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서론 : 총론에서 각론으로 진행하는 것은 어떤 가르침을 연구할 때도 현명한 법칙이다.
몇가지 일반적인 의문을 먼저 살펴보자.
1. 왜 산상보훈을 설교해야 하는가?
1.1 성령의 강권하심, 인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1.2 현대 교회 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피상성 때문이다. 전도 활동 뿐 아니라 거룩, 성화 개념까지 피상성은 침투했다.
1.3 이 피상성의 주원인은 성경에 대한 태도에 있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권위이므로 읽는데 그쳐서 안되고 묵상하고 깊이 연구해야 한다.
1.4 이런 경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서도 살필 수 있다. 율법의지나친 강조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자유의 복음을 도덕 훈화집으로 전락시키든지 은혜의 지나친 강조로 율법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가 하는 대답이 산상보훈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서 결정된다.
2.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이 설교는 의도되었는가?
2.1 사회 복음의 견해 : 사람들의 삶의 원리가 산상 보훈에 있으므로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나 양차 대전과 발트주의에 의해서 이 주장은 묵살되었다.
2.2 모세 율법의 해설이라는 견해 : 산상보훈은 단지 모세 율법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팔복만 보아도 단순한 율법의 해설을 능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3 세대주의자의 견해 : 산상보훈은 현대신자와 전혀 관계가 없고 다만 왕국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주님은 이 세상에서 신자가 실천하도록 의도하셨다. 산상보훈의 가르침은 모두 서신서에 발견되므로 오늘 신자를 위한 것이다. 사실 산상 보훈은 그의 새 계명의 장엄한 해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마태는 유대인의 잘못된 천국관을 수정하고 있다. 산상 보훈은 '이렇게 살라 그러면 신자가 되리라'라기 보다는 '신자이므로 이렇게 살라'고 한다.
3. 왜 우리는 이것을 공부해야 하는가?
3.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이 보훈에 따라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딛2:14)
3.2 산상 보훈만큼 중생, 성령, 그의 내적 역사의 필요성을 보이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산상 보훈은 나를 땅에 쳐박아 완전 소망없이 만든다.
3.3 산상 보훈은 실천하면 할수록 축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축복을 찾아 좇아 다니는 대신 산상 보훈의 요구에 직면하라. 자신의 전적 궁핍을 볼 때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3.4 최선의 전도 방법이기 때문이다.
결론 : 산상 보훈이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라! 모두가 우리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산상 보훈대로 살면 세상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볼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산상 보훈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 빛 속에서 자신을 볼 때 참 부흥이 왔다. 세상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볼 때 정죄됨을 느끼고 끌려올 것이다. 주의깊게 이 보훈을 배워 우리가 마땅히 어떤 자인지 보여주자. 하나님이 은혜주셔서 산상 보훈을 진지하게 정직하게 기도하며 대하도록 하소서!
개관 및 분석
서론 :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구조 분석을 위해서 있지 않고 읽고 적용토록, 실천해서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 무릎을 꿇고 대하라.
1. 왜 전체적인 고려가 중요한가?
1.1 이 산상보훈의 어떤 부분도 전체의 빛을 떠나서는 바로 이해될 수 없다. 이 팔복을 이미 받아들여 사는 이 외에는 산상보훈의 어떤 교훈도 지킬 수 없다.
1.2 부분을 시작하기 전에 전체적인 고려가 항상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3 산상보훈에는 논리적인 차례가 있기 때문이다.
2. 산상보훈의 일반적 구분
2.1 일반적 부분(총론) (마태 5:3-16)
2.1.1 신자의 특성(마태 5:3-10)
2.1.2 세상의 반응에 의한 입증 (마태 5:11-12)
2.1.3 세상에서의 신자의 역할 (마태 5:13-16)
2.2 특수적 부분(각론) (마태 5:17-7)
2.2.1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한 신자(마태 5:17-48)
2.2.2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삶(6:)
2.2.3 하나님의 심판 아래 사는 삶(7:)
3. 일반적인 분석은 완벽한 신자의 상을 제시한다.
3.1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관심사이어야 한다.
3.2 신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며 사는 자이어야 한다.
3.3 신자는 하나님의 두려워하며 항상 걸어가는 자이어야 한다.
4. 산상보훈 해석을 지배하는 원리들
4.1 산상보훈은 특성의 묘사이지 윤리나 도덕 법전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라
4.2 일반적인 원리와 태도의 특수한 예증으로 각 부분을 보아야 한다.
4.3 정신을 떠나서 문자를 고려해서는 안된다. 가령 수긍 불가능하든지, 우습게 보이든지, 실천 불가능한 경우는 잘못된 해석이다.
결론 : 부름받은 우리의 삶은 위의 세가지 원리가 나타나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게 살 때 위대한 부흥은 일어날 것이며 세상은 놀라 주님께로 나올 것이다. 산상보훈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이 그 판단 아래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팔복의 서론
1. 서론
1.1 팔복은 기독교인의 기본 면모와 특징을 보여준다.
1.2 팔복의 강해를 시작하기 전의 팔복 전체에 대한 개관이 필요하다
1.3 팔복은 행복의 진정한 방법이다.
2. 팔복에서 이끌어 낼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
2.1 기독교인은 모두 이렇게 되어야 한다.
2.2 기독교인은 팔복의 모든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
2.3 팔복의 성품은 생래적인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
2.4 팔복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근본적이고 절대적 차이를 보여준다. 복음은 교회가 세상과 다를 때 그 힘을 발휘한다.
2.5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천국 백성이다.
3. 천국이란 무엇인가?
3.1 천국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왕국이다.
3.2 천국은 카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3.3 그러나 천국은 앞으로 가시적, 물질적으로 완전하게 임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3)
서론 : 첫째의 복이 당연히 맨 처음에 와야 할 이유가 있다. 이 복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단 한사람도 없다. 이것이 크리스챤 즉 천국 시민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의미는 ‘빈 것으로 하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먼저 비워 있지 않으면 다른 복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이 복은 뒤에 계속되는 모든 복들을 풀어주는 열쇠가 된다.
1. 첫째 복을 잘못 해석한 견해들
1.1 사회변혁 프로그램으로 오해 : 산상수훈은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것은 심령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적용 불가능한 말씀이다.
1.2 가난을 궁핍으로 해석하는 오류들 : 누가복음 6장 20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은 가난 그 자체를 좋은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성경은 명백히 심령의 가난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1.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칭찬 받지 못하는 태도이다. 세상은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라고 한다.
1.4 교회 안에서도 자기 PR과 광고는 공공연하다. 자기를 겸손히 낮추고 숨기는 일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2. 첫째 복의 소극적인 고찰
2.1 심령이 가난함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겁쟁이나 소심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2.2 심령이 가난함은 모방이나 가식으로 이룰 수 없다. : 겸손을 가장, 까운, 논쟁, 용모나 걸음걸이 제스츄어의 모방 - 성경은 외모가 아닌 심령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2.3 심령의 가난함은 인격의 억압이 아니다 : 고행, 수도생활
3. 첫째 복의 적극적인 고찰
3.1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실예
3.1.1 기드온 -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
3.1.2 이사야 - 주여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사6:5)
3.1.3 베드로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3.2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자임을 의식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철저한 가난함을 깊이 깨닫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완전히 복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신앙하여 하나님과 그의 은혜와 긍휼만을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이다.
결론 :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바라보자. 보면 볼수록 자기 혼자서는 자기의 힘만으로는 소망이 없음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역설적으로 자기의 절대적인 가난함과 공허함을 느끼지 않고서는 참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 심령의 가난함은 인생의 절벽에서 매달린 밧줄의 끝에 있는 상황과 비유된다. 즉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할 수 없는 마지막 상황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해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서론 : 애통하는 자의 복은 첫 번째 복과 같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세상은 애통함을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상은 무조건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예수님이 말하는 애통함은 평범한 의미에서의 애통이 아니다. 누군가 불행을 당했을 때 느끼는 그러한 애통이 아니다. 본문의 애통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오늘날 교회에서 애통이 사라져 가고 있는 이유
1.1 과거 잘못된 청교도 운동은 기독교인의 모습을 애통하는 모습, 슬픔에 가득찬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은 매력없는 삶으로 비쳐지기까지 하였다.
1.2 이러한 생각들의 반작용으로 전도를 위해서라도 크리스챤은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하고, 크리스챤은 축복받고 세상적으로 잘 나가야 한다는 신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3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고방식들은 애통의 참된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애통은 외적인 것도 아니고 가식적인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힘은 외적이며 형식적이고 가식적인데 나타나지 않는다.
2. 애통이란 무엇인가?
2.1 산상수훈은 부정의 말씀을 가지고 시작된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된 위로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2 참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서 깊이 슬퍼하고 애통해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라(롬7:24) 탄식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이러한 탄식을 하는 사람이다. 크리스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소망을 잃어버린 것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2.3 애통함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력하고 죄많은 것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크리스챤이라면 자기 생활을 돌이켜 보고 얼마나 죄악된 삶인가를 느끼며 가슴을 치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이 현실을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고 탄식하셨다.
3.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가?
3.1 자기의 죄 많은 상태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다.애통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된다.
3.2 사도바울은 자신에 대해 탄식하면서 곧이어 주님을 발견하고 노래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위로함을 받으며 행복하게 된다.
결론 : 어떻게 하면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령께서 우리 속의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충만하게 계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심오한 죄의식과 깨달음이 차원 높은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요 감격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5)
서론 : 크리스챤의 행복론은 세상과 완전히 반대이다. 세상은 항상 무력과 자기 확신과 침략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런면에서 세상은 크리스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도 이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현대 교회들은 조직의 힘으로 돈의 힘에 의지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진리에 의지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면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복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1. 온유해지려면
1.1 온유해지려면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 애통하지 않으면 결코 온유해질 수 없는 것이다. 온유를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방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때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른 사람이 죄인이라고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그것을 몹시도 싫어한다. 온유는 타인의 판단에 대해서 불편해하지 않는다.
1.2 아브라함이 롯과의 갈등에서 그러했다. 그는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그러한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모세도 그러했고, 다윗도 사울과의 싸움에서 그러했고, 스데반도 그러했다.
2. 온유의 특성
2.1 그러므로 온유는 기질적인 것이 아니다. 온유는 나약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질려고 무조건 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온유가 아니라 연약함이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부여잡는 사람이다. 진리를 부여잡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다. 실지로 온유한 사람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교의 자리에도 기꺼이 설줄 알았다.
2.2 온유를 외부에 나타난 태도가 아니다. 온유는 내적인 정신적인 심령의 문제이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인지 아는 사람이다. 존 번연은 말하기를 이미 넘어진 사람은 굴러 넘어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넘어진 사람이다.
3. 온유의 결과
3.1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항상 충족하며 만족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사도바울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고 했다. 바울은 가난함에도 처할줄 알고 부함에도 처할줄 알았지만 그를 항상 만족케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강하게 해주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했다.
3.2 온유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은 만물을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으로 물려받은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그러므로 작은 것 때문에 아옹다옹하지 않는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다 왕노릇할 것이라고 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자신을 낮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높이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 세우실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6)
서론 : 오늘날 세계는 참된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저들은 온갖 회의와 대안을 내놓지만 참된 해결책은 없다. 만일 저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을 안다면 전쟁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상고하기 보다는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1.1 먼저 우리는 행복 그 자체를 구하기 위해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저 행복을 추구하지만 우리가 항상 경험해 왔듯이 행복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마치 환자가 자신의 몸의 아픈 원인을 찾아 치료하지 않고 그저 고통만 제거해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2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한마디로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놓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하는 갈망이다.
1.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며 불쌍한지를 알고서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참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1.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나아가 자신을 거룩하고 청결하게 하고자 한다. 그는 할수만 있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닮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전 생활, 그의 모든 생각을 오로지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것이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 실제적인 의미
2.1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자기의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을 다 얻기까지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발버둥치듯이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까이 나아가는 자이다.
2.2 이러한 사람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다. 그가 주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욱 더 주님을 가까이 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승작용과도 같다.
2.3 그리하여 영원토록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거룩한 모습에 서기까지 나아갈 것이다.
결론 : 크리스챤은 완전하지만 더욱 완전하게 설 사람이다. 크리스챤은 주리고 목마르고 있음과 동시에 충만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크리스챤은 영광에서 영광에로 변화되면서 하늘의 처소를 얻을 때까지 전진해 나간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히 받고 있지만 그러나 더욱 더 높게 소망을 가지고 있다. 과연 당신은 이런 충만함 가운데 있는가?
영적 갈망의 시금석 (마5:6)
서론 : 6절의 계속적인 고찰이나 보다 실제적인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이 복음 8복의 열쇠의 하나로서 자아검토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행복은 자기의 상태에 대하여 검토해 볼 수 있는 좋은 테스트가 된다.
1. 구원론에 대한 두 개의 반대를 다루고 있다(교리적인 시금석)
1.1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함으로 구원을 너무 쉽게 얻게 된다고 반대하는 자들을 반박한다.
1.2 본문이 말하는 의의 성격 때문에 구원을 너무 어렵게 만든다고 반대하는 자들을 반박한다.
2.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실제적인 시금석)?
2.1 우리 나름의 거짓된 의를 꿰뚫어 보게 한다.
2.2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2.3 구주와 구원이 제공되지 않으면 소망이 없음을 알게 한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능동적으로 무엇을 하는가(적극적 시금석)?
3.1 이와같은 의와 반대되는 것을 모두 피한다.
3.2 나아가서 영적 의욕을 마비시키거나 무디게 하는 것을 피한다.
3.3 의를 활발하게 상기시킨다.
3.4 항상 그것을 얻을 기회를 마련한다. 이를테면 경건한 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를 힘쓰며,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를 힘쓴다. 또한 기도하는 것과 성도들의 전기나 경건 서적을 열심히 읽는다.
결론 :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왜 가장 큰 소원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의를 현세에서 소유하지 못하면 영원한 파멸의 운명에 빠진다. 이 의를 소유하는 것이 현세와 내세에서 축복받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의를 조금이나마 안다면 다른 아무것도 소원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삶을 닮기를....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의로워진 사람은 의를 행한다. 곧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7)
서론 :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도 앞의 복들과 논리적 관계가 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성도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주님은 행위(doing)보다 존재(being)가 먼저임을 강조한다. 성도가 되어야만이 긍휼히 여기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다.
1.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가?
1.1 긍휼은 안이하고 적당주의 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1.2 생래적인 기질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긍휼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성품이다.
2.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1 긍휼과 진리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 진리를 희생시켜서 얻는 긍휼은 참 긍휼이 아니다.
2.2 긍휼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과 은혜를 비교하는 것이다. 은혜는 죄를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는 표현이라면 긍휼은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 보는 것이다.
2.3 긍휼은 불쌍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과 행동이 합쳐진 것이다(실례 - 선한 사마리아 사람,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3.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약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3.1 이것은 조건부 약속이 아니다. 주기도문과 마태복음 18장의 빚진 자의 비유는 용서에 있어서 조건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3.2 참된 회개는 나는 처벌 외에는 받을 것이 없으며 용서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3.3 참된 회개만이 용서하는 삶을 살게 한다.
결론 :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을 안다면 내게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받았나 못 받았나 여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나 못하나로 알수 있다. 만일 긍휼히 여기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8)
서론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복음의 강조점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우리의 두뇌가 아니다. 우리의 가슴이다. 물론 교리의 이해, 말씀의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중심에 따르는 마음이다.
1. 마음
1.1 성경은 악의 자리도 마음이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악한 생각이나 살인, 간음, 사악, 도적질, 위선, 비방들이 나온다(막7:2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1.2 이 마음은 환경의 개선이나 조건의 변화를 통해서 변화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교육이나 철학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는 변화되지 않는다.
1.3 마음의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을 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자기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가 참으로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눈물 흘림을 통해서 더러워진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이다.
2. 청결한 마음
2.1 청결한 마음은 두 마음이 아니다. 진실한 마음이요 변함없는 마음이다. 시86:11은 청결에 대해 가장 적합한 정의를 내린다. 마음이 하나로 해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는 두 마음이 있어서 두 마음의 법이 싸우고 있다(롬7:22-23).
2.2 청결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늘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3. 하나님을 본다.
3.1 본다는 의미는 육신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믿음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 자연을 통해서도 보게 되고, 환경을 통해서도, 체험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 불신자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볼 것이다.
3.2 우리는 하나님 뵙기를 갈망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청결해지게 될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장엄한 순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최고의 목표요 욕망이요 소망으로 삼으라.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5:9)
서론 : 팔복은 우리들을 철저히 파헤치고 시험하고, 우리의 교만을 꺽는다. 새 사람만이 이러한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선언한다. 산상설교는 철저히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전쟁과 불화, 소동, 불행이 다 죄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1 이는 안일무사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감이 부족한 유화주의자가 아니다.
1.2 그는 수동적인 의미에서 평화로운 사람이요, 능동적인 의미에서 화평을 사랑하고 만드는 사람이다.
1.3 성품이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다.기독교인은 생래적 자아를 부정한다. 만사를 자기 중심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섬겨야 할 대의 명분이나 교회나 사회의 조직의 더 큰 일에 관심을 가진 자이다.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집중한다.
1.4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살핀다. 저것은 나에게 있어서 유익을 주는 것일까? 나는 권리와 의무를 지킬 수 있을까? 그들의 관심은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1.5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자기 안에 두가지 사람,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옛사람을 미워하며 옛사람을 향하여 잠잠하라 이제는 너와는 절교다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한가지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함이라면 부당하고 불공평한 대우라도 달게 받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사욕 그리고 자신에의 관심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은지 오래이다.
2. 화평케 하는 실제 방법
2.1 화평케 하는 자는 모든 것을 복음의 빛이 비추어서 판단하는 사람이다. 전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사람에게서, 죄에서 그리고 사탄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불화가 생긴다.
2.2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이신 평화의 하나님은 스스로 위엄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셨으며 우리를 위해 죽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기 위하여 그 아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낮추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5:10)
서론 : 행복론은 크리스챤을 묘사하고 잇다. 지금까지 적극적인 묘사였다면 이 복은 그 결과이다. 다시 말해 크리스챤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며 어떠한 독특한 방법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1. 소극적인 고찰
1.1 이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받는 박해를 뜻하지 않는다.
1.2 이것은 광신적인 연고로 받는 박해를 뜻하지 않는다.
1.3 이것은 자신의 악행이나 잘못으로 받는 박해를 뜻하지 않는다.
1.4 이것은 어떤 주의(ism)로 인해 받는 박해를 뜻하지 않는다.
1.5 이것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받는 박해를 뜻하지 않는다.
1.6 이것은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 희생적이기 때문에 받는 박해를 뜻하지 않는다. 순교자와 신앙고백자들이 의를 위함과 동시에 어떤 주장을 위하여 고난받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 두가지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2. 적극적인 고찰
2.1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에 받고 있는 핍박을 말한다(요15:18, 딤후3:12)
2.2 박해자들의 면모 : 예수님 당시의 종교가들, 로마 카톨릭, 교회 안의 형식적인 신자들
2.3 왜 의인은 핍박을 받아야 하는가? - 주님을 미워한 것은 주님이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분이셨기 때문이다.
3. 실제적인 교훈
3.1 자연인으로부터 칭찬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화가 미칠 것이다(눅6:26)
3.2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세상은 그를 미워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셨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이다.
3.3 크리스챤에게는 반드시 중생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고자 할 뿐이라면 세상의 칭찬을 받을 것이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면 세상은 당신은 미워할 것이다.
결론 : 빛은 항상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 드러나게 한다. 때문에 어두움은 언제나 빛을 미워한다. 우리는 박해를 자초할 만한 일을 해서도 안되지만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음으로써 핍박은 불가피하게 온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이며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최종적 증거를 얻은 셈이다.
핍박 가운데 기뻐함 (마5:11-12)
서론 : 크리스챤을 살펴 보는데는 두 가지의 중요한 방법이 있다. 크리스챤 그 자체를 단독으로 볼수가 있으며 또 세상에서 크리스챤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반응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1.크리스챤의 성격과 모습
1.1 크리스챤은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분열을 가져온다.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 곁에 서 있는다.
1.2 크리스챤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제되며 지배받고 있다(고전6:20).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며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1.3 크리스챤은 천국과 내세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생활이 통제를 받아야 한다. 히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영웅들도 내세의 소망이 아주 분명한 사람들이다.
2. 핍박에 대처하는 크리스챤의 태도 - 소극적인 면
2.1 크리스챤은 핍박을 받아도 보복을 해서는 안된다.
2.2 크리스챤은 반감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분개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2.3 크리스챤은 핍박으로 인해 기가 꺽여서도 안된다. 크리스챤은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다.
3. 핍박에 대처하는 크리스챤의 태도 - 적극적인 면
3.1 핍박이야말로 크리스챤이 어떤 신분의 사람인가를 분명히 나타내준다. 핍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표시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보증을 사탄이 해주는 것이다.
3.2 핍박은 크리스챤이 궁극적으로 가게 될 목적지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증표이므로 기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3.3 핍박은 우리에게 귀한 상급이 있음을 나타내 준다. 어떤 사람은 상급을 바라보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아주 고상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신앙의 영웅들은 다 상급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상급을 바라본다는 말은 그가 하늘의 하나님을 늘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론 : 당신은 어느 정도로 천국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가? 당신이 천국을 생각할 때에 당신은 기뻐하는가? 혹시 천국의 생각이 당신에게 두려움 또한 피하고자 하는 생각을 낳게 하지는 않는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러한 생각이 생긴다면 그것은 너무나 차원이 낮은 곳에 살고 있다는 죄를 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에 대한 생각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더욱 확실하게 하여 준다.
세상의 소금 (마5:13)
서론 : 기독교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앞에서 생각한 다음 여기서는 새로운 제목으로 기독교인이 어떤 역할을 세상에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기독교인은 그 신분상 세상에 속해있지 않으나 세상과 격리되어 살지 않는다. 타계적이거나 도피적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 본문에서 주님은 세상에서의 신자의 기능을 말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1. 성경은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1.1 낙관주의자들의 이상이나 주장처럼 자연적 발전을 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1.2 성경은 오히려 이 세상이 소금을 필요로 하는 썩은 생선과 같다고 암시한다.
1.3 세상은 방부제에 의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다.
2. 세상에 있는 신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2.1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세상과 다르다.
2.2 기독교인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은 자랑되어야 한다.
2.3 소금이 부패방지에 그 주기능이 있듯이 신자의 주기능도 세상을 썩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2.4 부차적인 기능으로 소금이 맛을 내듯이 신자도 세상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3. 기독교인은 어떤 방법으로 소금의 역활을 해야 하는가?
3.1 세상의 일반적 상황에 관해 교회가 선언문을 발표함으로 그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다.
3.2 기독교인이 그의 개인생활과 성격을 통하여 그가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서 부패와 불결성에 제동거는 역할을 해야한다.
3.3 교회는 세상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그 죄의 정체가 드러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전하고 설교해야 한다.
3.4 교회에서의 큰 부흥과 개혁이 있을 때에 전체 사회가 그 유익을 거두었다.
3.5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서 거의 자동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3.6 기독교인들의 직접적 참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개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전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고 보다 높은 전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결론 : 기독교인이 소금 역할을 하는데 문제는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는 것이고 충분히 소금구실을 못하는데 있다. 우리가 참 기독교인이 되고 주위 사람들을 신자로 만든다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
세상의 빛(마5:14)
서론 : 주님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크리스챤을 향하여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1. 소극적 의미
1.1 이 세상은 암흑 상태이다. 세상은 늘 진보와 발전상을 말하지만 사실 저들은 생명에 관한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
1.2 개인과 개인의 관계 : 인간이 자기의 계몽 상태, 지식, 이성을 과시하는 곳에 인간 관계의 비극적인 붕괴가 있다.
1.3 집단과 집단의 관계 : 여기에도 산업상, 경제상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1.4 그리스도인은 제외하고는 누구나 이 일에 관하여 유익한 충고와 지식과 지도를 줄 수 없다.
2. 적극적 의미
2.1 보통의 크리스챤이라도 비기독교인이 아는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고전1:21)
2.2 우리들은 빛을 받을 뿐만 아니라 빛이다. 빛의 전달자이다(요8:12, 엡5:8). 우리들은 복음을 믿고 있는 자로서 빛과 지식과 지도를 받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주님의 성품이 우리들의 일부로 되고 있는 것이다.(요일1:5, 요8:12, 약1:17)
2.3 크리스챤이 첫 번째 미치는 영향은 일반적 영향, 즉 억제적 영향(소금의 역할)이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빛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3. 세상의 빛
3.1 빛의 역할은 어두움과 어두움에 속하는 것을 들어나게 하는데 있다(엡5:14).
3.2 빛은 숨은 어두움의 진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어두움의 원인도 지적한다. 세계 문제의 유일한 원인은 개인적 단계의 문제로부터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 .<가져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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