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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상한 마음의 내적치유에 관한 연구

by 은총가득 2011. 6. 25.


 

상한 마음의 내적치유에 관한 연구

 

1.서론

 

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인간은 모든 사고와 감정을 의식을 통해 느끼고 수행한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 역시 의식 속에서 수행되고 조절된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의식이 없는 세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기능 중 의식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엄연한 가치로서 존재한다.

영적 세계가 바로 이러한 세계이다. 의식으로 안 느껴진다고 해서 존재치 않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는 우리가 느낄 수 없더라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끝나는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이 기독인의 신앙이요, 믿음이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신앙이란, 곧 믿음이란 의식의 지각현상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어떠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믿음은 의식현상에 의존한다. 믿음은 의식의 이해와 의지를 기반으로 출발하기에 믿음은 초의식적 영역이 되기도 하면서 의식을 무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세계의 어려움이기도 하면서 신비한 면이기도 하다. 신앙은 의식의 수준을 통해 시작되나 얼마나 의식 너머의 넓고 깊은 세계로까지 확장되어지느냐가 곧 신앙의 깊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인간의 신앙은 의식의 수준을 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초월적 세계와 영적 세계, 혹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 세계를 사모하고는 있지만 의식의 범주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즉, 초월적 세계 자체로서의 경험과 열림보다는 자신의 의식의 경험과 개념 안에서의 세계로 닫혀진 경우가 많은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식의 고백을 통해서 시작되지만, 복음의 영향력은 그 의식의 세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인간은 의식으로 보고 느끼고 만지고 경험하는 세계에 매여 살기 때문에 복음의 영역도 그 수준에만 머물고 마는 안타까움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셨다. 이것은 단지 의식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인간 인격의 전부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사람을 움직여 나가는 내적인 상태는 올바른 성경적인 관점에서 조명되고 치유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일찍이 기독교 역사에 뛰어난 선교사적 업적을 남겼던 사도바울은 로마서7장19절에서 "재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라고 하는 자신의 실존의 아픔에 대하여 토로하였다. 그는 이미 오해 전에 인간의 내적 갈등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와 같은 갈등을 겪는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안, 두려움, 염려, 죄책감, 열등감, 수치심, 때로는 엄청난 분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갈등과 문제로 인하여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가 깨어지고 아픔을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분명 이사야61장 1절의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말씀처럼 주님은 이땅의 주님의 백성들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오셨다. 그러나 제한된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백성으로 살아가지만 여러 가지 죄악된 한경 속에서 아픔을 겪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러 아픔이 바로 대부분의 경우 내적인 상태의 불안전함과 상한 마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질병보다는 감정상의 문제로 앓고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이기는 하나 그 원인을 살펴보면 사실상 감정이나 영적인 부분의 장애 때문에 신체적 기능의 손상이나 기관장애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신체가 손상되었을 때보다도 감정상의 상처를 입었을 때 고통은 더 크고 심각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눈에 쉽게 뜨이는 것은 아니다. 부러진 다리는 보기만 해도 안됐다고 생각하고 측은히 여기지만 마음이 상한 것에 대해 그렇게 까지 생각지는 않는다.

교회가 이제까지 감정에 대한 인간 내적인 상태에 대하여 무시하고 넘어온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적인 경험 중에서 감정이란 부분을 그리 중요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감정의 문제는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자신의 감정의 문제는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자신의 감정을 쏟을 만한 다른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세상과 정욕과 마귀에게 감정을 노출시킨다.

따라서 본인은 이 글에서 교회 사역 안에서 적게나마 경험해던 개개인들의 내적인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함께 아파하며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나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면서 이글을 통해서 우리 속의 상한 마음과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하나님의 치유방법들을 모색하고 또한 편협하나마 목회현장에서의 적용점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B.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문헌연구에 의존하고 다음과 같은 경향으로 진행된다. 우선적으로 상한 마음의 영역을 정의하고 상한마음이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증상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본다. 그 이후에는 그것의 성경적인 해결 방법을 고찰하도록 하며 목회적인 적용들을 간단히 살피도록 한다. 이 논문에서는 사람의 전인 중에서 마음과 감정의 부분에 관한 성경적인 치유를 다루며 어떤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는 다루지 않도록 한다.

 

 

2. 상한마음이란?

 

A, 인간관의 문제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상한 마음(broken heart)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것이 인간의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적 치유가 상담의 한 분야라고 볼 때 상담이론은 언제나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 개념들로부터 출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우리의 상담법 및 상담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1. 비기독교적 인간관

 

1)관념론적 인간관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신이며, 인간의 물질적 육체란 인간의 근본적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유의 사고는 고대희랍 철학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지성(이성)일 뿐이며 이 지성(이성)은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의 불꽃이며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질료(물질, matter)를 취하게 되는데, 이 질료는 우주의 실체 중에서 저급한 질서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정신에 대해서는 방해물밖에 되지 않으며 이 질료가 없어야만 사람은 더 고급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성은 가르치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게 된다.

 

2)물질주의적 인간관

이런 물질주의적 인간관은 오늘날 가장 팽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정신적, 감정적, 영적 삶이란 인간의 물질적 구성의 부산물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막스주의지가 역사를 경제적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사실상 인간본성을 물질적 자연주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서 기인한다. 막스주의지에게 있어서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치 못할 일이며 창조주의 존재마저도 부인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식이니 윤리적 지상명제이니 하는 말은 막스주의자에게는 전혀 생소한 문구들이다. 인간은 사회구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악이란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하며 사회구조의 변경을 통하여 악은 제거될 수 있다고 철저히 믿는다. 개인은 자기가 행하는 막스주의지에 있어서 인간이란 한 인격적 개인으로서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목표는 개인 구원이 아니라 완전한 사회의 미래적 성취에 있다. 이러한 사회가 도해하게 되면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 사이의 계층간의 갈등들은 제거되고 해소된다. 이러한 미래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적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물질주의적 인간관의 또 다른 유형으로서 오늘날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상이 있는데 특히 스키너(B. F. Skinner)의 저술을 통하여 대변될 수 있는 인간관이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은 더 이상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주장한다. 인간행위를 결정짓는 요소는 소위 스키너가 말하는 "자율적 인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시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스키너에게 있어서는 신화이다.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만일 이 환경이 완전하게 인간에게 알려진다면 인간의 행위는 완전하게 예측될 수 있다는 것이다.

 

3)비기독교적인 인간관에 대한 비판

이상의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한 마디로 이런 견해들이 매우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위의 견해들은 인간존재의 여러 국면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오직 한 단면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념론적 인간관은 오직 인간의 "영혼", "정신", "이성"에서 강조점을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물체적 구조성에 대한 실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반면에 막스나 스키너의 견해로 대변될 수 있는 물질적 인간관은 소위 인간의 "정신적", "영적" 측면의 실체를 부인하면서 오직 인간의 육체적 측면만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식의 평가를 넘어서서 문제의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상에서 언급된 인간관들은 제각기 인간 존재의 한 국면만을 절대화시키고,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실존의 의존성 내지 책임성을 제쳐놓고 있으므로 이러한 인간관들은 우상숭배의 죄책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의 한 단면만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인간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을 부인하는 모든 인간관은 옳지 못한 것으로 우리는 담대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비기독교적인 인간관에서는 아무런 상한 마음에 대한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되고 실제적이 부분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다. 인간의 존재는 어떤 하나의 존재가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기독교적 인간관

 

1)학자들의 견해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직관이나 이성적 사고 또는 경험적 관찰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실이 금방 드러나는, 전혀 차원이 다른 대화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해답을 다 알고 있는 어떤 타자(他者)가 자기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겠다고 나서지 않는 한, 우리는 돛대 없이 표류하는 배와 같을 것이다. 그러기에 수천 권의 책이 나왔어도 인간 본성에 대해 대충 합의하는 것에 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Lawrence Crabb은 성경의 계시를 기본 틀로 삼는다. 그는 이 계시를 근거로 두 가지의 가정을 한다. 첫 번째 가정은 '인간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다른 의미도 있겠지만 이 말 속에는 인간이 몇몇 중요한 부분에서 하나님을 닮았다는 핵심 개념이 들어있다. 두 번째 가정은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 그 유사성을 심각하게 왜곡 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과 세상안에 있는 것들은 더 이상 애초의 모습이 아니다. 아담은 죄를 범함으로서 자기자신과 모든 후손의 모습을 심각하게 일그러뜨려 놓았다. 지금 우리의 기능은 원래 의도되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괴상한 몰골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Gary Collins는 인간을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다. 첫째는 피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피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은 동물과 별다른 바 없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와 도덕적 능력, 고상한 이성등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 준다. 진화론의 결론과는 달리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은 언제나 동물 그 이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천사들 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에 만드신 동물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다스릴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이다.(창1:26, 시8:5-6)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치 않으시지만 그는 우리를 창조하시되 그 자신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하셨다. (이사야43:7)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우리들의 근거는 창세기1:26의 말씀에 근거한다.

 

개혁주의 신학자 Hoekema의 견해는 비기독교적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피조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이 전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이며, 이것은 곧 인간이 자율적 혹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지적해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창1:1,27) 성경은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도 여기에서 예외된 존재가 아니다. 반면에 사람은 피조물뿐만이 아니다. 그는 동시에 인격체이다. 인격체라 함은 일종의 독립성을 지닌 존재임을 가리킨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 곧 피조된 인격체인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중심적인 신비라고 후크마는 말한다.. 어떻게 사람이 피조물인 동시에 인격체가 될 수 있겠는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피조물이라 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말하며 인격체라 함은 상대적 독립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타락한 인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마땅히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쳐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신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러한 회복은 지금 진행 중에 있으나 장차 완전하게 이루어 질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더 이상 온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며 따라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인간의 본성에 관한 대략적인 성경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의 증거에 충실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될 수 없는 인간의 찬 측면이다. 다시 말해 인간 본질과 실존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이 인간되기를 멈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실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죄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굴절되게 일그러지게 되었으며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회복되고 새로워지게 되는 그 무엇이라는 관점이다.이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은 분명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그의 모든 기능들이 상실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 속의 한 부분인 마음의 영역이 또한 파괴되고 상하게 되었다. 이런 마음을 두고 상한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러 마음의 영역이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부분인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전인으로서의 인간

인간 본성의 정수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 여러 세기에 걸쳐 있어 왔는데 이 논쟁을 종합해 보면 삼분설과 이분설로 축소될 수 있다. 삼분설을 믿든 아니면 보다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분설을 믿든 그것은 상관없지만, 만약 그 부분 하나 하나가 우리 안에서 다 분리도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Collins는 말한다. 인간을 보는 회근의 경향은 인간을 어떤 부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적인 전인으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몸"과 "혼" 혹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세속학자들이나 크리스챤 신학자들 모두가 점점 더 인간에 대하 이런 식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인간은 그의 단일체로 보아져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상담책들을 보면 가끔 주로 육체적, 심리적,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분석과 토론을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구분이 편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은 분명히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인 전인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전인의 개념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인이라고 해서 다 함께 취급될 수 있는 성직의 것은 아니다.

 

B.마음의 성경원어적 의미

 

구약과 신약의 마음이란 표현은 Hebrew로는 레브(또는 네페쉬) Greek으로는 카르디아 혹은 델레마로 표현된다.

 

1. Hebrew에서의 "마음"의 용례

 

B. D. B.는 아래와 같은 의미들을 포함해, 이 두 단어에 대한 열 개의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 "속사람 혹 내적 혼", "정신", "의지의 결정", "양심", "도덕상", "인간 자신", "욕망의 자리", "감정의 자리", "용기의 자리". 마이엔펠트는 그의 훌륭한 단어 연구서에서,마음은 보통 전인을 나타내며 현저한 종교적 중요성으로 가진 단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경에서 이들 두 개의 어휘가 사용되는 문맥들을 살펴보면, 약 204회 정도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는 이들이 '정신'에 주안점을 두어 번역되어 있을을 알 수 있다. 195곳에서는 '의지'를 강조하여 번역되고 있고 166회 정도가 '정서'의 틀 안에 초점을 맞추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개의 용어가 가장 빈도 높게 사용되고 있는 257개 맥락에서는 인간의 총체, 또는 개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새 성경 사전] J.D. 더글라스 편집, 1375.

구약에서 마음이란 단어는 생각, 느낌, 의지의 자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죄의 자리, 영적 갱신의 자리, 그리고 믿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구약 용어 이외의 경우에는 마음이란 단어는 그의 존재의 심층에 있는 인간과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화란 철학자 도이벨트는 성결에 있어서의 마음을 "주체적 자아의 중심부"라고 불렀으며 그에게 있어서 마음은 "참된 질서 가운데 놓여진 육체와 영혼의 단일체이다. - 그것은 인간이다.

 

2. Greek에서의 "마음"의 용례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단어는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이다. 이 단어는 보통 "마음"이라 번역된다. A-G사전은 이 단어의 주요한 의미로 "육체적, 영적, 정신적 생명의 자리"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지, 정, 의를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의 중신과 원천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마음은 성령의 내주 하시는 장소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벰은 신약에 나타난 마음이란 표현을 정신적, 영적 삶의 주요기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시는 인간 속의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은 인간의 내적 삶의 중심부요, 감정, 이성, 의지의 원천인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내적 존재, 즉, 인간의 심층부를 의미하며 자아 즉 인성을 상징한다. 카르디아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속의 초고의 중심으로서 그 안에 종교적 삶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결정짓는다. 앞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마음"이란 것이 죄의 자리, 영적 갱생의 자리, 그리고 믿음의 자리로서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았다. 카르디아도 이와 똑같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크리스챤의 덕들이 카르디아에 기인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5과 베드로전서 1:22에서 보면 사랑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서 6:17과 골로새서 3:22에서 보면 순종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용서가 마태복음 11:29에서 결손이 마음에 관계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5:8과 야고보서 4:8에서 마음이 순결의 자리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골로새서 3:16에서 감사가 마음에 관계되며 빌립보서 4:7에서는 평강이 마음을 지킨다고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들에 충실하다면 마음에 대해서 그것은 인간 자체의 모든 것이요, 그러기에 그의 활동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활동의 근본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인간의 단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 그 자체이며 영과 육의 전체적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적 본질에 있어서의 전인을 상징한다. 마음에서, 믿음의 태도이든, 불신이든, 순종의 태도이든, 불순종의 태도이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토대가 결정되는 것이다.

 

Greek에서의 마음이란 이는 예컨대, 심장병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의학에서도 이 어휘가 사용되고 있다. 이 마음은 내적 인간의 총체와 같은 것으로 취급됨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삶을 통하여 개선시켜 가야 내용을 우리들 스스로가 책임을 지게 하는 한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변화될 수 있는 측면을 다분히 소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C. 결론

 

Adams는 말하기를 성경에서 마음과 머리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는 이유는 "마음"이란 말이 지성적인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성경에서의 마음이란 말은 사람의 속 부분을 가리킨다. 성경에서의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자신 앞에서 사는 속 사람을 가리킨다. 이 속사람은 다른 이 들에게서 숨기어져 있어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양심과 동일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마음으로부터 죄가 나온다. 우리는 밖으로부터 죄짓지 않을 지라도 마음에서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서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속과 겉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마음이란 인간의 나누어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간에 대한 하나의 부분적인 표현 중의 하나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전인으로서의 인간 중에 육신과 영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내적 요소가 있는데 그것을 마음이라는 것으로 대표해서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이 마음은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내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환경에 의해서 상처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상한 마음이라고 해야 할 수 있겠다.

 

 

 

Ⅲ. 상한마음의 원인

 

A.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욕구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동기와 원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당신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하시기위해 지으셨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피조물이다. 갓난아기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우유를 간절히 원하듯 인간은 내면의 평안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관계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은 온전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억압된 자신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와 관계된 여러 환경들이 우리의 속사람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가?

좋은 환경이나 이상적인 환경에서라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충족되고 우리의 속사람도 계발되고 자라갈 수 있을 것이다. Charles L. Whitfield는 유명한 교육심리학자 Maslow와 Weil(1973), Miller(1983, 1984), Glasser(1985)의 책들 속에서 공통되는 20여가지의 요소들과 조건들을 체계화하고 이것들을 "인간의 욕구"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귀한 잠재력들이 완전히 계발력들이 완전히 계발되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함은 명백하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런 것들이 우리가 자라날 때 적절히 채워지짖 못했다는 사실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가 결핍된 것들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에서 어려움을 주고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욕구들이 결핍되면 우리는 자주 인생을 살아가다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혼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고, 또 만성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감정을 가질 뿐이다.

 

1. 생존, 안전감, 만져줌

사람이 태어나서 갓 어린 신생아는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 아기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아기를 돌보는 일에만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최소한 아기가 안전하도록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집중적으로 돌봄을 받아야 할 때에 이런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불만족으로 인하여 혼자 있을때에 불안감을 느끼고 스스로 djEJs 일을 잘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2. 피부접촉(skin contact)

또한 피부접촉이 인간에게 중요한 욕구임을 학자들이 발견해냈다. 피부접촉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적절한 음식, 영양상태의 유지와 보호 가운데 있었더라도 건강한 아이로 자라지 못한다. 동맥경화제가 함유된 음식을 투여한 두 종류의 토끼로 실험한 결과, 사람들이 많이 쓰다듬어 준 토끼들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않았는데 , 사람의 손길이 받지 못한 토끼들은 동맥경화증에 걸렸다고 한다.(Dossey,1985)

이 피부접촉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하면 이것을 통해서"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고, 또 그들이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매개가 된다고 한다. 4-12세까지의 아이들에게 이런 접촉은 건강유지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한다.

 

3.돌봄(attention)

자녀에 대한 돌봄이 없는 무관심은 소극적인 학대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부모의 거부만큼이나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함에도 불구하고 부모자신은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아이가 외로움, 거부당함, 소외감을 지니게 되면 이것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아이가 자신의 최고 보호자요, 훈계자요, 관심을 주는 자인 부모에게 의존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아이는 버림받은 느낌을 받는다. 어른이든 아이든 이런 돌봄과 관심은 절대적인 욕구이다. 이런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일탈행위를 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상당한 쇼킹한 일을 하게 되고, 소극적인 사람은 무조건 순종과 복종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이일 때에 최소한의 안정과 돌봄이 그렇게 중요하다.

 

4.반영과 흉내냄 (mirroring&echoing)

이것 또한 아이든 어른이든 다 필요한 욕구이다. 반영과 흉내내는 말뿐만 아니라 표정,자세.말의 분위기, 기타 동작을 통해서 어린아이가 상대를 통해서 자기가 이해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할 때 이런 욕구를 엄마가 채워줄 수 없을 때 어린아이의 육체적, 정서적, 영적 성장에 장애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한가지 이유는 어떤 것일까? 아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엄마이다. 엄마가 자신이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녀가 엄마의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어린이에게는 놀라만한 잠재력이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무엇인가? 절실한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감지한다. 그리고는 엄마의 욕구를 채워줄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의 행동에는 큰 반대급부가 치러지는데, 그것은 바로 아기 자신의 참자아의 부인과 억제 또는 성장장애라는 대가이다. 그러한 대가는 이 아이가 성장해 나가면서 더욱 커지게 되는 데 그것은 육식적, 정서적, 영적인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

 

5.인도(guidance)

이런 인도는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훈련으로서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제약을 받지 않는 자녀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심각한 정서적인 문제를 발전시킨다. 자녀가 좀 더 나이가 들어 자신의 문제들의 근원이 적절한 제약이 없음으로써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될 때, 그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약을 가할 만큼 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잘 자라나도록 만드는 하나의 요소인데, 여기에는 충고나 조력, 말이나 다른 형태의 도움들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적절하고 건전한 사회적 기술들에 대하여 본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것도 포함된다.

 

6.경청(listening), 진실함(being Real), 참여(participating), 용납(acceptance)

다른 사람이 비록 다 나를 이해해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 말을 경청해 준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큰 만족감을 준다. 이것은 아이를 양육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 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자녀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자녀의 분노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은 분노를 다루는 첫걸음인 것이다. 이렇게 양육 받은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의 아픔이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며 존중할 줄 알고 그런 것에 대하여 감탄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 이해해 줌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솔직하게 지기를 표현할 자유를 주며 또 자라나게 한다.

 

7.상실된 것을 애통하고 근심하며 성장할 기회(opportunity to grieve losses & to grow)

이 상실이란 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잃어버림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런 상실과 관련된 고통과 슬픔을 잘 통과해야지만 올바른 성장을 하게된다. 통과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우선은 이것에 대하여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남자들의 경우는 "남자가 그런 것 가지고 그럴 필요있겠나?"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경험과 성숙의 과정이 우리가 다루는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근심은 상실감을 보상해 주기 위해 마음을 재정비해 주는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과정이다. 그것은 고통으로 받은 압력이 너무 낳아질 때 "피이...."하고 소리내는 안전밸브인 것이다. 이 커다란 상실감이 우리에게 있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근심은 치유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8.지지(support)

지지한다는 것은 참자아의 추구, 곧 정보를 받아들이고 창조하며, 참자아가 그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들을 막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지지란 참자아가 그 잠재력을 계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을 능동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포함한다. 실수하더라도 도와주는 것이다. 참된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만들어 가는데에 필요한 적극적인 도움을 말한다.

 

9.성실과 신뢰

지지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성실과 신뢰를 필요로 하게 된다. 상대방의 속사람을 무시하면 관계를 손상시키게된다. 속사람이 성숙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과 자신도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10.성취-지배, 능력, 통제, 창의성,성취감, 헌신

사람에겐 성취의 욕구가 강하다. 이 성취란 기초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한 단계 나아가서 그 과업 끝까지 완성할 뿐만 아니라 그 과업 자체도 완전한 것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성취는 자기의 관여가 그 과업에 의미를 더하게 했다는 것을 만족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욕구와 책임감을 위하여 로버트 반즈는 자녀들에게 집안일과 같은 허드렛일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녀에게 잔 일을 시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을 통해서 자녀가 성취감을 경험하고 책임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한 성인)일을 끝까지 완성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어떤 결정들을 내려야할 지에 대하여 어려움을 느낀다. 그 원인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의 지도와 격려를 받으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가진 사람(마음이 상한 사람)은 한 부분의 영역, 예를 들면 공부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부분은 높은 성취도를 나타내지만 다른 영역,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실패를 반복한다.

 

11. 기분전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정기적인 기분전환을 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다. 이런 생물학적인 욕구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공상이나 ,크게 웃기. 어떤 이들은 음식 먹기, 운동, 수면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성경적이지 않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경우가 있다. 신앙인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전환을 통해서 사람들은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편히 쉬거나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물론 이런 즐거움을 찾기도 하지만 이들의 방법은 잘못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편히 쉴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신앙인인 경우에는 세속에 물든 것 같은 죄의식을 느끼므로 그러한 일을 즐기기가 어렵다.

 

12. 성적 만족감(sexuality)

여기서의 성적 만족감은 성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잠재적인 영역, 죽, 남성된 것 또는 여성된 것을 스스로 만족스럽게 느끼는 것으로부텨 시작하여 양성(남성,여성)의 다양한 특성들을 즐기는 것과 여성 속에 깃들어 있는 남성적 요소나, 남성안에 깃든 여성적 요소의 발전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장과정에서 이런 만족감이 없을 때, 기능과 즐거움의 면에서나 성역할의 정체성을 갖는데 어려움을 갖는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성적학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온전한 역할이나 남자는 남자로서의 온전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아들선호 사상에 밀려 항상 여자들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고통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 나라와 동양권의 잘못된 문화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각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알맞게 이 땅에 보내졌는데 우리가 이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많은 현대인들은 열등감, 무의미함, 불안정을 느끼고 그리고 어떤 진실한 삶의 목적이 없다고 느낀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잘못된 성관계나 수음 같은 것은 종종 자신이 수용 받고, 증명되고, 필요된다고 느끼고, 또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성행위는 종종 그것을 행한 사람들에게 전보다 더 거부감과 더 자책감을 갖게 한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공허함을 채우고 더욱 안정된 주체의식을 찾으려고 이런 저런 성관계들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성적인 관념은 바른 이해를 가져올 필요가 있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사랑을 원한다. 사랑에 있어 헌신을 원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결합을 원한다. 육체적인 결합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에 있어 성적인 조화를 원한다. 이 조화를 원하는 사람은 조화가 가능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육체를 준비해야 한다.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육체에 대한 정신의 지배하는 점을 확신하여, 사랑의 관계가 서로 조건이 없는 가운데에 실행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린 시절의 온전한 성적인 욕구의 충족은 장래에 성인이 되어서의 성적인 역할과기능에 있어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13.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 - 신앙적인 사랑을 포함

챨스 솔로몬은 말하기를 정신적, 정서적으로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담실에서도 본 적이 있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을 주고 받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인데 대개 그 사람의 어린 시절, 그리고 그와 똑같은 문제를 지닌 부모들로부텨 원인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낮은 자존감,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감정, 늘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하고 느끼는 것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자라난 우리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 다, 그것은 약물중독이나 상호의존성 음주, 과식이나 지나친 성에 관한 집착된 감정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심리상태이기도 하다. 자신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간단히 자신은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믿어 버린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응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는 대신 "나는 사랑 따위는 필요 없어"하는 식으로 생각을 돌려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다시 "나는 사랑 받기를 원치 않는다"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누가 나에게 사랑을 주더라도 나는 그것을 거부할거야"라는 굳어진 생각으로 고착된다. 그러한 생각은 결국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얼어붙게 만들거나 사랑의 감정이나 정서를 제대로 경험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내적인 상처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한 증상들이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B.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한 마음

 

1.관계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 관계는 살아있는 우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유기체와 무기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계이다. 연관성이 없다면 그것은 무기체이며 생명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런 관계를 떠나서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관계들에 관한 주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관계들은 본인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 자아의 상호작용 또는 본인과 타인의 삶에 의해 영향을 받는 범주에 있다. 이러한 관계들이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중심요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관계들의 조직망안에서 살아가는데 이러한 관계들보부터 끊어지면 사실상 죽게되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문제들은 관계 안에 있는 어려움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내적인 마음의 상처도 이런 관계의 깨어짐에서 오는 아픔이다.

모든 유혹의 엄습함과 죄의 일차적인 영향력은 관계들은 파괴한다. 이것의 마지막 결과는 성경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멀어짐, 즉 하나님과 타인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멀어짐 또는 분리를 의미하며, 관계에 있어서의 선택이나 행동할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관계에 대한 이해 없는 내적 치유에 관한 접근은 마치 인체에 관한 최상의 치유법을 사용하긴 하나 해부학이나 생리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고 어떤 질병을 진단하거나 부러진 다리를 고치려는 의사와도 같다. 이것이 세상학문의 심리학적인 요법이나 정신의학적인 치료하는 다른 성경적인 내적 치유가 필요한 이유가 된다.

 

2. 관계의 의미

인간관계는 수많은 종류의 관계가 있다. 그런데 관계들을 개인적으로 구분하는 공통적인 기반은 무엇인가? 다음의 간단한 정의는 대부분의 우리 관계들에 적용되며 그러한 관계의 본질적인 특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관계는 둘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는 몇가지 중요한 함축된 의미들이 있다.

 

첫째는 상호성이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관계가 존재하기 위해서 각자는 두 사람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어떤 종류의 정보를 제공 또는 공급해야만 한다. 전적으로 일방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쌍방이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되어야 한다. 관계에 있어서 쌍방에 의해 제공되는 공헌이 동일한 조류나 동일한 수준일 필요는 없다.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들과의 관계,직장에서의 동료들과 상사들과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인간관계들은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관계가 성장하고 계발될 때 그 책임은 쌍방에 달려있다. 관계는 일방적으로 회복될 수도 없다.

 

둘째는 삶을 나누는 것이다. 관계는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를 고려해 보면 보다 민감한 영역을 접하게 된다. 관계는 단순한 행위의 연속들이 아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영이 없는 육체를 죽은 것이라 했다.(약2:26) 우리의 존재는 단순히 움직이는 육신과 소리로 발하는 말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영은 영에 의존해 산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삶을 나눈다는 것은 영의 상호교환을 포함한다. 어떤 이는 이런 것들을 손쉽게 하는데 이들의 관계에는 항상 생명력과 활력이 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삶을 나누는 일을 아주 힘들게 한다. 이들은 자주 뭔가 의미 있는 관계들을 자주 열망하지만 결코 어떻게 관계를 잘 해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면 또 왜 그렇게 되는 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런 것들을 배워 본적이 없다. 이러한 일은 개성이나 외향적, 내향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자신은 형상 안에 갇혀 있거나 드러나는 역할 뒤에 숨겨져 있다. 이런 현상들은 바로 내적인 마음이 상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으 나타내준다.

 

3. 상처를 받게되는 관계

인간은 누구나 나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면서도 여전히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나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조차도 의혹의 구름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만일 이들이 나의 …을 안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의혹들이다. 내 약점이 노출되었는데도 나를 여전히 온전하게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경험을 갈망한다. 나와의 관계를 끝까지 지속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 나의 조작적인 이기심을 보고도 전혀 영향받지 않을 만한 사랑을 가진 사람, 진정 나를 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의 관계를 갈망한다. 이러한 기대가 사랑의 마음에 치명적인 상해를 가져다주게 되는 것이다. 상처는 관계에서의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텨 맺는 수많은 인간관계를 크게 4가지 관계로 도식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인격이 형성되며 또한 상처를 경험하게 된다.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맺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이 두 번째로 깊은 관계를 맺는 곳이 학교이다.

ⓑ학교 안에서의 관계- 학교란 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친구들과 교사들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곳이다. 그 다음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사회(직장)이다.

ⓒ사회(직장)안에서의 관계- 이제 한 성인으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곳에서 사람들은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교회(영적)안에서의 관계- 이런 관계들은 특수한 영역의 관계로서 많은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위로와 안식을 찾고자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영적인 지도자들에 의하여 또는 다른 교우들과의 관계안에서 상처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상처를 경험하게 되는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권위자 들이다. 이들은 관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이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바꾸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본도 보이면서, 때로는 영향력도 행사하면서, 어떤 때는 교묘하게,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그들은 두려움과 불신의 벽을 쌓도록 그들의 대상에게 훈계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1)가정 안에서의 관계

우리는 인생을 통하여 최초의 권위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부모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예외 없이 서글픈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으로 말하기도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걷기를 실패한 나머지 하나님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지 못한 오늘날 같은 위기 때문에 부보 역할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이 자주 논의 되고 있다.

한가지 예로 한 어린이가 그의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넌 악하고, 나쁜 아이야!"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하였다. 이 아이가 왜 자신을 미워하며 자라났고 수많은 세월을 깊은 좌절감에 빠져 성장하게 되었는지는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어린이는 하나님과 자신에 관한 잘못된 말을 믿게 되었으며 그의 권위자 부모는 이 아이의 인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어린이들의 능력, 외모 또는 미래에 괸한 말들을 조심하지 않고 하는 경우, 그러한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들을 어린이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허다하며, 어린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그들의 부모들로보터 그러한 말들을 듣느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말을 최종의 진실로 그들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이나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불친절과 거짓으로 가득한 말들은 어린이의 정서 발달을 절름거리게 만들 수가 있으며 정상적인 생활로부터 어린이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유년시절의 경험은 치명적인 경우가 된다. 어릴 때 형성되는 인성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유아기에 거절당한 감정은 어떤 경우 아이들을 파멸로 몰아넣기도 하면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냥 나쁘다는 감정이 일어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는 아무 쓸모 없으며 아주 혹독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유아기에 질병을 앓았다거나 부모 중 특히 어머니가 않계셨다고 할 때 아이는 매우 무서워하거나 버림받은 느낌을 갖는다. 한 아이의 일생을 살펴보면 특별히 상처받기 쉬운 때가 있다.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 고등학교나 대학에 입학했을 때, 사춘기의 문제가 있는 때 등이다. 이러한 시기에 상처를 받는다면 더욱 고치기가 어렵다. 결혼이 파기되었을 때 아이들은 아무 죄없이 당하는 희생제물이 되고 만다. 아이들의 세계라 할 수 있는 부모들이 깨짐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정은 차지하고서라도 자기들이 가장 사랑하는 부모가 서로 적대시하는 것을 보는 데에서 오는 충격은 매우 심각하다.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맹약의 관계가 와해된 것을 보고 이것을 해소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아이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비관하게 된다.

문제는 부모들이 어떤 것을 해주었다는데 있지 않고 해주지 못했다는데 있는 경우가 많다. 모든 아이들은 두 가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는 사랑에 대한 욕구이고 또 하나는 자기의 가치 또는 존재 의미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물질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또 과잉으로 충족시킬 수 도 있다. 그러나 부모들이 아이들의 사랑이나 자기 가치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정서적인 발달을 거절 받는 느낌과 열등감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알콜중독. 그리고 다른 약물의존이란 음주나 약물사용과 연관된 반복적으로 발생되는 근심, 문제, 또는 어려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원인이 된 문제는 인간관계, 교육, 법률, 재정, 건강, 정신, 그리고 직업등을 포함한 몇 개 분야에서 발생 할 것이다. 찰스 휫필드는 그의 상담 일에서 알콜중독자의 자녀나 가족들이 그들의 부모나 다른 가족이 알콜중독자 혹은 약물의존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실을 발견했다고 보고한다. 블랙(1984)은 지금은 성인이 된 알콜중독자의 자녀들 중 절반 정도가 자기의 부모에게 알콜중독 문제가 있었다느 사실을 부인한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현재 알콕중독자나 약물의존자가 되어 있는 알콜종독자 자녀의 90%가 그들 부모의 음주 문제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들의 가정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인식 부족은 광범위하고 파괴적이며, 문제부모에 대한 불필요한 용납으로 나타나고 또한 가족들 간에는 자책과 죄책감으로 나타난다.

 

태속에서의 환경은 실질적인 사람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태속에서의 엄마의 생각과 정서적인 상태는 태아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고 이것은 사람의 인격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받으며 엄마의 그러한 생각들에 의하여 의존하고 있다. 진정한 자존감은 바로 태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즉, 혼외임신이라든지 원치 않는 성이라든지 가정의 경제적인 환경이나 기티 환경이 아이를 원치 않을 때 엄마는 낙태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산모와 아이 양쪽 다에게 큰 상처를 가져다 준다. 이런 생각을 가진 엄마가 아이를 낳았을 경우에 아이는 내적인 상처를 이미 태속에서부터 받고 나온다.

"임신중의 엄마가 가지는 두 번째의 책임은 아이의 정신적인 필요들을 인식하고 만나는 것이다. 엄마 태속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태아의 정신적인 필요는 긍정적인 개념과 자존감을 소유한 엄마를 가지는 것이다. 임신기간중의 정서적인 상태는 엄마가 가지는 엄마자신의 관점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환경인 가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게되는데 그 이유는 다양하다. 부모로부터 계속적인 비난을 받게되면 내적인 상처를 받는다. 또한 다른 형제들보다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주목을 받게되면 상처를 입는다. 부모의 잦은 불화나 싸움, 가정 안에서의 성적인 학대, 자녀의 성장에 관심이 없을 때, 신체적인 사랑의 표현이나 훈계의 결여가 지속될 때, 부모의 분주함 때문에 자녀들이 방치될 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경우에 사람들은 내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2)학교 안에서의 관계(교사와 친구)

만일 교사들까지 그릇된 쪽을 택한다면, 그들은 거짓된 비난 또는 옳지 못한 학생지도 때문에 학생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도덕적이지 못한 교사에 의해 대우받는 수많은 학생들이 아픔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계속적으로 학생들에게 잘못된 관념의 성공이나 세상사느 방법 등을 가르치며서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학생들을 차별화 시켜서 학생들로 하여금 잘못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오늘날 자유라는 것을 구가하기 위한 시도 과정에서 합법성이라는 것이 자유주의의 물결 때문에 크게 침식당하고 있는 시대에 놓여 있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보다도 더욱 이러한 현상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문제는 없다. 특히 10대 소년 소녀들이 결혼 전에 충동적인 성행위의 유혹으로 이끌리는 극심한 동료들의 압력하에 놓여 있다. 이런 10대의 친구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한 쌍의 젊은 남녀의 하룻밤으로 끝나는 성 관계를 합법적인 양 옹호하고 있으며 성관계도 없이 사랑을 고백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이 현실의 상황이다. 이 같은 유형의 압력을 가함으로써 친구들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들이다.

 

3)사회적인 관계

수많은 정부들 역시 그들의 국민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로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고 있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로부터 독재 정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부들이 그들의 국민들에게 해를 기치는 악법을 제정하여 집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흔히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뒤에서 공작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한다.

 

4)영적인 관계(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

교회가 그 동안 우리에게 가르쳐 왔다고 느껴지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교회로부터 배운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의례적인 교회의 사건들을 세대를 바꾸면서 계속 반복해온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예컨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명성을 날리는가 하면 얼마 안되어 부끄러운 일로 그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이 그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였으며 엉뚱한 방향으로 계도하였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많은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에스겔13장 3,6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에 외부인들이 진리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보는 고충이 없이도 쉽사리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어떤 기독인들은 어떤 특정한 날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유거가 있을 것이라 하여 어느 산에 운집하였으나 실망만 해버리고 만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지도자들의 완전한 기만에 빠져 집단 자살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치유해 보겠다는 생각에 현대 의학으로 치유될 수도 있는 그런 병을 방치해 죽은 자들도 있다. 교회는 이렇다 할 목표도 없이 생명도 없는 잡동사니 메시지를 세상에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진실하게 전파하는 선지자들의 아야기마저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이제까지 간단하게 인간관계의 문제를 언급했다.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데 이러한 관계들에서 우리는 내적인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는 계속적인 관계의 폭들은 넓어지지만 죄된 이 세상에서 온전하고 올바른 관계가 지속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경험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이고 온전한 관계가 되어야 할 곳에서부터 내적인 상처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적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내적인 치유는 관계의 회복이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감정상의 충격은 감정에 상처로 남는다. 이같은 충격으로는 사별, 결혼의 실패, 사업의 실패, 사고, 지위나 명망을 잃어버렸을 때, 건강을 상실했을 때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오핸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받는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 지냈을 때이다. 가령 잦은 불화난 심한 잔소리, 엄한 권위 밑에서 무섭게 양육 받는 것, 심리적으로 잔혹한 여러 형태의 스트레스가 있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점차 쌓여 마침내 폭발하기에 이른다.

 

C. 기타 상처를 받게되는 환경들

 

자녀를 갖지 못함으로 인한 부끄러움, 낙태에 대한 죄책감,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 이혼이나 연인으로부터의 버림받음, 남편이나 아내로부터의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학대 있을 경우에, 많은 상담이후에도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신뢰했던 사람들로부터의 실망감등이 내적인 상처를 받게 되는 환경들이다.

 

D. 관계가 깨어질 때 오는 정서적인 상태들

 

관계가 긴장되거나 깨어지려고 할 때 상당한 정도의 감정적인 긴장과 고통이 항상 뒤따른다.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복잡하다. 외적인 나타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슬픔의 눈물인지 알기는 어렵다. 우리가 감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반작용하게 된다면 쉽사리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다음은 중요한 관계들이 압박이나 붕괴의 위험에 놓이게 될 때 경험 할 수 있는 감정적인 상태들이다.

 

첫째는 고통이다. 이것은 상처, 상실, 비탄, 슬픔, 외로움이나 낙담으로 표현된다. 감정적인 상처 속에 있는 고통은 신체적인 상처만큼이나 고통스럽지만 외적인 증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동정을 받기가 어렵다.

 

둘째는 분노이다. 분노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용납지 못할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을 상처 입은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상처는 동정을 받을 수 있지만 분노는 동정조차도 받지 못한다. 분노는 적대감, 악독, 보복감이나 원한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한 분노를 감추거나 잘못 취급하면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분노는 감정적인 장치의 합법적인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쩨는 죄책감이다. 우리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에 반하여 우리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한다. 그리고 죄책감은 세 가지 주요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①후회로서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②양심의 가책이나 정죄감으로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인 상태이다. 쉽사리 병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자기 연민과 혼합된다.

③회개로서 이것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네 번째는 두려움을 둘러싼 감정들이다. 즉 놀람, 염려, 초조, 공포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현안하고 친숙하고 안전한 일들이 붕괴될 때 발생한다.

 

다섯 번째는 투기심이다. 투기심은 특권으로 주어진 위치를 상실했을 때 생기는 분개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서 자치하는 우리의 자리나 애정을 어떤 사람에게 빼앗길 때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멀어짐으로 불리는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이러한 느낌들이 있으면 관계 회복의 갈망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서로가 더 이상 돌보지 않게 된다. 회복이다. 화해의 가능성마저도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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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상한 마음의 반응과 증상

 

사람이 내적인 상처를 받게 되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상태의 반응을 보인다. 내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방어막을 설정하고는 진실된 자신을 보지 못하고 두움의 방어벽으로 자신을 가뒤버린다. 점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크게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절과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반항으로 나타난다.

 

A. 소극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거절

 

여기서의 여러 반응들은 사람들의 내적인 상처에 대한 소극적인 반응들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이런 정서적이고 영적인 상태는 다음과 같은 반응들로 나타난다.

 

1. 정서적인 면

 

1)슬픔

슬픔은 어떤 중요한 물건이나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그에 대한 하나의 주요하고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 감정적으로, 인식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상실과 근심의 경험이다. 일반적으로 슬픔을 "비탄에 젖은, 애처로운, 비참함을 보이는 또는 비참함을 야기시키는"등의 사전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정적인 면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전체 삶에 그림자를 던져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슬픔의 반응은 흔히 꿈이 깨어졌다거나 또는 기대가 어그러진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몰아내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같은 비참함을 슬픔의 옷으로 표현하고 있다.(이사야61장3절) 따라서 슬픔은 어느 유의한 출처로부터 오랫동안 얻어맞아 온 거절이라는 현상을 대치한 한 정적인 대치품이라 할 수 있다.

 

2)자기연민

자기 연민은 항상 비생산적이다. 자기연민은 자아와 자기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권리"에 집중되어 있으며 항상 하나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자기연민은 분명 자기를 파괴하고 이것은 나쁜 습관을 뿐만 아니라 하나으 L죄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러한 상항에 빠지면 빠질수록,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우리와 충돌하게 될 때는 언제나 이같은 사고의 유형속으로 옮겨들어가기가 그만큼 쉬워진다. 자기 연민을 지속하는 사람은 어떤 실망스러웠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하게 된다. 그런 일 때문에 압도되는 경우, 타인이 자기를 위로해 줄 것을 기대하게 되며, 타인들을 조작하여 스스로의 자기 연민의 상황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한 자기 연민은 거절을 나타내 보일 뿐 만 아니라 거절의 횟수나 강도를 높이게 되어 있다.

 

3)자기 증오

자기 증오는 타인에 의하여 거절당한 후에 자기 자신을 거절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증오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마 상담자가 겪게 될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 증오의 뿌리는 버림받고 상처받은 경험으로 인하여 자기 비난과 분개의 감정이 치솟게 됨에 따라 사랑을 실의에 빠지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러한 심리적인 문제들이 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치되는 경우, 자기 증오가 생겨나게 된다.

 

4)의기소침

가장 단순하면 혼합 형태인 실의는 상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하냐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지친 모습과 슬픈 표정을 짓는 가운데, 활기와 원기를 상실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느낀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회적인 활동으로부터 움치리게 되면 심지어는 가까운 친구들로부터도 멀어지게 된다. 직장이나 집에서의 활동도 저조해지면서 모든 것이 슬프게 느껴지고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고 활동이 거의 없어지게 되며,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들이 모두가 우울하게만 느껴진다. 죄의식에 대한 느낌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자기비하와 더불어 자기 평가절하 하는 그 다음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때때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끔 어떤 실의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정상적이지만 그것이 횟수를 더해가면 길어지는 경우, 그런 사람은 어떤 치료를 강구할 필요가 있게된다. 아주 흔히 무시되고 있는 사실 한 가지는 실의라는 것이 비록 사소한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기분이나 느낌을 드러내는 목소리이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 고쳐져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이러한 실의의 징후들은 분노- 표현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인식되지도 않고 또 정신적인 정신병학 이론에 의하면 자기 자신에 대항해 내부로 향해진 -를 숨기고 있다.

 

5)무관심

이 무관심은 인생의 커다란 적이다. 사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의 도전을 포기하는 첫 단계이다. 이런 것의 원인은 바로 어린 시절에 있다. 어린 시절 우리의 삶은 매우 혼돈스러워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다. 우리주변에는 가치가 없고 무책임한 어른들만 있었기에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예상되는 일들은 언제나 성취할 수 없는 능력밖에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것이 영향을 주어서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무관심이란 원래 거절과 실패에 대한 사고와 느낌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구체적인 예로 "도대체 소용이 없지 뭐야? 해봤자 되지도 않을 걸 말야. 난 언제나 이렇게 지낼 거라구!"와 같은 표현들이 우리들이 터뜨리는 하소연의 내용들이다.

 

2.지적인 면

 

1)열등의식

본능적으로 열등의식을 느끼는 일은 많은 지성인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며 티없이 맑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고 만다. 삶의 현장에서 거절당하는 일이 반복되는 경우, 사람들이 흔히 그러한 경우로부터 끌어내는 잘못된 결론은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일단 사람들이 최악의 결론을 내리는 경우, 그들은 다음의 표현들이 내포하는 사생아와 같은 결론에 걸맞는 열등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식으로 자기들을 몰아붙이는 거짓된 이유를 가져다 대는 일이 나타난다. "난 너무 뚱뚱해"또는 "난 너무 말랐어" "난 너무 키가 작다구"들과 같은 이유들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이러한 열등의식과 불신앙은 우리의 신념을 파멸시키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이들은 언제나 합세하여 우리가 신앙으로 쟁취할 수 있었을 그런 승리를 강탈해 간다.

이런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고립되었다고 또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가 어렵다. 되도록 이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자신감이 적다. 대인관계와 갈등을 느낀다. 칭찬이나 애정의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며 투덜거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들로 봐서 열등감이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수 있다.

 

2)불안정

불안정은 사랑의 결핍과 우리가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거절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대조적으로 안정은 사랑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연구가들이 보고해 온 내용을 보면 사랑이 모자라는 환경에서 양육된 어린이들의 경우, 흔히 깊이 자리잡은 열등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원치 않는 임신, 요즈음에 흔 히 복수 있는 성과 관련된 모든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 너무 바삐 돌아가거나 또는 자식들의 인생에 선입견을 가진 부모들, 온정이나 긍정적인 면은 찾아 복 수 없는 권위주의적이며 엄격한 부모들이 바로 그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구체적인 예들이다. 이같은 예들은 개개인의 불안정 성향을 나타내는 극소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거절이라는 반응은 커다란 불이익을 가져오게 하며 만일 그것이 허용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를 우리로부터 강탈해 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된다. 더욱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개인일수록 거절을 수용하는 면에 있어서의 저항은 약하게 보이는 반면 반항이라는 인간의 반응을 보이는 기준점이 달라지게 된다. 거절의 반응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은 반항이라는 길을 열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B. 적극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반항

 

1. 정서적인 면

 

1) 원한

원한은 여러 가지 형태의 영적 질병들의 기본이 되는 원인이다. 우리의 정신적 및 신체적 질병들은 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의 직접적인 결과인 경우가 많다. 건강한 방식으로 원한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우리가 회복되어 가는 과정의 귀중한 일부이다.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아픔을 준 환경이나 사람들에 관한 반응으로 극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바로 노여움이나 적개심으로 나타난다. 노여움은 건설적인 방법으로 해소될 수 있지만 고삐가 없는 적개심은 매우 위험할 수 가 있다. 노여움은 흔히 상처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상처가 지속적이 된다면 노여움도 마찬가지가 된다. 이러한 고질적인 기질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가끔 해결이 안된 어떤 내적 갈등 또는 내부 깊숙히 자리잡은 치료가 안된 상처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 노여움이 용인되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지하로 연결된다. 이렇게 되면 먼저 과잉 통제의 악순환으로 바뀔수가 있으며 그 다음 단계로 통제력을 잃고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유일한 출구로 등장한다.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고질적으로 억눌리게 될 때 그것들은 정신병 증세 또는 심리적인 질환으로 표면에 나타날 수도 있다.

 

2)자만심

자만심은 타인들과 거리를 유지하거나 타인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상태로 가장 잘 정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노골적인 개인의 공허함과 자기중심주의의 정도를 반영한다.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보통 외로움과 투쟁하여야 하지만 잠재적인 우정은 다소 멀리서 보이는 행동 또는 사양하는 듯한 표현 때문에 평가절하 되는 느낌과 심지어는 얕보이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되기도 한다.

갈들이 야기되거나 또는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될 때는 언제나 소소한 기분상의 기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때로는 상향된 감정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하향된 감정으로 내려울 때도 있다. 또한 이것이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기분의 교차 현상이 심화되는 경우 정적인 통제 기능의 마비 또는 소위 정신이상이라고 불리는 증세를 야기한다 휴식과 내적 갈등의 해소가 중요한 예방적 조치이다.

 

3) 지나친 책임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자라면서 부모의 문제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모범적인 어린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행동에 자신이 책임이 있는 것으로 믿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사건의 결과까지 포함되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그래서 그들의 욕구가 충족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완벽해지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책임감 때문에 지나치게 헌신적이 되고 따라서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잘하려고 시도하는 성향이 있다.

 

4)분개 및 비통

분개는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가 마음속에서 생겨난다. 어느 말한마디 행동 또는 반응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되거나 마음이 아픈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용서하느냐 또는 분개하느냐의 선택의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분개를 혀용하는 경우, 우리는 하나님 방식의 용서의 길에 장애물을 또한 설치하게 되며 비통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결과가 된다.

성경은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우리들에게 경고해 준다.(히12:15)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비통을 혀용한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 심겨진 단단한 뿌리를 내린 잡초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 뿌리가 내리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 곧 그것은 우리 마음 전체에 두루 퍼져 우리를 장악하게 될 것임은 물론 우리의 마음, 영혼 그리고 육체까지도 오염시키게 되어 있다.

 

5)비판적 성향

비판적 태도는 불만으로 이르도록 되어 있는데, 불만이 가득한 경우 그 불만은 감사함과 고마운 마음을 몰아낸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우리의 정신은 안으로 움츠리게 되며 자기 연민의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는 매시에 있어서 흠을 찾는 우리의 성향을 "긍정적인 비평"으로 나타내 보이려고 애를 쓸 수도 잇지만, 실상은 그 자체의 파괴적인 뿌리 때문에 정 반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필요 이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부정적인 태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 우리는 우리들은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비평적 사고"와 타인을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못된 "비판적 정신태도"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6)지배욕과 소유욕

어느 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 두 가지 마음의 벽은 상호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데, 그렇게 보는 이유는 한쪽의 다른 한쪽을 유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수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불안정과 마음의 상처를 야기함으로써 통제라는 것에 의존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통제라는 수단을 이용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가 남의 인생을 대신 살려는 소유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같은 왜곡의 벽은 인간 관계면에서 한 치명적인 무기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별성을 질식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2.지적인 면

 

1)우월의식과 경쟁의식

흔히 고고한 사람들은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국한시켰을때만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우월의식과 겸손의 태도를 왕래하면 행동을 보일 때 그것은 흔히 그들이 그들 자신의 열들의식에 대한 과잉보상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그들에게 경멸을 당할 때 그들은 우쭐한 기분을 느낀다.

무슨 수로든 남을 이겨보겠다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은 보통, 고통 또는 억압된 열등의식을 감추거나 보상하기 위한 한 시도이다. 그러한 느낌들은 남용적인 부모들의 역할 또는 어린 시절의 동료들이 박해 때문에 그 싹이 커져왔을 수도 있지만 이 같은 우월의식의 벽은 흔히 인생 과정에서 개인을 의미있는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일로부터 분리 소외되게 만들고 만다. 경쟁의식은 무엇이든 잘해낼 때에만 인정받고 수용되는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주로 가지는 방항의 반응이다. 부모들의 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특정한 표준, 즉, 학교 성적이나 체육시간에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기타 그가 살아가는 모든 면에서 기염을 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표준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견고성(완고함)

견고하다는 말은 "융통성이 없는., 뻣뻣한, 양보하지 않는"이란 의미를 가진다. 상처받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또다른 방응은 완고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자신의 생각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로 살아간다. 상대방의 의견이나 태도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종종 많은 관계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타인들과 반대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릇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 되며, 자신의 가치관 또한 쓸모 없는 존재로 완전히 평가절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고집불통의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처할 때의 그들의 불안정으로부터 연유되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그분에게 순종하는 면에서 실패하게 된다는 점이다. 고집불통은 오랜 세월 동안 굳어져 온 습관으로부터 연유되지만 특별히 자신들을 오용해 왔거나 또는 자신들의 위치를 남용해 왔던 권위의 인물들에게 지향되었던 몸에 벤 습관적 유형으로부터 연유된다.

 

3)교육불능(배우기를 싫어함)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반드시 지능이 낮은 결과이거나 나쁜 교육환경의 결과는 아니다. 이러한 교육 불능의 상태는 신체적인 장애나 가정에서의 긴장의 결과이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과는 아예 담을 쌓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본다. 그들의 자아라는 것은 대부분 그들이 지식 속에 감싸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 즉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을 뜻한다. 인생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도전에 부닥쳐보며 새로운 것을 배움으로서 현명해지려는 대신 그들은 자기 인식의 위기로 빠지고 만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배우기를 싫어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었던 일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우리의 교리가 일치되는 경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지식에 속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피차로부터 배우는 일이 용이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사랑을 통하여 우리들은 피차 진리를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전지 하신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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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상한 마음의 내적치유

 

전체적인 면에서 내적 치유는 목회상담학의 한 분야에 속한다. 상담은 '문제'를 지닌 자 곧 내담자와 그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도와주는 자 곧 상담자와의 상호 작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담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내용들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변화는 당연히 발전적인 요소를 포함하여야 한다. 이렇듯 한 인간은 발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상담의 영역에서는 다양한 방법들과 이론들이 정립되어 왔고 계속 개발되고 있다 .절대적 가치를 지닌 방법론은 없다. 또 기독교 상담이라고 해서 순수한 성경적 방법들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 일반 상담이론이나 심리학 연구의 성과물들을 기독교 상담에 원용한다면 성경적인 진리를 보다 평이하고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내적 치유에 관한 어떠한 신학적인 형가나 이론이 없는 상황에서 내적인 치유에 대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신학적인 방법론을 따르기보다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중심으로 내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겠다.

 

A. 내적 치유의 개념과 성경적 근거

 

내적 치유란 어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관념적인 개념일 수 있다. 어떤 정신의학적인 개념은 물론 아니며 신앙안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는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적 치유는 내적 사람의 치유이다. 감정, 고통스런 기억들, 꿈, 이는 우리가 분개, 자기연민, 억압, 죄책감, 두려움, 슬픔, 증오, 열등감, 정죄감, 무가치함 등등의 감정들보부터 기도를 통해 자유케하는 과정이다. 로마서 12장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분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다. 내적 치유는 마음이 상한 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또한 메시야의 오심의 목적과 사역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고 모든 슬픈 자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아픈 마음은 그것이 단지 고통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님의 보혈과 용서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는 구원의 사건에 직접 영향을 준다, 따라서 그 구원의 직접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계획은 아주 치밀하고 깊다. 곧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계획 중 이 내적 치유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의 타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구속의 역사는 오랜 시간을 거쳐서 진행되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과정과 시간을 소요하며 진행시킬까? 왜 예수님과 성령님을 빨리 보내셔서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지 않으셨을까?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어떤 특성과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그 문제는 어떤 것일까? 물론 필연적인 문제가 많았겠지만 인간이 가진 내적 세계의 존재와 그 특수성도 그 중의 한 중요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생긴 내적인 아픔과 고통은 섧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수치심과 아픔 때문에 우리는 이를 본능적으로 감추며 살게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에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자신의 치부를 숨기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이러한 행동은 죄로 인해 생긴 아픈 마음을 숨기고 감추는 인간들의 본능적인 노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 속에 있는 열등감, 죄의식, 분노하는 마음, 사랑 받지 못해 굶주린 마음과 외로운 마음등은 얼마나 아프고 수치스러운 마음들인가? 조금이라도 이를 느끼면 우리는 고통에 빠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등하거나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려 하며 이것이 드러날까 봐 염려한다. 결국 정신장애란 이를 느끼며 드러내는 것이다. 불안과 좌절, 무력감, 공포, 두려움, 죄의식 등 이러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 고통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연약함과 고통을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우리처럼 덮어둘 수만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고으이와 사랑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이중적 모순을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하신 것처럼 이러한 인간의 죄에 대한 숨김과 하나님의 드러내셔서 치유하시는 방법을 동시에 계획하시고 이를 진행시키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이며 치유하시는 방법이었다.

 

B. 내적 치유에 있어서의 필요한 과정

 

1.문제(상한 마음의 상태)에 대한 인지

 

자신에게 정직해 지는 것이 회복의 첫 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는 한 방법이 기만을 배격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일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므로 우리는 그것을 희망으로 대치한다.

이런 각성은 회복의 과정의 모든 단계에 걸쳐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런 문제의 인지의 시작을 위하여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현실에 대한 과거의 이해나 신념체계를 또 사물들을 인식하던 옛 사고 방식을 뒤흔들어 놓을 어떤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내적인 상태는 깊이 은폐되어 있고 우리의 거짓되고 죄에 대한 숨기려는 본성은 그러한 문제의 인식을 회피할 가능성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문제의 인식에 대한 출발은 여러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버릇이나 참자아에 관하여 기록한 것들을 듣거나 읽는 동안 시작될 수도 있고, 고통에 병들고 지친 어느 순간에 시작될 수도 있고, 상담이나 치료를 통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에 지지하게 개입하는 동안 일어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서로를 돕는 그룹에 참여하는 동안 시작될 수도 있고 교육을 받는 경험 속에서나 책을 읽는 동안, 또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친구의 아야기를 듣는 동안 시작될 수도 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종종, 혼란, 두려움, 열정, 흥분, 슬픔, 분노가 시작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감정을 그끼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시기에 포기하려고 한다. 새로운 감정들이 두렵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 자아와 상호의존적 자아로 후퇴하는 것이 더 쉽고 편안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가진 여러 상한 마음의 원인들을 인지하는 것은 큰 은혜이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대개 유년시절의 혼란된 가정이 주었던 부정적 영향에 눈이 뜨이게 되면 흥분에 싸인다. 그들이 싸워오던 게 무엇이었던가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는 것은 큰 안도감을 가져온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과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며 자기 비탄에 빠지게 할 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를 잊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최악의 행동이다. 그것은 그로부터 모든 내적인 힘을 빼앗아가고 자살을 기도하게 하는 실패감과 강한 혐오감만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은 내적 치유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 유년기에 택했던 어떠한 역을 해내고 있음을 명백히 볼 수 있다면 자신의 행동을 더욱 뚜렷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자신을 보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점에서 속사람의 문제를 발견하고 함께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후원자나 상담자 또는 치료자를 발견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치료 받는 사람은 보통 너무 연약하여 (종종 혼란, 두려움, 열광, 또는 회복에 대한 저항에 휩싸여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런 사람을 상담했거나 상담 받은 경험도 없는 후원자나 치료자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또한 자기의 요구가 적절히 채워지지 못 할 때, 최근에 겨우 깨달은 어떤 사람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속기 쉬운 사람"은 다시 마음의 상처를 받고 해결되지 못한 채로 과거의 상처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를 도와줄 상담자나 치료자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상담자의 자격으로 Adams는 세 가지의 상담자의 자격을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분별력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경적 지식(롬15:14)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그의 행동이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는 자로서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신적인 지혜(골3:16)를 가진 자야 한다.

셋째로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상담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관심(롬15:14)을 가진 자여야 한다. 이외에 더 첨가할 것이 있다고 Adams는 말한다.

더 첨가할 것은 상담자는 신앙과 소망의 사람이어야만 한다. 믿음의 사람인 상담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변화를 시켜줏? 것을 약속하신다. 신앙의 사람인 상담자는 또한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망이 없이 상담자는 소망과 격려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전달할 수 없다. 상담자는 성경이 진리이며 다른 사람에게 준비되고 약속된 길로 인도해 준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만 한다. 이것은 상담자의 오리엔테이션이 하나님의 해답을 지향하는 것이 되며 단순히 인간의 문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담자나 치료자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은 함께 문제를 고민하며 아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힘과 위로가 된다.

 

2. 상한 마음을 드러내기

 

문제에 대한 인지가 되었다면 이것에 대하 드러냄이 그 다음 단계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어벽을 구축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소모했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드러냄은 고립과 외로움을 벗어나는 회복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빛 가운데에서 행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빛 가운데의 삶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과 상한 심령의 문제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함, 행복 그리고 평안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것은 일종의 겸손한 경험이다. 우리가 완전히 정직해지도록 요청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다.

 

1)믿음으로 드러내기

내적 치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신자거나 불신자이거나를 떠나서 거의 언제나 회복과 치유의 영적인 차원에 대한 언급을 한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치유의 근본적인 의존을 확인 시켜주는 것이다.

앗시스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는 "주님,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평정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그것을 분별할 지혜를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두 종류의 문제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부모의 거부, 학대, 무시, 음주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들이다. 우리의 단 한가지의 방책은 하나님의 힘으로 그것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실 능력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매순간의 경험이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비할 수 없는 "믿는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그의 힘의 강력을 역사하심을 따라.......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엡1:19-20)라고 그 능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에 만 우리에게 역사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매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자유가 있다. 결국 내적인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이 용기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럴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있다.

 

이것은 또한 구체적으로 두 가지 역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는 십자가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요

둘째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첫째로, 십자가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내적인 상처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죄가 온 인류에게 가져온 모든 해악들-죄책감뿐만 아니라 슬픔, 고통, 질병, 절망, 두려움, 소외 등 이 모든 것을 다 처리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슴속에서 고통하는 상처의 깊이를 다 헤아리신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을 때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가장 잔인하게죽이는 처형술에 따라 죽으셨다. 정서적으로 심판을 당하신 것이다. 실제로 성경기자는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그 수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53장 3-4절)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상처와 배척을 당하셨다. 자기 백성?르 찾아 가끼시던 성읍에 오셨건만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시편 22편으로 자신을 말씀하셨다. 시편 22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히브리어 원어로 " 다 이루었다" 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극에 다다랐을 때에 자기 아버지께서 자기를 뜻대로 외면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애환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그 분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온전히 나음을 입는다.

 

둘째로,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르 완전히 신뢰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Adams는 상담에 있어서의 주역을 성령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파라클레이토스를 옹호자, 혹은 상담자, 돕는 자로 번역한 것은 매우 타당한일이다. 예수님은 이 상담자를 성령과 진리의 영으로 동일시 하였다.

로마서 8장 15절에는 성령을 일컬어 양자의 영이라 말씀한다. 이 말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양자가 아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양자는 어떤 아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이끄는 성숙의 영이라는 말이다.(엡4:15) 성령께서는 이와같은 성숙의 사역으로서 깨어진 심령을 다시 온전케하시는 기름부음의 일을 하신다. 특별히 성령의 사역을 묘사하는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26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파라클레이토스라는 이름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치유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처 입은 감정으로 가까이 접근하셔야만 한다. 다시 말하며 우리가 성령의 역사 안으로 우리의 상처난 부분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2)드러냄에 있어서의 문제점과 장애

우리의 신상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상한 마음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데에 효과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서로 돕는 그룹(자조그룹), 그룹치료와 개인적인 심리치료, 그리고 상담에 있어서의 회복의 기초가 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종종 나타나는 타인에 관한 험담이나 우리의 고통 속에서 뒹구는 것들은 대개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산물이며 문제점이다. 여기서의 험담은 자신을 노출시키기보다는 타인을 공격하는 경향으로 보이고 그것은 대개 불완전하며, 동시에 자신을 피해자의 입장에 둔다. 고통 속에서 뒹군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건전하게 슬퍼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간직하는 대신 고통을 계속 끊임없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자조그룹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이 분명하지만 즉각적인 해결책이 없는 고통스런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자기 연민"이라거나 "동정심의 잔치"니 하는 말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그룹이 참으로 안전하고 지지적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게 되는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고통과 상실을 직면하여 다루기로 결단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나누고, 노출하고, 참여하고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에게 고통스럽기는 하나, 결국은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게 된다. 그 고통으로부터도 자유케 된다. 우리의 속사람은 치료되고 우리는 성숙하게 된다.

 

또한 부모를 보호하려는 요구는 과거를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에 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성적 학대를 받앗던 한 여성은 가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밝힌 가운데서 뒤섞인 감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나는 그 이야기를 하기가 대단히 두렵다. 요즈음 나와 부모와의 관계는 아주 좋으며 어느 날, 언젠가 그들이 그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 두렵다. 지금도 나는 그들을 보호하기를 원한다." 그녀는 수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가증스러운 성행위를 자신에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느낀다.

이런 행동은 십계명의 4계명, 곧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라는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이 성구에서 "공경하라"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쉽지 않다.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성구를 "말대꾸하지 말라" 또는 이와 비슷하게 어린이를 억압하는 뜻을 ㅗ해서해 왔다. 우리가 상처를 드러내기를 방해하는 장애인 부모를 보호하려는 방식은 자신이 그들에 의해서 거부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내가 만일 나의 격노를 표현하면,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또는 "그들은 다시 나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할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인식하고 표현할 필요가 있는 두려움이다.

 

3)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냄

자신의 아픈 상처를 인지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객관적인 상처에 대한 인지와 또한 인간의 잠재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죄와 아픈 마음을 더 이상 의식의 세계에 머물지 못하게 잊어버리는 망각과 무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과거의 것이라도 꼭 필요한 것은 기억을 통해서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때의 고통스러운 감정은 방어기제(defence mdchanism)를 통해서 객관적인 과거 사실만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마음의 원리이다.

 

누군가가 무의식이란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재빨리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훈련에 더 큰 경향을 받았다고 가정을 꺼내곤 한다. 그것은 무의식의 세력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최초로 체계화하고 강조한 사람이 프로이도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신학적이기보다는 정신치료학적 개념으로 간주 해 왔다. 그 결과 교회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분명히 의식하는 바만 행하면 된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의식의 개념을 부활시키려는 운동이 점점 커지고 있다. Lawrence Crabb의 견해로는 무의식이한 그리스도인의 신학 속으로 침투해 온 세속적인 프로이드식의 한 파생물도 아니고 나를 신적인 존재가 되게 해 주는 엄청나지만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어떤 자원도 아니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내재된 무의식의 요소들에 대한 그의 이해의 뿌리는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만물 중 그 어떤 것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것하고 있다. 빙산의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수면 윗 부분은 의식 세계의 행동과 신념과 감정을 말한다. 수면 아랫부분은 자신이 선택했으면서도 분명히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이미지와 신념들의 세계이다.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개념들을 근거로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우리는 수면 아래의 문제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문제들은 대개 규명되지 않은 채로 있지만 우리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심성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며 사람들이 그런 숨겨진 부분들(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부분)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 법을 터득하야만 한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무의식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수면 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몽땅 하나로 묶어서 성령께 해결해 달라고 내려놓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혼돈과 무력함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는 책임과 새로 의존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기존의 방어적 이미지와 신념들을 능동적으로 내어버리는 책임을 회피하는 처사이다.

 

무의식은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부패한 마음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이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내가 진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바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를 파멸시켜 버릴 것만 같은 관계의 속의 고통을 느끼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고통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전략들에 우리는 반드시 직면해야만 한다. 고통이 우리를 주님께로 데려다 줄 수 있다. 잘못된 전략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회개하고,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고쳐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세계는 스스로 통제하겠다는 입장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 자신의 절망스러운 고통을 받아들이거나 죄된 전략들을 회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아주기까지는 아무도 자기를 정확히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과연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기 노출을 돕기 위하여 세가지 도구를 사용한다고 로랜스크랩은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히4:12-13)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시139:23-24)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사람들(히13:13)이라고 한다.

 

회복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심지어는 버림받았을 때 느꼈던 공포와 같은 깊은 경험들까지도 나누기 시작해야한다. 이러한 드러냄은 성경의 조명아래 있어야 하며 성령의 인도를 위해 기도해야한다. 또한 안전하고 용납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감정, 관심, 혼란과 갈등을 나눌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도 유익을 얻게 되지만 가장 큰 유익과 치료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는 자기 스스로 아야기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정확히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극복하기를 원하는 어떤 관심사, 문제를 안전한 사람이나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부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한다. 자신의 깊은 속에 있는 심장, 뼈, 오장육부, 곧 우리의 참자아로부터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자신 속에 있는 진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치유 받는 것이다 .이런 회복의 단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나 감정이 나타날 때 내적인 상처가 깊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제와는 다른 모양이나 가면을 가장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치료과정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 중 하나는 문제가 나타날 때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안전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들을 드러내고 정확히 진단할 수 있게 하는 이점이 있다.

 

3. 용서를 통한 치유

드러난 감정의 문제나 아픔의 일들은 이제 새롭게 처리되어져야 한다. 무작정의 감정 분출은 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아무런 유익이 없다. 드러난 감정은 이제 하나님의 용서라는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회복의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를 통하여 놀라운 은혜의 세계, 풍요로운 세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늘의 모든 기업과 하늘의 능력과 모든 권세를 예수님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가로막고 있다. 바로 이것을 푸는 열쇠가 용서라는 것이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놀라운 것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진정한 자유와 회복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이다.

성처로 인한 분개했던 일은 고백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를 공격했던 자들은 조건 없이 용서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해방의 시초요, 새로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20장 23절 말씀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며 사하여 질 것이요 뉘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은 아니지만 다른사람을 용서하며 그대로 용서된다는 내용이다. 또 이것과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 16장 19절에 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너희에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도 보면 내가 땅에서 무엇을 하면 하늘에서도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 마태복음 18장18절 말씀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 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비슷한 말씀이 있다. 용서와 관계해서 하늘의 열쇠라는 것은 특징적인 하나의 표현이다. 나의 용서와 관계되는 용서가 하늘의 열쇠라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므로 다른 이들을 기꺼이 용서한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아주 지독한 잘못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잔혹한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후 유럽과 미국을 다니며 용서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르위스 슴데스는 그녀가 뮌헨에서는 설교 후 취한 행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설교를 마쳤을 때 한 남자가 손을 뻗치고 그녀에게 왔다. "네, 아가씨. 방금 당신이 말했듯 예수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SS친위대의 일원으로서 교활하고 호색적이며 조롱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양옆에서 얼어붙었다. 그녀는 용서할 수 없었다. 모두들 용서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 실제 육신을 가지고 서 있는 친위대원을 대했을 때 그녀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신에게 부끄러워지고 두려워진 그녀는 기도하였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저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할 때 그녀는 용서하는 자로서 알려진 자신의 형편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용서받았으며 포용되엇음을 느꼈다. 그녀의 손은 순간 풀렸다. 증오의 얼음이 녹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그녀는 용서받음을 느꼈을 때 용서하였다. 따라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하고, 그 용서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용서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의 부모가 병이 있거나 선한 의도를 가졌다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기심과 죄악에 대해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용서한다. 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용서라는 단계를 거친 후일지라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투사하는 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투쟁해야 할지도 모들겠다. 어쩌다가 우리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우리들의 지상의 권위의 인물들의 왜곡된 상을 통해서 보려는 강한 경향을 갖기도 한다.총명과 지혜를 위해 이 '권위의 인물'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친절한 상을 반영시켜 우리가 누구라는 사실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한 실존의 하나님이시라는 그 실조 자체를 사실대로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분을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며, 그 사랑이 넘치게 될 때 그분을 닮아가기 시작하게 되어 있다. 이같은 단계별 해방은 우리들이 조건없이 용서하거나 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게 될 때 용서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찾아들게 되어 있다.

 

4.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음

충만한 사람의 모든 것을 충분히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게 하는 분위기들 때문에 그들은 치유를 위해 간구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것 같고. 고통을 덜기 위해 간구하려고 하면 그것을 비겁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만을 이러한 사람들이 의사를 찾아가는 경우, 그들은 이러한 변명을 해야한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두려운 마음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치유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다소 이방적인 하나님의 개념인 징계를 위해 또는 속죄를 위해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바꾸어 놓은 데 잇다 .그러므로 치유는 복음적 메시지의 필수적인 분이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으로 이끌어 준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믿는다면, 치유가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의 표시로서 일상적인 것이라고 믿어져야 한다. 치유에 대한 다른 어떤 태도까지도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복음의 내용을 강탈하는 것이 된다. 한 사람들의 완전한 위로와 도움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시편의 기자는 121편에서 여호와가 도움되신다고 고백한다. 자라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보호를 받지 못했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결손된 부분을 온전히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라고 다윗은 말하면서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고 하였다. 인간적인 부성애에 대한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욕구를 충분히 채우신다. 아무리 세상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훌륭하시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이며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치유의 마지막 단계로서 새로운 회복을 위한 출발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회복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이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로부터 새로운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한 상태에서 우리는 다시금 찾아올 여러 가지 불의한 환경들에 대한 상처나 아픔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5. 치유이후의 삶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는 단지 일시적인 개선이나 증상에 대한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상상태로 말씀하시는 온전함 혹은 건강함에 이르는 몸과 영혼의 완전한 치료이며 회복이다.

우리가 치유나 마귀로부터 해방된 다음부터는 어느 기간 동안은 과거에 있었던 두려움, 증상, 의심 등의 유혹을 막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상되기 쉽다.

따라서 두 가지 요인이 필요하다. 첫째는 치유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께 순종하느 것이다. 치유와 순종은 언제나 연계되어 있다. 둘째는 매일 하나님께, 사단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으며 치유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증상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백이 없이는 하나님이 약속은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치유를 상실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짐짓 알고도 계속 죄 가운데 있을 때, 불신앙과 부정적인 사고에 노출되었을 때, 때 이른 간증을 할 때, 사단이 주는 거짓 증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건강한 법칙을 무시했을 때 등이 있겠다.

치유를 받는 데 있어서 그 열쇠가 되는 것은 질병에 고착되었던 내적인 마음을 건강한 상태로 전향시키며, 치유를 견지해 나가기 위해 치유의 근거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며, 또 감사하느 마음의 상태를 지니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치유를 볼 때 치유자이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는 수단으로 여겨야 하며, 회복된 건강을 보살펴야 한다. 모든 잘못된 태도나 습성 따위를 제거해야 하고 회복된 우리의 삶을 성령께 맡겨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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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내적 치유의 목회적 적용

 

앞에서 살펴본 내적 치유의 여러 방면의 증상과 원인들과 해결 방법들을 설명했지만 이것을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할 것인가는 함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들어내면서 아픔을 호소하지만 목회자들의 인식부족과 전문성의 결여, 또한 이런 사역은 장기간의 시간을 요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치유 사역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이러한 사역을 전문적으로취급하는 기관들의 사역을 통해서 목회현장의 적용점들을 찾을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이러한 내적 치유의 사역을 하는 곳은 YWAM(예수전도단)의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있다. 이 학교에서는 약3-4주간의 기간을 통해서 강의를 하고 5-7명 정도의 소그룸 모임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나누며 개인적인 시간을 갖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면 전체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성령께서 치유하시는 시간을 갖는다. 이 훈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인 내적 치유의 경험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두란노 서원에서 주관하는 연세대 이성훈 박사의 12주간 치유세미나등과 같이 강의와 소그룹을 통하여 나눔의 사간과 기도의 시간을 통해 치유사역을 행하고 있다. 또한 외국의 경우는 알콜중독자 치료를 위한 익명 그룹(Alcoholics Anonymous)이라는 알콜중독 회복프로그램을 담은 12단계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여기에다 기독교적인 기초를 가미하여 성경적인 12단계의 회복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이 단계는 AA 그룹의 12단계에 성경 말씀을 통합시켜 정서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장까지 이룰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은 단지 알콜중독자뿐만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통된 사역의 방향은 모두가 내적 치유에 대한 강의와 소그룹의 모임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회 현장에서도 이러한 특별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년간 목회계획 중에 이러한 치유세미나를 위한 특별한 기간과 장소와 사람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일정한 프로그램이 계획되면 제한 된 사람과 공간을 확보하고 그 그룹이 자연스럽게 열려진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환경들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떠한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며 상담할 만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같은 교회란 울타리 속에서 서로가 잘 아는 관계일 때에 오는 어려움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치유사역이 주는 영적인 힘과 능력은 목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신앙의 성숙이란 곧 내적인 성숙을 말하는 것임으로 내적인 상함의 원인을 제공하고 치유하는것은 성경적이며 근본적인 사람의 변화의 시작이 된다. 이러한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의지이며 내적 치유 사역에 대한 끊임없는 목회자의 관심이다. 한번의 세미나나 강의로 끝낼 수 없는 것임으로 지속적인 내적 치유의 사역은 결국 목회자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내적 치유의 목회현장 적용점은 바로 목회자 자신의 끊임없는 성찰과 성도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상담하며 그들을 위해서 프로그램들을 계획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날마다 상한 마음을 회복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할 수 있겠다.

 

D. 내적 치유의 한계

 

내적 치유한 말은 오래 전부터 아마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에서 신유가 강조되면서 치유가 외적 신체질환만이 아니라 내면의 모든 문제도 치유할 수 있다는 데서 시작된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성령을 깊이 체험하면 마음의 아픔과 상처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다. 분위기와 감정적 도취로 생기는 표면적 감정 변화를 치유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내적 치유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변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성격이 더 굳어져 버리는 부작용으로 인해 은사 중심의 내적 치유는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했다. 내적 세계를 외적 신체와 동일 한 치유의 대상으로 접근함으로 치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등의 학문은 기독교적인 사상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적인 방법으로서 해결이 되지 않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 문제와 가정 내의 갈등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70년대에 들어서 교회도 이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와 한계가 있다. 그것은 심리학과 성경의 근본적인 배경에서 오는 한계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연구하자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인간의 심성에 대한 전문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성경적 내적 치유는 다른 내적인 치유의 방법보다 성경적 내용에 더 철저히 근거한다. 그렇다고 성경적 내적 치유가 모든 내면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만능적 치유는 결코 아니다. 본질적인 치유일수록 많은 어려움이 있다. 수술적 치유는 가장 원인적인 치료가 되지만 많은 후유증과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치료법은 아니다. 따라서 성경적 내적 치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치유 방법은 아니다. 심한 환자나 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신앙적인 경험이 깊지 않은 자에게는 결코 쉬운 치료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문제가 더 드러나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증상이 더 악화될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내적 치유는 어느 정도 인격적 성숙과 신앙적인 체험과 갈등을 경험한 사람에게 가장 효과적이다. 그렇지못한 사람에게는 아주 개인적인 지지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시행되어야 하는 치료 방법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Ⅵ. 결 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 본성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이 세상의 타락은 또한 인간에게 까지 심한 타력을 주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힘겨운 생존의 움직임이 되었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이란 곧 고통의 불가피성을 뜻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든 사람들은 내적인 상처를 입었으며 내적인 치유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본 소고에서 인생이 여러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삶과 그것에서 기인된 아픔들을 소개하고 여러 가지 상한마음의 원인들과 증상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들을 언급하였다. 유년 시절의 문제가 아직까지 영향을 주어서 내적인 자유함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이 있어서 내적인 자유함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그들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두려움과 슬픔, 우울증,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내적인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고 하나님의 치유의 도우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상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서는 이일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좋은 상담자나 공동체가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이들을 받아주며 인정해 주며 함께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은 바람직한 치유의 방법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와 관계된 많은 불신과 미움의 고리들을 끊고 용서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치유의 모델을 삼을 수 있겠다. 모든 인생의 질고를 지시고 가신 예수님의 삶은 내적인 아픔의 연속이었다. 예수님의 삶은 경건하고 거룩했지만 깊은 내적인 고통의 감정을 경험하셔야 했다. 그것은 인생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븐의 태어나심에서부터 예수님은 거절감을 받았다. 헤롯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다. 가난한 삶과 이웃들의 비웃음속에서 자란 예수님의 인생은 이사야(사53:1-6)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많은 내적인 열등감과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의 공생애에서도 그는 많은 내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렇게 환호하며 따라다니던 무리들의 경멸과 조롱으로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었고 그토록 사랑하셨던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고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로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