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9 상한 심령의 치유 ①
상하고 병든 영혼으로부터 자유 하는 길
이사야 61장 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
구원은 상한마음, 포로 된 마음, 갇힌 마음으로부터의 대탈출 작전입니다.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죄로 인해 상해있고, 포로가 되어있고,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자에 의해 포로의 사슬을 끊어 갇힌 자를 탈출시키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이 과정이 출애굽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 때의 바로 왕을 아시지요?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계속 자기의 노예로 부려먹고 싶어 그들을 보내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출애굽의 과정처럼 어려운 과정입니다. 상한 것을 치유해야 하고, 포로된 것을 끊어야 하고, 갇힌 것은 자유케 해야 합니다. 대탈출작전이지요. 굉장한 고통과 아픔 그리고 결단이 있은 후에 출애굽 곧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모든 과정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상에서 깨어지고, 상하고, 버림받으시고, 포로 된 아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당하셨던 역사적 사실이 있기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무덤 안에서 꼼짝달싹 못하시며 갇히는 경험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통을 말없이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과정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 내셨습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원망하며 악을 썼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지요.
사실 말이지만 여러분은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배운 바 그대로입니다. 갇히는 것, 포로 되는 것, 버림받는 것입니다. 감옥이나 마약중독 등이 그런 종류입니다. 우리는 약을 복용하면서 이런 생각을 누구나 합니다. “내가 중독되면 안 되지.” 이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갇힌 마음을 갖고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를 조금이라도 구속하면 난리를 일으킵니다. 왜요? 이미 자기가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가 우리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갇혀있는 사람일수록 누가 자기를 구속하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법입니다. 흔히 자신을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자신 속에 갇힌 마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치유된 사람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자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자기를 가두어도 그냥 자유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그냥 자유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가둬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늘 구원의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고린도후서 4장 7절부터 10절을 읽어봅시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10)
바울이 자유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습니다.
여러분,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공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이후의 삶은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삶으로 변화합니다. 십자가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처방임을 발견한 자만이 주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주님만을 신뢰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을 뻔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죽었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살리셨던 것입니다. 죽었던 자는 스스로를 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이 진리를 선명히 본 자는 이후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만이 능력인 것을 알아 십자가를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동의하며 매순간 자기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머물게 됩니다. 승리의 길을 보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이 없음을 본 자만이 자기 지혜나 자기 힘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신뢰하는 일을 그만둡니다. 의미 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동의합니다.
자아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처리된 사실을 깨달을 때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그런데 자아는 얼마나 교묘한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한 번 보고나면 영원히 보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매순간마다 의지해야하는 십자가입니다. 한 번 보고 말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아는 한 번 십자가를 의지하면 영원히 십자가를 바라볼 것처럼 자만심을 갖게 합니다. 아무리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보았다면 이런 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이 이제는 무언가가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는 일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매순간 더욱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알았고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유 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깜깜할지라도 십자가를 생각하면 모든 혼돈은 끊어집니다. 내가 달려야할 자리에 주님이 대신 달려 있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어떤 혼돈이라도 끊어집니다. 도리어 아버지의 사랑이 그 가운데 나타나 감동의 물결을 더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기쁨과 안식과 승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열심히 그 일을 이루실 것이기에 확신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있던지 심지어 설교를 하는 도중에도 그분께만 붙어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분만이 나를 만질 수 있고 온전케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는 개념인 동시에 놓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즉, 자신이 하려는 생각, 자신의 의도, 자신의 방법, 자기 자원 등을 내려놓는 일이 믿음에 의한 삶에 포함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말이 바로 주님이 하시도록 내게서 내려놓는 일입니다. 맡기는 것과 보는 것은 연관이 있습니다. 맡기기 위해서는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보아야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나 혼돈이 있으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보지 못하니까 내려놓을 수도 없고 맡기지도 못합니다.
본다는 말은 성령의 조명으로 그분을 알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일은 주님의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만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되 십자가로 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선명히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산만함 가운데 머물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비쳐주시기를 사모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비쳐주시는 만큼 볼 수 있으니까요. 보는 훈련이 되어지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환경에서든지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환경이 힘들어도 그곳에는 진정한 평강이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과 자유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주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볼 때 주의할 점은 주님께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니만을 바라보려고만 하십시오. 주님이 약속하시거나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신뢰하십시오.
십자가를 이해하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와 성품이 십자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는 일은 십자가를 이해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처방은 십자가뿐이었습니다. 마치 불뱀에 물린 자들이 장대 끝에 매달린 놋뱀을 보아야만 치유를 받았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만이 유일한 처방임을 고백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믿음에 의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과 믿음에 의한 삶은 땔레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을 운운하지만 이론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를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나이아가라 폭포 바로 위에서 상류 쪽으로 노 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젓자니 힘이 들고 노를 놓자니 죽을 것 같고 그렇게 힘들어 하며 사는 것이 친밀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볼 때 노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주님이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롬 8:32입니다.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초점을 자신에게 맞추지 마십시오. 밥을 지으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항상 마음의 눈을 주님께 맞추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보기를 구하십시오. 그분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기를 구하십시오. 그곳에는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그곳에 놀라운 자유가 있습니다. 내적인 문제를 보지 않고 치유자인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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