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초보와 완전한데(히 6:1-3)
본문은 문맥적으로 5장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된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 믿는다고 한 삶이 심히 긴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는 유대인 성도들을 향해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1절에서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릴 것을 이야기 하였고, 2절의 결론으로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도의 초보’는 무엇을 가리키고, ‘완전한 데’는 무엇을 가리킨 것일까? ‘도의 초보’에서 ‘도’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λόγος)의 목적격 명사인 ‘로곤’(λόγον)이다. 그리고 ‘초보’란 ‘시작’이나 ‘기원’ 또는 ‘처음’, ‘초보’등을 뜻하는 ‘아르케’(ἀρχή)의 소유격 명사 ‘아르케스’(ἀρχῆς)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말씀, 즉 기독교 원리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것을 가리킨 표현이다. 그리고 ‘완전한데’로 번역된 ‘텔레이오테타’(τελειότητα)의 원형 ‘텔레이오테스’(τελειότης)는 완성적 개념의 ‘완전’이 아니라 성숙이란 개념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즉 5장 13, 14절에서 비유한 바와 같이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머물지 말고 장성한 신앙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한 말씀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대하여 여섯 가지 실례를 언급하였다.
1. 죽은 행실의 회개
‘죽은 행실’이란 성도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던 모든 죄를 총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 하였듯이 죽음은 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회개하는 문제를 초보라고 지적한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부도덕한 행위나, 이기심, 불경건함과 무자비한 행위를 행하고서 회개하는 행태를 번복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런 행실에서 돌아설 것을 교훈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역시 동일하게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가 그렇게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킬 수도 없는 문제이지만 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알라고 선언한 바 있다.
물론 죄에 대한 문제가 다 해결 되었다하여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또 죄를 짓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죄를 지어서도 안 되고,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회개해야만 할 것 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저자의 의도는 죄를 짓고 안 짓고의 교훈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강조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즉 성도는 죄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도가 죄의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면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문제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교회 교훈의 본질은 윤리도덕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얼마나 더 주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더 주님을 위해 나를 드려 희생하는가의 문제가 교훈의 핵심이어야 한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게 되면 죄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문제만을 가지고 씨름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다 해결된 문제를 가지고 쓸모없이 시간과 힘을 낭비하는 것이 되고, 아울러 그 문제는 씨름한다하여 완전해 질 수 있는 부분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죽은 행실의 회개, 즉 윤리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초보적인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첫 번째 지적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심령에 진정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비기독교인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였다. 다른 주석서들도 대부분 하나님께 대한 진정성 있는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한 내용으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가 교회 교훈의 핵심이거나 성도가 믿음의 문제만을 갖고 씨름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이란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면서 기본이 되는 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된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문제이지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신앙’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믿음’이나 ‘확신’을 뜻하는 ‘피스티스’(πίστις)의 소유격 명사 ‘피스테오스’(πίστεως)다. 이 믿음에 대하여 소유격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것이 인간의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믿음과 관련해서는 아무리 가르치고 교훈한다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믿음의 진실성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아무리 따져보고 또 확인하려 한다하여 확인되는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거듭남,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문제는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하셨다(요 3:8). 즉 이 문제는 사람의 오감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들은 온통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며 믿어야 한다는 문제를 갖고 교회가 온 힘을 거기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두 들어 주실 것이라면서 ‘믿습니다’란 말에 악센트(accent)를 더하기도 하고,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아멘’을 강조하기도 한다. 다시 닦을 이유가 없는 초보적인 문제인 것이다.
‘믿습니다’란 말에 악센트를 더한다고 없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런다고 연약한 믿음이 진실하고 강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이 믿음에 대하여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롬 9:16)”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셨다(엡 2:8). 때문에 이것을 갖고 씨름하는 것은 역시 쓸데없이 시간과 정력만을 낭비할 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씨름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지 인간 의지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세례
이는 히브리서 저자가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와 관련하여 세 번째로 든 실례이다. ‘세례들’로 번역된 헬라어는 ‘밥티스몬’(βαπτισμῶν)이다. 이는 ‘밥티스모스’(βαπτισμός)의 소유격 명사이다. ‘물속에 담그다’, ‘물속에 잠기다’, ‘담가서 깨끗이 하다’, ‘물로 깨끗이 씻다’란 뜻의 ‘밥티조’(βαπτίζω)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사용된 ‘밥티스모스는 마가복음 7장 4절과 히브리서 9장 10에서는 ‘씻음’으로 번역되었고,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는 본절과 같이 ‘세례’란 말로 번역되었다. 때문에 교회가 세례를 행할 때 침례가 아니고 물에 잠긴다는 의미와 물로 씻는다는 개념에서 머리에 물을 찍어 안수하는 것으로 세례식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례란 의식은 역시 하나의 의식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나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 세례와 관련하여 여러 형태의 논쟁들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에 대하여 과거 유대인들이 행하여 왔던 정결례(민 19:7-21; 막 7:4)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을지 모른다. 더러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행 19:3), 즉 침례를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 성령 세례를 강조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던 그런 의식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다는 표로서 하나의 의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실제 백 배, 천 배, 더 중요한 것은 세례 자체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 세례를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어떻게 세례를 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는 종교개혁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파들 가운데 생겨난 재세례파나 침례파들에게서도 있었다. 재세례파는 교회가 유아들에게 세례를 준 문제를 성경의 교훈과 맞지 않는다 하여 다시금 세례를 주어야 함을 주장한 종파이다. 침례파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요단강물에 잠겼다하여 오직 침례만이 진정한 세례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은 창세전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을 믿지 않는다. 즉 그들은 행위 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들의 주장과 같이 침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하여 행위를 의지하면 부딪칠 돌에 부딪칠 것이라고 성경이 이를 분명하게 선언하였기 때문이다(롬 9:32).
역시 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또는 어떤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유익도 없는 일이다. 진정한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며, 아울러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례는 믿음의 표식으로서 행하는 하나의 의식일 뿐이지 그것이 구원을 결정하는 기준이나 잣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4. 안수
안수란 말의 원어적 의미는 ‘손을 머리에 얹는 것’이다. 본래 안수란 구약 교회의 중요한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 내용을 찾아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죄악을 전가시키는 표시로서 제물이 되는 짐승의 머리 위에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손을 얹는 의식이다(레 3:13). 둘째는 축복의 표시로서 아버지가 자식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하는 의식이다(창 48: 14, 15). 셋째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 등 특별한 직분 수여를 할 때 직분을 받는 사람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의식이 있었다(민 8:10; 27:18).
이러한 구약교회의 관습을 초대교회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신약교회에 나타난 안수도, 병의 치료를 위한 기도를 할 때(막 6:54), 축복 기도를 할 때(막 10:13), 교회 사역자와 선교사들을 임직할 때(행 6:6; 13:3),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할 때(행 8:17; 19:6) 안수를 하였던 경우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안수와 관련하여 이를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로 간주하고 이러한 터를 더 이상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저자의 권면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당시 교회들에서는 무분별한 안수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안수 자체가 무슨 큰 축복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였다거나 안수의 행위 자체에 무슨 큰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경우들은 오늘 날 우리시대의 교회에서도 만연되어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에 어느 기도원에서 한 부흥사가 자기의 안수 기도는 영발이 쎄서 6개월을 간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 먼저 안수를 받겠다고 강단 앞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머리를 부흥사 앞에 밀어대는 한심한 광경을 목격한 바 있다. 또 대부분의 기도원들에서는 집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성도들에게 통성기도를 시켜놓고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형태로 안수를 하기도 한다. 이런 광경은 이미 안수라는 것이 그런 것인 것처럼 인식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모습들이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안수를 하면 성령을 받기도 하고, 예언이나 방언을 하기도 하고, 병든 자들이 치유를 받는 사안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2장 4절에서도 밝힌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 역사에 대한 보증으로서 사도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역사였지 어느 시대나 그런 은사를 주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능력을 체험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보증으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초보적 단계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주된 업무요 행사인 것처럼 교회에서 이런 일들을 상시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이제는 그런 초보적인 교훈을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관계없이 안수를 받으면 무슨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는 다시 터를 닦아서는 안 되는 초보적인 행태라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지적이다. 교회는 그런 것으로 성도들 속여서는 안 된다. 육신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 주고,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바꾸어 주어야만 한다. 즉 바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요, 그것이 곧 완전한데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5. 죽은 자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16, 17절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는 것이 없었을 터이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이 부활에 대한 진리를 히브리서 저자는 기독교 교리의 초보적인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초보적인 문제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리고 둘째, 부활이란 알든 모르든, 믿던 믿지 않던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있게 될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초보일 때는 모르지만 그것을 가르쳐서 확증시키려고 씨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택한 백성이면 누구나 믿게 되어 있고, 또 그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부활과 관련해서는 부활 자체보다 부활의 차등적 결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이란 택한 백성이나 택함을 입지 못한 자나 모두에게 있어질 필연적 결과이고 성도의 부활은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차등적 부활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은 이렇게 교훈하신 바 있다.
(눅 14:13, 14)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부활의 영광은 달라질 것이란 말씀이다.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돌에 맞아죽고 톱에 켜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그런 것을 구차하게 면하려하지 않았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보다는 더 좋은 부활에 이를 수 있도록 성숙한 신앙의 삶에 교훈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부활자체는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알든 모르든 필연적으로 있어질 결과이기 때문이다.
휴거 논쟁도 여기에 속한 하나의 지류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 문제로 심각한 몸살을 앓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부활절 절기를 지킨다고 교회가 거기에 큰 공을 들이는 것도 그러하고, 성탄절이나 또 다른 절기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말씀의 경우에서 보면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만 해도 성탄절은 없었던 것으로 사료 된다. 성탄절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 부분도 초보적인 문제로 지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는 이미 그런 것은 더 이상 터를 닦을 필요가 없는 초보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미 당시 사회에서 그런 것은 보편화된 진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에 교회가 큰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초보적인 것을 떠나 심히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받아 마땅하다. 교회는 이런 것들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평소에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길들여지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한다. 평소에 주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이 안 된다면 부활이든 어떤 절기를 지키는 문제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6. 영원한 심판
저자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는 영원한 심판이다. 이 부분 역시 부활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심판이란 진리는 부활의 진리와 함께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교리이다. 그러나 이 부분도 믿음이 있는 자는 기본적으로 믿게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심판의 문제는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이 문제 역시 인간의 의지나 삶과 관련된 문제는 아닌 것이다.
택한 백성들은 그들의 삶과 관련 없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값없이 영생에 이르게 되어있다. 반대로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역시 그들의 삶과 관계없이 결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다. 때문에 교회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영벌에 처해질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온통 기본구원을 놓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저자가 지적한 이 초보적인 문제인 것이다. 교회에 나오면 구원을 받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구원을 인식하여 어떻게 하든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고자 열을 올리는 경우들을 포함하여, 개혁신학자들이 하늘의 상급은 없고 그저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의 문제에 몰두해 있는 것 역시 초보적인 문제에 속한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8, 39절에서 주님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17장 12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하나도 멸망치 않았고 멸망한 자들은 멸망의 자식들뿐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심판의 문제는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가지고 교회가 그렇게 집중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창세전 선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이고, 믿음이 있는 자는 분명 구원에 이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부분 역시 인간의 의지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답변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내용에 대하여 완전한데 나아가는 신앙과 연결지어 해석하였다. 그러나 3절의 이 부분은 완전한데 나아가는 문제와 연결된 말씀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적한 초보적인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즉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 세례,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절에서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고 할 때, ‘나아갈지니라’로 번역된 단어는 ‘페로’(φέρω)의 현재시제인 ‘페로메다’(φερώμεθα)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하리라고 할 때 ‘우리가 하리라’로 번역된 ‘포이에소멘’(ποιήσομεν)은 ‘하다’, ‘만들다’, ‘완수하다’란 뜻을 가진 ‘포이에오’(ποιέω)의 미래 능동태 형의 동사이다.
즉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권유한 것은 현재시제를 써서 지금 해야 할 일로 지적한 반면에 ‘우리가 하리라’고 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장래에 있어질 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 문제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한 번 교육을 받을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그런 것에 집중하거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는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성도는 이런 초보적인 문제를 떠나 완전한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란 앞에서 거듭하여 이야기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숙한 삶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하나님을 위해 나를 드리며 헌신하는 삶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교회나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신앙생활 곧 완전한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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