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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성탄, 그 위대한 복음

by 은총가득 2022. 12. 20.

 

 

 

 

성탄, 그 위대한 복음

 요한복음 3:16,17

   

 

 

함께 인사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성탄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왜 성탄절을 좋아하십니까?” 물었더니 세대마다 다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산타클로스 선물 때문에 좋아한답니다. 청소년들은 학교 안가니까 좋아 한답니다. 청년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 남자친구 만나니까 좋아한답니다. 직장인 직장 안가고 쉬니까 좋아한답니다. 어른들은 교회에서 떡국 먹으니까 좋아한답니다. 여러분은 왜 성탄절을 좋아합니까?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진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누구나 다 압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들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모든 성경의 요약이고 성탄절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요한복음 3:16 때문입니다. 왜 성탄절이 좋은 날입니까? 요한복음 3:16 때문입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16입니다.  이 말씀이 성탄을 맞은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네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메시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자를 사랑하사”했다면 가난한 사람은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국 사람을 사랑하사”했다면 한국 사람은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공한 사람만 사랑하사”했다면 실패한 사람은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만 사랑하사”했다면 죄인들은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죄인들입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야반도주한 사기꾼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압사람입니다. 다윗은 가정파괴범입니다. 솔로몬은 이방신을 섬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중 완전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난 시대적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디베료였고, 이스라엘의 왕은 헤롯이었고, 대제사장은 가야바와 안나스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칭 신이라고 하면서 모든 백성들은 자기를 신으로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헤롯 왕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당시 두 살 미만의 아이를 죽이는 등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고, 또 대형 토목공사를 빙자해서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고 유대 백성들을 강제노역을 시켰습니다. 가야바와 안나스는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 이었지만 그들은 아론의 혈통도 아닌 불법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가야바의 무덤은 우리나라 왕들의 무덤처럼 엄청난 금은보화가 묻혀 있는 화려한 무덤이었습니다. 당시의 부패하고, 죄악 된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이 태어날 때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보십시오.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밤중에 아기 예수를 찾아간 목자들, 그들은 밤늦게 까지 일하는 노가다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 그들은 나이 80살이 넘은 노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마리아는 나이 어린 처녀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세상에 살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죄짓고 사는 보통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모습대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킵니다. 로마서 5:8에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아직”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고 여전히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데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로마서 5:10에는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행위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은혜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부모들은 자식의 행위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한다고 사랑이 커지는 것도 아니요 못한다고 사랑이 작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있는 그대로 우리를 받아서 우리가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로 바꿔주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죄 많은 세상을 망하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에 세상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이 죄 많은 나를 참고 봐주셨기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독생자를 주셨으니”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사랑은 이제 부터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입니다. “주셨으니” 서양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 줄 수 있지만 주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성형외과 병원에 두 모녀가 들어왔습니다. 딸은 20대 후반으로 보이고 어머니는 중년이었습니다. 의사 앞에서 딸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어머니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제 딸이 곧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릴 때 사고로 손을 다쳤습니다. 다른 손가락은 수술이 잘되어서 괜찮은데 넷째 손가락인 약지만 없습니다. 결혼하면 반지를 끼워야 하는데 반지를 낄 손가락이 없어요. 선생님, 제 손가락을 딸에게 줄 수 없을까요?” 의사는 한참동안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딸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의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은 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제가 부목사로 사역했던 교회에 어느 여 집사님 얼굴이 갈수록 검어집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어디 안 좋으세요?” 그분이 어렵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간경화래요. 간을 이식 받는 수술을 빨리 받으래요. 그런데 수술비가 오천만원 든다내요” 그 분 남편은 사십대 후반의 공무원이었습니다. 며칠 후 남편이 찾아와 “제가 직장을 조금 일찍 퇴직하기로 했다.”고 말하기에 걱정이 되어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걱정하지 마세요. 몇 년 먼저 퇴직한 것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퇴직금으로 아내의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했다고 다 완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많은 치료비가 들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남편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아내를 치료했습니다. 아내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남편의 평생직장인데, 너무 미안해요.” 옆에 있는 남편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제게 직장보다 소중한 것은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이게 사랑 아닙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무엇을 못 주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가 머리로는 아는데, 도저히 줄 수 없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주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줄 수 없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 구원하기 위해 내 자식이 필요하니 내 자식의 목숨을 달라면 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저를 비롯한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 절대로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신없는 아버지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무 아들이나 준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합니다. “모노”는 “하나”라는 뜻이고, “게네스”는 “생명”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 여러 아들이 있는 데 그중에 하나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살리려고 준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준 것입니다. 이 “모노게네스”란 말은 성경에 세 번 쓰였습니다. 모리아산에 바쳐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죽은 과부의 독자가 “모노게네스”입니다. “모노게네스”, 독생자, 그 아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이제 세 번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 아들과 맺어야 할 관계는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가지, “믿음”만 요구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헌금 많이 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했다면 돈 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갈 뻔 했습니다. “누구든지 금식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했다면 한 끼도 못 굶는 사람은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누구든지 구제를 많이 행한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했다면 평생 구제 한 푼 못하고 자신만 위해 산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든지 믿는 자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믿음은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루한 광야생활에 지겨움을 느끼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데 그들을 뱀에 물려 죽게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장대에 구리 뱀을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면 살게 했습니다. 민수기 21:9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은 뱀과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약을 바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쳐다보라.” 쳐다보면 살았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나를 받아들입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면 기준이 나에게 있으므로 내가 주로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과거의 나는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후회가 남기 마련입니다. 과거에 내가 스스로 이루려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 그만큼 실망합니다. 내가 기준이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하고, 못하면 내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실망합니다. 실망이 많아지면 절망이 됩니다. 절망은 정죄를 낳고 정죄는 죽음을 낳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나는 틀렸어. 나는 끝났어.”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가롯 유다가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보느냐? 예수님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을 달라집니다. 내가 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내 약함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했다면 약함은 나에게 은혜의 통로입니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처와 흠집은 은혜가 스며드는 틈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누구든지”입니다. 마가복음 16:16,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요한복음 3:36,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요한복음 4:14,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면 삽니다.

 

 

 

 

네 번째 메시지는 “영생을 얻으리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얻게 되는 축복이 영생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영생이 먼저가 아니라 “멸망하지 않고”가 먼저 입니다. 영생을 얻기 전에 먼저 망하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천국가기 전에 먼저 멸망이 없습니다. 그래야 천국 갑니다. 천국 가서 멸망 받나 안 받나를 조사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죽은 뒤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기 전에 결정됩니다. 예수 믿는 즉시 우리에게는 멸망이 사라집니다. “안 믿으면 천국에 못가는 것 뿐 아니라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가복음 16:16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으면 그 순간 정죄가 사라집니다. 죽은 다음에 사하지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온 순간, 우리에게는 정죄도, 심판도, 지옥도, 멸망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혹 실수할 수 있고, 아플 수 있습니다. 혹 사업이 안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천국 문에 서는 순간,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가기 전에 이미 구원이 결정되고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 이전에 우리는 육신으로 살고, 죽음 이후에 우리는 영으로 삽니다. 죽음은 육신의 삶과 영혼의 삶을 이어주는 문지방일 뿐입니다. 믿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지방을 통해서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멸망을 당하지 않고 살고 있고, 육신적으로 죽음의 문지방을 넘어 선 뒤에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음 아닙니까?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이것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거룩한 성탄절에 성경 최고의 복된 소식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죄 많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너무 너무 사랑한 나머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는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먼저 망하지 않고, 다음 영생을 누립니다. 영원히 망하지 않게 된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우리에게 실수는 있지만 망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날, 그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것입니다. 이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