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의한 삶(9) 성령에 의한 삶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삼상3:1-14
신약은 성령시대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3가지를 말씀하신다.
*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려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들을 계시하심으로 나는 그 분의 일을 한다.
* 하나님이 그 분의 길들을 보여주심으로 나는 그 분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오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종들에게 말씀해 오시는 등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랑크 부크만 (Frank Buchm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종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가 가장 절실하게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듣는 자세입니다.
1.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하는 자가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하시는 도중 이런 말씀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여기서 귀 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당연히 육신적인 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야 더 정확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요한계시록에도 귀 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7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여기서도 귀 란 육신적인 귀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를 말합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택하고, 실제로 들을려고 애쓰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기록은 별로 없지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는 말씀이나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신 기록은 무려 17번이나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점을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조하셨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헌금에 대해서는 매우 강조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 교회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자세 혹은 듣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사모하고, 듣기를 택하고,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듣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세상에 소리를 듣기를 사모합니다.
지식의 소리,정치, 경제,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소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순간순간 성령님께 열려있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의 삶에서 순간순간 하나님의 성령께 열려져 있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성령께 묻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배소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가 바로 이러한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에베소서 6: 18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이렇게 성령께 항상 열려져 있는 자세를 가질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니까 두렵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을 하라고 하실까봐 겁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라고 하실까봐 음성을 안듣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까지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는 항상 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한 번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사모하는 자에게 들려옵니다.
2.순종하려는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무엘이 세 번이나 부르셨습니까? 말하면서 자기에게 오자 엘리는 깨닫습니다. 지금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때 엘리는 사무엘에게 다시 한 번 음성이 들리면 이렇게 답변하라고 지시합니다. 사무엘상 3:9 입니다.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에는 다른 기준이 없습니다. 얼굴이 잘생겼던, 못생겼던, 많이 배웠던, 적게 배웠던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앞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가르쳤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흔히 엘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만 엘리는 원래 이스라엘의 사사였으며, 분명 나라를 구했던 인물일 것입니다. 한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해서 하나님의 신임이 영원하리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 생각은 우리의 영적 분별력을 흐려놓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경을 오해하기에 가지는 생각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바로 이 자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종된 것을 인식하고 주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는 자세와 주인 되신 그분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이처럼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먼저 말씀해 보세요. 그럼 제가 잘 생각해보고 마음에 들면 순종할게요 라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결제권자인 자기에게 결제를 올리면, 자기가 잘 생각해보고 결제를 하겠다는 자세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 그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어차피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최종적인 결제권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순종과 관련해서 우리는 선지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예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루는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차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브라데 강가에 가서 그 띠를 바위틈에 숨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대로 했습니다. 예레미야 13:1-7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 여러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이나 예레미야 모두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과 순종을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존경을 받지도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전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주신 다음 차례차례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 하신 다음 선지자들이 순종하면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유브라데강에 가라고 하신 것은 대단한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브라데가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먼 거리에 있었는지 우리는 상상을 못합니다. 그러나 성지순례를 가보면 압니다. 그 먼 거리를 가라 오라 하신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아니, 하나님, 나하고 장난하는 겁니까? 숨기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다시 가서 파 보라니요. 유브라데가 옆 동네 강아지 이름입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순종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순종하자 그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부분이 배와 허리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썩어버린 베조각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취하여 하나님의 배와 허리에 띠는 띠로 삼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순종이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토기장이는 토기를 구울 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 때까지 토기를 깨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순종하였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약에서 우리는 빌립 집사를 만납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뒷받침되었습니다. 사마리와 빌립 집사에게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는 빌립 집사에게 사막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꽤 먼 거리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빌립 집사는 하나님의 음성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선교의 핵심 인물을 만납니다. 지금도 에디오피아에서는 많은 성경의 사본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에디오피아에 기독교가 성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뒷받침되었던 것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을 신뢰함입니다.
나는 예레미야의 경우나 빌립집사의 경우같은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아마 나였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유브라데 강에 가서 이 띠를 숨기라니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시나요?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유브라데 강은 가까운 길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별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일을 위해 며칠을 걸어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스토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며칠을 걸어서 갖다 왔을 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가서 그것을 다시 꺼내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 이제 방금 도착했는데 그것을 다시 꺼내 오라니요! 다시 꺼내오게 하시려면 무엇 때문에 갖다 묻으라고 하셨습니까? 그것도 그 먼 길에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소리 않고 다시 가서 그것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그 띠는 베로된 띠였기 때문에, 벌써 썩어서 조각조각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예레미야 13:8-11입니다.
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⑨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⑩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없음 같이 되리라 ⑪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원치도 않는 어떤 일을 시킬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집을 팔아서 헌금하라고 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는데서 나오는 자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항상 최선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길은 항상 옳은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든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열망하고 또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으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두번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복해서 불순종할 때, 다시는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말씀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요즈음에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면, 혹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없나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돌이켜 순종하겠사오니 불순종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럼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셨으면 순종하십시오.
3.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부부끼리 전화통화하면 보통 아, 당신이야,응, 나야 하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아마 누구세요?,잘 모르겠는데요 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자기야, 사랑해 하며 친밀함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부부끼리 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게 될까요? 이유는 서로를 아니까 그렇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방이 누군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신앙의 연조를 따지기도 합니다. 아이고, 난 아직 초신자인데 어떻게 감히 음성을 들을 수 있어? 말도 안돼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어떤 이는 기도를 몇 년 동안 많이 해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이, 하나님의 음성은 오래 믿은 자들이나 듣는거지 나같은 사람은 아직 멀었어. 기도도 많이 못하는데 ? 이 자세도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는 자세를 버리십시오.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헌신하거나 뭘 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들리겠지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그분과의 개인적이고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는 기도 즉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오직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 행할 때에 하나님을 더욱 더 알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 그 분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필요만 채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모르면 그 음성을 더 듣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그리고 반면에 하나님의 손을 구할 때, 우리는 아무리 많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에 이르지 못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차이점을 아십시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모세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만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미혹되어, 하나님을 근심케하고 시험하다가, 급기야 광야에서 흩어짐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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