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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29강 열등감과 죄의식 ③

by 은총가득 2010. 5. 12.

 

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29                                             열등감과 죄의식 ③

 


 열등감의 증상 No. 1


  첫째, 두려움과 불안, 타인을 향한 불신, 자기학대로 나타납니다.

  

  열등감은 자존감의 유무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열등감이 생기면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닌데도 근심하고 염려합니다. 수년 후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염려를 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에서도 이런 불안한 마음은 찾아옵니다. 방금 만난 사람에게서 앞으로 헤어질 일을 걱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헤어질 것이 두려워 지금의 만남을 즐기지 못합니다. 만남이 주는 즐거움은 잠간이며 상대방이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안절부절 합니다. 대개 이런 경우, 실제로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등감을 가진 개인은 결국 피해의식으로 물듭니다. 불신은 피해의식 속에서 싹트는 독버섯과도 같습니다. 남들이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지만 피해의식 때문에 사랑과 관심을 거부합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불평만 나열합니다. 원망스러운 생각만 듭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에게 짜증을 냅니다. 마침내 사람을 잃어버립니다.

 


  열등감이 심해지면 자기학대로 빠집니다. 자신은 열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어 버립니다. 자신은 열등하기에 남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자기는 홀로 있어야 마땅하며 버려져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무력한 존재라고 자기를 인식합니다. 대인관계를 하면서 상대방이 자기를 버리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부각시켜 상대방이 환멸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자기 스스로 사랑을 받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환경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나는 이런 환경가운데 살아야 하나?”, “하필이면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이 고생인가?”,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되는가?”,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실패만 하는 내가 미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안 될 일만 보이는 법입니다. 부정적인 것만 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몰랐는데 결혼 후 자신의 열등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사랑을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사랑을 받으려면 자기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심어야 하고 투자를 해야 합니다. 먼저 인정해 주어야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어야 할 것은 심지 않고 상대방에게 자꾸 요구만 나열합니다. 자꾸 확인하려만 듭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행동은 하지 않은 채 요구만 하는 자세, 잘못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예쁜 행동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나쁜 면만 상대방에게 보여줍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행동을 해도 당신은 나를 사랑해 주어야만 한다는 자세로 말입니다. 짜증을 달고 삽니다. 신경질을 밥 먹듯 냅니다. 여자의 경우 몸을 가꾸지 않습니다. 거친 행동을 합니다. 옷이 많이 있는데도 버림받은(?) 옷만 골라 입습니다. 가장 멋있는 옷은 교회 갈 때만 입습니다. 머리도 다듬지 않습니다. 파출부 아줌마인지 마누라인지 구별이 안갑니다. 열등감 때문에 안 가꾸는 사람,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 가꾸라고 하기 전에 화장품을 한번이라도 사줬어야 말이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면은 중요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영적인 것이 중요하지 머리, 옷이 뭐 중요하냐고?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이야! 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영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일수록 보이는 삶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전 지금 육적인 면을 잘 가꾸어 옷 잘 입고 몸매를 가다듬고 성형 수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인 깊이는 반드시 육적인 면으로 보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면의 믿음이 외적으로 순종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이는 이웃과의 관계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부터 17절입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5-17)

 


  보이는 아내에게, 보이는 남편에게 보이는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는 누구나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의 세계에서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인간관계가 정상적이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보이는 관계가 우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인 열매를 맺고 있는지 또는 영적으로 바로 서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보이는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보이는 세계는 굉장히 중요한 세계입니다. 영적으로 깊어갈수록 보이는 세계에서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유일한 해결책 삼는 훈련의 장으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남녀관계로 묘사하셨습니다. 주님을 신랑으로, 우리들을 신부로 묘사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님들도, 사모님들도, 목사님들도 치장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너무 가꾸어도 안 되지만 너무 헬렐레 풀고 다녀도 안 됩니다. 우리 사모님은 너무 풀고 다니셔!”, “아무개 집사님은 너무하시는 것 같아!”, “우리 목사님은 너무 영적이시라서 머리도 안 감으셔! 기도만 하시는가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어떤 부흥사가 한 말입니다. 남자들이여 아내에게 화장품을 사주시라, 야한 잠옷도 사주시라틀린 얘기임에는 맞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 있는 가치관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혹 사람들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너무 나누지 않았나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회복하는 정도는 아내와 남편과의 회복하는 정도와 비례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아내와 남편과도 가깝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토대하여 세워질 때 가장 먼저 부부관계를 다루십니다. 결국 부부관계가 서지 않으면 신앙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먼 사람은 아내나 남편, 가족, 이웃과 먼 법입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면 되지 꼭 표현해야 사랑인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중요한 만큼 장미꽃다발도 중요합니다.

                           

 

  오래 전에, 전 사모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십분의 일만 내게 하라. 그러면 내가 살겠노라.” 맞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끄럽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하는 십일조만 아내에게 한다면 목사님들 가정이 달라질 것입니다.

  

 

  둘째, 열등감은 욕심이나 개인적인 야망, 스스로 세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열등감이 커지면 사랑이 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기학대의 결과로 굶주림이 커집니다. 굶주림의 증상은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욕심은 강한 소유욕과 강한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소유욕이 강합니다.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할 때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서로가 받아주어야 할 때 받아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부부싸움이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깁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크게 싸우는 법입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신혼부부가 처음 싸울 때 많은 경우 치약을 어디서부터 짜는가를 가지고 다투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이혼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차피 맞지 않는 배우자와 살다 헤어지느니 미리 헤어지자는 논리로 말입니다. 서로가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 결론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 수 있는데 꼭 이렇게만 되어야 한다고 우겨대며 핏대를 올리면 싸움은 일어납니다. 집착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집착은 자존심의 옷을 입고 나타난 열등감이요 이기적인 욕심입니다. 서로가 인정받아야 할 때 인정받지 못한 결과입니다.

 


  3) 열등감은 완벽주의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허점이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열등감이 나타나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단점과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기를 씁니다. 허점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욕구가 작용을 한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허물이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완벽으로 자기를 꾸미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럴 경우, 대개 어릴 적 부모님들이 실수를 잘 감싸주지 않은 결과입니다.

 


  넷째, 열등감은 겸손과 희생하는 모습으로 잘 나타납니다.


  자기를 자책하고 자학하는 표현으로서의 겸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못난 놈이야”, “나는 자격이 없어”, “나는 항상 궂은 일만 해야 하고 희생만 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들 중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봉사를 잘 하다가 끝에 가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봉사 중에 누가 성령으로 봉사하고, 누가 열등감으로 봉사하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성령과 열등감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헌신된 성도가 봉사할 때 일부는 은사로, 일부는 자기학대로 봉사를 합니다. 이렇게 봉사하다가 자기의 희생에 대해 인정을 못 받았다든지 자기에게 돌아와야 할 칭찬이나 몫을 타인이 취했을 때 분노가 폭발합니다. 내가 이렇게 봉사하니까 너 까지 나를 무시하느냐?”, “나를 이렇게 따돌릴 수 있는 거야?”, “내가 너희들처럼 고상할 수 없는 줄 알아? 이게 다 주님을 위한 거라구, 알아들어?


  그러기에 교회가 행위로서의 봉사를 장려해서는 안 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교회가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좋을지 모르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폭발이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열등감으로 인한 마음을 먼저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봉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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