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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이사야 53장

by 은총가득 2022. 5. 19.

 

 

이사야 53장

 

- 경건 및 주해적 강해 -

 

E. J. Young은 20세기 최고의 구약학자이다. 그는 셈어에도 능통했을 뿐 아니라 말씀의 계시성과 복음의 핵심에 역점을 둔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특별히 그는 이사야서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사야 53장”은 학구적 면과 경건적인 면을 겸비한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다. 이 책은 그 내용이나 깊이에 있어서 목회자나 신학생들 뿐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유익이 되는 좋은 책이다.

 

머 리 말

 

Young은 머리말에서 이사야 53장은 특별히 기독론 중심적인 입장에서만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주님께서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에 관하여 이사야 53장보다 더욱 영광스럽고 명백하게 예언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Young의 말대로 이사야 53장의 예언 자체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우리는 이 이사야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과의 단절을 화해하기 위하여 성취하실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확연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사야 53장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랄한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본다. 따라서 Young의 지적대로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말 옳은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서 론

 

이사야 53장의 핵심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Young은 이사야 52:13절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 구절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사야 53장에서 충분히 전개시킬 주제를 간단명료한 형태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는 말로 시작함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직접 자신의 메시지의 중심 인물에게로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나의 종”이라고 선포하신 바로 그 분이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즉시 자신의 청중들 앞에 자기가 전할 메시지의 핵심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 “종”께서 최선의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종이 지혜롭게 행하리니”라는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그분의 사역을 통해 이루실 목적이 완전히 성취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동사의 일차적 의미는 단지 분별력 있게 또는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행동이라는 관념도 포함하고 있다. 그의 것이 될 궁극적인 성공은 적합하고 효과적인 행동과 함께 나타날 것이며 풍부한 결실이 그의 노력의 최후를 장식할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처럼 효과적으로 일하시고 그 일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어 가실 그 분이 “내 종”으로 소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종”을 소개하시는 분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음부터 그 “종”은 하나님께 속했으며 그의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참으로 성공의 최고 절정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 “종”은 지혜롭게 행할 것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효과적으로 성취할 것이다. 이것이 13절 상반절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닥칠 치욕스러운 고난에 직면함에 있어서 그분은 승리자로 역사하실 것이다. 그 “종”의 이러한 승귀는 각각 그 시작, 계속, 절정을 의미하는 세 개의 동사로써 묘사되고 있다.

첫번 것은 “그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두번째 동사는 재귀적 의미를 가지므로 “그가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마지막 동사는 하나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것은 이처럼 승귀의 마지막 절정을 진술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은 그 세 동사가 모두 승귀의 최고 정점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철저히 고난을 당하셨던 그분은 이제 모든 것 위에 높이 뛰어난 자리에 들어 올리움을 받으셨다.

몇몇 경건한 이사야서 연구가들도 역시 그 ”종“의 승귀를 보여주는 세 단어를 그리스도의 승귀의 세 단계 즉 그의 부활, 승천, 높은 곳에 성부의 우편에 앉으심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셨을 때 비하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구원의 사역을 수행할 임무를 맡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는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율법 하에 계셨으며 장사지낸바 되어 당분간 사망의 권세 하에 계셨다. 그러나 이러한 비하의 상태로부터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영광스러운 승귀의 자리에 오르셨다. 제 삼일에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은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려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그 선지자가 그 세 동사를 사용한 것은 그 “종”에게 임할 완전한 승귀를 가장 힘있게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좋다.

 

골 고 다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우리의 전한 것”이란 구절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말 자체로만 본다면 그것은 “우리에 관해 전한 것” 또는 “우리가 전해 받은 것” 또는 “우리가 선포하여 전한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견해 중에 어느 것이 정확한지를 우리가 결정짓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우선 그 단어가 쓰인 문맥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요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약간 다른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계속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만일 이 두 표현을 나란히 병립시켜 놓는다면 두번째의 표현은 첫번 것과 그 사상에 있어서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한 것을 ? 여호와의 팔이

누가 믿었느뇨? ? 뉘게 나타났느뇨?

이러한 현상, 즉 문장이 후반부가 전반부와 사상에 있어서 평행을 이루는 것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매우 흔한 것으로 평행법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평행법이 성경에 널리 사용된 이유가 있다. 성경의 시는 교훈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전달할 메세지를 지니고 있으며 평행법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인 것이다.

사53:1에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힘이 있고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하고 하는 다른 문구로써 똑같은 핵심적인 사상이 표현되었음을 발견할 때 그 사상의 힘은 대단히 강화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팔의 나타남과 선지자의 전한 것을 믿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동일한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종종 평행법은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한 기자의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매우 유익하고 유용한 도구가 된다.

 

이와같이 “전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한 것 즉 우리가 선포한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역자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인 것이다.

 

성경에서 “팔”은 활발한 힘을 비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원문:팔)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께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6)고 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팔이 여러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권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포하여 전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우시고 선하신 기쁨으로 자신의 영을 우리의 마음 속에 보내시며 우리에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능력을 주시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신 것을 인해 항상 찬송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복된 선물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본절의 번역은 보통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이라고 시작된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셨다(올라오셨다).” 그런데 이러한 과거 시제의 사용은 즉시 한 문제점을 제기한다. 만일 이 구절이 과거의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환언해서 그 “종”이 이미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하는 것이다.

 

혹자는 동사들이 과거 시제로 쓰였으므로 본서의 저자인 선지자는 장차 올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온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종”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미 살았던 적이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장에서 시제의 사용을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면, 그 “종”은 본 장이 쓰여지기 이전에 이미 살았던 사람이라는 입장을 취하는데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본 장의 문단의 서론을 다시 숙고해 보면, 그 시간적 배경이 미래임을 알게 된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52:13-15). 서론의 이러한 말들 가운데에 그 “종”은 장차 오실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아직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는 아직 그의 속죄 사역을 수행치 않으셨다. 그는 미래에 그렇게 하시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단의 결론 부분도 마찬가지로 서론과 동일한 미래형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호와께서...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적히 여길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53:10-12). 이로써 서론과 결론은 그 시간적 배경이 미래임이 명백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적 과거”라고 알리어진 예언적 언어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주의를 모을 수 있겠다. 영감을 받아 이 선지자가 미래를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이 예언하는 메시지를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고 있으므로 자신에게는 그 일이 이미 발생한 것같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예언을 동사의 미래시제로써 묘사하는 대신에 그는 과거형을 사용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불리웠다(사9:5))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이 아주 명백하다. 그의 탄생은 미래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탄생이 그 선지자에게는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그는 마치 그 일을 이미 발생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이사야 53장의 본론에 나타나고 있다. 흠정역의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날 것이다”라는 번역은 사실상 부정확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번역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고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사야 53장에 언급된 “여호와의 종”은 이사야 42장에 최초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그 “종”의 사역이 미래에 있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사야 42장에서부터 53장에 이르기까지는 사상의 진전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이사야 53장은 42장에서 묘사된 사실 이후에 발생하는 어떤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53:2절을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나가면 우리는 여기서 그 “종”의 처절한 비하로부터 승귀에 관해 전파할 것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이유를 이 구절이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그 “종”의 전 생애의 과정이 멸시와 굴욕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본 절은 또한 그러한 비하에 관한 개괄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그가 자라났다”라는 말은 사실상 그의 생의 전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아무 가치나 중요성도 없는 연한 순들 중의 하나처럼 보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유되고 있는데, 마른 땅에서는 줄기가 그 생존을 위해 어려움과 투쟁해야 한다. 마른 땅이란 식물의 성장을 약속해 주는 토양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나타난다. 이 묘사는 특히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들을 가리키는 적절한 묘사이다. 오히려 황폐한 땅에서 나와서 그 생명의 존속을 위해 힘에 겹도록 분투해야만 하는 약하고 연한 줄기에 비유하였다. 그 종의 모습에 있어서는 매력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훌륭한 체격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우리가 그를 바라보아도 우리로 하여금 그를 흠모하게 할 만한 모습이 그에게는 없다.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3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종”의 비하를 좀 더 상세한 모습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2절에서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서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유한 것들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를 진술하는 것이 3절의 목적이다.

“멸시받아서.” 사람들은 그 “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조소와 멸시를 퍼부었다. 이 단어에는 거절과 배척의 사상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무관심하다고 흔히 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무관심이란 있을 수가 없다.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자는 사실상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영광의 주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 세상은 그 “종”을 배척한다. 그 “종”의 고난은 인간의 구원과 속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종”의 하신 일의 참된 의미를 인식치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를 배척한다. 이것이 이제껏 구세주에 대해 세상이 취해온 태도의 역사이다. 구원을 가져오신 그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 것이다.

“슬픔의 사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배척한다. 즉 그의 으뜸가는 특성은 그의 슬픔에서 발견된다. 그의 전 생애의 특이성 중의 하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그의 견인불굴한 인내에 있었다.

 

“질고를 아는” 그 진술의 뜻은 오히려 그 자신이 질병들을 알게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구를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해서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병”이라는 단어는 죄를 묘사하는 비유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성취될 구원이 육체적 슬픔이나 질병들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그러한 질병이 흘러나오는 원천 즉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아 분명하다.

또한 본 절의 하반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그 “종”을 배척한 태도를 선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 구절은 보통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라고 번역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차마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이 구절은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라는 진술을 되풀이 하는데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강력한 반응이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였으며 우리는 그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수난자”가 짊어진 질고와 간고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기술되어 있다. “우리”와 “그” 사이에 뚜렷한 대조가 있다. 이러한 대조가 본 장을 특징짓고 있는 대리개념을 서두에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와 다수라는 수적인 대조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즉 질적인 대조이다. 한편엔 의로우신 한분이 계시다. 다른 편엔 의가 전혀 없고 단지 병들과 질고와 허물과 죄악만을 가진 많은 사람이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종”께서, 우리의 것이며 또한 우리가 받아 마땅한 이 고난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스스로 담당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가 그것들을 우리에게서 가져가심으로 더 이상 우리 위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이와같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난을 담당하셨다면 그는 우리의 대리로서 행동하고 계셨던 것이 된다. 우리가 질 고난을 그가 대신 지심으로 그는 우리의 대리자가 되셨다.

 

그가 우리의 대리자로서 우리의 죄로 인해서 내리는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말함이 올바르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 동사는 “어떤 사람의 죄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물론 그 죄로 인해서 생기는 죄책을 진다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종”이 우리의 병을 지셨다고 말할 때, 그는 그러한 병들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이 우리 위에 가해지는 대신에 그 “종”위에 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종”은 비록 질고와 슬픔으로 자신을 특징짓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우리들의 슬픔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지를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시고 계시며 그의 맞음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53:5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절에 나타난 대리적 속죄에 대한 명쾌한 진술 때문에 이 구절은 모든 독실한 기독교인에게 귀중한 성구가 된다. 본 절은 놀랄만한 분리적 접속사 “그러나”(   )로 시작된다. 알기쉽게 풀어 보자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맞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맞은 실제 이유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비길데 없는 대속적 고난의 선포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수동형이며 그 “종”이 외부로부터 이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찔림이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범죄자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한 법에 대해서 우리가 범죄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진노와 그 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종”에게 타격이 가해졌다. “우리의 허물”은 - 이렇게 의역할 수 있겠다. - 상처 입히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우리가 입은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입으셨다.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범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상처를 입으셨다.

 

마찬가지로 본 절은 우리의 “죄악이 그를 상하게 만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는 상함을 입었다. 죄악을 범한 우리가 우리 죄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임할 형벌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이 죄악들을 친히 담당하셔서 상함을 입으시고 찔림을 받으셨다. 이렇게 그는 우리를 위해 속죄를 이루어 놓으셨다.

 

그 다음으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선포되어 있다. 우리는 평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으므로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두려운 심판의 눈길만이 우리를 벼르고 있게 되었다. 우리 죄의 결과는 우리를 위한 평화가 있으려면 우리 죄 때문에 반드시 징계가 있어야만 한다. 징계는 우리에게가 아닌 그분에게로 임했다.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징계를 그분이 받으심으로 우리의 평화가 성립된 것이다. 평화가 그“종”의 대속적 죽음과 같은 비범한 방법에 의해서 얻어져야만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누릴 평화는 전쟁의 중단이나 물질적인 번영 그 보다도 훨씬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평화”라는 이 말은 우리는 예전에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에 장벽으로 놓여있던 것들이 제거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언하고 있고,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는 그 “종”을 죽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이 우리 대신에 잔혹한 고난에 순응하심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와같은 고난을 당하심으로 그는 우리를 멸망시킬 저주로부터 치유하신 것이다.

 

이사야 53장을 읽으면 만족설을 가르쳐 주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간에 평화가 있으려면 그 “종”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그 죄인을 감금시키므로 그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은 그를 영원한 죽음과 형벌로 이끌어 간다.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자들은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죄했음을 알고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시키고 자신들을 다시금 그의 면전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어지기를 사모한다. 누구도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없다. 인간은 속죄에 필요한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올 수 없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이루어 놓은 그 희생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었던 유일한 희생이었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종”의 고난이 필요했던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그 “종“은 남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그의 고난의 대리적 성격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역시 죄로 인하여 목자 잃은 양들과 같이 잘못된 길을 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제 길로 갔거늘” (We had gone astray) 이라는 말에서 그 동사의 강세를 주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죄악“이란 단어는 실제적인 범죄를 언급할 뿐 아니라 그 범죄가 포함하는 죄책과 거기에 따르는 형벌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종”이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어기고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이다. 우리를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죄악을 그 “종”에게 담당시키셨다. 우리의 것이었던 그 죄책과 더불어 무서운 형벌이 그에게 전가되었다.

 

이 구절에는 전적부패의 교리가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죄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그릇된 길로 가 버렸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종”의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을 그 “종”에게 담당시킨 분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본 절에는 또한 은혜에 의한 구원 교리가 나타나 있다. 우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대속적인 형벌 교리가 있다.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우리 대신 그 분에게 임했다.

또한 이 구절 속에는 만족과 속죄의 교리가 있다. 바로 그 “종”께서 자신이 죽음으로써 죄를 제거하기 위한 희생 제물을 드리신 것이다.

 

끝으로 이 구절에는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섭리 교리가 나타나 있다. 그 “종”의 고난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뜻대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었다.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 “종”은 자신의 뜻에 거슬리게, 아니면 자원하여 그 죽음의 고통들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본 절은 그가 어떻게 고난받으셨으며 죽으셨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라는 말로 본 절은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 상 그분 자신이 스스로 곤욕을 감수하셨던 것이다. 히브리 동사의 정확한 의미를 그대로 나타내기는 다소 어려우나 그것은 위의 두 가지 진술을 다 뜻하는 듯하다. 즉,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는 말씀과 “그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그가 곤욕을 당한 환경과 형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본 문장의 처음에 그 고통이 다시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보아서 정말로 그 고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술들에서 두 가지 새로운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첫째로 그 고난은 자원하여 받은 것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그 “종”이 인내함으로 고난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변호나 옹호를 위해 자신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는 그 “종”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게 서 있는 어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다. 도살장 앞의 양과 그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은 온순하며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순결함과 인내에 대해 이 묘사보다 더욱 좋은 회화적 묘사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전혀 무죄한 분이지만. 그분은 끝까지 인내하셨다.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라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본문에 대하여 히브리 원문상으로 보면 대체로 세 가지의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하나는 문법적으로 가능한 번역인데 “곤욕적인 심문 때문에 그가 끌려갔다”라는 것이다. 또 가능한 번역은 “곤욕과 심문이 없이 그는 끌려갔다.”라는 것인데, 이 사상에 따르면 그 “종”이 정당한 재판을 전혀 받지 않은 채 끌려갔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흠정역에서 번역되어진 대로 우리는 여자적(如字的)으로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그가 끌려갔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번째의 해석은 지지를 얻을만한 증거가 있다. 우선 그 전치사는 “으로부터(from)”로 번역함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 사실을 “그가 끌려갔다”는 진술이 역시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 “종”이 곤욕적인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음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여기 언급되어 있는 심문이란 그 “종”에게 임한 법적 선고를 가리킨다. 법적 소송은 그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서 고소되었다. 결국 그는 유죄로 판결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잘못이 없는 무죄한 분이었으므로 그에게 언도된 그 선고는 부당한 것이었다. 죄가 없으신 그분 자신이 부당한 심판에 복종해야 하는 이 일에 대한 암시가 이사야서에는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사야 42장에서 그 “종”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는 수행해야 할 위대한 사명을 지닌 분이며 그 사명이 성취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계속하실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다음 이사야 49에서 수행해야 할 그 일의 어려움에 대한 약간의 표시가 되어 있다. 그리고 50장에서는 격심한 고통이 훨씬 더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에서는 이 고난의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 “종”의 고난의 이유는 보류되었다가 이사야 53장에 이르러, 그가 다른 이들을 위해 또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받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에 그가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죄가 없으신 그분이 부당하게도 인간들의 손에 의해 고난을 받아야 했다 것이다. 물론 여호와가 그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를 죽게 한 것은 그가 구원하기로 작정한, 즉 그의 택한 자들의 죄였다. 그리고 그를 무덤에 이르게 한 것도 그들의 죄였다. 여기서 이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정죄할 여지가 없다. 그 “종”을 부당히 심판하고 정죄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온 세상은 이미 정죄받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땅은 사악했다. 진리를 사랑치 않았고 진리가 이 땅에 오자 진리에 대적하여 일어나서 그를 죽였다. 이러한 곤욕적인 체포와 부당한 법적 절차로 인하여 그는 죽음을 당하기 위해 끌려갔다. 이것이 본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사실이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다”라는 평행절에서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해 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만이 아니다.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해석을 숙고해 봐야 한다. 죽음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거의 또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고 결코 망각해선 아니될 것은 바로 그가 죽으신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그 죽음을 설명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된다. 전파되어야 할 것은 그가 죄인들 대신에, 죄인들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희생제물로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사람들은 먼저 죄가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고는 죄를 회개치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해석으로 주제를 환원시키자면, 이사야 선지자는 그 “종”의 죽음에 대한 오해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하여 그가 형벌을 받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말씀하시고 있는 분은 여호와시다. “내 백성은 범죄했으며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무서운 형벌이 그에게 임했다. 그러므로 그가 형벌을 받도록 만든 것은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내 백성 - 선택된 자 - 의 죄였다.” 여기에서 “내 백성”이란 말은 속죄함을 받음으로 영적인 구원을 얻었으며, 의로우신 그 “종”의 의로움을 입은 백성을 지칭함이 명백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그 “종”이 형벌을 받았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고난받음에 있어서 그 “종”의 인내하심과 그의 죽음의 태도를 강조한 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장례(葬禮)의 성질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동사의 주어를 비인칭으로 보아 수동태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그리고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있도록 되어졌다(즉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라는 그 다음 구절 역시 많은 논쟁을 일으켜 왔다. 그가 매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본 후에 사실상 부자와 함께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영어성경에 “그의 죽음 후에”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문에서 “그의 죽음들 후에”라고 복수형을 취하고 있다. 복수형은 참혹하고도 비명적(非命的)인 죽음을 말해주며, 그 “종”의 비명의 죽음과 부자와의 연합을 대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우리 주님이 실제적인 죽음을 상기할 때 누구나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 범죄자들과 함께 되었고 그의 장례는 부자와 함께 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설명과 본 절에 기록된 것과의 사이에는 실제적인 부조화는 없다. “무덤”과 “죽음”이라는 이 두가지 표현은 거의 교체적으로 사용되며 그들 사이의 분리란 생각해 보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본문은 그의 죽음과 장례 후에 그 “종”은 부자와 또 악한 자와 함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종”의 종말에 있어서 한 전환이 나타난다. 그 “종”이 치욕적인 죽음 후에 즉시 명예로운 장례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완전한 무죄 때문이었다. 이 두가지 진술에 의해서 그의 완전한 무죄는 확정되었으며 악행을 전혀 하지 않으신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장례를 악한 사람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하신 것이었다.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그 수난자의 정죄받음과 죽음이 전적으로 불의한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생각을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원하사”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 단어는 하나님의 목적하심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그 단어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기뻐하시거나 즐겨 여기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종”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상함을 입는 것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역할로서 “그”가 상하도록 하셨음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그 “종”의 생명이 속건제물로 드려진다면, 우리는 그 제물을 그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 자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의 죽음, 즉 그의 생명의 피를 쏟아부음은 속죄를 위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린 결과는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인 것이다. 그 “종”자신은 사망에 메이지 아니하시고 다시 살아나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한 씨를 보게 될 것이다.” 이 문구는 영적인 씨, 즉 그 “수난자”가 자신의 죽음으로써 그 죄책을 제거시켜 준 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생명의 원천은 그분 자신에게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종”의 활동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릴 것이며, 한 씨를 보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실 것이다.

 

내 오른 편에 앉으라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1절에는 그 “종”의 승귀가 먼저 언급되고 이어서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묘사가 나타난다. 이 구절은 승귀의 효과적인 또는 결정적인 원인을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봄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자기 영혼의 수고 때문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그 “종”이 이미 그토록 주의깊게 묘사된 영혼의 크나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 개념은 “그가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 두 진술은 중언법(hendiadys)이라고 알려진 문법적인 원칙의 실례인 것이다. 중언법이란 한 단어가 단순히 다른 단어를 수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충분히 볼 것이다” 또는 “그가 충분히 만족하여 볼 것이다”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그 “수난자”의 승귀에 대한 이러한 언급이 나온 뒤에, 성경 전체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명확한 복음적 진술 중의 하나가 나타나 있다. 이 진술은 “자기 지식으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소유한 지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그보다는 “그의 지식으로” 또는 “그분을 앎으로”라고 번역함이 훨씬 본 문맥과 일치하는 것이며 문법적으로 완전한 것이다. 이 지식이란 그분이 누구이시며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적 이해뿐만 아니라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모든 유익을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이다. 그것은 신앙, 신뢰, 지적 이해,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친숙하고 경험적인 관계이다. 이와같이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축복된 생명을 주는 그 “종”에 대한 지식이다.

 

다음 구절의 뜻은 “나의 종 의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것이며”라고 번역해야 가장 잘 부각될 수 있다. 그 “종”은 진실로 의로운 분이시며 죄악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은 그 “종”의 의로움을 받고 그는 그들의 죄악을 받았다. 그것은 영광스럽고 축복된 상호 교환이며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에게 전가되고 그들의 죄책은 그에게로 전가되는 신약성경의 교리를 분명히 예시하는 것이다.

 

그 “종”이 어떻게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가? 본절 마지막의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는 말씀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 죄악을 그 많은 사람들로부터 취해서 자신이 친히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완전하신 의를 그들에게 주신다. 이와같이 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죄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의를 소유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법정적 칭의인 것이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죄악이 제거되고 그 “종”의 완전하신 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를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당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엄중한 형벌을 받은 자로 보였다. 또한 그는 악한 자들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그는 자원하여 행하셨다. 비록 그가 범죄자들 중에 헤아림을 입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중재의 역할을 하신다. 일반적으로 사역적인 의미를 갖는 동사형이 사용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그가 효과적으로 중재한다는 의미를 지닌 듯하다. 이처럼 본 장은 그 “종”이 맡고 계신 제사장직을 진술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인가?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오하고 영감된 말씀으로 믿는 이들에게 신앙과 삶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이사야의 표제라고 할 수 있는 초두에 그 예언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저작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이사야의 저작권 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증언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예언의 첫부분(1-39장)과 둘째 부분(40-66장)에서 되어진 인용들이 모두 신약성경에서는 이사야 선지자 자신의 저작으로 되어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의 인용들에 대해서 마태복음 8: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바울은 로마서 10:16절에서 기록하기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라고 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많은 표적들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지 않았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믿음의 부족은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고 말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물론 여기에 나타난 이사야 53장(이사야서의 둘째 부분)의 인용도 이사야 선지자 자신의 것으로 되어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하기를 그들은 능히 믿을 수 없었으니 그 까닭은 이사야 선지자가 다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사6:10참조)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기꺼이 신약성경의 증언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이러한 말씀들이 참되며 신실한 것임을 믿는다. 이는 곧 이사야 53장의 저자가 이사야 선지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사야 53장에 관해서 매우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오랫동안 학자들이 중요한 두 개의 그룹들로 나뉘어져 왔다. 한편에서는 그 “종”이 한 개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편에서는 그 “종”이란 한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해석적인 양상들, 즉 개인적 해석 대 집단체적 해석은 오랫동안 주도권을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오늘날에는, 집단체적 견해와 개인적 견해 사이의 투쟁이 새로운 해석적 유형의 등장으로 인해 다소 침체되었다. 이 새로운 해석 역시 그 예언의 삶의 상황 또는 그것의 원초적인 성격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둔 해석이다. 이러한 현대의 해석적 표현에 의하면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구 왕권개념(the old ideology of the kingship)에서 유래했으나 이 개념에 밀착되어 있는 어떤 국가적 제한성들로부터 받는 구속에서 이제 벗어났다는 것이다.

또 이사야 53장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채택한 희생의 한 모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실 고난과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후자가 옳다는 것이 신약성경과 역사적 기독교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반대들이 있어 왔다. 이러한 반대 견해들 중 일부는 진리와 불일치 하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가치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말씀들은 신적기원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사야 53장의 위대한 주제를 형성하는 것은 외국의 압제자들이나 부당한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죄책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인간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과학적 방법을 고수하려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전혀 그 신비의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는 지음을 받았기에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으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가 계시하신 사상들을 사고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제시해 주신 사상들 앞에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감사하는 태도로 머리를 숙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어린아이처럼 된 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은혜로우신 형태로 그 선지자에게 본장 안에 그토록 숭고하게 묘사된 그 영광스러운 진리를 제시하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다. 그는 이사야 53장이 그 자체의 증거와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인류를 죄책과 죄의 부패로부터 구원하실 하나님의 종에 관한 예언임을 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역사의 주재자이시며 예언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숙여 경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일찍이 그의 종인 선지자에게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찔리우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신 그분에 대하여 제시하신 사실을 놀라웁게 성취시키셨다.

 

E. J. Young 저/윤영탁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