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5장 주석
●유대인들의 배반 (이사야 65:1-7)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한 해설자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지적했고 실현되었다는 것, 즉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이방인들을 부르고 유대인들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롬 10:20, 21). 그는 이 점에서는 "이사야가 매우 대담하다" 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대인에게 예언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자기 민족에 대한 굉장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모세의 말은 이루어졌다(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구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Ⅰ. 여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도 가까이 나아온다는 사실이 예언되어 있다(1절) 바울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었다. "나는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에게서 발견되었도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나타나게 되었도다." 그들에게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깨닫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1. 세상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없이 지냈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구하게 될 것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라고 말하지 않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나 그들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기도하지 않았고, 다만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나 돌 앞에 기도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세례를 받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행 2:21).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는 자기를 구하지 않던 자들에게서 자기가 찾아지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며, 또 그것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가! 대 죄인들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예비하실 것이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서 발견된다." 하나님과 이방 세계 사이에 있는 이러한 행복은 만남과 교신은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 되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갈 4:3).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고 구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되었다. 그들과 교제한 후에는 하나님이 그를 구하는 자에게서 발견된다(잠 8:17). 그러나 처음 교제에서는 그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서 그가 발견된다. "그러므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일반 섭리의 의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행 17:27).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아직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하나님"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발견되었다.
3. 하나님은 신앙 고백을 결코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거룩한 계시를 부여하셨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나는 그들에게 나를 보도록 하였고 그들을 초청하여 위안을 얻고 은혜도 얻도록 하였다). 이 말은 오랜 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한 것이다. 사도들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외칠 때 전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보라. 그를 보라. 그에게로 향하고, 너의 마음의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라. 그를 보라. 그에게로 향하고, 너의 마음의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라. 그를 알고, 그를 존경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가 만든 우상에서 벗어나라. 너를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나를 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은 오랫동안 "아무런 민족이 아니었던 자" 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지 못했던" 자, "로루하마" (롬 1:8, 9)에게 전해졌다(롬 9:25, 26).
Ⅱ. 오랫동안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 왔던 유대인들이 버려지고 멀리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 예언된다(2절). 사도는 자기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적용하였다. 즉 그들을 행악자들의 자손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리라" (롬 10:21).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유대인들을 거룩한 은혜로 인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언자들, 그의 아들, 사도들을 통해서 그들을 향하여 손을 폈다. 지혜자와도 같이(잠 1:24),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변론하기 위하여 그의 손을 펴신다. 그들을 포용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 손을 펴신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사랑의 증거를 보이고, 그들을 용납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이야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의 손은 "펴져서 앞으로 향하였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회개하는 죄인들을 그의 품으로 맞아들이려고 준비한 것 같았다. 그는 은혜스럽게 기다리셨다. 그러나 기다리시는데 싫증을 내지 않으셨다. 제 11시에 온 사람들까지도 물리치지 않으셨다.
2. 여기에서 그들이 그 초청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를 볼 수 있다. 그 초청은 반역적이고 반항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결혼 잔치에 초대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고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취할 수 있다.
(1) 이 백성들의 악한 성격을 알 수 있다. 세상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거절당한 것이 이유없는 사실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음행 때문에 된 일이었다.
[1] 그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늘의 은총을 그렇게 많이 받은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첫째, 그들은 매우 완고하였다. 옳든지 그르든지 그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불선(不善)한 길을 걸었다. 옳은 길과 안전한 길을 걷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에 따라 걸었고, 그들 자신의 계획이나 욕망대로 걸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만 따라간다면 우리의 길이 선하게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상상은 악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하곤 했으며, 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을 매우 격노케 했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음부터의 불만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비탄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그들의 적으로 만들까를 생각하는 자들처럼 "그의 성령을 거스렸다." 그들은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65:3)고 했다. 그들은 그러한 일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요. 그의 의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떤 모욕을 주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이 화를 내게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한 백성이 되어 "광야에서의 유혹의 날" 을 증거한 이래로 계속된 그들의 태도와 습관이다.
[2]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는 이유로써 이 예언자는 "그들의 죄악과 선조들의 죄악" 을 지적하여 말했다(7절). 이제 예언자는 그 실례를 든다.
첫째, 그들의 선조들이 지은 가장 자극적인 죄악도 우상 숭배였다. 예언자가 그들에게 말한 바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둘째 계명이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께서 종종 "그 자손들을 징계하시는" 죄악이다. 이것이 그들을 포로되게 한 죄다. 그들이 포로 생활에서 잘 구출되었다 하더라도, 그 민족의 마지막 폐허에 이르렀을 때는 그것이 다시금 그들에 대한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책하실 때는, 그러한 죄악을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32:34). 포로기 후에는 그들이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여기에 전술된 부조리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계속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버렸다. 그리하여 "정원이나 작은 숲에서 희생제를 드렸으며" 자기들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데 만족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제도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을 버렸다. 그들 자신이 만든 "벽돌 위에 향을 피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발명한 것에 따라 향을 피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향을 피우라고 지적하신 금으로 만든 제단에 비하면 벽돌로 만든 제단을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붕이 납작한 집을 덮었던 것과 같이 타이르 위에 향을 피웠다. 때로는 그 위에 다른 우상을 위해서 향을 피우기도 하였다. 이것이 열왕기 하 23장 12절에 나타난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시운 단들" 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 19장 13절에서는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였다" 고 되어 있다.
3. "그들은 마술을 사용하거나 죽은 사람과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은 무덤 사이에 거하며 기념관에서 산다." 엔돌의 마녀처럼 산 자들을 위해서 죽은 자에게 묻는다(8:19). 그렇지 않으면 무덤에 자주 가는 악령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식사의 율법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에 의하여 없어지기 전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의 구별을 깨뜨렸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마카비의 이야기에 나오는 엘르아살과 그의 일곱 형제들처럼 돼지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먹었으며, 특히 그렇게 하는 것이 생활 환경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우리의 구주가 살아계실 때도 그들에게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돼지고기를 먹으면서도 율법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들은 돼지 떼가 몰살을 당함으로써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지된 고기로 고깃국물이나 고깃덩어리" 는 여기에서 "가증한 것" 으로 불리워졌다. 그것이 "그들의 국 그릇 안에" 있었으며, 먹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금지된 고기는 "가증한 것" 으로 불리우며 그것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가증하게 만든다" 고 했다(레 11:42, 43). 감히 고기를 먹지 못하던 사람들도 고깃국은 대담하게 먹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능한 한 금지된 것에 접근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얼마나 금지된 과실을 탐내는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이것이 여기에서 나온 것은 죄로 인하여 취하는 모든 금지된 쾌락과 이익들을 비유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리라. 그것은 바로 "주께서 싫어하시는 불쾌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였으며, 고깃국을 맛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이 모험적으로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죄악의 심연에 떨어줄어들 위험성을 안고 있다.
둘째, 우리 구주 시대의 유대인들의 가장 자극적인 죄악은 그들의 교만과 위선이었다.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에 대하여 매우 여러 번 비난하였다(5절). 그들은 말하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라" 고 했다. 즉 "너는 너 자신의 동료들과 같이 있으라.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를 더럽힐까 하노라.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에 너와 어떤 친분관계도 가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하지 못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이러한 세리와도 같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하였다. "나는 너보다 더 거룩하다." 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고 선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다." 이것은 곧 열을 내고 활활 타오르는 불로부터 나오는 연기가 아니라, "종일 타는" 젖은 나무를 태운 연기이며, 연기만 날 뿐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교만한 자만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대하여 추악하고 불손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논쟁을 하셨다. 그들에 대한 증거는 간단하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다" (6절). 이것은 올 시대에 그들에 대해서 기억되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곧장 셈을 치르게 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죄, 특히 위선자의 허망한 자랑과 경멸 등은 하나님의 "곳간에 쌓인다" (신 32:34). 기록된 것은 잊혀질 것이고 계속 진행될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항상 잠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종종 하나님을 자기들과 같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 것이다. 신앙 고백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들은 종교 곧 존귀롭고 신성한 것을 비천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자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것에 대해 그들과 셈하실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신앙 고백은 그들의 저주를 악화시킬 뿐이다.
[1] "그들의 열조들의 죄악" 이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죄는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받을 만 한 것이다. 그들은 그만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스 9: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 큰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파괴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약의 순교자들의 피, 심지어 아벨의 피도 그들에게 돌리신다고 말씀하신다(마 23:3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조들의 우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산당에 대해서도 그들과 계산하실 것이다." 산들과 작은 산 위에서 행하는 분향이 참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능욕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기록하려고 선택하신 장소에 대한 모독이고 그가 거기에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축복하신다는 약속에 대한 치욕이다.
[2] 그들의 죄는 열조의 죄와 함께 그들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다. "너희의 죄악과 너희 선조들의 죄악" 은 상호 악화시키면서 이전의 업보를 이룰 것이다. 비록 이전행위가 간과되고 망각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그들이 품에 보응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적들뿐만 아니라(시 79:12)그의 거짓되고 배반한 친구들에게도 갚으실 것이니 곧 그들이 자기에게 가한 수치로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실 것이다.
●자비의 약속 (이사야 65:8-10)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 1-5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이 배척을 당하자 그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라고 묻고" 그럴 수 없다" 고 대답한다. 그는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고 말한다. 이 예언은 선택된 남은 자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적 국가를 멸망에 붙이실 때도 그들 중 일부를 구분하여 안전하게 하실 것이다. 일부 유대인 멸망의 날을 감하셨다고 말씀하신다(마 24:22; 막 13:20). "그 환난의 날 수가 줄어들지 않고 그 파멸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수가 줄어질 것이다."
Ⅰ. 이제 이것은 여기에서 비유로 설명되고 있다(8절). 한 포도나무가 마르고 시들어서 그 안에 즙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자. 그리하여 포도밭의 관리인이 그것을 파내거나 잘라내고 싶다고 하자. 포도즙이 너무도 적어 차라리 새 포도나무를 가꾸는 것이 타당하고 단 한 송이에서만 포도즙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곁에 서 있던 자가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뿌리에는 아직 생명이 있어서 언젠가 유익할지도 모른다" 고 말할 수 있다.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장소의 축복이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도시와 국가들을 살려두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바지할 수도 있다는 이런 명예는 얼마나 가슴이 벅찬 것인가!
Ⅱ. 본문은 이렇게 구원받고 구원하기도 하는 남은 무리는 어떤 사람들인지 여기서 기술하고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것은 "내 종들을 위한 것이다" (8절). 그리고 내 종들은 거기 거할 것이다(9절).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그들이 아무리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나라가 가진 가장 좋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자기 세대를 섬기는 자들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그의 이름 부르는 것을 필생의 일로 삼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를 찾은 내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발견할 것이며 그가 자기들의 관대한 보상자임을 발견할 것이다.
Ⅲ.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쌓아 두신 자비가 나오고 있다. 포로에서 돌아올 남은 무리는 다시 그들의 땅에서 행복하게 정착하게 될 것이다. "야곱 중에서 씨를 내듯이" 세습적인 권리에 의하여 그 안에서 가족이 유지되고, 계승권이 보존되며, 뿌린 씨앗이 다 수확을 내듯 그들에게서 무수한 증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신앙으로 복음 교회에 가입될 야곱의 남은 무리를 상징한다.
1. 그들은 좋은 분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산들" 즉 예루살렘과 성전이 세워졌던 거룩한 산 또는 약 속의 땅 가나안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 곧 그의 택함받은 자들은 은혜의 언약 안에서 거하며 그것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고, 그들의 안식처와 거주지로 삼아서 거기에서 거하고 그 안에서 편안히 생활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고 그것은 그들에게 불후의 상속 재산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은 기도하는 야곱의 영적 자손으로서 축복과 기쁨의 산들을 물려받는 상속자가 될 것이며,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서 그 산들까지 안전히 이르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자기 양떼를 위한 푸른 초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10절). "샤론과 아골 골짜기" 는 전처럼 다시 가축으로 채워질 것이다. 샤론은 서쪽으로 욥바 가까이에 위치하며 아골은 동쪽으로 요르단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온 땅을 회복하게 될 것과 그로써 그 모든 가축을 사육하게 되며 평화로운 생활을 향유하며 그들을 방해하거나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란 것을 암시한다. 복음의 규례는 그리스도의 양떼가 드나들면서 꼴을 얻고(요 10:9) 아골 골짜기의 이스라엘 무리처럼 (호 2:15) 거기서 눕는(시 23:2) 푸른 초장이가 골짜기이다.
●징벌의 예고 (이사야 65:11-16)
여기에서는 경건한 자와 사악한 자, 믿는 유대인과 아직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의 상이한 상태가 생과 사, 선과 악, 축복과 저주로 대조되고 있다.
Ⅰ. 여기에는 바벨론에서 구출된 후 우상 숭배를 고집한 자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후 불신앙을 고집하던 자들의 무서운 운명이 나오고 있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기에서 위협을 받는 운명은 12절에 나타난다. "내가 도살할 양같이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피할 수도 없고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다 그 앞에 구부러질 것이다."
(1) 하나님의 심판은 규칙적으로 온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실시된다.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칼에 의하여 쓰러질 것이다. 그 외에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 칼은 어떤 사람이나 무차별적으로 처치하는 것 같지만 그 수를 알게 되어 있고 그 수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온다. 극히 강하고 극히 강퍅한 죄인들도 그들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서도 형통케 된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을 칼에 붙이는 죄가 나오고 있다.
(1) 우상 숭배는 옛적부터 있던 죄였다(11절). "너희는 내 백성으로서 나를 찾거나 섬기지 않고,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를 부인하고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하여 나를 내던진 자들이다. 또한 너희는 너희 우상의 산에서 분향하기 위하여 나의 성산(그 특권과 의무)을 잊었다(7절). 그리하여 유일하게 살아계시고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을 버렸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무수한 잡신들에게 썪는 술을 가득히 부었다." 한 하나님으로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무 개나 백 개도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신들의 숫자를 늘려가서 마침내는 성이나 제단이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처럼 두터워지도록 많은 신들을 두게 되었다(호 12:11). 혹자는 갓과 므니를 각각 "군대" 나 "수효" 라고 번역하는데 이들은 여러 신들의 이름 중 하나이다. 이것은 쥬피터(역자 주:모든 신들의 왕이며 하늘의 지배자)와 머큐리(역자 주: 여러 신들의 심부름을 하는 신, 웅변가, 직공, 상인, 도둑의 수호신)에 대응하여 그들의 두 가지 우상에 적당한 이름이 되었다. 여하튼간에 그 우상을 공경하기 위해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섬기기 위해서 상을 베풀며 술을 가득히 붓는다. 그들은 자기 가족을 희생시켜 가면서라도 우상 숭배에 인색하려고 하지 않았다. 진정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이들의 열성을 보고 자기들의 인색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2) 불신앙은 후기 유대인들의 죄였다(12절). "내가 불렀을 때 너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2절과 똑 같은 것을 나타낸다(내가 손을 펴서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손수 부르셨다(그는 서서 외쳤다, 요 7:37).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설득에 각성하지 않았고, 그의 타이름에 감동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과 파멸에 대한 그의 정당한 경고와 생명과 행복에 대한 그의 정당하신 제의를 무시하였고 그에게서 어떤 감명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너희는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다." 이것은 놀람이나 부주의로 한 것이 아니고 계획적으로 한 것이다. "너희는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그는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혐오하고 가증히 여기는 것이었다고 암시하신다.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악한 것을 따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의 악함을 살펴보자.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악한 것이고 그를 아주 노엽게 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그의 면전에서 그를 멸시하여 그의 눈 앞에서 자행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즐겨하시지 않는 일을 택하여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이 그를 노엽게 한다는 것을 안다.
Ⅱ.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된 자들의 행복한 상태를 고려하면 이런 파멸은 더욱 비참해진다.
1.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축복과 그에 적대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서로 비교되고 있다(13-16절).
(1) 하나님의 종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대해 영원히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신앙 안에서 강퍅해지고 멸망하게 될 이웃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여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가를 봄으로써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생각한다(66:24 참조).
(2) 멸망할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행복감을 보고 슬픔이 더욱 커질 것이다(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미워하고 헐뜯으며 매우 경멸하였다). 특히 자기들의 잘못만 아니었다면 자기들도 그 축복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의 슬픔이야 오죽하겠는가!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본 것은 지옥에 있는 부자의 고통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눅 16:23; 13:28).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에 이와 같은 차이를 만드신다. 올바른 사람의 번영은 사악한 자에게 눈의 가시처럼 괴로움을 주며 상심시키는 것이 된다(시 112:10). 심판의 날에는 확실히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의 삶을 미친 것으로 그의 목적을 존경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성도들과 함께 계수되며 그의 분깃은 택함받은 자 중에 있게 되었다.
2. 그들의 상황은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1) 위로와 만족이란 점에 있어서의 차이.
[1] 하나님의 종들은 먹고 마실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될 것이고 잔치에 환대를 받을 것이며 그의 집이 선한 것으로 풍성히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좋은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 나라의 행복은 그들의 영원한 향연이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 배고파하고 갈증을 느낀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이 충족될 것이다. 반면에 자기 마음을 세상에 두고 거기서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굶주리고 갈할 것이며, 항상 공허감을 느껴 늘 갈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식은 과식하면 물리게 되고 또 만족시켜 주지도 못한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를 의지하는 데 풍성한 만족이 있다. 그러나 죄를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실망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의 기쁨을 찬송할 것이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항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슬픔이 될 일은 전혀 없고, 그들에게는 슬픔을 완화시키고도 남을 것이 있다. 신앙이 활동하고 작용하는 한 그들에게는 기쁜 마음이 생기며 기쁨은 그들의 힘이 된다. 그들은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이니 소망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지금 눈물로써 씨뿌리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기쁨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 반면에 주님을 버리는 사람들은 모든 진정한 기쁨으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대한 헛된 자신과 자기의 의, 그리고 그 토대위에 세운 자기들의 소망으로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산산히 부서질 때 그들의 얼굴은 당황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웃음이 통곡으로 변하고 기쁨이 고민으로 변하게 될 때 그들은 아마 마음이 슬픔으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하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서는 확실히 그럴 것이다. 거기서는 고통이 끝없고 편함도 없으며 구제받을 가망도 없고 오직 영원히 슬퍼 울며 이를 가는 것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25)는 두 가지를 비교해 보라. 우리는 어느 쪽을 우리의 분깃으로 선택할 것인가?
(2) 명예와 평판에 있어서의 차이(15,16절)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을 썪을 것이다" (잠 10:7).
[1] 우상 숭배자들과 불신앙인의 이름은 저주로 남을 것이고 치욕을 당할 것이며 영원히 불명예스럽게 될 것이다. 그 이
름은 악평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즉 "너는 유대인처럼 잔혹하다" 는 말이나 "하나님께서 너를 유대인처럼 비참하게 하시기를!" 이란 저주는 그 예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의 저주거리가 될 것이다." 즉 이것은 택함받은 자에게 경고가 된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임한 저주에 떨어질까봐 겁내며 "저 순종치 않는 본" (히 4:11)을 따라 멸망할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께 배척받는 자들이 당하는 저주는 하나님의 택함입은 자들을 떨게 만든다. "주 여호와가 너를 죽이리라." 그는 유대인들을 멸종시키실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한 민족으로 살 수 없고 다시 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의 이름은 축복이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종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실 것이다." 언약의 백성은 더 이상 "유대인" 이라고 불리워지지 않고 "기독교인" 이라고 불리운다. 새 언약의 모든 약속과 특권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에게 보장될 것이다. 이 다른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 될 것이다. 그 이름은 한 민족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으로 인하여 이 땅 위에,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서 새 이름으로 고귀하게 될 종들을 얻으시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들은 기도와 엄숙한 서약,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청원, 심판자 되신 그의 공의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충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해야 한다. 즉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을 소유하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으며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복을 구한다는 것과, 우리가 극히 큰 즐거움을 구한다는 것과, 우리의 이익이 결부되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소유물의 넉넉한 데서 복을 구한다(시 49:18; 눅 12:19).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들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한다. 그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이시고, 아름다운 보관이시며, 그들의 힘이요, 분깃이다. 또 그들은 피조물이나, 거짓 신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맹세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것이며 모든 사람의 심판은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
둘째,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 아멘의 하나님" 되신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에덴은 진리란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그리스도께 대한 말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아멘" 이시고 "신실한 증거" 이시다(계 3:14). 그리고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 이 된다(고후 1:20). 우리는 그에게서 복을 구해야 하며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서약을 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어야 한다. "땅에서 복된 자는 진리의 하나님 안에서 복될 것이다(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요 5:20). "그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는다" 는 것은 옛날에 약속되었다(창 12:3). "그는 신실한 백성의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할 것이다" (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신자들이 받는 축복에 동참하는 것 이상 탐내지 않을 것이며 신자들이 받는 대접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이러한 복된 변화의 장본인으로서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이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셨고 참당한 추억을 현재의 안락으로 말살시킨 하나님이셨다.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이전 환난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만약 그들이 당한 고통의 잔재가 남아 있으면 그들에게 대한 긍휼심과 동정심에서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것을 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전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것들을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그들을 편안하게 해야 자신도 편안해진다는 듯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주 굉장한 만족감을 가지고 그를 향해 복을 구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예고 (이사야 65:17-25)
이 약곳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즉 그들은 고도에 평화로운 정착을 하게 되었고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복음 교회에서 온전한 성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투쟁하는 교회가 되나 나중에는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갈 4:26).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이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도록 해야 한다. "옛 것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고 하는 것은 복음서에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이다(고후 5:17). 16절에 묘사된 것과 "이전의 고통들이 잊혀졌다" 고 하는 것은 강력하고 행복한 변화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은 더욱 높이 상승한다. 심지어 이전의 세계는 잊혀져서 더 이상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그 위로가 너무나 황홀하여 이전에 알았던 모든 안락을 초개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이전 슬픔은 물론 이전의 기쁨도 현재의 기쁨에 압도되고 삼켜졌다. 영화로게 된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잊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 세상 것에 완전히 빠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신적인 힘이 얼마나 무진장한가를 살펴 보라. 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도 창조할 수가 있다. 성도의 행복이 얼마나 완전한지 살펴보자. 부분적인 것들이 모여 전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함께 새 땅도 창조하실 것이다.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만물이 너희 것이다" (고전 3:22).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실 때 우리에게 새 땅을 주신다. 성도들이 장차 얻을 영광은 전에 알던 것과 너무나 달라서 가히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불리워질 만한 것이다(벧후 3:13).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
Ⅰ. 거기에는 새로운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교인들과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18절).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복음에 의하여 창조하신 새로운 것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영원한 기쁨의 제목이 되고 또 그럴 것이다. "내 종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13절). 이제는 그들이 애곡할지라도 결국은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2. 교회는 그들이 기뻐할 장소가 될 것이고, 교회의 상태는 즐겁고 번영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으리라." 교회는 즐거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교회와 함께 슬퍼했던 자들은 교회와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3. 교회의 번영은 하나님께 즐거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번영을 즐거워하신다(19절).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잘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가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 3:17).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4. 이 기쁨은 약화되거나 교회의 기쁜 상태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는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 생에 있는 교회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이전의 슬픈 일이 재현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방해받지 않는 평온을 오래도록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약속된 기쁨의 완성과 영속이란 점에서 생각할 때 이것은 천국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눈물이 사라질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삶이 있을 것이다(20절). 이전처럼 칼이나 병으로 인한 불의의 죽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 이상 울부짓는 소리가 없을 것이다" (19절). 죽음이 없을 때 "슬픔도 없어질 것이다" (계 21:4). 죽음이 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듯 생명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롬 5:14, 21).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된 자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너무 일찍 죽은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삶이 짧으면 짧을수록 휴식은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 사망이 왕노릇 하더라도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죽으면서 그리고 그의 왕국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은 유아" 라고 불리우지 않을 것이며 유아라 할지라도 "백 세에 죽는 자" 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일어나 완전한 수명을 누릴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유년기에 지혜가 출중하나 요절하는 어린이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들은 이런 아이를 백세에 죽었다고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의의 열매로 그들의 날 수를 채울 것이라" 는 것이 약속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늙어도 결실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시 92:14, 15). 그렇게 될 때 그는 선한 노인이라 할 수 있으며 자기 수한을 채우는 자라 할 수 있다. 지혜롭고 착하고 유능한 노인은 참으로 자기 수한이 찬 노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있는 노인들은 결코 자기 수한을 채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풍족한 것을 얻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래 살려고 한다. 시므온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본 뒤 "충분한 수한을 채우고" (Satur dierum) 늙어 죽는 사람은 평화롭게 하직하기를 원한다.
2. 불신자들은 인생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행할 것이다. 죄인들은 그가 아무리 "백 세" 를 산다 하더라도 "저주받을 것이다." 죄인의 장수는 그에게 신적 은총이나 축복의 증거가 되지 못하며 신적이 진노와 저주에 대한 어떤 피난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죄인이 받은 판결은 클림 없이 확실히 집행될 것이다. 그의 오랜 생명은 단지 긴 유예일 따름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저주다. 그가 오래 살면 살수록 전노의 날을 우해 더욱 많은 진노를 쌓게 되고 그가 갚아야 할 죄는 더욱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의 삶이 긴가 짧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의 생활을 하는가, 죄인의 삶을 사는가에 있다.
Ⅲ. 그들은 생의 위로물을 새로 향유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그것이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서 그들이 건축한 가옥에는 원수가 거했으며 그들이 재배한 나무 열매는 원수들이 먹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다" (21,22절). 이것은 그들의 손의 수고가 축복을 받고 번영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목적한 것을 얻을 것이고, 그들이 얻었던 것은 보존되고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편안히 그것을 즐길 것이고 아무 것도 그들의 향유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즐기며 살아갈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전처럼 그들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다." 그것은 정직하게 얻은 것이어서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손으로 일한 것" 이다. 그들은 손수 일했으므로 그것을 가장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게으름의 양식이나 거짓의 떡" 을 먹지 않았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즐길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전 3:13)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오래도록 즐기며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렇게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의 수한은 나무의 수한과 같다. 또한 상수리나무의 수한과도 같다(6:13). 그 잎이 떨어져도 생명은 그 안에 남아 있다." 잎은 겨울마다 헐벗는다 하여도 다시 회생하고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내 백성의 수한은 생명 나무의 수한과 같다" (70인 역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생명의 나무다. 여기에서 약속된 현세적 축복은 영적 위안물을 상징하는데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온갖 영적 위안을 향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원수들은 그들에게서 이런 축복을 박탈할 능력이 없으며 이 즐거움의 향유를 방해할 권세도 없을 것이다.
Ⅳ. 그들 대신 새 세대가 일어나 이런 축복을 상속받고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하는 일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 뒤에 올 사람들에게 만족스럽게 물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로몬처럼 우울한 전망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전 2:18, 19). 그들이 생산한 자녀는 재난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선조로부터 축복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생도 그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워 가질 것이고 그들처럼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 이 될 것이다. 그들이 생산한 자손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생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자손들이 "진리에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손이 편안한 세월을 만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선하듯 만사도 순풍에 돛단 듯이 잘될 것이다. 그들은 재난의 때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배지 않은 태에 복이 있다" 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복음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대대로 세습될 것이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다(시 22:30). 그는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다."
Ⅴ. 그들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 좋은 교제가 이루어질 것이다(24절).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다윗은 "내가 자복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사하셨다" (시 32:5)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 때 그를 맞아 주었다.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들이 아직 기도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이 기도하는 일을 이루어 주며 그에 대한 확신과 징표를 주리라."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속히 그리고 기꺼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지를 나타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보다 복음의 은총에서 더 잘 나타난다. 우리가 편안한 것은 아버지께 우리를 대언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하심 덕택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속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Ⅵ. 그들과 그들의 이웃 사이에는 좋은 교류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25절). 노아 방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원수의 세력을 깨뜨리거나 대적들의 손을 묶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며 은혜로 그들의 본성을 바꾸실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박해하던 바울이(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므로 이리처럼 물어 뜯었다, 창 49:27) 사도 중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한이 사라지자, 모든 적대 관계가 종식되고 위대한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은 한 우리의 양떼가 되었다(요 10:16). 교회의 적들은 자기들이 행하던 훼방을 중단하고 교회의 식구들은 서로 싸우고 남을 해치던 이전 행위를 불식했다. 그래서 거기에는 안팎으로 해치거나 파괴할 사람이 없다.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다. 이사야 11장 9절에 약속된 대로 "모든 성산에서" 교회를 해하는 자는 더욱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람들은 변할 것이다. 사자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었더라면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인 바 그것은 더 이상 먹이를 찾는 짐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 을 것이다." "황소처럼 그의 소유자를 알고 주인이 주는 여물통을 알 것이다." 강탈과 약탈로 살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을 부유하게 하려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고, 정직한 수고로써 살며 자기 일에 만족하게 되었다. 도둑질하던 사람들이 이제 훔치지 않고 그들의 손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될 때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는 말은 성취된다.
2. 사탄은 사슬에 묶일 것이고 용은 속박당할 것이다. "뱀은 다시 흙으로 그의 식물을 삼을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대적이 풀려나자 그는 성도들의 고귀한 피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성자들은 사탄의 선동으로 박해를 받았다. 이 원수는 죄인의 고귀한 영혼도 게걸스럽게 먹어버렸다. 죄인들은 그의 선동에 의하여 박해자가 되었고 자신을 영원히 파멸사켜 버렸다. 그러나 이제 다음과 같은 선고에 따라 그 원수는 흙에 한정되었다. "너는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4). 하나님의 교회를 대항하는 모든 원수는 뱀처럼 교활하고 독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복되고 진압되어 흙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왕국의 모든 적들이 자기 발등상이 되고 또 교회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시온의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겠다고 하는 이 약속은 위에 있는 성산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만이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성 경: [사65:1]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 바로 앞장 마지막 부분에서 토로된 이스라엘의 탄원에 대한 대답의 첫 성(聲)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본 구절이다.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란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리고 '물음을 받았다'는 '니드라쉬티'(*)인데 이것은 수동태로서 '찾음을 당하였다'가 문자적인 뜻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신학적으로 다소 어폐(語弊)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이 이방인도 부르신 것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보면 된다. 바울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롬 10:20). 그런데 구원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라는 문맥에서 암시된 이방인 구원에의 비전은 구원 역사에 관한 좀더 넓은 시야를 열어준다.
성 경: [사65:2]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내가...불선한 길을 행하는 - 이것은 다음절에서부터 자세하게 열거하게 될 이스라엘의 패역한 행동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배척하셨던 그리고 이방에게 그의 구원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신 전체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ꃨ 종일 손을 펴서 - '손을 펼친다'는 것은 초청을 뜻한다(잠 1:24).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은총 속에서 이스라엘을 초청하셨다.
성 경: [사65:3]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 이것은 이방의 우상 숭배와 연관성이 있는 표현이다. 이방인들은 주로 수풀 속에서 제사 의식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벽돌 위에 미신적인 상징을 새기기도 하였는데 돌 대신 벽돌을 재료로 취한 까닭은 벽돌이 돌 보다 그 위에 새기기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출 20:25에 보면 제단을 세울 때 다듬은 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벽돌 위에 미신적 주문이나 형상 새기는 것을 금하고자 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제사는 그 외형적인 모양도 취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ꃨ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 여기 '항상'의 원문 직역은 '계속적으로'이다. 이것은 2절의 '종일' 곧 '계속적으로'와 적절한 대비를 이룬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셨지만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신 32:21).
성 경: [사65:4]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무덤 사이에 앉으며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1) 영매(靈媒)가 되기 위해 묘지에 왕래했던 사실(8:19)을 가리킨다(Whybray).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생을 떠난 사람의 경우 이생에 관한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죽은 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영매술이 유행했다. (2) 죽은 자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러 무덤으로 간 것을 가리킨다(Vitringa).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취하기는 어렵다.
ꃨ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 '은밀한 처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추림'(*)의 원형은 '지키다', '숨기다', '숨다' 등을 뜻하는 '나차르'(*)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방의 신상을 안치해 둔 신전(Jerome)이나 지하 토굴(Delitzsch)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지내며'(*, 얄리누)는 '하룻밤을 머물다'는 뜻이다.
ꃨ 돼지 고기를 먹으며 - 이방인들은 돼지를 대체로 식용이나 제물로도 사용하였던 반면, 이스라엘은 그러한 사용을 일절 금하였다. 이것을 알았던 신 구약 중간 시대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Antriochus Epiphanes)는 여호와 신앙의 포기 및 배교의 증표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한편, 돼지가 이방의 희생 제사에 사용되기도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한 식용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즉, 제물로 바쳐진 것을 먹는 것은 그 제물이 바쳐진 대상에 대한 경의를 뜻하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 사실도 넌지시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ꃨ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 여기 '국'(*, 파라크)의 문자적인 뜻은 '조각'이다. 이방 종교 의식에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 동물의 살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드리는 의식이 있었는데, 본 구절은 바로 그 같은 의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앞구절의 '돼지'를 조각내어 드리기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 '가증한 물건'이란 돼지고기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성 경: [사65:5]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말라 - 그 당시 혐오스러운 이방 예식에 종사하던 자들이 영적 오만으로 자신을 구별하였던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주님 시대 당시 위선적인 자기 의로 가득 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부류를 연상시킨다(마 9:11;눅 5:30;18:11;유 1:19).
ꃨ 내 코의 연기요...불이로다 - 여기 '코'(*, 아프)는 문자 그대로의 '코'를 의미하지만(민 11:20;욥 40:24) 때때로 '분노'를 뜻하기도 하는데 분노는 강한 호흡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본 구절은 이방 제사자들의 역겨운 행동이 연기가 코를 찌르고 불쾌하게 하듯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거나, 그들의 행동이 분노의 상징인 하나님의 코에 불을 붙였다는 것, 곧 하나님의 진노케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 경: [사65:6]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 이 표현은 왕의 포고령을 그 백성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서책(書冊)에 혹은 테이블 따위에 기록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세워두거나 비치하던 당시의 관습을 연상케 한다. 이방 신 제사 금지와 그 금지를 어길 때에 따를 처벌에 관한 사실은 이미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다.
ꃨ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 여기 '품'(*, 헤크)이란 '가슴'이라는 뜻 외에 물건 따위를 넉넉히 받기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옷의 앞자락 부분을 가리킨다(출 4:6, 7;잠 6:27). 여기서는 범죄한 이방 제사자들에게 임할 징벌이 크고 심할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 경: [사65:7]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ꃨ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니 -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 임하기까지 세대에서 세대를 지나면서 축적되어 왔던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사65:8]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 이 구절은 여러 원인 때문에 대부분이 상해버린 포도송이들 중에서 그래도 쓸 만한 송이를 가려내는 작업을 연상케 한다.
ꃨ 나도...그같이 행하여 - 포도를 수확하는 사람이 상해버린 포도 송이들 중에서 좋은 포도즙을 낼 수 있는 포도 송이를 가려 뽑듯이 하나님이 불경건한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을 명망시키는 중에 경건한 '남은 자'를 아껴 두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본서에는 이 사상이 반복되고 있다(1:9;6:13; 10:21;11:11-16).
성 경: [사65:9]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씨 - '거룩한 씨'란 뜻으로,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몰수당했던 거룩한 땅을 다시 소유키로 되어 있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킨다(6:13).
ꃨ 나의 산들 -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이 지형학적으로 높은 곳이므로 산이라 불리웠다.
성 경: [사65:10]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사론 - 지중해 연안 갈멜 산 남부 지방인데 빼어난 경관과 비옥한 땅으로 유명한 곳이다(35:2).
ꃨ 아골(*, 아코르) - 문자적인 뜻은 '고통'인데 여리고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고통'이란 의미가 붙여진 이유는 과거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수 7:24). '아골 골짜기'란 호칭은 성경에서 재앙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처소로도 사용된다(호 2:15).
성 경: [사65:11]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 '갓'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여겨졌던 시리아 신(神)으로 이해되며 포에니시아(Phoenicia), 팔미르(Palmyra) 및 팔레스틴 등지에서 숭배되었다(수 11:17;12:7;15:37 참조, J. Watts, Whybray). 이 신을 섬기기 위해 마련된 상 위에는 온갖 음식, 특히 포도주와 꿀을 섞은 술잔 등이 진설되었다고 한다(Jerome).
ꃨ 므니(*, 메니) - '할당하다', '세다' 등을 뜻하는 '마나'(*)의 변형이 분명한데, 많은 견해가 있지만 운명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것 같다(J. Watts, Whybray).
성 경: [사65:12]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칼에 붙일 것인즉 - 고도의 언어적 유희가 돋보이는 구절이다. 여기 '붙일'에 해당하는 '마니티'(*)는 11절의 '메니'(*)와 그 원형(*, 마나)이 동일하다. 패역한 백성이 그들의 운명을 세듯 좌지 우지할 것으로 믿었던 바로 그 신의 운명을 하나님께서 좌지 우지하신다는 것이 본 언어 유희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헛된 우상 '메니'(*)를 의지한 이스라엘의 불경건한 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성 경: [사65:13]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본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가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본절이 이스라엘 역사 속의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암시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주릴 것'이란 A.D. 70년 로마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포위로 백십여 만 명이 기근으로 몰살한 역사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불명확하다(Houbigant). 뒷문맥에 근거하여(17-25절) 본절을 다분히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좋겠다.
성 경: [사65:14]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심령이 상하므로 - '상하므로'의 히브리어 '솨바르'(*)는 '산산이 부숴지다', '찢어지다'는 뜻으로서 극심한 재앙으로 인해 그 마음이 크게 눌릴 때 사용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이 제외될 것을 암시하는 대목인 마 8:12에 유사한 뜻의 표현이 사용되었다:"나라의 본(本)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성 경: [사65:15]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너희의...될 것이니라 - 어떤 이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끔찍한 저주의 사례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실례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저주하기 위해 시드기야와 아합의 이름을 사용한 렘 29:22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Whybray).
성 경: [사65:16]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ꃨ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 환난이 잊어졌다는 것은 환난이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은총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상에게 맹세하고 복을 비는 행위는 사라지고 참신이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복을 구하게 될 텐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성 경: [사65:17]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이후 새로이 회복될 공동체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통치시대의, 더 이상 고통과 슬픔 따위가 없는 완전한 세계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갈렙이 그 발로 밟았던 바로 그 땅을 물려받았듯이(신 1:36), 메시야와 그의 백성들은 전혀 새롭게 변화된 새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34:4;66:22;히 12:26-28;벧후 3:13;계 21:1)
성 경: [사65:18]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ꃨ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 새로이 재건될 예루살렘 혹은 새 창조로 말미암은 천성(天城) 예루살렘에 즐거움이 넘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I will create Jerusalem to be a delight, NIV).
성 경: [사65:19]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ꃨ 우는 소리와...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그리고 2차적으로는 모든 구원받을 자에 대한 예언이다(25:7, 8;35:10;계 7:17;21:4).
성 경: [사65:20]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최소한 100세일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 종말 이후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 세계는 수명이란 것이 아예 없이 영원히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은 본절의 평균 수명 100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영원히'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때 해소될 수 있다. 이 해석에 비추어 보건대, 아마도 너무 일찍 죽는 현세대의 상황과 대비시키기 위해 평균 수명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 같다.
성 경: [사65:21]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 역시 포로 귀환 후의 상황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가옥 건축과 과실 재배에 관한 본절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는 새 세계에 가옥이 있고 노동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세계를 좀더 실감나게 상상케 하기 위하여 익히 알고 있는 현세상의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있다고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성 경: [사65:22]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 상반절은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려졌던 저주와 정반대되는 내용이다:"...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신 28:30).
ꃨ 나무 - 자연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것 중의 하나로, 이 역시 영원한 삶을 보다 실감나게 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61:3;시 92:12).
성 경: [사65:23]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ꃨ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 원문 직역은 '고통을 위하여 낳지 않을 것이며'이다. 이것은 후손의 운명을 암시한다. 당시 산모가 아기를 낳을 경우, 아이는 출산 과정에서 죽기도 하고 분만이 되어도 짧은 생(生)을 살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 경: [사65:24]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64:7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와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암시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사65:25]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인간의 범죄 이후 여러 현상이 발생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연의 조화가 깨어지고 서로 죽이고 죽는 저주가 임했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롬 8:22). 그런데 본절에서 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와 같은 부조화가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육식 동물의 식성이 바뀔 것이며 심지어 저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나오는 창 3장을 연상케 하는 뱀까지도 더 이상 파괴자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세계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곧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조성된 적대감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청산될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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