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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하나님의 의(義)

by 은총가득 2020. 4. 15.

 

하나님의 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뀔즈음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라는 문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변화가 발생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의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반면(목격적 속격),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구를 하나님의 의(주격적 속격)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의(저자나 기원의 속격) 등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 유대교 묵시주의에서 하나님의 의,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사해사본에서 하나님의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보다 정교해졌다( 조셉 플레브닉 저. 배용덕역. 기독교문서선교회,p84)

 

이신칭의

 

이신칭의는 대개 바울에게서 중심적인 주제로 선정되고 바울의 복음이나 혹은 바울의 복음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신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원적 죽음에 근거하여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의의 선물을 주시거나, 혹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하나의 법정적 행동이다. 이같은 선물과 순수한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에 대조를 이룬다. 의의 선물은 받은 은혜와 일치하는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칭의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 성령, 세례, 교회 등과 관련시킨다.

 

3. 용어

영어에는 올바른(just), 정의(justice), 칭의(justification), 의로운(righteous), (righteousness)등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이 바울의 언어안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떤학자들(지글러)의로운, 를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긴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용법이 아니다.

 

는 성경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개념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세속적인 개념에 의하면, 사람은 사실에 근거해서 의로운 것으로 선언된다. 즉 사람은 무죄한 것으로 혹은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람이 의인으로 만들어지는것은 아니다. ‘는 전가되거나, 얻어지거나, 회복되거나,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확립된 규범이나 인정된 정의의 이상과 일치할 때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간과 신들은 만일 자신들의 행위가 자신들 밖의 정의의 이상적 규범과 일치하면 의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적 언어에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행위 안에서만 의롭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로우신 분으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자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와 일치하면서 의롭게 행동하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일치하게 행동하셨다. 그러나 그 언약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결정이며 선물인 것이다.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과 관련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셨다.

구약성경에서 인간은 언약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의롭다고 말해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실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선언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는 인간을 죄인으로 관계한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의로운 자로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은 죄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믿음으로써 그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진다. 사람이 의롭다고 선언된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고 사람이 이로워진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

 

4. 바울의 교리

 

라는 말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외의 바울서신에서는 단지 가끔 나타날 뿐이다. 믿음과 은혜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강조는 이 두 서신에서만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 두 서신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회심자들에게 모세 율법과 할례를 억지로 받지 않게 하는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떠나가 있든 동안 다른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유대 그리스도인 유대주의자들로 생각한다- 모두가 모세 율법을 따를 것과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갈라디아서는 자신의 복음과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이렇게 도전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논쟁적인 응답이다.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유일한 유효성과 충족성을 도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바울의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은 그리스도보다는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진정성을 ㅂ면호하고, 어떤 다른 복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또한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그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였으며, 그들을 아브라함의 약속을 공유하는 자들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택하였음을 지적한다.

 

이신칭의에 대한 주요 논증은 갈라디아서 2:19:-21에 나오는데, 이 단락에서 바울은 그가 전파한 복음과 일치하는 자신의 삶을 제시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는 칭의가 여기서 별도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율법과 대립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삶은 믿음에 의한 삶으로서, 이는 율법에 의한 삶과 대립된다. 칭의는 율법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 갈라디아서 3-4장에서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그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3:2-4). 바울은 성경적인 논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 자신이 그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나중에 주어진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미성년자를 제지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옳은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율법은 중지되었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성숙한 아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 26-29).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 아닐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으므로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상속자인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놓였으며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를 자니라” (4:6-7).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후로 그들의 행위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육체의 소욕을 죽일 수 있다(5).

 

칭의라는 말은 갈라디아서에서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핵심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에서 발견하는 칭의의 모든 요소들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특징은 율법보다는 믿음에 대한 강조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신칭의가 갈라디아서에서 중심적인 논쟁점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슈바이처, 샌더스). 또 다른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독특한 강조를 단순히 논쟁적인 응답으로 보고 있으며, 그리하여 영구적인 신학적 의미가 없는 역사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브레데, 데이비스).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주요 논증은 로마서에 나온다. 바울이 이 주제를 반고립적인 것으로 다루는 곳이 로마서이다.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와는 달리 논쟁적인 서신은 아니다.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다루는 주요 본문들은 로마서 1:173:21-26(9:30-33; 10:1-13)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복음을 로마서 1:16-17에서 제시하는데, 이 부분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로마서 전체의 주제로 간주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학자들은 이 전체 단락이 주제인지(캐제만, 빌켄스), 아니면 주요 주제가 16절인지(Dahl) 혹은 17절인지, 다시 말해서 주제가 복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인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로마서의 핵심 용어들 중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 문맥에서 이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가 구원의 능력이며 또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도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복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계속되는 단락인 1:18-3:20에서,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암울한 배경과 이 때문에 온 인류가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학자들이 로마서 3:21-26을 바울이 이신칭의에 대해 진술한느 중심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1:17을 취하며 또한 세상에 죄 있는 상태를 고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나라” (3:21-26).

 

온 세상에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율법과 관계없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에게 그리고 미등ㅁ으로 말미암아 받는 선물에 있다. 계시된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천이시고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으며, 또한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미듬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선물로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칭의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또한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인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로마서 3:21-26 배후에 바울 이전의 전승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정도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율법이나 할례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된 갈라디아서 3장의 논증을 다시 반복한다. 로마서 5-8장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상징들과 은유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실존에 대한 묘사로 넘어간다. 이 단락과 로마서 1-4장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로마서 5장을 과도적인 장으로 간주한다(다알, 샌더스). 그러나 이 단락을 앞 단락이나(빌켄스) 혹은 그 다음 단락과 연관시키는 학자들도 있다(보른캄, 마륵센, 슐리어). 비록 칭의라는 말이 로마서 5-8장에서 희박해지고 있긴 하지만, 이 주제가 전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구원의 새로운 질서가 율법에 근거한 옛 질서를 폐지시켰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근본적인 논쟁점, 즉 죄의 권세 문제로 나아간다. 인간에 대한 죄의 지배력은 깨뜨려졌다. 이러한 죄의 지배력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영향력 안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루어져야 했던 것은 인간에 대한 죄의 지배력을 깨뜨리며 인간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적인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은혜의 능력 안에 놓이게 되었으며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다 (5:20; 7:5-25). 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율법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제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기 때문이다(8:1-17).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문제로 다룬다. 바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의를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락을 로마서의 중심 부분으로 보기도 하고(스텐달), 사실상 이 단락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고, 혹은 이 단락을 이신칭의 주제 아래 통합시키는 학자들도 있다.

 

마지막 단락인 로마서 12-16장에서, 이신칭의 주제는 14:17에서 지나가는 언급으로 말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나오지 않는다. 이신칭의를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 단락을 일상적인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로 해석한다(캐제만).

 

로마서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믿음에 대한 강조를 발견한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죄의 권세, 보편적 죄성, 율법의 역할 그리고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 등에 대해 보다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뿐만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명백한 단언으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역할이다. 율법은 갈라디아서에서처럼 단순히 몽학선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로마서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무능하며 죄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겼다.

 

어려움은 율법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의 자취를 따라 인간 속의 탐욕의 근원인 육신에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죄가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그리고 율법에 대해 죽으셨다.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며, 신자는 죄와 율법에 대한 죽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권세에 속한 자들이 되었으며, 성령을 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옛 자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심으로 선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과 후사들이 된 것이다.

 

5. 최근의 해석들

 

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가 토론의 중심 과제가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라는 의미는 폐기되었으며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하나님의의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구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에 점차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이와 관계있는 것은 칭의가 법정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칭의가 인간에게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수반하느냐하는 오래된 신앙 고백적인 문제이다. 슈바이처의 전례를 따라 이러한 토론은 바울신학 안에서의 위치와 이 문구가 윤리와 가지는 관계등과 관련하여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토론은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 안에 들어 있는 속격에 대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는 캐제만의 주장(1961)을 따라 상당한 정도까지 진행되고 있다. 캐제만은 문젖의 차이가 여러 견해들을 잠재적으로 덮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불트만 학파에 의해 주장된 것처럼 이신칭의에 대한 개인주의적 해석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집합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뮐러와 슈툴마허는 캐제만을 가깝게 추종하였다. 카톨릭 신학자인 케르텔게는 자신의 제안이 가망 있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으로 알았다. 우리는 캐제만이 지슬러의 에뮤메니칼적 연구에, 슐리어와 빌켄스의 로마서 주석에, 그리고 류만의 에큐메니칼적 대화에 강한 영향을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미 확리보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느 최근에 비판적인 연구로서- 특히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들의 견해와 그리고 캐제만의 해석에도 어느 정도로 - 우리는 여기서 스텐달, 다알, 샌더스 등의 공헌을 언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케제만)

 

제만은 바울의 전승에서와 유대교에서 발견한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진부한 문구로 생각했다. 그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설명보다는 신학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하나님의 의서 로마서 1:17절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았다. 이구절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해지고 있는데, 이는 복음안에서 성령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은혜와 관련되에 있을 지적한다. 이들은 피조물에 대한 심판과 은혜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또한 피조물에 대한 주로서 행동하시는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표현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타락한 세상을 그의 정당한 주장의 영역으로 복귀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말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선물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이해이다( 최근 바울신학의 동향p97)'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의 유효성을 나타낸다. 능력은 칭의 보다는 실제로 복음의 선포, 성령, 그리스도의 주되심등과 더 밀접하고도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칭의와 관련있는 것으로써 바울에게는 심판뿐아니라, 로마서 5:6-10; 8:31-32; 갈라디아서 2:20이 암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성령은 능력뿐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케토릭진영의 신학짜 케르텔게는 중심주제를 하나님의 의에 맞추고 케제만의 능력이라는 표현보다는 행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로마서 1:173:21-26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근거하는 인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도 인간의 속성도 아닌 상호연결되어 분리할수 없는 것으로 믿음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과 선포에 있어서 그리스도 사건의 계시이다. 칭의는 근본적으로 계시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만 하나의 실재가 되는 새로운 관계이다. 칭의는 죄인이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이며 또한 사실상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케르텔게는 이것이 종말론적이며 창조적이며 능력 있는 하나님의 행동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칭의가 사람을 사로잡으면, 율법과 죄로 특징지어지는 옛 세대는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오는 인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케르텔게에 의하면, 바울은 여기서 구약의 용법, 유대교의 용법, 심지어는 초기 교회의 용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가능하게 하거나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다.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함이다. 사해사본에서 우리는 바울의 개념과 유사한 많은 것들을 발견하는데, 이는 그 외 유대교 묵시문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문헌에서도 의는 전적으로 율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로마서 3:24-26a에 나오는 바울 이전 전승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초기 교회 관점에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하여 언약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전에 지은 죄가 속죄되고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죄 용서를 넘어서서 재창조(recreation)를 강조한다.

 

케르텔게는 이신칭의가 복음을 적용한 것이기에 이 교리가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신칭의는 시간조건부(time-conditioned)이며 논쟁적인 응답일 뿐만 아니라 이 교리가 믿음에 있어서 순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영구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케르텔게는 세례와 연관시키는 전통적인 카톨릭 견해에 반대하면서 그는 바울 자신이 바울 이전 전승과는 대조적으로 칭의를 곧바로 세례와 연관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이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통상적인 프로테스탄트적 설명은 그 선언이 실제적이라고 이해할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실제적이다. 의롭다고 선언되는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그 사람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 놓여지는 것이다. 케르텔게는 해당 문구에 대한 칠십인경의 어법에 근거하여 의 법정적인 의미를 변호한다. 그러나 가 바울에 대해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법정적인 이미지의 기능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창조적인 집행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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