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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네로와 황제들의 동전

by 은총가득 2020. 10. 6.

 

네로의 동전 중에는 그가 ‘세상의 새로운 선한 영'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신과 동등시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세상의 구주요 은혜 베푸는 자'로 불리어졌으며, 로마제국의 동쪽 속주의 동전에서는 네로를 ‘신'으로 칭하였다. 로마 황제숭배 사상에 의하면 황제가 신의 오른 편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요한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패러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AD 65년부터는 사후 신격화된 황제들에게만 허용되었던 빛나는 관을 쓴 네로 황제의 모습이 등장했다. 네로의 과대망상증이 극에 달하자 그의 궁전에 100피트나 되는 자신의 상을 세웠다. 황제의 경우 주로 흉상이, 신의 경우 주로 전신상이 제작되었다. 네로는 AD59년 상류계급의 군인들로 구성된 Augustiani를 두어 그가 극장에 나타날 때 박수를 보내도록 했는데, 이러한 황제에 대한 환호에 사용된 단어는 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네로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돌아 왔을 때 군중은 “네로. 우리의 아폴로 신이여. 태초로부터 계신 유일하신 분, 신의 승리여. 당신의 말을 듣는 이들은 복이 있으라”고 외쳤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네로는 신으로 불리어지고 숭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계 13:4와 12절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계13:15와 14:3에 의하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만 경배하는 사람도 있다. 계시록의 수신자들은 네로를 신으로 섬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지 사생결단해야 했다.

 

Roman SILVER DENARIUS NERO JVPITER CVSTOS 54-68 AD

*진품이 아닌 것으로 보여 반품 후 환불 처리함- 아래 흑백

 

Roman SILVER DENARIUS NERO JVPITER CVSTOS 54-68 AD

Obv: NERO CAESAR AUGUSTUS - Laureate Bust of Nero right

Rev: IVPPITER GVSTOS - Juppiter

Size: 17.5~18.5mm Weight: 2.9g

2017.10.28 ancientground

 

 

Roman Coin struck AD 65 Emperor Nero. 54-68 AD

*위조된 동전으로 보임

 

Nero. 54~68 AD

Obv: IMP NERO CAESAR AVGVSTVS. Laureate Bust of Nero right

Rev: VESTA. Six columns Temple of Vesta, statue inside

Size: 17.3~17.9mm Weight: 2.62gr

2017.10. 9 svetche

 

 

 

 

네로(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68년, 재위 54년 - 68년)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칭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이자 양자이며 칼리굴라의 외조카가 된다.

흔히 네로 황제라고 하면 정신 이상자나 폭군을 연상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문화는 융성하였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를 대학살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

 

재위 이전

 

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모친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의 출생 당시 마 제국은 외삼촌인 칼리굴라의 집권기였으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서기 49년 모친인 아그리피나가 숙부(네로의 외종조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미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이미 후계자로 정하였는데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클라우디우스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설득한 끝에 네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언제 또 황제의 마음이 바뀔지 불안하게 되자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근위대를 동원하여 17세 소년 네로를 로마제국 제 5대 황제에 즉위시켰다

재위 시기

네로는 서기 54년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세 살 차이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집권 전반기 그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마의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라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아그라피나의 욕망은 끝이 없어 정치적 간섭과 섭정이 지속되자, 간섭과 등살에 견디다 못한 네로는 세네카와 브루투스의 협력을 얻어 어머니로부터 독립했다. 좌절한 아그리피나는 '네가 정 이러면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만들겠다'고 악담을 퍼부었다. 이에 분노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해 제거하였고, 59년에는 그의 모친 아그리피나도 살해하고 만다, 또한 네로는 친구오토의 처 폽파이아에 푹 빠져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폽파이아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62년에는 전 아내 옥타비아도 살해하였다.

 

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기독교도를 대학살함으로써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었다.65년에는 정치 스승인 세네카에 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에는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죽음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네로는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의 별장으로 도망쳤고 군사들이 계속 추격하였다. 측근들은 네로에게 자결을 권하자, "내가 죽고 나면 예술가는 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라고 원망했다 한다

바야흐로 별장으로 밀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네로는 결심한 듯 호메로스의 시구를 읊었다.

"빠르게 달리는 군마의 발굽소리가 내 귀를 때리도다." 그는 자신의 칼로 목을 찔렀다. 이때 네로의 나이 31세였다.

로마제국!!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해 온 절대적 강대국이었던 반면, 도덕적으로는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여자를 둘러 싼 갖은 음해와 정치적 권모술수가 횡횅했던 타락한 제국의 본보기이기도 했다.

 

젊은 황제 네로와 그의 모친 아그리피나(Agrippina)가 세겨진 금화

 

 

네로(Nero)는 로마제국의 제 5대 황제(서기 37년 ~ 서기 68년)로 로마를 폭정하에 혼란시키며 크리스트 교도를 박해했다.

 

자기 자신이 여장하여 해방노예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신부가 되기도 하고 거세시킨 미소년을 여장시켜 자기 정실(황후)로 맞이하기도 했다.

 

55년 로마제국 제 4대 황제의 아들 부리타니쿠스(Britannicus)의 살해,

59년 자신의 모친 아그리피타의 독살,

62년 첫 번째 아내 오크타비아의 죽음,

64년 로마의 대화재의 범인으로 크리스트 교도 박해 등으로 후세로부터 폭군으로 불렸다.

 

황제 네로(Nero)와 그의 아내 포파에 사비나(Poppaea Sabina, 서기 30년 ~ 서기 65년)

 

그녀는 로마제국의 제 7대 황제 오토(Otho)의 아내이자, 로마제국 제 5대 황제 네로(Nero)의 두 번째 아내.

 

네로는 첫 번째 아내 오크타비아와 이혼,그리고 그녀는 이해 6월 불륜 죄로 죽음을 당해야 했다.

 

네로는 이전부터 눈에 찍어 두었던 유부녀 포파에 사비나(Poppaea Sabina)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는 네로의 절친한 친구 오토(Otho)의 아내였으나 강제로 부부를 이혼하게 한 뒤에 오토는 루시타니아(Lusitania) 총동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사족(蛇足):

제정 로마시대의 역사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 서기 55년경 ~ 120년 무렵)는

그녀에 대해 “야심적인 여성이며 비정한 여성이었다”고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아내로서의 평판도 좋지 못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은화에 세겨진 황제 오토(Otho)

 

 

 

 

로마제국의 일곱 번째 황제로 취임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 서기 32년 ~ 서기 69년)는

제위기간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폭군 네로황제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젊었을 무렵부터 놀이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남색관계로 알려져 있다.

 

 

고대사에서 “명장 5일” 가운데 한 사람에 속하는 한니발이 활약한 시대의 지중해와 로마지도


Gallery

- Roman Emperors Gold Coin -

 

 

 

Julius Caesar

 

 

Gaius Octavius  “Augustus” (September 23, 63 B.C.)

 

 

Imperator Tiberius Caesar Autustus(42 B.B. ~ A.D. 37)

 

 

Caligula  “Little Boots” (August 31, A.D. 12 ~ A.D. 41)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10 B.C. ~ 54 A.D.)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Emperor Galba (December 24, 3 B.C.)

 

 

Marcus Salvius Otho (28 April A.D. 32 ~ 16 April A.D. 69)

 

 

Vitellius (September A.D. 15)

 

 

Imperator Titus Caesar Vespasianus Augutus

 

 

Vespasian

 

 

Domitian


카이사르 암살기념' 2000년 된 로마 금화, 무려 48억원에 낙찰

 

2000년이나 된 극히 희귀한 로마제국의 금화 한 닢이 경매에 나와 우리 돈으로 무려 48억원이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낙찰됐다.

지난 30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 등 해외언론은 기원전 42년에 제작된 금화가 29일 런던에서 열린 경매에서 수수료 등을 포함 총 324만 파운드에 팔렸다고 보도했다.

역대 최고가 금화 중 하나로 기록된 이 금화는 카이사르의 암살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영어로 줄리어스 시저라 불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는 로마 제국 천년사의 최고의 영웅으로 이후 유럽에서는 카이사르라는 이름 자체가 황제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기원전 44년 자객들에게 암살당했을 때 그의 직책은 종신 독재관이었다.

이번에 낙찰된 금화는 카이사르의 사망 2년 후 암살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발행한 것이다. 당시 그는 카이사르 암살의 대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금화와 은화를 주조했는데 이 금화의 앞면에는 브루투스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또한 뒷면에는 두 개의 단검과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3월 15일을 뜻하는 ‘EID MAR’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발행된 금화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단 3개로, 이중 유럽의 한 수집자가 소장했던 것이 이번에 낙찰됐으며 새주인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경매를 주관한 로마 누미스메틱스 마크 살츠버그 대표는 "이 금화가 기록적인 가격에 팔린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면서 "예술성과 희귀성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도 담고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EID MAR이 새겨진 동전은 약 100개 남아있지만 대부분은 은화”라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