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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Ⅱ. 의(義)사상의 배경

by 은총가득 2020. 4. 15.

 

. ()사상의 배경

 

1. 구약에 나타난 의()의 개념

 

1) 관계의 개념으로서의 의()  

a. 의 미

구약에서의 의는 윤리적, 법적, 종교적 혹은 영적 규범에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절한 활동도 이웃에 대한 공정한 봉사도 아니다.

오히려 의는 구약에서 관계(그것이 인간과의 관계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이든)의 요구를 성취하는 서이다. 각 사람은 많은 관계 속에 있다. 그리고 이 각각의 관계들은 특정한 요구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 의다. 그 요구들은 관계마다 다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의가 되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 혹은 인간이 관계에 의해 자신에게 부과된 조건을 성취할 때 구약의 용어로 의로운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의는 항상 인간과 인간 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동관계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의의 개념을 개인의 윤리적인 규범이나 그의 그러한 행위에 국한시켜서는 그 내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의는 이념적인 윤리규범에서 측정되기 보다는 바로 확증되어야 할 그때 그때 마다의 공도오간계에서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b.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의() 

()개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이스라엘의 공동관계에서 사용되는데, 이 관계에서는 하나님께 사용이 왼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적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기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 즉 여호와께서 자기가 선택한 민족과 맺은 계약을 이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성취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이때 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파악되어진다. 예를 들면,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은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말하고 있다. 특히 구원의 의에 대한 찬양은 이사야 후반부에 잘 나타나며, 여기에서 의와 구원은 동의어적으로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c.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의 의() 

인간 상호관계에서 사용된 의란 그 동동관계가 제기하는 요구에 대한 충족을 표시한다. 즉 한 인간이 속한 공동관계가 그에게 제시하는 특별한 요청들을 옳게 이행하는 자는 옳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에서 요청되는 요구들이 있었다. 창녀 행세를 한 다말은 이러한 요구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유다보다도 더욱 의로웠다(38:26). 또한 다윗은 그와 구약관계에 있는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은 사울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었다(삼상 24:6; 26:9). 즉 다윗은 사울과의 공동관계에 대한 신실성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요구하는 신실성을 충족시켰으므로 의롭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살해한 자들을 정죄했기(삼하 4:11) 때문에 그는 의로왔지만, 사울의 집이 몰락한 후에 므비보셋은 새 왕으로부터 호의를 기대할 권리는 없었다(삼하 19:28).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의의 요구는 관계와 함께 변했다. 그것은 일정한 절대적 요구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의로운 사람이란 공동생활의 요구를 성취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2) 법정적 개념으로서의 의()

 

의라는 용어를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재판하다혹은 재판이라는 말과 관련되어 사용되며(25:1; 왕상 8:32; 9:4 ), 동사는 거의 법정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난다(33:32; 43:9). 여기서 의는 법정적인 개념을 가지는데, 이렇게 볼 때, 의로운 자란 판사가 죄에서 자유하다고 선언한 자 즉 옳다고 판결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또한 여기서도 공동체의 관계적 요구는 결정적이다. 법적인 의미에서 의로운 것은 공동체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며, 재판장의 중요한 기능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사라들에게 그것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의에 대한 법정적인 개념은 구약에서 빈번히 사용되지만 유일한 용례는 아니다. 특별히 이 개념은 신약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중요한 배경이 된다.

 

3) 계약 개념으로서의 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 속에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요구들을 성취해야만 했으며, 이 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역시 관계란 요소다.

계약 관계 내에서 하나님의 지위는 주(Lord)로서의 지위였다. 여호와는 계약의 주, 계약의 창시자, 계약의 수호자, 계약의 보존자였다. 그분만이 계약을 유지하시며, 그분만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척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입었을 지언정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율법주의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의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었다.


계약 관계는 모든 율법과 모든 요구에 선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 밖에서 율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율법의 배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있었으므로, 이것을 믿음으로 우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밖에 있는 사람이므로 그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믿음의 관계가 의에 있어서 더욱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서의 성실성은 바로 믿음이었고, 따라서 믿음은 의로 여겨졌다(15:6; 2:4).

 

2. 유대교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

 

이 시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공적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대주의에 있어서 의는 주로 율법(Torah)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랍비들은 사람들에게는 선을 향한 충동과 악을 향한 충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둘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사람이 의롭다고 여겨지기 위해서는 선한 충동을 개발해야 하고 악한 충동은 억제해야만 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그가 얼마나 이것을 성공했느냐 하는데 달려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정확히 공적과 죄과 중에 어느 것이 더욱 드러나는 가에 달려 있으며, 그러한 판결은 마지막 심판 때에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적을 쌓는데도 두 가지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는데, 즉 율법에 대한 부지런한 연구와 자선 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선행에 대한 강조를 낳았다.


이로 인해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확신이 현저히 결여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비도 공적의 강조에 가리워 약되는 경향을 띄었다. 이러한 관념에서 유대인들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4:5) 바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자를 의롭다고 하는 재판장은 또한 불의한 재판장으로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유대주의는 분명히 행위에 의한 구원을 믿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문제들을 야기시켰다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3. 쿰란공동체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

 

쿰란 두루마리에 나타난 의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과 의의 연관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의가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구절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생의 일시성을 깨달았으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의에 호소를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나 쿰란에 있어서 의는 은혜로만(Sola Gratia) 이루어진다는 것이 긍정되어 왔다. 반면에 쿰란에서는 자비를 의와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바울은 그것을 혼용하지 않았다.

 

4. 헬라문헌에 나타난 의()의 개념

 

플라톤의 사상에서는 δίκαίοσύνη가 국가의 구성과 인간 영혼의 구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서의 경우에는 이것이 인간의 미덕들 중에서 으뜸의 위치에 있다.

따라서 의로운 자(δίκαίος)란 원래 그 행위가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신들과 이웃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이행하는 자를 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 이행은 그를 불의한 자들과 구별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교만과 야만적 행동은 의로운 사람의 특성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δίκαίος ζωη; 의로운 생활'이라는 용어는 문명화된 생활 방식, 즉 미개적인 상태와는 달리, 질서 사회의 규범들을 준수하는 생활방식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δίκαίος는 존재적, 사회적 질서에 순응함과 아울러 법에 대하여 의롭다는 뜻이었다. 이 단어는 "(법적 윤리적으로)올바른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중성명사로 널리 사용되었다.


명사 δίκαίοσύνη는 후기 어형이다. 한편으로 이 단어는 의로운 사람의 특질을 가리키지만, 또 한편으로는 본질적으로 재판관이 지지해야 하는 표준이 되었으며 재판관은 줄곧 이를 회복시키는 데 자기의 목표를 두어야했다. 따라서 이것은 '공평한 정의'라는 뜻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법률처럼'이라고 묘사하였다. 이것은 신중함, 절제 그리고 용기와 더불어 당시에 네 가지 기본 덕목 중의 하나였다.

 

5. 복음서에 나타난 의()의 개념

 

예수님은 거짓된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18:9 이하). 또한 그는 자신의 부족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세리들에 비하여 실제로는 의롭게 되지 못했으면서도 자만해 있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의는 고백과 회개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경배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셨고, 누구도 자연적 성품 그대로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제자들에게 까지 악한 자”(7:11)란 말씀을 하심으로서 암시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했다(16:15). 그들을 다루신 주님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의한 의를 가르치신 것이 명백하다.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려 하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5:20).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더욱 나은 의를 얻을 수가 있을까 이것은 공적에 근거한 그들의 의의 개념과는 달리 전적으로 다른 의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15:11 이하) 나타나는 아버지의 관대한 용서나 포도원의 일군의 비유(20:1-16)에서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늦게 온 일군에게도 같은 대가를 지불하는 고용주의 태도는 바로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다.


비록 믿음에 의한 의의 개념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의를 요구한 광범위한 요구는 바울의 가르침에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가 있으며, 바울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설득력 있게 부연했다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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