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의 고난
요한복음 19장 23-30절
변 종 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대에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 복음서를 기록하여 출판하였다(Irenaeus, Adv. Haer. III,1,1). 그는 아마도 유대인의 전쟁 발발 직전에(약 66년경) 팔레스타인을 떠나 대략 68년 전후에 에베소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cf. Eusebius, Hist. Eccl. III,5). 그래서 그는 90년대 말에 죽을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에베소와 주위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말기에(52년경) 설립하였으며(행 18:18-21), 3차 전도여행 때 와서 3년 동안 가르치며 목회하였다(행 19장). 그 후에 바울이 첫 번째 로마 투옥에서 풀려나 아시아 지역을 순방할 때에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고 떠나갔다(딤전 1:3). 이때가 대략 64~66년 사이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바울이 순교 직전에(66~67년경) 디모데를 로마로 오라고 부른(딤후 4:9) 이후로 에베소 교회는 전문교역자가 없는 상태였다(장로들이 교회를 돌보고 있었음). 그러던 차에 사도 요한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순회사역 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에베소 교회로 청빙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주위의 아시아 지역 교회들을 돌보고 지도했었는데, 그의 목회사역 마지막 즈음에 그의 이름을 딴 복음서를 기록 출판하였다. 이미 세 개의 복음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는 그 앞의 세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강조가 많으며,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의해 ‘영적인 복음’으로 불리기도 했다(Eusebius, Hist. Eccl. VI,14,7-8).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유대 지역 사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또한 유대인의 절기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해 주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유대인들’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도리어 ‘유대인들’은 안식일 문제와 표적들과 예수님의 정체성 문제로 인해 사사건건 충돌하였다(5-11장). 그러다가 결국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요 11:47-53).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셨으며, 그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다(요 12:24).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신 후에(요 13-18:11), 로마의 군대와 유대인의 하속들에게 잡혀 가서 심문과 재판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I. 본문 연구
요한복음 19:23-30은 예수님의 고난 중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십자가에 달리고 나서 돌아가시기까지 여섯 시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 중 중요한 몇 가지를 기록해 주고 있다. 먼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일이 기록되어 있고(23-24절), 그 다음에 예수님이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25-27절).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나서 그 영혼이 떠나간 일이 기록되어 있다(28-30절). 이 중에서 두 번째 사건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첫 번째 사건과 세 번째 사건은 단지 사건 자체를 기술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주제로 하여 기술되고 있다(24절, 28절).
1. 군인들의 옷 나눔(23-24절)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시간은 오전 9시경이었다(막 15:25). 따라서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정에 선 시각인 ‘제6시’(요 19:14)는 낮 12시가 아니라 로마의 시간을 따라 오전 6시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경(마 27:46; 막 15:34)에 돌아가셨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과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다. 이것은 당시의 관습이었는데 수고한 군인들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였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네 몫으로 나누어서 각각 한 몫씩 취하였는데(23절), 이것을 통해 이 군인들은 네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네 명’이 한 조로 움직였다(행 12:4 참조). 예수님과 강도 두 명을 각각 한 명씩 맡아서 십자가에 못 박고 나머지 한 명은 보초를 섰을 것이다. 이들이 네 몫으로 나눈 것은 겉옷이었다. 네 몫은 아마도 허리띠와 머리 덮개와 두 신발이었을 수도 있지만(Keulers), 머리 덮개, 신발들, 허리띠, 외투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겉옷들’(원어에는 복수)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실제로는 주사위 같은 것을 던짐) 나누어 가졌다(마 27:36; 막 15:24; 눅 23:34).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을 하나 더 추가해 주고 있다. 그것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 뽑아 가진 사건이다. 이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서 군인들은 이것을 찢지 않고 제비 뽑아서 한 사람이 다 가졌다. 평범해 보이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요한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성경은 시편 22:18인데 곧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는 말씀이다(24절).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눈 이 사건도 성경의 성취임을 요한이 말한 것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하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성경을 이루심을 알 수 있다.
2.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25-27절)
요한복음에는 독특하게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봉양 문제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준다. 이것은 아마도 요한 자신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먼저 25절은 십자가 곁에 서 있던 여자들의 이름을 말해 준다. 이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님의 이모(姨母)의 이름은 여기에 나와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16:1의 명단과 비교해 볼 때 ‘살로메’일 가능성이 있다(Zahn, Feine, Grosheide, Van Leeuwen).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의 이름이 ‘살로메’일 가능성은 있지만 예수님의 이모는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거의 다 도망쳤지만,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자들은 곁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와 제자 요한을 보시고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다. 먼저 어머니를 보시고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셨다(26절). 여기서 ‘여자’란 단어는 헬라어로 ‘귀네’(gunē)인데 ‘아내’, ‘부인’, ‘(성인) 여자’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말에서처럼 비하(卑下)나 경멸(輕蔑)의 의미는 없다. 자기 아내나 다른 사람의 아내 또는 어머니나 누구든 간에 어른인 여자에 대해 두루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르면 버릇없는 자식이라고 욕을 먹는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어머니’라고 번역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쨌든 장남인 예수님이 떠나고 나면 어머니 마리아가 혼자 남는데 누가 이 어머니를 부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예수님에게 남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이들은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요 7:3-5; 막 3:21 참조). 맏형으로서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평생 예수님에 대해 불평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만일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이모 살로메가 맞다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사도 요한의 이모가 된다. 이모와 조카는 대체로 좋은 관계인만큼 부양을 부탁하는 것이 전혀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는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2천년 전의 유대 상황에서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이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 13:23; 19:26; 20:2; 21:7, 20). 그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서 식사하던 제자였다(요 13:23). 그만큼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였다. 그런데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cf. 눅 7:47; 12:48).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만큼 기쁨으로 보답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cf. 롬 8:12; 12:1).
그래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을 때, 요한은 그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한다(27절).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다. 좀 생각해 보거나 아내와 의논해 보지도 않고 즉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에 기꺼이 보답하는 요한의 태도를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요한의 아내도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 이모이니까(만일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의 아내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말없이 마리아를 모시고 섬겼다. 사실상 마리아를 모신 것은 대부분 요한의 아내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생 동안 마리아를 모신 것은 큰 미덕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전적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는 마음과 희생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대인의 전쟁 발발 직전에 사도 요한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도 66년경으로 생각된다. 그때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갔다고 생각된다. 그때 마리아의 나이는 매우 많았을 것이다. 아마도 80대 후반쯤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버리지 않았다. 에베소까지 먼 길을 함께 모시고 갔다.
그래서 지금도 터키의 에베소에 가면 에베소 유적지가 있는데 산 쪽에 옛날에 마리아가 살았다고 하는 집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곳을 성지로 생각하며 로마 교황도 세 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이곳에 정말로 마리아가 살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마리아가 말년에 에베소에 와서 살다가 죽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여기서 살다가 승천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로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한 죄인이었다(눅 1:48). 그러나 경건한 믿음의 여인이었다.
3. 예수님의 죽으심(28-30절)
이어서 28-30절은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사건들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28-29절은 예수님이 목말라 하신 것과 무리들이 신 포도주를 예수님에게 준 일에 대해 말한다.
28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한다.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약 6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그때 예수님은 탈수현상으로 인하여 심한 갈증을 느끼셨다. 그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것조차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이 성경은 시편 69:21(또는 22:15)의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의 머릿속에는 온통 성경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아니 그 자신이 말씀이었다(요 1:1).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海綿)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29절). 여기서 ‘신 포도주’는 로마 군인들이 마시는 음료인 ‘포스카’(posca)이다. 이것은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는 음료이다(cf. 룻 2:14). 사람들이 해면(스폰지)에 신 포도주를 적신 다음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초점은 무리들의 선행(善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심한 갈증을 겪었으며 우리를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가 하는 것에 있다(시 69:21 참조).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30상). ‘다 이루었다’는 말의 원어는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인데 ‘온전케 하다’는 동사(teleioō)의 완료 수동태이다. 그래서 ‘완전케 되었다’,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객관적 구속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인류의 죄를 구속(救贖)하기 위한 모든 사역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의미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다 받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하셨다. 남은 것은 우리 인간 각자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 구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행 2:38).
이것을 우리는 구속적용이라 부른다. 이 주관적 구속적용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 회개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딛 3:5; 행 16:14). 따라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각자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구속사역은 효력이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힘써 기도해야 한다(눅 11:13).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중요한 한 이유이다.
이것에 대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그의 프린스턴 강연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주의도 주의 영이 없으면 무력하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 체계이고 완벽한 교리와 신학으로 짜여 있는 칼빈주의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날의 ‘에올루스 하프’를 예로 든다. 이 하프는 바람이 불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이 악기를 창가에 놓아두면 바람이 불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고 할지라도 하프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비록 바람 소리는 들릴지라도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카이퍼는 칼빈주의도 이 에올루스 하프와 같다고 한다. 주의 영 곧 성령이 불지 않으면 칼빈주의라는 하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혼이 떠나가셨다(30하). 예수님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혼은 죽지 않고 떠나가셨다(마 10:28 참조). 예수님의 영혼은 즉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낙원)로 가셨다(눅 23:43). 지옥이나 음부에 가신 것이 아니라 낙원에 가셨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무덤에 머물러서 부활할 때까지 기다리셨다(행 2:26-27). 이로써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II. 핵심 메시지
사도 요한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록하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실까 또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식의 감정적인 기술을 피하고 대신에 객관적으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고난이 성경을 응하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먼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군인들은 관례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죄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먼저 겉옷을 네 몫으로 나누어 각자 하나씩 취하였다. 그러나 속옷은 통째 하나로 되어 있어서 나눌 수가 없었다. 네 개로 찢으면 쓸모없게 되므로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서 한 명이 그것을 취하였다. 이런 행동들은 관례를 따른 것이었으며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사소한 인간의 유익을 추구하는 행동이었다.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이런 일조차도 성경의 기록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악한 행동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은 이제 로마 군인들을 통해 이 성경을 이루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은 악인들을 통해서도 성경을 이루심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관련해 간단히 기록해 준다. 이것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 자신과 관계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면서도 육신의 부모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 계명을 무시하지 않으셨으며 소중히 여기셨다. 그래서 홀로 남게 될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부탁에 대해 요한은 즉시 순종하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좀 생각해 보거나 집에 가서 아내와 의논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탁에 즉시 순종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평생 동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은 이런 방식으로 그 사랑에 보답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기록해 준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목말라 하셨다. 심한 갈증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고난은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혈과 육을 가진 분으로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다 느끼셨다(히 2:14; 4:15).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도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도, 숨이 곧 끊어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성경을 이루는 것에 모든 관심을 가지셨다. 자신의 어떤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으며, 그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그 영혼이 떠나가셨다. 이로써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이 끝났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다 완수하신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객관적 구속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사역이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III. 설교문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채찍 형벌과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에 대해 많이 말합니다. 손과 발이 못 박혀 고통당하는 모습, 탈수현상으로 인한 극심한 갈증 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는 무리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모습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서 이런 고통을 친히 체험하셨으며 모든 수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1. 군인들의 옷 나눔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런 일들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첫 번째 예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사건이었습니다. 죄수의 옷을 군인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각자 한 몫씩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속옷은 통째로 하나로 되어 있어서 찢지 않고 제비 뽑아서 한 사람이 가져갔습니다. 이처럼 군인들은 관례를 따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 예언한 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예언하시고 때가 되매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예언을 이루실 때는 꼭 의로운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루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실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앗수르를 통해서도 뜻을 이루시고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서도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들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는 일에 사용되었지만, 그 자신은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악한 일에 쓰임 받지 말고 선한 일에 쓰임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선한 일에 쓰임 받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살펴서 죄와 불의를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위해 여러분을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심한 고통과 갈증, 그리고 기력이 쇠미해진 상태에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잊지 않고 생각하셨습니다. 홀로 남게 될 어머니를 누가 모시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에겐 적어도 네 명의 남동생(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뭔가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나이 서른이 되어서는 집을 나갔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면서 갈릴리로 가서는 무식한 어부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동생들에게는 볼성사나웠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형이 미웠을 것입니다. 맏형이 되는 예수님이 가계를 팽개쳐 버리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요 7:1-5).
이런 상황에서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평생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그때부터 바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에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좀 생각해 보거나 아내와 의논해 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아마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에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나중에 팔레스타인을 떠나 에베소로 갈 때에도 모시고 갔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에베소에 살다가 죽을 때까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을 잘 들어 주었습니다. 요한과 그의 아내 모두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3. ‘내가 목마르다’와 ‘다 이루었다’
마지막 부분(28-30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고 또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여섯 시간쯤 지나자 심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28절). 그런데 요한은 이 말씀도 성경을 이루기 위해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 기록한 말씀(시 69:21; 22:15)을 이루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기운을 차려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나서 그 영혼이 떠나셨습니다(30절). ‘다 이루었다’는 말은 객관적 구속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편에서 하실 객관적 사역은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누가 보태거나 보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값없이 얻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이미 완성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의지하여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고 움직여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의 토대 위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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