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의한 삶(10) 성령에 기름부음심
살전5:19
성령에 의한 삶이란?
1.성령께 민감해서 성령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그분의 인도를 따라서 사는 삶.
성령하나님이 하시는 핵심적인 일 중 하나가
하나님 자신, 목적, 길을 계시하심(구원, 성화, 예배, 회개, 하님의 뜻, 인도..)
하나님께서 게시하시는 것들 |
그 이유와 목적 |
하나님 자신 |
①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출19:4, 막3:14) ②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
하나님의 목적 |
우리로 그 일에 동참하도록 |
하나님의 길 혹은 방법 |
그 길로 행하도록 |
*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려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들을 계시하심으로 나는 그 분의 일을 한다.
* 하나님이 그 분의 길들을 보여주심으로 나는 그 분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성령에 의한 삶을 실제 살려면?
소극적인 측면에서 -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함.
1.성령님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성령님을 근심케 합니다.
2.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 뭐냐? 세상 사랑입니다
3.육체의 일이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1)유익한 것을 행하야야 한다.
2)덕을 세우는 것.
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4)아무에게도 제제를 받지 않아야 한다. -오락이 나를 콘토롤 한다면 오락의 제제를 받고 있음.
어떻게 세상 사랑을 이길 수 있는가?
1)십자가를 통해 우리 옛 사람이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인식(갈5;24)
2)죽은 것으로 간주하라 - 손해로 떨어버리라(빌3 -바울이 모든 것을 해로 여김)
3)주님의 일에 힘쓰는 것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함.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때,
주님께 초점을 맞출 때 세상 사랑을 이길 수 있음
4.다양한 죄들이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1)도덕적 죄 - 술 취함, 간음, 방탕, 음란, 살인, 거짓말
2)관계의 죄 - 이것은 죄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
-미워하는 마음, 용서치 않은 마음, 상대에 대한 원망과 불평, 판단과 후욕, 서운한 마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①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비유)
②상대방을 용서하거나 회개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잘 못했을 때는 용서, 내가 상대방을 오해 ->회개
③상대방을 축복해야 합니다. 용서는 의지요, 결단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래도 감정 남아 있음, 따라서 마음껏 집중적으로
축복해야합니다.
④상대방에 대하여 최대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⑤상대방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상대방에 대해서도
3)불순종의 죄
적극적인 측면에서 - 성령님을 환영, 주도권을 드려야함
①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하는 자가 듣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심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마음(성령님을 의식하는 삶)
②순종하려는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인도하심의 각 부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 구체적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해야합니다.
③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2.두 번째 성령에 의한 삶이란? 성령의 기름부으심(능력을 부으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부음으로 사역을 감당해야하는 부분. 성령의 기름부음과 관련.
스가랴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에 의한 삶의 하나가 성령님의 인도라면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임 - 성령의 기름부음
①예수님의 사역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시므온 - 성령이 임하여서 예언함.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은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곧 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을 때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또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돌아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누가복음의 강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 공생애의 첫 번째 사건을 보아도 누가복음이 얼마나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사건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첫 번째 사건은 아닙니다. 누가복음도 그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4:15).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맨 처음에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복음은 이 구절을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하나의 패러다임(paradigm)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야말로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약해 놓은 것과 같으며, 우리에게 여기에 제시된 패러다임 혹은 모델을 통해서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해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16-21)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해 놓은 것과 같은 이 부분에서, 그리고 앞으로 행해질 예수님의 사역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패러다임과 같은 이 구절에서 누가복음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우선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의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사역의 성격이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것임을 역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되,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을 쓴 저자가 기록한 사도행전도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역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
제자들의 파송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보내시며. . . 제자들이 나가 각촌에 두루 행하여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 9:1-2, 6).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내용 -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47-49).
②사도들의 사역
행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성령의 기름 부름은 전도 치유, 상담, 가르침을 위해서도 필수임.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의지 하지 않고 자기가 감동을 주려고 함.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나타난 것 - 은사, 기름 부으심으로서의 은사
은사를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나타남으로 이해하는 견해
소유 개념으로서의 은사.
이 개념에서는 은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이해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2:12-13 참조). 그래서 이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각 성도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 전체를 위해 감당해야 할 한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곧 성령께서 주신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2:27-30을 이에 대한 좋은 성경적인 예로 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각 성도에게 하나씩 몸의 지체로서 각각의 직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에 따르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1. 각 성도에게는 그들이 거듭날 때 하나의 은사가 내재적으로(innately) 주어진다.
이 경우, 은사는 각 성도에게 소유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에게는 하나 이상의 은사가 주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많아야 두 개 내지는 세 개로서 제한된 숫자의 은사만이 주어집니다.
2. 이 은사들은 발견되고 개발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자주 “은사 배치도” 혹은 “은사 개발”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 말들이 바로 이 견해를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각자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여 개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의 발견은 개인적인 경험, 예언, 시험 등을 통해서 될 수 있고, 개발은 보통 적절한 훈련코스를 통해서 되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3. 각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로 만족해야 한다.
이미 각자에게는 은사가 주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은사를 달라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는 구절을 각 성도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보다는 더 큰 은사를 가진 지체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교회에 주어진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1. 어떠한 은사도 우리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다.
이 견해가 맞는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였으면, 그 은사를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은사도 우리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치유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치유할 수 없습니다. 치유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움직이셔야 가능합니다.
2. 이 견해로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9에서 “다 선지지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답변은 “아니다” 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에서 우리에게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도 바울은 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답변은 ‘아니다’ 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방언하는 자는 모두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는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 12:30)라고 말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고전 14:5). 그리고 고린도전서 14:31을 자세히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예언할 수 있는 것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는 다...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볼 때, 소유의 개념으로는 이 구절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각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은사에 대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
이 견해에 따르면, 성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이든지 감사하게 여기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에 대한 그러한 수동적인 자세는 성경이 취하고 있는 자세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데서도 은사에 대한 그러한 수동적이거나 운명적인 자세를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2:31; 14:1, 12).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집합적으로 교회를 향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성도를 향해 하고 있습니다. 방언(고전 14:5, 13)이나 예언(고전 14:1, 31, 39)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보면, 이것들이 개별적인 성도들을 향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으로서의 은사.
저는 위의 문제들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보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2:7은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나았으면 지금 나에게 치유의 은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 사람을 위해 예언이 주어졌으면, 예언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남”이란 단어는 영어로 ‘manifestation’인데, 영어의 ‘manifestation’이란 단어는 `춤추는 손'이라는 뜻을 가진 두 개의 라틴어 단어가 합해져서 생긴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마치 성령의 춤추는 손과 같습니다. 즉, 오케스트라에서 각종 다양한 악기들이 지휘자의 손에 의해 소리를 내듯이, 성령의 지휘에 따라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를 배경으로 쓰여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1-14장에 보면, “모일 때에”나 “교회에서”나 이와 같은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고전 11:4-5, 17, 18, 33, 12:28, 14:19, 23, 26 참조). 그래서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 성령의 지휘를 따라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이렇게 성령의 지휘아래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예배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님의 지휘아래 이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지기도 하며, 저 사람에게 방언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통역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찬양도 그리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1. 모든 성도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소유의 개념으로 성령의 은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은사는 가지고 있는 반면 그 나머지 은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나타나심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그 분이 택하시는 대로 각 성도를 통해서 각종 다양한 은사들을 그때 그때 나타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의 두 구절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그분의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물론 언제, 누구를 통해, 어떤 은사를 나타내실 것인지는 전적으로 성령님이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특히 예배로 모일 때, 성령께서 우리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세워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팀 사역을 하다보면, 이 부분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을 통해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한 사람을 통해 예언을 주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 지식의 말씀을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치유를 행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예언, 지식의 말씀 그리고 치유의 전문가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다른 때에는 동일한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그들을 통해서 전혀 역사하시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저는 오직 성령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선명하게 봅니다. 이 모든 역사들은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 분의 주권대로 그 때 그 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사람을 통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적극적 측면에서 - 기도
누가복음은 성령의 능력과 관련하여 기도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에는 어느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기도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눅 3:21-22, 4:1-2, 4:42, 5:16, 6:12, 9:18, 9:28-29, 11:1, 22:39-45 참조).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새벽기도를 하셨고, 철야기도는 물론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금식기도와 기타 여러 가지 형태로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5:15-16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 얼마나 의아한 모습입니까? 사람들이 전국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온 것도 아니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모여 들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말씀도 듣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도 경험하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남겨두고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날로 빗대어 말하면,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 왔는데, 강사가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가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말 성경에는 그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만, 개혁성경이나 NIV성경과 같은 영어성경에는 모두 그러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 기도를 중요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모든 것의 핵심이며, 또 모든 사역이 그것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를 강조하면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과의 관계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몇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3:21-22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기도와 성령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기록함으로써, 역시 기도와 성령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또한 누가복음 1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 앞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는 강청하는 기도(5-8절), 기도 응답에 대한 반복적인 약속(9-10절) 모두 성령을 구하는 기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그만큼 기도와 성령의 관계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다고 기록하는 등 예수님의 기도의 뒤를 따라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난 것을 기록함으로써 기도와 성령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었던 것과 또 그것이 기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들도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셨다면,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그렇게 직접 훈련시키신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입으라고 명령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오순절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우리 속에 와 계시기 때문에 이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이 오순절 이후에 태동한 교회를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 속에 성령님이 와 계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로 그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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