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대를 위한 요한복음의 메시지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로고스(Logos)라고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0?∼?)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변치 않는 진리를 '로고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변치 않는 진리, '로고스'를 빛과 생명이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라고 불렀습니다.
빛과 생명에 반대되는 개념은 흑암과 죽음입니다. 흑암과 죽음은 세상의 특징입니다. 세상은 자연의 법칙이 지배합니다. 자연의 법칙은 혼돈의 법칙이요, 죽음의 법칙이요,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마법의 굴레를 벗고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빛과 생명 되시며, 변화의 주체이면서도 자신은 변치 않는 '로고스'요,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변화'입니다. '변화'는 '회개'와 동의어입니다.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에서 던진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여기서 '천국'이란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말합니다. 이 천국은 또한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 '천국이 가까이 왔다'란 말은 '새 천년시대가 열렸다.' '교회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회개'한 사람들,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시대에 걸맞은 '변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를 주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를 강조하는 한 방법이 모형론(typology)입니다. 모세와 율법은 예수와 복음의 모형이며, 모세와 율법은 흑암과 죽음을, 예수와 복음은 빛과 생명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숫자로 표시한다면, 빛과 생명을 7이라고 할 때, 모세와 율법은 숫자 6으로, 예수와 복음은 숫자 8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숫자 6는 7-1이 되고, 8는 7+1이 됩니다. 그래서 숫자 6으로 표시되는 모세와 율법은 -1이 되고, 숫자 8로 표시되는 예수와 복음은 +1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은 더하기가 되는 살림의 일이 되고, 모세의 율법은 빼기가 되는 죽임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도 +표시에 숫자 1이 더해진 표식이 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기적이 표적이란 말로 일곱 개가 나오는데, 그 일곱 개의 표적이 한결같이 빛과 생명으로 상징되는 새 시대를 위한 변화를 강조할 뿐 아니라, 모세의 표적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새 시대를 위한 변화(요 2:1-11)
가나의 혼인잔치의 주제는 새 시대를 위한 변화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은 먼 옛날 모세가 물을 피로 변화시킨 것(출 7:14-24)의 원형입니다.
모세는 파괴적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고, 예수는 건설적이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모세와 예수의 삶의 방식의 차이, 율법과 복음적인 삶의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나타난 옛것의 상징은 '부족함'입니다. 요한복음 2장 3절의 "포도주가 모란다"는 말씀에서와 같이 혼인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식사전후에 손발을 씻는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을 담았던 돌 항아리도 '부족함'을 상징하는 숫자 6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는 옛것과 세상 것에는 인간을 복되게 하거나 참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율법으로 상징되는 옛것은 인간을 구원하기에는 참으로 역부족입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믿음과 중생(요 4:46-54)
요한복음 4장 46-54절은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죽을병에서 고친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출애굽기 9장 1-9절에서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모든 가축에게 심한 악질이 돌게 하여 다 죽게 만든 것의 원형입니다.
이 두 개의 표적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먼저 공통점은 주인이 직접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소유물인 가축이나 아들에게 재앙이 내린 데 있습니다. 둘째, 이 두 표적의 차이점은 '죽임'과 '살림'에 있습니다. 옛 시대의 상징인 모세가 일으킨 기적은 '죽임'이었고, 새 시대의 상징인 예수가 일으킨 기적은 '살림'이었습니다. 구약시대를 시작한 모세는 살아있던 가축을 죽게 하여 남에게 피해를 끼쳤고, 신약시대를 시작한 예수는 죽어 가던 신하의 아들을 살려내어 남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 두 번째 표적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믿음'과 '회생'입니다. '믿었다'는 말과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과 '회생'의 주제는 이 사건에 앞서 나오는 존경받는 유대인의 관원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자 바닥인생을 살고 있던 한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변화를 강조하는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이 소개되자마자, 제3장에서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만남이 소개되었고, 제4장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인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만남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역시 이방인을 대표하는 헤롯 안디바의 신하와 예수와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이들 세 사람과의 만남의 사건에서 발견되는 주제어는 '믿음'과 '거듭난 생명'입니다. 예수를 만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듯이, 예수를 만난 니고데모의 율법이 복음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세상에 대한 불신이 믿음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를 만난 왕의 신하의 아들의 죽음이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는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 이방인과의 만남에서 차별 없이 열려있는 새 시대를 강조하셨습니다. 남녀노소 민족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새 시대를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이 열린 시대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예수를 믿고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새 시대는 물이 포도주가 된 표적에서 나타났듯이 삶의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시대이며, 어둠이 빛이 되고, 무질서가 질서가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되고, 쓰러짐이 세워짐이 되고, 병듦이 고침이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는 회생과 생명이 넘치는 시대인 것입니다. 이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복음을 유대인인 니고데모에게 선포하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인 사마리아인 여인에게 선포하셨고, 이방인인 왕의 신하에게 선포하셨습니다.
3. 새 시대를 위한 복음적 사고(요 5:1-18)
옛 시대의 특징인 율법적 사고패턴과 행동패턴 그리고 새시대의 특징인 예수의 복음적 사고패턴과 행동패턴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곳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던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모세오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많은 환자들이 어쩌다 한번 끓어오르는 물에 먼저 뛰어들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주어지는 기회가 적었을 뿐 아니라, 그나마 기회도 먼저 뛰어든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은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곳입니다.
예수는 안식일 날에 이곳을 찾아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39가지 안식일 금지법을 만들어 일반인들의 손발을 묶어버린, 말 그대로 손가락하나 까닥할 수 없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이날 예수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 집에 보냄으로써 유대인의 안식일 법(하나님의 안식일 법이 아님)을 어겼을 뿐 아니라, 고침 받은 사람에게도 안식일 법을 어기도록 하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장으로 신성모독죄까지 추가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적 사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적 사고를 가지고서는 유대인들이 만든 안식일 법을 도저히 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재앙가운데 사람의 몸에 독종이 나게 한 표적(출 9:8-12)이 있습니다. 이 표적은 모세가 사람의 몸에 고통을 준 첫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모세의 이 재앙은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표적의 모형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치유가 예수께서 개인의 고통을 직접 고쳐준 첫 번째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적인 사고의 대표인 모세의 경우는 인간의 정상적인 육신을 병들게 만들었지만, 복음적인 사고의 대표인 예수의 경우에는 병든 육신을 고쳤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당신이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의존적 단계를 벗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38년 동안 전혀 의식전환 없이 살아왔습니다. 남이 나를 도와주기만을 바라고 38년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율법적 사고의 희생자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절)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는 가혹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율법과 전통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옛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력을 상실한 율법의 형식과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온 그들은 실로 이 환자를 38년 동안이나 질병의 고통에서 살도록 묶어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민중에게 보여주신 사고는 복음적이었습니다. 이 복음적 사고는 믿음의 사고, 유신론적 사고, 창조적 사고, 하면 된다는 사고, 할 수 있다는 사고, 살림의 사고, 열림의 사고, 영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적 사고에 반대되는 사고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들은 자연법칙만 믿고 행동하려는 사고, 무신론적 사고, 파괴적 사고, 해도 안 된다는 사고, 할 수 없다는 사고, 죽임의 사고, 닫힘의 사고, 세상적 사고들입니다.
예수께서 민중에게 보여주신 사고는 혁신적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보다는 '~하라'의 사고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보다는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의 사고였습니다. '원수를 갚으라.'보다는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의 사고였습니다. 부정적이고 외적인 율법의 형식에 치우치지 아니하시고, 긍정적이고 내적인 율법의 정신을 따라 생각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나 전통을 지켜가기 보다는 새로운 습관을 키우고 새로운 전통을 새우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민중에게 보여주신 사고는 살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기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따져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마 12:10). 그 때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되물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4. 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요 6:1-15)
오병이어의 표적은 모세가 메뚜기 재앙(출 10:1-20)을 베풀었던 표적의 원형입니다. 모세는 인간에게 엄청난 기근의 재앙을 내렸지만, 예수는 떡으로 민중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이 표적에서도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것이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생명'이 주제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이 표적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언어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요 6:40)이라고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민중을 먹이신 것은 오로지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임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기적이 있고 난 직후에 행한 설교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새 시대에 필요한 양식이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 새 시대를 위한 예수 영접(요 6:16-21)
요한복음에 실린 다섯 번째의 표적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입니다. 이 표적 또한 '믿음과 생명'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영접'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위기에서라도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이용해서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혹은 저편에서 이편으로 자주 이동을 했기 때문에 돌풍을 종종 만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런 폭풍 중에서 물위를 걸어와 목숨을 건져준 예수의 능력을 경험했을 것이고, 이런 특이한 경험이 후에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진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신학적 설명에서는 호수 이편이 떠나야할 옛 시대가 되고, 호수 저편이 꿈이 있고, 행복이 있는 새 시대가 됩니다. 이편인 옛 시대를 떠나 저편인 새 시대를 향해 가는 데에는 히브리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것처럼, 혹은 이집트에서 참혹한 노예의 삶을 보냈던 것처럼, 폭풍을 만나기도 하고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결코 폭풍에 좌절되거나 폭풍에 삼킨바되지 않고, 오히려 폭풍을 이기고 목표인 저편에 무사히 닿게됩니다.
옛 시대의 상징인 모세는 이집트에 뇌성과 우박의 재앙(출 9:13-35)을 내려 파괴를 초래하였지만, 새 시대의 상징인 예수는 폭풍을 진압하여 고요와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에게 자연재해를 가져다주었지만, 예수는 자연재해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새 시대를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6. 새 시대를 위한 세상의 빛(요 9:1-7)
요한복음 9장 1-7절에 나오는 여섯 번째 표적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예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후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게 하여 고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맹인의 눈을 고쳐서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게된 맹인은 예수를 "선지자"(9:17),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9:33)과 "주님"(9:38)으로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에 관한 말씀은 이미 1장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는 "사람들의 빛"(1:4)인데,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1:5)고 하였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빛을 볼 수 없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떠 볼 수 있게 되면 맹인처럼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9:33)과 "주님"(9:38)으로 고백할 수 있게됩니다. 맹인이 눈을 뜬 후에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예수를 '사람'(9:11)이라고 부르더니, 그 다음에는 '선지자'(9:17), 그 다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9:33),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님'(9:35-38)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삶에서 어두움이 걷히고 광명이 찾아왔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눈을 떴다고 생각했던 자들, 즉 바리새인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이야기 마지막에서 눈 먼 자들로 지적 당하고 맙니다. 이는 9장 39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한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치유이야기를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치유와 비교해보면, 몇 가지 비슷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이 두 장애인이 모두 안식일 날에 연못에서 고침을 받고 있고, 이 일로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납니다. 또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치유에서는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실로암 연못의 맹인치유에서는 "빛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두 개의 기적이 모두 세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눈먼 청년이 실로암의 물을 통해 그의 시력을 되찾았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의 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도, 즉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예수를 통해 참 빛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 실로암 물에 눈을 씻음으로 시력을 되찾은 맹인은 세례에 의해서 빛을 찾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빛 생명 진리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모세의 흑암재앙(출 10:21-29)과 예수의 맹인치유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2-23절에 보면,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었다."고 했는데, 결국 모세의 기적은 온 땅을 어둡게 만듦으로써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없게 만든 재앙이었지만, 예수의 기적은 어두움 속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사람을 고쳐서 볼 수 있게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7.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요 11:17-27; 39-44)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부활은 믿음과 새 생명에 관한 예수께서 행하신 설교의 총체적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죽은 예수를 살린 분으로, 예수를 죽은 나사로를 살린 분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를 우리 부활의 첫 열매로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죽임으로부터의 살림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죽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죽임과 영혼의 죽임까지도 포함하는 죽임으로부터의 살림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죽임뿐만 아니라, 작은 집단과 큰 사회를 망라한 타락과 병듦까지 다 포함하는 죽임으로부터의 살림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죽임은 아담의 범죄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죽임의 법칙인 현재의 자연법칙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죽임의 법칙이 없었습니다. 아담의 범죄이전에 어떤 자연법칙이 있었다해도 현재의 자연법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자연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으로써 생명에서 사망으로 가는 법칙입니다. 살림에서 죽임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건강에서 병듦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싱싱함에서 시듦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새것에서 헌것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사랑에서 미움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평화에서 전쟁으로 가는 법칙입니다.
부활은 이런 자연법칙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생명법칙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활이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예수재림의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말고 가만히 앉아서 그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죽임으로 상징되는 옛 시대의 자연법칙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상징되는 새 시대의 생명법칙에로 점진적으로 이루어가고 맛보고 경험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거듭난 새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새 삶은 예수재림의 때에 완성될 새 생명의 삶에 대한 약속이자, 지금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맛보아지고 경험되어지는 새로운 삶이요, 생명으로 가득한 삶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은 죄로 죽었던 자신의 영혼이 산 사람들이고, 미래에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새로운 육체로 태어날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큰복을 주신 것은 이제 더 이상 죽임의 일을 하지말고, 살림의 일을 하라고 한 것이요, 더 이상 죽음의 사슬에 얽매어 있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자유인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큰 복음을 전해서 그들도 예수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요, 자기 주변의 공동체나 사회가 병들지 않도록 힘쓰는 일이요, 혹 병들었다고 하면 고치는 일에 힘쓰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구와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임의 일은 마귀를 기쁘게 하는 일이요, 살림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지구가 환경파괴로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 있습니까? 이 중한 병을 고치고 살리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요, 진정한 부활사건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기적 가운데 열 번째가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출 11:1-12:30). 이 재앙은 아주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장자로 태어난 것은 다 죽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기적과 평행을 이룹니다. 모세의 재앙이 마지막 클라이맥스였듯이 예수의 기적도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죽음'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생명이 있던 곳에 죽음을 가져왔고, 기쁨이 있던 곳에 통곡을 가져왔지만, 예수는 죽음이 있던 곳에 생명을 가져다주었고, 슬픔이 있던 곳에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생명을 억압하고 생명을 죽이는 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종교가 참된 종교입니다. 예수는 생명을 억압하고 생명을 죽이는 옛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새 시대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 새 시대는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천국일 수도 있고, 우리 마음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또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고 거듭나야 합니다.
새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꿔야 합니다. 새 시대에 필요한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영접하여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환난과 흑암과 죽음으로부터 구원과 빛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복음은 살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자연법칙에 지배받지만, 복음은 생명법칙에 지배받습니다. 자연법칙은 죽이는 것이요, 생명법칙은 살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과 동물을 죽이는 재앙을 베풀었지만, 예수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을 억압하고 무거운 멍에를 메우고 죽이는 일을 했지만, 예수는 민중을 풀어주고 해방하고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자연법칙만을 믿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죽임의 일을 하지만, 예수를 믿고 부활을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는 분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살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살리고, 친구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환경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살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살림을 통해서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조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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