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른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르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 차이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공관복음에서는 성전청결이 사역 후반부에 나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초반부에 성전청결이 이루어진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물고기를 잡고 그물을 깁던 제자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의 소개로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고, 그 중 한 사람이 안드레라는 식이다. 마태/마가에서는 예수께서 가야바 앞에서 심문을 당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심문하는 사람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이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자료의 문제인가, 기술의도의 차이인가 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기록의 차이에 대한 답은 크게 두 방향에서 구해질 수 있다. 그 첫째는,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복음 기자들의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자신만의 개별적인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대안은 요한도 공관복음의 자료들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신학과 집필의도에 따라 공관복음과 다른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편집비평을 선호하는 성향의 학자들은 물론 첫 번째 입장을 견지한다. 사실상 그들에게 있어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생애의 직접 목격자 사도 요한이 아닌 제2세대 기독교인이다. 이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는 영지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고, 공관복음 기자들과 전혀 근원이 다른 자료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신학적 이해와 당시 교회의 필요에 의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본다. 이러한 가정하에서는 요한복음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비근한 예로, 급진적 성경해석과 회의적 예수이해의 대표적 성서학회인‘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요한복음 안에는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확신할 만한 구절이 하나도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성경 자체의 증언에 권위를 두고 성경을 해석하려 할 때, 이런 편집비평적 접근은 정당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이 스스로 말하는 저자,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13:23; 19:26; 21:7, 20, 24)는 사도요한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이러한 경우 예수의 애제자였던 사도요한이 스스로 보고 들은 내용은 거의 없이 다른 자료들을 토대로 비역사적 예수를 기록했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입장에서는 첫째,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고, 둘째, 요한은 그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다른 복음서들 자체나 그 복음서들이 사용했을 원자료들을 알았다고 이해하게 된다. 사실 요한보다 훨씬 이전에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복음의 저자도 예수에 대한 다수의 목격자들의 기록을 알았다는 사실(눅 1:1-3)은 요한이 그보다 더 많은 자료를 알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자연스럽게 한다. 다르게 기록하기 원했던 요한 그렇다면 왜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다르게 썼을까? 위의 논의를 따를 때 그 기본적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정될 수 있다. 다른 복음서들의 내용을 잘 아는 요한으로서는 같은 내용을 반복할 이유가 없었고,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읽혀진 복음서들로부터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를 원했을 것이고, 그의 신학적 바탕을 토대로 하여그 자신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술하기 원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 내용은 타 복음서와 비교할때 상치되지 않으나, 구별되고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됨은 당연하다. 그러면 요한은 어떤 신학적 이해와 의도를 가지고 그의 복음서를 기술했을까? 사실 요한복음의 기술은 그 여는 순간부터 전혀 새롭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탄생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요한복음 첫 부분에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독특한 이해는 그의 복음이 매우 영적이고, 예수의 가르침보다 예수 자신에게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는 추론을 자연스럽게 한다. 그리고 이런 전제와 함께 요한복음 전체를 읽을 때 많은 부분에서 타복음서와의 차이점이 긍정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들 간의 좀더 구체적인 사건 자체들, 즉 성전청결이나 제자 부르심 등에서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더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사건을 소개하는 요한복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역시 요한의 저작의도와 그의 기술목적을 더 잘 이해할 때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의 열쇠는 다시 한 번 그의 복음서 시작에 감추어져 있다. 요한은 예수 출생의 근원을 ‘태초’에로 거슬러 올라감으로 그가 예수 탄생의 본질, 그 진정한 시작에 대해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요한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던 예수에 대한 어떤 사실들보다 더 본질적이면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던 일들에 대해 더 관심이 있었고, 이러한 근원적인 사건들을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했다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런 요한의 기록 특성은 다른 복음서 안에 있는 유사사건들과의 관계성을 설명해 준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유사하지만 다른 사건들은 예수의 탄생, 성전청결, 제자 부르심, 기름부음 받으심, 대제사장에게 심문 받으심 등이 대표적이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두 곳에 다 등장하는 이 사건들은 동일한 사건들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기록한 사람의 관점과 기술방식 등의 차이로 설명하려고 하여도 그 사건들 사이의 차이는 시간, 대상, 인물 등에서 너무 극명하다. 이렇게 두 유사사건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각각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역사성과 권위를 인정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대안이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서‘예수의 기름 부으심 사건’의 주제하에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 원칙은 위의 사건들에도 적용이 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별개의 사건들로 볼 때 발견되는 흥미로운 공통점은 요한복음의 사건들이 공관복음의 사건들보다 모두 시간적으로 앞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점과 기록의 독특함은 충분히 의도적이다. 요한은 공관복음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그런 일련의 사건들보다 실상은 먼저 발생했고 더 중요했던 일들을 소개하기 원했던 것이다. 복음서 사건들의 조화로운 재구성 이런 이해와 함께, 위에 소개된 일련의 사건들의 좀더 합리적이고 흥미로운 역사적 재구성이 가능하다. 먼저, 예수께서는 그의 생애에 두 번 이상의 성전청결을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전청결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예수께서 박해를 당하시게 된 주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요한은 그 첫 번째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요 2:13-22). 그러나 그 청결 이후에 성전이 다시 더럽혀졌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고,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수난당하시기 바로 전에 일어난 성전청결을 기록하고 있다. 첫 성전청결 이후에도 여전히 문란해져 있는 성전을 보신 예수께서 다시 분을 발하셨을 것임은 당연하다. 예수의 심문 받으심에 대해서도, 마태/마가는 그 해 공식적인 대제사장의 위치에 있었던 가야바에 의한 심문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심문 이전에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에 의한 심문이 있었음을 알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그 심문에서 실재적으로 판결 내려졌다고 이해하여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을 비중 있게 다룬 것이다(18:12-24). 마지막으로, 제자 부르심에 대한 복음서들의 기록은 더 흥미로운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 복음서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베드로 등이 제자로 헌신하게 된것은 한 번에 된 일이 아니라 여러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첫번째 사건은 역시 요한복음에서 찾게 된다(1:35-51).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의 가장 오랜 기간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는 베드로, 안드레 등의 사람들과 예수께서 처음 만나신 것은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가셔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찾아가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첫 번째 만남에서는 ‘사람낚는 어부’로서의 전적인 헌신이 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그들이 예수를 전적으로 추종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면서도 생업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온전한 제자로서의 부르심은 마태와 마가가 기록하고 있다(마 4:18-22; 막1:16-20). 예수를 추종하면서도 어부의 일을 함께 하던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이때 그들은‘곧’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좇게 된다. 마태/마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어떤 이적도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셨고 특별한 가르침도 베풀지 않으셨다. 그들이 이미 예수와 개인적인 깊은 만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이 즉각적인 헌신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를 따르면서 그분을 잘 알고 있던 자들이었기에 그 헌신의 요청에 즉시 순종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 사건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5:1-11).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헌신이후 그들은 철저히 예수께 드려진 생활을 해야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다시 예수를 떠나게 되고 어부의 업으로 돌아간다. 사실 이런 일의 개연성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도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사명을 저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있는 그들을 예수께서는 다시 찾아오셔서 결정적인 헌신을 다시 요구하시게 되고, 이후 그들은 온전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해가 선행될 때에, 찾아오신 예수께 드렸던 베드로의 고백의 배경과 의미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위험에 처한 복음주의 필자는 근래에 여러 목회자들에게 위에 예시한 것과 같은 복음서 내의 유사한 사건들에 대한 목회자들의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반응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서의 차이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는 현대의 비평적 성서해석의 공격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성경의 기록을 순전히 인간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가하는 ‘편집비평’식 성서이해는 이미 신학자와 신학교육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러한 비평적 관점에서는 복음서 간의 사건 기록의 차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것은 기자들의 자료와 생각의 차이이며, 바로 성경의 오류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이러한 질문과 공격에 무방비 상태이고 성경의 권위를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복음주의 노선의 목회자들에게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 또는 복음서들간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차이는 틀린 점이 아니라 다른 점이며, 그 이유가 합리적으로 제시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능력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송창원 서울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에모리대학교에서 석사를 드루대학교에서 박사학위(신약과 초기기독교 전공)를 취득하였다. 뉴저지 주립대학교(Rutgers)와 드루에서 강의하였고, 현재 드루의 연구원(Research Fellow)으로서 성결대학에 출강하며 안산영광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로마서를 수사학으로 읽기』(영문판, 피터랑 출판사, 2004) 등이 있 |
요한복음서의 시간을 유대식 or 로마식으로 볼 것인가?
유대인의 시간 법
해 뜰 때와 해 질 때가 시간의 출발로 삼았다.
낮과 밤이 각각 12시간 씩
막 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대 제사장과 장로들이 심문한 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준 때를 새벽으로 공히 기록하고 있다.
마 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막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빌라도 총독 관저에서 심문을 반복하여 받은 후 최종 십자가 형에 언도되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위에 가 처형을 받는다.
공관복음(마, 막, 눅)에서 십자가에 달린 시간과 시간의 정도를 말해준다.
마태복음에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힌 시간은 말하고 있지 않으나 십자가에 달린 이후 6시부터 9시까지 땅에 어둠이 임했다는 기록을 말한다. 여기서 6-9시란? 지금 시간으로 정오12시부터 오후 3시를 가르킨다.
마 27:45-46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에서는
막15:24-25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막 15:33-34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이 3시이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혼절하며 어둠이 임한 시간을 6-9시였음을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시간이 마태와 일치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눅 23:44-45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누가 역시 마태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을 말하고 있지 않으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달았던 사건으로 인해 6시부터 9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한 것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공관복음은 유대인이 시간법으로 시간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인들의 시간 법
밤 자정과 낮 정오로부터 각각 시간의 출발로 삼음.
요한을 통해 하나님은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때가 새벽이고,
빌라도 총독은 잠시 심문을 한 후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를 어떻게 처결했으면 좋겠는지 묻는다.
그리고 여러 번 심문을 거친 다음 최종 십자가 형을 언도한다.
요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19:1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육시를 유대인의 시간법으로 해석한다면 낮 12시나 밤 12시에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고 하겠지만, 공관복음을 통해 빌라도에게 넘겨진 시각은 새벽이었으며, 이 때부터 심문을 받아 아침 9시(제 삼시)에 십자가에 매 달렸음을 마가는 말해주고 있으며,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해가 빛을 잃어버린 광경이 지속되었음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4장에 나오는 수가 성 여인을 예수님이 만난 시간은 6시는 낮 정오가 아니다.
왜냐하면
요4:6절에서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을 찾아 들어가신 것을 볼 때 아침이 아닌 저녁 해질 무렵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결 론
공관복음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때를 새벽으로 기록하고 있다(마27:1, 막15:1).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을 제 삼시(9시)로, 제 육시(12시)부터 제 구시(오후 3시)까지 어두움이 될 뿐 아니라
혼절해 계셨던 예수께서 제 구시에 운명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마27:45-46, 막15:25,33,34, 눅23:44,46)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던 때를 제 육시라고 기록하고 있다.(요19:14)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때가 새벽이며,
빌라도에게 재판받은 시간이 제 육시라는 요한복음이 로마시간 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요한복음이 로마 시간 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요한복음서 수신자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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