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서 9장 / 이스라엘의 선택
다음의 세 장은 이스라엘의 과거(9장), 현재(10장), 미래(11장)에 대한 영적인 역사를 다룬다. 바울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선택한 백성을 제쳐두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무엇이고,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은 이 민족을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가를 설명하는 데 있다.
1.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설명 (롬 9:1-13)
1) 선택으로 인한 축복들(1-5절)-
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진실한 부담감을 칭찬할 수밖에는 없다. 그의 말은 출애굽기 32장 31-32절의 모세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① 양자-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의해 선택됨(사 43:20-21).
② 영광-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출 24:16-17).
③ 언약-아브라함과, 전 민족과, 그리고 다윗과 맺으신 언약.
④ 율법의 수여-하나님은 이방인을 다루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들의 생활을 다스릴 하나님의 법을 받았다.
⑤ 하나님을 섬김-성막에서의 제사장 직분.
⑥ 약속들-구약의 수많은 약속들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성취될 것이다.
⑦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
⑧ 메시야-그리스도는 유다지파에 속한 유대인이셨으며, 율법에 따라 출생하셨다.
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 영원히 축복하셨다” 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다른 어떤 나라도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축복들을 일축해 버렸으며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 중에 속해 있으므로 그와 유사한 축복들을 누린다. 곧, 양자(엡 1:5), 영광(엡 1:6-7),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마음에 기록된 율법(히 10:16-17),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장 직분(벧전 1:4), 그리고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 등의 축복들로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선택의 기초(6-13절)-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절대 주권을 행사하셨다. 로마서 9-11장에서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민족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음을 유의하자. 이 장들에 나오는 진리들을 구원에 적용시키거나 또는 신자 개인의 안전성에 적용한다면, 그 전하는 메시지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실제로, 바울은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종족적으로 논하는 것이지 각각의 죄인들을 개인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① 아브라함-
그는 히브리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유대 백성이 이스라엘의 참된 아들은 아니라는 점을 서술한다(2:25-29 참조).
아브라함은 자녀들이 많았으나 선택된 아들은 이삭 한 사람뿐이었고, 이삭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아들이었다.
② 이삭-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아들이었던(갈 4:21-31) 반면에, 이스마엘은 행위를 통한 육신의 아이였다. 참된 “아브라함의 씨”는 신자들이며, 혈관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 “아브라함의 씨”는 아니다.
③ 야곱-
하나님은 장자인 에서를 지나치셔서 야곱을 택하셨다. 이것은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민족적인 목적이 성취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에서는 하나님께 반역할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목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둘 다 진리라는 점이며, 말씀에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이스라엘이 선택됨에 대한 변호 (롬 9:14-33)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선택의 교리가 몇 가지 의문을 일으킨다.
1) 하나님은 불의하신가?(14-18절)-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선택은 의로움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사람은 버리신다면 하나님은 공정하지 못하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공정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공정하시다면 그는 우리 모두를 정죄하셔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세(출 33:19)와 바로(출 9:16)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그의 원하시는 대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고 다른 민족은 지나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도 전혀 없다.
2) 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왜 잘못을 찾아내시는가?(19-29절)-
바울은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를 들어 응답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레미야 18장 1-6절에서 빌려 왔을 것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민족들과 그 지도자들은 그릇들이다. 어떤 그릇들이 파괴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인내로 참으시는 진노의 그릇들인가 하면(창 15:16), 다른 그릇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비의 그릇들이다. 이러한 자비의 그릇들은 신자를 나타내고 있다(24절의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를 뜻함).
다음으로 바울은 호세아 2장 23절과 1장 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 중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울 한 백성을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 백성이란 교회를 말한다(벧전 2:9-10 참조).
바울은 이사야 10장 22-23절을 인용하여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밝힌다(사 1:9). 다른 말로 하면,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30-33절)-
여기에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올바른 역사의 역설이 있다.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유대인들이 가졌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영접을 받았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하였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사 8:14/사 28:16/마 21:42/고전 1:23/벧전 2:6-8). 이들은 그 민족에게 정치적인 승리를 가져올 메시야를 원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서는 스가랴서에 대한 본 서의 설명을 참조하라.
본 장에서 바울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위치를 설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었고, 다른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이 민족은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데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본 장은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를 높이고 있으며, 이 주제는 오늘날 인간의 의지와 자기 공로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인간의 불순종에도 관계없이 잘 이루어져 나갈 것이며, 불순종하는 사람은 축복을 잃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측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11:33-36 참조).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특별 연구
1) 9장 13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구절은 말라기 1장 2-3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들을 가리킨다. “에서”는 에돔을, “야곱”은 유대인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신 것을 예증하기 위한 강압적인 방법일 뿐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빛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미워하시고 다른 이들은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2) 9장 18절-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심에는 이중의 과정이 있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셨고 바로는 이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 얼음을 녹이는 바로 그 동일한 태양이 진흙을 굳게 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구절을 읽고 바로가 그의 마음을 굳게 한 것과(출 8:15), 하나님이 또한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셨음을(9:12) 눈여겨보자.
3) 9장 28절-
마지막 적용은 환란의 “단축”에 관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고, 수가 감소될 것이며, 남은 자들은 참된 신자들 중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 로마서 10장 / 이스라엘의 거절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의 현재의 거절에 대해 다룬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왜 현재의 영적인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장이다.
1. 거절의 이유 (롬 10:1-13)
핵심 단어는 의(義)이다. 유대인들은 의를 원하였으나 그릇된 방법으로 얻고자하였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묘사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무지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적인 사람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보고서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두 종류의 의를 언급한다. 즉, 율법을 순종하여 얻는 행위 의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믿음 의이다. 유대인들은 믿음의 의에 순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교만은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믿음에서 맹목적인 종교로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율법에 매달렸으며, 율법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길을 준비한 것이라는 사실과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율법의 지배를 종식시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모세의 율법은 더 이상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로 인간을 다루신다. 율법의 의는 레위기 18장 5절에서 설명되어 있으며, 믿음의 의는 신명기 30장 12-14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 신명기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도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것임과, 그리스도가 죄인들 가까이 계셔서 구원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용된다. 6-8절은 바울이 신약의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구약의 구절들을 사용한 좋은 예이다.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율법이 그들에게서 멀다고 말하지 않도록, 특히 이스라엘이 나라들 가운데 흩어지게 될 때에 적용하여(신 32:1-55)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러 하늘에 가거나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입술과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곧 말씀(요 1:1)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다시 하늘에서 불러오거나 또는 지하 세계에서 끌어 올릴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에 있어서, 믿어 구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마음에 믿을 때에 오며, 마음에 믿은 것을 입으로 고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당대의 어떤 유대인들은 주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다(요 12:42-43).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공개적으로 그를 고백할 때에 그의 믿음이 증명되며 의의 선물을 받는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사야 28장 16절(롬 9:33 참조)을 인용한다. 본래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로 되어 있는데, 성령은 그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하실 것이라고 뜻을 부연하신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라는 말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3절에서 바울은 요엘 2장 32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유대인만이 아닌 것이다! “차별이 없다.”
2. 거절에 대한 치료책 (롬 10:14-17)
여기서 순서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전도자가 파송을 받고 주의 말씀을 전파하며, 죄인들이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죄인이 말씀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의 논점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7절).
15절에서 바울은 이사야 52장 7절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설립될 때 완전히 성취될 구절이다. 그들의 메시야가 통치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에 이스라엘이 누릴 기쁨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평화의 복음을 오늘날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는 것으로 적용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이다(엡 2:13-17).
우리는 선교사들을 이방 나라들에 보내는 근거로 로마서 10장 14-15절을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물론 잘하는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복음을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전파하는 것에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파하는 이유는 로마서 1장 16절 때문이 아니라(“첫째는 유대인에게”) 로마서 10장 14-15절 때문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부담감을 나누어진다면 복음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을 것이다. 이방인이건 또는 유대인이건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태도는 어떠한가? 이사야 53장 1절에서 말하듯 “누가 믿었는가?”의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날에(요 12:37-38), 그리고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동안에 불신앙으로 돌아섰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오늘날 불신앙 가운데 정착하게 되었다. 바울은 18절에서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자연을 통한 말씀조차) 온 세계에 미쳤으며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핑계할 수 없음을 밝힌다.
3. 거절의 결과 (롬 10:18-21)
이스라엘이 거절한 결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향하셨으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불러내시게 되었다(행 15장 참조). 그러나,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명기 42장 21절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시기가 나게 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사용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65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것이며, 이방인들은 그를 발견하고 그의 구원을 찾게 될 것임을 알리셨다.
구약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약속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수준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 구절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리고, 두 부류 출신의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 곳도 없다. 구약에서의 계획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흥왕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에 왕국을 건설함으로써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에 실패하였다.
그러면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자비가 이방인들에게 확장되었음을 지적한다(11:11). 하나님은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다고 판단하시며, 은혜로써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려는 방법이 갈보리의 일로 가능하게 되었다(11:32).
로마서 10장 21절은 오늘날도 해당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민족이 맹목과 불신앙 가운데 버림받았으나(고후 3:15-4:6/롬 11:25), 잃어버린 이방인들에게 그러하듯이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찾으신다.
오늘날 말씀을 듣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교회가 올리워 간 후 환란 기간이 시작되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교만과, 영적으로 눈멀었음을 비판하는 대신, 그들이 우리에게 성경과 구세주를 주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도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 실천적인 교훈
구원은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제시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며, 믿음을 주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말씀이다. 영화, 전도지, 노래 등 이들 모두는 각자의 위치(역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전파된 말씀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다. 행위의 의와 믿음의 의의 종교이다.
3. 로마서 11장 / 이스라엘의 영접
본 장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논하고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영속적으로 버려 두실 것인가, 또는 이 민족을 위한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장래가 있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1. 개인적인 증거 (롬 11:1)
“이스라엘 사람인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증거이다”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울의 회심(사도행전에 세 번나옴)은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오늘날 이방인이 개심하는 형식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죄인들이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거나,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거나 3일간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험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오실 때, 이스라엘이 회심하게 되는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그들은 믿지 않으며 반역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박해했던 분을 보게 될 것이며(슥 12:10/계 1:7),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보기 수천 년 전에 그가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보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2. 역사적인 증거 (롬 11:2-10)
바울은 열왕기상 19장 10-28절로 돌아가, 하나님은 불신앙이 극도에 달한 시대에도 충성된 남은 자들을 반드시 남겨 두셨음을 보여 준다. 사실상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축복하신 사람들은 남겨진 자들이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사 1:9 참조).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대다수가 언제나 믿음에 실패하고 개혁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취하여 다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5절은 하나님께는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들이 있는데, 이는 “몸된” 교회라고 진술한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몸 가운데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적인 특징들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일 이스라엘이 눈멀어 있을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계신다면 이스라엘이 다시금 무대에 등장할 때는 얼마나 더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우리는 이 교회 시대 동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처럼 민족적으로 다루지는 않으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인으로 구성된 교회”는 에베소서 2장 14-17절에 의하면 성경적인 것이 못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한 그룹을 하나님이 선택한 남은 자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8-10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눈먼 것은 이사야 29장 10절과 신명기 29장 4절에 예언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마 13:14-15/사 6:9-10 비교). 9-10절에서 그는 시편 69편 22절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말씀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들을 저주로 바꾸실 것을 약속하셨다.
3. 경륜적인 증거 (롬 11:11-24)
바울은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을 논하고 있으며, 죄인 개개인들이나 성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이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 뒤에 경륜적인 뜻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증거한다. 그 뜻이란 이른바 이방인의 구원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정죄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도 있으시다!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전에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만일 유대인의 타락이 세상에 이처럼 축복을 가져왔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에는 그 축복이 어떠할 것인가를 논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떻게 세상에 부활을 가져올 것인가(15절)! 다른 말로 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빛을 보게 될 미래가 있음을 확신한다.
오늘날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구약의 왕국 약속들은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방법”으로 성취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바울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영접을 받아 축복 가운데 들어갈 것임을 내다본 것이다.
감람나무의 비유는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민족적인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한 감람나무이다. 하나님은 가지들 중의 더러를 쳐서 이방인, 곧 “돌감람나무”를 접부치셨다. 이것은 “자연과는 반대로” 된 것이다(24절). 왜냐하면 좋은 가지를 보다 못한 줄기에 접부치는 것이 실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연약한 이방인들을 종교적인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줄기에 접부치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잘라 내시는 엄격하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방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감히 자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도 역시 잘라버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 민족들이 “세계 교회”에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할 이 시대의 종말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참된 교회를 부르시며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하신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제는 민족적이지 개인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원에서 “잘라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롬 8:35-39).
오늘날 교회는 주로 이방인이며, 우리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유익을 받고 있다(감람나무의 풍성한 수액).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민족적인 면으로 볼 때 우리는 이방인들이며, 함께 나눌 것은 아무것도 없다.
4. 구약의 증거 (롬 11:25-36)
물론 바울은 이 세 장에서 구약 성경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이사야 59장 20-21절, 27장 9절과 시편 14편 7절을 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회복하실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스라엘이 눈멀었던 “비밀”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감추어진 진리였으나 신약에서는 온전히 계시된 비밀이다. “이방인의 충만함”이란 이 교회 시대에 구원을 받게 될 이방인의 수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 때 주님은 교회를 공중으로 들어올리실 것이며, 그 후에 지상에는 7년 대환란 곧 “야곱의 역경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 시대의 종말에 구원자가 올 것이며, 남은 자는 자신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란 말은 마지막까지 남은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그날에 모두 구원을 받게 되어 구속받고 중생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27절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이 인용되어 있다(렘 31:31-34). 이 “새로운 언약”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믿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킬 때 이스라엘에게 적용될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여전히 사랑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들 때문이다. 인간들은 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변하실 수 없으며, 자신의 약속을 변경시키거나 취소하실 수 없다(29절).
마지막 단락에서(30-32절) 바울은 이방인들이 한 때는 하나님을 거절하였으나(롬 1:18-)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있듯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지만 어느 날 자비를 받을 것임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시에 불신앙과 죄 가운데 있다고 결론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둘 다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재고찰한 후에 이러한 놀라운 찬양의 노래를 하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는가?(33-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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