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에 관한 연구
- 팔복을 중심으로 -
서 론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해 왔으며,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시고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등(마4:23)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의 사역을 전개해 나가셨다. 온갖 병자들을 이적적 권능으로 치유하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혹은 그 권능을 목격하고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께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이 무리들에게 천국이나 축복의 실상이 어떠하며, 또한 그러한 축복 가운데 있는 자들이 드러내어야 할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셨다.
산상수훈은 주께서 이루신 구속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이미 천국시민이 되었으나 그 천국은 세상 세상 끝 날에야 영육 간에 온전히 도래할 것이므로 아직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단의 불법이 혼재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성도들이 그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간에 지켜야 할 차원 높은 윤리적, 종교적 삶의 기준들을 제시한 것이다.
1. 산상수훈의 정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란 마5-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교훈 또는 설교를 가리킨다. 특별히 ‘수훈’이라 하는 이유는 그 내용이 후세에도 길이 전수되어서 뭇 사람이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주옥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산상수훈’이라고 한 까닭은 본 설교가 예수께서 제1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에 갈릴리 지역의 한 야산에서 행해진 일련의 설교의 기록이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또한 이 설교가 너무나 가치 있는 가르침이란 의미에서 ‘산상보훈’(山上寶訓)으로도 불리우고, 기독교의 근본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어진다. 간디는 이 교훈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정신의 요람”이라고 하였다. 가르디니(R.Guardini)는 산상수훈을 가리켜 “하늘과 땅의 진동이다”라고 하였고 캠벨 몰간(G.Campbell Morgan)은 산상수훈은 “왕 중 왕의 대선언서”와도 같다고 증거 했다. *(주)캠벨 몰간. 왕이신 그리스도(마태복음강해 상권) 아가페(출) P.89
전통적으로 이 설교가 행해진 산은 디베랴 서쪽과 막달라 남쪽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인 핫틴 산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곳은 팔복산으로 불리워지며 그곳에는 산상수훈교회가 세워져 있다.
2. 마태복음에서 산상설교의 위치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가지 강화 중 - (1)산상설교(5-7장) (2)제자 파송의 교훈(10장) (3)천국의 비유(13장) (4)교회 공동체의 교훈(18장) (5)종말적인 교훈 (24-25장)- 첫 번째 로 가장 비중이 큰 위치에 있으며,
*산상수훈은 내용상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여덟가지 복(5:1-12) (2)구약율법과 성도의 삶(5:13-48) (3)구제, 기도, 금식의 교훈(6:1-34) (4)순전한 삶의 원리(7:1-12) (5)결론적 교훈(7:13-27)
3. 산상수훈의 해석과 적용의 주안점
1)율법주의자들의 접근
- 그들에게 이 말씀은 구원의 조건, 혹은 수준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모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2)가톨릭주의 - 가톨릭교회에서는 산상 수훈이 본래 주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으로서 현재에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금욕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에게나 적합한 것이며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제자원, 그랜드종합주석 12권 성서교재간행사 P.234
3)루터주의자들은 산상 수훈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이 교훈을 따를 수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 은총을 간구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4)세대주의자들은 이 세대에 해당되는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도래할 천년왕국에서 지킬 수 있는 교훈으로 생각했다.
5)개혁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켜 행하여만 할 삶의 기준 혹은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위의 다섯 가지 견해 중에서 우리는 루터의 견해와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옳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에 속하게 된 천국 백성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기준, 혹은 천국 시민의 생활의 원리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7:21)
동시에 법적으로는 회개, 중생하는 순간 의인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자범죄에 휩싸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으로서 최대한 이 기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다가 끝내 이를 이루지 못할 때 다시금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회개하며 이처럼 부족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공로에 의하여 구원을 확실히 받을 것이 보장된 것에 감사하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신약 시대의 산상수훈은 구약의 율법과 함께 율법으로서의 기본 속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4.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 영적상태)
-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
- 불신앙적 행위를 돌이키지 아니하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 분석
1) 영광스러운 성도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해서(롬8:17-18)
2) 대중적 성향에 이끌리는 인본주의적 마음 (마7:13-14, 마6:16)
3) 눈앞에 이익에 급급해하는 근시안적 사고 (마6:25-34)
4) 잘못알고 있는 신앙지식 (마5:15, 마6:5-6)
- 복음과 율법의 관계, 믿음과 행함 등
5) 인간의 죄성과 악의 영들의 역사(마7:15, 요8:44)
6) 하나님과 영적 법칙을 잘 알지 못해서(마6:16-20)
7) 죄의 습관들을 과감히 버리지 못함(마7:26)
*신앙성숙을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힘써 배움으로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거룩히 구별되기를 원하시고, 온전히 행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모습을 원하신다.
(신26:16)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 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비록 우리가 주님의 심판의 엄정함 앞에서 위축되거나, 주님의 명령이 명백하게 불가능하게 보인다는 것을 인식할 때라도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이는 주님이 자신의 무한한 자비하심으로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우리 옆에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아 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때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아시므로, 약해질 때는 우리를 격려하심으로써 언제나 주님께 소망을 두게 하신다.
그러나 주님이 결코 하시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주님은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신다. 최선을 다하여 말씀을 지켜 행하시기를 명령하신다.
신30:11-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14) 오직 그 말씀이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5. 산상수훈의 의의
1. 천국시민의 삶의 기준임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들은 단지 느슨하게 연결된 아름다운 잠언의 나열이 아니라 최고도의 기독교 생활을 위한 기준을 밝히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다. C.F.앤드류스 산상수훈의 삶을 사는 법 (지명수 옮김) 횃불(출) P.31
2. 이것은 단지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갖추어야할 당위적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산상수훈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내포되어있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 등 복음내용이 직접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았다는 점과 앞으로 드러날 복음과 메시지를 예시한다는 점에서 복음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4. 이 말씀은 곧 심판의 기준이 되는 말씀이다.
*(주)하용조 예수님의 산상설교 마태복음 강해설교3권
산상수훈이 제시하는 기준은 절대적이다. 따라서 이 교훈은 율법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여 결과적으로 오직 구원하시는 예수만을 의지하도록 성도들을 권면한다. 따라서 예수의 은혜를 부인하고 자기의 의를 따라 사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이 산상수훈에서 제시된 심판의 기준에 근거하여 멸망의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
(롬3:19-24)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5. 산상수훈은 실천을 통하여 무슨 공로를 세우도록 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분이 무엇을 바라고 계시며 어떠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시는지를 깨닫고 이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의 삶을 정비하는 동시에 결코 그 기준에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오직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감사하도록 하는데 있다. 따라서 산상수훈의 말씀이 요구하는 성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겨 그 뜻대로 실행하려 노력하되 자기 힘으로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며 그분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준수해야 한다.
*(주)제자원 그랜드종합주석 제12권 P.235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연구함으로서
원문의 뜻을 그 당시의 세계에서 찾아 현대에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새 그릇에 담아 나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정훈택 산상수훈 주해와 적용 그말씀 2001.3월호 두란노 P.33
- 추상적 개념을 실제적 개념으로 바꾸어 적용토록 해야 함
- 이론적 개념을 실천적 개념으로
- 미래적 개념을 현재적 개념으로
- 압축된 기록을 자세히 풀어서 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움이 되어야 함
6. 팔복(八福)의 의미와 적용
1) 팔복의 구조
어떤 학자들은 8복 중 처음 네 개가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한편 후에 네 개는 인간관계를 규정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앞의 4개는 소극적 실천 윤리이며, 뒤의 4개는 적극적인 사랑실천윤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주)캠벨 몰간 마태복음강해(상) 아가페 P.92
혹자는 ‘처음 네 가지 복은 사람이 자기 의가 없어서 어찌 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이며, 다음 네 가지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자가 된 후 자기로써 할 바 책임과 의무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주)조두만, 사복음서 주해설교 성청사 P.128
본문의 여덟 가지 축복들은 어떤 특정한 순서로 배열되었다기보다는 천국 시민의 특질이라고 하는 단일한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개 나열하여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은 팔복의 처음과 끝이 ‘천국’의 축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됨으로써 본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2) 팔복의 특성
누군가 산상수훈에 나오는 8복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8가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8가지 성품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1)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성품이다.
‘~한 자’ 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성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특별한 직분자만 갖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 유명했던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도 갖추어야 할 성품이라는 것이다.
2) 이것은 거듭난 자의 성품이다.
이 여덟 가지 성품 중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적으로 소유된 성품은 한 가지도 없다. 말씀에 기록된 여덟 가지 성품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특별히 거듭난 사람들에게 새로 입혀주는 옷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인은 심령의 가난이나 애통함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은 온유함보다는 고집을 원하고, 의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원하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복수를 원하고, 청결하기보다 부패를 더 사랑하고, 평화보다 전쟁을, 핍박받기 보다는 타협을 더 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복은 자연인은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에 능력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이다
3)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모두 소유해야할 동시적인 성품이다. 즉, 여기 나타나는 여러 특성들을 모두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들에 따라 어느 특성을 다른 특성에 비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두는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신앙 자세라는 면에서 하나이다.
4)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성품이다.
세상과 우리는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것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나라와 의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행동에 있어서도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능력과 힘을 자랑하고, 마음의 가난함보다는 부유함을 자랑하고, 온유함보다는 강력한 것, 영웅적인 것,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보여준 크리스챤의 모습은 반대로 자기의 철저한 무능력, 자신의 한계, 자신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바보나 무력함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고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됨으로 복 있는 자라는 것이다.
3) 여덟 가지 복
제1복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
*가난한 자 -프토코스( )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 영적 빈곤이나 고통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 확신하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 물질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과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왔다.
- 삭개오도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던 빌레몬은 골로새의 부자였다.
이와는 달리 물질이 부요하고 마음도 역시 부요한 즉 가난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주님은 본문에서 가난한 마음을 강조하였다.
- 다윗의 고백
(시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
(시69: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가난한 마음은 영적 빈곤(파탄)을 시인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것이다.
제2복 애통하는 자의 복(마5:4)
애통하는 자- ( )호이 펜둔테스는 슬퍼하다, 근심하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후회의 외적 표현을 비롯한 슬픔의 여러 가지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어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하여, 그리고 없어야 할 것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아파하는 의미에서의 애통이다.
우리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덕과 지혜와 능력이 없음을 슬퍼하고, 반면에 우리 안에 죄가 들어 있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세상은 돈과 쾌락 등으로 애통을 망각하고 인생을 즐기라고 눈짓한다. 그러나 성경은 애통하면 위로 가 있고, 울어야 기쁨이 있다고 가르친다.
눅6:21에서는“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했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한 성서 학자는 애통은 자신에 대하여 깨어지는 체험이다라고 했다.
성도의 애통은 마침내 죄를 버리게 만들고, 죄를 지배하여 우리를 거룩한 성화의 자리와 성숙의 자리로 인도한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 용서의 은혜, 함께하시는 은혜, 용기와 새 힘을 입혀 주신다.
제3복 온유한 자의 복 (마5:5)
온유한 자- 프라에이스( )는 모든 악한 행실과 반대되는 순화롭고 신축성 있는 아름다운 덕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이 말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을 가리킨다.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사람들은 이 온유 ‘프라에이스’라는 단어를 세가지 방법으로 많이 썼다고 한다.
(1)어떤 환자자 고열이 있어서 의사가 준 약을 먹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을 때를 ‘온유하다’라고 했다. 열이 다스려졌다는 말이다.
(2)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줄 모를 때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면 이 때에도 사람들은 프라에이스라고 했다. 바람이 열기를 잡고, 자기가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에 온유하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3)그보다 더 많이 사용된 용도는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킬 때 이다. 사자나 이리 같은 것을 들에서 훈련시킬 때 잘 훈련이 되면, 주인이 ‘프라에이스(온유해졌다!)’라고 했다.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훈련된 인격의 온유함에 대하여 성경은 강조한다.
*온유함이 나타나야 할 때
(1)억울한 환경 속에서 나타나야 함(시37:1)
시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2) 말씀을 받는 태도가 온유해야 함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약1:21) 그러므로 악을 내어 버리고 ···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3)죄를 범한 자에게 온유해야 함
(갈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4)교회 공동체가 하나되기 위해 온유해야 함
(엡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5)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온유해야 함
(딤후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 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이러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제4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이것은 말씀을 듣지 못해서 느끼는 영적기근을 의미한다.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63: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배부를 것임이요 - 이는 하나님으로 충만해 진다는 의미이다.
제5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긍휼이란 말의 어원은 ‘엘레오스’란 말로 그 뜻은 “당연한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서 그를 돕는 미덕”을 말한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한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낸다.
토마스 왓슨은 긍휼을 사랑과 은혜란 단어와 관련시켜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세자매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긍휼을 감상이나 타협의 모습으로 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에 대해서 교훈하시고 다음으로 긍휼을 말씀하셨다. 의가 없는 긍휼은 감상적인 자선에 지나지 않고 긍휼이 없는 의는 냉혹한 기계적 정의에 불과하다. 의와 긍휼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다. 이 긍휼은 주님의 성품이다.
엡2: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시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도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약2:13)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갈6:7)
제6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스인들에게 (1)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기관’, (2)비유적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 데 쓰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늘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히12:14)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제7복 화평케 하는 자의 복(마5:9)
이것은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함.
이 ‘화평’(에이레네)은 히브리어 ‘살롬’과 견줄 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평화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엡2:14)
화평케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 (골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제8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마5:10)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절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 당하는 것, 예수 이름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니다. (벧전2:20, 4:15)
세상에는 어둠에 속한 자가 너무 많으므로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토마스 왓슨 이라는 유명한 설교가는 “가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초대교회 유명한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가 된다”고 하였다. 핍박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성도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속한자라는 증거를 얻게 되는 것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하여 내적 소망이 강렬해 진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초대교회의 영적 생명을 소유한 사도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뻐하며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다. (행13:46,52)
4>. ‘복의’ 의미
헬라어 어휘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아쉬레’( )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한편 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성서연구원 성서원어사전 3권 P.718
첫째로, 신의 속성을 가르칠 때 사용되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 말을 썼다.
딤전1:11- “ 이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하였고
딤전6:15에서는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인간의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임을 교훈하고 있다. 참된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서만 참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
또한 성도가 팔복의 성품을 갖출 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둘째, 어떤 사람이 일상의 근심 걱정에서 놓여 자유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쓰였다.
현대인들은 상당한 문명의 혜택 속에 살면서도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매여 있는 것 같다.
* 하버드 대학 총장을 지냈던 한 사람이 현대인들의 네 가지 욕구를 이야기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신조, 따를 수 있는 지도자, 흔들 수 있는 깃발, 들을 수 있는 노래를 찾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현대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
블란서의 한 젊은이가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 그는 자기의 정서적 불안과 우울증세를 말하고 처방을 물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마침 그 도시에 유명한 희극 배우가 와서 쇼를 진행하니 관람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청년은 힘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병원 문을 닫고 나가며 신음을 토하듯 “그렇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인 것을 ···”하고 독백을 하였다. 우리는 웃어넘길 수 없는 이 이야기 속에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진정한 안식과 자유가 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참고자료
코멜대학교 교수인 러셀 세실박사는 세계적인 관절염 권위자이다. 그는 관절염을 일으키는 가장 평범한 원인으로서 결혼의 파탄, 경제적인 재난, 비극, 고독과 근심, 오장질환과 궤양을 지적한다. 또, 메이어 의료원의 해롤드 하베인박사는 미국 산업의 협회에서 낭독한 그의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176명의 지배인급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긴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잘 걸리는 세 가지 병 심장병, 소화기 궤양, 고혈압 중의 하나로 고생한다고 지적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다.
메이어 의료원의 두 박사는 신경성 환자들이 입원실의 반을 차지하는데, 그들이 죽은 후에 정밀한 현미경으로 신경검사를 해보면 그들의 신경은 건강한 레슬링 선수의 신경과 꼭 마찬가지로 건강하다고 했다. 단지 [신경성]질환은 신경이 실질적으로 손상된 때문이 아니고 무기력감, 좌절감, 불안, 염려, 공포, 패배감, "절망 등의 정서적 이유로 발생한다. 프라토는 "의사들의 가장 큰 잘못은 환자의 정신을 그냥 두고 육체만을 치료하려는 일이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므로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위대한 진리를 의학에서 인식하는데 2천 3백년이 걸려서 오늘날은 정신과 마음을 동시에 치료하는 정신요법 약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복이라는 어원가운데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있다. 이동원. 팔복강해설교 나침반출판사 P.14
앵글로 색슨어에서 축복은 본래 [피의 제사]란 의미의 말에서부터 블레싱(blessing/복)이란 단어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피의 제사를 드릴 때 성별하여 드리는 제사에서 축복의 의미를 찾았다고 한다. 행복은 소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바치는데서 시작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행20:35) 또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에릭 프롬은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 문화가 바뀔 때에만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증언하였다. 소유의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포로가 되게 할 따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드리는 것을 배우는 순간부터 인간은 놀랍게도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예배의 정신은 바로 드림의 정신이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데 있다.
넷째로, 고대의 역사가이며 문학자인 헤로도투스는 이 단어를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유하였다.
도저히 물을 찾을 수 없는 황폐한 사막에 생명을 위하여 예비된 오아시스는 얼마나 귀한 것인가 ·· 진정한 행복은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오아시스와 같다.(요4:14-15) 또한 주님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이런 사람은 진정 행복자이다.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의 헬라어 원어는 흠정역에서 43회에 걸쳐서 “복이 있나니”로 번역되었고, “행복하다”라고 번역된 경우도 6회나 된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종합해 보면 이 낱말은 “복이 있나니” 보다는 오히려 “행복하여라”로 번역하는 것이 헬라어의 의미에 가장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사자에게 나타난 의식과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 될 때에, 오히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더욱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본문의 “복이 있도다”는 상태, 즉 어떤 의식을 창출해 내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의식이란 곧, 완전한 안식에 대한 의식을 가리킨다. 이 모든 요소들은 바로 행복한 상태 속에 포함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의 삶에 대한 신적인 의도인 것이다. 이로 인해 슬픔과 한숨은 물러가고 주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행복의 추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론
지금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그 빚에 대해서 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 우리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앞에 기독교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할 시대가 되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곧 주님이 보여주신 삶이었고 팔복은 곧 주님의 성품이셨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져온글>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성령으로 채우사 주 보게 하소서
주의 임재속에 은혜 알게 하소서
주 뜻대로 살아가리 세상 끝날까지
나를 빚으시고 새날 열어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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