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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 /

by 은총가득 2020. 8. 10.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요즈음 천국에 상급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신실한 성도들조차도 과연 천국에 상급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의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성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는 것이며 또 상급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

 

상급의 차이?

천국의 상급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만일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면 그런 곳을 과연 천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천국에는 차별도 없고 시기심도 없고 위화감도 없는 곳, 완전히 평등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도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면 천국은 천국답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상’이란 말은 모든 성도들이 공평하게 받는 ‘구원 자체’ 또는 ‘천국 자체’를 의미하며, 성도 각자가 다르게 받는 ‘차등 상급’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금 면류관’을 받고, 다른 사람은 ‘개털 모자’를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얼핏 듣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서러움 받으며 한평생을 살았는데 천국에 가서 또 다시 차별을 받는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금 면류관’과 ‘개털 모자’ 이야기도 우습고, ‘맨션’과 ‘초가집’ 이야기도 우습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그렇게 감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성경을 펴서 차근차근히 살펴보고 성경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늘에 상이 많다

신약 성경에 보면 ‘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많다.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당하는 천국백성을 향해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신다(마 5:12). 여기서 ‘상’(misthos, 미스또스)은 원래 노동자에게 노동의 대가로 지급하는 ‘임금, 삯’(pay, wages)이란 뜻인데, 또한 어떤 일에 대한 대가로 갚아주는 ‘보상’(reward, recompense)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구체화될 때에는 보상(報償)으로 갚아주는 ‘상’(賞, a reward)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상’을 모든 성도들이 동등하게 받는 ‘구원’이나 ‘영생’의 의미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다’(polus, 폴뤼스)는 말은 원래 ‘많다’는 뜻이다. 상이 ‘많다’는 것은 ‘적다’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즉, 상을 많이 받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처럼 ‘천국 자체’를 ‘상’(보상)이라고 했다면 ‘많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약속된 ‘많은 상’은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당할 때에 주어지는 보상이다. 이것을 ‘천국 자체’로 본다면 우리의 ‘행위’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행위구원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마 10:41-42) 여기에 보면 각자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 ‘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냉수 한 그릇으로 얻는 ‘상’은 ‘구원’이나 ‘영생’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자기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상’은 각자의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보상으로서의 ‘상’이란 뜻이다. ‘구원’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상급’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그 외에도 성경에는 ‘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아주 많다. 그 중에는 물론 천국에 들어가는 것, 영생 얻는 것 자체를 ‘상’ 또는 ‘보응’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계 11:18, 롬 2:6-7). 이 경우의 ‘상’ 또는 ‘보응’은 구원이나 영생과 동일시할 수 있다. ‘영생’ 또는 ‘구원’은 모든 성도들이 받는 ‘기본적인 상’이며 ‘제일 큰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 외에 구원받은 자가 각자 행함에 따라 받게 될 ‘상’ 또는 ‘보상’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고 있다(마 6:1, 눅 6:35, 고전 3:8, 14-15, 9:17,18, 고후 5:10, 빌 3:14, 히 10:35, 11:26, 계 22:12; 또한 마 16:27, 막 10:40, 롬 14:10-12 등). 이 ‘상’ 또는 ‘보상’은 사람마다 다르며, 각자의 행함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다.

이렇게 상급에 차이가 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한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다 똑같으며 상급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따른 것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마치 공(功)을 많이 세운 신하에게 임금이 상을 내리려 할 때, 신하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이유로 상을 반대하는 것과 같다. 그런 신하는 임금의 호의와 기쁜 뜻을 무시하는 대죄를 짓게 된다.

영광에 있어서의 차이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했으니 마치 마땅히 상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것은 가톨릭의 공로사상이다. 상은 ‘권리’(權利)가 아니라 주는 자의 ‘호의’(好意)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다 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한다(눅 17:10). 마치 상을 받는 신하가 “성은이 망극합니다. 신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상’은 어디까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성경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다 천국에서 영생과 구원을 누리고 또 천국의 기쁨과 주님과의 복된 교제를 누릴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다 받는 공통의 상이다. 그러나 그 외에 각자 행한 대로 받는 상(보상)이 또 있다.

이 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또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해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그의 「개혁교의학」 제4권 제일 마지막에서 각자 ‘영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빛남과 영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par. 580)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다 천국에 가지만, 각자 행한 일을 따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족하며 이에서 지나치는 것은 인간의 사변이며 교만이다.

 

[출처]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 |작성자 changbum

사랑함이 많은 여인

누가복음 747-50

 

 

변 종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갈라디아서 522-23절에 나와 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여기에 아홉 가지 열매가 열거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개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외에도 더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적인 것 아홉 개만 열거한 것이다. 여기에 열매’(karpo,j, 카르포스)란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것은 성령의 여러 열매가 한꺼번에 열리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개가 차례대로 순차적으로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꺼번에 다 열리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열매란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것은 그것이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열매들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열매가 이처럼 비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는 히브리서 135절의 입술의 열매’(찬송의 제사)과 에베소서 59절의 빛의 열매등이 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보면 성령의 아홉 열매 중에서 사랑’(avga,ph, 아가페)이 제일 먼저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맺게 하시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갈릴리의 한 죄인 여자의 행동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I. 본문 배경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의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났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집에서 식사하고 있는 도중에 그 동네의 한 죄인인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향유를 그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추었다(7:36-38). 이 사건은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은 사건(26:6-13; 14:3-9; 12:1-8)과는 다르다. 그것은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이며, 본문은 갈릴리의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죄인인 이 여자의 이름은 여기에 나와 있지 않다. ‘죄인이란 것은 이 여자의 직업이나 부도덕한 행실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창녀이거나 또는 그와 비슷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남자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추고 하여도 예수님은 물리치지 않고 용인하셨다.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발을 만지는데 예수님은 어째서 피하지 않고 가만히 계신단 말인가? 예수님을 초청한 그 바리새인(이름은 시몬)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에 대해 도덕적이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여 존경하였지만 이 사건을 보고서는 실망이 컸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500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하나는 50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그러자 바리새인 시몬이 대답하였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43)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하시고서 이 여자의 행동을 설명하셨다. 이 여자가 이렇게 사랑을 많이 표현한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 이 여인의 행동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많은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사의 보답이 많다는 의미이다. ‘사랑을 이루어 내는 원동력은 죄 사함은혜임을 알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성령의 역사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할 수 있다.

 

II. 본문 연구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살펴볼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는 말씀이다(47). ‘사하여졌다는 말의 원어 아피에미’(avfi,hmi)는 원래 떠나다’(leave), ‘가게 하다’(let go), ‘탕감하다’(remit), ‘용서하다’(forgive), ‘허락하다’(allow) 등의 의미를 가진다. 가장 기본적인 뜻은 떠나가다이다. 어원상 아포’(avpo,)로부터’(from)를 뜻하고 히에미’(i[hmi)가다’(go)를 뜻한다. 구약 시대의 대속죄일에 아사셀염소를 광야로 멀리 떠나보내는 것과 같다(16:10). 이것은 우리의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멀리 치워졌음을 의미한다(103:12).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것도 같은 의미이다(1:29). 이처럼 죄인인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 , 그의 모든 죄가 다 치워지고 용서받은 것이다.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47)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함 받은 줄을 아셨을까?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바로 아실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그러지 않으시고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가 된다. 그 여자의 많은 사랑의 행동을 보시고서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 사함사랑사이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죄 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죄 사함을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각자가 지고 있는 죄의 빚을 탕감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탕감’(蕩減)은 어떤 사람의 채무를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헬라어로는 카리조마이’(cari,zomai)인데 은혜의 표시로 값없이 주다’(to give freely as a favor)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빚진 돈을 취소해 주다’(to cancel a sum of money that is owed)는 의미를 가진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4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빚을 탕감해 줄 때 주인이 전부 다탕감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탕감에는 부분탕감전액탕감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탕감은 전액탕감이다. , 각자가 빚진 금액을 전부 다 없애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빚진 자는 갚을 것이 없기때문이다(42; cf. 18:25).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이 빚진 자들은 둘 다 갚을 것이 전혀 없었다. 갚을 능력이 조금도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용불량자요 파산자였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란 말씀은 사실 우리 인간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마어마한 죄의 빚을 졌는데(cf. 18:24일만 달란트’), 우리에게는 갚을 것이 전혀 없었다. ,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죄의 빚을 해결할 능력이 조금도 없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때문이다(3:19).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전액탕감이라는 방법을 택하셨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주 파격적인 방법을 택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갚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 파산 상태에 있었다. 신용불량자일 뿐만 아니라 회생불능의 파산자였다. 마치 모압 땅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같은 신세에 있었다(룻기 1).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전액탕감이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그러다 보니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의 입장에서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곧 많이 빚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보게 되는 현상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500 데나리온 빚진 자와 50 데나리온 빚진 자 중에서 500 데나리온(일당 10만원으로 잡으면 5천만원) 빚진 자가 훨씬 이익이다. 따라서 전액탕감의 경우에 많이 빚진 자일수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대박인 것이다. 적게 빚진 사람은 소박이고 많이 빚진 사람은 대박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

본문에 나오는 갈릴리의 죄인인 여자는 그야말로 대박을 맞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를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시니 얼마나 감사했겠는가? 그래서 그 여자는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다(48). 여기서 ()함을 받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페온타이’(avfe,wntai)인데, 앞에서 말한 아피에미’(avfi,hmi) 동사의 완료 수동태이다. 그 근본 의미는 떠나가다임을 이미 앞에서 말하였다. 그리고 헬라어 동사의 완료’(完了)는 과거에 발생하여 완료된 동작의 결과가 현재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여자의 죄 사함 받은 사건은 이미 일어났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녀는 이제 죄 사함 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죄 사함 받은 시점은 그녀가 예수님을 믿은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예수님을 처음 믿은 그 시점에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였고 큰 기쁨과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감사하여 그것을 표현할 기회를 찾다가,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머무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그의 감사를 눈물로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

이런 믿음사랑은 다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성령이 그 마음에 역사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으며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고전 12:3).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에 감동하시고 역사하셔야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으며(살전 3:2), 너희는 그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다(2:8). 베드로도 예루살렘 공회석상에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하였다(15:11). 예수님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3:5).

믿음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도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그 성령께서 또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사랑을 실천하게 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이다(5:22). ,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하며 순수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은 두 가지 방향으로 역사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갈릴리의 이 여인의 경우도 그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님께 그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우선 그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귀한 향유 곧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어 드렸다. 이 여인의 사랑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고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5:44).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미운 사람, 원수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에 반()하며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이 사랑은 본능적 사랑이 아니라 의지적 사랑 곧 아가페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열매로 맺는 사랑도 아가페이다. 우리의 본능적, 감정적 자아(自我)를 극복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부인’(自己否認)이 필요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한 손양원 목사의 사랑이 그 전형적인 모범이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

이러한 원수사랑은 인간적으로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하셔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어떤 사랑을 나타내 주셨는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며, 우리도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도록 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된 사람, 대적이 된 사람을 조금씩 사랑하고 화평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늘 불평과 원망과 다툼이 있던 가정이 평안해지고 화목해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해 가는 것이다. 나아가서 교회도 평안해지고 각박한 사회도 인정이 있는 사회로 변해 간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치우친 사랑

그러나 한국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강조하면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은 약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하면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많이 약하다. 개인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강조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것은 등한시한다. 혹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사랑하는 것만 강조하고,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단지 전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며, 심지어 지옥 갈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랑의 대상으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햇빛을 비춰 주시며 때마다 비를 내려 주신다(5:45).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범위를 확대하고 대상을 넓혀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 주위의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 북한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사람들, 나아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한다. 성도 개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교회적으로 힘써야 한다. 교회가 자기들끼리만 행사하고 즐기기보다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주위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복지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므로(고전 13:5), 참된 사랑은 이타적이다. 따라서 자기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베풀 때에 참된 사랑이 이루어진다.

 

균형 잡힌 사랑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열매는 균형 있게 열리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열심이다. 요즘은 이것도 많이 식었지만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에 열심이었다. 요즘은 찬양에 열심을 내고 있다. 이에 반해 이웃 사랑은 많이 약하다. 특히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서 지역사회와 나라를 위한 사랑은 많이 약하다. 생각을 잘 안 한다. 그러니 성령의 열매에 있어서 불균형이 심각하다. 말하자면 수직적인 것만 강하고 수평적인 것이 약하다.

그러나 이웃 사랑이 약하면 하나님 사랑도 약하게 된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참된 것이라 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요일 4:20).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돌보지 아니하면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참된 하나님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 그런 것은 자기 자신의 종교적 감정 만족일 수도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에(16:13-14),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하신다(22:1 참조). 따라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균형 잡힌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22:37-40).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골고루 많이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갈라디아서 35-9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갈라디아 교회는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여러 개의 교회들이었다(1:2). 이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인데(16:6; 18:23), 사도행전에 자세한 기록이 없긴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 지역에 가서 전도한 것은 분명하다.

갈라디아 교회는 처음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후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자 그만 미혹되어 복음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강하게 호소한다. 할례를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이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이며,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5:3).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 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 하고 자기 공로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으며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말한다(2:21).

 

I. 본문 배경

 

갈라디아’(Galatia)는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지역) 중앙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 서쪽에는 브루기아(Phrygia), 동쪽에는 갑바도기아(Cappadocia)가 있다. 갈라디아는 원래 브루기아에 속해 있었는데, 갈라디아 사람들이 주전 200년 무렵에 버가모 왕국의 앗탈루스 I(Attalus I)에 의해 브루기아의 동쪽 지역으로 밀려났다. 그래서 그들이 살던 브루기아 동쪽 지역이 갈라디아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아마도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16:6) 또는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18:23)이라고 말할 때, 관사 하나로 묶어서 마치 한 지역인 것처럼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란 지명은 켈트’(Celt) 족 또는 갈리’(Galli) 족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켈트 족은 처음에 서쪽으로 이주하여 프랑스 남부 지역에 많이 살았으나, 그 중 일부는 다시 동쪽으로 이주하여 마게도냐 지역과 데살리아 지역에 살고 있었다. 마땅한 정착지가 없이 떠돌고 있던 차에 비두니아 왕국에서 형제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에 니코메데스(Nicomedes) 왕의 요청으로 2만 명의 갈리(켈트) 족이 흑해를 건너와서 도와주고 나서는 브루기아 지역에 머물러 살았다. 이들은 후에 브루기아 동쪽 지역(갈라디아)으로 쫓겨나서 거기서 살게 되었다. 그 중심 도시는 앙키라’(Ancyra)페시누스’(Pessinus)타비움’(Tavium)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일종의 인종의 섬을 이루게 되었는데, 머리가 검은 동양 사람들 가운데서 머리가 노란 켈트 족 사람들이 켈트 말을 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매우 감정적이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으며 손님 접대를 잘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대하였으며 눈이라도 빼어 줄만큼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4:14-15).

그러나 감정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쉽게 떠나간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떠난 후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은 쉽게 요동되고 바른 복음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1:6). 그래서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도다 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탄식하였다(3:1).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시금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II. 본문 연구

 

1. 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질문한다(3:5).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을 받았는데, 그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 모두가 체험한 것이며 논리가 필요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성령을 받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란 것이다. 그들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 들음으로 성령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명백하게 복음을 믿음으로 들음에 의해써였다. 처음 복음을 듣는데 무슨 율법을 지켜 행하고 할 수가 없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그들이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능력으로 일하기 시작하셨다. 이 사실은 성령을 받음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약속 또는 선물을 받음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오직 은혜로 성령을 받고 구원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2. 6

 

그러고 나서 바울은 이것은 창세기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이 말은 앞의 5절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5절의 내용은 곧 6절에서 말하는 바의 것과 같다는 말이다(원문에는 6절 초반에 ‘~와 같이에 해당하는 접속사가 있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믿음)을 그에게 의(의로움)로 여기셨다.

이 말씀은 창세기 156절의 인용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여기다’(logizomai 로기조마이)는 단어인데, 이것은 여기다, 간주하다’(count, reckon)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자체는 의()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로 여기셨다는 뜻이다. 둘째는 그 의로 여김의 시기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여김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의 일로서,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한 때(75)로부터 하갈을 첩으로 취할 때(85세 이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17장에 나오는데 99세 때이다. 따라서 할례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 받고 나서 약 15~20년 후에 있었던 일이다. 이로 보건대 할례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 받는 것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7

 

그러고 나서 바울은 하나의 결론을 유도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7)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hoi ek pisteωs)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 즉 믿음의 방법에 의한 자들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즉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과는 반대이다. 자기 공로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믿음의 방법을 따르는 자들,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문자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인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참 자녀들(영적 자녀들)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기업(基業)을 얻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유업)은 가시적으로는 가나안 땅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영원한 천국을 예표하는 것이다. 이 천국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자들만 들어가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과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다(14).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야 가나안 땅(천국)을 유업(遺業)으로 얻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는 권리와 축복 모두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자기들만 이 복을 받는 줄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언약의 자손이며, 언약의 표인 할례를 몸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이 표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증거한다고 생각하였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으나 회심 후에는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바울은 회심 후에 새로운 각도에서 성경을 읽었는데, 그것은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에 관한 것이다. 이때 자손이란 말은 원어로는 라고 되어 있다. 구약에서는 제라이고 신약에서는 스페르마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후손’()의 약속을 하실 때 항상 단수 제라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12:7; 13:15, 16; 15:5, 18; 17:7, 9; 22:17, 18; 24:7; 26:3, 4 ).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주목하고서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씨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하였다(3:16).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신 것인데 곧 그리스도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29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것그리스도인들도 또한 아브라함의 씨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육적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이며,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 이후에 깨달은 것이다.

 

4. 8

 

 

사도 바울은 나아가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전하셨다고 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8) 여기서 바울이 인용한 구절은 창세기 123절 말씀이다. 개역개정판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의 땅의 모든 족속이 갈라디아서에서는 모든 이방인이라고 되어 있으나 같은 내용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로 말미암아란 번역이다. 히브리어 원어나 헬라어 원어를 그대로 따르면 네 안에서로 번역해야 맞다. 히브리어 나 헬라어 은 다 안에란 뜻이다. 칠십인역(LXX)이 이 부분에서 히브리어 를 헬라어 으로 번역했으며, 그것을 강조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동사 앞에 을 덧붙여서 강조하였다. 사도 바울도 70인역을 따라 마찬가지로 네 안에서’(en soi, 엔 소이)란 말과 함께 동사 앞에 전치사 ’(en)을 덧붙여서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eneulogηθηsontai, 엔율로게떼손타이)고 표현하고 있다. ,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아브라함 안에서복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 안에서복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복을 얻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네 안에서 복을 얻으리라”(12:3)는 약속이 창세기 2218절과 264절에서는 네 씨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서복을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1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친다.”고 하였으며, 사도행전 325-26절에서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너의 씨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는다고 말하였다(여기서도 개역개정판 번역은 잘못되어 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네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전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에게 전한 것은 유대 민족의 복이나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복음이었다는 사실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복음을 아브라함에게 전했다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유대 민족의 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신약 시대에 와서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확장해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복음은 예수님에 의해 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주어졌는데, 곧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이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네 안에서 복을 얻으리라.”(12:3)는 말씀은 곧 복음이다. 여기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과 모든 민족(이방인)’에게 미치는 복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 것이다(8).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저 자기 민족만 복을 받는 줄로 알았다. 자기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며, 그 증거로 할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유대주의적으로, 민족주의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게 구원 얻는다는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을 받았으며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였다.

바울 자신도 전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그저 유대민족들에게만 주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제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자손으로만 생각하고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인 유대 민족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가 단수임에 주목하고 이는 곧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3:16). 이로써 구약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되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수건이 벗겨진 것이다(고후 3:13-18).

 

5. 9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의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을 전하셨고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것이다(4:11, 16).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는 유대인의 조상이지만(아랍인과 에돔인의 조상도 된다), 영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언약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3:29), 이것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율법의 저주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아브라함의 복(천국)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천국 백성이다. ,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다. 따라서 육신적인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유대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

 

III. 설교문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는 누구일까요? 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까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먼저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을 불러서 약속을 주셨습니다(12:1-3).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은 눈에 보이는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땅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천국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그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약속을 받게 될까요? 어떤 사람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될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일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들과 반대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율법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으려는 자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기 공로로 구원받으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처음에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성령을 받고 의롭다 함 받은 것이지, 율법을 지켜 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5).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의롭다 함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얻게 될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의 예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줄 믿습니다.

 

2. 모든 이방인이

 

믿음의 방법에 의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것을 미리 아시고 옛날에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네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8). 이것은 창세기 1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거기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기의 모든 이방인과 같은 말인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유대 민족만 받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이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 받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어느 민족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신약 시대에 비로소 전파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8).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은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이었으며, 단지 유대 민족만을 위한 육신적 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미래 일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미리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3. 네 안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약속이 주어질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네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12:3). 그런데 네 안에서란 말이 안타깝게도 우리말 성경에는 너로 말미암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어상 네 안에서’(: 브카; : 엔 소이; : in you)가 맞습니다. 이 말은 곧 너의 씨 안에서란 뜻입니다(22:18; 26:4).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3:25-26).

그래서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미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천국을 유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우리 일생 최대의 행복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복을 주신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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