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장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기한. 문자적으로 “정해진 때.” “결정하다”, “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어근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기한은 단순히 어떤 편의적인 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다. 하나님은 여러 자연 현상을 위하여 어떤 기한들을 정하셨다(참조 애 3:37; 약 4:15).
목적. “~을 기뻐하다”, “~을 즐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명사는 원래 “사람이 기뻐하는 것”, 곧 천직 혹은 취미를 의미한다. 바로 이 명사가 사 58:3, 13; 말 1:10에서 “오락”으로, 시 1:2; 16:3에서는 “즐거움”으로 번역되었다.
때. “때”에 대하여 보통으로 쓰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이며, 흔히 어떤 한 기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날 (때). (「제임스왕역」에는 “to be born”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어떤 이들은 이 동사형을 능동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낳을 때”(a time to bring birth)로 번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동사를 자동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태어날 때”(to be born)로 번역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죽을 (때). 한 개인의 삶에서 출생과 죽음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당연지사이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맘대로 할 수 없고,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그가 세상에서 떠나는 시간도 거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심을 (때). 이 표현은 그 앞에 있는 표현과 잘 대응이 되는데, “심다”는 “낳는다”와 짝을 이루고 “뽑다”는 “죽다”와 짝을 이룬다. 후자는 인간의 생명과 관계가 되고 전자는 식물의 생명과 관계가 된다.
뽑을 (때). 문자적으로 “뿌리를 뽑을 (때).” 아무리 좋은 과수도 잘려 나가야 할 때가 온다.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죽일 (때). 솔로몬이 여기서 전쟁에 관한 말을 하는지 아니면 다른 상황을 말하는지에 관해 주석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솔로몬은 범죄자들의 처형에 관해서 말하고 있거나, 사회를 위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가 상처 입은 가축을 생각하고, 그 상처의 정도가 그 짐승을 죽여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인지, 그를 치료해 주는 것이 더 나을지를 결정해야 할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헐 (때). 건물들은 헐어 버리고 그 대신 더 편리한 것들을 지어야 할 때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어떤 문명의 잔해를 새로운 문명의 건축 자재로 이용하는 것이 근동에서는 일반적인 습관이 되어 왔다. 여기서 솔로몬이 자신의 방대한 건축 계획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 때로는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은 유랑 중에 많이 울었다(시 137:1).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웃을 날도 올 것이다(시 52:1~6).
슬퍼할 (때). “슬퍼하다”(mourn)로 번역된 이 말은 동방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 공공연하게 큰 소리로 애곡하여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일컫는 전문용어이다(참조 삼하 3:31; 렘 4:8; 9:17~22; 49:3).
춤출 (때). 특히 동방에서 춤추는 것은 고대 종교의식과 축제의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참조 출 15:20; 32:19 주석; 삼하 6:14, 16; 대상 15:29; 마 11:17).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 여기에 나온 이 말은 아마도 농사짓는 데 방해가 되는 돌들을 밭에서 치워 밭과 포도원의 옹벽을 쌓는 데 사용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사 5:2, 5).
안을 (때). 아마 남편과 아내의 결혼 관계를 나타내는 완곡어법이거나(참조 잠 5:20) 아니면 게으름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일 것이다(참조 전 4:5에는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라고 되어 있음).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찾을 (때). 문자적으로 “찾을 (때).” 탐색하는 것 혹은 찾는 것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히브리어이다.
잃을 (때).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할 (때)”가 더 나을 것이며, 그것은 “찾다”라는 표현과 멋진 균형을 이룬다. 이 말은 교인들 중 잃어버린 신자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열렬히 찾고자 하여 압력을 가하면 가까이 있는 가족들로부터 불쾌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버릴 (때). 이 표현의 예증으로 왕하 7:15; 잠 11:24, 25; 욘 1:5; 마 16:25; 행 27:18, 19, 38을 참조하라.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찢을 (때). 참조 창 37:29; 삼하 1:11; 왕상 11:11; 대하 23:13; 욥 1:20; 2:12.
잠잠할 (때). “침묵이 금”일 경우가 있다(참조 레 10:3).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랑할 (때). 마 5:43, 44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비교하라.
전쟁할 (때). 이 말씀이 진리임을 설명할 만한 하나의 예증은 아직 오지 않은 여호와의 큰 날의 전쟁(계 16:15~17)과, 뒤따라오는 영구한 평화(계 21, 22장)가 될 것이다.
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참조 1:3 주석. 솔로몬의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한다. 인간의 삶이 굽이마다 방해를 받을 때 자신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하여 그처럼 애쓸 필요가 왜 있단 말인가? 그는 그의 인생길에 시험거리를 갖다 놓으시는 분은 사랑의 아버지이며 이를 통해서 그분은 지상의 자녀들을 훈련시켜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참조 히 12:11; 계 3:19~21).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노고. 참조 1:13 주석. 불멸의 생명을 구하는 자들에게(참조 롬 2:6, 7) 필요한 삶의 엄격한 훈련은 모두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의 길을 택하고, 자신의 품성을 계발하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 실제적인 생활의 난관들은 하나님의 지도 아래에서만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가 있다.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아름답게. 창 1:31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한 설명과 비교하라. 모든 것이 “좋았”을 뿐 아니라 아름다웠고, 미학적으로도 만족스러웠고, 실제적인 용도에 완전했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취향에도 좋았다. 몇 가지 사물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러했다.
또. 이 말은 저자가 독자들이 간과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추가적인 요점을 암시한다.
영원. ( “world”[세상]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올람(‘olam). “숨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올람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올람의 의미에 관하여 좀 더 연구해 보려면 출 12:14; 21:6 주석을 참조하라. 올람을 “세상”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영원”, “영구”, “연속”으로 되는 것이 더 일반적일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내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공의 무한성에 관한 이같은 인식은 이 세상 사물의 덧없는 성질에 불만족스러움을 불러 일으킨다. 참조 14절 주석.
마음. 그들의 사상 속에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물질세계가 인간 존재의 총화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간은 두 세계와 연결된다. 즉 육체적으로는 세상에, 지성적·정서적·심리적으로는 영원한 세상에 연결된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의식을 갖고서도 인간은 이 불만족스러운 삶의 좁은 경계선 저 너머에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주셨느니라. 문자적으로 “주어졌다.” 이 의미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한 경이로운 사물들 속으로 혹은 하나님이 계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신 영원한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사실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더 밀접한 연합을 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음받은 창조물―청소년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시 36:9)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의 기초를 이루는 깊은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시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이시다. 햇빛, 깨끗하고 맑은 공기, 음식물 등은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힘을 유지해 주는 중요한 요소들로서,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원천들이다. 우리가 시간마다 순간마다 생존하는 것은 그분의 생명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죄로 인해 변질된 것을 제외한 하나님이 선물들은 모두 인간의 생명과 건강과 기쁨을 위해 유용한 것들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3:11)다는 말씀처럼, 참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들을 훼손함으로써가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으시는 그분의 법칙에 조화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교육 197-198).
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먹고 마시는 것. 금욕주의적인 생활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된다. 사람이 자신의 필요와 행복을 위하여 제공된 좋은 것들을 적절히 즐기는 것이 창조주의 뜻이다.
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영원히. 11절에서 “영원”으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했다(참조 11절 주석). 여기서 솔로몬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일 가운데 작용하는 하나님의 뜻의 실제적인 불변성을 증명한다(참조 시 33:11; 사 46:10).
사람으로…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 비굴한 공포심이 아니라(참조 신 4:10; 6:5 주석) 하나님의 속성(시 40:3; 64:9)과 사람의 일상사에 역사하는 그분의 뜻에 대한 밝은 이해 위에 기초한 경외심이다(참조 사 45:18; 말 3:6; 계 15:3, 4).
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옛적에 있었고. 이 절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완전성과 영원성에 관한 회화적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무궁한 세월이 항상 현재일 뿐이다(참조 계 1:8).
하나님은…다시 찾으시느니라. 문자적으로 “하나님은…찾으신다.”
이미 지난 것. 문자적으로 “추적자.” 라다프(radap), “추적하다”, “추격하다”, “박해하다”에서 유래했다. 수 8:16에서는 “따르다”, 렘 29:18에서는 “학대하다”로 번역했다(「개역한글판」에는 수동형 “학대를 당하다”로 번역되어 있음-역자 주). 여기에 있는 사상은 아마도, 하나님 앞에는 과거의 모든 것이 마치 현재의 것인 양 공개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생각을 과거 속으로 투영시키기를 마치 현재와 미래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하신다. 만일 이것이 그 의미라면 “추적자”는 마치 그들이 서로를 추적하고 있던 것처럼 의인화된 과거 시대의 순환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재판하는 곳. 즉 “정의의 장소.” 말하자면 사법 관청으로 바쳐진 장소이다. 정의 구현을 위해 구별된 바로 이 법정들에서 악이 왕좌를 차지한 중에 뇌물과 부패가 생겼다.
악. “사악”으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히브리어에서 온 말이다. 악(iniquity)과 사악(wickedness)의 두 용례 중에서 후자가 더 적합하다. 솔로몬은 “의”라는 말로 정의를 다루는 일을 구현하고 그 화신이 되어야 할 재판관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첫 번째 표현은 그 장소를 가리켰고, 두 번째 표현은 그곳에서 권위를 갖고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된 “심판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그분이 의인과 악인의 송사를 판단하여 결정짓는 재판관으로 행하실 뿐 아니라, 그 형벌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사상을 표현한다.
모든 목적. 참조 1절 주석.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전 5:4; 12:1; 사 44:28; 46:10; 말 1:10에서는 “기쁨”으로, 말 3:12에서는 “아름다워짐”으로 번역되었다.
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일. “반차”(시 110:4)와 비교하라. 이 구절 전체를 좀 더 잘 번역하려면 단순히 “사람의 아들들에 관하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험하시리니. 문자적으로 “정결케 하다”, “택하다”, “시험하다”, “증명하다.” 이 동사는 사 52:11에서는 “정결케 할지어다”, 단 11:35에서는 “정결케 되며”, 단 12:10에서는 “스스로 정결케 하여”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깨끗케 하기 위하여 연단의 수단으로 그들을 시험하는 경향을 표현한다(참조 욥 5:17; 23:10; 참조 전 3:19 주석).
짐승. 대개 “가축”으로 번역됐다. 이 말은 “말 못하게 되다”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유래되었고 “말하는 데 방해를 받다”, “말문이 막히다” 등의 의미를 가진 아랍어와 관계가 있다.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자신의 죄 많고 부정한 상태를 인정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임하나니. 19절에서 “임하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이 세 경우 각각은 “기회”, “운명”, “행운”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에서 온 것인데, 그것들은 “마주치다”, “만나다”, “일어나다”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의 명사형이 룻 2:3과 삼상 6:9에는 “우연히”로, 삼상 20:26에는 “무슨 사고가 있어”로, 전 9:2, 3에는 “임하는 모든 것”으로 나타난다.
호흡. 히브리어 루아흐(ruah.). 생기가 떠날 때 생물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는다(참조 21절 주석).
죽음. 죽음이라는 불가해(不可解)한 현상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산 자의 운명이다. 시인은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라고 말한다. 죽음의 지배 아래 있다는 점에서는 인간이 짐승들보다 결코 나은 것이 없다.
뛰어남이 없음. 모든 산 자는 호흡의 중단과 함께 죽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육체적 죽음의 결과는 다 똑같다. 외관상으로는,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감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고전 15:51~58).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한 곳. 그곳은 무덤이다(참조 욥 7:9, 10).
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혼. 히브리어 루아흐(ruah.). 19절에서 “호흡”으로 번역했다. 생명의 원칙은 물리적 영역, 즉 육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12:7). 21절에서 루아흐는 혼(spirit)으로 번역되었다. 사람과 짐승이 다같이 루아흐를 가졌고, 사람의 루아흐와 짐승의 루아흐가 같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만약 죽을 때에 사람의 루아흐, 즉 사람의 “영”이 육체를 떠나 의식 있는 존재가 된다면 짐승의 루아흐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죽을 때 육체를 떠난 의식 있는 “혼”이 계속 살아 있다고 추론할 만한 것은 없고, 짐승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21절에서 솔로몬은 사람의 루아흐는 위로 올라가고, 반면에 짐승의 루아흐는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을 누가 알며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솔로몬은 그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느 누가 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루아흐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게 하자. 여기서와같이 문자적 호흡을 가리키는 루아흐의 용도(참조 욥 9:18; 19:17)와 생명의 원리를 가리키는(참조 창 6:17; 7:22) 루아흐의 비유적 용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을 의미하기 위해서 루아흐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피”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하다(참조 창 4:10; 9:4 주석).
누가 알랴. 「개정표준역」에는 “사람의 혼이 위로 올라가는지의 여부를 누가 알랴?”로 되어 있다. 거룩한 지혜가 없이는 아무도 모른다. 육체의 운명은 부패의 과정을 거쳐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그 “혼”, 즉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 외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관해서 확인할 수 없다(참조 12:7 주석).
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 즉 현세의 삶이 제공하는 것에서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라. 이것은 영원한 사물에 확고하게 기초한 믿음을 갖지 아니한 사람의 정상적인 생각이다.
신후사(身後事).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지식의 범위 밖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참조 살전 4:14~18). 옛날의 사두개인들처럼 미래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참조 마 22:23~32), “하나님의 아들들”(요일 3:1, 2)은 다시 살 것이다. 무덤 저 너머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셨다(고전 15:16~22; 딤후 1:10).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기한. 문자적으로 “정해진 때.” “결정하다”, “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어근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기한은 단순히 어떤 편의적인 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다. 하나님은 여러 자연 현상을 위하여 어떤 기한들을 정하셨다(참조 애 3:37; 약 4:15).
목적. “~을 기뻐하다”, “~을 즐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명사는 원래 “사람이 기뻐하는 것”, 곧 천직 혹은 취미를 의미한다. 바로 이 명사가 사 58:3, 13; 말 1:10에서 “오락”으로, 시 1:2; 16:3에서는 “즐거움”으로 번역되었다.
때. “때”에 대하여 보통으로 쓰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이며, 흔히 어떤 한 기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날 (때). (「제임스왕역」에는 “to be born”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어떤 이들은 이 동사형을 능동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낳을 때”(a time to bring birth)로 번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동사를 자동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태어날 때”(to be born)로 번역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죽을 (때). 한 개인의 삶에서 출생과 죽음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당연지사이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맘대로 할 수 없고,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그가 세상에서 떠나는 시간도 거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심을 (때). 이 표현은 그 앞에 있는 표현과 잘 대응이 되는데, “심다”는 “낳는다”와 짝을 이루고 “뽑다”는 “죽다”와 짝을 이룬다. 후자는 인간의 생명과 관계가 되고 전자는 식물의 생명과 관계가 된다.
뽑을 (때). 문자적으로 “뿌리를 뽑을 (때).” 아무리 좋은 과수도 잘려 나가야 할 때가 온다.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죽일 (때). 솔로몬이 여기서 전쟁에 관한 말을 하는지 아니면 다른 상황을 말하는지에 관해 주석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솔로몬은 범죄자들의 처형에 관해서 말하고 있거나, 사회를 위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가 상처 입은 가축을 생각하고, 그 상처의 정도가 그 짐승을 죽여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인지, 그를 치료해 주는 것이 더 나을지를 결정해야 할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헐 (때). 건물들은 헐어 버리고 그 대신 더 편리한 것들을 지어야 할 때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어떤 문명의 잔해를 새로운 문명의 건축 자재로 이용하는 것이 근동에서는 일반적인 습관이 되어 왔다. 여기서 솔로몬이 자신의 방대한 건축 계획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 때로는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은 유랑 중에 많이 울었다(시 137:1).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웃을 날도 올 것이다(시 52:1~6).
슬퍼할 (때). “슬퍼하다”(mourn)로 번역된 이 말은 동방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 공공연하게 큰 소리로 애곡하여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일컫는 전문용어이다(참조 삼하 3:31; 렘 4:8; 9:17~22; 49:3).
춤출 (때). 특히 동방에서 춤추는 것은 고대 종교의식과 축제의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참조 출 15:20; 32:19 주석; 삼하 6:14, 16; 대상 15:29; 마 11:17).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 여기에 나온 이 말은 아마도 농사짓는 데 방해가 되는 돌들을 밭에서 치워 밭과 포도원의 옹벽을 쌓는 데 사용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사 5:2, 5).
안을 (때). 아마 남편과 아내의 결혼 관계를 나타내는 완곡어법이거나(참조 잠 5:20) 아니면 게으름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일 것이다(참조 전 4:5에는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라고 되어 있음).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찾을 (때). 문자적으로 “찾을 (때).” 탐색하는 것 혹은 찾는 것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히브리어이다.
잃을 (때).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할 (때)”가 더 나을 것이며, 그것은 “찾다”라는 표현과 멋진 균형을 이룬다. 이 말은 교인들 중 잃어버린 신자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열렬히 찾고자 하여 압력을 가하면 가까이 있는 가족들로부터 불쾌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버릴 (때). 이 표현의 예증으로 왕하 7:15; 잠 11:24, 25; 욘 1:5; 마 16:25; 행 27:18, 19, 38을 참조하라.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찢을 (때). 참조 창 37:29; 삼하 1:11; 왕상 11:11; 대하 23:13; 욥 1:20; 2:12.
잠잠할 (때). “침묵이 금”일 경우가 있다(참조 레 10:3).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랑할 (때). 마 5:43, 44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비교하라.
전쟁할 (때). 이 말씀이 진리임을 설명할 만한 하나의 예증은 아직 오지 않은 여호와의 큰 날의 전쟁(계 16:15~17)과, 뒤따라오는 영구한 평화(계 21, 22장)가 될 것이다.
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참조 1:3 주석. 솔로몬의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한다. 인간의 삶이 굽이마다 방해를 받을 때 자신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하여 그처럼 애쓸 필요가 왜 있단 말인가? 그는 그의 인생길에 시험거리를 갖다 놓으시는 분은 사랑의 아버지이며 이를 통해서 그분은 지상의 자녀들을 훈련시켜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참조 히 12:11; 계 3:19~21).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노고. 참조 1:13 주석. 불멸의 생명을 구하는 자들에게(참조 롬 2:6, 7) 필요한 삶의 엄격한 훈련은 모두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의 길을 택하고, 자신의 품성을 계발하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 실제적인 생활의 난관들은 하나님의 지도 아래에서만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가 있다.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아름답게. 창 1:31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한 설명과 비교하라. 모든 것이 “좋았”을 뿐 아니라 아름다웠고, 미학적으로도 만족스러웠고, 실제적인 용도에 완전했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취향에도 좋았다. 몇 가지 사물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러했다.
또. 이 말은 저자가 독자들이 간과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추가적인 요점을 암시한다.
영원. (“world”[세상]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올람(‘olam). “숨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올람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올람의 의미에 관하여 좀 더 연구해 보려면 출 12:14; 21:6 주석을 참조하라. 올람을 “세상”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영원”, “영구”, “연속”으로 되는 것이 더 일반적일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내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공의 무한성에 관한 이같은 인식은 이 세상 사물의 덧없는 성질에 불만족스러움을 불러 일으킨다. 참조 14절 주석.
마음. 그들의 사상 속에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물질세계가 인간 존재의 총화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간은 두 세계와 연결된다. 즉 육체적으로는 세상에, 지성적·정서적·심리적으로는 영원한 세상에 연결된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의식을 갖고서도 인간은 이 불만족스러운 삶의 좁은 경계선 저 너머에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주셨느니라. 문자적으로 “주어졌다.” 이 의미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한 경이로운 사물들 속으로 혹은 하나님이 계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신 영원한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사실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더 밀접한 연합을 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음받은 창조물―청소년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시 36:9)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의 기초를 이루는 깊은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시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이시다. 햇빛, 깨끗하고 맑은 공기, 음식물 등은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힘을 유지해 주는 중요한 요소들로서,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원천들이다. 우리가 시간마다 순간마다 생존하는 것은 그분의 생명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죄로 인해 변질된 것을 제외한 하나님이 선물들은 모두 인간의 생명과 건강과 기쁨을 위해 유용한 것들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3:11)다는 말씀처럼, 참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들을 훼손함으로써가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으시는 그분의 법칙에 조화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교육 197-198).
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먹고 마시는 것. 금욕주의적인 생활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된다. 사람이 자신의 필요와 행복을 위하여 제공된 좋은 것들을 적절히 즐기는 것이 창조주의 뜻이다.
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영원히. 11절에서 “영원”으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했다(참조 11절 주석). 여기서 솔로몬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일 가운데 작용하는 하나님의 뜻의 실제적인 불변성을 증명한다(참조 시 33:11; 사 46:10).
사람으로…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 비굴한 공포심이 아니라(참조 신 4:10; 6:5 주석) 하나님의 속성(시 40:3; 64:9)과 사람의 일상사에 역사하는 그분의 뜻에 대한 밝은 이해 위에 기초한 경외심이다(참조 사 45:18; 말 3:6; 계 15:3, 4).
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옛적에 있었고. 이 절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완전성과 영원성에 관한 회화적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무궁한 세월이 항상 현재일 뿐이다(참조 계 1:8).
하나님은…다시 찾으시느니라. 문자적으로 “하나님은…찾으신다.”
이미 지난 것. 문자적으로 “추적자.” 라다프(radap), “추적하다”, “추격하다”, “박해하다”에서 유래했다. 수 8:16에서는 “따르다”, 렘 29:18에서는 “학대하다”로 번역했다(「개역한글판」에는 수동형 “학대를 당하다”로 번역되어 있음-역자 주). 여기에 있는 사상은 아마도, 하나님 앞에는 과거의 모든 것이 마치 현재의 것인 양 공개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생각을 과거 속으로 투영시키기를 마치 현재와 미래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하신다. 만일 이것이 그 의미라면 “추적자”는 마치 그들이 서로를 추적하고 있던 것처럼 의인화된 과거 시대의 순환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재판하는 곳. 즉 “정의의 장소.” 말하자면 사법 관청으로 바쳐진 장소이다. 정의 구현을 위해 구별된 바로 이 법정들에서 악이 왕좌를 차지한 중에 뇌물과 부패가 생겼다.
악. “사악”으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히브리어에서 온 말이다. 악(iniquity)과 사악(wickedness)의 두 용례 중에서 후자가 더 적합하다. 솔로몬은 “의”라는 말로 정의를 다루는 일을 구현하고 그 화신이 되어야 할 재판관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첫 번째 표현은 그 장소를 가리켰고, 두 번째 표현은 그곳에서 권위를 갖고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된 “심판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그분이 의인과 악인의 송사를 판단하여 결정짓는 재판관으로 행하실 뿐 아니라, 그 형벌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사상을 표현한다.
모든 목적. 참조 1절 주석.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전 5:4; 12:1; 사 44:28; 46:10; 말 1:10에서는 “기쁨”으로, 말 3:12에서는 “아름다워짐”으로 번역되었다.
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일. “반차”(시 110:4)와 비교하라. 이 구절 전체를 좀 더 잘 번역하려면 단순히 “사람의 아들들에 관하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험하시리니. 문자적으로 “정결케 하다”, “택하다”, “시험하다”, “증명하다.” 이 동사는 사 52:11에서는 “정결케 할지어다”, 단 11:35에서는 “정결케 되며”, 단 12:10에서는 “스스로 정결케 하여”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깨끗케 하기 위하여 연단의 수단으로 그들을 시험하는 경향을 표현한다(참조 욥 5:17; 23:10; 참조 전 3:19 주석).
짐승. 대개 “가축”으로 번역됐다. 이 말은 “말 못하게 되다”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유래되었고 “말하는 데 방해를 받다”, “말문이 막히다” 등의 의미를 가진 아랍어와 관계가 있다.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자신의 죄 많고 부정한 상태를 인정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임하나니. 19절에서 “임하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이 세 경우 각각은 “기회”, “운명”, “행운”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에서 온 것인데, 그것들은 “마주치다”, “만나다”, “일어나다”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의 명사형이 룻 2:3과 삼상 6:9에는 “우연히”로, 삼상 20:26에는 “무슨 사고가 있어”로, 전 9:2, 3에는 “임하는 모든 것”으로 나타난다.
호흡. 히브리어 루아흐(ruah.). 생기가 떠날 때 생물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는다(참조 21절 주석).
죽음. 죽음이라는 불가해(不可解)한 현상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산 자의 운명이다. 시인은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라고 말한다. 죽음의 지배 아래 있다는 점에서는 인간이 짐승들보다 결코 나은 것이 없다.
뛰어남이 없음. 모든 산 자는 호흡의 중단과 함께 죽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육체적 죽음의 결과는 다 똑같다. 외관상으로는,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감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고전 15:51~58).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한 곳. 그곳은 무덤이다(참조 욥 7:9, 10).
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혼. 히브리어 루아흐(ruah.). 19절에서 “호흡”으로 번역했다. 생명의 원칙은 물리적 영역, 즉 육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12:7). 21절에서 루아흐는 혼(spirit)으로 번역되었다. 사람과 짐승이 다같이 루아흐를 가졌고, 사람의 루아흐와 짐승의 루아흐가 같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만약 죽을 때에 사람의 루아흐, 즉 사람의 “영”이 육체를 떠나 의식 있는 존재가 된다면 짐승의 루아흐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죽을 때 육체를 떠난 의식 있는 “혼”이 계속 살아 있다고 추론할 만한 것은 없고, 짐승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21절에서 솔로몬은 사람의 루아흐는 위로 올라가고, 반면에 짐승의 루아흐는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을 누가 알며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솔로몬은 그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느 누가 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루아흐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게 하자. 여기서와같이 문자적 호흡을 가리키는 루아흐의 용도(참조 욥 9:18; 19:17)와 생명의 원리를 가리키는(참조 창 6:17; 7:22) 루아흐의 비유적 용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을 의미하기 위해서 루아흐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피”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하다(참조 창 4:10; 9:4 주석).
누가 알랴. 「개정표준역」에는 “사람의 혼이 위로 올라가는지의 여부를 누가 알랴?”로 되어 있다. 거룩한 지혜가 없이는 아무도 모른다. 육체의 운명은 부패의 과정을 거쳐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그 “혼”, 즉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 외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관해서 확인할 수 없다(참조 12:7 주석).
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 즉 현세의 삶이 제공하는 것에서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라. 이것은 영원한 사물에 확고하게 기초한 믿음을 갖지 아니한 사람의 정상적인 생각이다.
신후사(身後事).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지식의 범위 밖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참조 살전 4:14~18). 옛날의 사두개인들처럼 미래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참조 마 22:23~32), “하나님의 아들들”(요일 3:1, 2)은 다시 살 것이다. 무덤 저 너머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셨다(고전 15:16~22; 딤후 1:10).
전도서 4장
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내가 돌이켜…보았도다. 히브리어의 표현은 “내가 다시…생각해 보았다” 혹은 “내가 다시…보았다”(「개정표준역」)와 같은 말이다.
학대. 히브리어 아슈킴(‘as∨uqim), “억압하다”, “학대하다”, “강제로 탈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의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것은 “난폭”, “불공평”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와 관련이 있다. 솔로몬은 여기서 역사를 통하여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의 운명이 되어 온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참조 욥 35:9; 암 3:9; 삼상 12:4).
눈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시 39:12; 56:9; 사 38:5). 이와는 반대로 외식하는 자의 눈물은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신다(말 2:13).
위로자. “위문하다”, “위로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극한 슬픔 중에 있는 인간의 마음은,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의 말을 갈망하는데 위로자가 아무도 없을 때는 그들의 고통이 더욱 깊어진다(참조 시 69:20; 애 1:2).
권세. 히브리어는 삼손에게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육체적인 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삿 16:5, 6, 15),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어떤 방면의 재능이나 능력을 일컬을 때 쓰인다(잠 24:5). 여기서는 이것이 강한 자들이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거칠게 취급하는 것을 묘사한다.
2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산 자보다. 욥 3:13 그리고 유다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마 26:24)과 비교하라. 어떤 극악한 상태와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는 삶을 계속하느니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솔로몬이 이 글을 쓴 것은 이런 관점에서이다. 그것은 수천 년간의 죄의 결과로 생긴 불평등과 악이 야기시킨 분위기를 나타낸다.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남녀들이 인생의 허무함을 더욱 깊이 느낀다.
복되다 하였으며. 즉 “내가 축하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더욱 낫다. 마귀의 소산물인 비관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구주에 대한 굳은 신뢰 로(마 11:28)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다. 잠잠히 신뢰하라는 바울의 말과 비교하라(롬 5:1).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수고. 문자적으로 “고생”, “노고”, “노력.”
여러 가지 교묘한 일. (「제임스왕역」에는 “every right work”[모든 옳은 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여러 가지 일의 능숙함.” 이 표현은 “성공적인 일” 혹은 “유익한 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기를 받으니. 경쟁은 경쟁 상대가 가까울수록 시기심과 괴로움을 더욱 격동시킨다. 여기에 제시된 원칙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 조건, 사업상의 경쟁관계, 국제적인 문제들에도 적용된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곧 “바람을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것”(「개정표준역」). 세속적 성공을 행복의 보증으로 삼으려는 노력의 허무함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말이다.
5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손을 거두고. 문자적으로 “손을 모으고.” 게으름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표현이다(참조 잠 6:10; 24:33).
자기 살을 먹느니라. 유대인 주석자들은 “살”이라는 말 대신에 “고기”라는 말을 사용하여 오직 인생의 쾌락에만 관심을 갖고 식탁에 앉아 있는 멍청한 사람의 모습을 시사한다. 그들은 이 해석을 뒷받침하려고 출 16:8; 사 22:13을 인용한다. 아마 이 표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게으른 멍청이는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가족들도 같은 신세가 되게 한다는 말일 것이다.
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문자적으로 “한 손 가득히 평온함을 채우는 것.” 히브리어는 찻종 모양의 손을 가리킨다. 여기의 평온함이란 물론 마음의 평화를 말한다. 이 말은 6:5에서 행복을 의미하는 “평안함”으로, 9:17에서는 잠잠함을 의미하는(참조 사 30:15) “조용히”로 나타난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최고의 이익을 올리기 위하여, 가지각색의 것들을 얻고자 애쓰는 중에 심한 활동과 초조하게 달려가는 삶을 매일 살아가지만 충만하고 행복한 삶은 이 세상 것들의 풍부함에 달려 있지 않다.
7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헛된 것을 보았도다. 솔로몬은 삶의 또 다른 현상, 곧 탐욕에 관하여 생각한 것을 말하고 있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수고 중에 있는 그를 고무시킬 만한 동기가 거의 없는 애처롭고 고독한 모습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한 노력은 고상하고 만족스런 과업이다.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책임은 품성 계발에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런 동기가 없으면 사람은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의 내면에 있는 자비의 샘물은 말라버린다.
홀로. 이 묘사는 친구들이나 가까운 벗들도 없이 홀로 지내는 한 외로운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에게는 친척들도 없고 그를 계승하거나 그의 사업을 진척시켜 나갈 상속자도 없다.
마지 아니하며. 즉 “중단하며.” “잘라 내다”라는 동사의 어근에서 유래했다. 홀로 있는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고 있지 않으나 더 칭찬받을 만한 목적에서 나온 열정으로 계속 일하고 저축한다.
부를…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그는 많이 저축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갈망한다. 부의 획득은 그에게 강박관념이 되었다(참조 잠 27:20). 자신의 현재 상태를 만족히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이 말은 “내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이다(네페쉬[nepes∨]의 이러한 쓰임새에 대해서는 시 16:10 주석을 참조하라). 탐심의 노예가 된 이 사람은 왜 그가 그처럼 쉼 없이 일하는가에 관하여 결코 자문해 보지 않았다. 욕망으로 인해 눈이 멀었으므로 그는 부를 쌓는 일에 자신을 바쳤지만 만족은 찾지 못했다. 근면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완전한 만족이 있다(롬 12:11; 엡 4:28; 딤전 6:8; 히 13:5). 게으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된다(잠 12:24; 전 10:18).
무익한 노고로다. 곧 “악한 일이로다”, “불행한 일이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 협력해서 일하는 두 노동자는 혼자 일하는 사람의 노임의 두 배 이상을 버는 경우가 흔히 있다. “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임금에 대한 일반적인 히브리어이다. 이 말은 종과 관련해서 사용되었고(창 30:28, 32, 33), 군인들과 관련해서(겔 29:18, 19), 삯일 나간 짐승들과 관련해서도(슥 8:10) 사용되었다.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넘어지면. 히브리어 동사는 육체적으로 넘어지는 것에, 죽음에, 다른 사람의 권세에 말려드는 일에, 사업의 실패에 적용될 수 있다. 어떤 한 사람이 불행한 처지가 되었을 때 그의 짝이 와서 그를 구조해 주는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맨 마지막 의미가 더 적절하다. 고대에는 열악한 교통수단과 강도들 때문에 여행 조건이 대부분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사람이 실패할 수도 있는 여행을 두 사람은 안전하게 해낼 수 있었다. 협력은 그 가치를 측량할 수 없고, 고립은 대개가 위험하다.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과 비교하라(눅 10:1). 잘된 일에 나타나는 동료의식과 상호간의 기쁨은 가장 가치 있는 축복이다(행 13:2; 14:27).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10절은 곤란 중의 협조와 후원에 관하여 말하고, 11절은 위로에 관해서 말한다. 여기서 솔로몬은 낮의 온기에 이어지는 밤의 냉기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의 겉옷이 유일한 침구가 되었던 일반인의 가난에 대하여 생각한다(참조 출 22:26, 27).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여기서는 협조와 보호의 축복이 강조되고 있다. 똑같은 진리가 “뭉치면 산다”라는 격언에도 나타나 있다.
삼 겹 줄. 줄이 세 가닥이라도 따로따로 있으면 쉽게 끊어지지만, 그것들을 꼬아서 하나의 줄로 만들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어떤 주석자들은 여기서 삼위일체의 암시를 본다고 주장하므로 이 절을 해석하는 데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극단으로 치우쳤다. 그들은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 사이에 오고간 사랑과 우애와 같은 일을 인용하기도 하고, 예수님이 세 제자를 택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도록 한 일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런 기상천외(奇想天外)한 해석은 피해야 한다.
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소년. “청년” 혹은 “젊은이”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17세 소년 요셉에 대하여(창 37:30),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 “청년”들에 대하여 사 용되었다(왕상 12:8, 10, 14; 대하 10:8, 10, 14).
둔하여. (「제임스왕역」에는 “and foolish”[그리고 둔하여]로 되어 있음-역자 주). “그러나 둔하여”가 더 나을 것이다.
간함을 받을 줄. 이렇게 번역된 단어는 “충고하다”, “계몽하다”, “권고하다”, “경고하다”라는 말의 어근에서 온 것이다. 왕은 노령으로 인해 완고해져서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완고함으로 그는 모든 충고를 거절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나라와 백성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14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가난한. 신하들의 복리에 무관심한 우둔한 왕은 폐위될 수도 있고, 큰 고생을 하다가 어쩌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옥에서 나와. 문자적으로 “죄수들의 집에서 나와.” 아마 비유적으로 금지된 환경 가운데서 나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는 한 청년이 그의 앞에 놓인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고, 그가 만약 현명하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인생의 길에서 성공하여 나라의 최고 지위에까지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참조 왕상 11:26~28).
15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내가 본즉. 화제를 바꿀 때 쓰는 표현이다.
버금으로…소년. 이 절은 폐위된 왕을 대신하여 그를 계승한 새로운 통치자의 열렬한 추종자들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16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저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 문자적으로 “그의 뒤에 있던 그들 모두.” 이 의미는 “그가 다스렸던 자들”이다. 히브리인들은 지도자를 “앞서 행하는 자”라고 한다(삼상 18:16; 대하 1:10).
무수하였을지라도. 15절에 언급된 군중들의 열성에 관한 계속적인 묘사이다. 이것은 앞 구절의 히브리어가 확증해 주는데, 그것을 좀 더 잘 이해하면 “그의 다스림을 받던 그들 모두일지라도”라는 뜻이 된다.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오늘의 대중의 갈채가 내일의 집단적인 비난이 될 수도 있다. 애굽에 있던 요셉은 세상 관심의 변덕스러움을 잘 예증한다(출 1:8).
전도서 5장
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의 전. 고대의 성막을 “여호와의 집”이라 불렀다(삼상 1:7; 삼하 12:20). 같은 칭호가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참조 왕상 3:1).
네 발을 삼갈지어다. 히브리 성경과 「70인역」과 「불가타역」에는 이것이 4:17이다. “네 발을 삼갈지어다”는 “네 발을 조심하라”라는 구어적 표현과 같은 뜻이고, 여기서는 창 17:1; 시 119:101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어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 여기서 우매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발을 삼가지도 않고, 말씀을 “들을 준비”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을 행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 서 있으면서도(2절) 그분을 의식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은 세상 사물에 가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흔히 경솔하고 급하고 말이 많다.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너무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일상의 화제들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데, 지혜자는 여기서 그들을 우매자로 분류한다. 그들의 예배는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영적 요구들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진실 되고 지성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참조 요 4:24). 그들은 스스로 자초한 무지 가운데서 죄를 범하고 그 결과로 그들의 예배와 헌물들은-경솔하게 드려졌기 때문에-`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지 못한다.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참조 왕상 8:43). 하 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처럼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함부로. 즉 “경솔하게.” 7:9과 8:3에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급하고 경솔하고 무모한 말들은 대화나 탄원이나 기도 중일지라도 위험하다. 말〔馬〕과 같이 혓바닥은 조심스럽게 제어해야 한다. 기도에 관한 그리스도의 조언을 주목해 보라(마 6:7).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바알 제사장들의 탄원을 참조하라(왕상 18:26).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모르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의 구할 것을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하는 너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참조 마 6:7, 8; 눅 18:9~14).
3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꿈. 히브리어 할롬(h.alom). 거짓 선지자의 꿈이나 참 선지자의 꿈을 다 포함한 모든 꿈에 사용되는 말이다. 여기서 이 꿈이 근심에 싸인 세상 사람들의 혼란한 정신 상태를 일컫는 말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한 마음의 상태는 아니다.
나타나느니라. 히브리어에는 이 말이 없으므로 그냥 빼버리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꿈이란 과로나 신경과민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말을 많이 하면 말하는 사람에게 우매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다.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하시나니”라는 말은 첨가된 것임을 주목하라.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우매자에게는 기쁨이 없다”라고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은 생각 없이 많은 약속을 남발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물론 사람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행 5:1~10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과 비교하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우리는 어떤 두드러진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에 헌금을 드려야겠다는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러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6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네 육체를 범죄케. 6절의 첫 번째 구절은 문자적으로 “너의 입으로 네 육체에 죄를 가져오도록 하지 말라”로 해석된다. 서원(誓願)한 것을 갚지 않는 것은 태만죄이다.
사자. ( “the angel”[그 천사]로 되어 있음-역자 주). 「70인역」과 「수리아역」에는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사자”라는 말은 때때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 성스러운 이름을 사용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시사되어 왔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이름과 동의어로 사용할 여러 가지 표현을 계발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으로…진노하사.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에 관하여는 삿 2:20; 왕하 13:3; 17:11 주석을 참조하라. 사람이 왜 쓸데없이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자초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대한 서원―우리 형제들 앞에서 일정한 금액을 바치겠다고 구두로나 기록으로나 서약을 했으면, 저들(우리 형제들)은 우리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약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증인들이다. 그 서약은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으로 이웃 사람에게 준 약속 어음과 같은 것이다. 어떠한 법적인 계약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행한 서약보다 금전의 지불에 대하여 더욱 의무를 지워주는 것은 없다.
동료 인간에게 이렇게 서약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약한 것을 해제해 달라는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한 서약은 더욱 중요성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서약을 해제해 달라고 구하겠는가? 사람이 하나님께 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약속의 구속력이 덜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자기의 서약이 재판정(세상)에서 심문받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이 덜 유효한가? 예수님의 무한하신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할 것인가? 그의 서약과 행위가 하늘 법정에 있는 공의의 저울로 달릴 것이 아닌가?(청지기 315).
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경건한 두려움이 삶의 지도력이 되어야 한다(참조 신 4:10; 6:2 주석; 전 7:18; 8:12; 12:13; 합 2:20).
8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도. 아람어에서 번역된 말로 어떤 제국의 도를 뜻한다(참조 에 1:1; 단 8:2).
학대. 부패한 관계(官界)에 의한 착취는 드문 일이 아니다. 정치적 계획은 가난한 자들에게 혜택이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솔로몬도 자신의 방대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학대한 죄를 범해 왔다(왕상 12:4).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학대하는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말고, 그 사실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하지도 말라. 그것은 예상한 그대로일 뿐이다.
더 높은 자들. 아마도 각자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보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동방 정부 조직의 다양한 관리들의 계층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중 가장 높은 자까지도 감찰하신다(참조 시 33:13~15; 50:21; 습 1:12).
9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땅의 이익. 9절의 히브리어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이 절 앞부분을 더 정확히 번역하면 “모든 [정직한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땅은 이익을 내어 준다”로 될 것이다.
왕. 웃시야 왕은 농사를 크게 지었다(대하 26:10). 농업국의 통치자가 자기 백성과 가까운 경우가 흔히 있는 것은 그가 탐관오리들을 거치지 않고 백성을 직접 만나기 때문이다.
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은을 사랑하는 자. 재물을 쌓는 일에 바쳐진 삶은 이미 쌓아 놓은 것에 좀처럼 만족하는 법이 없다. 솔로몬은 동방 정부에서 각자가 자기 둥지를 트는 일에 여념이 없는 다수의 중하위직(中下位職) 공무원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소득. 재산이 아무리 증가해도 그것을 부족하게 여기고 좀 더 많이 얻기를 원한다.
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더하나니. 히브리어는 “그것을 먹는 자들이 증가한다”로 해석된다. 재정 형편이 나아지면 사람들은 살림을 늘린다. 비용이 많이 드는 접대를 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하고, 가신들과 종들과 식객들이 늘어나고, 친척들은 재정적 도움을 청하느라 아우성을 친다.
눈으로 보는. 부유한 사람은 죽을 때에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욥 1:21; 눅 12:19, 20). 그는 부를 축적하는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자랑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과시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딤전 6:10, 17~19).
무엇이 유익하랴. 곧 “어떤 이점이 있으랴?” 부는 이생에서만 그 쓸모가 있다. 돈을 모으고, 투자하고, 보전하는 것은 큰 걱정거리를 야기시키기 때문에 신경쇠약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이 세상의 재물은 영원으로 가는 여권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노동자. 특별히 농부, 즉 땅을 경작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한 말은 일반적으로 종들에게,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낮 동안의 육체노동은 밤에 숙면을 취하기 위한 아주 좋은 준비이다.
자지 못하느니라. 부를 관리하는 책임은 흔히 매우 힘든 것으로 판명되고 허약과 신경쇠약을 일으킬 정도로 사람에게서 휴식을 빼앗는다.
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재물을…지키는 것이라. 잘못은 재물을 쓰지 않고 쌓아 두는 데 있다. 재물의 소유에는 그것을 일반의 유익을 위해서 써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참조 마 19:20, 21). 바울의 권고를 참조하라(딤전 6:9, 10).
자기에게 해 되도록. 투자와 재물 관리로 인한 염려 때문에 생기는 불면은 흔히 그 소유자들을 병들게 한다(참조 12절). 어떤 범죄 집단들은 그들을 착취의 좋은 사냥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또 상속자들이 그들의 힘든 노고의 결실을 낭비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부의 축적으로 인해 입는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그의 품성에 입는 상처이다(참조 잠 11:24; 눅 12:16~21).
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재난. “서투른 모험”(「개정표준역」)이 더 낫다. 그것은 심각한 손해를 보는 어설픈 투자나 상거래를 말한다. 현명하지 못한 투기가 일평생 모은 것을 하룻밤 사이에 날려 버릴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업가가 자본을 가지고 그것으로 이익을 남기고자 한다면 끊임없는 염려가 불가피하다.
낳았으나. “낳았다”(완료형)가 히브리어에 더 가깝다. 여기에 나오는 아들은 미래에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할 자로 생각된다.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 손”이라고 할 때 “그”(his)라는 인칭소유대명사가 만약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그가 죽을 때에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만약 “그”라는 인칭소유대명사가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면 그 의미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의 사업이 처분되어서 그가 예상했던 유산이 한 푼도 남아있지 않음을 아들이 보게 된다는 말이다. 첫 번째의 의미가 더 낫다.
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벌거벗고. 욥의 말(욥 1:21)과 비교해 보고, 다윗의 말(시 49:16, 17)과도 비교해 보라. 이런 관찰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창 3:19)을 상기시킨다.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쌓은 영적 “재산”만을 무덤 저편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다(참조 요 3:36; 계 22:14). 품성만이 그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보화이다(실물교훈, 33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둘 길을 찾을 것이다(참조 눅 12:33, 34).
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이것도. 각 시대에 걸쳐 사람들은 삶이 공허해 보였기 때문에 고통을 당해 왔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결국 그 수고의 열매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몰수당할 뿐인데 도대체 일생 동안 힘써 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전도자는 묻는다.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 완전한 허무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여기에 있다(참조 욥 15:2; 잠 11:29). 바람은 형체가 없고, 잡히지 않으므로 붙잡아 놓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재물도 그러하다.
무엇이 유익하랴. 물론, 암시된 답변은 유익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어두운 데서 먹으며. 오직 물질적인 부의 축적을 위해서만 산 사람은 그것으로 그가 바라던 만족을 결코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묘사한 은유이다. 그의 희망을 영원한 사물에 두고 있는 사람(미 7:8)의 관점과 대조해 보라. 그들은 지금,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는 사물들을 생각하며 현재의 물질적 불편을 참고 견딘다(히 11:27).
번뇌. (「제임스왕역」에는 “많은 슬픔”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개정표준역」은 이 절의 나머지 부분에 관하여 “많은 번뇌와 질병과 분노”라는 「70인역」의 번역을 따른다. 이것은 “어두운 데서 먹으며” 살아온 사람의 경험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한 것이다.
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하나님의 주신바.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손이 선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것 위에 있다는 것(참조 롬 8:28)을 실감함으로써만 이르러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삶에서 잠잠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만족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이것이 바울의 권고였다(딤전 6:7, 8).
아름다움. 곧 “적당함” 혹은 “알맞음.”
내가 보았나니. 12~17절에서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는 일의 어리석음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배경 삼아, 부(富)는 일에 종사하게 하고 삶의 필요와 기쁨에 기여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능히 누리게 하시며. ( “hath given him power to eat”[그에게 먹을 힘을 주셨으며]로 되어 있음-역자 주). 여기서 “먹다”라는 말은 재물과 부요를 쌓아 놓는 대신에 활용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참조 13절).
하나님의 선물. 재물을 얻는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온다(신 8:18; 약 1:16, 17). 우리가 가진 능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이 능력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
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하나님과 협력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분이 해결하지 못할 일에 부딪히지 않는다(마 6:34). 그의 미래는 확실하고 그의 생애는 평화로울 것이다.
하나님이…응하심이니라. 여기서 “응하심이니라”라고 번역된 동사의 어근은 “[무엇인가를] 입증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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