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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로물루스 - 로마

by 은총가득 2020. 10. 2.

로물루스의

  팔라티노 언덕의 부락에서 세계의 수도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기 753년 전의 일이다. 로물루스는 그를 따라온 무리들과 함께 테베레 강이 굽어보이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 조그만 부락을 세웠는데, 이들의 자손은 나중에 북유럽을 제외한 전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중동지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현재 팔라티노 언덕에는 ‘로물루스의 집(Casa di Romolo)’이라는 팻말을 붙인 움막터가 있다. 그런데 로물루스의 족보를 따지고 보면, 그는 이탈리아 본토 사람이 아닌 이른바 도래인(到來人)의 후손이다. 그의 족보는 트로이아 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가 탄생한 팔라티노 언덕

트로이아 전쟁의 난민 아이네아스의 후손들

기원전 1150년경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해가자, 분개한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아 정벌에 나섰다. 이후 10년 동안이나 트로이아 성을 공격을 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마침내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특공대 기습작전을 구상했다. 우선 그는 그리스군이 전쟁에 싫증이 나서 퇴각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후, 해변에 거대한 목마를 남겨놓고 그리스로 되돌아가는 척했다. 그러자 트로이아 사람들은 적군이 물러난 줄 알고 승리의 기쁨에 빠졌다. 그러고는 거대한 목마를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 제물로 여기고 성 안으로 들여놓았다. 트로이아의 제사장 라오콘은 적의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목마가 성 안에 옮겨진 날 밤, 트로이아 사람들은 술에 취해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때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특공대가 몰래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물러나는 척했던 그리스군이 다시 상륙하여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난공불락의 트로이아 성은 어이없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와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데리고 탈출하는 아이네아스를 묘사한 고대 조각

 

불타는 트로이아를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 중, 미(美)의 여신 베누스와 인간 안키세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네아스(Aeneas)가 있는데, 기원전 1세기의 문호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아스의 일대기에 의하면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아이네아스는 베누스 여신의 보호 아래 늙은 아버지를 업고 어린 아들과 일행을 데리고 불타는 트로이아를 몰래 빠져 나와 지중해로 방랑의 길에 올랐다. 그가 시칠리아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죽어버렸고,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려 했으나 배가 풍랑을 만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해변으로 밀려가고 말았다.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는 아이네아스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런데 아이네아스와 디도 여왕이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자 이를 보다 못한 유피테르 신은 아이네아스에게 이탈리아 반도로 떠나라고 명했다. 아이네아스는 아쉬움을 남기고 카르타고를 몰래 떠나는데, 이를 알게 된 디도 여왕은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카르타고는 기원전 800년대 중반에 세워졌기 때문에 디도 여왕은 아이네아스와 같은 시대가 아닌 적어도 300년 후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와 디도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숙명적인 대립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리고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굳이 등장시킨 것은 로마인들이 조상 숭배를 매우 중요시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이후 아이네아스는 라틴족이 사는 라티움(Latium)의 서해안에 도착했다. 라티움은 이탈리아어로는 라찌오(Lazio)라고 하는데 한반도로 치면 경기도쯤 된다. 아이네아스는 라틴 왕의 딸 라비니아 공주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 이름을 공주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Lavinium)이라고 지었으며 그가 데려온 트로이아 사람들과 라티움의 원주민들을 함께 통치했다. 그 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Ascanius)는 알바 산 기슭에 알바 롱가(Alba Long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라티움의 수도로 삼았다.

 

쌍둥이 형제를 젖먹여 키운 늑대

대략 200년이 지난 후 아스카니우스의 후손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 형제가 라티움을 공동으로 통치했는데, 아물리우스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형 누미토르를 쫓아내고 그의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Vesta) 여신의 성화(聖火)를 지키는 처녀제관으로 만들어버렸다. 처녀제관은 몸을 항상 정결하게 해야 하는데 만약 불을 꺼뜨리거나 처녀성을 잃는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어느 여름날 강가에서 레아 실비아는 잠이 들었다. 바로 그때 전쟁의 신 마르스가 이곳을 지나다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그만 그녀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레아 실비아는 쌍둥이를 낳게 되는데, 이 사실을 안 아물리우스 왕은 크게 노하여 아기들을 조그만 뗏목에 실어 강에 띄워 버리도록 했다. 그런데 뗏목이 팔라티노 언덕 근처 강변의 무화과 나뭇가지에 걸려 멈추었다. 이때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늑대가 이들을 발견하고 젖을 먹여 키웠고, 다시 파우스툴루스라는 양치기가 이들을 발견하고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암늑대는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

 

 

마를 상징하는 암늑대상

쌍둥이 형제는 양치기로부터 각각 로물루스(Romulus), 레무스(Remus)란 이름을 얻었고, 성장한 다음 자신들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알바 롱가로 가서 아물리우스 왕을 처단하고 늙은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를 왕위에 세웠다. 그러고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났다.

 

 

루벤스의 작품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발견〉(1617년, 캄피돌리오 미술관)

숲속에서 군신 마르스와 레아 실비아가 관계를 맺는 장면과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늑대 젖을 빠는 장면과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쌍둥이 형제를 발견하는 장면이 모두 한 화면에 표현되어 있다.

 

고대인들의 도시 건설 의식

로마가 건국되기 전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는 에트루리아라는 엄청난 선진국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를 세울 때 까다롭고 복잡한 에트루리아의 도시 건설 의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 의식은 대부분 주술적이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과학적인 근거도 있었다. 먼저 신관은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동서남북의 땅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확실히 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늘을 관찰하는데,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신의 뜻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에 일정 기간 동안 양을 방목했다. 그러고 나서 양을 제물로 바치면서 양의 간의 상태를 보고 기(氣)가 있는 땅인지를 판정했다. 그리고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이용해 도읍의 경계선을 판 다음에야 비로소 집과 성곽을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로마인들이 다른 곳에서 식민도시를 건설할 때도 수세기 동안 그대로 적용되었다. 특히 기원전 1세기에 『건축론(De Architectura)』을 저술하여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친 비트루비우스는 새로운 도시나 요새를 건설할 때, 양의 간을 점검하는 의식을 절대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간의 상태가 좋다는 것은 그곳의 초목이 좋다는 뜻이고, 초목이 좋다는 것은 주변 환경이 좋다는 뜻이 아닐까?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가 자신들을 발견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언덕이 두 개 있고, 그 사이로 테베레 강으로 흐르는 냇물이 있었다. 이 두 언덕의 이름이 이탈리아어로 팔라티노(Palatino), 아벤티노(Aventino)이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을 새로운 도읍지로 선호했다. 형제간에 뜻이 맞지 않자 그들은 이 두 언덕에서 각각 새를 더 많이 보는 자의 뜻에 따라 도읍지를 정하기로 했는데,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새를 더 많이 봤다. 새는 신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새를 더 많이 봤다는 것은 유피테르 신의 뜻이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로물루스는 양치기들의 수호 여신인 팔레스(Pales)의 축제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열리는 4월 21일을 로마의 건국일로 잡고, 이 도읍지의 이름은 자기 이름을 따서 로마(Roma)로 정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 소가 끄는 쟁기로 직선으로 고랑을 파고 성곽을 쌓았다. 고랑을 파고 성곽을 쌓은 곳의 안쪽은 성역(聖域)이란 뜻이다. 그런데 동생 레무스는 이를 무시하고 로물루스가 쌓은 성벽을 발로 걷어차고 경계선을 넘었다. 그러자 로물루스는 신성한 구역을 무단으로 침입한 동생을 죽이고 만다.

 

 

 

도시 건설 의식을 묘사한 고대의 부조

왕은 두 마리의 소가 이끄는 쟁기로 직선의 고랑을 파서 도시의 영역을 확정했다.

확정된 영역의 경계선을 포메리움(pomerium)이라고 하는데 포메리움은 단순히 정치적 · 군사적 경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포메리움 안쪽은 성역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어떤 일은 금지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철저히 금지된 것은 포메리움 영역 안에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이었다. 죽은 영혼이 사람이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것을 불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실제로는 위생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포메리움의 개념은 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서 갓 태어난 로마는 주변의 땅을 조금씩 차지해나갔으며 아울러 로마의 포메리움도 넓어졌다. 이렇게 해서 넓혀진 영역을 우릅스(Urbs)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결국 로마를 지칭하게 됐고, 나중에 ‘도시’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참고로 영어에서 ‘도시의’라는 뜻의 urban이란 단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로물루스의 집

로마 건국에 관한 전설은 앞서 얘기한 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25~30개 정도는 그리스 사람들이 쓴 것인데, 공식적인 로마 건국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부 그리스인들은 아이네아스를 로마 창건의 시조로 묘사하기도 한다. 사실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고, 로마 가까이 있는 베이이(Veii)나 라비니움(Lavinium)과 같은 남부 에트루리아 도시에서는 아이네아스 숭배의식도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웃 도시의 ‘인기 있는 인물’을 들여오면서, 그들의 조상 로물루스를 아이네아스의 후손으로 살짝 접목시킨 것으로 보인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관한 이야기가 로마 지역에 국한된 전설이든지 아니면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이든지 간에 로마 역사의 첫 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굳어져 있다. 사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독일 학자들과 일부 유명한 이탈리아 학자들은 기존에 쓰인 로마 초기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왕정 시대와 관련된 전설뿐 아니라 심지어 로마공화정 시대의 역사까지도 무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 40~50년 사이 상황은 바뀌고 있다. 전설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줄 만한 유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로마의 남서쪽에는 아이네아스의 이야기와 관련된 리도 디 에네아(Lido di Enea, 아이네아스의 해변.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이네아스를 간단히 ‘에네아’라고 한다)와 라비니오(Lavinio)라는 조그만 휴양도시가 있긴 하지만, 전설에 등장하는 라비니움은 내륙 쪽에 있는 프라티카 델 마레(Pratica del Mare)라는 곳으로 밝혀졌다.

또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 밑에서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묻혔다고 추정되는 철기 시대의 주거 유적지가 세 군데 발굴되었다. 이것은 움막집을 떠받치고 있던 돌 기초인데, 크기는 각각 4미터×2.5미터 정도가 된다. 그 주변에서는 로마의 건국 전설에서 언급된 고랑과 성곽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에 의해 기원전 8세기 중반 경에 이곳에 조그만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는데, 이것은 로마의 건국 연대인 기원전 753년과 거의 일치한다. 이 부락에 로물루스라는 사람이 살았고, 또 이곳을 로마로 불렀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그렇지만 이곳은 당시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 있었던 여러 부락 가운데 하나였고, 또 이곳을 중심으로 로마가 생성되고 발전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된 로물루스의 집터

옛날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들보다 고대의 사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수긍하면 전설이란 허무맹랑한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팔라티노 언덕의 움막터를 ‘로물루스의 집(Casa di Romolo)’이라고 부르고 있다. ‘로물루스의 집’이라는 말 속에는 로물루스가 전설의 인물이 아닌, 실재의 인물로 판명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포룸 로마늄

‘공개토론회’라는 뜻으로 쓰이는 영어 ‘포럼(Forum)’은 따지고 보면 로마의 특정한 장소에서 유래된 말이다. 먼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화가 쟈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비니 여인들(Les Sabines)〉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한번 보자. 그림을 보면 어떤 여인들은 서로 싸우려고 대치한 두 군대 사이에 서서 싸움을 말리고 있고, 또 어떤 여인들은 아기를 번쩍 들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로마 최고의 번화가였던 포룸 로마눔 유적

팔라티노 언덕 위에 ‘로마’라고 하는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는 인구가 너무 적은 것이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캄피돌리오 언덕 위에 아실룸(Asylum)이라는 성역을 만들어 외부에서 피신해온 도망자들이나 범죄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인구를 늘리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로물루스의 추종자들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기가 막힌 묘수를 생각해냈다.

 

로물루스는 축제를 열어 로마 주변에 사는 사비니 부족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여동생이나 딸들을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가 베푼 축제에 자기 백성을 데리고 참석했다. 축제가 절정에 이를 때쯤 사비니 사람들은 술에 완전히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바로 이때 로물루스의 ‘작전’대로 로마의 장정들은 사비니 여인들을 모조리 납치해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사비니 남자들은 모두 쫓겨나고, 납치된 사비니 여인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로마 장정들에게 강제로 ‘집단 결혼’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사비니 남자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납치된 여인들을 구하러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군과 사비니군이 일전을 벌이려고 서로 대치하자, 이미 로마 장정들의 아내가 되어 자식까지 낳은 사비니 여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왜냐하면 로마군이 지게 되면 과부가 되고, 사비니군이 지게 되면 고아가 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로마군과 사비니군 사이에 뛰어들어 태어난 아기들을 번쩍 들고 싸움을 말렸다. 로마군과 사비니군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손을 잡고 평화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쟈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사비니 여인들〉(1799년, 루브르 박물관)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사비니인들이 민족적 자존심을 조장하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캄피돌리오 언덕의 아실룸 이야기는 타민족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사실이고, 따라서 로마인들은 관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또 사비니 왕 타티우스도 전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실존했던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공화정 때는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통치했는데, 왜 집정관이 둘이었는지를 암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결합만큼은 기정사실이다. 이리하여 로마는 다민족 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며, 적당한 인구를 확보한 다음부터는 팔라티노 언덕의 조그만 부락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나라로 서서히 떠오르게 되었다.

 

 

무질서한 부락에서 세련된 도시로

납치당한 여인들을 구하러온 사비니군과 로마군이 대치했던 곳은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그리고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이 서로 마주치는 습한 저지대였는데, 이 주변은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인 기원전 9세기부터 주변 언덕에 살던 사람들의 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곳을 흙으로 메워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고 ‘바깥에 있는 곳’이란 뜻의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종교행사를 함께 치르기에 매우 이상적인 장소였다.

 

 

로마는 건국된 후 약 250년 동안 로물루스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전설적인 왕들이 다스렸는데, 3대 왕까지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였으나 4대 왕부터 7대 왕까지는 에트루리아계였다. 당시 최고의 선진국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처럼 무질서한 부락이 아니라 방어용 성벽과 포장도로와 하수도망도 갖춘 그야말로 당시의 기준으로는 ‘초현대식 계획도시’였다.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Tarquinius Priscus)가 통치하는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도시다운 도시로 발전하게 되고 그들의 앞선 기술과 문화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습득하여 짧은 시간 안에 ‘촌놈’에서 ‘세련된 신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선진국 에트루리아를 압도할 수 있는 힘도 갖추게 되었다.

 

국가 경제라고는 농사밖에 모르던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제5대 왕은 기원전 616년부터 장장 38년 동안 집권하면서 에트루리아에서 건축가, 공학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도로와 배수시설과 같은 도시의 인프라를 먼저 구축하고 움막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던 달동네 같은 로마를 정돈된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특히 그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이 고이고 테베레 강이 넘치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리는 포룸에 배수시설과 하수시설을 구축하고 돌로 포장하여 널찍한 시장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건설의 시초가 된다. 포룸 로마눔은 이탈리아어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하는데, ‘로마 공회장(公會場)’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남쪽에서 캄피돌리오 언덕 쪽으로 본 포룸 로마눔 유적

포룸 로마눔은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히 열린 시장터가 아니라 도심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기원전 534~510년)는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라고 하는 커다란 하수도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와 폭이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한 대 지날 수 있을 정도였으며,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후 공공건물, 이어서 상점과 신전들이 이곳에 세워지면서 로마 중심가로서의 면모가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는 날씨가 나쁠 때를 대비하여 옥외 공간의 기능을 일부 흡수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다목적 공공건물 바실리카(basilica)가 군데군데 세워졌다. 그리하여 포룸 로마눔은 로마의 종교, 경제, 정치, 행정, 사법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중심가가 되었다.

 

 

로마 최고의 번화가

오늘날 대도시의 중심가처럼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포룸 로마눔은 한마디로 소통의 장(場)이었다. 이곳에서 정치인은 장외연설을 했고, 법관은 법을 집행했으며, 사제는 종교행사에 전념했고, 시민들은 ‘쇼핑’을 즐기기도 했으며, 또 정가에 떠도는 소문, 새로 제정된 법이나 전투 현황 등에 귀 기울이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문제를 주제로 공개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종종 시민들을 위한 축제가 밤늦게까지 열기기도 했는데, 특히 시민들의 눈길을 많이 끌었던 것은 개선행렬, 장례행렬, 종교행렬 등이었다. 이 행렬들은 포룸 로마눔 안에서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길 비아 사크라(Via Sacra, 신성한 길)를 따라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 위를 향해 지나갔다.

 

 

 

모형으로 본 로마제국 시대 후기의 포룸 로마눔의 모습

공화정 말기 로마의 인구는 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로마를 찾는 외국인들도 수없이 많았는데, 이들은 이 포룸을 보고 로마의 위대함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국력이 점점 커져가자 기존의 시설만으로는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포룸 율리움을 따로 세웠고,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후세의 황제들도 포룸 로마눔 동쪽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포룸을 따로 건설했다.

로마의 중심지에 새로운 포룸들이 계속 만들어지자 포룸 로마눔의 기능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 문화, 종교기능이 새로 세워진 포룸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기 80년 콜로세움이 완공된 다음부터는 포룸 로마눔에서 이루어지던 행사도 급격히 줄어들어서,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수용하는 도시 공간으로서 별로 사용되는 일이 없었다. 그 후 이곳은 주로 역사적인 일을 기념하는 곳으로만 사용되었다. 후세의 황제들은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념비들을 포룸 로마눔 안에 세우게 했다. 그래서 이미 중요한 건물들이 꽉 들어찬 이곳에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티투스 개선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황비 파우스티나 신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등이 기존 건물들 사이의 비좁은 틈이나 포룸 로마눔 변방에 세워졌다. 그리고 서기 608년에는 포룸 로마눔에 마침표를 찍듯이 동로마제국 황제 포카스를 기념하는 원기둥이 마지막으로 세워졌다. 물론 이때는 포룸 로마눔의 기능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지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대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영화 〈벤허〉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차경기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런 전차경기가 열리던 곳이 바로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이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란 문자 그대로 ‘최대의 경기장’이란 뜻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치르코 맛시모(Circo Massimo)라고 부른다. 같은 경기장이라도 고대 로마인들은 스피나(spina, 등뼈 즉 중앙분리대)가 있어서 그 주위로 마차가 회전할 수 있으면 키르쿠스(circus)라고 했고 중앙분리대가 없으면 스타디움(stadium)이라 불렀다.

 

팔라티노 언덕(왼쪽)과 아벤티노 언덕(오른쪽) 사이에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흔적

 

로물루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울 당시,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의 골짜기는 늪지대였다. 로물루스는 바로 이 늪지대 언저리의 평지에서 ‘콘수알리아’라는 축제를 벌였는데, 그 행사 중에는 말달리기 경주가 있었다. 로물루스는 바로 이 축제에 사비니인들을 초대해놓고 그 여인들을 납치했던 것이다. 콘수알리아는 콘수스 신에게 바치는 일종의 추수감사축제로, 콘수스는 곡식의 신이자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의 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엔의 세계식량기구(FAO)가 바로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듯싶다.

 

 

유엔의 세계식량기구(FAO) 본부에서 내려다 본 키르쿠스 막시무스 터

에트루리아계의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이 골짜기에 배수공사를 하여 테베레 강으로 물을 뽑아내고 경기장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키르쿠스 막시무스 건설의 시초가 된다. 그는 원로원과 기사계급에 한해 말달리기 경주가 잘 보이게끔 나무로 된 계단을 경기장 주변에 높이 쌓을 수 있도록 했으니, 이때 ‘관중석’의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셈이다. 그 후 제7대 왕은 평민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여 관중석을 더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전차경기장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29년 목조로 된 카르케레스(carceres)가 북쪽면에 세워지고 나서부터이다. 경주에 참가하는 마차들은 바로 이 카르케레스에서 출발했다. 그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경기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0년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 가져온 높이 23.7미터나 되는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를 중앙분리대 위에 세웠다.

 

이 경기장은 로마제국 번영기에 그 규모가 더 확장되어, 길이와 폭이 각각 600미터, 200미터가 넘었으며, 자그마치 30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38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웬만한 도시의 인구를 한꺼번에 모두 수용할 수 있었던 엄청난 규모였음에는 틀림없다.

 

빵과 키르쿠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이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이나 음식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점성술소와 매음굴까지 있었다. 한편 경기장 주변에 형성된 커다란 시장에는 불에 타기 쉬운 물질도 많았기 때문에 항상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기 64년 네로가 재위할 때, 바로 이곳에서 발생한 화재기 삽시간에 전 시가지로 번져 로마를 초토화하고 말았다. 경기장도 이 화재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본 것으로 추측되는데, 네로 황제가 그리스에서 1년 동안 체류하고 서기 68년 로마로 돌아왔을 때 다시 사용했다고 하니,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복구했음을 알 수 있다.

황제들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애지중지했는데, 민심을 잡을 수 있는 곳이자 국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2세기 초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빵과 키르쿠스(Panis et Circus)”라는 표현으로 이를 꼬집었는데, 오늘날도 국민들을 축구와 같은 스포츠에 열광하게 하여 국정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나라가 적지 않으니 지금이라고 옛날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셈이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9월 4일에서 18일까지 열리던 로마 대제전(Ludi romani)을 비롯한 각종 행사들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트랙을 일곱 번 빨리 도는 경주가 많이 열렸는데 특히 로마 대제전 기간 동안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의 아우리가(auriga, 전차경기 선수)들은 오늘날의 자동차경주 선수나 축구 선수처럼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돈도 엄청나게 벌었다. 특히 4세기에는 전차경기의 인기가 엄청나서 참가팀을 백색, 홍색, 녹색, 청색 네 개로 제한했고, 관중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나 돈을 건 팀을 열렬히 응원했다고 한다.

 

 

 

공터로 남아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터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549년에 동고트의 왕 토틸라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이후로는 황폐의 길로 접어들고 현재는 당시의 웅장했던 관중석의 구조물이 남쪽에 조금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로마 시민들은 이곳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거나 조깅을 하거나 공을 차곤 한다. 그리고 로마 시 축구팀이 우승하는 날이면 수십만의 열광적인 축구 팬들이 이곳에 모여 온 시가지가 떠나갈 듯이 경적을 울리며 밤이 깊도록 광란의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모형

 

베스타 신전

로마의 중심 베네치아 광장에는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거대한 하얀 대리석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이탈리아가 1870년에 통일되고 50년이 지난 다음, 통일의 구심점이 되었던 초대 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정된 기념관으로 한마디로 말해 ‘이탈리아 통일기념관’이다. 계단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산화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 ‘조국의 제단’이 있고 그 앞에는 두 명의 보초가 부동자세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지키고 있다. 이 성화의 기원은 까마득한 옛날 베스타 숭배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스타는 ‘처녀신’으로 고대 로마인들이 섬기던 최고의 12신 가운데 하나였다.

 

 

 

로마의 성화를 보존하던 베스타 신전 유적

베스타 여신 숭배를 공식화 한 누마 왕

로물루스가 사라진 후, 원로원에 의해 제2대 왕으로 추대된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는 라틴족이 아닌 사비니족 출신으로 철학자라고 불릴 정도로 교양과 덕망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43년 동안 평화롭게 로마를 다스렸는데, 그의 업적은 앞으로 계속 발전하게 될 로마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대제사장 집무실 레기아 옆에 로마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상징하는 성화를 모실 베스타 신전을 세우고 이 성화를 지키는 처녀제관을 임명했다고 한다. 베스타는 원래 각 집마다 있는 아궁이를 지키는 여신인데 누마 왕은 베스타 여신 숭배를 국가 차원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베스타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성화 외에도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아로부터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미네르바 여신의 신상을 비롯한 여러 성물(聖物)이 모셔져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주인공인 베스타 여신의 신상만은 없었다. 그것은 베스타 여신의 모습 그 자체가 바로 ‘불’이기 때문이었다. 불은 만물의 근원을 의미한다.

 

 

 

조국의 제단을 밝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한편 베스타 신전의 제관들을 모두 처녀들로만 구성되었다.(그러고 보니 로마 전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베스타 처녀제관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어머니인 레아 실비아인 셈이다.) 처녀제관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여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소녀들로 30년 동안 순결을 지키며 베스타 여신 숭배의식을 집전했으며 성화를 목숨 걸고 지켰다. 처녀제관 선발은 대제사장에 의해 최종결정이 내려졌는데, 초기에는 귀족가문에서만 선발되다가 나중에는 평민 출신에게도 자격이 주어졌다. 이렇게 엄선된 처녀제관은 매우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라로부터 막대한 급여를 받았으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도 누렸다. 일례로 공공행사장에서는 최상석에 앉을 특권이 있었으며, 공화정 시대에는 외출할 때 릭토르(lictor)라고 하는 길라잡이의 호위를 받았는데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도 길을 비켜주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만약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가다가 처녀제관과 조금이라도 마주치기만 하면 즉시 사면될 수도 있었다. 반면에 그들을 조금이라도 유혹하는 남자는 가차 없이 사형이었다. 처녀제관이 만약 성화를 꺼트리거나 순결을 잃는 경우 이에 대한 벌은 성 밖 퀴리날레 언덕 위 ‘악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곳에 생매장 당하는 것이었다.

 

베스타 신전 유적은 현재 포룸 로마눔 안에 마치 둥근 케이크를 잘라낸 조각처럼 서 있다. 누마 왕이 세웠던 베스타 신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유적은 서기 19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황비 율리아 돔나가 복원한 것의 ‘파편’이다. 이 신전의 형태는 라틴인들이 거주하던 둥근 움막의 형태에서 유래하는데, 신전의 지붕은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후세에 세워진 거대한 신전 판테온을 보면 지붕 한가운데가 뚫려 있는데, 그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베스타 신전 바로 옆에는 처녀제관들이 단체로 거주하던 집, 그러니까 일종의 기숙사라고 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집은 중정을 중심으로 거실과 처녀제관들의 숙소, 관리인실 등이 배치되어 있었고, 위층에는 목욕실과 난방시설을 갖춘 개인용 방이 있었다. 또 부엌, 방앗간, 빵 굽는 화로 등 갖가지 시설의 흔적을 보면 처녀제관들은 이곳에서 자급자족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현재 남아 있는 베스타 처녀제관들의 집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새로 지어진 것이다.

 

 

 

포룸 로마눔 안에 있는 베스타 신전과 기숙시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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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타 신전과 기숙시설 모형

 

한편 중정에는 처녀제관들의 공덕을 기념하는 문구와 이름이 새겨진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름 첫 글자 C만 조금 남기고 모두 지워져 있는데, 클라우디아(Claudia)라고 하는 처녀제관의 것이라고 한다. 4세기말 기독교 시인 프루덴티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클라우디아가 처녀제관직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자 다른 처녀제관들은 그녀가 베스타 여신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베스타 처녀제관 클라우디아의 석상

이름이 있는 부분이 지워져 있다.

베스타 여신 숭배의식은 누마 왕 이래로 국가 차원에서 1000년 이상 지속되었지만 기독교라는 강렬한 ‘불길’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기 394년에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고, 아울러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도 재만 남기고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

 

그 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의 전통이 서양에서 다시 살아났다. 1500년 만에 처음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아래 놓인, 제1차 세계대전 때 산화한 무명용사의 무덤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자 로마에서도 이 전통을 되살려 1921년 무명용사의 무덤 앞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다시 타오르게 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아래에 있는 무명용사의 무덤에 놓여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한편 1961년 파리 무명용사의 무덤을 참배했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에 흉탄에 쓰러지자 영부인 재클린 여사의 요청으로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그의 묘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놓이게 되었다.

판테온

요약 원래는 평범한 고전적 신전으로 지붕을 씌운 4각형 평면의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118~12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완전히 재건했고 3세기초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때 부분적으로 개축되었다.
판테온은 그 규모, 구조 및 설계가 매우 특이하며 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는 가장 커서 지름이 약 43.3m이고 기단으로부터의 높이가 21.6m에 이른다.
건물의 본체는 구형 공간이 돔 중앙에 있는 지름 8.2m의 오쿨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만 채광되고 있으며 대리석으로 입혀져 있다. 천장의 4각형 정간은 세베루스 때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청동제 장미 장식과 몰딩으로 꾸며져 있다.

 

 

판테온(Pantheon)

고대 로마의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로마의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인 서기 125년경에 재건되었다.

 

ⓒ Arpingstone/wikipedia | CC BY-SA 3.0

원래는 평범한 고전적 신전으로 지어져 박공 지붕을 씌운 4각형 평면의 구조로, 4면에 콜로네이드[柱廊]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8~128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전히 재건되었고 3세기초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때 부분적으로 개축되었다.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을 덧댄 원형 평면의 건물로서, 벽 위에 거대한 콘크리트 돔을 올렸다. 세베루스나 카라칼라가 아그리파의 원래 건물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이는 코린트식 기둥의 정면 현관은 3각형 박공이 있는 경사 지붕을 받치고 있다. 현관 아래쪽에는 높이 7m의 거대한 청동문 2짝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대형문 중에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테온은 그 규모, 구조 및 설계가 매우 특이하다. 지름이 약 43.3m이고 기단으로부터의 높이가 21.6m에 이르는 돔은 근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는 가장 크다. 돔 안쪽을 받치는 벽돌 아치는 가장 아랫부분을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확인되지 않는데, 정확한 공사방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2가지 요소가 이 건물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 콘크리트에 쓰인 모르타르의 뛰어난 질, 세심한 골재 선택과 분류가 바로 그것인데 건물의 기초 부분과 벽의 아래쪽에는 무거운 현무암을, 그 위에는 벽돌과 응회암(화산회로 형성된 암석)을, 그리고 돔의 가운데 부분에는 부석 중에서도 가장 가벼운 것을 각각 사용했다. 그밖에도 밖에서 보았을 때 원통형 외벽 위쪽의 1/3 부분은 안에서 본 돔의 아래쪽 부분과 일치하며 내부의 벽돌 아치와 함께 추력(推力)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원통형 벽 자체는 벽 내부에 위아래로 연결된 벽돌 아치와 벽기둥으로 보강되며 두께는 6.1m에 달한다. 현관의 설계는 평범하나 건물의 본체는 혁명적인 것으로, 어마어마한 구형 공간이 돔 중앙에 있는 지름 8.2m의 '눈', 즉 오쿨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만 채광되고 있다. 이는 외부보다는 내부를 더 중요시한 고대의 몇몇 거대 건축물 중 최초의 예일 것이다.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알록달록한 대리석으로 입혀져 있다. 벽에 우묵한 곳이 모두 7군데 있는데 이 앞을 가리는 1쌍의 기둥은 그 수수해보이는 크기가 거대한 원형 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천장의 4각형 정간(井間)은 세베루스 때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청동제 장미 장식과 몰딩으로 꾸며져 있다.

 

판테온은 609년에 산타마리아로톤다, 또는 순교자 교회로 봉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장의 청동제 장미장식과 몰딩을 비롯한 청동 장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없으며 후기 르네상스에 스투코로 장식한 프리즈가 내부 돔 바로 아래에 덧붙여졌다. 이를 제외하면 건물은 아직도 원래 모습을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누마 폼필리우스

다른 표기 언어 Numa Pompilius

요약 로마 전설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 건립(BC 509경) 이전의 로마 7왕가운데 2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 Nicke L/wikipedia | Public Domain

그의 치세는 BC 715~673년이라고 한다. 누마는 종교제식에 따른 달력을 고안하고 베스타 신전의 처녀사제, 그리고 마르스, 주피터, 신격화한 로물루스(전설적인 로마의 건국자)에게 바치는 제식 등 초기 종교관습을 확립했으며,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신관) 직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 이런 발전은 수세기에 걸친 종교성장의 결과였다.

전설에 따르면 누마는 호전적이었던 로물루스와는 달리 평화를 사랑했는데, 1년간 왕이 없는 공백기간을 거친 뒤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와 피타고라스가 관계가 있다는 설은 이미 연대를 따져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로마 공화정 때부터 생각되어왔으며, BC 181년에 철학·종교법(최고 성직자에 관한 법) 관련 저서 14권이 발견되었지만 이는 위작임이 분명했다.

 

*7대왕- 건국자 로물루스에서 시작해 차례로 왕위를 이은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말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왕은 실존했던 인물이며 후반의 세 왕의 이름은 에트루리아 계통이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독재정치를 펴지 않았고, 이들의 치세에는 원로원의 권한이 강했던 것 같다. 이러한 왕정은 로마 귀족들에 의해 에트루리아인 왕이 추방당하면서 무너졌다. <ⓒ 21세기북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음>

글<정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