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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막14:32- 52 기도의 이유/ 유다의 배신

by 은총가득 2020. 10. 29.

 

 

막14:32-42  

기도의 이유

 

오늘 본문은 기도하시는 주님과 세명의 수제자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방금전에 주님께 보여드렸던 놀라운 충심어린 고백을 차츰 잊어가고 있습니다. 육신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이 부서져라 기도하시면서 오직 영혼을 굳건히 지키려 몸부림 치십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14:32-42

 

(막14:32-4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 저지대에 구릉에 위치한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겟세마네는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 '겟트'와 기름을 의미하는 '세이멘'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동산의 이름입니다.

올리브 기름은 여러 단계로 짭니다.

우선 올리브를 수확하여 멧돌로 분쇄합니다(류모세. 열린다 성경).

 

잘게 부순 올리브 열매를 망사자루에 담아 압착기 밑에 쌓아 둡니다.

무게 추에 돌을 올리게 되어 있는데 1단계에서는 가장 가벼운 돌을 사용합니다.

첫번째로 짠 기름은 성전에 바치는 가장 거룩한 기름으로 사용하고, 그 다음은 무거운 무게추를 올려서 남은 찌꺼기로 다시 기름을 짭니다. 이 기름은 일반 가정에서 식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세번째 단계에서 더욱 무거운 돌을 올려 짠 기름은 가정마다 올리브 등잔을 밝히는 데 쓰거나 여자들의 화장품과 약품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더 무거운 추로 기름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짠 것은 잿물을 부어 비누로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찌꺼기는 버리지 않고 땔깜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올리브가 얼마나 소중하게 사용되었는지 버릴 것이 하나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무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추출한 가장 귀한 거룩한 기름은 성전의 촛대(메노라)를 밝히는 기름으로 썼습니다. 왕과 대제사장을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부을 때도 이 기름을 사용하였습니다.

'메시야'(그리스도)는 '마쉬아흐'로 정확히 읽을 수 있는데 왕과 대제사장을 기름 부을 때 사용하는 동사 '기름을 붓다'의 '마샤흐'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쉬아흐'이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십니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32절)"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란 상태입니다. 격하게 흥분하여 평정을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몹시 슬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감각없는 초인이 아닌 완전한 인간으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그대로 맛보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에게 기도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33-34절)"

그들의 기도는 주님의 고통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고통스러운 기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셔서 메시야가 행하신 모든 일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증인들은 자신들의 증거하는 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인간으로서 경험하신 모든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을 해보야 합니다.

(막5:37-43)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9:2-9)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리하여 이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할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기도의 내용은 고통의 시간, 죄의 짐에 눌려 있는 시간이 속히 지나가게 해달라는 청구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


우리의 '마쉬아흐'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이미지는 바로 올리브 기름을 짜는 이미지입니다. 무거운 돌로 추를 올려 눌러 댈때 바구니 옆으로 기름이 흘러나오 듯 예수님도 인류의 죄짐으로 눌려 그 중압감에 놀란 상태였고 슬픈 절망적 상태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중압감에 고개를 들수 조차 없으셨을 것입니다. 얼굴은 땅에 떨어뜨린 상태였고 올리브열매바구니 옆으로 기름이 추출되듯이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 처럼 흘려내리셨습니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기도하신 것도, 에너지 넘치게 기도하신 것도 아닌 절규하고 신음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죄의 무거운 돌을 더 무겁게 무겁게 하나씩 올려가며 기도하셨고 피한 방울 남지 않게 전부를 쏟아내셨습니다.

겟세마네라 불렸던 이 동산에 이런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주님께서 세 제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니 비탄스럽게도 이들이 깨어 있지 못합니다. 방금 전에 호언장담하였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7-38절)"

29,31절에 호언장담했어도 기도하지 못한 결과 68,70-71절의 결과를 낳고 맙니다. 즉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이 오고 기도하지 않은 결과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나가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보니 이들이 눈이 심히 피곤하여 깨어짔지 못하고 자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가오신 것을 알고 정신이 들어보니 부끄러워 주님께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1-42절)"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하루 앞두고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를 하면서 보내셨습니다. 평소에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던 주님이신데 십자가 형을 앞두고 치열한 영적 전투를 기도로 치르신 것입니다.

 

또 겟세마네의 기도는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막14:43-52  세 제자의 십자가

 

 

 

가룟 유다는 더이상 예수님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라도 잘못 꿰어진 단추를 이쯤에서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며, 메시야 사기극에 불과한 유월절 스캔들을 끝장내는 길이고, 이 혼란을 잠재워 종교지도자들도 백성들도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는 유월절 예배에 집중할수있게 하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입으로 맹세한 충성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마가요한은 세배대의 아들 요한보다 더 어린 청년입니다. 미숙하기 짝이없는 그도 후에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세명의 사도들 저마다의 실패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43-45 유다의 배반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책임, 선하신 뜻의 회복, 자기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실 수 없으시기에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커도 너무나도 큽니다.

심지어 친히 3년을 가르친 제자들마저도 죄인의 본성 가운데서 주님을 바라보려 합니다.

지상생애의 마지막 날 밤, 주님은 인간의 죄를 짊어진 채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납짝 엎드시셨습니다.

기름, 곧 '마쉬아흐'의 주님께서 말할 수 없는 수치, 놀람, 슬픔, 중압감 등의 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겟트' '세이멘',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에서 '마쉬아흐'의 거룩한 기름을 짜는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신 주님께서 자신을 포획하려고 온 사냥꾼들을 맞이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1-42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의 파송을 받은 유대 군병들이었습니다. 검과 몽치로 무장한 채로 유다를 따라 나온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앞서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아주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저런 소인배가 자신의 스승이라니....'

사기당한 느낌입니다. 그런 능력, 그런 인기라면 헤롯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로마까지도 정복할수 있겠다 싶어 따르는 데 '메시야라 하는 자'가 입만 열면 정반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 합니다.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들은 목자없는 양이건만 스승이라는 자는 자기를 따르는 양떼를 흩어버리는 삯군 목자일뿐이다 싶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마치 에서가 장자권을 외면하고 활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던 것처럼 검과 몽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는 권세가들이 붙여준 군인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유다는 이들과 신호를 정하여 두기를 '자기가 입맞추는 자가 체포할 자'라 하였고 그들보고 지시하기를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해 두었습니다.

스승을 만나 존경의 인사를 드리는 대신 무표정하게 팔아 넘기기 위한 군호로서 배신의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삼년동안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이건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며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급기야 주님을 배신한것도 모자라 아예 주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주님께서 로마의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형으로 죽으실 줄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46-49절) 말씀보다 검을 든 베드로

유다가 데리고 온 자들이 유다의 입맞춤의 신호를 보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손대었습니다.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보낸 군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큰 권세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악한 자의 명을 받아 자신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잡아 가두려 하고 있습니다. 마치 죄인처럼 예수님을 잡아가지만, 사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는 악한 소작농들일 뿐입니다(12:1-12).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정당하다면, 왜 낮에 사람들이 많은 성전에서 잡지 않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48-49절)"

 

 

저들의 검과 몽치를 보시면서도 두려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엄중하게 책망하시는 것은 듣고 잘못을 깨닫는 자가 나중에라도 회개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오직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붙잡혀 가시기도 하시고, 대제사장과 빌라도 앞에도 서시기도 하십니다.

베드로의 열심

유다를 따라온 군병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하는 것을 목격한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땅에 떨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용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입밖에 낸 말을 지키려 합니다. 풍랑 가운데에서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믿음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복음을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 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하사 늘 곁에 두시곤 하셨습니다.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시려 하셨고 그의 집에 머물며 그의 충성스러운 헌신을 의지하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주님의 가시는 길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할 베드로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교회 열쇠가 주어져 있고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주님께 대한 목격담들도 몇가지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뜻을 더 살피고 주님이 명하시는 것을 더 잘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신다는 주님을 만류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8:33)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들었었는데 아직도 주님의 뜻에 반하여 검을 빼어 들었습니다. 주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길을 가시건만 베드로는 아직도 유대를 회복하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 합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이 오히려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각오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한다는 것이 성령의 도움 없이 불가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마치 베드로보다 현명하고 충성스럽다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실패한 것을 내가 해보겠다 하는 것이 교만이라 여기는 것도 핵심에서 벗어난 생각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그보다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쓰시려고 성령께서 그를 붙드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비록 어리석고 연약하지만 성령님께 구하고 그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를 위해 충성한다면 주님께서 귀하게 쓰실 줄 믿습니다.


50-52절) 벌거벗은 도망자 마가요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폭력에 대하여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순순히 체포 되시는 것을 보고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군인들로부터 해를 당한 이가 없습니다. 그 중에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용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치는데 성공합니다.

(슥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양들이 흩어질 때 그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손을 드리워서 원수들의 해를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벗은 몸으로 도망을 쳤던 청년은 주님의 체포와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교회에서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마가요한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이가 없습니다. 그는 이 마가복음서의 저자입니다.

마가요한

마가는 큰 망치라는 뜻입니다. 그는 다락방 주인인 마리아의 아들이고,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그의 집이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당이었습니다.

마가는 훌륭한 어머니의 신앙을 잘 계승하였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께 선뜻 내드렸고, 실수가 있었으나 이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에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밤빌리아에 중도 하차 하고 이 사건은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서로 다른 지역으로 선교하게 합니다.

그 이후 골로새서 4:11, 딤후4:9-11, 딤전4:11에서 언급이 되기까지 20여년간 마가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요한에 대한 전승은 풍부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58년과 62년 사이 이집트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역임하다가 68년에 순교를 합니다.

 

 

이교도들은 끈으로 마가의 목을 묶고 도시 전체를 끌고 다니다가 돌팔매질로 죽였습니다. 그의 시신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828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시신을 돼지고기 밑에 몰래 숨겨 베네치아에 들여 왔고 성 마가 대성당 제단에 두게 됩니다. 그 후 베네치아의 깃발은 마가를 상징하는 앞발로는 성서를 잡은 날개가 달린 사자가 그려 넣어지게 됩니다. 성 마가 광장에는 지금도 날개가 달린 사자 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5:13) "여러분과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빌론에 있는 자매 교회와 나의 아들 마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기도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폭력을 묵인하지 않고, 주님의 방식을 따라 맞서게 하소서.  <blog/iagp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