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 하는가?(히6:4-6)
역사적 배경
초대교회는 누구를 성도의 교제에 들어오게 하는 일에 대해 아주 신중을 기했다. 죄를 범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공개적 회개를 통해서만 그 교제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그러나 살인이라든가 간음 또는 우상 숭배와 같은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성도의 교제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순교당하는 것이 두려워 우상 숭배를 했을 경우에는 두 번 다시 성도의 교제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웬만한 일은 대충 넘겨 버리는 등 징계에 대해 그다지 엄하지 않았다. 터툴리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감독 제피리누스(Zephyrinus)가 간통한 사람들의 회개를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성도의 교제를 다시 나눌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책망하고 있다.
노바투스(Novatus)와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는 극단적인 정반대의 길을 취함으로써 이 방종에 대해 대항했다. 그들은 세례 받은 후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하지 않았으며 성도의 교제에도 다시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치리에 질린 그 추종자들은 아주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사람들만 성도의 교제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노바투스와 노바티아누스가 그토록 엄하게 치리했던 것은 세례의 본질적 성격에 근거해서 교회의 기강을 잡아 보려 한 데서 연유한다. 세례의 본질적 성격이란, 일단 한번 받고 나면 또 다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받을 때 죄로부터 깨끗이 씻음 받은 사람들이 다시 그 죄에 빠지는 것에 대해 용서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브리서 6: 4-6 말씀이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성경의 한 구절이나 한 본문에서 어떤 특별한 교리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 말씀 전체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을 때 항상 그 구절이나 본문에 대한 오역 또는 오용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해서 이 히브리서 말씀도 역시 오역되고 오용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볼 때, 노바티안들이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아 성도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없도록 한 것은 복음의 사랑 및 징계의 규범에 어긋난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그것은 잘 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히브리서 6: 4-6 말씀에 대해서 노바티안들에게 어떤 해명을 해주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말씀에 섣불리 동의했다가 불리한 판단이나 비판을 받게 되느니 차라리 이 히브리서 말씀의 권위에 동의하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나중에 가서야 몇몇 학자들이 자신들의 건전한 해석에 근거해 볼 때 이 본문이 노바티안들의 엄한 치리를 정당화 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밝힌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에 굴복하기보다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 태도는 성경 진리에 아주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것으로 증명되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과 무지로 말미암아 그 가르침에 대해 무어라 해석하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서신(히브리서)은 결국은 그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논쟁은 그 때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파묻혀 있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세례 받을 때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다시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성도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시대에도 역시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이 참 신자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참 신자들도 얼마든지 타락해서 마침내 멸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은 절대 궁극적으로 타락해서 영원히 멸망할 수 없다고 가르치면서, 이 구절의 말씀은 참 신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만약 본문이 참 신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면 그 구절은 참 신자들이 타락해서 배도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경고라고 본다.
또 이 구절을 읽거나 듣고서, 자기들은 복음을 믿는다고 선언한 후 침륜에 빠져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이 구절에 나오는 죄를 범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영락없이 지옥에 가게 생겼다고 믿고 낙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발아래 엎드려 용납되기를 구하는 사람은 낙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런 의도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부주의한 신자들 모두에 대한 경고로 쓰여 진 것만은 사실이다.
히브리서 6: 4-6
(히 6: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공부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의 문맥 그리고 누구에 관해 쓰여 졌으며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두루 다 살펴보아야 한다.
문맥. (한글 개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본문은 “왜냐하면”(for) 이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이 말씀 전에 쓰여 진 글로 돌아가서 이 말씀이 쓰여 진 원인을 발견해야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이라는 단어 바로 앞에 있는 말은“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9절에 보면, 히브리서 저자가 신자들은 이보다 낫고 구원에 가깝다고 확신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말은 본문이 신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신자들에게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이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이런 사람들은 게으르며 무지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믿음의 지식과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있어서 자라가는 대신 잘 해보았자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요 아니면 오히려 퇴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한다. 복음을 아는 지식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라가지 않으면 결국 믿기 이전의 불신과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가서 복음을 부인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자들을 경고하기 위해, 처음 공중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시작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무지와 태만으로 말미암아 옛날 상태와 습관으로 돌아가서 결국 복음을 저버리게 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엄한 경고의 말씀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누구에 관해 쓰여 졌나. 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큰 특권과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특권과 혜택을 경멸하고 등한히 함으로써 복음에서마저 떠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그들은 절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히 2:3참조)
이들이 누렸던 특권은 성령의 특별 사역에 기초한 것으로 복음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주의의 율법 아래서는 이런 특권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었다.”(갈 3:2참조) 이 특권은 곧 그들이 복음의 큰 특권인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원 얻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본문은 그들에 대한 은혜라든가 자비의 언약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그들의 믿음의 역사나 순종의 의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칭의 되고 성화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선언도 없다. 나중에 가서 서신의 저자는, 독자들이 그 서신에 묘사된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근거 위에서 그 당부를 하고 있다.
(1) 참 신자는 구원에 따르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들은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특징들 중 어느 것도 구원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상태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은 틀린 말일 것이다.
(2) 참 신자는 그들의 순종과 삶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그들의 사랑의 수고요 행위이다.(10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기록한 사람들, 즉 영원히 멸망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런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진지한 사랑의 열매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
(3) 참 신자는, 영원히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 아래 살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잊어버리는 불의한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 약속이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면으로 보나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안전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사람들이 되기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 반대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그들이 참 신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자칭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복음의 특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원이 수반되지 않는 복음의 특권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적 특권은“비췸을 얻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 번 비췸을 얻고” 시리아 번역본에는 이 말이 “한 번 세례를 받았다”로 되어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조명(照明)”이라 불렀으며 “비취다”라는 말을 “세례 주다”라는 뜻으로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세례식 때 새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켜 “빛의 생애들”이라 불렀다. 시리아어 해석자는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 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해석 속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교회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세례는 오직 한 번만 받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세례를 “조명”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개종자가 교회의 신비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음으로 개종자들은 어둠의 나라로부터 빛과 은혜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 말은 본문이 세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세례는 본문에 기록된 나머지 모든 영적 특권들을 누릴 수 있는 시작이요 기초이기 때문에 본문이 세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사도 시대에나 가능했던 특이하고 놀라운 영적 은사들을 덧입혀 주는 일이 예사였다.
“비췸을 받은”이라는 말이 이와 다르게 해석될 필요가 없다면 나는 아마 이 견해를 지지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단어가 신비스럽게 세례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본 서신과 신약의 다른 부분들이 쓰여 진후 꽤 오랜 시간, 적어도 한 두 세대는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단어는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외적 의식 집행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어떤 단어의 뜻을 해석할 때 성경의 다른 모든 부분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 그 본문이 반드시 그 뜻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그런데 히브리서의 이 본문은 그렇지도 않다 - 건방진 일이다. 여기서 “한 번”이라는 단어는 “비췸을 받은”이라는 말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따라서 “한 번”은 본문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특권과 축복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비췸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종종 보면 “가르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비췸을 받은”이라는 뜻의 헬라어로 번역되고 있다.(출 4:12; 시 119:33, 잠 4:4; 사 27:11과 같은 구절들)히브리어로 “가르치다”라는 말이 70인 역에(헬라어 구약성경)에서는 “비췸을 받은”으로 번역되어 있다(삿13:8; 왕하12:2, 17:27). 바울은 이 단어에 해당되는 동일한 헬라어를 고린도전서 4:5과 디모데후서 1:10에서 사용하고 있다.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저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또한 요한복음 1:9에서도 이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침을 통해 “빛을 주신다.”
바울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었느니라.”(고후 4:6)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는 빛”이란 복음이 갖고 있는 영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복음의 교리에 대해 가르침 받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 안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영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우선 복음이 그 빛으로,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들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딤후 1:10)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데서 나와 그의 기이한 빛으로”(벧전 2:9 참조) 들어갈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복음이 없는 이 세상은 사단의 왕국이요(요일 5:19참조),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그 악한 자,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능력 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흑암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상은 “어두운 곳”(벧후 1:19)이다. 이 세상은 무지, 어리석음, 오류, 미신 등이 거하며 다스리는 곳이다. 이 어둠의 막강한 세력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것을 가리켜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요일 1:6)고 말한다.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의 반대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요일 1:7)이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아는 지식 안에 있는 이 가르침 때문에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가리켜 ”조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그 자체가 빛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갖고 있는 이러한 영적 진리들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그 마음 자체가 “조명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과 무지 및 혼돈이 추방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목 시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의 직무와 사역 및 중재 역할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다른 교리들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 알게 되면 사람들 마음에 영적인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동안에는 전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진리들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엡 4:18 참조)
그런데 이 빛과 지식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그 등급은 그들이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또 배운 것을 얼마만큼 수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배운 것을 학습하고 기억하는 데 얼마만한 노력을 쏟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아무튼 복음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사람의 마음이 빛을 받아 어둠과 무지로부터 자유케 될 수 있는 것이다.(벧후 1:19-21 참조).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렸던 특권이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을 때 그 가르침에 의해 비췸을 받은 자들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질 때 깊은 감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 다 같이 임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마음이 비췸을 얻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 있는 진리들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요, 우리로서는 굉장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태만이라는 죄로 말미암아 이 크신 긍휼과 특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죄와 판결이 더욱 중해진다.
이 큰 특권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복음을 아는 지식에서 커가려 하지 않을 때 그런 사람의 형편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결국 완전히 타락하여 다시 회개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도 혹시 본문에 나온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아닌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일을 위해 구원에 수반되는 특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첫 번째 특권은 “영적 비췸”(또는 영적 조명)이다.
이 세상에는 일종의 순수 자연 학문처럼 성령의 사역이나 특별한 도우심을 받지 않고도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적 지식이 있다. 그것은 여느 다른 학문이나 예술과 같이 연구와 노력을 통해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췸”은 성령의 선물로서 자연적 지식과는 다르며 그 지식을 능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췸을 받아 영적인 것들을 깨닫게 될 때는 그 본질적인 것, 즉 어떠한 자연적 지식으로도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조명은 성령의 일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고전 2:14 참조) 그러나 영적 조명을 인간의 마음에 영적 복락들에 대한 만족감과 기쁨을 부여해 준다. 이 영적 조명이 비치면 비록 복음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의(義)의 도(道)”(벧후 2:21 참조)임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연적 지식은 인간의 영혼에 아무 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즉,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떠나게 하지도 못할 뿐더러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지도 못한다. 많은 죄인들이 이 자연적 지식의 그늘 아래 있으면서 자기들은 안전하여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놓고 있다. 그러나 영적 조명은 인간의 양심과 영혼에 효과적으로 일하면서 그 영혼이 죄로부터 멀어져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이 조명의 능력과 이 조명이 주는 확신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게 흠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이 영적 조명에도 역시 영적 은사들이 수반된다(마 7:22 참조) 그러나 자연적 깨달음과 지식에는 이러한 영적 은사들이 뒤따르지 않는다. 영적 조명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구원의 빛과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첫걸음이라고는 할 수 있다. 영적 조명을 받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아마 영적인 일들의 아름다움과 그 영광 및 탁월함을 어렴풋이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꾸준히 깨닫게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직접적이며 꾸준한 깨달음은 인간 이성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고후 3:18, 4:6참조) 이 영적 조명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인간의 가슴에 심어 주고 그 의지를 변화시킴으로 영혼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화(化)하게 해주는 일도 하지 못한다. 그 일은 오직 구원하는 빛과 지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후 3:18; 롬 6:17, 12:2 참조)
(2) 두 번째로 언급된 영적 특권은 그들이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하늘의 은사라는 것이 무엇이며 이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라는 말은 때로 주는 행위를 뜻한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부어 주신 관대한 정신을 말한다. 즉, 그들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넘치도록 관대하게 헌금할 정신을 부어 주신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즉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 대로”(롬 5:15-17; 엡 3:7 참조)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자체를 말할 때도 있다(약 1:17참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 ……알았더면.”(요 4:10), 즉 “하나님께서 주신 것 혹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알았더면”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선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맥을 볼 때 선물은 성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생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수는 주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선물”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서나 성령을 말할 때 사용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 2:38에 나오는 “선물”(“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성령은 기적을 행하시는 그의 능력 가운데서 주어진다(행 10:45, 11:17참조).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곧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다.
성령은 하늘로부터 오시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천상(天上)적”이라고 말한다. “천상적”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성령의 사역과 능력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과 능력은 세상적이요 육신적인 것과 반대되는 천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후 친히 보내시는 성령 자신을 말할 때 쓰인다(행 2:33참조).
성령에 대한 약속은 곧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혹은 “위로부터” 보내심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위에 계신”하나님 이라고 할 때 그 말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과 같은 이치이다(신 4:39; 대하 6:23; 욥 31:28; 사 32:15, 24:18 참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기 전 그의 사역을 위해 기름 부으시려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위로부터 임하셨다(마 3:16 참조). 오순절 날에는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처럼” 사도들에게 임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보내신”(벧전 1:12) 성령이라고 했다. 물론 성령께서 보내신 다른 은사들에 대해서도 “하늘의 은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늘의 은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 친히 보내 주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늘의 은사”란 곧 성령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해석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다음에 바로 성령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무엇 때문에 성령을 두 번이나 언급했단 말인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즉,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똑같은 것을 서로 다르게 두 번 언급하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처럼 그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는 특권이 “하늘의 은사”를 부연 설명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로서 여기서도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 굳이 이 해석을 부인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은 복음 시대의 큰 선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성령은 하늘에 더 이상 계시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위에서의 특별 사역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큰 선물이다. 성령의 특별 사역이란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 특권에서 보면 성령의 외적 사역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신약 시대 아래에서 주어지기로 약속된 하늘의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예배 의식을 제정하실 것이다. 성령에게는 교회 개혁의 임무가 주어졌는데 이제 그 때가 온 것이다(히 9:10참조). 하늘로 승천하실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 시대 이래로 지켜져 내려오던 구약의 예배법을 그대로 두고 가셨다. 비록 그 예배를 근본적으로 아주 풍요롭게 만들어 놓으시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오시기 전까지는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행 1:4,5참조). 따라서 신약 시대를 위해 약속된,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신 성령께서 임하시는 때, 모세식의 옛날 예배를 모두 제거해 버리신다. 그는 이 일을 행하시되 그동안 모세 식 예배가 이제 올 것이라고 상징하며 지적해 주었던 모든 것을 드러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 이제 성령께서 복음이라는 거룩한 새 예배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이전에 행했던 성전 예배를 대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와 예배에 있어서 이 새 복음 상태를 소개하기 위해 특별히 주어진 하나님의 영을 가리켜 “하늘의 은사”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서신을 읽는 독자들은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히 12:25)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복음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이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
이제 “이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단어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해본다 혹은 시도해본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즉, 어떤 것을 “경험”해 본다는 의미이다. 음식 먹을 때를 예로 들면 아주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먼저 맛을 본다. 맛을 보는 행위 속에는 삼키거나 소화시키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것을 맛보았다가 그 맛이 싫으면 뱉어 버린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마 27:34참조).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어떤 구절들을 보면 “맛본다”는 말 속에 실제로 먹는 행위까지 포함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은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삼하 3:35)고 맹세하는데 여기서 맛본다는 말은 “내가 해 지기 전까지는 떡이나 무엇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맛도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맹세를 한 다윗이 무엇을 먹었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요나단이 꿀 조금을 맛보았다고 했을 때(삼상 14:29참조) 는 또 다르다. 그때 그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꿀을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고 맛만 보았으니까 사울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아무튼 이 단어는 누군가가 무엇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현숙한 아내는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안다(taste)”.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자신이 직접 무역을 해보았고 그것이 이로움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을 직접 맛보고 그것이 좋음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맛본다는 말은 어떤 것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베드로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벧전 2:3). 따라서 “맛본다”는 말은 어떤 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 서신을 받은 교인들이 누린 영적 특권이란 곧 복음 안에서 제공된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체험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진리를 계시하신 자요 복음의 새로운 영적 예배를 소개하신 분으로서의 성령을 체험한 것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도래된 이 새로운 상태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맛보고 체험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리지 못했던 하나의 특권으로서 말이다. 그것을 맛봄으로써 그들은 이 복음이 자신들이 과거에 드리던 예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에 의해 그들에게 온 그 복음의 영광을 체험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이 특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묵은 도토리를 되찾기 위해 이 가장 좋은 밀을 버리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이 영적 특권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하늘의 은사임을 배운다. (요 3:12; 엡 1:3참조) 따라서 그것들을 등한히 하거나 경멸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히 2:3참조)
우리는 성령이 신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성령은 복음의 신비를 계시하고 영적 예배 및 그에 관한 규례들을 도입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또한 배운다.
우리는 이 하늘의 은사에는 선함과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그 선함과 영광은 어느 정도 “맛보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 진리를 말로는 맛보아 알지만, 그 진리로부터 생명을 주는 능력은 맛보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도 순서에 따라 예배는 드리지만 그 예배가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적 아름다움은 보거나 체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의 선물은 체험하지만 교회의 은혜는 체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복음 안에 있는 그 부요함과 영광을 조금 체험한 후 그 복음의 진리와 영적 예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무시하는 행위로, 그 당사자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3) 세 번째 특권은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모든 영적 특권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앞뒤로 각각 두 가지 은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은사들은 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성령에 참여한바”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 성령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도 되고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에게 그의 사역을 행하신다는 말도 된다.
우선 “이 세상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요 14:17참조). 그래서 이 세상이 참 신자들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령에 참여한 자들이 아니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 안에 거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 안에 거하시게 하도록 성령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체험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 그들은 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영적 은사들 중 어떤 것들을 받아 누리는 특권을 가졌다(고전 12:11참조).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이 아무런 영적 은사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가 성령에 참여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행 8:21참조). 이처럼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 위에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 중 어떤 것을 체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모든 특권이 다 성령의 은사요 사역 아닌가? 만약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말이 그의 은사와 사역을 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특권이 구태여 본문에 언급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성경은 우리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똑같은 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나 여기 본 서신의 저자는 아마 이 배도자 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 그토록 은혜스러웠던 성령,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 큰 영적 은사들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신 성령께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경멸과 모욕을 가하고 있는지 깨달으라는 말이다.
다른 모든 특권들이 성령께 달려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는 이 특권이 한 중앙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의 은사”인 성령께서 “그들에게 비췸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체험하는 가운데 그들은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이다.
이 특권은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이런 일들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데 그 체험이란 그들이 이런 일들에 대한 설교를 듣거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하게 해주셨다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그들 자신이 이런 일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친히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은사 사역으로 말미암아 혜택을 입고 그 은사들에 동참한다는 것과 자기가 직접 그 은사들을 받는다는 것과는 서로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그들이 복음 아래서 누리게 된 그 큰 특권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 특권은 그들이 유대주의 아래서 누리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주의 아래서는 성령이 계시다는 소리조차 별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행 19:2참조). 그런데 이제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령에 참여한 자들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입장에서 볼 때 이처럼 큰 특권을 등한히 하고 경멸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사악한 배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다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롬 8:9참조). 성령의 은사들은 받았으나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마 7:22,23참조).
(4) 이 배도자들이 누린 네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본” 것이다.
여기 “말씀”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본래 구어, 즉 입으로 낸 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 서신에서만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히 1:3, 11:3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로 “입으로 낸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하면 설교되고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롬 10:17; 요 6:68참조) 따라서 이 배도자들이 맛본 것은 설교되어진 복음이었다.
그러나 유대주의 아래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지 않았던가? 물론이다. 그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겼다.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롬 3:2)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좋은 일들(그들이 맛본 특권들)이 전해지게 된 것은 복음 아래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뿐이다.(롬 1:16; 행 20:32; 약 1:21참조)
이 말씀은 꿀이나 송이꿀보다 더 단 “좋은” 것이다(시 19:10참조). 특히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선한 말씀”(렘 29:10)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은 약속된 “선한 일”이다(렘 33: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화와 구원이라는 “복된 좋은 소식”인 것이다.(사 52:7)
본 서신의 저자는 그들에게, 전에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배도자들은 복음을 믿는 참 신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영접하여 생명의 떡 되신 그를 먹고 그로 말미암아 사는 그런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요 6:35, 49-51, 54-56참조)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영혼을 위한 영적 음식을 받아먹어 소화시킴으로써 그 음식을 자신의 영적 양분으로 삼은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영적 건강과 성장을 위한 젖으로 생각하고 소원해야 마땅한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 그 선한 말씀을 등한히 하고 이제 그 말씀으로부터 돌아섰다. 마치 자기 앞에 차려진 음식을 우습게 여기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그 선하심과 영광은, 그 말씀에 절대로 진지하게 순종하지 않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매혹시키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의 말씀 및 그 약속의 성취를 설교하는 데는 특별한 선하심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고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하늘의 영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바람직하고 아름답다. 인간의 마음이 진리를 받으면, 진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그 마음을 일치시키면서 그 마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준다.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또한 선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진리와 선을 나란히 적어 놓았다(빌 4:8참조). 그리고 진리는 그 자체가 선하므로 마음에 미치는 영향 또한 선하다. 진리는 마음에 평안과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어둠, 오류와 거짓은 그 자체가 악하므로 인간의 마음을 교만, 불안정, 미신, 두려움 및 속박으로 채운다. 영혼을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이다.(요 8:32참조)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전하고 순수하며 확실한 진리이다(요 17:17 참조). 하나님의 말씀에 없으면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추측으로 방황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만이 변함없이 확고하며 절대 무오하다. 이것이 영혼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무오한 진리로서 눈을 밝게 하고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있는 선한 가르침 때문에 선하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이 말씀 안에 선포되고 있다. 유일하게 선하실 뿐 아니라 모든 선의 유일한 원천이요 근원 되시는 하나님, 그분의 즐거움 안에 모든 안식과 축복이 놓여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계시, 그분의 본질과 속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선한 것으로 만든다(요 17:3 참조). 온 세계 및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그의 말씀은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렘 9:23,24 참조). 하나님의 말씀은 삼위일체라는 영광스러운 신비를 계시하고 있는데 그 점 때문에도 역시 놀랄 만큼 선하다. 다른 모든 거룩한 진리들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곧 삼위일체라는 신비요 그에 대한 지식이다. 그 진리 없이는 어떠한 진리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또 어떠한 진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고자 하시는 참 선(善)으로 인도해 주지 못한다. 이 진리만이 영혼에 참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신앙 면에서나 순종 면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미흡한 신자라도 이 진리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삼위일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모든 은혜와 진리가 다 삼위일체라는 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들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모든 능력을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따라서 이 신비를 계시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 우리 것이 되게 되어있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 용서, 칭의, 양자 삼음 그리고 다른 모든 놀라운 축복들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선하다.
그것은 또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복된 효과 때문에 선하다(시 19:7-9, 행 20:32, 약 1:21 참조).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탁월함, 가치 및 선하심과 견줄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선하다.
본문의 그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이 진실됨을 인식했을 때 이 말씀을 맛보았다. 이것이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새롭게 됨을 받지 못했다. 세례 요한이 진리를 설교할 때 들은 자들은 그 진리로부터 얻은 마음의 만족감 때문에 즐거워하였다(요 5:35 참조).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은 자들 가운데서도 나타났다(눅 4:22, 요 7:46 참조). 우리 주요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정욕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의 오염들을 피하고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청산할 때, 인간은 그 마음에 안식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선하심과 달콤함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을 맛본”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씀 안에 있는 가르침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그 선하심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들이 그들이 장차 누리게 될 것들에 대한 소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자비, 용서, 생명, 영원히 죽지 않음, 영광,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안에 선포되어 있다. 그들은 이 진리들을 기쁘고 만족스럽게 맛본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들은 그것들을 정말 받았으며 그것에 순복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진리들을 정말 받지도 못했고 그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기 때문에 핍박자의 불이 일어나면 곧 넘어져 버린다(마 13:20 참조).
이것을 맛봄으로써 마음과 양심에 말씀이 효력을 발하여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또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으며 기쁨과 만족을 느낄지도 모른다(겔 33:30-33 참조). 그들은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들은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을 기쁘게 듣고 많은 일을 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맛만 보았을 뿐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당시 많은 군중들 역시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실제로 영접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군중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맛봄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을 줄 뿐 아니라 들은 것들에 대해서도 역시 기쁨을 갖게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 구주께서 돌밭에 비유한 그런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았다(마 13:20 참조).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요 5:35 참조). 오직 맛만 보았기 때문에 그 말씀은 그들이 들은 것에 대한 기쁨만 일으킬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기쁨은 견고하게 내주하는 그런 기쁨이 아니다. 이것은 참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아니다(벧전 1:8 참조). 그들의 기쁨은 곧 사라져버리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비, 용서, 은혜, 영원한 생명, 영광에 대해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이런 것들을 확실히 받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면 많은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될 만큼 그렇게 삶에 변화와 개혁이 일어날 수도 있다(벧후 2:·18, 20; 막 6:20 참조).
복음의 말씀과 복음 안에 선포된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이다. 참 믿음은 이것을 맛볼 뿐 아니라 양식으로 섭취하여 은혜 및 영혼의 양분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먹고 살려면 먼저 그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눅 1:66, 2:19 참조). 음식이 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어떤 자양분도 그 음식으로부터 섭취할 수 없다. 위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 음식이 소화되어 온몸에 자양분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묵상과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지 않는다면 그 말씀 때문에 잠시 기뻐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영혼을 위한 양식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음식은 소화액과 섞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분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음식을 준다 해도 그 사람이 소화액의 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라면 그 음식은 양분이 되어 그 사람 몸속으로 흡수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믿음으로 소화되어 가슴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절대 우리 영혼을 위한 양분이 되지 못한다(히 4:2 참조). 이것은 단순히 맛만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사람이 말씀을 먹고 살면 그 말씀이 인생의 원리가 되며 영적 성숙을 낳는 영적 힘이 된다. - 이것은 맛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음식이 소화되면 피와 살이 되듯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도 우리 영혼에 생명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우리 안에 사시게 된다.”(갈 2:20; 골 3:3 참조). 우리는 말씀에 의해 영적으로 성장한다(벧전 2:2 참조). 단순히 맛만 보는 것은 순간적인 상쾌함은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내주하는 힘은 절대 부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즐거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자기 가슴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적 생명도 소유하지 못하고 영적 능력이나 성장도 누리지 못한다. 말씀을 진실로 받으면 그 말씀이 영혼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자신처럼 만드시기 위해 이 음식을 보내 주신 하나님처럼 말이다(엡 4:21-24; 고후 3:18 참조). 그러나 단순히 맛만 보고서는 이 중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또한 모든 시련과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말씀에 충실할 정도로 진리에 대한 사랑을 갖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살후 2:10 참조). 또 맛만 보고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언급된 특권은 “내세의 능력”이다.
그 배도자들은 이 특권 역시 개인적 체험으로 맛보았다. 이 내세의 능력이란 성령의 크고 놀라운 활동과 사역을 말한다. 성령께서 행하실 이적과 기사 및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는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바 있다(욜 2:28-32; 행 2:16-21 참조). 이 배도자들도 이러한 능력들, 즉 방언의 은사라든가 성령의 다른 기적적 사역들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부여하신 성령을 무시한다는 것은 성령 모독죄를 쌓는 행위로 그들의 죄만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많은 이적과 기사로 하나님이 증거 하신 진리 그리고 성령이 나누어 주신 여러 은사들과 이적들로 말미암아 증거 된 진리를 거절하고 있다(히 2:4 참조). 그렇다면 성령이 나누어 주신 초자연적 은사들로 말미암아 증거 된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고 멸시했으니 저들이 어찌 피하리오(히 2:3,4)?
성령이 주시는 보통 은사들도 역시 “내세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모든 것 역시 내세의 능역이다. 왕국을 처음에 세울 때는 큰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왕국이 일단 세워지고 나면 보통 능력만으로도 그 왕국을 지킬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처음 세울 때는 성령의 특별한 기적적 은사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단 세워지고 난 후부터 그 왕국은 보통 은사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보통 은사들 역시 “내세의 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 하는가?/존 오웬/포도나무 선교회- cafe.daum.net/correctthe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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