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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조지 휫필드의 거듭남 체험>

by 은총가득 2020. 3. 23.


<조지 휫필드의 거듭남 체험> 
 
18세기를 가리켜 종교적 천재의 시기라고 한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은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위대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던 부흥이었다.1) 지금부터 소개할 세 사람, 조지 윗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자 18세기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the Evangelical Great Awakening)의 일꾼으로 선택하신 자들이다.

필자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를 가장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 세기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 중에 윗필드가 가장 사랑할 만한 사람”이며, “영국이 지금까지 배출한 설교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하였다.2) 『설교의 역사』를 지은 다간은 “사도들 이후 설교의 역사에 있어서 조지 윗필드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이름은 없다.”라고 했다.3) 웨슬리의 전기를 지은 배질 밀러(Basil Miller)도 “설교자로서 바울 이후 윗필드보다 더 큰 명성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했다.

『18세기 영적 지도자』를 지은 존 라일(John C. Ryle, 1816~1900)은 윗필드, 웨슬리, 로메인 등 18세기 영국에서 부흥을 일으켰던 위대한 영적 거인 11명 중 윗필드를 가장 먼저 거명했다. “내가 제일 먼저 거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유명한 조지 윗필드다. 그의 출생 연도를 고려한다면 순서상 첫 번째는 될 수 없지만,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를 공적의 순서에서 첫 번째 자리에 놓고자 한다. 백 년 전 모든 영적인 거장 중에서 윗필드만큼 시대의 요구를 빨리 파악한 인물은 없었으며, 영적인 전쟁의 위대한 사역에서 윗필드만큼 앞장서 나간 사람도 없었다. 만일 내가 윗필드 앞에 다른 이름을 놓는다면 그것은 내가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4)

먼저, 조지 윗필드, 존 웨슬리의 영국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배경을 알아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찬란한 부흥과 각성의 시대를 연 조지 윗필드가 태어나기 전 영국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오웬, 백스터, 번연 등 많은 청교도들이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의 용맹을 떨쳤다. 1689년 관용령(the Toleration Act)으로 비국교도들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상당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교도의 불길이 타올랐던 영국은 국교도, 비국교도 할 것 없이 총체적 영적 무기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라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 국교회에는 경탄할 만한 규약과 유서 깊은 예배 의식과 교구 제도와 주일 예배와 천여 명의 성직자가 있었다. 비국교도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자유가 제한되었고, 통제 없는 강단권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다. 불행하게도 국교도, 비국교도 할 것 없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5)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합리주의가 맹위를 떨치며 기독교에 침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신론6)을 받아들였다. 이신론이 초자연적 종교, 즉 성경적 기독교에 대해서 맹렬히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교회도 이에 영향을 받아 신앙의 초자연적인 성격을 거부하고 이성주의적인 신앙으로 바뀌었다. 설교도 도덕을 말하는 것 이상의 것이 없었다. 윗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을 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설교는 단지 도덕을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강단 거의 모두가 도덕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열심히 배우고자 함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되는 일이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알지 못합니다.”7) 상류층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청교도주의의 냄새가 나는 것은 무엇이든 경멸했으며,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비웃음거리로 생각하는 풍조였다. 하원 의원 중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네다섯 명에 불과했다.

국교회의 감독들은 도덕적 부패의 온상이었다. 볼링브룩(Bolingbrooke)경은 성직자들의 생활양식을 보고 그들을 비난하며 “기독교가 당신들처럼 엉터리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했다. 사회는 부도덕과 무질서와 가난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하층민들은 무지하고, 교양이 없고, 태만했다. 문맹이 만연했으며, 대중들의 오락은 저속했다. 법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고, 감옥은 질병과 불법으로 가득 찼다. 영국 역사에 있어서 그 어떤 때보다 술 취함이 만연했다. 도시와 시골 어디서나 평민의 상태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시기도 희망이 있을까?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위해 열심이 특심한 자들을 예비해 두셨다.

이제 조지 윗필드의 거듭남 체험을 알아보자. 조지 윗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벨 여관 주인의 아들로, 6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벨 여관은 글로스터의 중심부에 위치했으며, 그 도시에서 가장 크고 좋은 여관이었다. 윗필드의 가문은 꽤 유력한 집안이었다. 윗필드의 조상 중에는 성직자가 많았다. 그의 조상들 중에는 고조할아버지 이하 5대에 걸쳐서 두 명의 사위까지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었고, 그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교구 목사들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종교적 자질이 조지 윗필드에게까지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윗필드의 고조, 증조할아버지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였던 반면, 그의 아버지는 포도주 상인이자 여관 주인이었다. 윗필드는 비교적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네 살 되던 해 윗필드는 홍역을 앓았는데 부주의로 한쪽 눈이 약간 사시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지 8년이 지난 후 윗필드의 나이 열 살쯤에, 어머니가 재혼하였는데, 그 후 여인숙 사업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윗필드가 열다섯 살 되었을 때, 가정의 경제 사정이 매우 좋지 않게 되었다. 윗필드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일 년 반 정도 여인숙 급사로 일했다. 윗필드는 또래의 친구들이 학교를 가는 것을 볼 때 “종종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라고 나중에 술회했다.

윗필드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죄성에 대한 예민한 인식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죄 중에 잉태되고 태어났다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자기 마음속에 부패함이 꿈틀거렸다고 말했다. 어릴 때 윗필드는 거짓말, 음탕한 말, 하찮은 농담을 늘 입에 달고 다녔으며, 때때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저주를 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주머니에서 아무 생각 없이 돈을 꺼내기도 했다. 주일성수를 지키지 못한 적도 수차례 있었고, 카드놀이와 연애 소설을 좋아했다. 그러나 윗필드는 “어릴 때부터 종종 죄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복된 성령께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마음 위에 운행하고 계셨음을 회고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목사 역할 놀이 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종종 기도문을 읽는 등 목사 흉내를 냈다.

일 년 반 정도 여관에서 급사로 일한 후 그는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17세쯤 되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다. 윗필드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뵙기로 되어 있었으나 하나님 뵙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윗필드는 이 꿈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어떤 부인에게 이 꿈 이야기를 하자 그 부인은 “조지,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야.”라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밤에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가고 있을 때 속히 설교를 해야 한다는 설명하기 힘든 매우 강한 인상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 집에 와서 이것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요셉의 부모들처럼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제발 부탁이니 입 조심 하여라.” 하며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것은 하나의 예언적 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목사가 되기를 소원했던 윗필드의 길을 하나님께서 순조롭게 예비해 주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1732년 7월 근로 장학생으로 옥스퍼드의 펨브로크(Pembroke)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었다(18세).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윗필드는 윌리엄 로(William Law, 1868~1761)의 『경건한 삶을 위한 진지한 부르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과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읽고 강한 감동을 받았다. 윗필드는 옥스퍼드에 오기 전부터 소문에 의해서 “홀리 클럽”(Holy Club)을 알고 있었다. 윗필드는 당시 학교의 모든 사람에게 경멸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가득했던 홀리 클럽 회원들을 동경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다른 학생들과 신분이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근로 장학생이었으므로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일 년 가까이 멀리서 선망만 하던 윗필드는 1733년에 찰스 웨슬리(1707~1788)의 소개로 드디어 홀리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찰스 웨슬리가 윗필드를 아침 식사에 초대함으로써 윗필드와 홀리 클럽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윗필드는 찰스가 그에게 준 책을 읽고 그동안의 신앙관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윗필드는 외적인 행위나 의식으로는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까지 윗필드는 ‘신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예배, 기도, 금식, 성찬 참여, 선행, 도덕적 삶 등과 같은 경건한 삶을 열심히 살면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그 책 앞부분을 읽으면서 윗필드는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아해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고, 절제된 식습관을 지키며, 예배를 충실히 드리고, 교회와 골방에 자주 가며, 때때로 손을 내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그들은 신앙적으로 할 일을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한다.” 윗필드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참된 신앙이란 말인가?” 이 도전 앞에 그는 자신의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면서 파산을 직면해야 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뛰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책을 불태워 버릴까? 집어 던져 버릴까? 아니면 부딪쳐서 파고들 것인가?’ 그는 파고들기로 하였다. 그 책을 그의 손에 쥐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주여,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제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부디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사 나로 하여금 결국에 멸망당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금방 왔다. 하나님께서는 곧 가르쳐 주셨다. 몇 줄 더 읽어 내려가자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영혼이 연합되는 것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즉시에 신적인 빛의 광선이 그의 마음에 꽂혔으며,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8) 윗필드는 자기가 발견한 사실, 즉 ‘신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가족들에게 편지로 알렸다. 윗필드는 가족들이 기뻐하며 자기 편지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가족들은 윗필드가 정신이 이상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찰스 웨슬리는 윗필드에게 다른 홀리 클럽 형제들을 점차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윗필드도 이제 그들처럼 규율에 따라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먹는 일에 있어서나 마시는 일에 있어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려고 노력했다. 윗필드도 그들처럼 다른 학생들의 조롱을 무릅쓰고 그리스도 교회(Christ Church)에서 매주일 성찬을 받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했다. 예수 그리스도께 좀 더 가까이 가도록 그를 이끌어 주는 방편이라 생각되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시행했다. 윗필드는 메서디스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믿기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그들보다 더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극단적으로 제어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죽었으며, 기꺼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로 여김을 받고자 했다. 그리함으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들이 외부에서 자신들에 대하여 온갖 악의에 찬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만큼 그들의 속사람이 강성해지는 때가 없었다.”

윗필드는 스쿠걸이 말한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 학업에 지장이 올 정도로 극심한 자기 부인과 기도를 계속했다. 윗필드는 거듭남의 은혜를 받기까지 극심한 시련의 기간을 통과하게 된다. 먼저 세인트 메리즈에서 평일에 공적으로 성찬을 받자마자 곧 그를 알았던 모든 상류 학생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한다고 해서 교수의 눈 밖에 나게 되었으며, 종종 꾸짖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면 쫓아내겠다는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가족들도 윗필드의 행동의 변화에 놀랐고 그를 제정신으로 보지 않기까지 했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모욕을 당했다. 어떤 사람은 진흙을 던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급료를 가로채기도 했다. 그에게 소중했던 두 친구는 그를 점점 부끄러워하더니 떠나가 버렸다.

윗필드는 사탄의 직접적 공격도 심하게 받았다. 어느 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내적인 어둠과 함께 평소와 다른 인상과 무게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찰스 웨슬리에게 상담을 하였다. 찰스는 자신을 계속 살피라고 조언하면서, 아 켐피스 책의 어떤 한 장을 보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이 무게가 점점 커져 완전히 그를 내리누르는 것을 느꼈다. 모든 묵상하는 능력, 생각하는 힘까지 빼앗아 갔다. 사탄이 한때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육신을 소유하고 그의 몸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고 윗필드는 확신했다. 모든 묵상의 능력 심지어 생각하는 힘마저 앗아가 버렸다. 기억력도 완전히 떨어졌다. 그의 영혼 전체가 황무해졌으며 메말라 갔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을 때마다 영혼과 몸 모두를 짓누르는 엄청난 무게가 느껴졌고, 종종 땀이 날 정도로 그 무게를 견디며 기도해야 했다. 또 쉬려고 누울 때 마귀가 너무나 심하게 괴롭혀 몇 주 동안은 한 번에 세 시간 이상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윗필드는 기도와 자기 부인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감각적인 식욕의 노예였었는지 깨닫고, 과일이나 좋은 음식을 끊고 평소에 먹는 데 썼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차례 금식을 하고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더러운 신을 신었다. 1735년 봄 사순절이 되자 6주간에 걸친 그 절기 내내 토요일 외에는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 동안에는 거친 빵과 설탕을 넣지 않은 세이지 차(茶)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러한 계속적인 금욕과 내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수난 주간 즈음이 되자 그는 몸이 너무 허약해져 계단을 기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정도가 되었다. 의사는 그에게 침대에 누워만 있을 것을 명령했고 그는 의사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때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났다. 다음의 체험은 1735년, 그의 나이 21세 때 일어난 일이었다.



“병의 증상이 7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방문이었다. 복된 성령께서 이 기간 동안 내내 내 영혼을 정결케 하고 계셨다. 나의 이전의 모든 추하고 악랄했던 죄악들이 내 가슴에 사무치게 떠올랐다. 나는 즉시 그 기억들을 기록했고, 하나님 앞에 아침저녁으로 그것들을 자백했다. 몸은 비록 약했지만, 나는 종종 저녁에 조용한 시간을 두 시간씩 가졌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매번 헬라어 성경과 홀 감독의 가장 탁월한 책 『묵상집』(Contemplations)을 읽고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7주가 끝나갈 무렵, 열두 달이 넘도록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압박 아래서 신음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어느 날, 내 입 안에서 심한 목마름과 불쾌한 끈적거림을 느끼고는 갈증을 없애려고 이것저것을 시도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실 때 그의 고난이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부르짖었다.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이 일이 있은 즉시 나는 나를 그토록 무겁게 눌렀던 짐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발견하고 느꼈다. 애통의 영이 나를 떠났고, 나는 하나님 내 구주 안에서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내가 어디로 가든지 크게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하나님을 송축하라! 간헐적으로 중단될 때를 제외하고는, 그 후로 그 기쁨은 내 영혼 속에 계속 머물러 더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애통의 날들이 끝났다. 버림받음과 시험의 오랜 밤이 지난 후, 전에 내가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태양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영혼을 사로잡으셨고, 내가 겸손히 바라기로는,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쳐 주셨다.”9)



위 글은 1740년에 출간된 일기이고, 1756년에 수정 출간된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탄의 셀 수 없는 공격을 견디고, 여러 달 동안 종의 영 아래서 밤낮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은 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붙잡을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양자의 영을 내게 주심으로 영원한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쳐 주셨다. 오! 죄의 무게가 나를 떠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감각과 신앙의 충만한 확신이 나의 외로웠던 영혼 속에 밀려들어 왔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영광으로 충만한 큰 기쁨이 내 영혼을 채웠다. 분명히 이날은 내가 주님과 결혼하는 날이었다. 영원히 기억해야 할 날이었다. 처음에 내 기쁨은 만조와 같았으며, 그리고 마침내 둑을 넘쳐흐르게 되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 이것은 점차 안정되었다. ― 하나님을 송축할지라! 아주 간헐적인 몇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후로 계속하여 그 기쁨은 내 영혼 속에 머물렀으며 더욱 커져만 갔다.”10)



윗필드는 이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은 그가 거듭난 날이며 ‘주님과 결혼하는 날’이었다. 55세 때 행한 한 설교(제목: 모든 사람이 가는 곳)에서 윗필드는 “미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옥스퍼드를 방문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초로 저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저를 거듭나게 하셨던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온 힘을 다하여 ‘신생’을 구한 윗필드에게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영광스러운 ‘신생’의 체험을 주셨다. 윗필드의 영적 생애의 특징은 그의 회심 체험의 영구성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한 번도 영적인 확신을 잃거나 영적으로 후퇴하는 일이 없었다.

윗필드는 22세 되던 1736년 6월 20일 삼위일체 주일에 글로스터에서 벤슨 감독의 안수로 부제가 되었으며, 7월에 옥스퍼드에서 문학사(B.A.)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윗필드는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평일이든 주일이든 그가 설교를 할 때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737년에는 글로스터, 브리스톨, 런던에서 설교를 하여 성공적인 대중 사역을 하였다(23살). 그는 이때에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새롭고 참된 메서디즘(Methodism)을 일으켰다. 윗필드는 조지아 식민지를 방문해 고아원을 돌보는 일을 도와 달라는 웨슬리의 요청으로 1737년 12월 런던을 떠났다. 배를 타고 1738년 5월 조지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사역했다.

1738년 12월에 런던으로 돌아온 윗필드는 과거에 자신이 떠났던 그곳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교회 성직자들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윗필드의 거듭남의 가르침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섰고, 교회들은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사는 다시는 윗필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그를 열광주의자나 광신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특히 윗필드가 거듭남과 신생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이는 세례 받은 많은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윗필드가 방문했던 수많은 강단이 빠르게 그에게 등을 돌렸다. …… 아리안주의, 소시니안주의, 이신론 등을 묵인했던 수많은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사역을 완전히 선포하는 한 사람에 대해 적개심을 가득히 품고, 윗필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11)

그리하여 윗필드는 1739년 2월 브리스톨 부근 킹스우드(Kingswood)에 있는 광부들에게 최초로 ‘야외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윗필드는 이제부터는 주변에 큰 공유지가 있는 곳마다, 수많은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목소리를 높여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윗필드가 설교하면 수만 명씩 모여들었다. 무어필즈(Moorfields)의 한 집회에서는 기도 제목이 적힌 종이를 천 장이나 받았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청중의 찬양은 2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예배드리는 장소에 가 보리라고 결코 꿈도 꾸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선포된 복음을 들었으며 간절히 그 말씀을 받았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몇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 성직자들은 이 이상한 설교자를 전적으로 거절했다. 그들은 진짜 개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반(半) 이교도나 마찬가지인 대다수 주민에게 스스로 다가가고자 하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때부터 영국 교회 강단에서 윗필드의 사역은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영국 국교회가 윗필드와 같은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윗필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으며, 또한 침묵하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해 약이 올라서 마귀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12)

그는 평생에 걸쳐 7번이나 미국을 방문했고, 13회나 대서양을 건넜다.13) 두 번째 미국 방문 중인 1740년에 미국에서 ‘제1차 대각성 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이라는 놀라운 역사가 그를 통하여 일어났다(26살). 그는 하루에 두세 번 2만 명의 청중에게 설교할 정도로 역량을 입증했으며, 이러한 생활을 스물두 살부터 생을 마감할 때인 쉰여섯 살까지 지속했다. 윗필드가 설교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 보통 수천, 수만 명씩 몰려왔다. 윗필드가 보스턴을 떠나기 전에 행한 한 집회에서는 2만 3천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그날의 인파는 보스턴 전체 인구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그가 가까운 곳에서 설교를 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모여들었다. 가게 주인들은 곧장 문을 닫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를 잊었고 농부들은 연장을 놓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서서 설교를 들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들으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모였던 일은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조차도 윗필드의 설교 때문에 “필라델피아 주민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신앙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고 무관심한 사람이라 해도 마치 모든 세상이 신앙적으로 변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대각성 운동을 통해 뉴잉글랜드 인구 30만 명 가운데 25만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수많은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고, 다른 성직자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거듭남’의 복음을 전했다. 한번은 더블린에서 무지한 가톨릭 폭도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윗필드는 “불타는 떨기나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시간입니다. 무어필즈(Moorfields)나 케닝턴 커먼에서 썩은 계란이 날아오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개나 고양이를 집어 던지는 순간들, 더러운 오물을 내 옷에 던져서 다 떼어낼 수도 없었던 그런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더 큰 위안의 순간이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상태에서 저는 안락한 순간들보다 더 많은 위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엑스터(Exeter)에서 설교를 하던 중에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아서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저를 주시하고 있던 한 노동자를 향해 저의 말이 갑절의 능력으로 다가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14)

1743년에는 ‘칼빈주의 감리교 협회’가 결성되었고, 윗필드가 초대 종신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1748년에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하였다. 그는 34년의 사역 기간에 공식적인 대중 집회를 1만 8천 회나 인도하였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였다. 벨덴(Belden)의 추정에 의하면 윗필드는 그의 전 생애에 약 총 1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14번 방문했으며, 아일랜드로 두 번 건너갔다. 윗필드는 스코틀랜드 캠버슬랭(Cambuslang)에서는 약 십만 명의 군중 앞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때 그의 설교를 듣고 약 일만 명의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했다.

윗필드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는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구원을 제시하는 매우 독특한 형태를 띠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윗필드를 가리켜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다고 평했는데, 역사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 미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역사가 렉키(Lecky)는 1789년 이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한 것은 분명 복음주의 대각성이라고 했다. …… 만일 이 말이 옳다면 조지 윗필드야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한 주역이다.”15)

윗필드의 죽음도 장엄하였다. 윗필드는 1770년 9월 29일 보스턴으로 가는 길에 엑서터(Exeter)에서 설교를 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받고 거의 두 시간이나 들판에 모인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다. 그 후 그는 뉴베리포트(Newburyport)에 있는 조나단 파슨스 목사의 집에서 한밤중에 몰려든 청중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 후 발작성 천식으로 이튿날인 9월 30일 주일 아침에 56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한 마디의 신음도 없이, 한숨도 쉬지 않은 채 운명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장례식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사도 시대 이후로 어느 누구가 그처럼 무수한 죄인을 회개시켰다는 이야기를 읽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많은 죄인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도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까?”16)

윗필드는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복음 전도자로 평가된다. 그가 행한 거의 모든 설교에 ‘신생’의 주제가 깔려 있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스스로 알지도, 느껴 보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중들이 그처럼 죽어 있는 이유는 죽은 자들이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39년 7월 23일 월요일 그의 일기를 보면 윗필드의 정신이 단적으로 나타난다(25세).

“세상이 기독교화 되었는데 내가 핍박에 대해서 말한다고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슬프도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로부터 내려오신다면, 전과 똑같이 취급을 당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복음을 설교하러 나가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첫 사도들이 당했던 취급을 동일하게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주님, 모든 일에 대비하여 저희를 준비시켜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