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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의 종말론(24, 25장)

by 은총가득 2020. 8. 11.

마태복음의 종말론(24, 25장)

 

1.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마태복음 24, 25장에 나타난 종말론을 신약신학적인 관점에서 탐색하고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의 방법

성경의 각 책은 각각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들과 관련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마태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과 관련하여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핵심을 이해하려 하였다. 먼저는 본문연구를 통해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해석하고, 이 기록의 배경이 되는 23장을 살펴 본 후 다른 복음서 및 바울 서신과의 비교를 통하여 마태복음 종말론의 독특성을 알아 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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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태복음 24장의 구조

24장은 두가지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또 하나는 세상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답변이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긴 하지만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마지막에 일어나는 종말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장에서는 종말의 심판의 일부로 진행되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마지막날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징조들을 잘 구별하여 읽되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비춰지는 종말에 대한 교훈을 서로 잘 연결하여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멸예고(1-2절)

 

2) 제자들의 질문(3절)

(1) 어느 때에 예루살렘이 파멸되겠습니까?

(2) 또 주의 재림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3) 종말의 시작에 관한 말씀(4-8절)

(1)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이다.(5절)

(2) 전쟁과 내란이 있을 것이다.(6-7절 상)

(3)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7절 하)

 

4)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말씀(9-28절)

(1) 제자들의 박해와 복음전파의 시작(9-14절)

(2) 예루살렘의 멸망과 제자들의 준비(15-28절)

 

5) 세상 마지막 날의 임박한 징조(29-36절)

(1) 우주적 변화(29절)

(2) 하늘에서 보이는 재림의 징조(30절 상)

(3)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30절 하-31절)

(4)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임(31절 하)

(5) 그 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32-36절)

이후 25장 까지는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내 용이 이어지고 있다.

 

4. 예루살렘 성전 파멸의 의미

마태복음 23장은 24장에서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24장과 25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문맥인 23장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23장에서 25장의 내용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23장은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유대체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선포인 반면 24, 25장은 제자들에 대한 사적인 가르침이라는 면에서 23-25장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23장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는 24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23장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유대체제를 상징한다. 23장은 당시 유대체제의 핵심부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언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23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자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이 나타나고 있다. 37-39절을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유대체제의 지배계층들의 위선의 집합소요 부패의 온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왜곡된 길로 인도하는 세력이었다. 하나님을 알려주고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을 죽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자명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를 거부한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셀롯당원들이 제사장들을 학살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고 그 결과 로마군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피해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 교회 역사가들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이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로마군은 성전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군기를 세웠다. 이 군기에는 로마황제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로마황제는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정복 후 이 기장에 제물을 드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상황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일부 여인들은 자식을 먹기 까지 했다고 한다. 겨울철은 더욱 어렵다. 겨울엔 계곡의 물줄기가 불어나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피난민 중 일부는 실제로 겨울에 로마군의 공격을 피하려다 계곡의 물줄기에 막혔고 시간을 끌다가 살해를 당하기고 했다. 안식일은 통행수단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통행거리도 제한을 받았다. 그리고 셀롯당의 광적인 애국자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그리고 있는 환난과 심판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교훈은 비그리스도인에게는 회개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시급성을 깨닫게 해준다.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한 무서운 결과 즉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재앙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지막날에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이 당하게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의 공동체는 이 기록을 읽고 복음 전도의 시급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24장 이후 25장의 내용을 읽어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의 종말론에서 보여지는 환난과 재앙들의 1차적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환난의 때에 보호받는다. (22:24) 또한 복음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세상에 전파된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 후 종말론의 맥락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비유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종말론의 핵심 메시지는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첫 째 종말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유대전통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을 가진 공동체가 더 이상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시작이 전제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유대체제와는 결별을 선언하여야 했다.

 

둘 째 복음은 전 세계를 향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체제와 결별을 선언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체제 안에 더 이상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복음은 이제 유대를 넘어 온 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셋 째 예루살렘의 파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이 겪게될 마지막 날 심판의 고통이다.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전도의 사명을 일깨운다.

 

넷 째 심판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의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심판 가운데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5.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의 삶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말씀은 하나의 독립된 수사단위이다. 이들은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포함한 모든 말씀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5장의 내용을 보면 마태의 공동체 안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은 여러 부류의 생활양식들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 매여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4:37-51), 주님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재림이 지체될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13), 복음을 듣고 신앙 공동체로 나아왔으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4-30),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있지 않는 사람들(25:31-46)이다.

 

노아 홍수 때의 비유(24:37-51)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36절) 홍수 때에 멸망당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임박해있는 분명한 심판의 징조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에 매여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 갔다. 마태복음은 일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구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 장소가 똑 같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인 ‘밭’과 ‘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제자의 삶을 엄중히 경계한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어떤이는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고 어떤 이는 일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종이 등장한다.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로서의 직무를 다하여야한다. 주인이 다시 와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는 지를 불시에 확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깨어있는 제자의 삶이란 ‘때를 따라 양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상의 삶을 살며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직무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열 처녀 비유 역시 강조점은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이 비유를 해석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는 신랑이 그들의 예견대로 ‘속히’ 올 것이라고 예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주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았거나 직업을 때려 치운 사람들일 것이다. 기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본문에서는 신랑이 더디 오더라도 맞이 할 수 있는 ‘준비되어 있는 삶’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즉 종말을 살아가는 제자의 삶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는 조금 다른 강조점을 가진다. 앞의 두 비유는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데에 그 강조점이 있지만 달란트 비유는 ‘오랜 후에’(19절) 주인이 필연적으로 돌아와 결산한다는데 그 강조점이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이 받은 능력에 상관없이 결산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자신은 그 만한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 수 없었다거나 시간과 재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핑계를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도 금 한 달란트 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노동자가 일만일을 일하여 번 임금의 양이었다. 즉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많은 이들이 복음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왕국 가까이에는 왔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 헌신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마태는 그들에게 그들의 삶은 반드시 주인 앞에서 결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도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시와 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이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제자는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해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믿었다. 그런데 종말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공동체안에는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말씀들을 다시 정확하게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들의 공동체에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지연된 종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가르침으로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종말론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후대에 복음서 기자에 의해 창작된 것인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는데 마태의 시대에 가서야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루살렘 파멸에 관한 예언 기사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조직적이며, 더욱 교훈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태복음의 기록연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성전 파괴 이 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하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미 시작된 종말과 아직은 오지 않은 종말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제시한다.

 

첫 째, 예수의 제자들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때를 따라 양식을 그 집 맡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준다“.

 

둘 째,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속단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더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계속’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셋 째,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 재물, 시간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 주인은 충분히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주신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 지 결산하게 될 것이다. 제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기여한다.

 

넷 째,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까지 제자들은 가난한고 소외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섬기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 분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주님은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6.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마가의 기록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비교해보자.

마가복음 13장 1-37절은 마태복음 24, 25장과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도 비교적 마가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마가복음과의 비교를 통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드러내 보이겠다.) 그러나 전 후 문맥과 그 강조점에서 볼 때 마태복음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점들은 마태복음의 종말론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첫 번 째 차이점은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의 파멸이 부패한 유대전통과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그러한 전 문맥의 설명적 진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부패한 유대전통, 유대지배 체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번 째 차이점은 마가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이 후에 관련된 교훈적인 비유가 이어지지 않는다. 마가복음 13장 이 후 14장 1,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꾸미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7. 바울서신과의 비교

바울서신에서의 종말론은 주로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고린도 전, 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고린도 전, 후서에서의 종말과 관련된 진술들을 살펴보면 주로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은 신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신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 후서에서도 바울은 후패한 몸을 벗고 새로운 생명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고후 4:16-5:10) 바울에게 종말은 소망의 대상이며 기다림의 대상이다. 바울은 종말을 ‘기다리며’ 현재를 ‘산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종말을 ‘살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종말에 관한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의 강조점은 신자들이 종말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살후 2:1-12) 바울의 주된 관심은 성도들에게 종말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하여 미혹되지 않게 하는데 있었다. 종말에 관해서 바울은 ‘바르게 아는 것’을 더욱 강조 하였다면 그에 비해 마태의 관심은 종말의 시대를 ‘바르게 사는 가’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 결론

위의 연구를 토대로 마태복음 종말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마태복음 종말론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인 전통적인 종교지배체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그러한 유대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태복음의 공동체였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심판받은 유대체제를 넘어서 복음을 들고 온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선교적이다.

 

둘 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를 ‘오늘’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주요한 관심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이다. 그 삶은 일상의 삶을 살되 일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말씀을 전파하고 맡은 사람들을 돌보는 삶이다. 또한 그 삶은 종말을 의식하며 살되 늘 준비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꺼이 헌신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적 삶은 철저하게 종말이 현재화된 삶인 것이다.

 

셋 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제자로서의 ‘삶’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위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신앙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말론적 신앙를 가졌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종말을 믿으며, 그 종말을 의식하며 사는가?.

 

참고문헌

France, R. T.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y: Matthew.: Grand Rapid: IVP,1987.

Keener, Craig 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IVP. 1993. 「IVP성경배경주석 신약」. 정옥배외 역 서울: IVP.1998.<소망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