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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그리스도인의 자족-제레미야 버로우즈

by 은총가득 2020. 3. 23.

 

그리스도인의 자족-제레미야 버로우즈

 

제 1장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무엇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안락하고 안전하기를 구한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성삼위의 하나님은 완벽하게 복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족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들 속에서는 자족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자족하기에 충분한 선(善)이나 능력이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신자들은 이러한 영적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있다. 신자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후 6:10).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6-9).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권면을 하고 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내적이며 묵묵히 순종하는 고고한 태도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지혜와 아버지로서의 염려에 무조건 순복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1. 자족이란 내적인 것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2: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내적인 평안을 찾는 법을 배웠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5절).
이 말씀은 “나의 마음이여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나의 영혼아 평안을 누리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압박을 받는다면 혀를 억제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면 참고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까지도 잠잠해져야 한다. 겉으로는 아주 평온하게 행동하지만 마음속에는 반항심이 용솟음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판단하신다. 겉모습의 침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고 또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잠잠하였다(시 32:3).
 
자족이란 전인(全人)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자족은 지적(知的)인 면에서 한정되지 않는다. 시편 42편에서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5절).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안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외부적인 도움을 받아 그 결과로 자족하는 것은 추운 겨울날 불을 쪼임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과 같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열을 발산하여 자기 옷을 덥힌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변함이 없는 내면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항구적인 태도이다.
 
2. 자족이란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적인 비극을 겪는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러한 비극이 닥칠 때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묵묵히 순종하는 자족이 곧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묵묵한 자족이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짜증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여 혼란되거나 반항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소홀히 할 정도로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너무 깊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묵묵히 순종한다는 것은 위의 모든 일들과 반대되는 것이다.
 
3. 자족이란 고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천성적으로 갖는 평온한 기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외부적인 일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걱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일종의 자족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상태”처럼 단순히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참으로 적극적인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가장 고고한 부분이다.
 
4. 자족이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자족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복하며 거리낌 없이 자족을 얻는다.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이것은 곧 그들이 행할 바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마 11:29).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혼의 안식을 찾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에 순복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스스로 세운 계획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더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셨음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어서 자기 자신이 한 번만 잘못하면 파멸로 갈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런 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 안에서 기쁨을 찾는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겪고 나가서 아니라 환난 중에도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렇게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5. 자족이란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는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첫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그 환난이 아무리 오래 갈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그 환난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께 순복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죽음으로 인해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도 순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자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된 자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얼마나 계속되든지 간에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밖으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 방주 안에 있어야 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이 얼마나 다양하든,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해야 한다. 간혹 한 그리스도인이 생활의 모든 국면, 즉 가정, 건강, 사업 등 모든 면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리스도인이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제 2장 쉽게 이해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자족
 
바울은 자족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 장(章)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이 불신자의 눈에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는 여러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사항들을 숙고해 보면 영적인 이해가 더욱 증진될 것이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 곧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눈에는 어리둥절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아주 만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만족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늘 자족한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오직 천국에서만 죄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일들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요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하다. 불신자들에게 그토록 큰 기쁨을 주는 듯이 보이는 것들도 신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할 것이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의 소망을 완벽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가장 암담한 형편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은혜롭게 자각하게 된다면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체험한다. 일단 이러한 평강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없이는 결코 행복을 못 느낀다. 그들은 평강의 왕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서는 이러한 평강을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할 때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가장 강력하게 느껴진다.(요일 3:6)
세상 사람들도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평강의 왕께 순복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또는 학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만족하고 평화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불신자가 신자에게 “당신은 왜 그토록 만족해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이 자족하는 것은 그들의 소원이 모두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기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소유를 확보함으로써 불만족함을 경감시키려고 한다. “이 새 것을 사자, 밖에 나가서 외식하자. 한잔하러 나가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러한 것들이 불만을 잠시 감소시켜 줄지 모르나 불만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처하게 하신 환경에 알맞도록 자신의 욕망을 줄여야 한다. 자족하는 사람들은 영화배우처럼 항상 부유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자족이란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자족은 교만한가 겸손한가의 문제이며, 또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한 다리는 길고 한 다리는 짧은 사람보다 두 다리가 다 짧은 사람이 더 잘 걸을 수 있다. 많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만 기대가 그것보다 더 크다면 항상 불만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가진 것은 적지만 기대 또한 적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이교도 철학자는 오래 전에 이런 말을 했다.
“가장 훌륭한 부자는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요즈음처럼 물질에 대한 기대가 끊임없이 증대되고 있는 때에 그리스도인은 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소유를 더하기보다 덜어냄으로써 자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은 또 하나의 짐을 짐으로써 자족을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짐을 더 짐으로써 자족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은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끝나야만 행복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염려해야 할 또 하나의 짐이 있으니, 바로 죄의 짐이다. 이 죄의 짐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한다면 다른 환난들을 훨씬 가볍게 보일 것이다.
환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만큼 공경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만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재산, 건강, 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복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탓한다면 그것 또한 범죄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들을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이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절감할수록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더욱 자족하게 될 것이다.
 
여기 한 예(例)가 있다. 어떤 한 가정이 소중하게 생각해 오던 계획이 좌절되어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일로 서로를 비판하며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정이 믿는 가정이라면, 남편과 아내는 함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좋은 일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슬플지 모르지만, 곧 감사와 자족이 분노와 불만을 몰아낼 것이다.
 
4. 고난이 복으로 바뀐다.

자족을 체험하기 위해 문제점을 먼저 해결할 필요는 없다. 문제점 그 자체가 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암브로스(Ambrose/339-397년 밀라노의 감독)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 그 자체도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부요가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영적인 문제를 다루노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있는 갈등을 묘사해 주는 말씀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한다.
“그리스도인은 능력 있는 일꾼이요 놀라운 창조자가 된다. 즉, 우울함으로부터 기쁨을, 두려움으로부터 위로를, 죄로부터 의(義)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5. 자족이란 염려함으로써가 아니라 섬김으로써 온다.

자족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얻을 수 있다.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환경을 변화시키셨다. 나는 지금은 부유(건강 또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불평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한 예(例)로, 구름을 잡기 위해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꼭대기에 도착해보면 구름은 여전히 더 먼 곳에 있다. 그들은 또 다른 산을 보고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구름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환경에 만족해야 하며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계속 손을 뻗치지 말아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소욕을 변화시키시어 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되게 하실 때에 자족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갖기를 소망했던 바를 항상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욕(所欲)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바를 소원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해야 하며, 그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되신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신다면, 나는 만족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함이 바로 나의 지혜와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고,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만족한다.”
 
7. 자족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내면에서 덜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
그리스도인은 경건과 반대되는 내면적인 모든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자족이란 외부에서보다는 한 사람의 성품 내면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신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부분들 가운데 하나이다.
 
8. 자족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모든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으로 “양육받는” 신자들이 체험하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당신에게 선물을 보냈다면 당신은 그것을 자신이 직접 구입했을 때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멀리 떠나 있는 남편이나 아내가 선물을 보내왔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이러한 선물들이 귀중한 것은 그것을 보내준 사람들 때문이다. 그 선물들은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표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 즉 건강, 집, 음식, 의복, 친구, 가정, 직장, 기회 그리고 오락 등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실들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다른 사람들이 침울해 있을 때 그들은 기뻐한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할 때 그들은 만족한다. 신자들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불신자들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질 만한 자격이 없는 것들을 은혜로써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소유하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조금만 소유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스도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그에게 약속된 영원한 부(富)의 보증 또는 작은 일부분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생에서 누리는 모든 위로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을 조금 맛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9.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있다.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서 기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는다. 그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든지 그분은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알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모든 육신적, 물질적, 감정적 또는 영적 고통을 이해하신다. 예수께서는 가나하셨으므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학대를 받으셨으므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혹독한 고통을 겪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할 때 힘을 주실 것을 예수께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사 43:2).
그리스도인도 죽음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모든 짐을 감당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심판에서 건지며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환난에서 그들을 붙드실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이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골 1:11)될 것을 기도했다. 이것이 그들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그들이 견뎌내야 할 시련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견뎌내야 한다.
 
10.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물질적인 것에서 얻었던 행복을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얻는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예레미야애가의 기자는 실의에 빠질 만한 모든 일을 다 겪고 있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만족해야 할 필요성을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애 3: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쁘게 만드는 많은 일들을 베풀어 주신다. 그 일들은 우리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송수관과 같은 것이다. 그 일들은 행복을 안겨준다. 간혹 송수관으로 공급되던 것들이 중단될 때마다 우리는 샘에서 직접 물을 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생활에서도 그들의 기쁨과 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은 하늘의 환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성(城)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복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이 행복을 체험하기 시작할 수 있다.

1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 있으므로 항상 자족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속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내용들을 체험하는 사람들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그들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다시 말해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질 수 없는 영적 필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속에 있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자족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함께 있으면 즐거운 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평안을 얻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야 할 경우가 있다. 가족들이 항상 시끄럽게 서로 다투거나, 아니면 환경이 불결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늘 다른 곳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그들끼리 있을 때에는 별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즐거움을 줄 만한 일을 찾는다. 그들은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 행복하다.
 
땅 위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영광을 누리리라는 것을 절대 확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믿음은 영원한 세상의 기쁨을 현재의 확실한 사실로 만든다. 어떤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형편없는 아침 식사를 할지라도 저녁은 훌륭하게 먹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하늘나라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고린도인 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러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바울은 또 이 편지의 그 다음 부분에서 계속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 3장 자족과 은혜언약
 
1. 은혜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과 약속을 맺으셨다. 이러한 약속의 확실성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족할 수 있다.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간과한 수 없으셨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 죄인들을 크게 불쌍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렘 31:33,34/ 참조 히 8장).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값없는 자비의 행위로써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겠다고 자발적으로 동의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아간다(롬 4:24).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에서 비롯된 모든 형벌을 스스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롬 5:8). 그러므로 이 은혜언약은 아래와 같은 사실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순종(또는 의)을 부여하기로 약속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은 신자들이 감당해야 할 형벌과 죄책을 그리스도께 전가함으로써 그들에게서 그 형벌과 죄책을 제하여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셋째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딛 1:2/ 요 17:2).
이 은혜언약에서 성령님의 역할은 죄 가운데 죽어있는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시는 일이다(롬 8:1-4). 성령님은 구원의 확신과 체험을 주신다(롬 8:15,16). 성령님은 신자들이 생활 속에서 죄의 힘을 이기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신다.
 
우리는 이 은혜언약이 하나님께서 온전히 은혜로써 자신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은혜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백성들이 영원히, 그리고 확실히 구원받을 것을 보증한다. 그리스도는 금생이나 내세에서 그 백성들이 잃어버린바 되도록 방치하시지 않을 것이다. (요 10:28) 이 언약의 혜택은 개개의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이 언약에 참예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한 주 예수님의 기도가 나타나 있다(요 17:9,10,24).
 
2. 은혜언약이 어떻게 자족하게 만드는가?
은혜언약은 신자들에게 용기를 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그 백성에게 큰 영적 기쁨과 만족을 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멸망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언약에 대해 알면 신자들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절망과 부딪혀 싸우는 데 도움이 된다. 매일의 생활이 불확실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영적인 안정감을 누린다. 구약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지키시는 미쁘신 분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확신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오늘날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다윗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새 언약을 가져다주신 주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볼 수 있다. 히브리서 8장에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설명되어 있다. 구약의 신자들이 한 집단으로서의 그들 민족(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맺으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으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오늘날 신자들은 그들 각각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실로부터 얼마나 더 큰 용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3. 구체적인 약속들은 모두 은혜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은 놀라운 약속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자족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약속들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적 결과와 관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의 일부 약속들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편 91편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시편에는 신자는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해를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신자는 구약 시대의 신자이다. 소망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이 시편이 자신의 처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아래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 비해 좀 더 육체적이고 외부적인 방식으로 다루셨던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한 대가로 가나안 땅에는 물질적인 축복이 내렸다. 또 불순종에는 저주가 따랐다(신 28장).
 
새 언약의 시대에는 그러한 약속들이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예를 들자면 시편 91편 9,10절에 나타난 약속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백성들을 살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으로부터 지키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연단시키기 위하여 심지어는 고난을 비롯한 모든 방법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다(히 12:8).
 
둘째,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소유, 그들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그들의 삶 등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주장하신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것들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해롭다고 생각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사야서 43장 2절은 환난의 때에 만족을 주는 또 다른 약속이다. 그 약속은 원래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의미를 갖는다. 또 여호수아서 1장 5절도 복음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히 13:5) 그 의미를 더 강화시키고 있다. 그는 핵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역설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결단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폭풍우가 이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의 선원들이 육지를 바라보듯이, 경건한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본다. 이 약속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늘나라의 달콤한 행복의 일부이다.
제 4장 자족을 배우는 그리스도의 학교
 
당신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상상해 보라 물론 수학, 과학 또는 지리를 배우려고 가는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선생이 되셔서 자족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학교에 가는 것이다. 자족을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족을 배우는 데에는 열 가지의 교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과 과정을 다 마친다면 그들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 깊은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는 선생이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모범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훈 1 :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혹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사실을 가르치셨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무익한 존재임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다(눅 17:10).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고 가르치셨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설령 어떤 위로가 될 만한 일들이 없어지더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행한 것이 거의 없는데 그렇게 많이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들을 망쳐버리기 쉬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정결케 하시고 축복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오용(誤用)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선물이나 능력을 주셨다면, 그들은 버림받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야 한다.
 
여섯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죽는다고 해도 어느 누구에게도 손실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겸손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는 사람을 일으켜서 역사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가 한 가지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면 모든 환난은 작게 보일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은 더욱 크게 보일 것이다.
 
교훈 2 : 자기부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한 사람은 없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여기에서 이사야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죽음에 완전히 굴복하신 그리스도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을 때 보여주신 자기부인의 태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그리스도는 가장 자족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부인하기를 배우면 배울수록 그들은 더욱 자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기뻐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통하여 만족을 얻으셨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신자들의 마음속을 지배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행하실 때에만 자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부인하기를 배운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자족하게 될 것이다.
 
교훈 3 :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것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 것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일들이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들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으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다.”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면 만족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기 위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굶주린 사람과 똑같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다.
 
교훈 4 :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만족
예수께서는 많은 놀라운 주장들을 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주장들 가운데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그리고 또 한 번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떡(빵)과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떡과 물로 비유하신 것은 자신이 자기 백성들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힘 있게 묘사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이사야가 예언하였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 모든 충만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확신을 주셨다.
 
교훈 5 :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여행길을 걸어갈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들이다. 그들은 육신 안에 잠깐 “거하고”(camping)있다. 그들은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부활의 몸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현재의 육신에 만족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도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였던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훨씬 더 나은 나라,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예를 들어, 집을 멀리 떠난 나그네는 여러 가지 불편을 겪을 것이다. 남의 집에 묵게 되었을 때, 그 집에 있는 종들은 자기 집의 종들처럼 잘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음식도 자기 집에서 먹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할 것이다. 또 먼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은 파도와 물결에 대하여 어리석게 불평하거나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 더럽고 누더기 같은 옷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향에 돌아가면 생활환경이 훨씬 나아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결을 따라 요동하는 바다의 여행자들과 매우 흡사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나그네가 하룻밤 여관에 머무르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생활은 영원에 비하면 아주 짧다. 다윗은 이 세상적인 일들로부터 생각을 돌이키고 하늘나라의 일들에 집중하기 위하여 자기의 이러한 위치를 상고한다.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19)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훈련, 또는 작전 수행을 위해 고향을 멀리 떠나 있는 군사는 집에서처럼 편안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군사들로 뽑혔다. 그들은 자기 영혼의 원수인 마귀와 싸우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어려움을 견디어야 한다. 그들은 삶이 비록 끊임없는 싸움일지라도 승리가 확실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군사는 자기편이 과연 이길지의 여부를 알지 못할 때에도 어려움을 감수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참아야 하겠는가?
 
교훈 6 : 세상적인 일들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소유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안다면 그들은 세상적인 일들로부터도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만 드린다면 그들은 세상적인 일들도 즐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다면 그들은 그것들로부터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소유들을 너무 귀히 여겨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면 그 모든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일꾼을 고용하여 그에게 할 일을 맡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일꾼이 일을 잘하면 또 다른 일을 맡길 수도 있다. 어쩌면 일꾼은 “나는 이 일을 썩 잘하고 있으므로 다른 일과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이 말을 듣는 당신은 별로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때에 자신을 섬기라고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실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섬기라고 부르실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평탄한 환경을 주신다면 그리스도인들도 즐거워할 것이지만, 고난을 주신다 해도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교훈 7 : 네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의 마음,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책, 곧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그들 자신의 마음의 책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자족을 얻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건이나 환경이 자기가 느끼는 불만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불만을 느끼게 되는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가 느끼는 불만의 진정한 원인이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죄라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이러한 죄의 문제를 그 뿌리부터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문제가 발생할 때 매우 두려워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겸손임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환난을 보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부작용이 따르는 약이 환자의 생명을 구원하듯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어려운 문제들은 신자들의 범죄를 방지해 준다.
 
셋째, 자신에 대한 지식은 좀 더 성숙한 기도를 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합당치 못한 일들을 구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더욱 많은 부(富)를 얻게 된다면 그들은 아마 교만해져서 영적인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할 때에도 불만스러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일이 잘 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게 될 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해 주고 있다.
 
교훈 8 : 번영은 위험한 것이므로 조심하라
 
그리스도인은 종종 번영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휘황찬란한 겉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위험성을 보지 못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부유한 사람에게도 남모르는 슬픔이 있을 수 있다. 산뜻한 새 구두를 신었을지라도 그 구두가 얼마나 발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그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또 한 예로, 멀리에서는 아름답게 보이던 도시가 정작 가까이 가보면 더러운 거리에 쓰레기가 가득차 있을 수도 있다.
부유하거나 높은 지위에 있어 번영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네 가지의 사항이 있다.
 
첫째, 번영은 종종 어려운 문제를 일으킨다.
 
둘째, 번영은 유혹을 일으킬 수도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독특한 측면에서 유혹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보다도 번영하는 자들에게 훨씬 더 큰 의무를 지우신다.

넷째,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들이지만 통치자나 교회의 지도자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답변해야 한다. 이것은 엄숙한 책임이다.
 
교훈 9 :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은 위험한 것이므로 조심하라
 
성경에 간혹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허락해 주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천성적인 욕망은 항상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갖게 하며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서운 형벌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시 81:11,12)
끌래르보(Clairvaux)의 대수도원장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1090-1153년)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 나에게 그러한 비참함을 허락지 마소서. 내가 갖고자 하는 바를 주시고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심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심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천성적인 욕망이 얼마나 기만적(欺瞞的)인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교훈들 가운데 하나이다.
 
교훈 10 :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그 섭리로써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 또한 그분은 지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세세히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인도하시고 주장하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 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 12:6,7)
예수께서는 많은 반대와 환난에 부딪히게 될 그분의 제자들을 준비 시키시면서 이와 같이 격려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이 성장하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다른 요소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능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주간(週間)에 내려 주시는 어떤 환경을 통하여 한 사람의 20년 생애를 결정짓는 일을 성취하시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멋대로 행하여 그 상황의 세세한 국면들을 자기 좋은 대로 조정하며 산다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다른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등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보통 확실한 방법으로 작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방법들을 깨달아야 한다고 신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방식에 익숙할 때에 그들과 훨씬 더 기쁘게 의견을 같이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역사하는지 이해할 때에 그분의 섭리에 훨씬 더 기쁘게 동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신자들은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고 조롱한다. 그들은 “저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저들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난은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나쁜 일에서 가장 좋은 일이 임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보이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비천한 형편에 처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셉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기 전에 먼저 감옥에 들어갔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짐승처럼 쫓겨 다녔다. 예수께서도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높이시려는 자들을 먼저 낮추시고, 살리시려는 자들을 죽이시며, 영광스럽게 만드시려는 자들을 먼저 좌절시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제 5 장 그리스도인의 자족이 주는 유익
 
사도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자족할 때에 얻게 되는 몇 가지 유익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유익 1 :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예배에 참석하고 매일 기도를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몸이 경배의 행위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불만족해 하고 반역적이라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영혼으로써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예배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주신 일들을 기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자족을 발견할 것이다.
 
유익 2 : 영적 생활이 활력 있게 된다.
자족한다는 것은 믿음, 겸손, 사랑, 인내, 지혜, 소망 등과 같은 많은 영적인 능력들을 활용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자라나는 것을 보기 원하신다. 자족하는 신자들의 삶은 불신자들에게 영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러므로 불평 없이 고난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간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유익 3 :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해와 달과 별 등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 중 어느 것도 어려운 문제들을 겪으면서도 자족하는 사람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느부갓네살 왕은 불꽃 가운데서도 해를 받지 않고 걸어 다니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보고 그들의 하나님을 믿었다.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신자들을 볼 때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될 것이다.
 
유익 4 : 하나님께서 더 큰 자비를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기 원한다면, 잠잠히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달라고 소리를 지를 때, 부모들은 종종 그 아이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고 그 원하는 것을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버릇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을 때가 많다. 그들은 무언가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구한 것을 즉시 얻지 못할 때에는 화를 낸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할 준비를 할 때까지 기다리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몸부림을 친다면 자신의 몸만 상할 뿐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을 풀어 주길 기다리면서 조용하게 있어야 할 것이다. 또 거지에게 돈을 주려고 하는데 그가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대문을 두드린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유익 5 : 기꺼이 섬길 준비가 된다.
불안정하고 자족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치 못하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을 잠잠하게 만들어 주셔야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섬길 각오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지도자들이나 또는 자기보다 훨씬 더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하나님 섬기는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으나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워 쓰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무엇인가 특별하고 공적(公的)인 일이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기 위해 구비해야 할 것은 오직 내적인 자족뿐이다. 사실, 하나님의 방법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족하도록 도와 줄 수 없는 것이다.
 
유익 6 : 유혹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단에게 쉽게 유혹 당한다.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이 걱정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불어넣는다. 마귀는 “네가 왜 이토록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그러한 짐을 지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단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유혹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면 마귀는 돈을 약속한다.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마귀는 복수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족한다면 사단은 거짓 약속으로 그들을 유혹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사단의 유혹은 마치 굳은 벽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유익 7 : 생활의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많은 소유를 갖지 못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경우가 있다. 자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많은 일들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한다. 로마의 한 옛날이야기는 자기에게 없는 원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위대한 장군 피루스가 로마를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그는 평화운동가 시네우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시네우스 : “각하, 저는 로마인들이 강력한 투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신들이 허락하여 우리가 그들을 무찌른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피루스 : 「로마를 물리치면 이태리의 나머지 땅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오.」
시네우스 :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태리를 정복하면 싸움이 끝날까요?”
피루스 : 「아니요. 계속 정복하여 아프리카에 있는 로마의 영토도 차지할 수 있을 것이오.」
시네우스 : “그러면 로마 제국 전체를 정복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피루스 : 「그때 우리는 쉬면서 날마다 잔치를 열고 마음껏 즐기게 될 것이오.」
시네우스 : “지금 그렇게 쉬고 즐길 수는 없을까요? 그런 작전을 통하여 많은 위험을 당하고 또 많은 사람들의 목
숨을 빼앗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지금 쉬면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바를 만족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자족의 열쇠이다. 더욱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족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땅위에서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자족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광은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하늘나라의 성도들과 천사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그들은 땅 위에 있는 신자들처럼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께 훨씬 더 큰 기쁨이 된다.
 
유익 8 :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것이 없이도 자족한다면 하나님은 그 순종을 보시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선한 행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하나님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설령 어떤 이유로 인해 그 일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있는 소원을 보신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이 사악한 행동을 계획하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하기를 원하는 선한 일들에 대하여 상급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 받고자 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상급을 주신다.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이 소유하지 못한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인하여 기뻐해야 한다.
 
 
제 6 장 원망의 사악성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자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왔다.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우선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항하여 불평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자.
 
1. 불평은 감염된 상처 같은 것이다.
심한 상처가 난 자리는 곪을 수가 있다. 그리고 연고를 발라도 잘 치료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곪은 자리를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처 부위를 잘라내어 감염된 근육 조직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불만족은 심한 상처를 입어 감염된 부위와 같은 것으로, 위와 같은 처치 방법을 써야 한다. 즉,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야 신자들은 심령의 자족을 얻게 될 것이다.
 
2. 불평은 죄이다.
유다서는 불평하는 죄를 무섭게 정죄하고 있다.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들을 심판하사 모든「경건치 않은」자의「경건치 않게」행한 모든「경건치 않은」일과 또「경건치 않은」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14-16절)
“경건치 않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라. 불평하는 자들이야말로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선두에 선 자들이다. 그러므로 불평하는 자들은 폭력을 쓰거나 술 취하거나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이다. 불평은 지극히 심각한 죄이다.
 
3.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야기에는 그리스도인이 깨우쳐야 할 많은 교훈들이 담겨 있다. 그들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이 언제라도 하나님께 불평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해방된 후에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기뻐했던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불평과 원망은 출애굽 이후의 역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평을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의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하는 자의 전부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26-30).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여 원망하는 것도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임을 알라. 민수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그들은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41절)라고 말했다. 그 답변으로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발하사 백성에게는 전염병을, 반역의 주동자들에게는 지진을 내리셨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에 원망이 확산되기 전에 반역의 씨가 속히 제거되어야 한다.
 
4. 원망은 회심 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적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회심(回心)은 여러 가지 단계로 나타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자신의 큰 죄를 깨닫는다면 어떻게 그보다 못한 일들에 대하여 염려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하늘의 영광을 버리도록 강권한 사랑을 깨닫는다. 우리는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스스로를 제한시키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인내를 본다. 우리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주신 모든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문제에 대하여 원망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부요를 잊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셋째로, 우리가 회심할 때 성령께서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한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의 소유물들 가운데서는 안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넷째로, 우리는 회심할 때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이요 주님으로 영접한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섯째로, 신자들은 회심할 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들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을 영원히 하나님께 굴복시킨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뜻)에 불평하는 신자들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항상 자기가 회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늘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완악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끌어 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신자들은 이러한 회심을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한 체험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회심은 그들의 삶 전반을 통하여 꾸준히 계속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마 18:3).
신자들은 날마다 이기적인 원망에서 생각을 돌이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해야 한다.
 
5. 불평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설정된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관한 한, 불평은 신자에게 요구되는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성경은 이 점을 하나의 예(例)로 설명해 주고 있다. 다윗 왕의 아들 암논은 성격이 나쁜 사람으로 병까지 들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가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삼하 13:4)라고 물었다. 이 말에는 왕자라는 특권을 받은 사람은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신자들도 왕의 자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의 최고 이익을 지켜 주실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혼인한 자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갓 결혼한 부부가 행복하지 않게 보인다면, 친구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저런, 저 결혼은 오래 못가겠구먼”이라고 말할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해 상심해 있을 때 그녀의 남편이 자기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신자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다. 남편은 그 아내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낙심해 있는 것을 보기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도 신자들이 불평하여 원망하는 것을 보기 원치 않으신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일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몸, 곧 교회의 머리이시며,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다. 몸의 한 부분이 만족해하지 못한다면, 그 머리도 그것을 느끼고 슬퍼할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과도 관계를 갖는다. 성령은 신자들의 조언자이며 위로자이시다. 성령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의 위로를 신자들에게 전해 주신다. 그런데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자들이 어떻게 사소한 일들에 불평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불평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고상한 권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비천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바울은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1,22)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들이 천사들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본성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본성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다. 신자들은 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받은 자들이니, 그 목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이루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높은 위치에 올려놓으신 백성들이 약간 불편하다고 해서 불평과 원망을 일삼으면 되겠는가? 이러한 불만과 불평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하자.
 
셋째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신자들에게서 자신의 영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신다.
이는 육신의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에게서 자신의 성품과 기질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자들의 영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영광을 반영해야 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창 49:8,9 참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들을 향하여 격노하심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원망 없이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사자(獅子)같은 기상을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께서는 죽음과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셨으나 또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도 기도하셨다. 신자들은 이렇게 순복하는 정신을 구하여야 한다.
 
넷째로, 불평은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신앙고백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살았다고 선언한다(롬 6:11).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져 있다. 그러나 원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지 않았고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고 나서 불평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다섯째로, 불평은 특별한 믿음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신자들의 소유가 되게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신자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약속받은 적이 없다. 만일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모든 계획이 실현된다면 믿음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에게는 은혜 언약도 없고 그들을 지탱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도 없다. 그러므로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불신자가 그리스도인보다 더 표정이 밝다면 그것은 신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여섯째로, 불평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기대하시는 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참고 견디며, 또 그 시련들을 이기고 그 안에서 기뻐하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많은 신자들이 이처럼 높은 표준에 도달하는 것을 보아 오셨다. 과거에나 현대에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끔찍한 난관 가운데서도 기쁨과 승리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예(例)들을 살펴보라. 그들은 많은 문제점을 지닌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으며 시련을 겪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도우심을 바랐다. 구원에 대한 강한 확신은 믿음의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

6. 불평은 기도와 반대되는 것이다.
기도의 행위는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한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일은 이러한 것들을 주시고 내년에는 더 많은 돈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그날 그날 필요한 양식만 있다면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에 대하여 원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주권적 권위를 가지셨음을 인정했던 우리의 기도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7. 원망은 더 큰 비극을 낳는다.
 
첫째로, 원망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불만족한 생각들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이 불만으로 가득 차도록 버려두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이러한 죄를 피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둘째로, 불평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치 못하게 만든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신자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다른 신자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베풀라는 부르심을 받을 수가 있다. 불만이 있거나 성품의 훈련이 덜 된 신자에게는 이러한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나쁜 소식에 관한 생각이나 다른 시련들 때문에 계속 곁길로 가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할 것이다.
 
셋째로, 자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게 만든다.
자족할 줄 모르는 신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어리석은 계획을 세운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 어리석음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신다.
 
넷째로,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에는 감사가 없다.
성경은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가장 큰 죄의 하나로 간주한다. 자족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물을 주시지만, 그들은 그 선물들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들은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바라는 척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선물들의 가치는 무시한다.
이와 같이 감사하지 못하는 자세는 물질적인 축복 면에서 더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웃이 자기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을 불평하는 신자들도 있다. 그것은 죄이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를 찬양하는데 할애할 것을 기대하신다. 루터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악한 일들을 더 적게 생각하고 선한 일들을 크게 확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성령)의 방법이다.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 닥치면 그 일을 적게 생각할 것이되 자비를 얻을 때에는 그 자비를 크게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만일 신자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러한 시련이 실제보다는 크지 않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는 크게 여기고 허락하신 환난은 적게 생각하도록 만드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귀는 자족할 줄 모르는 신자의 마음속에 문제를 크게 확대시켜 놓는다. 반역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방황할 때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이려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 16:13).
여기서 우리는 진리가 철저히 왜곡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끊임없는 원망은 이 백성들의 정신 상태를 형편없이 영락(靈落)시켜 급기야는 옳은 것을 전혀 분별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된 것이다. 잔인한 속박, 강제 노동 그리고 이스라엘 유아들의 대량 학살로 얼룩진 애굽 땅이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모세가 지도자가 된 것에도 악한 동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신자들은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전에는 이보다 훨씬 행복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8. 불평은 어리석은 죄이다.
 
첫째로, 신자들이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불평하는 행위는, 그들로 하여금 가진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알면서 그들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아이들이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부모가 ‘안 된다’고 하면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던져 버리기도 한다. 신자들도 하나님에게 많은 축복들을 받았으면서 때때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신 다른 축복들을 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안 된다’는 말씀을 듣고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마저도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죄이다.
 
둘째로,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고 말씀하셨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사실 끊임없는 걱정은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자족하지 못하는 것은 에너지의 낭비며 비생산적인 태도이다. 주님께서는 자족할 줄 모르는 신자가 자족하는 의식 구조를 갖출 때까지 그를 위해 작정하신 축복들을 지연시키실 지도 모른다.
 
셋째로,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복을 받기도 전에 그 복의 기쁨을 제거해 버릴 것이다.
벌레들이 속을 다 파먹어 껍데기만 남은 밤을 간혹 볼 수 있다. 이 빈껍데기는 자족할 줄 모르는 신자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 어떤 특별한 축복을 간절히 구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허락하셔도 그것은 더 이상 복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저주로 보인다. 받는 사람 쪽의 영적 상태가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넷째로,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같은 고통이라도 자족할 줄 알았을 경우에 비해 훨씬 더 크게 느낀다.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이다. 시련이 닥쳐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고집이 센 선원은 폭풍우 속에서 돛을 내리기를 거부하고 내리치는 폭풍우를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상황은 급속하게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있는 선원은 폭풍우가 치면 돛을 내릴 것이다. 순복하는 신자들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야 한다.
 
9. 불평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다.
민수기 14장 27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여호와께서는 오늘날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을 들으시고 진노하신다. 민수기 14장의 계속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징벌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신자들은 불평한다고 해서 재난이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건치 못한 사람들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원망함으로 인해서도 징벌을 받을 것이다. 욥기 38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다시 말해, 어떤 인간이 감히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시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만족이 없다면 그것은 그 사람 속에 사단의 영이 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사단은 하나님께 반역한 선봉자이며, 불평은 반역의 상징이다.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가장 무서운 저주 가운데 한 가지가 신명기 28장 65,66절에 기록되어 있다.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서는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47절)라고 설명된다. 이 책을 읽는 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원망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쁘게 섬기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10.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이 불평한다면 하나님은 보호하심을 거두어들이실 것이다.
종은 주인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불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은 “그럼 가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자들이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계속 불평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결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불만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거두어 들이실지도 모른다.
 
이 장(章)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것을 생각해 보면, 신자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자비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그분을 원망했고 그래서 벌을 받았다. 부디 우리의 마음이 겸손해져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럼으로써 자족할 줄 모르는 죄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7 장 심각한 원망의 실례(實例)

 

자족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그런데 자족하지 못하는 것이 특별히 심각한 죄가 되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1. 신자들이 가진 특권이 크면 클수록 불평에 대한 죄책도 커진다.

그리스도인이 생활에서 많은 유익들을 누리려면 불평하지 않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신자들이 마음대로 전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 크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자유 또는 심지어 생명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른 교회를 자신의 교회보다 더 축복하시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제 곧 그들의 차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는 지금 받고 있는 복에 대하여 다른 교회들과 더불어 즐거워해야 한다.

또 자신의 교회가 복을 받고 있을 때 개개인의 신자들이 자기 개인의 입장만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자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하나님 나라가 번영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그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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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소한 일에 대하여 불평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온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 그가 포도원 하나를 더 소유하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건강하고 명랑하며 귀여운 아이를 가진 한 여인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이 아이의 손가락에는 사마귀가 하나 있었다. 그 여인이 만약 그 작은 사마귀 때문에 걱정하느라 아무 일도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심히 잘못된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사소한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은혜와 선하심을 거저 베푸셨음을 안다면 자족할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악한 죄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값없이 대접을 받고도 트집을 잡는 사람은 무례하고도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손님()들이다. 그들은 아무 일에 대해서도 권리가 없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뿐이다. 그러므로 자족할 줄 모르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값없이 받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할 때 원망하는 것은 특별히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노아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깨닫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난의 때에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의하며, 하나님께서 그 시련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영적인 유익을 주시려고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환난이 닥쳐온다고 해서 신자들이 원망을 하는 것은 죄이다. 더 나아가 환난이 지속되는 동안 계속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욱 큰 죄이다. 암소에게 쟁기질을 가르치기 위하여 처음으로 멍에를 매면 그 소는 비틀거리고 똑바로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가 계속 말썽을 피우고 멍에를 매지 않으려 한다면 농부는 그 소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환난을 당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의 처사에 불평하는 신자가 있으면, 그는 그전보다 한층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211절을 생각해 보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鍊達)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리스도인은 시련을 오래 당하면 당할수록 한층 더 겸손하게 되어야 한다. 그들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새로 만든 마차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소리가 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여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은 지 오래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환난의 때에 어떻게 그리스도께 순복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 다녀서 연륜이 오래된 신자가 불평하고 불만족하는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제 8 장 원망에 대한 일반적인 핑계들
 
1. 나는 자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을 직시할 뿐이다
신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현실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자족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실제적인 처지를 자각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준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자신의 어려운 입장에 관하여 더 많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자각하는 일이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당연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만일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만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처지를 자각하는 신자는 자신이 겪는 것과 같은 환난을 다른 사람에게 내리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족할 줄 모르는 잘못된 태도는 신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게 만든다. 만일 질투심이 생긴다면 그것은 신자가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만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나는 자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죄를 자각하고 있을 뿐이다

신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죄가 자신을 슬프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그 슬픔의 원인은 죄가 아니라 어떤 역경(逆境)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제거해 주실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려움이 사라지면 그들은 더 이상 죄 때문에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불행은 죄의 자각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의 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신자가 참으로 자신의 죄로 인해 슬퍼한다면 원망함으로써 죄를 가중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원망은 그들이 그토록 염려해 마지않는 죄를 한층 더 심화시킬 것이다.
신자가 참으로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불평 없이 하나님의 연단에 기꺼이 순복하려 할 것이다.
 
3.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신자들은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큰 슬픔을 겪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거두어 가셨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꾸중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를 “원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환난의 때에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사 43:2).
신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신 사실에 대하여 크게 불평한다면, 그들의 모든 불평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을 내몰아 버릴 것이다. 마음을 잠잠케 하고 불평 없이 순복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길을 잃은 아이가 어머니가 간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신자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돌아오시기를 간구하면서 그분을 좇아야 한다.
“불평하다”(to murmur)라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가 “남아 있다”(to remain) 또는 “거한다”(to abide)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하나의 단어가 두 가지 의미로 모두 사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불평』이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불평을 어떻게 격퇴할 수 있는지 제시하고 싶다.
 
4. 이 곤경 중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만 있다면 다 잘될 것이지만, 남들이 나를 그토록 잔인하고 부당하게 대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또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면, 신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목적(뜻)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신자들은 모든 악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설사 다른 사람들로부터 혹심한 대접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과 은혜만을 받으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
 
5. 나는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문제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생활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2,23절에서 한 말을 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렇게 신자들은 환난의 때를 각오해야 한다. 그래야만 환난이 닥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역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6. 내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므로 나는 감당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신자들은 너무나 불만족한 상태이므로 자신의 문제를 크게 과장하여 생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남보다 더 큰 시련을 겪는다면 그 시련을 견딤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더 많이 갖는 셈이다. 즉,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게 나타났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고난이 한 군데 모여 커다란 무더기를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각 사람은 정확히 똑같은 몫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전에 처해 있던 환경을 다시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기가 겪는 고난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고난을 겪는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7. 나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나 어떤 형편(말하자면 사고나 질병)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게 되어 자족할 수 없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을 때 슬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형편에 처하더라도 결코 원망하는 시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네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신자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별로 중요치 않은 작은 지체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은 이 세상의 중요 인물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적인 소명(召命)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신자들이 받는 하늘의 부르심은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인 청소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국가의 장관보다 훨씬 더 고귀한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신자들의 보잘 것 없는 행동들을 귀하게 보신다.
알렉산더 대왕 또는 불신자인 그 밖의 유명한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보다도 신자들의 작은 행동이 하나님께는 훨씬 더 귀하게 보인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공적인 봉사나 국제 관계 일들에서의 빛나는 업적보다도 충성을 더 요구하신다.
이는 가장 중요한 사실로서, 신실하고 인내하며 잠잠한 신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이 세상의 생활에서 격려를 받게 되면 자족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8. 나는 환경이 너무나 불안정하여 견딜 수가 없다

생활이 매우 불안정한 신자들은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불평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무쌍한 환경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안정된 수입이 없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시리라는, 또는 공급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더욱 크게 가질 수 있다. 신자의 외부적인 여건이 좋지 못할수록, 그의 영혼은 더욱 건강한 경우가 많다.
 
그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비록 신자들의 외부적인 조건이 불안정할지라도 그들의 영원한 영적 복락(福樂)은 확고하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신자들에게는 영적인 은혜가 풍성하게 공급된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지키고 계신 창고에ㅐ서 신자들이 물건을 꺼내어 쓰는 것과 같다. 간혹 그 물건 중의 일부를 낭비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모든 것을 다 써버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9. 한때 부자였던 나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난하게 만드셨으니 내가 어떻게 자족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제 옛날처럼 자신을 후하게 대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들은 궁핍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번영의 때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일 지금 건강하다면 병이 들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다면 감옥에 갇힐 때를 준비해야 한다. 지금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인생의 폭풍이 몰아닥칠 때를 예비해야 한다.
 
환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전에 건강하고 번영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축복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신자들은 이제까지 자신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모든 자비에 감사해야 한다. 항해하는 자들이 수주일 동안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서 항해했다면, 육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폭풍우를 만났다고 해서 불평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안전하게 항해한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받은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옳은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어떤 축복들을 신자들에게 영원히 베풀어야 할 의무는 없으시다. 그들은 영원히 약속된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것으로 족하다.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는 이것을 얻느라고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하였다. 이제 와서 이것을 포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가 무엇을 얻기 위해 큰 수고를 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자기에게 매우 소중한 것들을 기꺼이 포기한다면, 그보다 가치가 없는 것들을 바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제 9 장 자족을 얻는 방법
 
이 책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신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자족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자족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책망을 받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두 가지 사항을 살펴보려 하는데, 그 하나는 고난을 당할 때에 자족을 유지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자족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 고난을 당할 때에도 여전히 자족할 수 있는 방법
첫째로, 신자들은 이미 누리고 있는 자비는 큰 것이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일부 불신자들이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갈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풍성한 영적 축복들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자족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들”을 베풀어 주셨다면 이 세상의 찰나적인 것들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자족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로, 신자들은 이미 받은 축복들이 환난의 때에 그들의 불평을 감소시키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0세가 된 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48년 동안 그의 건강은 아주 양호했다. 그러나 최근 2년 동안 그는 무서운 질병으로 시달렸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오! 주님, 당신은 나의 전 생애를 괴로움과 고통의 생애로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48년 동안 건강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이미 받은 것들로 인하여 당신을 찬양하며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을 인하여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
 
셋째로, 신자들은 영원의 세상(내세)에 비하면 이 세상의 삶은 아주 짧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많이 들도록 산다 해도 신자들의 고통은 쉬이 끝날 것이다. 어떤 순교자는 동료 순교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단지 눈을 감으시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뜨면 당신은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넷째로, 신자들은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훨씬 더 무서운 시련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야곱은 이삭과 아브라함의 후사였지만 지극히 비천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자족해야 했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부요를 누릴 수 있었던 모세도 기꺼이 가장 열악한 환경인 광야에서 살았다. 애굽으로 돌아갈 때 그는 가진 것도 거의 없이 나귀 한 마리를 몰고 돌아갈 수 있었다(출 4:20). 엘리야는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만족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 속에 갇히는 모욕을 받았다. 위대한 마르틴 루터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게는 집도 없고 땅도 없으며 처자에게 남겨줄 아무런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고난을 당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자들이 고난을 면제받기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니가?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본을 따라야 한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공중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세상 생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들에 감사해야 한다.
 
다섯째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로 인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기 전의 생활 속에서도 만족했다면 영적인 축복을 받은 지금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자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 새로운 영적 본성을 입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된 자족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2. 고난을 당할 때에도 자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첫째로, 자족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비롯된다.
배의 외부에 버팀목을 세워 놓아가지고는 배를 똑바로 세울 수 없다. 배가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배 내부에 바닥짐(ballast)이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마음이 늘 평안하도록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 속에 있는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계속 자족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로, 모든 신자들은 이 세상의 일에 어느 정도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방향을 지시하시지 않는 한, 세상과의 관계를 계속 확대시켜서는 안 된다. 신중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상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상처를 입기 쉽다!
 
셋째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된 법칙들에 순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23)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신자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지적하고 있다(롬 8:28). 피조계 내에 있는 모든 것은 신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다스림 받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가? 신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면 만물이 그 신자들에게 복종할 것이다.
 
넷째로,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활용해야 한다.
신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성(異性)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에 신자들은 믿음을 활용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방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주전 469-399)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너를 그토록 세심하게 보살피시는데 자신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것은 불신자들을 위한 놀라운 명언인데, 하물며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얼마나 더 믿음을 실천에 옮겨야 하겠는가? 그들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짐을 하나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의탁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들의 마음에 자족과 평안이 임하게 할 것이다.
 
다섯째로, 신자들은 영적인 일에 마음을 쓰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하늘의 일들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이 같은 태도는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싹틔운다. 신자들이 영적인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면 세상의 일들에 실망할 때도 그다지 실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로, 신자들은 너무 높은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세상 사람들은 흔히 큰일을 기대하다가 실망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영적인 일들을 기대한다면 결코 실망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한, 신자들은 이미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은 바룩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 45:5).
오늘날의 신자들도 이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곱째로, 신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못박혀 죽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다.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공적(公的)으로 연합한다. 그들은 물에서 나와 새 생명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영적인 것에 참 행복이 있음을 알며, 또한 자신의 삶 속에는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서 일종의 ‘죽음과 같은 상태’(deadness)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여덟째로, 신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상처가 나서 쓰라리면 계속 그곳을 만진다. 그러면 상처가 낫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신자들 중에는 자신의 문제를 그러한 식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친구들에게 말할 때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끊임없이 그 문제에 대하여 염려한다. 그러면 문제는 점점 더 커져서 그들을 거의 삼켜버릴 것처럼 보인다. 신자들이 어떤 문제에 대처할 때 훨씬 더 바람직한 방법은 하나님의 자비를 더 많이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염려하고 불평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한 좋은 예(例)가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야곱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경우이다. 그녀는 그 아이를 『베노니』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내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을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탓인지 그 아들을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같이 긍정적인 자세는 신자들이 자족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아홉째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오해만 하고 있는 사람은 좋은 친구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말을 곡해하고 행동의 동기를 의심하는 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하여 신자들이 불평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영적인 방법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될 위험성을 아시고 그 자비로써 그것을 제거해 주셨다.”
또는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위해 나를 예비시키실 작정으로 지금 내 삶에 이같이 역사하고 계시므로 나는 만족할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고전 13:5)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을 가장 아름다운 방향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방법을 해석하는 데 아홉 가지의 나쁜 방향이 있고 단 하나의 좋은 방향이 있다면 그 하나의 좋은 해석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 아홉 가지는 잊어 버려야 한다.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을 살펴볼 때에 선한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한다. 신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실 때 그리스도의 의(義)를 보신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다. 사실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보냈던 글들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선하게 보신다면 신자들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신 속성들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열째로, 신자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좌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크리소스톰(Chrysostom/345-407년)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사람들로 우리의 주님을 삼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 믿음의 주(主)로 삼아서는 안 되므로, 사람들이 우리 위로의 주(主)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서 크리소스톰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족하던 신자들도 자신이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으면 즉시 자족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기 전에 자족한 상태에 있었다면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하여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말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열한째로, 신자들은 이 세상의 위로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신자들이 이 세상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없어져 버릴 때에도 그리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세상 것들이란 재산, 가정, 명예 등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중요시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들을 상실할 때에 너무 상심해서도 안 된다.
 
이제 결론으로 “우리는 지금 자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생활을 성취하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얼마나 전진해 왔는가? 나는 이것을 가르치기 보다는 배우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연륜이 짧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의 초기부터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믿은 지 오래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그 문제에 관하여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족한다는 것은 그토록 깨우치기 힘든 일인 것이다. 우리는 일생을 통하여 자족하기를 익혀야 하며 그것을 다 배울 때까지는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