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 본문> 눅 5:1-11
I. 들어가는 말
1. 우리는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신앙이 성장해 가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숙한 모습은 오순절 날 성령충만을 받은 후 제자들의 대표로서 오순절 날 유대인들에게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에서 여러 사역들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11장에 걸쳐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는 헤롯에 의해 체포되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풀려납니다.
2. 베드로의 중간 단계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신앙고백입니다. 누가복음 9장 20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니이다.” 두 번째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장면입니다(눅 22:54-61). 여기에는 베드로 신앙의 긍정적인 것도 볼 수 있고, 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도 봅니다.
3. 그렇다면 첫 번째 장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게네사렛, 즉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다 예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베드로 신앙의 기초석이 된 사건입니다. 후에 베드로가 체포당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병자를 일으키고,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사역을 했지만 베드로에게는 그의 신앙의 고향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과의 만남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다음 “밖에 나가 심피 통곡하니라.”(눅 22:62)고 했습니다. 그 때는 자신이 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는 무엇을 더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 때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예수를 배반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II. 베드로 신앙의 기초
1.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꼼꼼히 고찰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현재 매우 고차원의 신앙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고, 큰 일을 하는 분이 있을지라도 처음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이 없었다면 그 처음이 여러분 삶 속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2.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다가간 것입니다. 베드로와의 첫 만남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려 쓴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예수님은 사람들을 육지에 앉히고 배에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말씀하시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바다같이 큰 갈릴리 호수에서 바람이 대개 호수 안에서 육지로 불기 때문에 마이크가 없던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잘 들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배를 공짜로 빌려 쓴 것이 미안했던지 베드로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전문가요, 베드로는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인데 예수님이 말씀 이야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인 단순한 사람 대 사람의 일이라면 예수님은 결례를 행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전공을 무시하고 끼어들은 것입니다. 대개 자기 일에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있듯이 예수님도 그런 형국입니다.
4. 어쨌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이것이야 말로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한 수 코치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저는 이것을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미쳤었나? 왜 어부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그물을 내렸을까?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말은 8절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거기에서는 신앙고백적으로 예수님께 신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으로 쓰는 “선생님”입니다. “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도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여”라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서 그냥 그렇게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5. 저는 베드로가 특별히 순종적인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서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따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어차피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수확이 없었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보자 하는 것입니다. 밎져 보았자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이 배를 빌려주는 동안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면 내가 그분의 말대로 할 수 있겠다.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위의 감정이 병존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베드로가 아직 시앙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대하고 그 말대로 그냥 따라 해 본 것입니다.
6. 우리 중에도 아직 이 단계에 머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누구의 소개로 교회에 나와 보니 참 좋은 말씀이 있고, 한번 그 말씀대로 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여기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뭔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한 번 그대로 따라 해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100% 믿어지지 않아도 말씀을 듣고 긍정적으로 그대로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7. 백 퍼센트 순도의 믿음은 아니었지만 베드로의 이런 행동에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6절) 아마도 베드로는 지난 밤에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 쪽으로도 그물을 내려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대로 했더니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것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잡혔든지 자기 배와 동료의 배에 고기를 다 채우자 배가 가라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의 죄 문제 해결
1. 오늘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더라가 아닙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어 해 보았더니 그대로 되네. 이 분 점장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다음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고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로마의 치하에서 이방인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운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고대했는데, 베드로는 이 장면에서 바로 자기가 만난 분이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2.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 이사야서 6장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 벌벌 떨고 있는 이사야를 생각나게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베드로는 신현현 앞에 저절로 무릎이 꿀려졌고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자동적으로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3. 이것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현현 앞에 무서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눅 1:13, 30; 행 18:9; 27:24). 이것이야 말로 베드로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공식적인 신앙고백도 했고, 잠시 예수님을 부인했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같이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 없이 돈 궤를 맡아 이익을 얻으려고 처음부터 예수를 좇아갔던 가룟 유다는 결국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4.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가 처음으로 고백한 것,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후예가 되는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첫 과정이요 단추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영국에서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로 넬슨 제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프랑스와의 ??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인데, 런던의 가장 중심지인 트라팔과 광장에 가면 이 사람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죽기 전에 목사님을 청해서 고민을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리적으로는 많이 들었지만] 제가 죄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이 사람은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5.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첫 번째로 느끼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당신들은 죄인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예수 믿고 어떤 일이 잘되고, 기분이 좋아지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기 좋아합니다. 요즘 유명한 설교자 중에 죄에 대한 깊은 터치가 별로 없습니다. 신앙은 죄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 속 깊이 깨닫지 않으면 신앙의 문에 아직 못 들어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느끼고, 깨닫고, 해결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6. 어떤 사람은 저에게 와서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한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죄인이야?” 우리는 죄인하면 형사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를 생각합니다. 감옥소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도 법을 어긴 죄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인으로 확정되기 까지는 법정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판사는 증거와 정황을 참작하여 법이 정한 벌을 내립니다. 하지만 죄가 많은 데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고, 반면 제가 적은데도 상대적으로 크게 처벌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피의자가 좋은 변호사를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는 사람인가와도 관계가 있지만, 또 한 가지는 검사와 판사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마음과 행동을 100%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분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어떤 구체적인 일을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 속에 벌써 더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는 복잡한 심문 절차와 기간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곧바로 유/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7.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진 증거입니다. 1) 알람 시계를 처음에는 들리지만 매일 울리다보면 그냥 알람시계가 울려도 잠이 듭니다. 2) 노동자들이 손을 많이 사용하면 굳은 살이 생겨 감각을 잘 못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3) 남도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옆에 사람을 보고 위안을 받고 자신이 정당하다고 계속해서 마음 속에 mind-control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야. 그만하면 훌륭해.”
8. 죄라는 것은 특정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7에는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 죄는 바로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죄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죄는 무슨 특정한 잘못을 했다기보다 마음 속이 올바르지 않아서 무슨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입니다.
9. 우리는 죄를 어디에다 대 보아야 합니까? 1) 형법? 2) 양심의 법? 3)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의 하나님의 말씀?-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깨끗하게 하얀 가를 대 볼 때 먹지와 대보지 않습니다. 회색지에 대보지도 않습니다. 백지에 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지는 말씀 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말씀 앞에 자신을 대 보면 금방 자신이 죄인인 것이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베드로처럼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옆 사람에게 대 볼지 모릅니다. “내가 제 보다는 낫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대 보아야 합니다.
IV. 나가는 말
1. 우리 중에는 베드로와 같은 죄의 고백을 한 경험이 있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올챙이 적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도 그 후보 가운데 하나로 넣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는 의식을 가질 때 이미 교만해 진 것이고, 갈릴리 사건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가서 놀다가 정작 복음서의 첫 사건 즉 갈릴리 사건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본문> 눅 16:19-31
I. 들어가는 말
1. 본문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중 약간 의아한 것은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거지의 이름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한 분당 재벌과 그 집 거지 동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지가 아니고 부자입니다. 부자가 죽어 음부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음부란 유대교에서 본래 지하라는 뜻으로 땅 속을 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 성서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이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자신의 형제들이 여기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세상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간절히 청원했지만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은 그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들어주지 않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2. 천국와 지옥의 문제는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과연 천국은 있는 것인지, 또 있다면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II. 천국은 있는가?
1. 먼저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날에 한 구 소련 우주 비행사가 우주에 가 보았더니 천국은 없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미국 비행사는 우주에 가 보았더니 정말 우주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믿어지더라는 고백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천국이 있다는 것도 또 없다는 것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간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100%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는 장소적인 천국 개념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천당(天堂)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은 불교에서 온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천국은 낙원(Paradise)이라고 표현되어 분명히 나옵니다. 이곳은 사후에 신자가 들어갈 곳입니다.
1)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을 의탁한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눅 23:43).
2) 바울은 스스로 “낙원”에 이끌려 간 체험을 고린도후서 12:4에 이야기합니다.
3) 요한계시록 2: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4) 또 요한복음 14:1 이하에도 예수님은 고별 설교를 통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5) 오늘 본문에서는 음부와 반대되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천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 성경에서는 낙원보다는 지옥 혹은 음부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내세 사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죽어서는 땅 속인 음부로 내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음부는 지옥이 아니라 땅속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음부는 낙원의 대척어로 쓰입니다(마 11:23; 16:18; 눅 15:23; 행 2:27, 31; 롬 10:7; 계 1:18; 6:8; 20:13, 14). 또 예수님은 지옥이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게헨나’라고 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게힌놈’(힌놈의 골까지)이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이곳은 자녀들을 불로 지나게 하는 인신 제사가 이루어지고 우상 숭배의 장소였습니다. 본래는 죽어서 들어갈 곳이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신약에서는 심판을 받기 위해 죽어서 들어가는 곳으로 쓰입니다. 여기에서는 불의 고통이 있습니다.
1)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는 곳. 눅 16:24
2) 불이 계속 타는 곳. 마 5:29
3) 꺼지지 않는 불 막 9:43
4)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 막 9:48
5) 꺼지지 않는 불로 소금치듯 당하는 곳. 막 9:48-49
6)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 마 25:30
7) 마귀와 그 사자들을 향하여 예비된 곳. 마 25:41
8) 영원히 불타는. 곳 마 25:41
9) 유황 불붙는 곳. 계 19:20
10) 바깥 어두운 곳. 마 8:12
11) 둘째 사망의 불 못. 계 20:15
12) 영벌 받는 곳. 마 25:46
13) 영원한 멸망의 형벌 받는 곳. 살후 1:9.
4.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상 지옥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하나님은 악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약한 연민이나 감정이 아니라 바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III.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1.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교리적으로 보면 간단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지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이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거지였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거지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또 부자가 음부에 들어간 것도 예수 믿지 않아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부자로서 호화롭게 즐기는 삶을 산 것 밖에 없습니다. 혹시 이 사람은 부자라서 음부에 들어간 것일까요?
2. 먼저, 이 이야기는 신약의 신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내세가 있다면 자신들 모두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 유대인 중에는 내세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예수를 믿는 신앙, 불신앙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대로 어떻게 올바로 사는 것인가를 이야기 한 것이고, 여기에서 출발하여 어떤 사람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신앙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3.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사후 세계에서는 부자와 거지의 처지가 역전되었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부자가 고통을 받는 것이 이 땅에서 단지 부자로 살았기 때문이고, 나사로가 위로를 받는 것은 이 땅에서 고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부자는 16:13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 많은 부자들이 재물의 종이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런 말씀을 비웃습니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예수님은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16:19에 보면 이 부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도 하지 않고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자신의 인생만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16:30에 보면 천국에 들어갈 자는 바로 회개한 자입니다. 앞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부자의 말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편지나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회개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5. 그렇다면 누가 회개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 본문에서는 공개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을 회개라고 봅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돈지갑이 거듭난 것을 회개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로 회개했다고 해도 과연 돈지갑이 회개했는지를 보아야 그 사람이 참으로 회개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여기서 부자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사로 같은 거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홀로 독존하여 자신의 삶을 즐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 바로 앞 구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눅 16:13). 이에 대해서 누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누가는 대단히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사람의 회개가 재물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하고 재물에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누가는 이들이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예화) 참으로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성직자는 돈과 상관없이 살 것 같은데 요즘 메스 미디어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대교회 목사님들이야말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3) 가난하다고 모두 ‘나사로과’는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에 대해서 포기하고 선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들도 부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난한 것이 싫었던 것이고 기회가 되니 도로 부자가 된 것입니다.
6.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개했는지를 보려면 물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의 인품을 보려면 그 사람의 돈 씀씀이를 보면 됩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는 가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영적인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 뒤에는 검은 돈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해 놓고 물질적으로는 어떻게든 부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태도입니다.
IV. 나가는 말
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가 보다는 어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가에 대한 본문입니다.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처럼 살면 음부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앞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한 돈을 섬긴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기도 따라잡기
<본문> 눅 22:39-46 (cf. 마 26:36-46; cf. 막 14:32-42)
I. 들어가는 말
1.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특별히 인생에서 난관 앞에 섰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겟세마네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듯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기도의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흔히 겟세마네 기도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는 이 기도의 장소를 감람산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올리브(기름) 산입니다. 그런데 겟세마네라는 말이 ‘갓세마니’라는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표기한 것인데 그 뜻은 기름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곧 겟세마네와 감람산은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혹은 감람산은 산 전체를 겟세마네는 거기에서의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본문의 감람산 기도는 겟세마네 기도와 같은 내용입니다.
4.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할 필요가 있으셨을까 우리는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날 밤에, 변화산 사건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기 전,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는 기사에서 모두 기도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중요한 일마다 기도하셨음을 유의해서 기록했습니다.
5. 그런데 이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누가는 이것이 상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전, 베드로가 옥에서 나올 때 성도들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모두 기도하여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기도하여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나갔다는 것을 누가는 강조하려 했습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의 제자들처럼 기도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 그렇다면 누가는 본문에서 우리에게 기도에 있어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저는 누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예수님의 기도 따라하기를 4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II.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기(42절)
1.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본문의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에는 “아빠 아버지로”, 마태복음 본문에는 “내 아버지”로 부릅니다. 모두 같습니다. 하나님을 친근하게 아버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기도문의 원문의 첫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은 형용사 구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초대 교회 기도문을 보아도 모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롬 8:15; 갈 4:6). 신약의 기도에서 모두 일치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를 할 때 초신자는 주로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을 상정하고 기도합니다. 또 오래된 신자는 “당회에서 유치부에 이르기까지,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까지로” 대표되는 교회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가장 적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옆에 와 계시다고 느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부자간에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당시 일반 사람들에게는 매우 경망스럽고 불경건한 어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빠”로 호칭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이런 기도는 잘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 주일 예배에서 장로님이 “하나님 아빠”라고 시작하고 기도하신 적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3. 우리 중에 기도를 못하시는 분의 몇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려고 하면 앞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기도할 때 인류 평화 등 주로 기도할 제목만 생각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통성 기도하면 옆 사람 기도가 들려서 기도가 안 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 기도의 대상이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기도에 몰입이 되면 다른 사람의 기도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III.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분명히 아뢰기(42b절)
1. 기도는 자신의 처지에서 가장 급박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진솔하게 기도합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십자가의 고통을 격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 기도를 3번이나 하십니다.
2. 이것은 자신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이러한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기도일까요? 한 마디로 말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베풀어달라고까지 하나님께 아룁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때로 그것이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3. 소원의 기도를 시작 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처럼 순종하기 위한 결단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을 버리기 위한 씨름이지, 기도하기 전에 이기심을 다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있어서 최악은 이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나쁜 신앙은 정욕으로 기도할까봐 걱정되어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동으로 정욕으로 행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원을 진솔하게 올려놓고 기도하면서 순종하는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IV. 간절한 마음으로 아뢰기(44절)
1.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되면 우리의 기도는 저절로 간절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옆집 아저씨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투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기도는 한 번만 하고 곧이어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가 될 것입니다. 내 딸이 이대 국제학부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보다 간절할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2. 강원도 황지에 가면 예수원이라고 있는데 예배당 앞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노동하는 것이요, 노동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육체 노동을 하듯이 힘들여 해야 한다는 것이고, 노동 자체도 기도처럼 경건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육체도 힘이 듭니다. 우리의 마음이 간절하면 우리의 육체까지도 움직이게 됩니다.
3. 누가는 기도하다가 낙망한 사람들에게 다시 간절히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비유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닌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하찮은 과부의 청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지만 귀찮을 정도로 와서 자신의 소원을 아뢰면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귀 기울여 들을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는 흔히 이것을 이 기도의 비유와 상관없이 “말세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아닙니다. 말세에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그러한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해도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4. 흔히 기도에는 스타일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보다는 기도는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것을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에베소서 6:18에는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묵상기도, 부르짖는 기도, 조용한 기도 등 한 사람이 모든 기도를 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 기도는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도는 힘쓰고 애써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V. 천사의 도움을 받는 기도하기(43절)
1. 43절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힘써 기도하실 때 천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는데 있어 도움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바로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1) 여기서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고 합니다. 2) 그 연약함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신자가 올바른 태도로 기도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올바른 기도의 내용조차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3) 그래서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와 같이 탄식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3. 바울과 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바로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엡 6:18; 유 20). 그러면 이런 기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술 먹는 것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하는 방법은 1) 사람이 술을 마신다. 2) 술에 취해서 술이 사람을 먹는다. 3) 술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술이 술을 부른다. 우리의 기도는 1) 먼저, 예수님처럼 구체적인 기도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처럼 힘써 기도합니다. 기도에 몰입됩니다. 3)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에 깊이 몰입됩니다. 예수님은 천사의 도움을 받을 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4. 우리의 기도는 몰입하는 경지까지 가야 합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실 때 잠이든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십니다. 기도에 몰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몰입하는 기도를 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5.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기도에서 양이 중요할까?” 중요합니다. 질은 양이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는 진리는 기도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오래, 깊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끗한 몸을 유지하려면 매일 샤워와 주기적인 전신 때밀이 목욕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온전한 영성 생활을 하려면 매일 기도와 깊이 몰입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VI. 나가는 말
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겟세마네란 사람이 만나는 고통과 난관일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의 겟세마네를 만날 때의 4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1) 자기 힘 혹은 주변의 힘을 의지. 2) 사람을 의지. 3) 포기. 4) 기도하기.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도하기를 요청하십니다. 평상 시 기도 안 하다가 겟세마네 기도를 하는 것도 좋은 신앙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그]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그 믿음”이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생의 위기에서도 기도하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2. 기도해야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40, 46절). 본문은 감싸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것이지요. 39절은 배경이요 본 구절의 핵심인 40-46절을 보면 첫 절과 마지막 절에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바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다른 요소를 아무리 잘해도 그렇습니다. 말씀 듣기, 교제, 봉사, 헌신을 한다고 할지라도 기도 없이 하면 시험에 들게 마련입니다.
4.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합시다.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의과 대학을 들어가려다가 기도하고 뜻하지 않게 독일어학과를 나와 신학을 했습니다. 돈이 거의 한 푼도 없었는데 양재동 횃불회관 지하에서 기도하고 유학 5년 반 동안의 등록금과 생활비 일체를 얻었습니다. 저의 뜻은 아니었지만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한 후 캠브리지로 가서 박사과정을 3년 반 만에 마쳐 IMF를 이기고 학위를 받아 지금 교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대로 따라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여러분도 겟세마네 기도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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