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
본문 : 롬 4:17-25
사람은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로, 혹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들림 받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함께 갑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기적을 보여주시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믿음의 사람이란 이성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영적인 믿음, 하나님의 믿음, 복음적인 믿음, 말씀을 통해 만들어지는 믿음, 성령의 능력으로 부어지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성의 믿음은 인간이 가진 태생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1)부모로부터 유전됨으로, 2)경험을 통해서, 3)교육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이성의 믿음과 영적인 믿음은 비슷해서 언 듯 보면 구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동일할지라도 이성의 믿음과 영적인 믿음은 끝이 다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배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찬송합니다. 이 믿음은 이성의 믿음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응답이 없습니다. 반면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응답이 있습니다. 축복과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믿음과 영적인 믿음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믿음은 이성의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첫째로, 말씀을 들을 때 만들어집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둘째는, 성령의 은사적인 믿음을 받을 때 만들어집니다.
(고전 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만들어지며, 성령의 은사적인 믿음을 받을 때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받아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봉사할 때, 참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1.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며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롬 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르러서도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 바로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바라고 믿으며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절대 부정적인 결과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조건이나 환경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직 가능성 한 가지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의사가 사형선고를 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낫는다고 생각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믿음의 사람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 안에서 모든 해답과 희망을 찾기 때문입니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 불가능한 중에서 가능한 것을 눈으로 보고 믿는 사람입니다.
(창 13:14-15)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기 전, 먼저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땅과 자손의 약속을 받기 전에,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았고,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드넓은 대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눈이 있을 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각 차이에 대한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신발 회사에서 아프리카로 판매 사원을 보내어 그곳의 시장 조사를 명령했습니다. 먼저 파견된 판매 사원이 가보니 놀랍게도 그 부족 사람들은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는 즉시 본사로 연락했습니다.
“구두 판매 계획 취소 요망. 이 부족은 전혀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며 구두를 판매하는 상점도 전혀 없음.”
다음날 또 다른 판매 사원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곳의 형편을 살핀 후 깜짝 놀라 재빠르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습니다.
“구두 판매 계획 적극 추진 요망. 이 부족들은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며 구두 상점도 전혀 없음. 구두는 얼마든지 팔 수 있겠음.”
두 사람 모두 동일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시각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신발 회사는 이 두 번째 판매 사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곳에 신발 공장을 세워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의 사람은 가능한 상황에서도 불가능을 보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능을 봅니다.
요즘 초등학교에는 성적표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수우미양가가 써진 성적표를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우미양가라는 말이 참 새겨볼만한 표기법입니다. 첫 번째 수(秀)는 ‘빼어나다’라는 뜻으로, 뛰어나고 우수하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우(優)는 ‘넉넉하다’는 뜻으로, 이 역시 능력이 넘치고 우수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수나 우는 별 차이가 없이 뛰어나고 우수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미(美)는 ‘아름답다, 좋다’는 뜻으로, 이것도 역시 잘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양(良)은 ‘좋다, 어질다’는 뜻으로, 다섯 개의 등급 가운데 하위 등급인 이것마저도 잘했다,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보통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마지막 등급에 대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인 가(可)는 ‘가능하다, 옳다’는 뜻으로, 이 사람이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옛 선생님들의 성적 표기법은 어느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좋은 점을 보고 그 가능성을 이끌어내려는 평가방법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상황에서도 가능성을 볼 줄 아는 눈, 바로 여기에서 믿음이 태어나고 기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불가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을 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능을 찾아 볼 줄 아는 눈, 이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사람이 가진 특징입니다.
3. 바랄 수 없는 것을 된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롬 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된다고 생각하고, 가능성을 눈으로 볼 뿐 아니라,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될 수 있다고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과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믿음의 말이 선포되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상상이요, 꿈에 불과합니다. 꿈을 간직한 씨앗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말로 선포될 때, 그 씨앗은 이미 싹이 트고, 힘차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기적을 향해 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 조련사인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남의 목장을 전전하며 말을 조련해 주는 것이 직업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설계해 보라는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소년은 평소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다음에 자신은 1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목장주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적어 선생님에게 제출하였습니다.
다음날 선생님은 소년의 숙제에 빨갛게 X표를 치며 말했습니다.
“얘야. 이건 좀 허풍이 심하구나.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모아야 하는데, 네 형편에 그게 가능하겠니? 좀 더 현실적인 계획표를 작성해 오면 그때 다시 점수를 주겠다.”
그러자 소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럼 그냥 X표를 주세요. 저는 이 다음에 반드시 100만평의 목장을 가진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 꿈을 점수와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소년은 그의 꿈대로 100만평 목장의 주인이 되었고, 그 지역에서 저명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10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목장의 규모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장의 주인을 찾아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나를 기억하겠나? 30년 전 자네의 100만평 꿈에 X표를 했던 선생이라네. 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꿈에 X표를 한 꿈 도둑이네. 그런데 자네만이 나에게 꿈을 도둑맞지 않았구만.”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승리와 기적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하신 기적과 축복을 도둑맞지 않는 방법은 바로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대로 말합니다. 절대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나는 잘 된다고 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바랄 수 없는 것을 이루어진다고 믿고 꿈꾸는 사람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3월 8일, 그 유명한 워싱턴 대선 때 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은 변함없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4남매가, 피부 색깔이 아니라, 인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남쪽 앨라바마 주에서도 검고 흰 아이들의 손이 정답게 뭉쳐질 것입니다.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 가득한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꿈꾸는 자만이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일찍이 이러한 꿈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말세에는 꿈을 가진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꿈은 세상의 헛된 망상이나 허상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꿈을 가진 자는 언제나 도전합니다. 꿈을 꾸는 자는 언제나 역동적 삶을 삽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꿈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그를 만나 주시고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신앙 생활의 성공은 영적인 믿음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믿음을 받읍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은사적인 믿음을 받읍시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며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가능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된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이루어진다고 믿고 꿈을 꿉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말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큰 꿈을 이루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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