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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분노하는 마음

by 은총가득 2011. 6. 27.

 

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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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3)


   첫째, 인간의 굶주린 마음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데 그중의 하나가 분노입니다. 창세기 4장 5절부터 15절입니다.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 4:5-15)


  인간이 굶주린 마음을 분노로 느끼는 것에 관해 이 구절들은 소상히 보여줍니다. 내가 분노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깊숙한 곳에 굶주림이 있다는 말입니다. 분노는 굶주림과 반대양상을 나타냅니다. 굶주림은 사람에게 다가가게 합니다. 반대로 분노는 공격적이 되게 합니다. ‘애증(愛憎)’이란 정서가 있습니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굶주림과 분노를 적절히 표현한 단어라 사려됩니다.


  굶주림이 크면 분노가 큽니다. 분노가 크면 굶주림이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인간은 굶주림을 채우려다가 좌절될 때 분노가 생겨납니다. 굶주림을 채우고 싶었는데 버림받았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욕심이 좌절되었을 때, 꿈이 상실되었을 때 인간은 분노합니다.


  둘째, 분노는 대개 억압됩니다.


  분노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약한 자가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분노는 또 누군가에게 의해서 버림받았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의지하고 싶었는데 보호를 해주기는커녕 버림받게 했을 때 분노를 느낍니다. 버림은 강한 자가 하는 짓입니다. 약한 자는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가 버려도 별로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약한 자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을 때 그 좌절감이 분노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는 분노를 표현하면 그나마 있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표출을 못합니다. 힘이 없으니 분노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분노를 억압하게 됩니다. 또 ‘분노는 죄다’라는 죄의식 때문에 억압합니다. ‘참는 게 미덕’이라는 도덕과 전통 때문에 억압합니다. “효도해야지, 공경해야지, 순종해야지”하며 꾹 누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니까 분노를 무조건 참아야 된다는 관념 때문에 억지로 참습니다.


  셋째, 분노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파서 빵을 훔치는 죄는 어쩔 수 없는 경우라고 생각하지만 화를 내는 경우는 나쁜 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합니다. 분노가 그만큼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더욱 억압하게 됩니다.


  억압된 분노는 당장 우리의 의식 속에서 잊혀집니다. 우리는 흔히 “화를 잘 참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노는 잠시 의식 밑으로 억압되었을 뿐입니다.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분노를 억압하는 힘이 더 들 것입니다. 억압되어지는 분노는 자꾸 쌓여질 것이기 때문에 밑에 눌려진 분노는 강한 탄력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분노를 억압하는 일은 분노를 더욱 강화시킬 뿐입니다.

      

  넷째, 분노는 죄가 아니고, 죄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분노 자체는 죄의 경로가 되기는 하지만 새로운 죄는 아닙니다. 창세기에서는 분노를 “죄의 소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7절입니다.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따라서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분노가 마음이 좌절된 결과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로부터 온 것이라 나쁘기는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배고픔(허기)도 죄의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그렇다고 배고픔을 죄라고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분노는 다시 좌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마음속의 분노는 강화됩니다. 흔히 굶주림은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분노를 인정하려 들지는 않습니다. 굶주림이 있는데 어떻게 분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섯째, 해가 지도록 분노를 품고 있으면 죄가 됩니다.


  분노는 죄의 결과, 죄의 배설물입니다. 새로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노를 품고 있으면 죄가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분노를 빨리 해결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죄의 소원이 되어 마침내 형제라도 죽이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26절과 27절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다음, 분노를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해를 넘기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단이 역사하는 기회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을 언제까지 품으라는 말씀입니까? 해지기 전까지입니다. 하룻밤을 넘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분노를 정당화시키거나 분노를 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나 분노를 느낍니다. 그렇다고 다 터뜨릴 수는 없습니다. 성경도 분노를 품는 것과 참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의 창고 속에다 넣어야 합니다. 마음의 창고에 잠깐 넣어두었다가 곧 바로 꺼내서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됩니다. 기억하실 것은 마음의 창고를 잠그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마음의 창고가 잠궈집니다. 우리가 밤에 수면을 취할 때, 단순히 몸과 마음이 잠을 자는 것 같지만 우리의 뇌는 그때부터 많은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일들 중 하나가 낮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을 정리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창고에다 집어넣는 일입니다. 의학적인 용어로 전기생리학적 기억이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분노는 밤사이에 기억의 임시저장장소에서 나와 완전한 방을 꾸미고 자리를 잡습니다. 만일 분노를 해결하지 않고 잠을 청하면 분노에게 방을 잡아주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분노가 우리의 뇌 속에 방을 잡으면 그때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방 속에 갇힌 분노는 집을 짓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생각의 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집을 지으면 사단이 들어옵니다. 이제 분노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만큼 집을 더 크게 짓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분노의 집은 견고해집니다. 마귀가 우리의 내면에 거하기 좋은 최적의 환경이 꾸며집니다. 마귀는 분노의 집을 좋아합니다. 왜 좋아합니까? 분노가 있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니까요. 하나님과 목자를 불신하게 되니까요.


  분노가 방을 꾸미고 집을 짓는 과정은 마치 우리 몸에 암이 형성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합니다. 우리 몸속에는 매일 암세포가 형성되었다가 사라집니다. 마치 분노가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그러지듯이 말입니다. 암세포는 기형세포입니다. 이 기형세포가 매일 우리 몸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암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면역세포가 우리 몸속을 돌아다니다가 기형세포를 잡아 먹기 때문입니다. 면역세포(티 임파구)는 암세포가 자리 잡고 방을 꾸미지 못하도록 발암세포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잡아먹지 못하는 세포가 생깁니다. 이 세포가 바로 암인 것입니다. 암세포는 몸속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면역세포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하여 막을 쳐 자기를 보호합니다. 또 면역세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물질을 분비하여 자기정체를 숨깁니다. 일단 막이 생기면 면역세포가 공격을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 암세포는 서서히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암이 자란만큼 발견되어 우리를 놀라 합니다. 일찍 발견하면 치료가 가능하고, 늦어지면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암과 마찬가지로 분노가 집을 지으면 그때부터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분노가 주인이 됩니다. 아무리 분노를 풀고 해결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루종일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보면 굶주림으로 인한 분노가 인간 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그냥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십자가 앞에다가 몽땅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면역세포 앞에다가 내려놓아야 합니다. 분노를 억압하지 말고 해결하십시오. 억압하면 분노는 집을 짓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악화됩니다. 우리는 흔히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생각으로 참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착각을 합니다. 사단은 이 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말입니다.


  여섯째, 억압된 분노는 반드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분노를 억압하며 삽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억압하며 삽니다. 표현하면 안 되니까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니까 참고, 성도들이 보고 있으니까 꾹 누르고, 가족들 앞이니까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얘기를 못하고 삽니다. 대개 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래, 내가 십자가를 지는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정말 착각입니다. 할 말을 못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분노를 억압하고 참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