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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우상은 무엇인가?

by 은총가득 2020. 8. 9.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많은 적그리스도들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로마 교황인가? 아니면 말세에 나타날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인가? 아니면 말세에 온 세상을 지배할 범세계적 정권인가? 위키백과에 보면 세계 종말 직전에 나타날 악마를 일컫는다고 한다. 두산백과에 보면 종말에 나타나 그리스도를 대적할 것으로 예언된 통치자라고 설명한다. 요즈음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짐승과 연결시키면서 종말에 나타날 무시무시한 존재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기보다 성경에서 차근차근히 살펴보아야 한다.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요한일서 3(2:18, 22; 4:3)과 요한이서(1:7) 한 곳이다. 먼저 요한일서 2:18에 보면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한다.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처음에는 단수가 사용되었으나 두 번째는 복수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여러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단수로서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라 한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온다는 사실(事實)을 원리적으로 말한 것이며, 실제로 역사에 나타날 때에는 그러한 존재가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일어났다’(gegonasin)는 것은 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일어나서 요한 당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요일 4:3 참조). 이 사실에서 요한은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추론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다 마지막 때말세인데(1:2; 벧전 1:20; 딤후 3:1-5),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마지막 때가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cf. 7:15; 24:4-5, 11, 23-26; 20:29; 딤전 4:1-3). 따라서 적그리스도는 꼭 마지막 종말 직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 시대에 이미 나타났으며, 교회시대 전체를 통해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

 

그러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요일일서 2:22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성부와 성자를 부인하는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이다. 요한의 이 말은 그 당시에 에베소와 소아시아에 들어와서 미혹하던 영지주의자인 케린투스(Cerinthus)와 그의 추종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Irenaeus). 이들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는데, ‘그리스도가 그 위에 비둘기 형상으로 임하여서 이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고난 받기 직전에 떠나갔다고 한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영지주의자들 곧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요한은 적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요한일서 4:3에서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고 한다.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인데 그 배후에는 악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한 악령의 역사는 사도 시대에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요한이서 7절에서는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요한은 미혹하는 자적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가 미혹하는 자요 곧 적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은 다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벧후 2:1; 3:10; 13:6).

 

교황은 적그리스도?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6절은 로마의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인데, 교황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교회에서 자기를 높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은 적그리스도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했지 적그리스도는 교황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황은 성경에서 말하는 미혹하는 자들거짓 선지자들중의 하나이지만, ‘적그리스도는 교황뿐인 것은 아니다. ‘교황은 많은 미혹자들 곧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미국북장로교회는 190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이 부분을 수정하였다. 예장합동측은 미국 정통장로교회(OPC)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라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가톨릭에 대해 차라리 타종교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에 대해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가르치면서도, 불필요하게 비방하거나 자극함으로써 도리어 교회가 욕을 얻어먹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이 비진리이며 개신교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데살로니가후서 2:3에는 불법의 사람멸망의 아들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3-10절의 문맥을 보면, 이 존재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어떤 한 인격체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다는 표현도 있어서(7)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칼빈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탄에 의해 붙잡힌 왕국으로 보았으며, 화란국역성경(SV)한 사람만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권세와 주권을 가진 사람들로 보았다. 개혁주의 주석가인 판 레이우원(Van Leeuwen)은 역사상 나타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로서의 적그리스도로 보려고 한 것 같다(KNT 살후 2:4 주석). 따라서 이 부분의 본문은 어려우며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알 수는 없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있다(벧후 3:16).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억지로 풀려고 하지 말고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성경을 억지로 이상하게 풀다가 멸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상은 무엇인가?

우상(偶像, idol)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다. 옛날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멸망한 것도 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우상을 싫어하시고 우상 섬기는 죄를 중대하게 보시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존엄과 관계되고, 온 피조계의 질서와 행복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우상 숭배가 죄인 줄을 모른다. 우상 숭배가 경건이며 미덕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또 우상 숭배가 죄인 줄은 알면서도 자기 자신이 우상 숭배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유대교와 이슬람 신도들이 그러하다. 유대인들은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다(요 8:19, 55; 14:7; 16:3). 그들이 만일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도 알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이슬람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그들은 유일신 알라를 믿는다고 하지만, 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따라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경전도 다르고 교리도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다 우상 숭배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우상

 

구약 성경에서 ‘우상’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가리킨다. 십계명 중 제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신 5:7)고 할 때의 ‘다른 신들’이다.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장엄복수로서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처럼 ‘신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럴 경우의 ‘신들’은 참 신이 아닌 우상 신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한다(신 4:35; 사 44:6).

다른 한편으로, 사람이 새기거나 부어 만든 형상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말할 때가 많다. 십계명 중 제2계명에 나오는 ‘우상’이 바로 그것인데, 히브리어로는 ‘세펠’이다(출 20:4; 신 5:8; 삿 17:3; 사 44:15, 17 등).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새기거나 부어 만든 것은 참 신이 될 수 없으며 다 우상이다.

그 외에도 ‘가증한 것’(식쿠츠; 신 29:17)과 ‘헛것’(엘릴; 대상 16:26; 시 2:8; 96:5; 97:7)이란 단어가 ‘우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길룰’(우상; 레 26:30; 신 29:17), ‘아웬’(삼상 15:23; 사 66:3)과 ‘드라빔’(삼상 15:23) 같은 단어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벧엘’은 원래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지만, 우상 숭배를 많이 하므로 경멸적인 의미에서 ‘벧아웬’ 곧 ‘우상들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호 4:15; 10:5).

 

신약에서의 우상

 

이러한 구약의 사상은 신약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오직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실 뿐이며, 다른 신들은 다 거짓이며 헛된 것들이다(롬 1:23, 25; 딤전 6:15).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와 온 아시아를 다니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전파하였다(행 19:26).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에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다고 한다(행 17:16).

그런데 이 하나님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곧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며(요 5:18; 10:30), 자신이 또한 ‘하나님’으로 불리기도 한다(요 1:1; 20:28; 행 20:28; 딛 2:13; 롬 9:5).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예수님 당시부터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고대교회에서 ‘기독론’이 확립되자 ‘성령’의 신성이 또 논란되었다. 오랜 논쟁 끝에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하나님 되심)이 모두 확립되면서, 이들 3위(位)는 3신(神)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제5문에서는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오직 유일하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 계십니다.”고 답한다. 제6문에서는 “그 신성(the Godhead)에는 몇 위(persons)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신성에 3 위(persons)가 있으니 곧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이 셋은 한 하나님(one God)이며, 본질에 있어서 같고(the same in substance),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합니다(equal in power and glory).”라고 답변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

 

신약에서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언급은 골로새서 3:5에 나오는 바울의 말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淫亂)과 부정(不淨)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情慾)과 탐심(貪心)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같은 맥락에서 에베소서 5:5에서는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基業)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한다. ‘탐심’(플레오넥시아)은 ‘자기에게 마땅한 것보다 더 가지려는 욕구’를 의미한다(Bauer 사전). 같은 단어가 마가복음 7:22, 로마서 1:29, 에베소서 5:3, 베드로후서 2:14에서는 ‘탐욕’(貪慾)으로 번역되었다. 누가복음 12:15, 골로새서 3:5, 데살로니가전서 2:5, 베드로후서 2:3에는 ‘탐심’(貪心)으로 번역되었다.

어쨌든 ‘탐심’ 또는 ‘탐욕’에 대해 ‘우상 숭배’라는 강한 정죄(定罪)가 붙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 앞에는 절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속에 ‘탐심’이라는 우상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우상은 무엇보다도 ‘탐심’ 특히 재물에 대한 탐심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며 제 정신이 아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자기를 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다(딤전 6:10).

그러면 돈은 악인가? 돈은 나쁜 것이고 멀리해야만 하는가? 어떤 철학자들의 말처럼 돈을 돌처럼 여기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미덕인가? 소위 ‘청빈’(淸貧)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인가? 아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지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고 하였다(전 10:19). 따라서 ‘돈’은 나쁜 것이 아니며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곧 ‘탐심’이 죄이며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재물을 섬기면 안 된다(마 6:24). 재물을 섬기는 것 곧 재물에게 종노릇 하는 것이 죄이며 재물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다(창 1:4, 10, 12, 18, 21, 25, 31). 따라서 우리는 물질을 악하게 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가난’이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미덕이다(딤전 6:17-19; 딛 2:14; 엡 2:10).

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다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하나님보다 낮은 자리에 두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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