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산상보훈, 산상복음, 8복의 올바른 이해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산상보훈(山上寶訓), 산상복음(山上福音)이라고 부르며 흔히 8복(八福)으로 쉽게 이해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 한 야산에서 말씀하신 기독교 도덕의 근본과 극치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대헌장(大憲章)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합니다. 흔히 8복(복이 있나니~~)이라고도 하며, 시편1편(복 있는 사람은 ~~)과 연결이 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이 된 예수님의 교훈과 설교를 가리킵니다.
이런 산상수훈은 누가복음 6:20-49에도 비슷하게 기록이 되어 있으며,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 11-16장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복음과 구분하기 위해 누가복음의 수훈을 ‘평지수훈“이라고 부르나 내용상에는 거의 차이기 없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일목요연하게 집중 배치하여서 독자들이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상수훈의 본질이나 근본적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이런 논란이 일어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윤리적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천하기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살기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십 리를 동행하고, 돈은 빌려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지킬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마5:38-42). 심지어 오른 눈이 죄를 범하면 빼 버리고, 오른 손이 죄를 범하면 도끼로 찍어서 버리라고 말씀하시면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범한 눈이라고 빼 버리고, 손을 잘라서 버렸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문헌에서나 풍문으로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것인가요? 지키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산상수훈은 과장법으로 치부하여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구약의 율법의 연장 차원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 달성해야할 목표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산상수훈을 지킬 대상이 누구인가에 관하여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이 산상수훈에 관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1) 중세 가톨릭에서는 본래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서(마5:1) 신부들이나 수도사들이 준수하여야 할 윤리로 보아서 일반신자들이 지키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2) 루터주의는 인간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은혜를 간구하도록 주어진 것으로 평가합니다.
3) 세대주의자는 이 시대에 적용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천년왕국에서 지내는 성도들이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 알버트 슈바이처는 산상수훈을 중간의 윤리로 보아서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임박함으로 모든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촉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5) 개혁주의는 산상수훈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켜 행하여야 할 삶의 기준과 원리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의 생각을 종합하면 올바른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신자가 거듭나서 중생하고 회개하는 순간에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육체에 그대로 남아있는 죄와 자범죄로 인하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때 자신의 죄성과 의지와 노력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아니 이 수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여야 할 점은 문자 그대로 실행하고자 할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범하였던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져 위선적이 되거나 아니면 절망에 빠지게 될 소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천국시민으로서 산상수훈을 지키려고 노력하되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구하며 주시는 능력에 따라 준수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즉 달성하여야 할 목표로서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이지요. 신자들마다 윤리적인 정도의 차이와 높낮이가 있으므로 그 목표달성에 시간이 더 걸리는 신자도 있고 단축되는 신자도 있습니다.
따라사 쉽게 표현하자면 산상수훈의 삶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나의 노력의 합력과 조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목적이요 의도입니다.
<가져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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