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 및 신앙 서적

그리스도의 영광-존 오웬

by 은총가득 2020. 3. 23.

 

 

 

 

그리스도의 영광-존 오웬

 

서론

신자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깨달음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의 생각, 육의 생각]과 [죄 죽이기]와 함께 존 오웬의 3대 걸작중 하나이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일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찬송의 제일되는 대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리고 부지런히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참으로 위험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고도 참된 우리의 유일한 안내자를 버리고, 기록된 것보다 더 지혜로워지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 나머지, 성경의 계시를 떠나 공상과 상상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부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참된 지식이 없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뜻을 어둡게 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고, 알맹이가 없거나 그들 속에서 전혀 믿음의 신령한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함부로 발설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관점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 되는 그리스도와 그 영광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연약하고 희미할지라도, 그것마저도 다른 모든 이해나 지식보다 말할 수 없이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 오웬 생애 마지막 저작이자 최고의 역작 ' 그리스도의 영광 '

이 책은 존 오웬의 수많은 저작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집필된 작품으로, 그의 학문적 경지의 최완숙기에 집필된 투혼의 불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신은 물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락이 바로 ‘이 땅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살다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보며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는 임종 직전에 평생토록 열정을 쏟아 부은 신학 연구의 대결론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참으로 우리를 창조하고 선택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참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사 구원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와, 성도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그 영광을 보고 누리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날마다 묵상하고 누리라(윤종훈교수)

오웬은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사실을 목도하면서 안타까워한다. 첫 번째로, 오웬은 수많은 성직자들을 위시하여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목사는 물론 교회의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과 부활의 권능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막 14:36)라고 부르는 특권을 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은 뒷전으로 하고 자신의 삶에 도취하여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오웬은 개탄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 ‘자기 의’에 도취된 채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회심하지 못한 죄인들을 안타까워한다. 바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향하여, 오웬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정으로 발견하고 모두 함께 이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오웬은 이 한 구절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불신자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묵상이 가져다주는 엄청나고도 가공할 만한 영적 능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는 성도가 누리게 될 최고의 복은 그 영광을 직접 보는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무능력한 영성이 회복되며, 그토록 즐기던 죄악된 삶이 쓰디쓴 독초의 맛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웬은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할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성도는 예루살렘의 딸들로서, 아가서에 제시된 ‘순결한 신부’로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Ⅰ 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묵상하는 최상의 책무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참된 안식이나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뽐낼 수 있다. 인류의 모든 행복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을 등지고 패역함으로 지옥에까지 낮아져 비참하게 된 우리의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보다 높아진다.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은 인격 안에서 우리의 본성이 처음 만들어질 때, 우리의 본성은 존귀와 영예로 관 씌여졌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바 더 낮은 세계를 지배하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본성을 탁월함과 아름다움과 영광의 보좌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벌거벗겨지고, 진흙구덩이에 내동댕이쳐졌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인간 본성의 모든 내적인 기능들 속에 더러운 정욕이 침입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 전체가 하나님을 닮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끝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인간의 본성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고, 모든 피조물들의 원수인 사탄은 저급해진 인간의 본성 속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보다 비열하고 야비해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인간 본성의 수치요 부끄러움이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태였을 때, 즉 타락하여 야비해지고 가난하며 저주받은 상태로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자신의 인격 속에서 조금도 흠이 없고 거룩한 본질을 가지심으로써 극도의 비참에 떨어진 인성이 다시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그 인성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셨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0-21).

그리하여 우리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큰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그것들 가운데서 뽐낼 수 있고, 그것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믿음과 은혜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참여하게 된 그 신적 성품의 존재와 목적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극한 비참함에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허락받은 그 영광스러운 높아짐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각들은 그들의 영혼에 새로운 힘을 주는 은혜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 본성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2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확보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친구가 서로 사랑하듯이 우리와 하나님은 서로 닮아 있고 서로 만족해하는 그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 관계의 연합의 끈은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반역함으로써 너무나 빨리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본성 전체가 도덕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비참의 깊이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로 다시금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키겠노라는 뜻을 세우셨다. 우리의 본성이 다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는 분리되지 않도록 그 일을 해내셨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인성을 자기 자신과 본질적으로 연합시키심으로써 그 뜻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충만이 육신을 입고 실제적이고도 영원한 방식으로 아들의 인격 안에 거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그 자비가 우리 각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의 장자가 되셨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로서 이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3 사람이 만나기 쉬운 모든 대적들,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극복할 수 있다.
-이 영광에 대해서는 이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4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훨씬 위에 있는, 그리고 빛이 충만한 그 복된 곳에 우리가 거할 수 있다는 보증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루살이의 공격에도 부셔져 버릴 만한’ 흙집에 살고 있다. 또한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의 한 치 높이도 떠서 살수가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의 밝은 별들은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 거하기에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워 보인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사실을 이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천체들이 거하는 우주 공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영광스러운 곳에서 영원한 삶을 영위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곳에 거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우리 본성에서 조금이라도 존재하는가?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보증물을 주셨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채로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훨씬 더 높이 오르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 거하는 영원한 처소는 바로 빛과 영광으로 충만한 복된 곳이다. 그리고 그가 계신 곳에 우리도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Ⅱ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그 특별한 유익은, 바로 우리를 삶에서든 죽음 앞에서든 기쁨과 안위 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그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만나게 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능히 기쁨과 승리감 속에서 극복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이란 무엇인가? 시험과 환난, 격변과 슬픔, 위험과 두려움, 질병을 만나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모든 고통들이 일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어떤 힘과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모두 불확실하며 만족스럽지 못하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뿐이다. 모든 것들이 죄로 오염되어 쓴맛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 고통과 슬픔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여러 가지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는 때에는 이러한 것들이 더욱 고조된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5-26). 많은 곳에서,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이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과 또한 그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하셨음이라”(대하 15:5-6)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악인들의 경건하지 못한 행동에 임하는 고통은 인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애처롭게도 양심의 증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여러 부류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분열과 적대감이 만연하다. 인간 삶의 중압감과 허무함과 비참함이 지각 있는 모든 모든 사람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교도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악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 모든 악에 짓눌려 연약해지지 않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후 4:8-9)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도 영원한 것들을 본다면, 모든 고통이 경감되고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고 우리 영혼이 낙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을 합당하게 포괄하고 있는 주제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그 영광이 그것들을 주도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그 영광을 묵상하는 사람은 악한 일들을 만나 괴롭힘을 당할지라도, 그 모든 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할지라도 능히 이겨 낼 것이다. ‘그 생각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곤고함에 직면하면서도 끝내 날아가 버릴 돈을 모르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정말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그런 비참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낫게 할 유일한 향기름이다. 아무리 우리를 압박하고 구차하게 하며 당황하게 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이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 영광에 동참하고 있음을 바르게 숙고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위로와 도움이 베풀어 질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가 그런 하찮은 것들 때문에 고통당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지 못한 일인지 알게 된다

그런 고통과 마음 아픔은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지나치게 귀중하게 여기는 데서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실한 분별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하기까지는 오직 두려움과 슬픔과 혼란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곧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끝내 모두 사라져 없어질 것들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반면 우리가 확실하게 분깃으로 받은바 저 하늘에 속한 것들은 지상에 속한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값지고도 우월하다. 바로 이런 가치관을 지닐 수 있는 확실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영광에 대한우리의 관계를 진실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고, 우리의 정서가 그 영광을 즐거워하는 데로 기울어져 있다면, 고통과 질병과 슬픔, 두려움과 위험, 사망쯤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충만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마음이 회복되고 평정을 찾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은 본시 고통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기 쉽고, 여러 가지 애착과 정욕으로 인해 평정을 잃어 버리기 쉽다. 시편 기자는 곤고할 때 자기 속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묵상하면 그 마음이 회복되고 평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안정되고도 고요한 심사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믿음은 요동하는 정욕의 바람과 파도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라고 명령할 것이며, 격정의 바람과 파도가 순종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생이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궁극적인 안식을 찾아 기댈 곳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롬 5:2-5)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뿐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 편에서 사용해야 할 방식들과 방편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 방식과 방편을 통해서, 바로 그 방편이 취해질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각을 베풀어 주셔서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하실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실하게 숙고할 때 기쁨과 위안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사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숙고하는 의무를 감당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유익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실하게 숙고할 때 기쁨과 위안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일관된 기쁨과 승리감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러한 것들이 모자라서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죽음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떻게 주장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그 시련에 대해서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일을 주권적인 방식으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행하라고 요구하신 것들이 있다.

1) 육체를 떠나게 되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 곧 우리의 영혼을 능히 받아주고 지켜 주고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을 안식과 복락의 상태에 두실 수 있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믿음의 특별한 행위’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영혼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영원한 상태로 들어간다. 이 땅에서 외적인 감각을 통해 보고 듣고 누렸던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그렇게 영원히 떠날 때는 잠시도 영혼과 함께 머물 수 없다. 영혼은 믿음으로 받은 것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 영원한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우리에게로 돌아온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혼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도록 그것을 숨기고 계신 것 같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믿음으로만 받도록 하셨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몸을 떠난 후에 영혼이 제멋대로 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영혼은 이제 더 큰 다른 존재의 주장에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사람만이 내세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상태가 안식과 복락을 가진 상태임을 알고 처신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도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대한 표본이시다. 그는 몸을 떠나는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눅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시편 기자도 동일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였다.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시 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몸을 떠나 있는 자신의 영혼이 결코 악한 것을 만나지 않고 복되게 부활할 자신의 몸과 다시 합하게 되어 영원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임을 온전히 확신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속주로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즉시 받으신다. 스데반도 그랬다(행 7:55). 그리스도의 영광과 인격, 능력과 높아지심, 그리고 그의 직무와 은혜를 매일 묵상하는 것, 이보다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도록 더 강하게 격려하는 또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이제 몸을 떠나는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과 돌보심에 부탁하기를 무서워하며 주저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죽어가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받으시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2) 동일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또다른 의무는,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체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하고 바람직한 모든 것들과 언제라도 기꺼이 결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전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인간의 영혼과 짐승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무신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를 생각할 때에만 무신론에서 해방될 수 있다. 사람은 짐승과는 달리 불멸하는 영혼, 하늘에 속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지혜자는 말한다. 그런데 몸과 영혼이 특이하고도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기에 그 둘이 나누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고정관념이 전체 인성 속에 도사리고 있다. 몸과 영혼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므로 이런 성향을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평안하고도 기쁘게 죽을 수가 없다. 신자들은 믿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 성향을 극복하여 몸과 영혼이 나누어지는 것을 소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 안에서 안식하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싶을 때가 되면 너를 부를 것이고, 너는 흙속에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을 행사하셔서 하나님 손으로 정결하게 지으셨던 너의 처음 상태의 그 찬란한 영광을 되찾게 할 것이고, 말할 수 없는 영광과 특권과 영광을 네게 주셔서 너를 영화롭고도 부요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게 만드는 모든 생각들을 떨쳐 버려라. 흙으로 돌아가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려면, 우리가 지금 연속적인 묵상의 주제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그 모든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그분이, 우리가 언젠가는 겪게 될 ‘몸과 영의 분리’를 실제로 겪으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하실 때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

때가 되면 자신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거의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연장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예컨대 가족들이나 친척들, 세상의 재물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런 모든 소원의 바탕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이 깔려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버리지 않는 한, 이생에 대한 애착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죽음의 때와 기한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부단히 맡기지 않는 사람 중에는 위안 가운데서 기쁨으로 죽을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주권저긴 손안에 있으며,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결심과 이생에 대한 애착이 포기 없이는 이 세상에서 최소한의 견고한 평화도 누릴 수 없다.

4) 죽음의 방식과 방편에 대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죽음의 시기와 시간뿐만 아니라 죽음이 다가오는 방법과 방식도 우리에게 특별한 시련이 된다. 이 시련에 대해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죽음의 노예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는 우리의 힘을 소진시키고 곤비하게 하는 것과, 태워 죽이는 열기와 강한 고통, 칼고 불고 고문과 외부적인 수치와 채찍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 필요한 은혜들을 마땅한 도리들을 항상 기꺼운 자세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기뻐하시는 뜻에 부단히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무서워하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능히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신령한 능력과 인내심도 함께 주실 것이다.



현재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런 자세를 절대 가질 수 없다. 아무리 그런 척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만일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그 영광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장차 나타날 것에 대해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자유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직 그 영광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쉽고도 즐겁게 여기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심지어 죽음 자체까지도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권고하는 것 말고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지런히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크고도 영광스러운 다른 유익들이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 강론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영광스럽고도 위대한 유익들의 원천과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약함과 곤비함,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건강 상태 때문에 그런 일을 위해 더 진력할 수가 없음을 덧붙여 말하는 바이다.

 

 

4장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겸비함과 그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신 것은 참으로 자신을 무한히 낮추신 것이다. 신자들은 바로 그 일 가운데 그리스도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위대함’을 살펴보고, 둘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본질’에 대해서 선언하고, 셋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볼 수 있는 관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Ⅰ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위대함

하나님의 신성이 지니는 말할 수 없이 우월한 탁월성에 대해 시편 기자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6)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탁월하심으로 높은 곳에서 위의 하늘에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을 내려다보시며 주목하시고 이 땅에 있는 가장 큰 것들을 바라보시기 위헤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야 한다. 비록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보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무한히 낮추셔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는 본질과 존재와 본체와 관련된 무한한 차이가 있다

(사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에게는 그분이 관심을 두고 바라보실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본질에 비해서 무한하게 탁월하신 하나님은 본질의 무한한 위대하심 때문에 그 피조물의 대해 관계하실 때에 자신을 낮추시고 낮아지셔야만한다. 이사야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사 57:15, 개정)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너무 높고 고상하시며, 자신의 영원한 존재 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러하기에 그분이 땅 아래 있는 존재들을 내려다보시기만 해도 그것은 은혜의 행동이 된다. 특히 세상이 다 멸시하는 자들을 바라보실 때는 정말 특별한 방식으로 그 은혜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서 행동하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시는데 스스로 무한히 충분하신 분이기에, 그분이 자신을 낮추신 것은 위대한 일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을 만족시키거나 복되게 하기 위한 일에 조금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본성 속에서 무한한 완전하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함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 이웃을 유익하게 하듯이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는 없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 35:6-7).
그처럼 스스로 영원히 복될 만큼 충분하셔서 그 어떤 것도 그분에게 더하거나 뺄 것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가 어떤 피조물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면, 그것은 마땅히 자신을 낮추시는 행동이요, 자신의 존재와 그 보좌의 특권에서 내려오시는 행동이다.



Ⅱ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본질

그리스도의 영광의 이러한 측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성질과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인하거나 오해하는 모든 시대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 잘못을 불식하고 난 다음에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셨다는 것은 그가 가진 신성을 벗어 버렸거나 신성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셨다는 것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으로 존재하시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신성의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인격과 동등되심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함께 신성에 참여한 바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권위와 존엄과 능력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분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셔야만 한다. 물론 신적 격위들 간에 순서가 있다. 그러나 신적 존재에는 차별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요 5:17-18).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신성을 지니신 채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한다(빌 2:7).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것을 멈추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본체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여전히 지속되면서, 다만 ‘인성 속에서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바꾸신 것이 아니며, 자기 존재의 본질을 버리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분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이신 분은 결코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

소시니안(Socinin) '소시니안‘이란 16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신학자인 레리우스 소시너스(Laellus Socinus)의 추종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적적으로 태어나 이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사람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속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도 부인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감화를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사람으로서 자신을 위해서 하나의 ‘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낮아지심 가우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의 기초이며, 먼 하늘에 속한 진리와 신비와 생명이요 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때가 되매 인자가 되었고, 인자가 되었음에도 이전의 자기 존재를 그래도 유지하셨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옛 아리우스파(Arians)가 상상했던 것처럼 신성이 인성으로 바뀐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아리우스파 아리우스(Arius, 250년 또는 256년 - 336년)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활동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지만 성부와 유사한 본질(유사본질), 곧 신성을 가진 존재로써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지만 '참 하나님'은 오직 성부이시며,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인간도 하나님(참 하나님)도 아닌 인간과 하나님(성부)의 중간 존재라고 하였으며(천사라는 것도 아님)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였고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초기 기독교 분파로 발전하였다. 당시 그의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폭넓게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주재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만물을 지으시고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의 발현이었던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때가 차매 육체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우리 구주께서 행하신 이적으로 말미암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 같이 그 ‘말씀’의 본질이 그렇게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선성이 인성으로 바뀌는 본체론적인 변화를 상상하였다. 이것은 마치 교황주의자들이 화체설(化體設)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하나님의 본체가 사람의 본질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이가봇(삼상 4:21), 즉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는 아무런 영광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식의 낮아지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파괴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와 아무 관계없는 인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신성은 조금도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 유두개(Eutyches) 유두개는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장로로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후에 취하신 인성이 신적 성질로 변화되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인간의 몸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이 함께 혼합되어 하나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하나의 본성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본질적으로 전과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게 되었지만, 그분의 신성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분의 신성에는 ‘어둠이나 회전하는 그림자“(약 1:17)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안에 여전히 동일하게 존재하였다. 그 신성의 본질적 속성들과 작용들과 복됨이 영원 전과 똑같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격 속에서, 인성으로 삶과 죽음 속에서 많은 것을 행하고 겪으셨다. 그때 신성은 아무것도 담당하지 않으셨다. 물론 삶과 죽음에서 많은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성경에 나오기는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라고 표현기도 한다.


4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그 인성으로 신성의 영광을 가리셨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자신의 선성에 대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

사도는 그분이 ‘자기를 비워....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한다(빌 2:6-7).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인성으로 가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신성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나타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세상은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보기는커녕 선한 사람으로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나타내는 표증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격분하여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요 8:59)하였다. 사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보는 인성과는 다른 본성으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한 인격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일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연 속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예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시니안들은 오늘날까지 그것을 중요한 구실로 삼아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노선을 따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영광으로 인해 그 모든 문제가 해소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적 격위이시고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실 하나님이셨지만,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되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까지 낮추사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신적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하며,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보지 못하므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부인한다. 그리스도를 사람 이상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진 하나님의 영광과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 등을 배척한다. 모든 피조계를 통틀어서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에 대하여 그리스도보다 더 많이 관련되신 분이 없는데 말이다. 모든 복음의 진리가 바로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데도 그들은 모든 복음 진리의 뿌리를 캐내어 잘라 버린다.

이런 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대하여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롬 9:33)이심에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한 분의 선지자로서만 고백하고,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믿 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비난이나 반대가 가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정도로만 인정하려고 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소시니안들의 죄악된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눈멂과 불신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신비를 믿지도 않고, 앞으로도 믿지 않을 것이며, 믿을 수도 없다. 또한 그들은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떼어내 버리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도 그것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기독교의 신비와 영광과 진리와 효력이 모두 상실되어 아무 의미도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면 그 자리에 정교하고도 세련되어 보이는 이방종교가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이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는 그 반석을 이길 수 없다(마 16:18).

5 그리스도께서 환영(幻影)이나 허깨비의 방식으로 낮아지신 것이다

사도들이 죽은 뒤에 교회를 더럽힌 첫 번째 이단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곧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가 행하고 당한 모든 일들은 정말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고 당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에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단은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인 육체적인 몸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몸으로 나타나 보였을 뿐이라고 가르치기에 ‘가현주의(Docetism)’라고 불린다. 이 이단이 흔히 ‘기독교 최초의 이단’이라고 칭해진다.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어떤 철학자들의 개념에서 이단이 생성되었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실제성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적 낮아지심의 참된 본질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격위, 또는 아들의 격위 안에 있는 신성이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신적 능력과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인성을 자신의 개인적인 실체를 취하셨다’. 신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의 요소이듯이, 인성을 자신의 인격의 요소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기초이다. 이런 신적 신비에 대해서 아주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믿음의 확실한 기초가 된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자신의 인격의 요소로 취하셨다고 믿을 수 있고, 또한 믿고 있다.

사람이 맨 처음 지음 받았을 때에는 인성이 아담 안에서만 존재하였다. 그때 아담은 지금 각 사람이 그 인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존재하는 것과 똑같이 개별적인 사람이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그 인성을 자신의 인격 속에 고유한 요소로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그 인성이 그의 것이 되고, 그분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예수가 되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행하고 당하신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발견되셨으며, 그분의 신적 격위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이 또한 낮아지심에 속한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실 때 그 인성을 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으셨다는 점을 관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 인성의 본질적 속성과 활동을 그대로 보존하셨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 고통을 당하였으며, 시련과 시험을 받았고, 버림당했다. 다른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인성과 동일하게 말이다. 그 인성은 모든 사람이 가진 인성이 당하는 세상의 모든 악에 노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도가 묘사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측량할 수 없는 낮아지심을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다.



Ⅲ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관점



우리가 사람들과 천사들이 방언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 낮아지심의 영광을 합당하게 표현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신적 지혜의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이며, 성자의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광이요, 모든 복음 진리의 살아 있는 혼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과 천사들의 이해나 추론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지혜의 신비를 믿음과 감탄의 유일한 대상이 되게 한다.

바로 이 신비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되, 모든 피조물보다 무한히 더 위대하심이 드러난다. 바로 이 신비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방식과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욥 11:7-9, 개정) 『[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롬 11:33-36, 개정)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가련하고 수준 낮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말한다. 그저 성경에 계시된 대로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의 본질을 직접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 마음이 떨리고 우리의 생각이 움츠러들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거룩한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의 확실한 열매들과 효력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에 관한 위대한 약속, “그가 곧 성소가 되시리라”(사 8:14)라는 약속이 교회에 주어졌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2장 8절에서 해석되는 대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벧전 2:8, 개정)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소가 되시며 확실한 피난처가 되신다. 곤고한 사람이 성소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부족한 모든 것이 채워지고, 모든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으며,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모든 위험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다. 죄롤 말미암아 곤고해하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영적인 질고와 고통 속에서 있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히 6:18, 개정)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시험으로 말미암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어떤 영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침체되어 있는가? 이러한 어느 한 가지 경우에 해당되어 빛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채로 어둠 안에서 행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소생할 것이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에게로 피하려 할 때에는 그 사람의 뜻과 능력 이외에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뜻과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처럼 자신을 비워 낮아지신 분,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충족하시는 자신의 영광의 특권을 사양하시고는 우리를 위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그분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곤고함 속에서 우리를 구출해 내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영원히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곤고한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시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성소가 되시지 않겠는가?

그분의 능력을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무한이 낮아져 고난받는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전능한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상실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와 영광스러운 은혜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서 하셨던 모든 일을 여전히 하실 수 있다. 한없이 낮아지셨음에도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곤고한 죄인들을 위한 성소가 되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믿음의 빛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낮아지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곤고한 자에게 안식을 준다. 이것이야말로 새 힘을 북돋아 주는 요소이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언하거나 입증하고 있다기보다, 믿음의 길에서 그 영광을 실질적으로 묵상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너무나 게으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제 믿음의 순례 길을 다 끝마쳐 가고 있다. 그런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악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복음의 중요한 비밀들을 공공연하게 멸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그 생명의 원리와는 관계없이 고백한다. 그들은 참되고도 핵심이 되는 사실을 약화시킨 채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것이 겉으로 쾌활하고 용기 있어 보이면 되는 것인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지런히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다면 믿음의 중요한 행사들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지 못할 것이며, 중요한 순종의 의무들을 기꺼이 감당하지도 못할 것이다.’

믿음의 행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저 격위에 관해 아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관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속에 나타난 영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신적 격위에 관한 진리를 바르게 지킬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개념을 체험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바로 서는지 넘어지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한 복음적인 동기를 제공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자기 부인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땅한 방식으로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

 

 존 오웬 5장-6장 그리스도의 영광 묵상

 

5장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영광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첫 번째 묵상-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시게 된 유일하고도 강권적인 사랑이다.

(요 3:16, 개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계 1:5, 개정)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왜냐하면 영광의 가장 큰 광채는 신적 사랑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는 무서움이나 공포 같은 것이 전혀 뒤따르지 않는다. 따뜻하고 무한한 새로운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Ⅰ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

1 아버지의 사랑은 교회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에 대한 영원한 요인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사랑이 ‘창세전’(엡 1:4)부터 아버지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작용해왔고, 그 후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그 경륜을 효력 있게 하시는 일 속에서도 작용하였다(요 3:16).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비밀로 말미암아 인류 가운데 영원 전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누리도록 인도받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살후 2:13, 개정)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벧전 1:2, 개정)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의 이 영원하신 뜻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상태와 조건을 실제로 인정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로지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만족해하실 상태와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개선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이 왜 하나님의 사랑이고 불리는가?

1)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럽고도 탁월한 성품인 사랑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9). 그러므로 신적 속성들 가운데서 가정 먼저 겉으로 드러난 것도 분명 죄인들에게 전달된 사랑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의지의 영원한 작용인 이 선택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2)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나 공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값없이 선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선한 것이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그를 유익하려는 의도로 주어진다면 오직 사랑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 속에 선이 있다고 할 때, 그 선조차도 그분의 택하심의 열매이다.

3) 하나님의 택하심이 우리를 영원토록 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그 택하심의 원천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열매나 효과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의 행위들이다. 그 택하심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은 확장된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는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렘 31: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2 사랑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교회를 파생시킨 영원한 샘이다

이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의 모든 계획을 실행하고 완성시킨 것은 바로 아들의 사랑이다.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죄로 인해 이런 상태에서 떨어져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이것이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에서의 모든 비참함의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은 신적 긍휼의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비참함을 보신 그리스도의 눈 아래 있었기에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류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시는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셨다. 그 또한 사랑의 행위이다.

(잠 8:30-31, 개정)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딛 3:5, 개정)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되는 기꺼움과 기쁨을 가지고 계실 때에 우리를 회복하시는 방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그 방식은 큰 난제와 복잡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어렵거나 무거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성품을 가지셔야 했다. 즉,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이 짓눌려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이 가진 기쁨을 계속 견지하면서 우리가 당한 고통을 맛보심으로써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의 일을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격위의 영원한 사랑 속에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신 후에, 그 일을 위해 한 몸이 예비되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은혜로 충만해지셨으며, 특히 인류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인성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이 모든 열매를 맺도록 만드는 합당한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이다(히 2:14,17).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성 속에서만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그분이 인성을 입기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일을 인성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로 인하여 그분은 영광스러우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영광을 본다. 하늘에 있는 성도의 복락과 하늘에서 성도가 차지하는 승리의 영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이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에 감사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계 5:9-10, 개정)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하늘에서는 이 영광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채로 빛난다. 하늘에서 영광을 소유하게 된 성도들의 영혼은 그 영광의 광채를 봄으로써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 광채와 만족을 우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이 땅에서의 지각을 초월한다. 하늘에서 비로소 그 사랑의 여러 국면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땅에서라도 우리가 게으르거나 육적인 상태에 빠져 있지 않다면, 그 사랑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을 가질 수 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그 사랑에 대해 감겨하게 되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보기 위한 지침

1 하늘에 속한 것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항상 준비하라

만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육신적이고도 감각적인 상태에 빠져 있거나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광에 대한 바른 지각이 마음속에 머물 수 없다. 또한 합법적이긴 하지만 인생의 여러 경우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분주하다면, 그것은 인생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합당하게 교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활동과 그 교통하는 것이 그들의 내적인 영혼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땅에 속한 것을 구석구석 살피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묵상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먼저 신령한 원리들을 힘입어 마음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또 하늘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마음의 기쁨을 얻도록 힘써야 한다. 신적 영광의 많은 탁월성을 부단하게 생각하고, 아울러 하늘에 속한 것들의 샘 근원 속에 영혼이 잠겨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의 중요한 국면을 특별하게 묵상하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기만당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으로 그 어떤 영광도 느끼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반적인 관념으로만 생각하고 끝내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적 격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보편적인 관념만 가지고 있을 뿐, 그에 대한 특별한 개념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 사랑의 중요한 국면에 대해서 특별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

1) 먼저, 그것이 누구의 사랑인지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격위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 사랑이 누구의 사랑인지를 항상 생각할 수 있도록, 성경은 그 사랑이 표현될 때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2) 하나님의 아들의 이 놀라운 사랑이 어떤 방편과 방식을 통해서 드러났는지를 생각하라.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그에 합당한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의 영원한 행위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 긍휼하심의 모든 열매들이 맺힌다.

3) 그 사랑은 자원하는 사랑이다

(요일 4:10, 개정)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6장 중보의 직무를 이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두 번째 묵상-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의 직무를 맡으시는 데 영광스러우셨으며, 그 직무를 직접 감당하시는 데에도 영광스러우셨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이 서려 있었고, 그분이 당한 모든 일 가운데 그 영광이 배어 있었다. 세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홀로 심판하실 이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영광이 나타나 보였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분에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사 53;2)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점에 대해 몇 가지를 관찰해 보려고 한다. 먼저 순종하시기 위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맡으신 직무를 감당하면서 그분이 당한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1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일들은 자원하는 심정으로 택한 일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셨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개정).

신적 격위 속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주인이었다. 그분은 율법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었다. 율법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도 없었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실 필요도 없었다. 또한 그 후에도 무죄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율법 자체와 그 모든 세력보다 모든 면에서 위에 계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순종의 본질적인 영광이다.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신 그분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겸비하심이 모든 행동 속에 배어 있고, 그 순종이 모든 의무 가운데 스며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시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한에게로 나가시자 요한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는 세례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분에게 세례를 베푸는 마땅한 도리를 사양한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개정).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에 순종하신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은혜의 증거가 된다.

2 이 순종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순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원하심이 아니었다면 순종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지만 그 일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존귀를 하락하시되, 한편으로 모든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사셨다(롬 5:19).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허락하시되, 그분의 순종을 교회의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시고는 교회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방식을 취하신 것이다.

3 절대적으로 보편적이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의 위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손이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셨을 때 영광이 나타났다. 또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것이 신령하게 새겨졌을 때는 더욱더 탁월하게 보였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의 거룩과 순종 안에서만 그 율법이 완전하게 실증될 수 있다. 율법 안에 하나님의 거룩이 들어 있었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일은 그분의 영광에서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었다.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이 바로 그 순종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인성적인 차원에서 볼 때 참으로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거룩이 온전히 표현된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난관과 대적을 물리치고 순종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성 속에 침입하여 들어온 그 엄청난 손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 속에 들어온 그 성품의 손상은 내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일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밖에서 침입하여 들어오는 모든 대적과 온갖 시험과 고난과 거스름에 대해 우리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대처하셨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영광스러운 말씀이 나온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5 이 순종이 누구의 순종인지를 생각할 때 그 영광이 참으로 놀랍게 드러난다

이 순종이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이셨다. 그분은 한 인격 속에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셨다. 하늘에 계시며 모든 만유보다 높으신 만유의 주임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사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에서 가장 엄격한 순종의 길을 걸으셨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 하나님께 밤낮 기도를 드리셨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의무를 부단히 행하셨다. 하나님의 집을 맡은 주인이신 그분이 그 집에서 가장 작은 직무를 충성되게 감당하셨다(히 3:6).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모든 사람을 지으신 분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공의의 원칙을 지키셨다. 그가 합당히 행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행하신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는데도 가장 엄격한 사랑의 원칙을 지키셨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시면서 드린 그 순종을 신비롭고도 영광스럽게 만든 요인이다.


1)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직무 때문에 당한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떠오른다. 그리스도의 직무와 승리와 성공과 그분의 개선자적인 승리에는 큰 영광이 함께한다(사 63:1-3).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분에게는 고난이 요구되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6, 개정).

그러나 우리의 부족한 지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런 고난을 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 이 고난은 우리의 지성을 금방 물러가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묵상으로는 금방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바다 속에 들어가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의 중압감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에게 항상 경고하셨던 그 모든 악을 스스로 담당하셨다. 우리는, 죽을 정도로 슬퍼하시면서 고뇌에 차고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시는 그분의 모습과 통곡하면서 간구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무시무시한 시련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일들을 아시고는 놀라시는 그분의 모습도 볼수 있다. 그분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속죄제로 드리셨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개정).

우리가 그런 일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주셨다(롬 8:3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불행을 당하셨다. 그것도 우리처럼 불쌍하고 가련하며 타락한 죄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본성이 당해야 할 그 불행을 스스로 당하셨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신자들의 눈에 얼마나 놀랍게 드러나는가! 주님께서는 죄를 깨닫고 두려워하는 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초청하실 때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나타난다(갈 3:1). 그분의 영광을 이루고 있는 것 안에서, 또한 자신이 담당한 직무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 안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해지고 멸시와 핍박과 질책을 받으며 욕설을 들은 후에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성경에 기록되고 읽히고 설교되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바로 그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이 일들 가운데서 어떤 영광을 볼 수 있는가?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 바로 그 일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주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도록 지명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통해서 도움과 구원을 얻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살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가?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18-25저에서 그것이 어리석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선언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고 영화로우며 보배로우시다(벧전 2:6-7). 왜냐하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가 되시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가 그처럼 나우어져 있는 이유를 상세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3-6).

7장 중보의 직무를 완성하신 후 높아진 그리스도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예고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이라는 두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개정).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 미리 증언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담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축약해 주셨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6).

또한 사도도 서신서에 같은 내용을 자주 되풀이한다(롬 14:9; 빌 2:5-9).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아는 만큼만 성경을 이해한다. 이 일의 순서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보다 고난이 먼저였다. 그러나 사탄과 세상의 순서는 그와 정반대이다. 먼저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오고, 그다음에 영원한 비참이 온다. 이것이 사탄의 방식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은 교회의 구원의 두 샘 근원이다. 교회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황금 기름을 힘입어서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진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리스도께 고난당하신 뒤에 누리게 된 높아지신 영광을 살펴보자.

1. 그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자기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사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실 때의 바로 그 영광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우리가 앞에서 강조한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에 베일이 드리워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영광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다. 그 영광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조차도 희미하게만 볼 뿐 밝게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가려져 있던 베일이 벗겨져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중보 사역의 모든 영광이 찬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가 직접 그 영광을 보게 될 때에는 계신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뵈올 것인데,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께 허락하신 영광,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사실상 아버지께서 입혀 주신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2. 그 높아지심의 영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격 속에 가지고 있는 신적 영광은 그 높아지심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그 높아지심에 속한다. 그 영광은 값없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낮아지신 후에 천사들과 교회에 영광이 선포되었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그 영광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시기까지’ 그 영광의 직접적인 증거와 선포를 미루어 두신 것일 뿐이다.
이 땅에서 가련하게 사람으로서 질고와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죽어 가는 그분을 본 사람들이, 무한하고 스스로 계신 그 본연의 신성의 영광을 지니신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 그 신성의 영광이 그의 인격 속에서 드러날 때, 그 영혼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찬탄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이 잠든 곳에 함께 계시며 그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3.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었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말하는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고난당하고 죽고 다시 사신 그분의 영혼과 몸이 영화롭게 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된다. 그것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실 영광의 실증이다. 그러나 지금은 좀 더 나아가서 문제를 그것에 관하여는 두 가지 요점만 살펴보겠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취하신 인성이 영광스럽게 높아졌다. 교회와 모든 복음적 신앙의 위대한 기초는 그가 육신이 되셨고 자녀들처럼 혈과 육에 참여하게 되셨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제한된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신적 은혜와 완전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인성이 신격화 되는 것이 아니다.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늘에서 신성과 서로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모든 신적인 완전함의 충만함 속에서 높여지게 된다. 모든 천사들과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말할 수 없이 더 가까이 있다. 그리고 영광스런 빛과 사랑과 능력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들을 가지되, 천사들과 사람들보다 더 크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인성은 여전히 하나의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니는 영광의 실제에 신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를 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분량과 정도의 면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모든 것보다 높은 영광이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4 그리스도께서 낮아지고 죽은 후에 높아지셔서 받으신 영광을 다음과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그 영광에는 신적 인격(격위) 안에 존재하는 인성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아지셨음이 함축되어 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지혜로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광을 빛나게 하시고자 지정하신 모든 것들과 함께 능력과 존귀와 권위와 통치 속에서 그 인성을 높이셨다.

2> 그 영광 속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무한히 사랑하고 기뻐하시되, 그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위임받은 직무를 감당하신 것을 영원토록 인정하신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골 3:1), 또는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담당하신 직무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영광스럽게 높아지셨음이 모든 피조물에게 반포되었다.

3> 여기에 더하여 교회를 위한 중보와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적 지혜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영광은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절대적이고도 독특하며 고유한 영광이다. 천사든지 사람이든지 어느 누구도 그 영광에는 조금도 참여하지 못한다. 이 땅에서 우리는 그 영광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하늘 위에서는 그 영광이 밝게 빛나 바라보는 이들의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다.

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광을 제자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에 대한 시각을 가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나는 분명 ‘상상으로’라고 말하지 않고 ‘믿음으로’라고 말하고 있다.

허망하고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 영광의 참된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그림이나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무척 애를 쓴다. 금과 보석으로 만든 장식과 그림 솜씨로 나타날 수 있는 찬연함과 아름다움으로 장식하여 그림과 형상을 나타내려고 애를 쓴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타나냄으로 미신적인 사람들의 상상과 정서에 경건과 우아한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수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영광도 모른다.

5> 이 영광은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묵상의 유일한 기초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실제 소유하고 있는 영광은, 이 세상에서 신적 계시에 확고하게 의존하는 믿음의 빛 가운데서만 이해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격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쳐다보는 것으로는 그 영광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계시하고 묘사한 것을 의존하는 믿음을 부단하게 행사하는 것이, 그 영광에 대한 모든 거룩한 묵상의 근거와 원리와 척도이다. 우리가 부단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한다면, 그분이 하신 말씀을 의뢰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 기쁨이 바로 거룩한 묵상의 의무에 대한 효과적인 동기가 된다.

찬미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님이시여!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영광에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러하시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영광스럽게 높아지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이 우리 마음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약속대로 그 영광을 더욱 충분히,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 보기를 갈망하나이다.


 8장 구약에 예표된 그리스도의 영광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라는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본다. 그러므로 모세와 선지자들, 그리고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증언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이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생명과 빛의 방향이다. 그것이 없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어느 것도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마음에 수건을 두른 것과 같았다. 사도가 선언한 바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서 수건을 벗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한 그 믿음뿐이다.

(고후 3:14-16, 개정)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이 제시되는 방식과 방편들에 대하여 간단하게 생각해보 보고자 한다.

1 율법에 기록된 예배와 그 예배의 모든 방편들을 정한 규례 속에 그 영광이 예표된다

율법의 제도는 하나님을 외적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찬란한 여러 의식들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무를 드러내어 그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나님의 지혜로 구상하고 만드신 제도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성막과 성전은 무엇인가? 성소와 그 곳에 있는 도구들은 무엇인가? 그곳에 있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과 법궤, 그리고 그룹들과 속죄소 등은 무엇인가? 대제사장과 그 예복들과 행동 방식을 규정하는 여러 규례들은 무엇인가?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린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그림자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통해서 예표된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그 성막의 여러 섬기는 예법을 규정하기 위해서 행한 모든 일들은, 후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일들을 예표하기 위해 미리 증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사역의 본질이었다.

(히3: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2. 그리스도가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자기 교회와 교통할 것을 신비적으로 그린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표현된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 이 점이 시사되어 있으며, 특히 구약에는 이것을 선언할 목적으로 계획된 책이 있다. 바로 솔로몬의 ‘아가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가서를 전혀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가볍게 여긴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외적으로 정해 놓은 여러 가지 제도들과 함께, 은혜와 믿음과 사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내적으로 교통하는 것을 기록한 아가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어떤 관점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는지 그 실상을 알려 주고 있다.

기쁨과 감격의 거룩한 긴장감, 기쁨의 환희, 엄숙하고도 거룩한 만족, 불타는 듯한 사모하는 심정,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기 위한 방편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일, 믿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발견, 이런 것들이 아가서의 말씀 속에 강조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모하고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거룩하게 찬탄하면서도 그런 것들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느 날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받을 만한 가치기 없는 사람으로 판단받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의 지도자 몇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장차의 일을 나타내고 알리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자신의 성육신을 넌지시 예시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 당시에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으로 계셨지만, 자신이 어떤 분이 되실 것인지를 전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그 당시에 인성을 창조하셔서 그것을 자신에게 연합시킨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나타나셨다.

또한 그분은 구약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와 함께 거하셨던 신격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가운데 끊임없이 인간의 정서를 취하심으로써 언젠가는 인성을 입고 그 가운데 직접 행하시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타락이후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자신에 관한 모든 기록과 함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여러 규례에 관한 모든 기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방식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4. 예언적인 환상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다

사도는 이사야가 본 환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사야가 그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신격을 지니고 영광의 보좌 위에 높이 계신 것을 뜻한다. 이는 사람이 만든 장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참된 장막이다.

이사야는 그 환상을 보고 두렵고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 영광스러운 분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었으며,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으로 그 불의가 깨끗해졌다(사 6:6).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정결하게 하는 효력을 모형적으로 나타낸다. 이는 신자들의 영혼을 위한 양식이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하게 영광스럽게 나타나셨다. 시편 기자가 그 영광에 대해서 묘사한 것을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적용한다.

(시 68:17-18, 개정) 『[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불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정말 무서움으로 가득 찬 일이었지만, 시편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측면에서 긍휼이 가득 찬 일로 언급하고 있다. 그 율법을 주신 일은 거룩함과 무서운 저주가 함께 했기 때문에 그 일에 참여했던 자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 율법을 완성하는 일은 생명이었다. 그 율법에서 나오는 용서와 의로 말미암아 생명이 된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써 우리가 탐구하는 그 모든 영광의 주인공이 되셨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가 계시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가장 분명하게 계시된 곳은 복음서이다. 복음서는 실제로 이루어진 후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미 구약 속에 그 일이 많이 계시되어 있다.
(사 9:6-7, 개정)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한 가지 증거만으로도 유대인이나 소시니안이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패쇠시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장차 육신을 입으실 것과 통치하실 것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했지만, 그 선포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많은 어둠이 남아 있었음을 인정한다. 비록 그들이 계시의 진리에 익숙해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도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예언이 복음서에서 설명되고 선포되어 그 신비한 의미가 눈에 보이게끔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 예언의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지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정죄 받을 눈멂이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들과 예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표증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께서 오심, 그리스도의 직무와 나라, 그 모든 것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모두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선이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분간해 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수건이 덮여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선포되고 표증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하고 살펴보라는 의도가 없다면, 아무리 구약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읽거나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런 시각을 가지지 않으면, 오늘날까지도 그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봉함된 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7. 구약에서는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

우리가 즉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알게 하는 데에는 그런 방식으로 넌지시 표현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들어 영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이런 가르침에는 신격의 무한한 겸비함이 나타난다.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탁월함이 우리의 감각에 와 닿을 수 있도록 피조물들의 이름을 들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예들 들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와 순종의 향기를 장미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아름다움과 호감을 백합화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한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값진 진주로 나타내기도 한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에 나타난 바 자신에 관한 것들을 열어 보여 주신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에 내포되어 있는 것들을 묵상하도록 우리의 영혼을 격려하고자 그런 것들을 언급하신 것이다.

 


9장 교회와의 연합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이 장의 제목과 관련하여 직접 유추할 수 없는 세 가지 문제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첫 번째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행하고 당한 모든 일들이 다 우리의 것을 간주되고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의의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당하고도 공평한 일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한 그 모든 고난의 열매와 유익에 우리가 참여하되, 마치 우리가 직접 그 일을 한 것같이 그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이 연합은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과 의지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일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로 할 수 없이 영화로우시다.

사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라고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딘지 이치에 맞지 않게 보인다. 의인이 불의한 자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이 공정하고도 공평한 처사인가? 거기 어디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가?

1 교회의 구원을 위해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직무의 정당성

그러면 이 일의 공평성과 그 정당한 근거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모든 태한 백성들, 곧 하나님의 교회 전체는 아담 안에서 율법을 어긴 일로 인해 저주 아래 떨어졌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죽는 것과 영원히 죽는 것이 다 저주에 포함되어 있고,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죄가 심판받지 않은 채 그냥 간과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과 거룩과 진리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뜻을 정하셨다면, 반드시 그들이 당할 그 형벌을 다른 데로 옮겨야만 했다. 그들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 형벌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이기에 그들의 죄가 형벌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 형벌을 감내할 수 있는 존재에게로 옮겨져야만 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 형벌이 옮겨지는 식의 전제는 기독교의 근본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계시의 기초이다. 가장 처음에 주어진 약속 안에서 그 점이 먼저 시사되었고, 그 후에 구약의 모든 제도들을 통해서 그것이 설명되고 확증되었다. 율법의 제사제도들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과 용도는 형벌 받을 자에게서 그 형벌을 벗겨 대신 희생될 이에게로 옮기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것이 왜 공평하고도 공정한지,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드러난 말로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1)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은 신적 공의의 성질에 위배되지 않고 사람의 본성의 빛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행하실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고 엄명하셨다. 물론 그들도 죄인이기에 그들의 아버지의 죄를 대를 이어 짓는다. 그러나 가장 악한 죄인이라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그들이 자기의 아버지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면,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합법적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애 5:7).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잡히게 하신 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으며, 특히 므낫세 때에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벌하신 것이다(왕하 23:26-27).

가나안은 그 아버지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 9:25). 사울의 일곱 아들들은 피에 굶주린 그 아버지의 잔악성 때문에 죽음에 처해졌다. 또한 다윗의 죄 때문에 칠만 면의 백성이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그 일에 관하여,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삼하 24:17)라고 슬퍼했다. 노아의 홍수 때 죽임을 당한 모든 어린아이들이나 영아들의 경우가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 불탈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심판받는 것은 신적 공의의 성질에 위배되지 않고, 사람의 이성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2) 이런 공의가 문란하게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시행하려면 언제나 특별한 이유와 원인이 있어야 한다. 죄를 짓는 자와 그 죄 때문에 심판받는 자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먼저, 형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려면 특별한 관계가 요구된다.

앞에서 말한 경우가 그러듯이 부모와 자녀 관계이거나 다윗의 경우처럼 왕이나 신하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죄를 짓는 자나 고통을 당하는 자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한몸 안에서는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당연히 다른 지체들도 고통을 당할 수가 있다.

또는 서로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 때문에 형벌을 받는 자들은 그들과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형벌을 받는 것이 죄지은 자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이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그들이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심판의 일부가 자녀들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들의 대한 징벌의 가시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그 어떤 경우보다 더욱 긴밀하고도 친근하여 훨씬 더 높은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당하고 공평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독특성과 고유성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와 세 가지 방면에서 관계를 맺고 계신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독특하고 고유한 방식을 채택한다.

(1)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첫 번째 관계는 육친적인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에서 낙 하셨다(행 17:26). 그러므로 모든 인류 사이에는 동족 관계, 또는 동맹 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형제이며 이웃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워야 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개정).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

(히 2:14-15, 개정)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래서 성경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말한다.

우리와 육신적으로 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하시기 위하여 무한히 겸손하게 낮아지신 그분의 모습을 앞에서 이미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인성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하고도 탁월하다.

첫째,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한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의지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는 필연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나 선택의 행위로 그런 관계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다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의지적 행동으로 혈육에 참여하셨다. 즉, 우리와 이런 관계를 맺기고 자원하신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자녀들과 같은 본성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셨다. 주님께서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이 관계에 들어오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런 관계에 들어오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당해야 할 일을 당하기 위해서이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5).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교회와 관계를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보다 더 위대하게 만든다.

(2)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는 신비로운 관계가 존재한다

이 점은 사람들이나 다른 어떤 일들과의 관계 중에서 가장 엄격하고 사실적이며 도덕적인 연합이나 관계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몸의 머리와 지체 간에 존재하는 관계나, 포도나무와 그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는 진정하고 도덕적이며 진실한 관계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존재함을 풍성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요 남편이 되신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거룩함을 입고 구원받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고난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한 일의 효력이 교회에 전가되는 것 역시 옳다.

(3)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한 새 언약의 보증자가 되신다

구별되는 두 인격들 사이에 연대적 연합이 있다 그 연합을 이루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목적에 따라 연대적인 연합 역시 다양해진다. 거기에 보증인이나 후원자가 되어 그 일에 책임지고 담당하게 된다면, 그 연대적인 연합은 매우 뛰어난 연합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교회를 위해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는니라”(히 7:22).

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교회를 향하여 요구되는 것들을 그들을 위해 대신 당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하고 교회가 거룩해지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죄인들의 죄책과 형벌이 그들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옮겨지는 신비에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그 교회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는 이는 모든 방면에서 무죄하고 순결하며 스스로 의로워야 한다. 그분은 성경의 모든 계시의 생명이요 혼이요 중심이시다. 이런 점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지극히 영광스럽고도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 어떤 마음도 이와 관련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상하거나 표현해 낼 수 없다.


2 그리스도의 직무의 열매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겸비함과 사랑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겸손과 사랑의 몇 가지 열매들 속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큰 영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높아진다는 면에서 그 영광이 빛난다.

통치와 다스림에서 드러난 공의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더 합당한 개념은 없다. 그 죄를 마땅하게 징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 행위에는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첫 번째 행동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영원히 심판하시는 데서 행사되었다. 또 아담을 낙원에서 추방하신 일 가운데도 드러났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의 한 표징이다

온 교회, 하나님의 선택받은 모든 백성들은 죄인이다. 그들은 아담 안에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아담 안에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가? 택하신 백성들을 모두 벌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죄지은 천사들이나 첫 사람 아담을 아끼지 않은 그 공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절차와 경우가 조화를 이루거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확립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일이 서로 모순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영원토록 넘어지고 멸망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재사역,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형벌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이 놀라운 일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사함이 복된 조화를 이룬다.

(롬 3:24-25, 개정)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양심은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걸려 넘어져 영원한 파멸로 자신을 던져 버린다.

그런데 그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제거되고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율법의 공의가 행사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은혜와 긍휼이 그 영향력을 최고로 행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영혼들을 만족하게 하는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의를 선언하고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긍휼을 행사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히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영혼의 안식과 위안을 주기 위해서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 영혼이 주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로 하여금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 하시옵고, 그 영광의 아름다움과 충만한 속에서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지금 이 세상에 살 때에도 그 영광으로 감격하게 하옵소서.”

2)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고 성취하시는 그 순종 속에서 영광이 드러난다.

그런 순종은 순종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과 의의 차원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연합을 힘입어 그 율법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시고 그것의 영원한 상급을 덧붙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참으로 드러나게 된다.

(롬 8:3-4)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음으로 그 영광을 바라보는 자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것이고 모든 반론에 대처해 나갈 것이며, 가난하고 시험받고 의심하는 영혼들의 모든 낙담을 극복하여 이기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들이 휘장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닻과 같다. 그것이 모든 시련과 폭풍과 삶과 죽음 가운데 있는 온갖 시험을 이겨 내고, 견고하도고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붙들어 줄 것이다.
 
10장 교회에 자신을 전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우리가 이 땅에 믿음으로 바라보고 내세에서 직접 보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또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중보적인 모든 유익들을 신자들의 영혼에 전달하셔서 현재의 행복과 장래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것이 된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과 영광과 위안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 6:3, 개정)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개정)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개정)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것이 신자들의 것으로 인정된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러한 관계를 가지려면, 그만한 근거와 공식적인 이유와 원인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그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교통과, 그로 인하여 둘 사이에 존재하게 된 연합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임을 확증하였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개정)

나는 이 신비로운 교통의 원인과 방식과 방편들에 대하여 매우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신비로운 교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중보의 모든 유익들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었다. 먼저 일반적인 신적교통과 그의 영광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옛 창조와 새 창조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와 상응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면서 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Ⅰ 옛 창조와 새창조 사이의 조화와 상응성

1 옛창조에 나타난 신적 교통과 영광

모든 존재와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는 본래 본질적으로, 하나님안에 있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의 완전한 요소들과 함께 그분의 핵심적인 영광의 내용이 된다.

옛 창조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한한 지혜로 자신의 존재와 그 선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 받은 만물에 자신을 전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 밖에 있는 어떤 존재에 자신을 처음으로 전달하신 것이다. 그런 옛 창조는 지극히 영화로웠다. 옛 창조는 마치 부품들이 서로 복종하고 의존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기묘한 기계와 같았다.
그러한 상호의존과 복종이 없이는 피조물들이 자기 존재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예컨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모두 땅에서 살고 땅의 소산을 먹는다. 그리고 그 땅은 자기의 소산을 위하여 해와 하늘에 있는 다른 것들을 의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하신 바와 같다.

(호 2:21-22, 개정)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이렇게 서로 의존하고 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체계였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들은 존재와 능력과 선하심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자신의 존재와 선하심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만물에 계속 전달하심으로써 이 질서를 지속시키시는 일에 있어서 그분은 그러한 것들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와 다름없이 영화로우시다.

이러한 이성은 하나님의 영광은 눈에 보이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인류의 이성에 분명하게 보여 알게 되어 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인 영원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교통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성품의 본질적인 속성들 속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격위(인격)들 속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다. 맨 처음 모든 피조물이 완전하게 지음 받았을 때에도 그 피조물이 성부의 인격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능력과 선하심으로 존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성부 하나님은 성삼위의 근원이시다. 그래서 성부를 가리켜 ‘만물의 창조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의 일을 직접 행하신 분은 성부의 능력과 지혜가 되시는 성자이시다.

(요 1:1-3, 개정)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 1:16, 개정)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 1:2, 개정)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피조물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피조물들이 그 종류대로 만들어지도록 보전하고 간직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돌보심에 속한 일이다. 창조된 이후 그 피조물 전체를 유지시키는 일에도 만물 속에 작용하시는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다. 성령으로부터 능력이 계속 나오는 일이 없다면, 피조물들끼리 서로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한순간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만들고 보전하는 일에 이런 신적 교통을 베푸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자연 속에서 이런 교통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런 교통이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영화로우시다 한들 하나님 자신 말고는 그 영광을 알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顯現)은 모두 이런 신적 교통(전달)에 달려 있다.

그런데 새로운 창조 속에서는, 밖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신적 교통이 훨씬 더 탁월하다. 이제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2 새창조에 나타난 신적 교통과 영광

1)성부와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교통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이것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것들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새로운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의 거룩한 속성들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시는 신적 지혜의 첫 번째 발현이다.

(골 1:17-19, 개정)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새로운 창조와 그 새롭게 창조하신 것들을 보전하기 위한 모든 선하심과 은혜와 빛과 능력과 자비의 보고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러한 것들이 전달되었다.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쌓여 있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신비로운 몸(교회)전체로 전달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그런 식으로 은혜와 영광을 받도록 택하고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한 택정하심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교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부와 그리스도 사이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무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충만함이 본래부터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거하고 있다.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에 연합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모든 충만이 육체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한량없이 충만하게 성령을 받으신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이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는 신적 은혜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며’ 충만하다.

둘째, 그리스도의 직무는 바로 자신의 인격에 전달된 풍성한 은혜를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정한 방식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직무 전체의 목적이다. 직무의 모든 부분이 다 그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으로서 가진 직무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인격 안에 쌓아 놓으신 은혜를 교회에 전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정하신 방식인 직무의 초월적인 영광이다.

2)선택의 경륜

옛 창조에서 하나님은 먼저 피조물의 전체 덩어리, 또는 재료를 준비하고 창조하셨다. 후에, 그 덩어리, 또는 재료가 성령이 능력으로 말미암아 각각의 모든 존재로 나뉘어 모양이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의 일을 행하시고 완성하기 위하여, 영원 전에 자신의 의지로 세우신 거룩한 목적대로 인류 중에서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의 내용이다. 그들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독특한 재료들이요, 그들만이 교회를 구성하는 영광스러운 성원이다. 시편 기자가 우리 몸에 대하여 말한 바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에도 해당된다.

(시 139:15-16, 개정)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눈은 교회를 구성하게 될 요소를 보시되, 선택의 경륜 속에 제시된 대로 보셨을 것이다. 아직 그 경륜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이 신비로운 몸의 각 지체들로 모양 지어지거나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다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세대가 오고 가는 모든 과정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정해진 모양을 띠게 된다.

3)신적 교통의 영광스러운 질서

여기에 복되신 성삼위일체의 영광스러운 진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진리를 대적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진리를 태만히 여기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자기가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진리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로운 것이요, 믿음과 소망의 샘 근원이다. 그 신적 교통들의 영광스러운 질서를 보면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는 세 격위(인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가 가진,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꾸준히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적 교통의 질서를 따라서 모든 세대의 택한 백성들이, 새로운 창조의 구성 재료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양이 지어지고 영적인 생명과 빛과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나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새롭게 피조된 것들 전체가 날마다 보전함을 받는다.

매순간 신적 교통의 질서 속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전달되는 생명력과 자비와 힘과 긍휼이 있다. 샘 근원이요 머리 되신 분으로부터 지체들 모두에게 오는 끊임없는 감화가 있다. 그러하기에 그 지체들은 모두 우리 속에서 자기의 선하신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 안에 있데 되며, 그로 인하여 활동하게 된다.

사도는 교회 질서의 전체 구성요소가 하나의 외적인 도구로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이러한 신적교통을 촉발시켜 주기에 합당하다고 선언한다.

(엡 4:13-15, 개정)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것이 보편적인 신적 교통의 질서이다. 이 질서는 하늘에서 계속되는 그 본질을 위해서 존재하며, 영원토록 진행되어 간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시고 만물 위에 계신 모든 것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육신의 눈으로는 아니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 영광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엡 1:16-23, 개정)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옛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시는 계시는 새로운 창조에서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나타내신 계시에 비하면 매우 열등한 것이다.

Ⅱ 교회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달하시는 방식(방편)

이제 신적교통의 영광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전제하여 놓았으니,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자신의 중보 사역의 모든 유익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하시는 근거와 방식에 대하여 살펴보자.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개정).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고 그것이 자비롭게 우리에게 허락되어야 그분이 우리에게 전달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의 일부는 성부의 신적 행동들을 통해서, 또 다른 일부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은 성부의 의지적이고도 주권적인 행동, 곧 성부의 기뻐하심과 은혜이다. 이것은 은혜의 방식과 모든 신적인 작용들의 질서와 방법이다. 그러한 것들은 본래 모두 성부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고 나면 다시 성부에게로 돌아오고, 거기서 중심을 찾는다.

(엡 1:4-6, 개정)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우리와 교통하시는 일은, 본래 성부의 값없는 은혜의 행동과 허락과 재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전 1:30, 개정)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성부께서는 택함 받은 모든 백성들을 그리스도에게 허락하사 그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하고 그에 수반되는 수고를 하셨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주어진 약속과 정해진 복음의 법칙과 규율에 따라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을 보증 받게 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익과 모든 것을 확실히 함께 누리게 되었다.

(요일 1:1-4, 개정)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지혜와 사랑과 겸손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행동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성령을 전달하여 주신다.

성령께서는 고유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아버지의 허락으로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게 거하게 되셨다. 성령께서는 고유한 격위로 거하시면서 자신의 작용과 능력의 효력들을 무한하게 나타내신다. 바로 그 성령을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심으로써 그들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 사이에 깨질 수 없는 분명한 연합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써 인성을 자신의 인격으로 받아들이신 것같이,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으로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도록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적 생명의 샘 근원과 원리, 교회가 하나님 과 하늘에 속한 일들을 향하여 영적이고 생명력있게 활동하는 원리를 통하여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바’ 된다. 그 원리가 교회의 영광과 존귀함과 영예와 안전이 되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찬미가 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 곧 자신이 성품을 형성시킴으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하신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는 그 성품의 모든 영광스러운 요소들이 절대로 안전하다. 그러나 교회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성품을 전달하시는 분량의 정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일로 인하여 우리는 참으로 복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자신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의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엡 5:27)’ 방도를 마련하셨다.

교회의 순결과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내적인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형상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심으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교통시켜 주시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자신을 그 일에 연관시킴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

사실 그 일을 주님께서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며, 주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다. 교회에 자신을 전달하시는 데는 두 가지 일이 수반된다. 하나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의 법과 제도로 말미암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에 전달하여 주시는 이 신비로운 일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의 사례들을 몇 가지만 제시하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 심령이 충분히 그 영광을 볼 수 있으며, 거룩한 감탄과 감사로 넘치리라 확신한다.
​ 
11장 만물을 자신 안에서 통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자신 안에서 재구성하신다는 점에서 탁월하고도 영화로우시다. 죄로 인하여 흩어져 버리고 무질서해진 만물을 재구성하시는 것이다. 사도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적인 뜻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열매라고 말한다.

(엡 1:8-10, 개정)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살펴보려면 성령께서 어떤 의도를 계신지를 살펴보아야한다. 그 일을 위해 먼저 본래 하늘이나 땅에 있는 만물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간략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타락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자신 안에 두신다.

이전에 있었거나 지금 있거나 앞을 있게 될 것이나 그 모든 것이 아니게 될 때에도,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신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들은 다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롬 11:36)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선하심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교통시키시어 효력을 나타낼 때 신적 존재의 요지를 적확(的確)하게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그 선하심은 하나님의 본질의 가장 우선적인 발로이다. 지성적이고 스스로 완전하신 본질로서 영원히 존재하며 선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 영원히, 항상 변함없이 존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지혜나 능력을 외적으로 발하여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하시기 전에도 이렇게 무한히 영원하시고 선하신 존재로 계신다. 무한한 존재와 그 존재가 있는 곳에는 무한한 복되심과 행복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한 분이시다. 이것은 ‘주는 한결같으시고’(시 102:27)라는 말씀에서 증언된다. 하나님께는 더할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태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다른 모든 무한한 완전함뿐만 아니라 복되심과 행복, 하나님의 자족함 등은 만물을 지으시기 전이나 지으신 후나 여전히 한결같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완전함을 아는 완전한 지식과 그 완전함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 가운데서 행하신다. 그러한 것을 무한하게 지속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적 복락이다.

3)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 창조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 밖에 있는 유한하고도 제한적이며 의존적인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선함을 전달해 주셨다. 모든 존재와 선함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신의 본질이 밖으로 처음 발산되어 그 효력을 발생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 존재와 선하심을 다른 것들에게 교통시킨 것임에 틀림없다.

4) 하나님 자신만을 직접 의존하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존재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을 직접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을 지으신 신의 본질에 속한 이런 속성들이 즉시 시행됨으로써 그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보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다양한 성질의 능력과 원리들에 부여하신 법에 따라 그분을 의존해야 한다.

5) 이와 같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성적인 인격을 가진 서로 다른 두 가족에게 자신을 제공하셨다. 그들을 위하여 두 개의 서로 다른 거처가 주어졌다. 그들의 본성과 용도를 따라서 하늘 위에 있는 처소와 하늘 아래 땅에 있는 처소를 각각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땅에서 살라고 명하셨다. 사람의 체질로는 땅에 사는 것이 더 합당하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를 보전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땅에 사는 것이 더 좋았다.

한편 천사들의 거처로는 하늘을 준비하여 주셨다. 그곳은 천사들의 체질에 알맞았다. 그들이 자기 존재를 보전하고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 처소가 천사들에게는 합당하였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땅에 있는 사람들 외에 다른 이성적인 피조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서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신 모든 체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6) 이런 만물의 질서는 정말 아름답고도 우아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가족은 각각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절대적인 머리가 되신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머리는 전혀 없다. 그들이 서로에게 머리가 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구별되는 두 가족을 각각 나누어 거하게 하셨다.

7) 죄가 들어옴으로써 그 아름다운 질서와 가족 간의 연합이 부서지고 와해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가족의 일부와 땅에 있는 가족 전체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데서 떨어져 버렸다. 자신들의 머리이신 하나님 안에서 자기 존재의 중심을 찾는 것을 멈추어 버리고, 그들끼리 서로 분쟁하고 대적하는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다.

연합과 질서의 중심이 없어지고 난 그들에게는 적대감과 혼돈밖에는 남지 않았다. 본래 땅은 타락하지 않는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의 선함이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보여 주시고자 땅과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저주하셨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저주하시지는 않았다. 하늘은 그곳에 거하는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얼마는 아직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교통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회복, 재통일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 전체를 완전하게 버리지 않고,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구원하고 회복하기로 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공의로우심이 표증으로 범죄한 천사들을 영원히 버리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시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을 하나로 모으실 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 차이 나고 구별되는 거처에 거하게 하신 그 두 가족을 하나의 새로운 머리 아래로 모으실 것이다. 그 안에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지키시고, 땅에 있는 가족들이 지은 죄에서 구원받게 하시고자 그 머리 아래로 모으시는 것이다.

2) 그 모으심을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엡 1:10)하신다

바울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골 1:20, 개정)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죄로 인해 모든 것들이 무질서해지고 혼돈에 빠졌다. 그들은 다 타락하여 서로를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시지는 않는다. 하나님 자신의 완전하심을 의지하는 상태로 되돌리시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을 완전히 구분되는 가족들로 두시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한 머리 아래로 모으신다. 그들의 그 머리를 직접 의존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화목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3) 새로운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을 하나로, 한몸으로, 한가족으로 통일하신다. 그들 모두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을 직접 의지하여야 한다.

(고전 11:3, 개정)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엡 1:22-23, 개정)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 영광이 그를 위하여 유보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만한 자격과 가치를 가진 이가 없었다.

4)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와 은혜와 영광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에게 위임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모은 가족의 새로운 머리로 세우신 모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와 은혜와 영광의 모든 충만이 그에게 위임되어야 한다. 이제 천사들이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교통이 전혀 없다. 이 가족을 향한 어떤 법령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덕이나 능력이나 은혜나 선하심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지 않는다. 그들의 새로운 머리로부터 그러한 것이 직접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들이 서로 화평과 연합과 협력을 이루는 것은 모두 머리가 되신 그분과의 관계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말하는 통일이다.

5)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상태와 조건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천사들에게는 필요 없는 구속과 은혜로 말미암은 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천사들은 영광 중에서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천사들의 속성을 취하지 않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 자신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신에게로 연합시키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같은 권속으로 그 천사들의 무리들과 함께 교제하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이룬 신비로운 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에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광이 서려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의 이해를 훨씬 초월한다. 그러하기에 이제 그 영광을 살펴보고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

1) 그리스도만이 그러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그 영광의 무게를 능히 감당 하실 수 있다. 하늘에나 땅에 있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새 창조의 머리가 되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중에는 어느 하나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피조물 중에는 하나님 대신 그러한 자리에서 만물이 의지하고 만물을 복종하게 할 만한 존재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릴 때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가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을 갖추신 유일한 분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묘사하였다.

(골 1:15-17)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바로 그런 분만이 이러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자신의 인격의 영광이 그러하기에 모든 피조물의 복됨이 그가 담당하신 직무의 영광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그런 영광을 주시기로 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신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의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하신 의도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분은 진실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교회를 구속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의 행동을 통해서 교회를 구속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집중되고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도 포괄적인 의도가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려’ 하신 것이다. 영원히 분리될 수밖에 없는 모든 피조물이 한 머리 아래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그 한 머리를 의지하여 모든 피조물의 존재가 유지되고 보존되며, 그 질서가 존귀함과 안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견지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샘의 근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모든 물줄기가 그리스도에게로 이르게 되고,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르게 된다.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통일시키신 하나님의 계획의 신적인 아름다움과 질서와 조화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겠는가?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의 연합,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속, 생명과 은혜와 능력, 그리고 긍휼과 위로를 교회에 전달하시는 일과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법칙 모두가 이 영광에 달려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성육신하게 하시려는 그 영광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는 여러 국면 가운데,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영광스러운 사실만큼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셔서 피조물 전체를 움직이고 주장하며 인도하고 관장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기만 해도, 믿은 영혼은 영적이고도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 영광과,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를 더욱 깊이 묵상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감당하는 의무나 우리가 누리는 특권 중 그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들어옴으로써 흠이 난 피조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셨기 에 영화로우시다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질서는 천사들과 사람들, 즉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지켜진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질서의 아름다움이 손상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도 이제 죄의 개입으로 온통 망가졌다.

그러나 이제 새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됨으로써 모든 것이 회복되고 고쳐졌다. 진실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비한 모든 것이 처음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회복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하여 탄식하고 있다.

그것은 위의 하늘에나 아래의 땅에 영광스럽고도 아름다우며 질서 있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지 못한 채로 그저 제멋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요 어둠과 혼돈 속에 놓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의 모든 보화를 행사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지명되었으므로 진실로 영화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절대적으로 항상 같으시고 만물 안에서 무한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은 더 지혜롭게 행하시고, 또 어떤 일은 덜 지혜롭게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무생물을 창조하실 때보다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더 지혜로운 분이 아니시다.

처음 창조 하실 때에도 무한한 지혜와 능력이 수반되었다. “오 주여, 주님이 하신 일이 어찌 그리 기이한지요! 지혜로 그 모든 것을 지으셨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영광이 훼손되었기에 그것을 회복하시는 데에는 더 큰 지혜의 보화가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만물을 다시 끌어 모으실 때에, 피조물을 치료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신 것이다. 사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만물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는 일을 통하여, 측량할 수 없고 복합적이며 다양한 하나님의 지혜가 천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죄가 들어온 뒤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 계획인지에 대하여 미리 알지 못하였다. 또한 상실한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를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의 보고 안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목적을 이룩할 수 있는 다양하고도 무한한 지혜가 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시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충만하고도 가득한 보고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골 2:3, 개정)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 지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시되기에 그리스도께서 영화로우시며, 그 영광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 전체에 확실함과 안전을 보장해 주셨으므로 영화로우시다

질서 있던 처음의 창조는 신비하고도 영화로운 조직이었다. 모든 만물이 자신에게 부여된 성질의 원리와 순종의 법을 따라 하나님을 직접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천사들과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이 상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제 이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늘에 있는 천사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상에 있는 각 신자들도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이게 된다. 그 모든 족속들이 다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다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모든 신자마다, 과거에 모든 만물을 넘어지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파멸에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받았다. 이 새로운 머리 안에서 그 모든 존재가 무너져 내릴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
 
12장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보는 것과 하늘에서 직접 보는 것의 차이Ⅰ

우리는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후 5:7). 이 땅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은혜와 거룩과 순종함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순종하는 모든 것은 믿음의 지시와 영향을 받는 것이지 보는 것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직접 보는 것으로 영원한 복락과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바라보는 대상은 같다. 둘 다 그 대상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영광의 구성요소들이다. 그러하기에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과 하늘에서 직접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Ⅰ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흐릿하고 어두우며 불분명하고 어른거린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고전 13:12)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거울’을 통하여 본다. 그것도 ‘흠집투성이 거울’로 본다. 비유나 분명하지 않은 숨은 언어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이나 그림자가 복음서에도 그려져 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거울에 비추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 그것은 하늘에서 직접 보게 될 주님의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영광에 비하면 모호하고 불안전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 대신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러한 사물들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더 온전하고도 충분하게 우리에게 나타내 보인 복음서가 바로 그러한 거울이다. 그것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물론 복음서를 통해서 본다고 하여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여러 가지 국면을 그대로 다 볼 수 있는 거울은 아니다.

사도는 불완전하게 보여 주는 두 번째 경우로 또 다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어떤 사물들이 말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제시되고 전달되는 것이다. 이 말은 분명하며 직설적일 수도 있고, 상징적이며 은유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그 말이 은유적이라면, 제시되는 사물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고 불완전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불완전하게 보는 것을 가리켜 ‘아니그마티(ainigmati-은밀함, 희미함’ 속에서 주어진다고 말한다(마 6:4, 고전 13:12). ‘수수께끼’같이 제시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방식들을 가리켜 ‘비유’라고 표현한다.

(시 78:2, 개정)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단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보지는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장애물로도 금방 흐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아 2:9, 개정)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방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데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견고하지도 못하다. 그 장벽은 바로 우리가 지금 죽을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분을 그 모습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장벽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 전에는 복음의 여러 규례들을 창문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다. 그분이 그 창문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셔서 자신을 그런 방편으로 보게 하시는 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창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더라도 믿는 자들의 영혼이 충분히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Ⅱ 하늘에서 직접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

1 하늘에서는 ‘우리가 바라볼 대상’이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일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와 그 모든 영광을 끊임없이, 그리고 바로 앞에서 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복음서에 대략적으로 그려진 것과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가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사도는 그것을 거울로 보는 것과 비교하면서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에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보는 일이 아무리 최고점에 도달하더도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요일 3:2, 개정)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직접 보게 될 때 그 시각이 지성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보는 대상은 그리스도의 인성만이 아니다. 인성과 연합되어 있는 신성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꿈꾸며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천 배나 더 큰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능력의 탁월하심이 항상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에 연약하고도 희미하게 살펴보았던 그리스도의 인격의 모든 영광이 우리의 시야 속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복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살전 4:17)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계신 곳에 함께 있어 그 영광을 보게’(요 17:24)하여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직접 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탄식하며 기다리는 바이다.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좋은 것,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하여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용의를 가지고 있다.

(빌 1:23, 개정)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러한 것을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거나, 영혼과 마음이 자주 그 영광에 대한 간절한 소원으로 사로잡히지 않거나, 그러한 영광을 생각함으로써 고통 중에서 새 힘을 얻고 그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이 먼 육신적인 사람들이요,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그런 영광을 부단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부추기고 새롭게 한다.

2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므로 그 일은 아주 현실적일 것이다

그런 능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계신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변모되셨을 때에 인성과 함께 그의 신적 영광의 일부가 나타났다.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새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히 두려워하였다(마 17:6).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그리스도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직접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여러 번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진실로 가장 친밀한 사랑을 경험하였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험을 밧모섬에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계 1:17) 되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일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

(행 26:13-14)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육체의 연약함과 모든 고난의 베일에 싸여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은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대로 나타나는 곳에서 직접 교통할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은 바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감당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지금도 육신을 따라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수 없다.

(고후 5:16, 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부활한 이후의 몸에 관계된 몇 가지 일들

1>지상에 살 때 마음이 가지는 모든 희미한 것과 견고하지 못한 것과 여러 가지 면에서 무능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마음의 문제들은 믿음의 역사를 약하게 하고 방해하며 차단한다. 그러한 마음의 약점을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한 본성의 타락의 잔재이다. 고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허망하고 우둔하며 부패하게 되었다. 또한 결코 영적인 것들을 올바르게 분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치유되는데, 어둠에 속한 자들이 주 안에서 빛이 되거나 자기에게 전달된 새로운 영적 빛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을 정도로 제거되고 치유된다. 그러나 이런 치유는 부분적인 것이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분변하는 데 연약하고 무능하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들을 방해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없다. 연약함이나 허망함이나 무능함이 그 능력들을 방해하거나 무력화시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일이 절대 있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우리 마음속에 영적이고도 영원한 것들의 대한 무능함이다. 우리 마음의 체질이나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마음은 육체의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차원이 낮고 부패해 있다. 특히 하늘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려고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마음이 몸에 갇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물리적인 도구에서 벗어나게 될 때 영혼들의 순전한 행사들 속에 천사 같은 탁월함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 그들이 모두 영화롭게 되고 최고의 영적인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

2>새(은혜의)빛과 새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심길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는 사람의 일을 분변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으로 본성에 속한 것들을 알고 분변하고 판단하게 된다.

(잠 20:27, 개정)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그러나 사도가 선언하듯이 그런 본성의 빛으로는 신령한 일을 분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기 위하여 부르신 사람들에게 믿음과 은혜의 빛, 신령하고도 우월한 빛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기 위하여 그런 빛을 주신다.

새 빛은 전혀 새로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성의 빛만 가진 사람은 새 빛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다. 새 빛의 능력을 맛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사람이 신령한 빛에 대하여 잘 말하고 잘 연구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새 영광의 빛에 대한 세 가지 살펴볼 것

첫째, 은혜의 빛이 본성의 빛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개선시키고 강화시키듯이, 그 영광의 빛도 믿음과 은혜의 빛을 폐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합하여 그것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할 것이다.

둘째, 우리의 본성의 빛으로는 은혜의 효려과 참된 성질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다른 종류에 속하고, 그 자체의 빛을 통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은혜의 빛만으로는 이 영광의 빛을 절대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의 빛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그 영광의 빛에 대하여 우리가 최대한 가질 수 있는 개념은, 그 영광의 빛이 처음 한 번만 작용하여도 단번에 영혼을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안식과 복락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선과 악에 대한 원리들과 실제적인 확신들은 은혜를 통해 완전히 없어지 않고 개선될 뿐이다. 그 본성의 눈멂과 희미함과 하나님의 대한 적의가 부분적으로 제거될 뿐이다.

이렇게 본성이 이 땅에서 영적인 생명과 빛에 대하여 받은 것은 은혜로 새롭게 되어 파괴되지 않고 영광 가운데 완전하게 될 것이다. 은혜를 본성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영광은 은혜를 완성한다. 또한 모든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치료하사 보게 하신 맹인에게서 그에 대한 암시를 보게 된다.

(막 8:22-24, 개정)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본래 절대적 맹인이었다. 그러다가 은혜로 말미암아 처음 눈을 뜨게 되어 하늘에 속한 신령하고 영원한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3 영화롭게 된 몸은 그 모든 감각도 그에 걸맞는 쓰임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시 육신을 입게 될 때에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구속주를 뵙게 될 것이다. 이 땅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때 어떤 능력과 영성이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우리의 영화롭게 된 몸도 영원한 복락의 일부가 될 것이다.

첫 순교자인 스데반은 죽기 전에 밀 그 영광에 대해 무언가를 본 것 같다. 성경에는 공회에 끌려갔을 때에 거기 않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된 것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그가 그의 분량에 맞게 변모되었던 것이다.

먼저 그에게 비췬 이 영광의 빛으로 말미암아 그의 육신의 눈이 꿰뚫어 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땅과 그 복락이 거하는 사이에 참으로 생각할 수조차 없는 먼 거리를 한꺼번에 꿰뚫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신 것’(행 7:55)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육안으로 그를 뵌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 특권에 참여하고자 했다.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도 그 특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어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는 않으셨다. 또 그들의 본성이 완전하게 변화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뵌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밝히 말씀하셨다.

(마 13:17, 개정)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과, 나중에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의 첫 번째 차이의 근거들 중 몇 가지를 알아보았다. 이 땅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약하고 불완전하며 희미하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묵상하면서 거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직접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데 대한 갈망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과을 그렇게 직접 부단하게 보기를 간절히 바라며 갈망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셨다. 사도도 그것이 우리의 최상의 소망이라고 증언하다. 우리의 본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상태가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안식과 만족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영혼은 여러 가지 연약함에 시달린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무지와 어둠으로 인하여 역사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가장 좋은 지위와 경지에 이른다고 해도 구원을 위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롬 8:23, 개정)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장막에 거하는 동안 우리는 짐 진 것같이 탄식한다.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고후 5:8)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과 신령한 빛 안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는 현재의 짐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하나님의 아들들의 완전한 자유에 이르기를 더욱 간절히 갈망하게 된다. 가장 탁월하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 자세가 바로 그러하였다.

이러한 탄식이 계속적이고 습관적일 때, 그것이야말로 구원받아 도달하게 될 것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이 세상에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효력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이 그러한 간절한 소원을 표한다.

(롬 7:24, 개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8:23, 개정)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복음의 복된 거울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신자들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아 자꾸 변해간다. 반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라는 저주스러운 거울을 통해 그 속에 형상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갈피를 잡기 힘든 두려움과 헛된 소망, 망할 것들을 허상으로 감싸 안는 일과 열매 없는 소원, 세상적이고도 육적인 궁리, 저주 어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상상 등 세상과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성장되고 보전되는 것들이 그들 속에 거하면서 세력을 잡는다.

그런 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관한 복음의 계시와 선포에 대한 신령한 지식과 발견 - 계시된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닌 내용 자체에 대한 영적인 분별과 지각과 이해가 필요하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고후4:6)이라고 부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특별히 자기 자신의 칭의와 구원에 적합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칭의와 구원이라는 목적을 효력있게 성취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믿는 사람 각각을 구원하기에 적합하고 적당하며 유력하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신입니다.

3. 믿음의 마지막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원 방식과 구원 방편들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 방식만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의 이 같은 행위에 있어서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격과 그 중보와 그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생명과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목적(존 오웬)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은혜와 부패 모두 신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신자에게 충분히 그 실재의 상태를 바로 알게 해 주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고하거나 격려하실 목적으로 넒은 의미에서 시험을 행하시는데 이로써 그는 어떤 특별한 환경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은혜와 부패의 상태 여부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때로는 은혜를 막으시는 방법으로 시헌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믿던 사람들이 사실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셨기 때문에 살아왓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또 때로는 은혜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신자는 다시 새롭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 그리고 은혜를 확인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더 깊이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영적인 기도를 시험하는 몇 가지 기준들 - 존 오웬

참된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동기가 순전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 것입니다.

1. 기도가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편안하게해줌으로써 우리에게 기쁨이 될 때에 그 기도는 참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기도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동반할 때에, 그 기도는 영적인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기도하는 신자들은 올바르게 살고자 할 것이며, 경건한 삶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피하고자 할 것입니다.

3.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면, 그러한 기도는 영적인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은 것입니다.

4. 우리의 기도가 실천적인 행위들을 동반한다면, 그러한 기도 역시 참된 것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열성으로 기도하면서도 그들을 돕기 위하여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존 오웬(John Owen), "Thinking Spiritually"에서.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세가지 요소 (존 오웬)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관한 복음의 계시와 선포에 대한 신령한 지식과 발견 - 계시된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닌 내용 자체에 대한 영적인 분별과 지각과 이해가 필요하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고후4:6)이라고 부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특별히 자기 자신의 칭의와 구원에 적합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칭의와 구원이라는 목적을 효력있게 성취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믿는 사람 각각을 구원하기에 적합하고 적당하며 유력하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신입니다.
* 이렇게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1) 인간 본성의 죄,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을 배교한 인간의 현재상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의 현재상태, 그로 인해 발생한 온갖 비참한 결과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각성한 사람.
(2) 죄의 본성과 허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 그리고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
(3) 자신이 범한 수많은 죄들의 심각성과 범한 횟수, 그 죄들을 범한 모든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범죄를 온전히 각성하고 자신의 죄가 날로 악화된다는 사실을 온전히 각성한 사람.
(4) 죄로 기우는 지속적인 경향이 자신 안에 역사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요, 그런 경향으로 인해 계속해서 증가하는 은밀한 죄와 발견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
(5)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숙고하는 사람.

3. 믿음의 마지막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원 방식과 구원 방편들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 방식만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의 이 같은 행위에 있어서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격과 그 중보와 그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생명과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0-24).


오웬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

영국의 모든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하나, 청교도들 중의 왕자, 그는 존 오웬이다.

그는 방대한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지식을 기억하며, 지식을 조직하는 비상한 능력을 소유한 신학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적 능력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로 인한 겸손과 복음에 대한 능력을 경험으로 되어진 것이다. 청교도 교육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사고는 필수조건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했으며, 존 오웬 역시 신자들에게 네 가지 항목으로 상기시켰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인간이다.

그는 이성적인 활동을 위한 피조물이며 삼위일체적인 기능을 하는 이해력과 의지와 감정을 부여받는다.지성이며 이해력인 정신은 영혼의 선도적인 기능을 한다. 이의 기능은 인도하고 지시하고 선택하고 안내하는 것이다. 의지는 행동의 능력이고 이성적인 욕구이다. 정신에 인도되므로 이성적이며 감정에 의해 자극되므로 욕구적이다. 의지는 선의 모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이성적인 선에 따라 선택한다. 감정은 특별한 대상들로 이끌거나 또는 물리치는 선택들을 이끌어내는 정서적 연상들이다. 감정이 없이는 절대로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무엇이 감정의 지지를 얻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힌다. 하나님은 진리를 감정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탁월함으로 심령을 압박하신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배우는 것'이다. 영혼의 방향키가 감정이라면 항해지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인간이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에 Thomas Boston은 죄로 인한 4중 소외로 하나님, 이웃, 자신,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주장했다. 죄의 열매는 영혼의 무질서와 인격의 분열이다. 정신기능인 지성은 서로 엇갈리고 정반대로 움직이며, 의지는 정신이 발전하는 선한 것을 택하지 않고, 감정이 주권을 잡아 영혼을 포로로 잡고 이끌게 된다.

죄의 근원은 창조주에 대한 뿌리깊은 불만과 반감이다.(롬8:7) 불경과 불의와 불신과 이교는 내주하는 죄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죄는 전 인격에 침투하여 오염시킨다. 지성은 무지하고 허영되며 부패하게 된다. 감정은 선한 것에 대한 혐오와 증오하게 되며 의지는 무기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존재와 능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기 혐오와 자기불신 위에 기초되어야 한다. 자기 신뢰와 자기 만족은 자기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 참된 성도는 상하고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구속을 받은 인간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빚을 갚으시고 그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를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그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신 영원한 구속언약 가운데 보증인이 되신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핵심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인간, 곧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생명의 법칙과 순종의 습관이 주입되는 마음의 할례인 중생으로 인도하신다. 이 할례의 직접적인 결과인 회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진정으로 구원을 얻는 믿음의 첫 번째 의식적인 행동이다. 중생은 인간의 심령을 죄와 싸우는 전투장으로 만든다. 죄는 마음속에서 항상 활동하고 있다. 죄가 일시적으로 공격의 소강상태를 보이는 것은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는 가장 잠잠해 보일 때 가장 잠잠하지 않은 것이다. 죄의 호수가 잔잔할 때 가장 깊다." 죄의 전략은 기습의 전조로 거짓된 안전감을 주는 것이다. 이 죄와의 전투, 죄죽임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 글은 존 오웬의 설교식 논문들,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 "죄의 억제(Mortification of Sin)", "유혹(Temptation)", "성령에 대한 논설(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를 수집하여 집필한 청교도 사상(기독교문서선교회)의 저자 제임스 패커의 글 "존 오웬의 영성"에서 발췌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의 기능을 창조하셨고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를 인식하고 조명되어 인간에 대한 내면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그분의 거룩하고 탁월한 말씀 가운데 목적하신 바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상실했다. 죄의 깊이는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깊이와 비례한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언약의 보증을 통하여 구원의 완결을 향해 이루어져 가는 은혜는 죄죽임을 통한 날로 새로워지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지상에서 거룩한 자녀가 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그런즉 하나님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벌레 같은 인생이랴"(욥25:4-6).


영적인 것에 대한 진정한 사랑 ( 존 오웬)

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마음 상태일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이 참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다음 장들에서 나는 이것을 정의하고 그 특성을 설명하면서 영적인 사랑을 고무하는 법을 제시할 것이다.


영적인 사랑의 전제조건, 영적 변화

먼저 이 사실로부터 시작하자. 하나님의 은혜와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한 영적 변화, 즉 거듭남이 없이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영혼의 모든 자연적인 활동들이 죄성으로 인해 부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인간의 부패한 영혼

여기서는 이 문제를 상세히 고찰하지 않고 몇 가지만 간략히 설명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영혼이 부패했다는 사실은 성경 지식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하기 쉽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이 부패성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도 분별될 수 있음을 볼 때, 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지니고서도 이것을 거부하는 자들의 무지는 얼마나 심각한가!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그릇된 행실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은 특정한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죄악된 태도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에서 단 하나의 죄악도 제거될 수 없다. 설령 특정한 한 가지 죄악을 중단할지라도 도덕적으로 병든 본성으로부터 다른 죄들이 쉽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죄악된 본성의 자발성이 우리를 온갖 죄악으로 이끈다. 우리는 본능이 원하는 것을 행한다(골3:5-7).

죄악된 본능에 복종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이성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그 본능의 힘을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함을 보여주는 가장 단순한 증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반감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꿀단지 주변의 벌들처럼 세상적인 유익을 위해 달려드는 세상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은 변화

실제적이긴 하지만 영적인 마음을 키워 주지는 않는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말미암은 변화가 아니다.

때로는 강력한 설교를 들음으로써 일시적인 감명을 받을 수도 있다(마 13:20-21). 어떤 철학이 설득력에 의해, 비참한 경험을 통해, 또는 교육이나 새로운 책임감에 의해 변화되는 경우도 있다(삼상 10:9).

하지만 그런 변화들은 영적인 마음을 키워주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욕구의 방향만을 바꿀 뿐이고 실제적인 욕구를 땅의 것으로부터 하늘의 것으로 바꿔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고무적이긴 하지만, 영적인 것들과는 무관하다. 길들여진 짐승이 피 맛을 보면 다시 야수가 되는 법이다.

때로는 불신자들의 끈기 있고 친절하며 유익한 삶이 영적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 본성으로 본질을 바꾸어 진정으로 영적인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변화뿐이다(엡 4:23)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뛰어나심을 명확하고 분명히 볼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 안' 뿐이다.
- 존 오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