서 론
1. 표제
이 책명은 히브리어로 코헬레트(Qohelet), “전도자”(preacher)이다. 전도서의 논술자는 1:12에서 이 제목을 자기에게 적용했다. 코헬레트는 대개 모임의 “소집자” 또는 그런 모임에서의 공식적인 “연설자”, “설교자”라는 뜻이 있다. 코헬레트는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가 여성형이고 7:27에서 여성 동사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전도서에서 사용된바 “전도자”로서의 솔로몬은 물론이요 그를 통해 말씀하는 거룩한 지혜자를 지칭하는 것 같다. 상징적으로 지혜가 백성들에게 말한다(잠 1:20). 이와 같이 코헬레트는 거룩한 지혜와 교통하는 중개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인화한 지혜로도 나타난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다”(전 12:11)고 일컬어진다. 12:9에는 “전도자가 지혜로우므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쳤”다고 기술되었다. 왕상 4:32, 33에는 “말했다”(spake)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어 있다. 이는 기록된 문장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모인 무리 앞에서 행한 연설을 가리킨다. 성령은, 솔로몬의 교훈이 모든 시대와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 즉 “큰 회중”(great congregation)을 위해 준 것으로 이해되도록 할 작정이었다(참조 시 22:25; 49:1~4).
헬라어나 라틴어 제목은 코헬레트를 “전도서”(Ecclesiastes)라고 번역했다. 그 뜻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코헬레트는 히브리어 카할(qahal), “회중을 모으다”에서 온 단어인데, 그것의 명사형은 “모임”(gathering) 또는 “회중”(congregation)이란 의미이다. 헬라어의 경우 “회중”은 이 말의 동사 어근 칼레오(kaleo-), “부르다”에서 유래한 것이고, 명사형이 엑클레시아(ekkle-sia), 곧 “교회”이다. 이와 같이 영어 단어 “ecclesiastic”(교회적) 또는 “ecclesiastical”(성회의)는 엑클레시아에서 따온 단어들이다.
2. 저자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 왕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공인된 사실이다(참조 선지자와 왕, 85). “예루살렘 왕 다윗의 아들”(전 1:1)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솔로몬 저자설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의 즉석 담화(Table Talk)에서 처음으로 솔로몬 저자설에 의심을 던졌다. 고대로부터 마르틴 루터 시대까지 전도서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잠언, 전도서, 아가의 저자는 동일인이라는 의견이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문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지적되었다. 그렇지만 전도서를 잠언과 아가와 비교해 볼 때 문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다루는 주제가 서로 다르다는 점과 또한 생애의 노년에 이른 솔로몬의 사고방식이 성숙했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가는 하나님께 대한 솔로몬의 첫사랑의 시기에, 잠언은 후기에, 전도서는 그의 노년에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도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현대의 모든 연구가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솔로몬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떤 그럴듯한 견해를 가지고도 다른 인물을 저자로 결정할 수 없음이 확실하다. 이런 견해로 볼 때 전 1:1의 “전도자”는 솔로몬의 “심령과 능력으로”(참조 눅 1:17)라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임에 틀림없다.
전도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BC 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BC 930/931년에 사망했는데(참조 제4권, 66), 만일 그가 저자라고 한다면 기록 시기는 그의 사망 직전이 될 것이다.
히브리 정경의 배열에서 전도서의 위치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경우처럼, 이 책이 정경에 삽입된 연대를 추측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전도서는 므길로트(Megillot)라는 다섯 권의 작은 “두루마리”에 포함되는데, 그것은 아가, 룻,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의 순으로 되어 있다. 둘째, 전도서는 히브리 정경이 형성될 때 마지막 다섯 권의 책 중 하나인데, 이들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이다. 이 두 경우에 전도서는 에스더 바로 앞에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두 책이 거의 동시대에 정경에 편입된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참조 제1권, 38~41). 전도서가 정경이 되기 전에 수 년간 유포되고 있었거나, 심지어 수 세기 전에 이미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3. 역사적 배경
전도서의 배경은 그 책 자체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처음 열한 절의 서론 부분 다음에 솔로몬 자신의 간명한 언급,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전 1:12)가 나온다. 히브리어 동사 “나는 되었다”(I was)는 완료시제인데, 솔로몬이 그의 노년에 회중 앞에서 말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바로 그 형태이다. 그는 아직 왕으로서 자기의 경험을 진술했다. 그는 청중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보다는 행복에 관해 연구한 바를 더 많이 언급했다.
4. 주제
솔로몬은 히브리 왕들 가운데서 지혜와 세상의 재산이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영구적이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 얼마나 쓸모없는 것이냐고 말한다. 그럼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또한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거룩한 목적을 깨달음으로이다.
전도자는 인간의 행복의 무상(無常)함을 생각하고 나서, 세상에 편만한 불행으로 그의 시선을 돌린다. 재난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하여 “지혜자”는 사회적인 불공평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어떤 종류의 “복지국가”를 제안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자기의 탐구를 끝맺으면서 일련의 실제적인 제안을 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들은 가난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복종함으로 마지막 심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서는 인생과 인간 존재의 목적 그리고 본분과 운명에 관한 건전한 철학을 제공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경험을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불법과 실망 그리고 세상에 편만한 포학을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의 날은 무시될 수도 없고 무제한으로 연기될 수도 없다. 비록 불공평한 일들이 잠시 지속된다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본래 징계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분과 궁극적인 행복은 기회를 포착하고 이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활용하기 위한 결심으로 생애를 마주하는 데 있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선민의 개념이 아니고 코헬레트 곧 전도자의 지도 아래 함께 모인 개인들의 회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중의 논쟁은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각인이 하나님께 갖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에 무게를 두고 있다. 따라서 전도서는 혈통적인 이스라엘로부터 영적인 이스라엘로 옮겨가는 적절한 전이를 마련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그 이름의 뜻은 “평화”이지만 그가 고령이 되기까지 생애에 평화를 찾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마지막 부분, 즉 고대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취급하신 방법을 통해 예시하신 인생철학의 절정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 솔로몬의 설교를 상당히 포함시켰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영광과 능력의 근원을 잃어 버렸을 때 본래의 성향이 이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거룩한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는 저절로 무너지고 자기 신뢰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이성이 점점 더 기분에 지배되므로, 솔로몬의 도덕적인 감수성은 둔해지고, 그의 양심은 마비되고, 그의 판단은 왜곡되었다. 무신론적 회의와 불신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도덕적인 원칙을 약화시키고 그의 생애를 타락시켜서 결과적으로 완전한 배교에 이르게 되었다. 수년 동안 그는 파멸로 이끌어갈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돌이키려는 노력이 헛되므로 괴로워했다(선지자와 왕, 51~77).
그러나 그의 생애가 끝나려고 할 때 드디어 양심은 소생되어 솔로몬은 참된 빛으로 어리석은 행위를 보기 시작하고,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전 4:13)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시는 것처럼 자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죽을 시간이 가까이 다가올 때, 자기가 낭비한 생애를 반성하면서 기쁨을 찾을 수 없었다(전 12:1). 방종의 결과로 그의 마음과 몸은 이미 쇠약해졌다(전 12:2~5; 선지자와 왕, 77).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멋대로 행한 과거의 발자취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영혼을 순화시키기 위하여, 지치고 목이 갈한 그는 세상의 깨진 물통에서 돌이켜 다시 한번 생명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자 했다.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오랫동안 낭비한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을 기적적으로 되찾지는 못했다(치료봉사, 169). “죄로 인해 인간의 모든 기관은 교란되고, 정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패했다”(치료봉사, 451). 또한 솔로몬의 뉘우침이 “자기가 뿌린 악의 결실을 막지 못했다”(교육, 49 ). “그는 죄의 무서운 결과로부터 피할 것이라고 결코 기대할 수 없었다”(선지자와 왕, 78). 그럼에도 솔로몬은 자기가 어리석은 행위를 추구함으로 그렇게도 무모하게 내버린 지혜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 경험을 통해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한 생애가 허무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선지자와 왕, 76). 점차적으로 그는 자기 생애의 악함을 깨닫고, 자기가 거쳐 온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경고의 음성을 높이 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선지자와 왕, 80~82, 85).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솔로몬은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가 낭비한 수 년 동안의 역사를 후세대에게 경고의 교훈으로 기록했다(선지자와 왕, 79). 전도서는 “그의 어리석음과 회개에 대한 기록”(선지자와 왕, 85)이며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들을 무가치한 것을 위해 낭비하도록 만든 잘못”(선지자와 왕, 80)에 관한 묘사이다. 그것은 “경고로 가득 차 있”고(선지자와 왕, 82), 따라야 할 모본을 영감적으로 기록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엄숙한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전도서는 자기가 쾌락과 인기, 재물과 권력을 추구한 사실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하려는 비뚤어진 사고방식에 대한 솔로몬 자신의 솔직한 분석이 슬픈 이야기들을 묶는 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배역한 수 년 동안의 경험과 논증을 기술한 부분들을 성령의 목적과 뜻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말씀들은 그때 그가 실제로 생각하고 행한 것에 대한 영감적인 기록이며(선지자와 왕, 79), 그 기록은 잘못된 생각과 행위에 대한 진정한 경고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전 2:17; 4:2; 7:1, 28에 묘사된 인생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본이 되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참조 전 1:17; 2:1, 3, 12). 이와 같은 본문들은 그 문맥에서 억지로 떼어내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시려고 의도하지 않은 상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연구할 때 솔로몬이 말하는 교활하고 비뚤어진 논리와 그의 회개에서 나오는 명석한 통찰력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맥을 보면 솔로몬이 이전 생애의 잘못된 논리를 전개하는지, 아니면 그가 회개한 동안에 순화된 사상을 피력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전 생애의 비뚤어진 사상과 태도에 대한 묘사는 가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즉 “나는 보았다”(I saw), “나는 말했다”, “나는 궁구(窮究)했다”, “나는 만들었다”, “마음을 썼다” 등이다(참조 전 1:13~2:26). 반면에 생애의 경험에서 나오는 진정한 결론들은 가끔 “나는 안다” 또는 “내가 보았노라”(I have seen) 등으로 소개되었다(참조 전 3:10~14; 5:13, 18). 또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기록은 이전 생애의 사상으로 구분한다(전 1:18; 2:1, 11, 14~20; 4:2, 3; 6:12; 7:13, 27, 28; 9:11). 반면에 인생 말년의 사려 깊은 판단이 반영된 결론들은 그 논조가 적극적이며(참조 전 5:1, 10; 9:11; 11:1; 12:1), 언급된 원칙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충되었다(참조 전 5:10, 13; 6:7; 8:11; 11:9; 12:7, 13, 14).
솔로몬은 “지혜”라는 단어를 세상적인 지혜(전 1:18; 7:12 등)와 참된 지혜(전 7:19; 8:1; 10:1 등) 양쪽에 모두 사용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쾌락과 어리석은 일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죄악적인 모든 쾌락을 즐기고 동시에 자기의 지혜와 건전한 판단력도 손상시키지 않고 유지하려고 작정했다(전 2:3). 어리석게도, 자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했으나(전 2:9) 여러 해가 지나갈 때까지 이 치명적인 자기기만을 깨닫지 못했으며, 탕자처럼(눅 15:17) 그는 산전수전 다 겪고 더욱 현명한 자가 되었다(전 7:23). 마치 하와가 자기의 원통함과 비통한 실망을 깨달은 것처럼 죄의 기만성은 이와 같은 것이다(참조 창 3:5~7).
5. 개요
I. 서론: 인생의 무상함, 1:1~11
A. 세대가 오고 가는 것이 헛되게 보임, 1:1~4
B. 자연의 순환이 끝이 없고 목적이 없어 보임, 1:5~8
C. 무슨 “새로운” 것이 있으며, 생존에 어떤 위대한 목표가 있는가? 1:9~11
II. 행복에 대한 솔로몬의 질문, 1:12~2:26
A. 지식이 더할수록 실망이 커짐, 1:12~18
B. 쾌락, 환락, 물질적 소유의 헛됨, 2:1~11
C. 죽으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같음, 2:12~17
D. 지혜로운 자는 자기 노력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음, 2:18~23
E. 만족은 하나님에게서만 옴, 2:24~26
III. 범사가 기한이 있음, 3:1~4:8
A. 여러 가지 인간 활동을 위한 때, 3:1~15
B.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때, 3:16~22
C. 인간의 불의를 위하여 허용된 때, 4:1~8
IV. 네 가지 이상(理想), 4:9~5:9
A. 우정의 가치, 4:9~12
B. 지혜의 가치, 4:13~16
C. 경건의 가치, 5:1~7
D. 공의의 가치, 5:8, 9
V. 인생의 어리석음, 5:10~6:12
A. 물질주의의 어리석음, 5:10~12
B.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음, 5:13~17
C. 수고의 무상함, 5:18~6:12
VI. 삶의 목표가 될 만한 것들, 7:1~22
A. 평판과 품성의 형성, 7:1~10
B.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지혜, 7:11~14
C. 인생에 대한 균형진 전망, 7:15~18
D. 완전한 것은 없음, 7:19~22
VII. 지혜를 탐색함, 7:23~12:7
A. 지혜가 주는 실망, 7:23~29
B. 지혜의 갈등을 해결함, 8:1~15
C.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8:16~9:6
D. 생애의 무쌍한 변화 가운데서 만족함, 9:7~10:6
E. 모든 행위와 마땅한 보상, 10:7~11:10
F. 생애의 마지막, 12:1~7
VIII. 결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12:8~14
전도서 1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받았지만(왕상 3:9~13) 유산을 무모한 행복 추구에 낭비해 버린 그 사람보다 여기에 기록된 심오한 진리를 설명하기에 누가 더 적절하겠는가?
예루살렘 왕. 이 구절은 다윗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말을 하고 있을 당시에 “전도자”는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 책에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 표현은 솔로몬 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다. 솔로몬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은 그의 지혜에 대하여 언급한 것과 여러 잠언의 저자로서 언급한 것이다(참조 전 1:12, 13, 16; 2:15; 12:9; 왕상 3:12; 4:32).
영광스럽게 위치를 정한,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 성은 왕의 유일한 거주지는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려고 택한 하나님의 자리였다. 여기에서 종교와 하나님의 지혜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탁월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한 도성에서 보좌 위에 앉은 통치자는 하나님의 지도를 쾌히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이상적인 수행자가 되어 하나님의 지혜의 빛을 받아들이고자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그것을 비추어 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전도자. 히브리어 코헬레트(Qohelet), 동사 카할(qahal), “모으다”, “소집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카할의 용례에 관해서는 대하 20:26; 에 9:2, 16, 18 등을 참조하라. “집회”, “회중”, “회합”으로 번역된 동계 명사(同系名詞)는 구약에 122회 나타난다.
유대인 저술가들은 코헬레트를 “회중을 모으고 교훈을 탐구하는 자”로 설명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설교자”라고 하는데, 솔로몬이 회중 앞에서 이 설교를 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대한 수집가”, “심오한 연구자”와 같이 여러 가지로 번역된 아랍어 어근과 비슷하다(참조 선지자와 왕, 85; 전도서 서론).
말씀이라. 이 책의 제목이 되는 첫 절은 이렇게 시작한다(“The words of”라는 말로 문장이 시작됨-역자 주). 다른 세 성경책, 즉 느헤미야, 예레미야, 아모스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말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또한 “소식”, “보고”, “기별”, “이야기”, “명령”을 의미한다.
솔로몬의 슬픈 자서전―전도서는 솔로몬이 지상의 모든 쾌락이 줄 수 있는 것은 허무와 불만족 뿐이라는 것을 완전히 경험하고 난 후 나이 많아서 쓴 책이다. 거기에서 그는 세상의 헛된 것들로 영혼의 갈망을 채우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결론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을 기쁨으로 즐기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일은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자서전은 슬픈 책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가 행복을 찾아 방황한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지적 탐구에도 종사해 보았고, 쾌락을 위하여 정욕을 만족시켜보기도 하였다. 매력적이고 화려한 궁중 생활이 그의 주변 환경이었고, 육신적인 생각이 소원하는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경험을 이 슬픈 기록 속에서 요약하고 있다(1:14-2:11 인용)(건강 개혁자 1878. 6).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가로되. 문자적으로 “말했다.” 영어의 어법이 현재나 현재완료형을 요구하는 곳에 히브리어는 계속적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 “전도자가 가로되”라는 표현은 솔로몬이 말하는 사람이며 또한 책의 저자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헛되고 헛되며. 히브리어 하벨 하발림(habel habalim). 이 말은 책 전체의 제목을 진술하며 서문의 주제를 이룬다. 헤벨(hebel), “헛되다”는 전도서에 37회나 나오지만 구약의 다른 곳에는 33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숨” 혹은 “증기”이다. 그것은 헛되고 무익한 우상들과 또한 그것들을 경배하는 것에 대하여 사용된다(왕하 17:15; 렘 2:5; 10:8). 어떤 사람들은 전도서에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다고 말하지만 이 책의 핵심어가 바로 우상과 우상숭배에 관하여 자주 사용된 이 단어이다. 전도자는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 대신에 구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다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벨 하발림은 “하늘들의 하늘”(왕상 8:27)과 “노래들 중의 노래”(아 1:1)와 같이 강세적(强勢的) 표현과 비교되는 최상급이다. 문자적으로 “호흡들 중의 호흡”과 같은 강세적 형태로 솔로몬은, 만약 인간의 모든 노력과 삶이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 아니면 허망하고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모든 인생을 포함한 세상이 전체적인 면에서 이른바 하나의 호흡에 불과하고 아무런 희망을 약속해 주지 못한다는 의미로 “총체적으로 헛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사람. 히브리어 단어는 “사람”을 나타내는 통칭 용어 혹은 우리가 “인류”라고 말할 때의 그 단어이다. 인간 생명의 순환은 새로운 세대와 함께 거듭거듭 되풀이된다.
해 아래서. “하늘 아래서”(1:13; 2:3; 3:1)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은 전도서에서 약 30회 나온다.
수고. “노고”, “고생” 혹은 “해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이 말이 사람이 일생 동안 하는 노력 전체에 적용된다.
모든 수고. 이 표현은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활동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유익한고. 히브리어 이트론(yitron). 이 말은 이 책의 다른 곳에 9회 나오며(2:11, 13; 3:9; 5:9, 16; 7:12; 10:10, 11), “뛰어나다”, “탁월”, “유익한”, “유용한”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이트론은 “잔존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파생된 명사는 “나머지”, 나아가 “여분”, “풍부”를 뜻하고, 또한 히브리어로 “우월”, “이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부단히 애를 쓰고 있지만 그의 모든 수고에 대한 영속적인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솔로몬이 여기서 사용한 은유는, 끊임없는 활동을 요하면서도 그 목적은 물질적인 목표에 해당하는 것을 얻는 데 불과한 세상 사업 중 하나일 것이다(참조 2:11 주석). 그러나 흔히 사람의 일생은 그의 후계자가 허물어 버리는 그 무엇인가를 세우는 데 허비된다. 무익과 불확실이 모든 인간의 노력을 특징짓는다.
무엇”이라는 의문대명사는 강한 부정적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은 주께서 문자적으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묻는 마 16:26의 말씀들과 비교할 수 있다. 전도자가 기대하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세대. 히브리어 도르(dor), “기간”, “시대”, “세대.” “쌓아올리다”, “축적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본래 “집단으로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였지만 그 후에 “장막에 거하다”가 되었는데, 아마도 유목민 생활의 불안정과 관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단어 속에는 불안정이라는 고유한 사상이 들어 있다. 그것은 “사곡한 종류”(신 32:5)라는 구절 속에 있는 것과 동일한 종류와 특성과 상태에 관련이 있고, 아무라도 거리낌 없이 저주하는(잠 30:11) 자들과 흔히 무자비한 사람들과도 관계가 있다(잠 30:14).
가고. 히브리어에서 이 말과 “온다”라는 말은 모두 계속적이고 끝없는 변화를 강조하는 단순 분사로 되어 있다(참조 욥 10:20~22; 시 39:13).
영원히.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는 우리가 그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어떤 동사의 어 근에서 온 것 같다. 여기서 전치사 “for”와 함께 사용된 명사는 남성명사이며 그것의 헬라어 상당어구처럼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 그것은 “옛날”, “고대”, “장기간”, “계속적인 존재” 등을 언급할 수도 있고, “무한한”, “끝없는 미래”, “영원”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이 단어의 헬라어 상당어와 같이 그것과 함께 사용된 주제의 성격에 맞추어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참조 출 12:14; 21:6 주석).
있도다. 히브리어 아마드(‘amad), “서 있다.” 이 말은 계속성과 지속성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절에서 솔로몬이 나열하고 있는 대조는 부분적으로 산들의 표면적인 영구성과 강들의 중단 없는 흐름과 밤낮의 부단한 연속성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떴던. 히브리어 자라흐(zarah.). 연속적 혹은 반복적 활동을 강조하는 분사형이다.
빨리 돌아가고. 히브리어 샤아프(s∨a’ap), “헐떡거리며 뛰다”, “열심히 붙잡으려고 하다”, “열망하다.” 이 비유는 경기 중인 말이 속력을 내기 위해서 힘을 다하여 숨을 들이쉬고 있는 생기 넘치는 말에서 가져 온 것이다. 이런 비유의 예로는 렘 2:24을, 이것을 영적 생활에 적용한 것은 시 119:131을 참조하라.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 히브리어 루아흐(ruah.), “바람.” 항상 움직임을 시사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여러 활동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
돌이키며. 끝없는 활동과 반복을 묘사하는 말이다. “북”과 “남”은 5절의 해가 뜨고 지는 위치인 “동”과 “서”와 대조를 이루어 언급되고 있다.
이리 돌며 저리 돌아. 이 절의 히브리어에서는 네 번이나 “돌다”, “선회하다”라는 단어 의 어근에서 파생된 어형들이 끊임없는 활동과 반복을 강조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또한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 성을 두루 돌며 행군하는 것(수 6:3, 15)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행”한(신 2:1, 3) 것을 말할 때에 사용되었다.
솔로몬은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인간 생활의 순환과의 유사성을 보았다(전 1:4).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숭고한 목적도 없는 단순한 반복일 뿐인가? 인류의 삶에는 그 어떤 절정이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지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것같이 보이는 이 같은 인간의 활동을 마침내 대체시킬 어떤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지구 표면을 떠도는 기단(氣團)들의 움직임에 관하여 여기에 주어진 표현의 과학적 정확 성은 고대 문헌이 이에 견줄 수 없으며 천연계의 법칙에 관한 통찰력이 대부분의 고대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함을 드러낸다.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강물. 자연의 끝없는 순환에 관한 세 번째 예증으로 솔로몬은 물의 순환을 들고 있다. 자연의 힘은 끝없는 반복을 묘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이므로 그분의 뜻에 일치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가 아니므로 그분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했던 목적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인류는 만족과 기쁨에 이르는 새로운 길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지만 창조주와 화목하는 단 하나의 길에서만 그의 참목적에 이를 수 있다(참조 마 11:28~30).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만물. 히브리어 드바림(debarim). 1절에서는 “말씀”으로 번역되었으나 여기서는 “만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신약에서 “말씀” 혹은 “만물”을 뜻하는 헬라어 레마(rhe-ma)도 이곳에 쓰인 히브리어처럼 이중적 의미가 있다.
피곤함.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는 “고생하다”, “수고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형용사이며, “고생하다”, “고통을 겪다”라는 의미의 아랍어 어근과 연결된다. 인간 활동의 명백한 헛됨과 이에 수반되는 실망 등이 여기서 강조된 요점들이다.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사람”으로 번역된 단어는 3절에 나오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고 여자와 확연히 구별되는 “남자”를 언급한 말이다. “말하다”(utter)로 번역된 동사는 1절에서는 “말씀”으로, 8절에서는 “만물”로 번역된 단어의 어근이다. 히브리어에서 “말하다”라는 동사는 “만물”(all things)대하여 말하고 있다.
족함이 없고. 외적인 경험은 심령의 내적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만물 즉 물질적 축복은 생각이 깊은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외적인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고, 내적인 경험을 통해서 마련된다. 하나님은 영이므로(요 4:24)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영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귀에 들리는 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의 영적 본성에 속한 내적인 귀로 중계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유익이 이루어 질 수 없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이미 있던 것.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지금껏 있어 온 것이 앞으로 있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따라 되풀이되는 자연의 변함없는 순환에 관한 언급이다. 「70인역」과 「불가타역」은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을 의문문으로 잘못 번역했다.
새것이 없나니. 말하자면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는 변이(變異)가 없다. 사람이 한 번의 순환을 보았다면 순환을 모두 본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순환은 별로 다를 바 없는 다른 순환과 알아차릴 수 없게 뒤섞인다. 그 순환들은 영속적인 자기 보전 외에는 어떤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저자는 자신이 9절에서 한 말에 대하여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고 도전해 올 수도 있는 묵시적 반대를 논박한다.
오래 전 세대. 문자적으로 “각 시대.” “오래 전 세대”로 번역된 단어 올람(‘olam)은 4절에서 “영원히”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참조 출 12:14; 21:6 주석). “세대”로 번역된 단어는 복수이지만 그 단어에 단수 동사가 쓰인 것은 그 명사를 집합명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미 있었느니라. 새것처럼 보이는 것도 과거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문맥상 9절과 10절에 있는 솔로몬의 말이 인간 생활의 순환을 포함한 자연의 여러 현상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준다.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이전 세대(former things). “things”(「개역한글판」에는 “세대”로 번역 되어 있음-역자 주)는 첨가된 단어이다. 히브리어 형용사 “이전”이 남성 복수이므로 “이전”이라는 말은 아마도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은 물론이요 (10절) 사람들까지 모두 다 잊혀진다.
기억함이 없으니. 새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옛 것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 세대의 어떤 사물들도 다음 세대가 잊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명성에도 당연히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없어서는 안 될 것같이 보이는 오늘의 걸출한 인물도 내일에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고 잊혀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3절).
장래 세대. 거듭하는 말이지만 “things”(「개역한글판」에는 “세대”로 번역 되어 있음-역자 주)는 첨가된 단어이며, “장래”로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는 남성복수이다. 사람들의 세대는 아마도 여기서 나온 사상인 것 같다. 현 세대의 명성은 다음 세대에 의하여 잊혀진다. 솔로몬은 그의 책 서두를 명성의 덧없는 성격에 대한 단정적인 말로 맺는다. 이 점은 문자적으로 “지금 이후”, 곧 “그 후 (세대)”라는 말로 거듭 강조되었다.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왕이 되어. “was king”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왕으로 있다”(참조 1절 주석). 히브리어는 화자(話者)가 이제는 더 이상 왕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어 동사의 단순과거는 영어의 현재형이나 현재완료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전도자”는 솔로몬이었다. 왜냐하면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아래에서만 예루살렘은 한 왕이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한 나라의 수도였고, 화자가 “다윗의 아들”(1절)이기 때문이다.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마음을 다하며. 이 구절과 그 상당어구는 이 책(1:17; 7:25; 8:9, 16)과 성경의 다른 곳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인들은 마음을 단순히 감정의 근원만이 아니고 지성의 근원으로도 간주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라”라는 말은 “정신을 진정하여”(참조 대상 22:19) 혹은 “마음을 두고”(참조 욥 7:17)와 같은 의미가 되곤 했다. 솔로몬은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았다. 그는 자연사와 철학과 시문학과 기타 유용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지혜를 써서. 문자적으로 “그 지혜.” 아마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솔로몬의 직접적인 연구와 관찰로써 그가 평생 쌓은 지혜와 관련된 말일 것이다. 히브리어 단어는 여러 분야에 걸친 기술과 명철에 적용된다.
모든 일. “일”은 첨가된 말이다. 히브리어는 “하늘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으로 해석되며,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활동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궁구하며. 히브리어 다라쉬(daras∨), “탐색하다”, “뜻을 자세히 풀이하다”, “토론하다”, “반복하여 실습하다”, “연구와 응용으로 탐구하다” 등의 의미를 다 포괄하는 폭넓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참조 창 25:22; 출 18:15; 신 19:18; 대하 14:7; 시 119:10; 암 5:14).
살핀즉. “탐험하다”라는 의미에서, “정탐한즉.” 이 말은 가나안 땅을 탐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민 13:16, 17, 25, 32). 이것은 지식을 위한 개척자적인 연구를 의미한다. “궁구하다”와 “살피다”라는 두 단어를 함께 쓴 것은 어떤 문제의 근저(根底)에 이르러 그것을 모든 면에서 샅샅이 살펴본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괴로운 것이니. 문자적으로 “이 악의 고통이니” 혹은 “사악한 이 고통이니.”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연구하고 살펴보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불어 넣으셨다. 그것은 사람의 육체적 및 정신적 힘을 크게 요하는 힘든 일이다.
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일. 이것들은 인간의 계획과 활동들로서 대부분 무가치한 것 아니면 쓸모없는 것들로 판명된다.
본즉. 히브리어 단어는 흔히 외양이나 모양을 보는 것 이상의 것, 즉 예리한 통찰 혹은 지각을 의미한다. 파생된 명사는 “이상” 즉 계시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것은 복잡한 사실들에 관한 연구에서 보인 솔로몬의 예리한 관찰력을 가리킨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vexation of spirit). “잡으려는 것”(vexation)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먹이다” 혹은 “목양하다”라는 말의 어근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바람”(spirit)이라는 말은 “바람”(wind)이라는 일반적인 단어에서 왔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바람을 따라 잡으려고 애쓰는 것”(「개정표준역」) 혹은 “바람을 먹고 사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호 12:1의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라는 표현과 비교해 보라. 어떻게 번역하든 이 말은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노력과 연구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 44:20의 “그는 재를 먹고”라는 표현과도 비교해 보라.
하나님 없는 학문은 미련한 짓―솔로몬은 큰 학문을 가졌었지만 그의 지혜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꼴지워진 품성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 도덕적으로 홀로 서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연구와 정성을 들인 노력, 그리고 참을성 있는 탐구의 결과를 우리에게 말했다. 그의 지혜는 모두 다 헛된 것이라고 그는 선언한다(리뷰 1906. 4. 5).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0:16-19; 왕상 10:18-23; 대하 9:17-22)―솔로몬의 보좌는 상아 보좌였다. 그 계단들은 정금이었으며 보좌에 오르는 양옆의 난간은 여섯 마리의 황금 사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이 보좌에 앉았다. 그의 눈이 머무는 곳, 그의 바로 앞에는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그의 마당은 될 수 있는 대로 에덴 동산 비슷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잘 선택된 나무들과 정원수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꽃들은 그 동산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외국에서 들여 왔다. 여러 가지 빛깔이 나는 깃털을 가진 새들이 감미롭게 노래하면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고 있었다.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로 단장한 젊은 시녀들이 시립하고 서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술마시고 노는 환락의 장면들, 음악, 스포츠, 각종 게임들은 그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 돈을 많이 들여 마련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 왕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참으로 멋진 그의 보좌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 모습은 실망으로 일그러진 어두운 모습이었다. 방탕한 생활은, 한때 수려하고 지성으로 빛나던 얼굴에 그 자취를 남겼다. 그는 젊고 영리하던 그 솔로몬이 아닌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불행과 걱정으로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패어 있었고 그의 얼굴 구석 구석에는 성적(性的) 방종의 명백한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그가 바라는 데서 조금만 빗나가도 야단을 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파손된 그의 신경과 흐트러진 그의 몸매는 자연의 법칙을 범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그는 그의 낭비된 삶을 가리켜, 행복을 좇아 다닌 실패한 삶이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슬픈 탄식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며 다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전 10:16-19 인용).
히브리인들의 일반적 식사 습관은 하루에 두끼 먹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장 잘 차려서 먹는 때는 한낮이 좀 지나서 먹는 식사였다. 그러나 이방의 사치스러운 습관이 그 나라에 들어와서 왕과 왕자들은 밤 늦게까지 잔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오전에 축제나 술잔치를 가지면 나라의 위정자들과 공복들은 임무 수행에 큰 지장을 받았다.
솔로몬은 그 타락한 식욕의 방종에서 자라난 그 죄악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필요한 개혁을 단행할 만한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체력과 안정된 마음, 그리고 건전한 도덕성은 절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솔로몬은 깨닫고 있었다. 대식(大食)은 술취함에 이르게 하고 정도가 어떠하든간에 부절제한 사람은 공무를 맡기에 부적합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엄청나게 먹는 잔치들과 시도 때도 없이 위장 속으로 마구 쏟아넣는 음식물은 모든 신경 조직의 섬유소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마음도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의해서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솔로몬의 생애는 청년들은 물론 성인들에게도 하나의 경종이 된다. 우리는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죗된 쾌락이 보내는 유혹에 대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종종 보는 바로는 초기 생애가 모범적이었던 사람들이 죄에 매료되어서 길을 잃고 지족(知足)할 줄 아는 사나이다움을 희생시키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들은 한동안 원칙과 금지된 행동 노선을 추구하려는 경향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한때 의롭고 현명한 왕이었던 솔로몬의 경우와 같이 그들의 선한 결심에 비하면 유행하는 죄악의 힘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 마침내 입증된다. …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상상으로 모리아 산에 서서 폐허가 된 이교의 제단들이 있는 기드론 골짜기 저 건너편을 바라보라.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 되라. 하나님을 그대들의 의지로 삼으라. 유혹으로부터 단호히 그대들의 얼굴을 돌리라. 죄악이란 돈이 많이 드는 방종이다. 죄 때문에 빨리 죽지 않는 사람들의 몸에 죄는 끔찍한 영향을 미친다. 현기증, 무력증, 기억 상실, 정신 착란, 가슴과 폐의 혼란 등이 건강의 법과 도덕률을 범한 죄에 신속히 뒤따라 온다(건강 개혁자 1878. 6).
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구부러진 것. “구부리다” 혹은 “비틀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의 형태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본래부터 구부러진 것이나 조화되지 않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으로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말한다. 구부러진 것은 다 “사람의 일”이다(14절).
곧게. “가지런히 하다”, “곧게 하다”, “정리하다”라는 히브리어 어근에서 온 말이다. 강조점은 인간에게는 계속적으로 자신이 직면하는 상황에 대처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셀 수 없도다. 결손이 너무 커서 인간은 결손이 생기기 시작한 것에 관하여 할 말이 전혀 없을 만큼 그것에 관하여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세다”로 번역된 단어는 “할당하다”, “지정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말하여 이르기를. 다른 사람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개인적인 명상을 시사하는 히브리어의 강세적 언급이다.
내가…. 문자적으로 일하고 연구하는 일에서 자기 재능의 연마 그리고 그 결과로 얻은 지식과 경험의 성장에 있어 “내가…되게 했다”라는 말이다.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곧 “지혜를 붙잡았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던. 더 정확히 말하면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즉 통치자로 그 도성을 “지배하던”이다. 이것은 솔로몬 이전 시대의 현인들과 통치자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만나 보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14절에 나오는 “본즉”과 같은 동사이다. 문자적으로 “많이 보았다”[예리한 통찰력을 받았다]인데 물론 이것은 “지혜와 지식에 관해서”이다. 「70인역」은 “지혜”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말로, “지식”은 지적인 노력의 사색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번역한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미련한 것. 이렇게 번역된 말은 아마도 엇갈리게 놓는다”를 뜻하는 단어의 어근에서 온 것 같다. 지혜가 반드시 솔로몬이 연구한 일반적인 원칙으로 그를 인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암시할 수도 있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번뇌. 이렇게 번역된 말은 “짜증나게 하다”, “화나게 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유래되었다. 지나친 연구는 불면증을 가져오고, 신경을 소모시키고, 때로는 건강을 잃게 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무지가 최상의 행복이라는 생각을 옹호하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근심. 문자적으로 정신적이요 육체적인 양면의 “고통.” 만약 어떤 사람이 지혜를 원한다면 그는 깊이 탐구해야 하고(참조 잠 2:4),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는 건강과 힘을 손상시킨다. 위대한 지식도 품성의 지표는 아니라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천국 문을 열어주지, 지식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전도서 2장
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 마음에. 곧 “내 자신에게”(「개정표준역」). 여기서 솔로몬의 마음의 이성적인 측면이 육체적인 욕망과 만족을 나타내는 측면을 향해 말하고 있다. 이 독백은 의지의 역할과 같다. 눅 12:17~19에 나오는 부자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예와 비교해 보라.
시험적으로. 어떤 특정한 행동의 결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실험” 혹은 “경험”을 해 보는 것을 뜻한다.
즐겁게. 즉 “쾌락을 누리게.” 히브리어는 광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기쁨”, “즐거움”, “흥겨움” 등으로 모두 육체적 감각에 기쁨을 주는 것이다. 비록 다른 곳에서 이 말이 종교적인 기쁨과 행복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세상적 쾌락에 참여함으로써 일깨워지는 감정과 욕구에 국한시켜 사용되었다.
낙을 누리라. 문자적으로 “행운을 보라”, 즉 “삶의 모든 좋은 것을 한껏 맛보라”는 뜻이다. 현대의 관용구적 상당어구는 “좋은 시간 보내세요”(have a good time)가 될 것이다. 솔로몬은 세상이 주는 쾌락 속에서 지속적인 만족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것을 싫증이 날 정도로 즐겨 보라고 제안하였다.
만족은 하나님께로서만 온다―솔로몬의 훈련은 다윗이 초년 시절에 경험한 훈련에 비해 부족하였다. 환경과 품성, 그리고 생활에 있어서, 솔로몬은 누구보다도 더 많은 혜택을 받은 듯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은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 큰 번영과 영광이 약속된 통치자의 지위에 올랐다. 여러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사람의 지식과 통찰력에 경탄하였다. 그러나, 번영에 대한 교만은 결국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기쁨을 떠나 관능적인 쾌락에서 만족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노비는 사기도 하였고…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2:4-12, 17,18).
솔로몬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세속적 사물에서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찾는 생활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교의 신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나, 소위 영혼에게 평안을 준다는 그 신들의 약속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배웠을 뿐이다.
만년에, 솔로몬은 이 세상의 터진 웅덩이에서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피곤하여, 마침내 생명 샘에서 마시기 위하여 돌아왔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후세대를 위하여 자기가 헛되이 보낸 세월의 역사를 경고의 교훈과 함께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그의 백성들이 그가 뿌린 씨로 악의 수확을 거두었으나, 그의 평생 사업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필경에는 고난의 단련이 그를 위하여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교훈들을 솔로몬이 만일 젊어서 배웠더라면, 그렇게 훌륭하게 출발한 그의 인생의 대낮이 얼마나 더 영광스러웠겠는가!(교육 152-154).
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웃음. 히브리어 스호크(seh.oq). 이 말은 “웃음거리”(잠 10:23) 혹은 “조롱거리”(애 3:14)를 뜻한다. 동사형은 “장난하다”(삼하 2:14)를 의미하는 것 같다. 감각적 쾌락과 오락을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내리막길로 가는 큰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참조 선지자와 왕, 76).
미친 것. 문자적으로 “어리석은 것.” 1:17에서 이 말과 관련된 히브리어와 비교하라.
희락. 히브리어는 오만하고 정욕적인 환락과 일반적이고 합법적인 쾌락에 다같이 쓰인다.
저가 무엇을 하는가. 즉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문자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하는가?” “그것이 무슨 영향을 끼치는가?” 혹은 “그것이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가?” 롬 6:21에 있는 바울의 적절한 질문과 비교하라.
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다스림을 받으면서. 문자적으로 “안내를 받으면서.” 같은 동사가 “인도하다” 혹은 “지도하다”와 같은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신 4:27; 28:37; 시 48:14; 78:52; 사 49:10). 시사된 은유에 의하면, 솔로몬은 자신의 훌륭한 판단력이 식욕과 정욕을 통제하여 절제의 길에 머무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시험적으로 하는 것이므로(참조 1절 주석) 양식(良識)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도에 지나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런 생각은 감각적 쾌락에 굴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취지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적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치명적인 기만이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 “to give myself unto wine”[내 자신을 술에 내어 줄까]로 되어 있음-역자 주). “술로 육신을 상쾌하게 하다”가 더 낫다. “내어 주다”로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 “이끌다”를 의미한다(참조 신 21:3; 시 28:3; 호 11:3). “내 자신”은 히브리어로 브사리(besari)인데 문자적으로 “나의 육신”, 곧 육체적인 본질, 몸을 가리킨다. “술”은 히브리어 야인(yayin)인데(참조 민 27:8 주석; 창 9:21), 성소 봉사와 이교 제의에서 “전제”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출 29:40; 레 23:13; 민 15:5, 7, 10; 28:14). 그러므로 솔로몬은, 마치 육신이 술의 형상으로 된 말[馬]에 끌리는 수레인 양 “나는 내 육신을 취하게 하는 음료로 이끌었다(혹은 기운을 북돋웠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리석음. 이것은 아마 그 자체로서는 실제로 죄된 것이 아닐지라도 “죄 가운데로 이끌고 갈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 의미는 솔로몬이 만족이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통하여 배우되 그것들에게 지배당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서 그 실험으로 많은 것을 얻어 내고자 노력했다는 뜻인 것 같다.
인생. 히브리어 아담(’adam), 남자와 여자를 포함한 포괄적인 용어(참조 창 1:26; 3:17; 민 24:3).
종신. 문자적으로 “숫자”, “이야기.” 사파르(sapar), “자세히 얘기하다”, “헤아리다”, “이야기하다”, “측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온 말이다. “책”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 세페르(seper)도 같은 어근에서 온 말이다.
알까 하여. 솔로몬은 여기서 그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그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을 해보라고 그에게 요구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해보도록 그에게 권하였을 리도 없다.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제임스왕역」에는 “I made me great works”[나는 나에게 큰 사업을 하게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이것은 분명히 그가 건축한 건물들의 크기와 화려함에 관한 언급이다. 이것은 분명히 1~3절의 방종보다는 훨씬 나은 모양의 방종이었다(참조 왕상 7:1; 9:1).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참조 왕상 7:1~12; 9:15~19. 솔로몬은 방대한 건축 공사에 몰두했다.
포도원. 참조 아 8:11. 솔로몬 당시의 일반인들의 경제 상태는 왕상 4:25에 다음과 같이 암시되어 있다.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여러 동산. 문자적으로 동사 “담으로 에워싸다”, “둘러싸다”에서 유래한 “울타리.” 근동 지방의 염소와 나귀와 다른 동물들의 자유로운 방목 습관 때문에, 튼튼하고 손질이 잘 된 울타리가 없는 동산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원. 히브리어 파르데스(pardes). 페르시아 왕의 거대한 동식물 공원을 가리키는 페르시아어 파이리-다에자(pairi-dae^za)에서 유래했다(참조 창 2:8 주석). 그러므로 파르데스는 왕실 소유의 금렵지나 동산 혹은 공원이었다. 영어의 “paradise”(낙원)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데이소스(paradeisos)의 음역이다. 파르데스는 느 2:8에서 “삼림”으로, 아 4:13에는 “과수”로 나타난다. 참조 창 2:8 주석.
과목. 솔로몬은 거대한 원예 사업 계획에 몰두해 있었고, 우리가 공원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과원들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과수들도 전문적으로 연구했음이 분명하다. 예루살렘 남쪽 언덕 기슭에 그는 왕궁 정원을 갖고 있었으며(왕하 25:4), “포도의 집”이라는 뜻의 벧학게렘에는 그의 포도원이 있었다. 이 포도원은 예루살렘 서쪽 6.4킬로미터 지점에 있던(렘 6:1) 아인 카림(‘Ain Ka^rim)과 대체로 동일시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예루살렘 남쪽 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라모트 라헬(Ramoth Rahel)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있다. 바알하몬(아 8:11)에도 또 다른 포도원이 있었다.
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못. 팔레스타인의 강수량은 물을 공급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였다(참조 제2권, 110; 창 12:10 주석). 오늘날은 관개(灌漑)가 필수이지만, 고대에도 농부들은 집수정(集水井)을 파서 물을 저장하였다. 느 2:14의 “왕의 못”을 요세푸스(Wars v. 4, 2)는 “솔로몬의 못”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솔로몬의 못들은 아마도 로마 시대의 것 같으며,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길이 182.9미터, 너비 63.1미터, 깊이 15.2미터 정도이다. 이 못들은 베들레헴 동남쪽 약 4.8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솔로몬은 물고기 부화장들도 만들어서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길렀던 것 같다(아 7:4).
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노비. 솔로몬의 방대한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종자들과 일꾼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공공 시설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왕상 10:5). 솔로몬은 분명히 히브리인이 아닌 노예들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왕상 9:21; 대하 8:8). 또 동시에 노예라고 하기에는 좀 부적당한 다수의 히브리인 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참조 출 21:2, 20; 신 15:12, 15 주석).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문자적으로 “그 집의 아이들이 내게 태어났으며.” 이들은 그가 “가진” 노예들 외에 더해진 자들이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얻은 자들이었다. 팔려 왔거나 포로로 잡혀온 노예들은 자녀들도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종복들의 수에 관해서는 왕상 4:21~27; 10:25, 26을 참조하라.
소와 양떼. ( “great and small cattle”[크고 작은 가축들]로 되어 있음-역자 주). 「개정표준역」에는 “소떼와 양떼”로 되어 있다. 성전 봉헌 시에 드린 희생제물의 수(왕상 8:63)로 미루어 볼 때 솔로몬의 소떼와 양떼의 수는 엄청난 규모였음이 분명하다. 희생제물로 드려진 것 외에 왕이 부리고 있던 노예들과 군인들도 엄청난 양의 고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참조 왕상 4:22, 23; 대상 27:29~31).
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은금. 귀금속과 은과 금으로 된 기물에 나타난 솔로몬의 부에 대해서는 왕상 9:28; 10:14~27; 대하 1:15; 9:20~27을 참조하라.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이 요구한 조공을 왕궁 곳간에 있는 것 일부로 바쳤다(왕하 18:14~16). 히스기야는 또한 바벨론 왕의 사자들에게 보고(寶庫)를 보여 주었다(왕하 20:13).
왕들의 보배. “peculiar treasure”[특수한 보배]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재산.” 아마 솔로몬이 징수해 들인 여러 종류의 공물과 세금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특수한 보배”로 번역된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적용한다(출 19:5; 시 135:4; 참조 신 7:6; 14:2; 26:18; 말 3:17, “나의 특별한 소유”).
여러 도의(of the provinces). 정관사는 이 구절을 아마도 “그리고 그들의 도”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피지배국의 통치자들과 그 백성들에게서 징수한 공물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조 왕상 4:21, 24; 10:15).
노래하는 남녀. 솔로몬은 여러 나라에서 온 방문객들을 접견하는 일들을 했기 때문에 손 님 접대를 위해서 꽤 큰 연회를 자주 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서 직업적인 큰 연예인단이 필요하였을 것이다(참조 삼하 19:35; 암 6:5).
처와 첩들을. (「제임스왕역」에는 “musical instruments”[악기들]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쉿다 워쉿도트(s∨iddah wes∨iddot), 대체로 “많은 첩”, 문자적으로 “첩과 첩들”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쉿다는 어원이 불확실하지만, 전쟁에서 패한 백성의 여인들을 취하는 것과 관련하여 “약탈하다”라는 동사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또 아랍어의 “젖게 하다”와 동의어인 어떤 동사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이 단어에서 여자의 젖가슴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파생되었다. 「70인역」은 “술 따르는 사람(남녀 다 포함)”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도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문자적으로 “젖가슴”)와 첩들(문자적으로 “젖가슴들”)을 두었노라.” 물론 솔로몬은 그렇게 하였다. 이 설명에 의하면 쉿다 워쉿도트는 라함 라하마타임(rah.am rah.amatayim)과 비교될 것인데, 그 말의 뜻은 “한두 처녀”, 문자적으로 “한 자궁 또는 두 자궁”(삿 5:30)이다.
많이. 이 말은 번역자들이 덧붙였다.
두었노라. 문자적으로 “내 자신을 위하여 만들었노라.” 여기에 나온 이 동사는 “취득했다”, “정했다” 혹은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 12:5에서는 이 말이 “얻은”으로 번역되었다.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느부갓네살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라고 자신의 영광을 자랑할 때와 똑같은 정신으로, 솔로몬은 흡족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의 치세의 융성함을 나타낸다. 여기서 솔로몬은 교만과 자만심으로 자신의 부와 지혜가 모든 선임자보다, 심지어는 아버지보다도 낫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문자적으로 “나의 지혜가 나의 명령을 대기하고 서 있어서.” 이 말은 “그의 지혜가 모든 재산을 취득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그의 곁에 서 있었다” 혹은 “지혜가 그를 지나치게 방종하지 못하도록(참조 3절 주석) 붙들어 주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 주석들은 이 두 사상을 다 포함한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어리석음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자신은 정신이 말짱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원하는 것. 히브리어 샤알(s∨a’al), 문자적으로 “구걸했다”, “요청했다.” 히브리인의 흔한 이름인 샤울(s∨a’ul), “사울”(Saul), 문자적으로 “요청했다”는 이 어근에서 유래한다(참조 삼상 9:2 주석). 여기서 솔로몬은 자신이 극단으로 나갔다는 것과 그가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참조 요일 2:15~17).
즐거워하는 것을…기뻐하였음이라. 히브리어 심하…사메아흐(simh.ah…sameah.). 명사가 동사에서 파생했다. 이 두 말은 종교적 경험이든, 합법적인 쾌락이든, 노동이나 방탕한 유희 속에서든 실제적으로 모든 종류의 즐거운 감정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확실히 솔로몬은 자신이 궁구하고 실험해 본 모든 것의 열매를 바로 맛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분복. 전리품이든 약탈물이든, 음식이든 재산이든 혹은 생활양식이든, “몫” 혹은 “상품”을 말한다. 시 50:18에서는 “동류”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간음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말한다. 분명히 솔로몬은 그의 삶의 방식, 즉 그의 행복 추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본즉. 문자적으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내가 눈을 돌린즉.” 히브리어는 “무심코 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 어근에서 유래된 명사는 “얼굴”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서, 어떤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그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또한 히브리어에서는 마치 솔로몬이 “나는 개인적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라고 말한 때처럼 강세 대명사가 사용된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vaxation of spirit). 연회, 축제, 음악, 관능적 쾌락, 이 모든 것은 다 영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 요 4:24에 의하면 많은 영들 중 한 영이라는 의미에서 “한” 영이 아니고,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영”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오직 이러한 연합 속에서만 인간은 완전한 만족과 충족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쾌락이 그저 단순한 “바람”이요 “호흡”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노력임”을 발견했다(참조 1:14 주석).
해 아래서. 이 표현은 전도서에 29회 나오는데, 이는 인간의 활동 범위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유사한 표현들이 여러 다른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무익(no profit). 참조 1:13 주석. “유익”(profit)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전도서에서 10회 나타나고 구약의 다른 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솔로몬은 그의 모든 경험과 사업 그리고 자신이 탐닉한 쾌락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시험해 보았다. “유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어근의 문자적인 의미는 “잉여금” 혹은 “차감 잔액”으로, 아마도 유대인들의 상거래에서 사용되던 말로 시사되어 왔다.
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돌이켜. 참조 11절 주석. 이때까지 솔로몬은 물질생활의 기쁨들을 실험하고 고려해 왔었다. 이제 그는 실제적인 면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에 관한 시험을 시작한다.
무슨 일을 행할꼬. 이 구절의 문자적인 번역은 “왕의 뒤에 올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인가?”이다. 그 의미는 아마도 “솔로몬보다 못한 사람이 그가 해 본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인 듯하다. 그는 왕이었고 모든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그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왕의 뒤에” 오는 그보다 못한 사람은 솔로몬이 이미 이룬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리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솔로몬은 이 세상 쾌락의 헛됨과 무익함을 이미 증명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이제 일단락지어졌다고 생각하였다.
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내가 보건대. 대명사는 강조형이다. 모든 문제를 직접 탐색해 보지 않고는 만족할 줄 모르는 자들이여 그리고 의심하는 자들이여,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보았노라”라는 의미이다.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문자적으로 “지혜가 우매보다 유익함이.” 솔로몬은 참 지혜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자부해 왔다.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문자적으로 “빛의 유익이 어둠을 능가한다.” 이 비유적인 말에서 빛은 지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가리키고, 반면에 지적이고 도덕적인 퇴폐와 타락은 어둠에 비유된다. 사도 바울은 엡 5:8; 살전 5:5에서 똑같은 은유를 사용했다. 의의 길은 빛에 비유되고(시 37:6; 119:105; 사 51:4), 죄악의 길은 어둠으로 묘사된다(욥 37:19; 잠 4:19).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어둠 속에 빛나는 하늘의 빛이라고 설명한다(요 1:4, 5).
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눈. 지혜자의 눈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곳, 즉 앞을 똑바로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요 11:9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비교해 보라. 또 다른 영적 적용에 대해서는 엡 1:18을 참조하라.
우매자. 지혜자는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을 보고 가장 곧은 길로 행하지만 우매자는 불확실 한 길에서 더듬거리다가 걸려 넘어진다. 잠 17:24에는 비슷한 사상이 다른 은유로 주어졌다. “미련한 자는 눈을 땅에 두느니라.”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문자적으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남을”(참조 시 49:10; 90:3~5). 결국 지혜자나 우매자가 다 죽음에 붙잡히게 된다.
내가 깨닫고. 강조형으로, 문자적으로는 “나 곧 나까지도.” 이 말은 지혜를 찬양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솔로몬이 알았음을 시사한다.
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나도 당하리니. 지혜자도 우매자도 다 죽는다. 외관상으로는 전혀 구별이 없는 것같이 보인다.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그렇다면 “밤중까지 촛불을 밝히며” 행한 수고로운 연구과제가 대체 무슨 유익이 있었단 말인가? 인생의 문제들에 맞서 해결하고자 불요불굴의 노력을 경주한 사람도 죽을 때에는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 삶을 산 우매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발전적인 삶을 위한 야망과 노력도 아무 가치 없는 한낱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고 솔로몬은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을 제쳐놓고는 실로 인생과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이 존재하는 참 목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가 거룩한 지혜 속에서 자라나고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정리할 때뿐이다(참조 마 6:33).
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지혜자나 우매자가 다 저희 동료 인간들에게서 오래지 않아 잊혀질 것이다. 이 세상에 관한 한 이 말은 물론 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거룩한 지혜로 잘 보존하고 정리한 사람은 영원히 기억되고(시 112:6; 잠 10:7),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는 확신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다(눅 10:20; 빌 4:3).
잊어버린 지. 세상은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신다(참조 말 3:16, 17; 요 14:1~3).
오호라. 16절의 후반부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살려서 읽는 방법일 것이다. “세상에! 지혜자가 우매자처럼 죽다니!” 영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도 의문 부사는 의문문에서는 물론 감탄문에서도 쓰일 수 있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한하였노니. 히브리어는 불쾌감, 혐오감, 권태감, 반감 등과 같은 증오나 적의의 감정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이 어근의 일차적인 의미는 신체적인 면에서나 기질 혹은 성벽 측면에서 “추함” 혹은 “기형”을 뜻한다. 같은 동사가 말 1:3에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에서를 실망감과 유감스러움을 가지고 바라보았다는 의미이지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인 “증오심”을 갖고 보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비록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전 2:17 후반부에서 솔로몬은 “해 아래서 행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라고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밝힌다. 솔로몬이 시도했던 모든 것은 그가 기대했던 만족감을 주는 일에는 너무나 미흡한 것이었으므로 그 일들에 대한 생각 자체가 그의 불만족을 증폭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었다.
내게 괴로움이요. 문자적으로 “내게 사악한 것이요”(참조 욥 3:24~26; 7:14~16).
바람을 잡으려는 것. 곧 “바람을 먹고 사는 것”(참조 전 1:14; 2:11 주석; 호 12:1).
18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모든 수고. 솔로몬은 자신이 건축한 모든 큰 건물과 그가 이룩해 놓은 큰 사업들을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하여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았다(참조 19절 주석).
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누가 알랴. 솔로몬은 의심을 표명하기 위해서 “알다”라는 동사를 흔히 사용한다. 여기서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그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그 가치를 알고 그것들을 관리할 만한 자격이 있는 자일지의 여부를 그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가 한 수고를 계속 이어갈 수도 있고 그냥 내팽개쳐 버릴 수도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사실은 그가 그 문제에 도무지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솔로몬이 자신의 후계자인 르호보암에 대한 걱정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관리하리니.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사람이나 사물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을 시사한다. 그가 평생토록 수고한 결과를 어떤 후계자가 다 탕진해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가장 괴로운 생각이다(참조 욥 27:16, 17; 시 39:6; 잠 23:5; 사 65:22; 눅 12:20).
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내가…대하여 도리어…하였도다. 좀 더 좋은 표현을 쓰자면 “내가…대하여 도리어…되돌렸도다.” 즉 다른 방향 혹은 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솔로몬이 일생 동안 해 온 사업을 되돌아본 결과로 그의 견해와 활동에까지도 완전한 변화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실망케. 솔로몬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에 대해서 체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참조 삼상 27:1; 욥 6:26).
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재주. 여기서 “재주”로 번역된 단어는 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말로서 “적당하다”, “알맞다”, “옳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의 어근에서 유래했으므로 “적성”, “타고난 재능”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솔로몬의 생각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능을 다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일을 일으켜 세우는 데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줄 모르는 자에게 그가 수고한 결과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 상속 재산, 곧 땅이나 재산 혹은 전리품의 배당.
끼치리니. “넘겨주다”라는 의미에서, 문자적으로 “주리니.”
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소득이 무엇이랴. 향유할 만한 영구적인 결과나 보상이 무엇인가? 예상되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얻은 것은 쏟은 수고에 상응한 것이 아닌 것 같다.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일평생. (「제임스왕역」에는 “days”[낮들 동안]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밤”과 대조되는 말이다. 일하는 시간들은 활동으로 메워지고 밤에는 낮에 하던 일들을 생각하며 자지 못했다. 솔로몬은 수고와 슬픔과 낙망이 주는 연단에서 느낄 수 있는 축복을 충분히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참조 욥 35:10; 롬 8:35; 고후 12:9; 히 12:11; 계 3:19).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마시며. 여기서 솔로몬은 자신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결론을 말한다. 결국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는데 왜 먹고 마시지 않을 것이며, 삶이 제공하는 것들을 즐기지 않겠느냐고 그는 생각한다.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 문자적으로 “그의 영혼에 좋은 것을 보여 주는 것.” 여기서 “심령”(soul)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욕망이나 식욕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참조 창 2:7; 9:5; 신 6:5 주석; 잠 10:3; 13:25; 27:7). 이 말은 그가 수고한 결과를 실제로 즐기는 것을 말할 수도 있고, 그의 계획과 책임들을 이행한 데서 오는 만족감을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손. 사람이 자신이 한 수고의 결과를 누릴 뿐 아니라, 그의 임무 수행에서 오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표현은 또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힘을 솔로몬이 인정한다는 것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한 결말을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시사한다.
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보다. 더 정확한 독법은 아마도 “그분”, 즉 “하나님을 제쳐두고”가 될 것이다. 그 취지는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의 삶의 배후에 계시므로 그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승하랴. “누가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겠는가?”가 더 나을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일생 동안 행한 일에 관해서, 또한 그 결과에 대해서 다른 어떤 사람이 하는 평가보다 더 나은 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그가 가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참조 24절). 25절에서 이 절의 독법이 “하나님을 제쳐두고 누가 먹으며, 하나님을 떠나서 누가 경험을 한단 말인가?”가 될 것이다.
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이…주시고. ( “for God giveth”[이는 하나님이…주시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for”는 25절과 26절을 대등하게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두 절이 차례로 24절에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우주적인 감찰력을 시인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죄인. 범죄자, 즉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반항하는 사람. 문자적으로 “목표에서 빗나간 사람.”
모아. 죄인은 영원한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일을 하면서 삶을 허비한다. 그가 쌓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한 것이다. 그는 돈을 모으려고 애쓴다. 그는 그것들을 쌓지만 영원한 목표를 위해서 하지 않는다(참조 마 13:12; 25:28; 눅 12:20).
하나님을 기뻐하는. 악인들의 수고한 열매가 의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상은 욥 27:16, 17; 잠 13:22; 28:8에서 발견된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참조 1:14 주석.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처리하신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근거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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