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나타난 ‘감사’
최 원 준 「목회와신학」 편집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
어휘 고찰 ‘감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유카리스티아’eujcaristiva이며, 신약에서는 바울서신에서만 15회 나온다. 동사 ‘유카리스테오’eujcaristevw는 신약 전체에 38회 사용되고 있다. ‘유로게오’eujlogevw 역시 ‘감사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식사하기 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를 말하며, 신약에서는 총 41회 사용되고 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유로게오’는 ‘축사祝謝하다’, ‘축복하다’ 등으로 번역된다. ‘안쏘모로게오마이’ajnqomologevomai는 누가복음 2:38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보통 ‘은혜’로 번역되는 헬라어 ‘카리스’cavri"는 ‘엑코 카린’e[cw cavrin의 형식으로 사용되어 ‘감사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딤전 1:12; 딤후 1:3; 히 12:28; 롬 6:17; 7:25; 고전 10:30; 고후 2:14; 9:15; 골 3:16.
신약에 나타난 감사
1. 감사와 기적 1) 감사와 오병이어의 이적(막 6:30~44; 마 14:13~21; 눅 9:10~17; 요 6:1~14)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 놀라운 사건이 감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오천 명이 먹어야 할 양식이 있기는커녕, 한두 사람이 겨우 먹을 만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궁핍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켜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100명씩, 50명씩 앉게 하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헬. 유로게센. 여기서 축사는 식사 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를 뜻한다. 유대인의 식사 습관이다. 상상해보라. 양손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감사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 이것이 바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의 출발점이었다.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난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끊이지 않는 이적을 베푼 것(왕상 17:8~16 )혹은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100명을 먹이고도 음식이 남은 사건(왕하 4:38~44)과 닮았다. 또한 오병이어의 이적은 출애굽 전승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과 같이 예수님도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사 이들을 먹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인 모습은 불평과 원망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1.감사, 불평, 원망, 불신앙’를 보라.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의 표현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오병이어 이적은 감사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 최후의 만찬에서 감사하시는 예수님 오병이어의 이적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닮은 점이 많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기 전 빵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서, 주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도 반복된다.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라본 labwvn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유로게센. eujlovghsen ) 떡을 떼어(카테크라센 katevklasen) 제자들에게 주어(에디두 ejdivdou)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막 6:41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라본 labwvn) 축복하시고(유로게사스 eujlogvhsa") 떼어(에크라센 e[klasen) 제자들에게 주시며(에도켄 e;[wken)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4:22.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이 기도는 통상적인 유대인의 식사 기도를 따른 것이지만,1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사역에 절대 순종하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잔치(사 25:6; 렘 31:14)를 바라보셨기에 죽음을 앞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감사하실 수 있었다. 또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빵을 자신의 몸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이적은 그의 몸으로 우리를 살리시는(요 6:35, 48 )십자가 사건의 예표다.
3) 절망의 바다 위 선상에서 거행된 성찬식, 276명의 구원(행 27장) 바울도 그랬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알렉산드리아호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갈 때,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났다. 14일 동안 계속된 거센 폭풍우 앞에서 속수무책, 완전 절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셨다. 바울은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바울로 인해 그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명을 다 이루기까지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또한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자도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에 힘을 얻은 바울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지난 14일 동안 폭풍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바울은 이들에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권면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자신이 먼저 빵을 먹는다. 그런데 바울이 빵을 먹는 행동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성찬식이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행 27:35~36.
먼저,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라본 labwvn)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다(유카리스테센 eujcarivsthsen). 그리고 떼어 먹었다(크라사스 에르크사토 에스씨에인 klavsa" h[rxato ejsqivein). 그러자 배안에 있던 사람들도 떡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프로세라본토 proselavbonto). 성찬식과 동일한 모습이다!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라. 폭풍을 만나 14일 동안 바다를 표류했던 배 안에서 이루어진 성찬식. 그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바울은 절망의 한복판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다. 바울과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먹은 것은 단순한 빵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과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였다. 바울이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준 것은 그들의 굶주린 배를 불리는 빵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모두 구출되었다.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4)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하신 예수님(요 11:41~44)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감사하셨던 모습은 기적의 백미라고 할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실 때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예수님이 지금 처한 상황은 인간이라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즉 죽음의 상황이다. 이미 죽은 지 4일이 된 시체를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상황을 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셨다.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예수님이 드린 감사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41절에 따르면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 감사란 무엇인가?감사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가운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내가 기도한 것 이상으로 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행위다.
둘째, 42절에 따르면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즉 과거에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셋째, 42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감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자.
2.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돋보이게 만든다(눅 17:11~19)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이 이야기에는 누가복음의 대표적인 신학사상인 이방보편주의Gentile Universalism가 잘 나타나 있다. 이방보편주의는 유대편협주의Jewish Particularism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후자가 배타적 선민의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에게만 제한하는 사상이라면, 전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전해지기 위함이라는 사상이다.
누가는 대표적인 이방보편주의를 주창한 신학자로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부터 잘 나타나 있다.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민 앞에 예비하신’ 주님의 구원이요, ‘이방의 빛’참고 사 42:6; 49:6 이 될 것을 예언한 것눅 2:30~32이 그 예다. 누가의 이방보편주의는 정결법적으로 부정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그의 묘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마리아인은 정결한 사람의 대표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치고 참된 이웃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눅 10:25~37.
누가복음 17:11~9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출생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나병이라는 부정하디 부정한 병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이 구원을 받았노라고 선포하셨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믿음, 구원을 이루는 믿음의 소유자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먼저, 사마리아인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높여 간청한 사람은 사마리아인만은 아니었다. 나머지 9명의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였다이들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돌아온 그 사람에게 대해 굳이 사마리아인, 이방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10명 모두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했다. 나병환자는 그 병이 나으면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치유된 것이 확인되면, 성전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했다. 10명 모두가 가는 도중에 나을 것을 믿고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들 10명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예수님 말씀대로 깨끗함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똑같다. 그러나 지금부터 달라진다. 10명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다는 말이다. 감사가 무엇인가?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다. 선물이나 도움을 받았을 때, 잘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감사다.
둘째, 이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만 감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를 낫게 해준 분, 즉 하나님의 치유 능력의 매개체이신 예수님을 찾아갔다. 가던 길을 돌아서 다시 예수님께 와 감사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대부분 누군가를 통해서 오기 마련이다. 감사는 하나님과 은혜의 매개자 모두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단지 능력의 매개자로만 여긴 것은 아니다. 그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요 하나님을 경배하듯 예수님을 높였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의 믿음이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치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 하나님처럼 마땅히 경배를 받아야 하는 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아왔고, 그분의 발아래 엎드렸고, 감사했던 것이다.
이 믿음의 결과는 구원의 완성이었다. 9명도 치유를 받았지만 그들은 육체적인 치유만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육신의 치유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사마리아인은 10명 가운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9명에 비해 돋보일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감사였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돋보이게 만든다.
3. 감사의 이유들
1) 감사로 시작하는 서신의 본론부 바울서신은 인사말 후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본론을 시작한다고전 1:4; 고후 1:3; 엡 1:4;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단, 갈라디아서는 예외인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바울을 음해하고 바울이 전해준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해준 자들에게 갈라디아 교인들이 넘어가려는 위기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로마 교회는 제외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넘쳤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성도들이 믿음 생활을 잘했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보인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2~3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은혜의 삼중주’Triad of Graces로 불리는데,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로 이 세 가지를 몇 차례 언급한 바있다살전 5:8; 고전 13:13; 갈 5:5~6; 골 1:4~5. ‘믿음의 역사’란 믿음을 가진 자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삶을 가리키며, ‘사랑의 수고’ 역시 유사한 개념으로, 사랑은 감정이 아닌 구체적인 노력과 수고와 희생임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 둘을 합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했다. 또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이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것을 감사하고 있다살후 1:3.
‘소망의 인내’는 박해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박해를 받았다살전 1:6~7; 2:14. 또 그들에게 궁핍과 박해를 견디게 하는 힘은 소망이었다. 이 소망은 주님께서 결국에는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며,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다. 바울의 감사는 특별히 여기에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런 소망의 인내로써 많은 환란과 궁핍을 잘 이겨내고 믿음을 지키고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자 바울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최상급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8~9.
빌립보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넘쳤는데, 그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줄곧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3~5.
빌립보 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바울을 후원하여 복음 전파사역에 동참했으니, 바울이 볼 때에 빌립보 교인들의 아름다운 믿음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과 빌레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 역시 그들이 예수님과 성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골 1:3~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몬 1:4~5.
2)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 서신의 본론 첫 부분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여러 차례 표현하고 있는데,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과 그의 일행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에 대해 감사했다살전 2:13. 또 하나님이 그들을 처음부터 택하사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어 구원받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살후 2:13. 또 바울은 로마 교인들이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죄의 종에서 벗어난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롬 6:17.
이처럼 바울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내용은 거의 모두 성도들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만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내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내가 무엇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가는 나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4. 감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바울서신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날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는 권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대표적으로 골로새서를 들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고 권면한다. 내 삶에 감사함이 넘쳐 난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비결은 6~7절이 말해주고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자들이다. 그 주님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으며, 받은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면 된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는 이단 사상이 침투해 있었다. 거짓 교사들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할례, 음식법, 절기를 지켜야 한다2:11, 16, 다른 하늘의 존재들heavenly beings을 섬기라2:18 “천사 숭배.” 참고 갈 4:3,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라2:21~23고 주장했다. 이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에바브라에게 배운 바2를 굳게 지키고 이런 이단 사상에 넘어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단 사설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모든 보물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어찌 교묘한 말로 골로새 교인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갈 것인가? 그들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가 넘쳐날 것이다.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크릿」이란 책이 있다. 호주 출신의 론다 번Rhonda Byrne이란 여성이 쓴 이 책은 2007년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미국에서 최단 기간 500만 부를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2007년 6월에 출판되어 8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고, 2009년 6월 현재 190만 부가 팔렸다. 이 책이 인기를 모으면서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 「크리스천을 위한 시크릿」, 「부의 시크릿」 등 ‘시크릿’이란 제목을 단 유사 도서들이 출판되기도 했다.
일반 책의 크기보다 다소 작고, 분량도 234쪽밖에 되지 않는 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이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자기계발서이기 때문이다. 시류에 맞았다는 말이다. 둘째, 제목이다. 「시크릿」, 즉 비밀이란 뜻의 제목, 그리고 “수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란 부제가 오늘날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부와 성공의 비밀은 “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우리의 생각은 그 생각에 걸맞은 것을 끌어당긴다는 법칙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생각한 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 삶은 지난날 우리가 한 생각들이 현실에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이며,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별로 새로울 것도, 놀라운 주장도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빠져든다. 그러나 이런 류의 생각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와 비교하면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만 아는 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면 감사는 넘칠 것이다.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라는 것은 골로새서 3:15~17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성도는 ‘감사하는 자’다. 성도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찬양과 감사가 넘쳐난다. 본래 감사와 찬양은 동의어다. 구약에서 감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삼하 22:50; 대상 16:4; 25:3; 29:13; 스 3:11; 느 12:24; 시 7:17; 106:47; 108:3; 147:7; 사 38:18; 단 2:23; 4:34; 롬 15:9; 계 7:12. 계시록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하는 일은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리는 일이다계 4:9.
특히 16절 ‘감사’의 헬라어 ‘카리스’는 보통 ‘은혜’로 번역되는 단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감사의 핵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성도는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을 힘입어,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이기에 감사의 근거는 그분께 있다. 성도의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주님이 되셔서 성도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고백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삶에 주인되시기에 성도는 그 분을 통해디 아우투 dij aujtou`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5. 감사와 기도
앞서 언급한 대로 바울에게 있어서 기도는 곧 감사였다. 그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다. 감사와 기도를 같은 뜻으로 이해한 그였기에 바울은 기도할 때 감사하라고 요구한다.
1)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길은 모든 일에 기도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울은 감사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는 것은 인간이 염려를 없애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노력보다 하나님의 평강이 더 뛰어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평강은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임할 것이다.
사실 바울이 이런 담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수감되어서 오히려 복음에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1:12. 여기서 ‘진전’라는 말의 헬라어 ‘프로코페’는 군대 용어로서, “본진本陣이 가기 전에, 선발대가 먼저 가서 길을 만들어 행진을 계속할 수 있게 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마치 길을 만드는 선발대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채로 지방 총독의 관저에서 재판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재판이 진행되면서 바울에 관한 일들이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과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용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시련을 복음 전진의 기회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역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를 시기하고, 공격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바울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온갖 술수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투기와 악한 행동까지도 결국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바울은 자신을 투기하고 적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의 악함까지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사실에 기뻐했다. 또한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15~18절에서 3회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전파될 수 있다면 나의 고난조차도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기쁨은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그리스도=복음가 전파되느냐 여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선한 방법으로든, 악한 방법으로든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전파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다. 구원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감히 측량치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vw는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들의 기도 생활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 단어다참고 행 1:14; 6:4. 또 ‘프로스카르테레오’는 누군가를 위해서 ‘항시 대기 중에 있다’stand ready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막 3:9. 기도란 24시 대기조처럼 중단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참고 막 14:3.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감사를 추가한다. 2절 후반부를 직역하면 이렇다. “깨어있으라, 기도 안에서, 감사 안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각성은 기도와 감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감사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사람이다.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민감한 촉수를 가질 때 가능하다. 그 촉수가 무뎌지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보지 못하게 된다. 감사가 사라지는 순간 원망과 불평이 찾아올 것이다. 혹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게 될 것이다. ‘깨어 있다’그레고레오 grhgorevw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한다는 종말론적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다. 성도의 종말론적인 삶이란 사회를 떠나 고립무원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유혹과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기도와 감사로 깨어있는 삶이다.
3) 디모데전서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이 구절은 기도의 보다 구체적인 형식 4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간구’데에시스는 어떤 필요에 대해 요청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다. ‘기도’프로슈케는 기도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단어다. ‘도고’엔툭시스는 중보기도를 뜻하고 ‘감사’는 말 그대로 감사다.3 감사가 기도의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기도와 감사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6.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범사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판티’ejn pantiv는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모든 것에’이며, ‘모든 상황 속에서’, ‘언제나’라는 뜻도 가능하다. 에베소서 5:20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이 같이 나타나고 있다. “범사에휘페르 판톤 uJpe;r pavntw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판토테 pavntote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모든 일’에는 좋은 일뿐만 아니라 시련이나 고난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늘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7. 감사와 고난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이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환란고후 1:8~9을 겪었다.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극복했다고후 1:9고 말한다. 부활 신앙이 고난 극복의 비결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저 유명한 ‘부활장’으로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썩을 육신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키는 부활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기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감사의 종말론적 차원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어도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승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맛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57에서 ‘승리를 준다’는 말의 헬라어디돈티 토 니코스 didovnti to; ni`ko"는 현재분사다. 하나님은 죽음과 죄와 율법에 대한 승리를 성령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지금도’ 주고 계시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계속해서 주의 일에 힘쓸 수 있는 근거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4~18.
8. 감사하는 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성도의 마땅한 삶을 이야기할 때 언어의 문제를 언급한다. 말이 그 사람이 어떤 인격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가 버려야 할 말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그 대체어를 제시한다.
성도는 마땅히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4:25. 성도는 더러운4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하고, 대신 남을 세워주는 말, 시기적절한 말,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4:29. 성도는 악독남에게 상처를 주는 예리한 칼과 같은 말과 떠드는 것흥분해서 고래 고래 고함 지르는 것과 훼방하는 것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남을 헐뜯는 것을 버려야 한다4:31.
5:4에는 성도가 버려야 할 3가지 악한 말이 나오는데, 이 세 가지 언어는 모두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첫째, ‘누추함’아이스크로테스 aijscrovth"은 ‘저속한 행동, 저속한 언어’를 말한다. 골로새서 3:8의 ‘부끄러운 말’아이스코로기아 aijscologiva과 유사한 단어다. 둘째, 어리석은 말모로로기아. mwrologiva이다. 셋째는, 희롱하는 말유트라페리아. eujtrapeliva로서 음담패설이라는 뜻에 가깝다. 이 세 가지 말과 대척점에 있는 언어가 바로 ‘감사하는 말’이다. 성도의 언어생활은 한 마디로 감사하는 말로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하는 말, 이 세 가지가 앞뒤 3절과 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5절은 이 세 가지 죄악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하고 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어떤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우상숭배하는 자의 삶의 모습이 바로 3~5절에 묘사되어 있으며, 그 반대의 모습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모습은 ‘감사’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사는 성도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9. 감사와 직분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바울은 본인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비방하고 박해하며 폭행하는 자였다딤전 1:13.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였던 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의 감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주님은 바울을 충성되게피스토스 pistov" 여겨 직분디아코니아 diakoniva까지 맡기셨다. 그 직분이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 1:11을 전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에게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신 일이야말로 ‘은혜의 패러독스’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행 20:24할 만큼 충성될 것을 믿어주셨던 것이다. 감사는 항상 과분한 선물을 받을 때 넘치는 법이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은사에 따라 직분을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10. 감사와 금욕주의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3~4.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에 거짓 교사가 침투해 성도들을 미혹했다. 그들은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했는데, 일부 학자는 육체를 죄악시하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의 주장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유대교의 음식정결법을 여전히 고집하던 유대인 성도들의 주장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 연원이야 어찌됐든 이들은 특정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음식물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음식정결법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주후 1세기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적인 주장이다. 바울의 이러한 논조는 마가복음 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입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음식물이 깨끗하다”19절고 천명하신다. 이 주장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음식정결법 그 자체에 대한 폐지 선언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엄청난 선언이었는지, 마태는 이 말을 아예 삭제한다.
로마교회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내부 갈등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식 문제였는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려는 목회적 목적에 따라 음식 문제에 자유로운 자들에게 그렇지 못한 자들을 위해 절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음식정결법 준수로 회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믿음이 연약한 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로마 교회에게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롬 14:20라고 선포하고 있다.
음식정결법을 지키는 것이나 금욕주의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판하며, 자기 우월감을 가진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그랬고, 바울이 세운 교회의 일부 성도들이 그랬다. 예수님은 음식정결법을 뛰어넘어 어떤 음식이라도, 누구와도세리와 죄인들 식사를 하셨다. 그것은 장차 있을 천국 잔치를 예시하는 종말론적 행위였다. 세례 요한의 삶이 금욕적 삶인 것과는 달리참고 막 2:18, 예수님은 구원의 기쁨과 감사를 표상하는 잔치의 삶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식탁은 당신을 통해 도래한 구원의 시대를 축하하는 기쁨의 잔치였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감사하는 자리였다.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 역시 그랬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주장한다. 성령 안에서는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비본질적인 문제다. 필자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의 한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 선교사가 열심히 한국에서 선교를 한 후 자기를 파송한 미국 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했다. 그런데 설교를 하던 중 자신이 한국에서 보신탕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흥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개를 먹는다는 말인가? 저런 개 같은 사람 같으니….” 반대로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하였다. “저 선교사는 참 훌륭하다. 현지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개까지 먹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이렇게 선교사가 보신탕을 먹은 것 가지고 서로 싸웠다고 한다.
바울은 말한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롬 14:20. 서로 화평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모든 것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겨서는 안 되고, 반대로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면 안 된다고롬 14:3. 각자의 믿음에 따라 행하되, 주님을 위해 하면 된다.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11. 감사, 불평, 원망, 불신앙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로마서 1:18 이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된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이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표현이다. 로마서 1:22 이하에서 바울은 우상숭배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자는 자연스럽게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이며, 감사하지 않는 일은 불신앙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도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한마디로 원망과 불평이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고, 물이 없다고 불평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을 때 잘 먹었다.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민 11:8. 그러나 그들은 매일 만나만 먹는 것에 질렸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민수기 11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불평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울면서 과거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와 생선과 각종 과일과 야채를 그리워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겪은 압제와 가혹한 노예 생활은 기억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원망하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하삽숩. 구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출 12:38에 언급된 ‘수많은 잡족’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이 탐욕을 품었고,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충동질한 것으로 보인다. 감사 대신에 불평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더 큰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과 불평은 결국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불만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지에 대한 의구심, 곧 불신앙의 표현이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2~3, 7.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가나안 정탐 후 결과를 들었을 때 극에 달했다민 14장. 12명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풍성한 열매가 있지만, 그곳에서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와 같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은 매우 크고 견고해서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성대곡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며 이곳까지 자신들을 데려온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3. 그들은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애굽으로 자신들을 인도할 지도자까지 세울 계획을 짰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호수와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까지 했다.
그러면 어째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담하고 원망했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을까? 이런 차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신뢰했다.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고, 광야 생활 40년 동안 자기들을 인도하셨지 않은가?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 있던 모세에게 나타나 출애굽을 지시하실 때부터 이 약속을 분명히 전하셨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8.
또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에 가나안 땅을 주리라는 약속을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애굽 탈출을 감행한 것도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기 때문이다출 3:16~18. 이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할 사람을 선발하라고 지시할 때에도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땅으로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민 13:2.
이렇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누누이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약속을 기억하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 약속의 성취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 14:8.
여호수아와 갈렙은 출애굽시키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광야생활을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분도 역시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직접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인 분석을 넘어서게 한다. 사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나머지 사람들의 보고는 ‘객관적인 분석’이다. 신체적인 면에서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었던 아낙 자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뛰어났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객관적 전세 분석을 넘어선 믿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이 허황된 망상이나 만용이 아닌 이유는, 그들의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약속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을 보여주는 이적을 하나님이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객관적인 전세 분석 앞에서 두려워 하고, 원망하는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Magnalia Dei를 잊기 때문이라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는 시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시 78:40~42.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시 106:12~25.
한편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나님이 친히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던 갈렙에 대해 성경민 14:24; 수 14:8, 9, 14은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이 커 보일 때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불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한 멸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는 신앙인은 커다란 장벽 앞에서도 감사와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렇게 보면 감사는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신앙의 표현이며,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불신앙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사탄은 “항상 낙심하라 쉬지 말고 원망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니라”고 말한다.4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거역하는 일은 말세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아카리스토이. ajcavristoi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바울은 말세에 사람들이 어떻게 타락할지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딤후 3:4의 특징이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요, 여기서부터 자연스럽게 부모를 공경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루시퍼는 타락 전에도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흔히 사탄이 타락한 천사 루시퍼라고 말한다. 루시퍼는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다. 반역은 감사의 반대어다.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사람이 참된 신앙인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표시라고 하겠다.
1. 유월절 만찬이었던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이야기」 (두란노, 2009), 94~100을 참고하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촛불 점화 → 첫 번째 포도주 잔 → 축복문 낭송 → 손을 씻는 예식 → 전식(前食: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서 먹고, 세 개의 무교병(히. 마짜)을 포개서 가운데를 잘라 접시에 올려놓는다) → 두 번째 포도주 잔 → 축복문 낭송 → 무교병을 떼어 나눔 → 쓴 나물을 무교병에 넣은 힐렐 샌드위치를 만들어 하로셋 소스에 찍어 먹음 → 축복문 낭송 → 유월절 어린양 식사 → 세 번째 포도주 잔(=구원의 잔) → 네 번째 잔(=엘리야의 잔) → 만찬 후 지붕에 올라가 힐렐송(시 113~118) 찬양. 2.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아니라 이방계 그리스도인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1:7; 4:11~12). 아마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4:10)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회에 대해 듣고 편지를 쓴 것 같다. 3. 기도에 관한 여러 용어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말씀」 (2009. 2 ) “기도에 관한 어휘적·배경적 고찰” 8~11을 참고. 4. 헬라어 ‘사프로스’(saprov")는 나무나 고기가 ‘썩은’이란 뜻이다. 5. 전광, 「평생감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7), 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