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장 주석
●신앙 완성을 향해 전진해야 할 그리스도인(히브리서 6:1-8)
위의 구절에서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충고를 주고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자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새 사람이 되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큰 용기를 주기 위하여 자신까지 포함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나아갈지라(1절)"고 말하였다.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식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초보적인 지식에서 떠나야 한다고 해서 그 지식을 버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식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며, 또 멸시하여도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초보적인 진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또 그 진리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초보단계에서 머물고 쉬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항상 기초만 놓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며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기초를 놓는 것은 건물을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초 위에는 반드시 건물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바울이 왜 유대인들이 어린아이의 단계에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에게 강한 고기를 먹이려고 결심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 대답은 이것이다.
1. 비록 유대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아직도 약한 단계에 있었으나 그들 중의 얼마는 보다 강한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다 성장한 사람에게는 그의 상태에 알맞은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리고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초보적인 진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야만 한다면 반면에 약한 사람들도 강한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좀 더 어렵고 신비한 진리를 기꺼이 들으려 해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2. 바울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강건하여지고 성장하기를 소망하였다. 그래서 강한 고기를 소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Ⅰ. 바울은 몇 개의 초보적인 진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초보적 진리들을 잘 깨닫고 난 다음에 건물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 자신이나 그들도 이 기초를 되풀이하여 놓는데 시간을 다 소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초보적인 진리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말하였다.
1. 죽음에 이르는 행실에 대한 회개. 즉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와 영적 죽음을 향한 길로부터 돌아서서 중생 하는 것을 사도는 첫 번으로 들었다. 그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라 하겠다. "너희 영혼 가운데 있는 은혜로 받은 영적 생명이 파괴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너희는 회개로 인해 심령이 변화되었고 또 이로 인하여 너희 생명도 영적 생명으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그럴 때 너희는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다시 죄를 범하면 다시 죽을 행실에 대해 회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죽은 행실로부터 돌아서는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하는 죄가 곧 죽음에 이르는 행실인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죄는 또한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 죽은 일을 회개하는 것이 옳게 이루어지면, 죽음에 이르는 행실에서부터 돌아서게 심령과 다같이 변하게 된다.
(3) 죽음에 이르는 행실에 대한 회개와 그러한 행실로부터의 돌이킴은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기초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새롭게 회개해야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기초를 다시 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하나님의 실존과 그의 성품과 속성과 완전성, 또한 그가 인격에 있어서는 삼위를 이루고 있지만 본질은 하나가 되심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말씀 가운데 계시되어 있음과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성경의 말씀에 대하 확고한 믿음을 바울은 두 번째로 들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모하며 또한 우리의 행위로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죽음에 이르는 행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연관된 것으로 항상 언제나 병행한다. 그 두 가지 일은 분리될 수 없는 쌍둥이와 같은 것으로 한편이 없이는 다른 한편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2) 이 두 가지는 초보적 진리로써 처음에 잘 놓여져야 한다. 또한 이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할 필요가 생길 정도로 이것들을 허물어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앙에 다시 빠져서는 안 된다.
3. 또한 세례의 교리를 기초적 진리로 바울은 제시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하였다. 세례란 은혜의 계약의 징표이며 은혜의 계약에 대한 보증이다. 세례란 세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 계약에 대하여 알려고 힘쓰게 하기 위해 또 새 계약을 따르기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세례는 세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 계약에 포함된 축복의 약속은 진실하고 틀림이 없는 것임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바울이 말한 세례에는 외적인 세례만이 아니라 내적 세례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내면적인 세례란 곧 성령의 세례로써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의 영혼에 뿌리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으며 또한 성령의 은사로 거룩하여져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세례는 바르게 집행되어야 하는 기초적 진리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례를 날마다 기억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되풀이 해석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4. 또한 약속은 이 기초적 진리로 안수를 말하였다. 이 안수는 세례를 받아 믿음이 확고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선한 양심을 지니고자 하며 또 그의 성만찬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안수는 완전히 교인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안전한 교인 자격을 얻게 될 때는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특별한 방법을 통해 전달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 안수도 한 번 받으면 또 다른 안수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이루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또는 이 안수는 사역자로서 사람을 임명하는 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이 안수를 통해 그들은 사역자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게 되며 사역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안수는 기도와 금식을 하는 가운데 장로회의 손을 얹으므로 주어졌다. 그리고 이 안수는 한번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5. 또한 바울은 기초적인 진리로써 죽은 자의 부활, 즉 죽은 육체가 부활을 하였었다. 즉 죽은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결합함을 말하였다. 이 부활한 몸은 그들이 죽을 때 하나님을 향한 바라는 상태에서 죽었느냐 또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 온 생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느냐에 따라서 축복을 받든지 또는 저주를 받게 된다.
6. 또한 바울은 초보적 진리로 영을 말하였다. 이 심판에 의해 우리가 죽을 때 육신에서 벗어난 영혼의 갈 길이 결정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영혼과 몸이 영원히 있어야 할 곳이 이 심판에 의해 정해진다. 그들은 각자 이 세상에서 생활한 결과에 따라 그들의 영원히 거할 곳을 지정 받게 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벌을 받을 것이요, 의인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초보적 진리들은 사역자들이 사람들에게 확신 있는 태도로 가르치고 또 사람들로 그같이 살게 해야 하는 진리인 것이다. 교인들은 이 초보적 진리를 잘 가르침을 받고 또 이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들은 결코 이 진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 기초적인 진리 없이는 다른 모든 신앙도 지탱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Ⅱ. 바울은 히브리인들이 이 기초 위에 완전한 건물을 이루기까지 그들을 도울 결의와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절)고 본문에서 말하였다. 이 구절에 의해서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가르쳤다.
1. 옳은 결단은 신앙의 증진과 향상을 위해서 매우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결단과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의존에서 나온 결단이 옳은 결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사역자들은 교우들에게 그들이 행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 앞서 솔선하여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한다.
Ⅲ. 바울은 이러한 영적 성장이야말로 믿음을 배반하는 끔찍한 죄를 막기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1. 바울은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과 멀어질 수 있는가를 말하고 또 그 결과는 믿음을 버리게 되고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4,5절0.
(1) "비췸을 얻은" 사람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몇몇 교부들은 이 말씀을 세례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비췸을 얻는다"는 말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고 봄이 옳겠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늘 나라에는 이르지 못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발람은 진리의 눈이 뜨인 자였다"(민 24:3). 그럼에도 그는 그의 열린 눈을 가지고 캄캄한 어둠의 길로 내려갔다.
(2) 사람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을지라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의 어떤 면을 즉 성령이 그들의 영혼 위에 역사하는 힘을 맛보고 신앙의 신비한 맛을 보고서도 믿음에서 떠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마치 시장에 간 사람이 어떤 음식을 사려고 맛은 보았으나 돈이 모자라므로 맛만 보고 사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나 신앙을 맛볼 수는 있다. 또 신앙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어려운 방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다 쉬운 방법으로 믿으려는 자들이고 그러기에 결국은 믿음에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3) 신앙과 떨어진 "성령에 참여한" 사람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성령의 독특하고도 기적적인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타 여러 능력 있는 일을 행한 자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구원을 받지 못할 자들에게도 이러한 은사가 수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본" 사람들도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그들도 복음을 기쁨으로 듣고 그 위로도 받으며 그 말씀을 많이 기억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말씀에 요구하는 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5)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도 타락할 수 있다. 그들 또한 천국과 지옥을 믿을 수 있고 또 하늘 나라에 가고 싶은 욕망도 지닐 수 있으며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이런 자들의 위선은 오래 지속될 수 있으나 결국은 변절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부터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믿음에서 떨어질 사람들도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였다던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배교자들도 행할 수 있는 이러한 놀라운 능력들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받는 은혜를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실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2] 이러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배교한다고 하여 참된 성도들도 결국은 믿음을 떠나고 말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능력,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제, 복음의 약속, 하나님이 성도들과 맺으신 영원한 계약, 성령의 내주(內住), 썩지 않는 말씀의 씨, 이 모든 요소 등이 성도들을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것들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나무는 결코 서지 못할 것이다.
2. 바울은 상당한 수준의 신앙 고백의 단계까지 이르렀다가 후에 배반한 자들이 당할 무서운 사태를 묘사하였다.
(1) 배교라는 죄의 엄청남에 대하여, 그러므로 "배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철저히 욕을 보이는 일이라"고 하였다. 배교자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을 옳다고 인정하고, 만약 그들에게도 같은 기회와 능력이 주어진다면 다시 똑같은 일을 기꺼이 하겠다고 선언한다.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장 큰 저주를 퍼붓는다. 그를 모욕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을 경외하고 그들이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듯이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그를 공개적으로 욕보이고 비방하고자 한다. 이것이 배교의 특성인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이 배교의 특성이다.
(2) 배교자들의 겪을 곤경.
[1] 배교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있는 가망이 없는 자들이다. 배교자들이 돌이킨다는 것은 대단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즉 이런 자들의 영혼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은 참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배교가 성령을 거스리는 죄라고 말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법도에서 어긋나는 배교의 죄임이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그들을 다시 회개케 하실 수 있으나 실제로는 좀처럼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배교자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회개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2] 배교자들이 비참함이 적절히 비유되고 있다. 즉 경작해 논 땅이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오래지 않아 저주를 받아 마침내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이다"는 비유를 바울은 들었다(8절). 이 배교자의 비참한 종말을 보다 강조하기 위하여 좋은 땅과 나쁜 땅의 차이에 대해 본문은 논하였다. 즉 서로 상반되는 요소를 대조시킴으로 양쪽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려 하였다. 첫째, 본문에는 좋은 땅이 묘사되고 있다. "좋은 땅은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한다"(7절).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맛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마셔야 한다. 또한 좋은 땅은 경비를 드릴 만큼의 가치에 해당하는 열매를 맺는다. 훌륭한 신자들 또한 그래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그리스도의 지위 아래에서 땅을 경작하는 자들인 사역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다. 이같이 열매를 맺는 땅과 들은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결실을 맺는 그리스도인을 축복하고,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 또한 결실을 내는 그리스도인들을 복된 사람들로 여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증가되고 마침내는 영광된 자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둘째, 또한 나쁜 땅의 경우가 묘사되고 있다. "나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나쁜 땅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뿐더러 나쁜 것 즉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마찬가지로 배교자들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입히는 죄와 악의 열매만을 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땅은 마침내 제거되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배교자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시고 그의 보호밖에 두실 것이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떠날 것이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래지 않아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축복을 받기는커녕 무서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비록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완전히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셋째, 나쁜 땅의 마지막은 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배교자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배교자들이 맞아야 하는 슬픈 종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은혜 속에서 계속 전파하며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속에서 전진하지 않고 퇴부만 한다면 죄의 결말인 저주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히브리서 6:9-20)
바울은 히브리인들을 각성시켜 부지런하게 하고 또 그들이 배교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두려운 말씀을 전한 후 이제는 그들에게 주어질 소망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그들이 잘 견디리라는 소망을 자신이 지니고 있음을 솔직히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그들로 힘차게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로 격려하였다.
Ⅰ. 바울은 그들이 끝날까지 잘 견디어 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거리낌없이 또 자유로이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말을 하지만 여러분은 더 좋은 구원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9절)라고 하였다. 이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그것을 증거해 주는 표적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구원에 부수되는 증거들이 반드시 있고 또 어떤 사람이 구원의 상태에 있는가 그리고 영원한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들이 있는 것이다.
2. 구원에 이를 자들에게 따르는 증거물들은 위선자들이나 배교할 자들이 흉내낼 수 있는 놀라운 일들 보다 더욱 뛰어난 것들이다. 이러한 증거물들은 그것들의 본질이나 또는 추구하는 목적에 있어서 배교할 자들이 흉내내는 은사보다 더욱 뛰어난 것이다.
3. 구원과 반대되는 어떠한 표시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4. 목회자들은 구원에 큰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가끔 경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만약 그들이 구원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실망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Ⅱ.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계속해서 수행할 것을 격려하며 또 논증으로 그 이유를 보여 준다.
1.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 거룩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심어주셨다는 사실을 들어 바울은 그들에게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전하였다. 이러한 마음은 선한 일을 통해 나타나게 마련이고 이러한 선행을 하나님이 잊으시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0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선행과 수고는 칭찬될 만한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일도 꼭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도들에게 베푼 선행을 자신에게 베풀어진 일로써 간주하신다.
2. 사랑의 수고에 대한 은혜로운 보답을 바라는 자는 능력과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사랑의 수고를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성도를 섬긴 것과 이 제도를 섬기는 것을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가 각 사람이 끝내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3. 해야 할 의무를 끝까지 열심히 하는 자들은 끝날에 올 희망을 완전히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절대적인 확신은 소망에 대한 절대적 확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2) 완전한 확신은 큰 열심과 끝까지 견디는 데서 와지게 되는 것이다.
Ⅲ.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어떻게 끝날까지 희망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주의를 준다.
1. 바울은 그들에게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게으름으로 인하여 사람은 누더기 옷을 입게 된다. 그들은 편함을 구하지 말고 기회를 잃지도 말아야 한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죽은 사람들의 "좋은 본을 따르려 해야"한다고 하였다(12절).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확신하므로 약속을 기업으로 얻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약속을 얻기 전에 벌써 그 약속을 믿었고, 지금은 약속을 기업으로 얻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2) 약속을 기업으로 얻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얻은 방법은 인내와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과 인내가 그들의 영혼에 뿌리 내려 있었고 또 이러한 믿음과 인내는 그들의 삶 가운데서 행동으로 나타났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처럼 약속을 기업으로 받기 원한다면, 우리도 그들을 따라 믿음과 인내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기업으로 얻은 자들같이 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을 따라 갈 것이요, 그들이 받은 축복이 동참자가 될 것이다.
Ⅳ. 바울이 하나님이 약속이 불변함을 완전하고 명백하게 설명함으로써 이 장을 끝내고 있다(13-20절).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맹세로써 보증하신 것이었으며, 이러한 약속들은 하나님이 영원한 뜻 가운데서 유래된 것들인 것이다.
1.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심으로 보증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친히 인봉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서원을 예로써 발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맹세는 모든 참된 믿는 자들에게로 강력한 효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었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11절)라고 하였다.
(1) 약속의 내용. 그것은 "내가 반드시 복 주고 너를 복 주며 너를 완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의 백성들에게 주는 축복이다. 하나님은 그가 진정으로 축복한 자들을 계속하여 축복하실 것이며 그들을 완전한 축복에 으르게 하실때까지 축복을 더욱 더 증강시켜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시는 맹세의 내용.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복되신 위치를 걸고서 맹세하셨다. 어떠한 맹세도 이보다 더 안전하고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맹세가 성취된 방법. 아브라함은 때가 이르렀을 때 그 약속을 얻었다. 아브라함의 끈질긴 인내는 마침내 그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1] 약속과 약속의 성취 사이에는 언제나 간격이 있는데, 때로는 그 간격 시간이 길 때도 있다.
[2] 간격은 믿는 자들이 끝날 때까지 인내하느냐 못하느냐를 시험하는 시험 기간이다.
[3] 인내하며 노력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이 약속된 축복을 얻었던 것처럼 분명히 약속된 축복을 받을 것이다.
[4] 하나님의 맹세하심은 약속에 대한 보증이 되며 약속이 성취되기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된다(16절).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맹세는 확고한 것으로 모든 의심을 말소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맹세할 때 자기보다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걸어 맹세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 하나님의 맹세는 이같은 것이므로 이 맹세에 대한 왈가왈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내적인 갈등 즉 의심과 불신이 있어도 안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이 약속에 대한 논쟁을 벌여도 안 되며 특히 약속하신 분에게 시비를 벌이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낮추시기까지 하며 맹세를 하셨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맹세를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영원한 뜻 가운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약속에 대한 그의 미리 정하신 뜻은 불변의 뜻인 것이다.
(1)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은 성급하게 서둘러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결과인 것이었다.
(2)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뜻과 일치되는 것으로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 성령 사이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3) 이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경될 수 없다. 그의 뜻은 불변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변경하실 필요를 느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를 미리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에게는 돌발적인 사태란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3.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미 정해져 있었고 또 하나님의 맹세로 인하여 확인된 이 약속은 우리가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이 약속에는 두 가지 불변하는 요소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맹세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뜻과 그의 본성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게 그가 거짓말 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을 살펴 보자.
(1) 하나님께서 이같이 축복을 절대 보장해 주신 대상.
[1] 하나님은 약속을 물려받을 후사들에게 이런 축복을 보장하셨다. 이들은 유업으로 또 새롭게 태어나므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약속의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우리들이 태어날 때는 저주밖에 상속받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에 의해 약속을 상속받을 자가 된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들 앞에 놓인 소망에 자신을 의뢰한(피신시킨) 사람들에게 이러한 축복을 보장하셨다. 율법 아래에서는 피의 보수자들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된 도피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복음 아래서는 복음에 의해 마련된 보다 훌륭한 도피성이 있다. 이 도피성은 이곳에 피신하기를 원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개방되어진 도피성인 것이다. 비록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이리로 올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신 것은 믿는 자들로 안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들이 큰 위로를 얻기를 바라셔서였다. 이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성화(聖化)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그의 자녀들이 주를 경외하고 또 성령의 위로를 맛보며 생활하게 하고자 하신다.
[2] 그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므로 이 위로를 받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련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이 주는 위로는 너무나 약해서 시험과 박해와 죽음이 닥치면 우리의 영혼은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주의 위로는 결코 드물게 우리에게 임하거나 또는 보잘 것 없게 우리에게 임하지는 않는다.
(3)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원한 축복에 대한 힘이되고 위로를 주는 희망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소용이 되는가?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 준다"(19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배와 같아서 이리저리로 흔들리며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기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영혼은 배이다. 우리 영혼안에 깃든 안락함과 소망과 은혜와 축복은 영혼이란 배가 싣고 있는 아주 귀중한 화물인 것이다. 또 하늘 나라가 당하는 유혹과 박해와 고난은 배를 난파 시키려고 하는 폭풍과 파도와 같은 것이다.
[2]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튼튼하고 견고한 닻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위험 속에 처할 것이다.
[3] 복음이 주는 소망이 우리의 닻이다. 이 소망은 우리의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는 철모와 같은 역할을 하며 사나운 폭풍이 치는 이 세상 속을 향해해 나가는 데는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
[4] 복음이 주는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하다. 만일 그것이 튼튼하고 견고하지 못하다면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첫째, 복음이 주는 소망은 본래부터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주는 소망은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아름다운 소망인 것이다. 그 소망은 거미줄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럴듯하게 외관만 갖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튼튼하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둘째, 복음이 주는 소망은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만큼 견고하다. 그것은 든든하게 박혀있는 뜻과 같다. 이 소망은 우리로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준다. 이 소망은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님에게 내려진 닻이다. 이 소망을 지닌 우리들은 암초에 걸려서는 안 되며 휘장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리스도에게 소망의 닻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적이시며 믿는 자들의 소망은 닻을 든든하게 받쳐 주시는 분이시다. 휘장 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이 신자들의 바라는 바 희망인 것처럼, 휘장 안에 계셔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 또한 신자들 희망의 기본이 되신다. 하나님의 자유스런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성령의 능력있는 감화력은 믿는 자들의 소망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주는 희망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점에서 믿는 자들의 소망 목표가 되시며 근거가 되신다.
a. 그리스도께서 휘장 밖 즉 이 세상에 계실 때 드리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가 이제 휘장 안 즉 하늘 나라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같이 우리의 소망은 그의 희생 제물되심과 중제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b. 그리스도께서 믿는 그의 백성들의 선두주자가 되셔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있을 곳을 준비해 놓으시고 그를 따라 오라고 확실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예표요 첫열매이시다. 즉 그는 부활에 있어서나 승천에 있어서 우리의 예표와 첫열매이신 것이다.
c.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이으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나라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그가 구원의 역사와 계획을 완성하시기까지 중단됨이 없을 것이고 또 실패됨도 없을 것이다. 그의 사업이 완성될 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축복이 주어질 것이다. 이 축복에 이르게 될 때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또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의 선두주자가 되셔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신 그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 나라에 계시면서 우리를 염려하시고 돌보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으며, 우리들에게 가장 큰 관심과 열심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더욱 하늘 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기에 있게 되기를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전과 만족을 줄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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