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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요엘 서

by 은총가득 2022. 9. 20.

 

요엘

요엘 선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언제 사역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사도행전 2장 16절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와 사람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성령충만의 역사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 외에는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엘 선지자는 아모스와 동시대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요엘도 아모스가 탄식했던 것과 동일하게 메뚜기 떼나 기근이나 불의 심판들에 대해서 예언했기 때문이지요(암 4:7-11, 7:1-6).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요엘은 남유다에서 사역했습니다. 요엘은 호세아와 오바댜와도 동시대에 사역했을 것으로 봅니다.

 

광야 여정

여호와의 날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을 5회나 언급합니다(1:15, 2:1,11,31, 3:14). 여호와의 날이 아주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그날은 슬픈 날, 멸망의 날, 주민들이 떠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로 심히 두렵다고 표현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지금 닥친 일일 수도 있고, 더 큰 심판이 임할 거라는 서곡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든 항상 깨어 있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장 1절-2장 11절에는 재앙의 날들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을 후대에 걸쳐서 말해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신기한 이야깃거리로 삼으라는 게 아니라 ‘가르치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미워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메뚜기 떼로 인해 대자연의 황폐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팥중이와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이 때문에 남은 게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황폐해집니다(1:4). 자연재해로 인한 재앙은 오히려 모든 백성들이 회개할 기회를 갖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의 얼굴을 구할 때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1장 14절에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2:12-14)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섯 영역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은혜로우시며, 둘째 자비로우시며, 셋째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넷째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다섯째 더 나아가서 복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계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거나 연기할 경우는 애초에 계획을 잘못 세웠거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돌이키실 때는 전적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회개하며 나아가서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 주께서는 심판의 계획을 세우셨다 할지라도 뜻을 돌이키시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엘서에는 악한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면서 주께로 돌아가 간절히 부르짖으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재앙을 돌이키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할 때 중심은 우리의 행위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으로의 회복정

2장 18-32절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특히 18-2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를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우리에게 양식을 주셔서 풍족한 삶을 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둘째, 다시는 이방 나라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셋째,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군대들을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어 다시는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넷째, 회개하여 돌이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내려주겠다고 하십니다.

다섯째, 그들에게 이전에 있었던 팥중이와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이가 먹은 햇수대로 도로 갚아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28-32절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시간적으로 명확하게 ‘말세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부어주리니”라고 했지요(행 2:17). ‘말세’라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마지막 때에 온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도록 약속하십니다.

 

 

 

여호사밧 골짜기

3장에서 주님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을 벌하시고,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회복하여 형통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열방을 심판하는 법정입니다(3:2).

 

열방의 죄목은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여러 나라로 흩어버리고 그들의 땅을 나누어 가져간 것.

둘째는 포로로 잡아 온 유대인의 젊은 남녀를 인신매매업자에게 판 것.

셋째는 하나님의 금과 은을 부당하게 빼앗고 성전의 보물을 그들의 신전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열방에 내려진 선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행한 그대로 당하게 될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는 피난처와 산성이 되실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애굽은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영원히 있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분적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들에게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요엘서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은 멸망을 받을 것이나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분의 성품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간절히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 긍휼히 여기시고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홍성건>

 

 

 

 

심판의 위협 (요엘 1:1-7)

 

일부 유대인의 생각처럼 본 선지자가 사무엘의 아들 요엘(삼상 8:2)과 동일 인물이였다는 것은 어리석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대 랍비 중 한 사람은 사무엘이 여기서 왜 브두엘로 호칭되는지를 매우 진지하게 증명하려고 든다. 그러나 이 요엘은 그보다 훨씬 후대 사람이다. 요엘 선지는 유다의 죄로 인해, 유다에 임했거나 임할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슬프고도 쓰라린 심판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심판의 규모. 이 심판은 매우 큰 심판으로서 여기서는 두 가지로 표현된다.

1. 이 심판은 지나간 역사에 있어서나 살아 있는 자의 기억으로나 과거 어느 심판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심판이었다(2절). 오래 전 일도 기억할 수 있는 노인이 호소의 대상으로 나온다. 아니, 땅의 모든 거민도 그와 같은 일을 기억할 수 있다면 증언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어느 누구의 기억을 동원하여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우더라도(욥 8:8) 그들은 기록상 그런 일을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죄에 있어서 선조를 능가하는 자들은 선조들이 받은 심판보다 더 크고 쓰라린 심판을 받을 것으로 각오해 마땅하다.

2. 이 심판은 장차 올 시대에도 결코 잊혀지지 아니할 심판이다(3절). "너희는 이 일을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라. 너희가 얼마나 음울한 진노의 표징 아래 있었는지를 자녀들에게 알리라. 이는 그들로 경고를 받고 너희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너희 자녀에게 경고를 주려는 목적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세대에 고할 것이다." 그들은 진기한 일처럼 고해야 할 것이다. 진기한 일은 화제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좀체로 볼 수 없는 사고는 연감에 기록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몇 년 이래의 대화재니 서리니 풍해니 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일로써 자녀를 교훈하기 위해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일을 말해 줌으로써 그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심판을 경외하게 하며 그 앞에서 떨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비뿐만 아니라 그의 심판도 후손에게 전하여 기억시켜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심판 자체. 이 심판은 대군에 의한 유다국의 침략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해석가들은 이것을 인간의 군대 즉 앗수르 군대로 이해한다. 산헤립 휘하의 앗수르 대군은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취했다. 그때 앗수르 군대는 전국을 파괴하고 유다의 산물을 유린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어떤 이들은 여기에 나오는 네 종류의 동물이 유대 민족을 번갈아 가며 압제한 내 왕국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유대 민족은 실제로 한 나라의 분노를 피해 나오면 또 다른 나라가 멸망시키는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유대 해석가들은 이것을 적군의 내도와 적군의 무수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생각한다. 갈대아 주석도 이 네 동물을 언급하지만 나중 2장 25절에는 이들 대신에 "열방, 민족, 방언, 언어, 권세자 그리고 복수하는 왕국" 이란 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군대라기보다 문자 그대로 그 땅에 몰려 와 모든 소산을 먹어 치운 곤충의 대군으로 이해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메뚜기는 애굽의 재앙 중 하나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다" (출 10:14)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메뚜기는 애굽에 다시없었고 이런 해충은 유다에도 다시없었다. 크기에 있어서는 애굽의 메뚜기 같은 것이 없었고 수효와 끼친 해독에 있어서는 여기 나오는 곤충 같은 것이 없었다. 애굽의 메뚜기 재앙은 불과 며칠 간 계속되었을 뿐이지만 이 심판은 4년 간 내리 계속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하나가 남긴 것을 다른 하나가 먹어 치우는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이 네 동물이 일 년에 대거 몰려 왔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구약 역사에서 이런 일이 언제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여기서 주로 의도하는 것은 곤충에 의한 황폐라고 해도 언어적 표현을 봐서는 적군의 침입에 의한 멸망을 가리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이 땅을 삼키는 보다 덜한 심판에도 겸비치 아니하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거민을 삼키는 보다 큰 심판을 보내고자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심판의 표현을 통해 경고를 삼도록 하라고 명령받는다. 만일 벌레의 나라에서 그들이 진압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가 그들을 멸망시키러 올 것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1. 그들을 치라고 보냄을 받은 동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메뚜기와 황충과 팟종이와 늣이다(4절). 우리는 이들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묘사할 수 없다. 이들은 전부가 작은 곤충이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사람이 손이나 발로 쉽사리 눌러 죽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수많은 무리나 떼를 짓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떼는 자기들 앞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먹어치우는 막강한 군대가 된다. 하나님은 만군의 주 여호와시며 모든 피조물을 장악하고 계셔서 그가 원하실 때에는 극히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미물로 교만하고 패역한 백성들을 낮추실 수 있고 억제하실 수 있다는 데 주목하자. 인간은 벌레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인간이 벌레보다 못하다는 것은 이로써도 나타난다. 즉 하나님이 원하실 때면 벌레도 인간에게는 당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인간의 국토를 유린하며 인간이 수고해 얻은 것을 먹어 치우고 마량을 없애며 강력한 국가의 생존 수단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도구가 연약하면 할수록 그의 권능은 더욱 커지며 칭송을 받는다.

2. 그들은 어떤 힘과 어떤 진노로 왔는가? 그들은 여기서 민족이라고 불리우는데(6절), 이는 그들이 구체화되고 동의에 의해 행동하며 마치 공동 목표를 지닌 것같이 행하기 때문이다. "메뚜기는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간다" (잠 30:27). 거기서는 이것이 그들의 지혜로운 본보기로 언급되어 있다. 약한 자들이 여럿이 연합하며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려깊은 행위이다. 그들은 강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무수하기 때문이다. 저울 위의 작은 티끌은 가벼워서 쉽사리 날려 가지만 그것도 쌓이면 태산같이 무거워진다. 마찬가지로 한 마리의 벌레는 거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요나의 박넝쿨을 시들게 하는 데는 한 마리의 벌레가 이용되었다). 그러나 벌레도 수가 많으면 놀라운 일을 행한다. 많은 벌레는 굉장히 무서운 일을 해내기 때문에 사자, 특히 큰 사자의 이빨을 가졌다고들 한다. 메뚜기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면 사자같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메뚜기 기사를 읽는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았다(계 9:8). 그들은 어떤 해를 끼치는가?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것을 다 먹어치운다(4절). 하나가 남기면 다른 것이 삼킨다. 그들은 풀과 곡식뿐만 아니라 나무도 전멸시킨다(7절). "그들은 포도나무를 멸한다." 이들 해충은 열매가 익는 동안 그 열매의 보호처가 되는 잎을 먹어서 나무를 멸하고 그들은 무화과나무 껍질도 먹어서 나무롤 고사시킨다. 이렇게 하여 무화과나무는 무성하지 못하게 되며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게 된다(합 3:17).

Ⅲ. 술 취한 자들에게 이 심판을 애통해 하라는 부름이 주어진다(5절).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그들은 이 재난을 통해 현저한 고통을 의식해야 한다. 이 심판은 그들의 민감한 데를 건드릴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단 포도주는 그들의 입에서 끊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극도의 사치로 남용되는 위안물을 빼앗아 가시고 바알을 위해 예비되며 상스러운 욕정의 양식과 기름이 되는 곡식과 포도주를 도로 찾아가시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심판이 가장 쓰라린 슬픔을 준다. 사람이 관능의 만족에 행복을 두면 둘수록, 현세적 고통은 더욱 더 가중된다. 물을 마시는 자들은 포도나무가 멸종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 없이는 몰라도 포도주 없이는 잘 살 수 있었던 때문이다. 나실인에게는 포도나무의 황폐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은 곡하며 부르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욕망의 충족을 위해 많은 즐거움을 필요로 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고통과 실망에 자신을 노출하게 된다.

2. 이것은 그들이 전에 하나님의 노여워하시는 표징 아래서도 매우 몰지각하고 우둔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깨어 울으라고 촉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안일한 가운데서 깨어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채찍에 의해 깨어나게 될 것이다. 멀리 있는 심판에 놀라 일어나지 않는 자들은 그 심판에 잡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금단의 열매를 나누어 먹으려고 할 때에는 다른 종류의 금지가 잔과 입술 사이에 임하여 그 입에서 술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다.

 

심판의 위치 (요엘 1:8-13)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심판은 매우 비탄스러우며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다 휩쓸어 가는 심판이다. 이 심판은 주정뱅이의 낙을 빼앗아갈 것이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악한 심판이라도 잘 견딜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심판은 주정뱅이가 아닌 자들의 생활 필수품까지도 탈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듯 애곡하라는 요청을 받는다(8절). 완전히 결혼하진 않았지만 어릴 때 정혼한 처녀한테는 그 약혼자가 실제 남편이나 다름없다. 또는 갓 결혼한 젊은 처녀의 젊은 남편이 갑자기 요절할 때처럼 애곡하라는 것이다. 연애 결혼을 한 신혼 부부는 새로운 정이 샘솟듯하여 서로가 어디를 보아도 사랑스럽고 기쁘다. 그들 사이에는 큰 애정이 생겨나 있어서 만일 한 사람이 죽는다면 그 슬픔은 여간 크지 않을 것이다. 곡식과 포도주를 잃는 그들의 슬픔도 이처럼 지극할 것이다. 우리가 피조물의 위로에 많이 결합되면 될수록 헤어지기는 더욱 더 어려울 것이다(본문에 평행하는 구절은 사 32:10-12 을 참조). 이 황폐를 슬퍼하는 자들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농부이고 나머지 하나는 성직자들이다.

Ⅰ. 농부와 포도 재배자들은 애통해야 한다(11절). 그들이 자기 수고와 염려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기들의 모든 노동과 수고가 애쓴 보람도 없이 될 것이며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고의 열매가 목전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없어질 양식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은 조만간에 자기들의 수고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이 포도잎과 열매가 포도원에서 사라져서 포도나무가 시들어 버리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곡함으로써 자기들의 지극한 슬픔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포도 재배로써 소작료도 물고 가족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포도나무가 시들었으니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멸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10절). 밭은 황무하여 거기서 산출되는 모든 것이 소멸된다. 토지는 황량하다. 땅은 우울한 모양을 하고 있고 슬픈 듯이 보인다. 그 땅의 모든 거민들은 잃어버린 것 때문에 눈물을 짓고 굶어 죽을까봐 걱정한다(사 24:4; 렘 4:28). 곡식 즉 생명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양식은 진하였다. 묵은 술을 다 마시면 내오려고 지하실에 저장해 둔 새 포도주가 말라서 밑바닥을 부끄러워한다. 기름은 감람이 떨어졌으므로(갈대아 주석) 다하였거나 줄어들었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을 인하여(시 104:14, 15)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땅의 모든 소산물을 상실하고 핍절하게 됨을 슬퍼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연명을 위해서든 즐거움을 위해서든 그들에게 땅의 소출을 주셨던 것이다(11절, 12절). 밀과 보리는 당시의 두 가지 주요 곡식이었다. 밀은 부자용 곡식이었고 보리는 가난한 자의 식량이었다. 그러므로 빈부가 이 재난을 함께 당한다. 멸망당하는 나무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7절) 뿐만 아니라 이 두 나무는 물론 유용하고 필요한 작물이었다. 그러나 다른 나무들도 즐거움을 주는 데 필요한 작물이었다. 이를테면 석류나무와 대추나무, 사과나무 그리고 밭의 모든 나무도 과수원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필요했고 목재용 나무도 과수용 나무처럼 유용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밭의 소산은 다 없어졌던 것이다(11절). 이렇게 해서 인간의 희락이 말라 버렸다. 전체적인 큰 기쁨을 표현하는 데 수확의 기쁨이 사용되는데 그 기쁨이 없어지며 수치와 애곡으로 바뀐다. 수확의 낭패는 인간의 기쁨을 마르게 한다. 감각의 즐거움을 행복으로 여기는 자들은 그 즐거움을 빼앗기거나 향락이 방해를 받을 때에는 그들의 모든 기쁨을 상실하고 만다. 이에 반해 감각적 즐거움을 거룩한 무관심과 경멸감으로써 바라보며 하나님을 자기 마음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않을 때에도 자기 구원의 하나님 되신 분을 기뻐할 수 있다. 그때 영적 희락은 결코 시들거나 진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느 때 보다 더 무성해진다(합 3:17, 18).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피조물의 모든 위안은 얼마나 불확실하며 허무한 것인가? 우리는 세상 위안물의 존속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본문에서도 그렇다. 하늘은 철을 따라 적시에 비를 내려 주었고 땅은 지력을 발산해 주었다. 정해진 수확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그들은 대풍작을 의심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원수들이 습격하여 모든 것을 황폐시키다니 이게 웬 말인가! 그들은 칼이나 불로만 습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수 사납게 사고 당하기 쉬운 것들로 보물을 삼아 쌓지 않는 게 현명하다.

2. 우리가 부단히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의존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은 얼마나 큰가? 우리 손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곡식의 이삭이 다 익으면 그것을 우리의 소유로 확신하고 안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익은 곡식을 집에다 가져다 놓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어 버리시면, 만일 그것을 축복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곡식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3. 죄는 어떤 파괴 공작을 꾸미는가? 낙원도 그곳에 거하는 자들의 죄악을 인하여 황무지로 변하며 옥토 즉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도 볼모지로 바뀐다.

Ⅱ. 제사장들 즉 여호와의 사역자들도 애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재난에 깊이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13잘). 아니, 그들은 슬퍼한다(9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제사장들은 단에 수종드는 자로 불리우는 데 이는 그들이 제단을 수종했기 때문이다. 또 제사장은 여호와의 사역자(선지자는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라고 부른다)로 호칭되는데 이는 그들이 제단을 수중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하며 그에게 영광을 드리는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이며 그에게 수종드는 자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항상 기뻐하며 찬송에 매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슬피 울으며 곡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9절) "너희" 가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13절). 이 말의 의미를 부연하면 이렇다. "그는 특별히 너희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다른 이스라엘인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에 없다. 그러므로 지성소의 봉사에 방해되는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너희에게 기대된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1. 백성들은 땅의 소출이 순조롭게 생산되는 동안 여호와께 드릴 것은 제대로 바쳤으며 제단에는 헌물을 드렸고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에게도 십일조를 바쳤다. 사람들이 자기 죄의 양을 속히 채우면서도 외면적 경건 행위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양식과 술이 떨어질 때 소제와 전제가 끊어질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그 재난 중에서 가장 쓰라린 본보기이다. 국가적 환난이 신앙 행위에 장애가 되는 한 제사장들, 곧 여호와의 사역자들은 그 때문에라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이를 더 슬퍼해야 한다. 빈곤이 경건의 쇠퇴와 하나님의 직분에 대한 태만을 유발시키며 백성들의 신앙심을 질식시킨다면 그것은 참으로 쓰라린 심판이 된다. 기근이 극심할 때는 하나님도 자기 제사를 받으실 수 없고 제사장들은 부양물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수종드는 자들은 슬피 울어야 할 것이다

 

 

금식의 선포 (요엘 1:14-20)

 

 

우리는 앞에서 메뚜기가 땅의 소산물을 다 먹어버림으로 인해 흘리는 많은 눈물을 보았다. 이제 여기서는 그 눈물이 올바른 경로로 흘러 드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심판은 매우 중했다. 그들은 여기서 이 심판 가운데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의 강한 손을 인정하고 스스로 겸비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Ⅰ. 국민적 금식일이 선포되고 있다. 제사장들은 금식일을 지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도 애곡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들의 애곡도 촉구해야 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라. 세상 일에서 일부 시간을 따로 떼내어 신앙 행위와 회개의 표현과 다른 비상한 헌신 사례에 사용하라." 국민적 심판 아래서는 국민적 회개와 겸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통곡과 애곡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회개 시에는 슬픔과 수치의 모든 표시와 함께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그의 은총을 탄원해야 한다. 그런 때 한 민족이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인가?

1. 이를 위해서는 날을 지정해야 한다. 그 날은 금제의 날이다. 국민이 다른 일상적 일을 금제 당하고(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보다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육체적 오락도 제지받아야 한다.

2. 그 날은 금식일이 되어야 한다. 이 날은 음식과 주류를 금하는 날이다. 이 날은 꼭 필요한 것도 먹지 않는 날이다. 니느웨 임금은 금식일을 정하였고 그 날에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욘 3:7). 금식 때에는 우리가 필수적 음식조차 입에 댈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며 더욱이 우리는 그런 음식을 몰수당했고 완전히 박탈당해 마땅하다는 것도 자인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벌하고 우리 신체를 억압해야 한다. 신체는 범죄의 빌미가 되어 온 까닭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영혼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육체를 정비해야 하며 음식을 갈망하는 식욕의 절제를 통해 생명보다 나은 것을 갈구하는 영혼의 소원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금식은 그들에게 특히 시기 적절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목하 그들의 양식과 술을 박탈하고 계신 까닭에서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현재의 고난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너는 금식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금식하겠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3. 성회가 열려야 한다. 장로들과 백성들, 지배층과 피지배층, 심지어 그 땅의 모든 거민이 함께 모여야 했다. 이것은 범 국민적 굴복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들로 더욱 수치를 느끼도록 하며 서로를 분기시키고 자극시켜 신앙적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국가적 범죄에 가담했고 국가적 재난에 동참했으므로 그들은 모두 참회의 고백에 같이 참여해야 했다.

4.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함께 나아와야 했다. 그곳은 기도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것으로 소망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가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잘 될 것으로 바랄 수 있었으니 그곳이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의 예표였던 까닭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이 전을 향해 드리는 모든 청원을 용납해 달라고 한 솔로몬의 기도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또 그들의 현재 형편도 그 기도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왕상 8:37, 38).

5. 그들은 금식일을 정하며 성수하며 진실한 신앙심으로 지켜야 했다. 만일 성수하지 않는다면 금식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6.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간청을 드려야 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에는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다(슥 7:5).

Ⅱ. 금식일의 선포와 엄수를 유도하기 위한 몇 가지 고려가 제시된다.

1. 하나님은 그들과의 논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은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기 때문이다" (14, 15절). 이것은 그들이 그 때 목격하고 있던 심판의 계속이나 결과를 의미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심판을 가리킬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이 심판은 단지 그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간에, 그들은 이 심판을 애곡의 재료로 삼으라고 교훈받는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그에게 부르짖으라."

(1) "여호와의 심판일은 매우 가깝다. 그 날은 임박하고 하다. 그 심판 날은 졸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졸아선 안 된다. 지금은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자신을 내놓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 심판날은 매우 두려울 것이다. 그 날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 "그 나은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사 13:6 참조). 이 심판은 징계가 아니라 멸망이다. 이것은 연약한 피조물의 손에서가 아니라 전능자의 손에서 나온다. 누가 그의 진노의 능력을 알랴? 아니, 누가 그의 진노의 능력을 모르랴? 두려운 심판이 연유하는 분께 부르짖지 않고 우리가 어디로 가서 부르짖겠는가? 우리는 그에게로 도망치지 않고서는 그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으며 전능자에게 순복하고 간청하는 방법이외에는 전능자로부터 나오는 멸망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가 그와 화친하는 것이 곧 그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사 27:5).

2.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 아래 있음을 보았다. 그때는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은 매우 큰 까닭이다(16절).

(1) 그들은 자기 집을 조사해 봐야 했다. 거기에는 전과 같은 풍족함이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식탁을 잘 차리던 자들도 이제는 식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어디를 가봐도 이 현상은 매 한가지 였다.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으로 우회하지 않는 자들이 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목전에 있는데도 그 마음이 떨지 않으며, 겸비치 않는 자들은 참으로 완악하다. 하나님이 손을 드실 때 사람들이 그 손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그 손을 대실 때는 그들이 보게 될 것이다. 양식은 우리 목전에서 여러 번 끊어지지도 않는 양식을 위해 수고하도록 하자.

(2)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들여다보며 그 곳에 남은 심판의 흔적을 보아야 했다. 기쁨과 즐거움이 하나님의 전에서 끊어졌다. 우리 하나님의 집은 기쁨과 즐거움의 고유한 장소라는 점을 기억하자. 다윗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갈 때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시 43:4)라고 했다.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이 거룩한 일들의 부패로든 거룩한 사람의 박해로든 하나님의 전에서 끊어질 때, 진실한 경건이 쇠하고 사랑이 식을 때는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이며 "오호라" 하고 부르짖을 때이다.

3. 선지자는 다시 몇몇 구체적 사례로 그 재난의 비탄스러움을 묘사한다. 곡식과 가축은 농부의 주요 재산이다. 그런데 농부는 이 두 가지를 다 빼앗기게 된다.

(1) 황충이 곡식을 다 먹어버렸다(17절). 그들이 곡식을 축적하는 데 사용하던 창고는 비었고(흠정역:황폐했고) 곳간은 무너졌으니 그 이유는 곡식이 시들었던 때문이다. 소유주들은 넣을 것도 없고 또 어떤 작물도 얻을 가능성이 없으므로 창고는 수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씨는 비가 너무 많이 왔거나 너무 적게 왔거나 아니면 지하 곤충의 잠식 때문에 흙덩이 아래서 썩어버렸다. 농부는 한 작물에서 낭패하더라도 다음 작물에서 벌충할 것을 바란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예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뿌린 씨 자체가 엉망이기 때문이다.

(2) 가축 역시 목초 부족으로 멸망한다(18절). 생축은 탄식한다. 선지자가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이 일에 느낀 바 있어 하나님의 심판을 유념케 하기 위해서다. 가축의 신음 소리는 완악하고 회개치 않은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줄 터였다. 소떼가 민망해 한다. 아니, 공용지에서 살며 매우 짧은 목초에도 만족할 양떼조차 피곤해 한다. 우리 죄로 인해 고통받으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저주라는 이중적 부담 아래에서 신음하는 짐승들을 주목하자.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았느니라."

Ⅲ. 선지자는 그들을 분기시켜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만든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본보기가 고려의 대상으로 제시된다.

1. 선지자 자신의 모범(19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나이다." 그는 자기가 실행을 결심하지 않는 일은 그들에게 부과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이 그 일을 행하려고 하든 않든 자기만은 그 일을 행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설사 하나님의 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시켜 감동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그것에 감동되어야 한다. 그들이 남으로 하여금 여호와께 부르짖도록 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자신은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도에서 부르짖기도 해야 하며 열렬하고 간절해야 한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언제나 멸망과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만든 것을 개인적 고난이라기보다 국가적 범죄였다.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던 것이다. 이것은 타는 듯한 태양 열을 가리키는 것 같다. 땅의 소산물에게는 뜨거운 햇볕이 불이나 다름없다. 태양이 모든 식물을 태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로 다투시겠다고 부르실 때에는 하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어 구원을 간청해야 할 때이다(민 11:2; 암 7:4, 5).

 

2. 짐승들의 모범(20절). "들짐승은 탄식할 뿐만 아니라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나이다(흠정역:부르짖나이다). 들짐승도 본능을 따라 주께 긍휼과 연민을 호소하나이다. 그들은 이성적 능력이 없고 또 이성을 바탕으로 계시된 종교를 이해할 수도 없지만 자연적 본능에 의해 하나님께 의존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짐승들이 재난을 인하여 신음(탄식)할 때 만큼은 그들이 자기에게 부르짖기라도 하는 듯이 즐겨 해석하신다. 하물며 자기 자녀들의 탄식이랴? 그 자녀들이 너무 약해서 말도 할 수 없는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탄식을 은혜롭게 해석하실 것이다(롬 8:26). 여기서는 들짐승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말한다(흠정역) 이것은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며(시 104:2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다" (욥 38:41)는 표현과 같다. 여기서 야수들이 호소하는 것은 물과 풀이 없기 때문이다. 극도의 한발로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기 때문이다. 곡식과 포도주를 위해서만 하나님께 부르짖고 감각적 즐거움 이외에는 호소할 게 없는 자들은 이들 짐승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아니, 이들 짐승이 이 경우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자들의 우매를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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