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경에 나타난 부부 중 참 불행한 부부이다. 한 날에 세 시간 간격으로 죽었다. 그것도 세상적으로 볼 때 무슨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일을 하다가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두다가 큰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 자기의 소유를 바쳤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죄를 무서운 죄로 규정하고 있다. 땅을 팔고 나서 얼마를 감춘 것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한 죄로 보고 있다(3, 4절).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하였다고 책망하고 있다(3절).
따라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바로 알고, 그것이 왜 그렇게 큰 죄인지를 깨닫고 오늘날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I. 본문 연구
1. 본문 배경
때는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고 능력 있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오순절 날 당일에는 남자만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2장). 그리고 성전 문 앞에 앉은 지체부자유 장애인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이적이 발생하였다(3:1-10). 이로 말미암아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때 믿은 자가 남자만 약 5천이 되었다고 한다(4:4).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가고 있었다. 성령이 충만하였으며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4:31).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4:32).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온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말한다. 성령의 능력은 재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마저 극복하게 하고 진정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제도나 강제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3-35)
이처럼 성도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고 각자의 필요를 따라 물건을 나누어 주는 공동체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공산주의가 강제적으로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이 있었고, 결국은 새로운 공산당 독재를 낳고 특권층을 만들고 말았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인위적인 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큰 은혜가 있었고,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그 판 돈을 사도들에게로 가져왔다. 그러면 사도들은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런 사람들 중의 하나는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난 레위족 사람인 바나바였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4:36-37). 바나바의 이런 행동은 교회 안에서 금방 소문이 났을 것이다. 바나바는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큰 시험이 찾아왔다.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예루살렘 교회에 마귀로 말미암은 시험이 들어왔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기들의 땅 판 값 얼마를 감추고 일부분만 사도들에게 가져온 사건이었다. 전체를 다 드리든 일부분만 드리든 그것은 자유지만 문제는 속여서 거짓말한 데 있었다.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초대 교회에 거짓이 들어오고 성령을 속이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데 큰 문제가 있었다.
2. 본문 연구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부부였다. ‘아나니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또는 ‘여호와는 응답하신다’이며, ‘삽비라’는 ‘아름다운 자’란 뜻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서 함께 일을 꾸몄다. 자기들의 재산(땅)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갖다 바치면 사람들에게서 큰 존경과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 바치지는 말고 일부를 감추어 두고 일부만 바치기로 하였다. 이들 부부만 알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큰 실패와 낭패를 가져오고 말았다. 아니, 파멸과 멸망을 가져오고 말았다. 왜냐하면 먼저 아나니아가 그 땅 판 값 중에서 일부를 들고 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자마자 베드로가 호통을 치면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그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의 음모를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사탄이 아나니아에게 역사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 판 값의 얼마를 감춘 사실을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담대하게 진상을 밝히며 책망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액수가 아니다. 땅 판 금액을 다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4절의 “땅이 그대로 있을 대에는 네 땅이 아니며 그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일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 성도들은 이처럼 자기 재산을 팔아 바치는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재산을 팔아 바친 사람은 전체 성도들 중에서 소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 눈만 속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속이려 한 것이 큰 잘못이고 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직 사람들 눈만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자들”이었다(마 23:25).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外飾)과 불법(不法)이 가득”하였다(마 23:28). 이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비록 세례받고 교인인 것처럼 행세하였을지라도 참된 믿음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확실한 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아나니아가 베드로의 이 말을 듣자 바로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5절). 이것은 베드로가 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의 이런 거짓 행동을 다 보고 계셨는데 베드로의 이 엄중한 책망의 말이 있고 나서 바로 아나니아에게 엄중한 심판을 행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사실 경각간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시면 바로 끝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눅 12:20; 사 2:20).
그러자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며(5절),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였다고 한다(6절). 헛된 공명심에 교회 안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한 아나니아의 악한 시도는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시간쯤 후에 그의 아내인 삽비라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7절). 삽비라가 왜 따로, 늦게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남편이 죽은 것도 모르고 사도들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8절) 이것은 삽비라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삽비라는 사도들 앞에서 뻔뻔스럽게 거짓말하였다. “네. 이것뿐입니다.”(9절)
그러자 베드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9절) 이 말도 베드로가 임의로 한 말이라기보다 성령의 감동 또는 알려 주심으로 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주의 영 곧 성령을 시험한 것이었다. ‘거룩한 영’이며 ‘진리의 영’인 성령을 속이고 거짓을 행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죄였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죄는 ‘성령을 훼방한 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Grosheide).
베드로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삽비라의 혼이 떠났다. 그러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를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였다(10절). 이로써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한 날에 죽어서 장사 지낸 바 되고 말았다. 그러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11절).
그러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왜 그렇게 크고 무서운 죄였는가? 당장 그들의 혼이 떠날 만큼 무서운 죄란 말인가? 오늘날에는 큰 죄를 짓고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교회의 헌금에 손을 대고도 천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 가운데 나아가는 교회였다.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였으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서 걷고 뛰는 이적과 많은 표적이 일어났다. 기도하니 땅이 진동하는 역사도 일어났다. 이처럼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 초대 교회에서 성령을 속이는 거짓이 들어오는 것은 큰 죄였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거짓이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탄에게 사로잡혀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순수한 초대 교회를 더럽히고 어지럽히려고 했다.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예루살렘 교회에 위선(僞善)과 외식(外飾)이 들어오게 하여서 예수님이 그렇게도 미워하셨던 바리새 종교로 물들게 하려고 하였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의 눈을 속이는 거짓 종교로 타락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준엄한 심판을 시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갓 탄생한 초대 교회의 성결을 지키고 바리새주의의 누룩이 퍼지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둘째, 오늘날 이런 준엄한 심판이 많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죄가 적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와 같은 죄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을 수 있지만, 그때와 같은 벌을 즉각 내리시지 않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롬 2:4).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신다. 물론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와 같이 무서운 징벌을 행하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그렇게 행하시더라도 하나님께는 잘못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는 그런 벌을 받고도 남을 만큼 크고도 무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그때처럼 그렇게 무서운 심판을 즉각 행하지 않으시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에는 왜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지 아니하셨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사항이지만, 그때는 교회의 성결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교회의 성결은 중요하지만 그때는 오직 예루살렘 교회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초창기였다. 그래서 두고 두고 오는 만대의 교회에게 교회의 성결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을 주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대의 교회에 교훈을 주시기 위해 본보기로 그런 심판을 행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처음 정복했을 때 첫 성 여리고를 완전히 파괴하여 하나님께 제물(헤렘)로 바친 것과 같다.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받아 마땅한 가나안 땅 전체를 대표한 제물로 여리고 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때때로 무서운 심판을 행하신다.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완악하게 될 때 경우에 따라 하나님은 준엄한 심판을 행하시기도 한다. 특별히 성령의 역사가 강한 곳에서 그런 심판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며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 12:29).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일어나며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도록 해야 한다(벧전 5:6).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실 수 있지만 오래 참으시고 용납하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을 보시고 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누리고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주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그의 보혈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의지해야 할 것이다.
II. 핵심 메시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된다.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 준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공명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거짓을 행하고 위선을 행하는 것은 멸망받아 마땅한 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아니하고 사람의 눈만 의식하고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의 눈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을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와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즉각 벌하시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사함의 길을 열어 주셨다(시 130:3-4).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덮어 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을 행하는 사람의 죄에 대해 언제든지 개입하시고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 물론 마지막 날 심판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심판하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특별히 간섭하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악인의 죄는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즉각 심판하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행하신다.
III. 설교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참 불행한 부부입니다. 어쩌면 신약 성경에서 가장 불행한 부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재산을 바치다가 참변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다가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재산을 바치다가 벌을 받아 둘 다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1. 그들은 성령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땅을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가지고 왔는데, 문제의 핵심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보지 못하였으니까 모를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땅을 판 값이 이게 전부 다라고 말하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부부의 생각과 행동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으니 얼마나 큰 죄이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하였습니다(3절). 여기서 핵심은 땅 값을 적게 내었느냐 많이 내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를 내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땅을 팔지 않고 그냥 두어도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탄에게 미혹되어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초대 교회에 큰 시험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에 탄생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거짓이 들어오고 위선이 들어오면 교회가 처음부터 거짓되고 혼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준엄함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즉시 그 혼이 떠나 죽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먼저 죽고 세 시간쯤 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똑같은 거짓말을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참 불행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교회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준엄한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들은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위선과 외식을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사람의 눈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속에는 온갖 인간적인 공명심과 이기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미워하셨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外飾)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초대 교회는 속에는 온갖 탐욕과 불법이 있으면서도 겉만 번지르 하게 꾸미는 바리새 종교로 전락할 위험이 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복음은 무효가 되고 예수님의 사역도 허사로 끝나게 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엄한 심판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교회의 성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부족함이 많고 죄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도 때때로 거짓이 있고 헛된 공명심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즉각 벌하지 않으시는 것은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롬 2:4).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생각하고 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벧전 5:6). 우리의 행위로 볼 때 우리는 즉각 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어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개입하시고 즉각 심판을 행하십니다. 대개는 오래 참으시지만 어떤 악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시고 심판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개입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경우에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며 겸손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십니다. 대개는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다 갚으시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시 130:3).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살며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삽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얻고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출처] 아나니아와 삽비라(그말씀)|작성자 chang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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