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6 : 1-31
눅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눅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눅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눅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눅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눅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 이니라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눅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
눅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눅16: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 함이니라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눅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눅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16: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생각해 보기 1
누가는 9장 말미부터 22장에 이르는 기록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계획을 실행하러 가시는 일주일간의 유언적 성격의 사마리아 여정을 소개하면서 19:10절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과 하신 일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여정가운데 15장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오신 목적과 하시는 일”을 정의하는 3가지의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다. 누가는 15장에 등장하는 3가지 비유(‘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를 3절에서 ‘비유’라는 단수를 사용함으로써 이 비유들은 각기 다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라는 하나의 메시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32절에서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로 오신 목적과 하시는 일에 합치되는 결론을 맺는다.
이어지는 16장에서는 ‘또한’이란 단어로 시작하여 16장 역시도 15장과 이어지는 교훈이란 것을 ‘누가’는 제시하고 있다.
-.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Elegen< de; kai; pro;" tou;"< maqhta; 엘레겐 데 카이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1절a)
※ 생각해 보기 2
본 16장에 등장하는 비유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의 해석과 설명이 있는 가장 어려운 비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는 “15장을 전제로 ‘누가’는 16장에서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 가?”를 집어보지 않고 8절과 등장하는 ‘지혜’와 ‘칭송’이라는 단어 그리고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는 말에 있어서 첫째로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에 의한 해석에서 걸림돌이 발생하고, 둘째로는 그 단어들이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누의도한 것 이상의 확장 해석에 치중하고, 또 그와 연결시키어 뒤에 부분을 이해하려는 데서 기인되어지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일반적으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불리 우는 본 비유는 4복음서 중 누가만이 기록을 하였는데 누가는 어떤 이유에서 16장 서두에 이 비유를 배치한 것 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16장에서 누가가 가장 핵심적으로 말하고자하는 바를 찾아보면 31절의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일 것이다. 사실 31절은 16장의 결론으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거지 나사로를 자기의 아버지 집에 보내어 자신의 5형제로 하여금 자기처럼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그들이 현재 율법(모세)과 선지자의 글(구약성경을 의미)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예표 되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는 자들로 누군가가 죽었다 살아나서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그 말을 믿고 회계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부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요11장에서 유대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서도 회개치 않은 것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음을 연관시켜보자!
따라서 31절이 16장 전체의 결론임을 알 수 있다면, 서두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누가가 31절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도입한 예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상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본론의 핵심적 주제에 따른 결론보다도 예화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 주제와 결론과는 전혀 다른 잘못된 감동들을 간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의 누가복음 16장에 대한 해석이 그리되어 있는 것 같고, 그 예화의 해석에 따라 어려워지고 각양각색의 결론들이 나있는 것 같다.
※ 생각해 보기 3
16장에 영향을 주고 있는 15장의 내용과 전제들을 알아보고 누가는 31절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16장은 어떠한 구조로 전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❶ 15장 1~2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자 3절에서 그들을 향하여 비유를 통한 교훈을 하신다.
※ 참고:‘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해당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조상의 유전이나 율법 해석을 기초로 해서 만든 수많은 금지사항과 의무 조항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했고 죄인으로 지칭 되는 사람들은 첫째 비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로 간음한 자, 속이는 자(18:11)등이며, 둘째로 불명예스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들은 공민권(公民權)인 공직퇴임권(公職退任權)과 법정증언권(法廷證言權)을 박탈당한 자들로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이었다.
‘가까이 나아오니’의 '엥기존테스'는 '접근하다'는 뜻의 현재 분사형으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와 대화를 나누시는 자리로 '죄인'으로 정죄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소외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음을 시사한다.
‘원망하여’의 '디아공귀조(diegovgguzon)'는 '와글와글 떠들다' 또는 '수근거리다', '불평하다'의 뜻으로, 여기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된 데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불만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현재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이 동사는 그들의 불만이 단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계속해서 토로되었으며, 아울러 이러한 불평불만의 소리는 사건 때마다 늘 있었던 것임을 나타낸다.
또한 헬라어 ‘공귀조’ ‘수군거리다’라는 뜻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했던 말과 같은 단어임을 생각하면 그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손님으로 접대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예수가 어떻게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가라는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들을 향해 예수를 탄핵(彈劾)하는 말로서 '예수는 경건한 자가 아니니 그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의미이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대해 '이 사람'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보지 않고 기껏해야 율법 선생 정도로 여겼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❷ 그리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자신이 택한 백성들이 어떠한 처지와 상황에 있던지 끝까지 찾으시고 덮으심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긍휼의 하나님이란 것이 전제된다.
❸ 이러한 배경(수군거림)과 전제(택한 백성은 은혜와 긍휼로 끝까지 구원하심) 속에 16장에서는 세상적 부자에 관련된 교훈으로 하나님께서는 택하지 않은 백성 즉 세상의 재물, 맘몬을 숭배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음(Limited Redemption, 제한적 구속)을 누가는 설명하고자 한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왜?(눅 16:1-13)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알려진 이 비유는 해석하기 어렵고 적용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비유입니다. 왜 성경은, 청지기의 주인은 그리고 예수님은 사기꾼같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꾸짖지 않고 칭찬하셨을까요? 어려운 비유입니다.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눅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다가 발각되어 해고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청지기의 생각을 분석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해고 선언을 받은 청지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추측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원래 신실하지 못했던 이 청지기가 마지막으로 주인의 돈을 싹 긁어서 외국으로 도망갑니다. 또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채무자들의 돈을 다 긁어모아서 어디론가 도피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런 것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에게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라고 청지기가 말하는 부분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눅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눅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눅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눅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내가 할 일! 아마도 빨리 돈을 챙겨서 도망가는 일일 것 같은데 의외의 일을 합니다.
채무자들을 다 불러 증서를 위조하면서 그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원해서 그랬을까요? 왜 마지막으로 자기 돈을 챙기지 않았을까요?
이 부분이 주인이 칭찬한 지혜였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어차피 주인도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었던 사람이고 그것을 청지기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 정도는 탕감해줘도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는 견해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탕감해준 액수는 원래 자기 몫으로 돌아올 것인데 자기가 받을 몫을 포기하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풀었다는 견해입니다. 두 견해가 다 가능할 것입니다.
주인이 그것을 알면 아마 법정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검찰조사를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청지기는 이렇게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집착했던 재물을 놓아버렸습니다.
이 부분, 그가 그렇게 집착했던 재물을 놓아버린 그 결단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그가 얻기 원했던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그 채무자들의 괴로움과 때로는 억울함과 한을 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채무자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그 채무자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신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관계회복이 물질보다 중요했던 것일까요? 이 청지기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오히려 칭찬합니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영주할 처소를 준비하는 마음, 미래를 준비하는 것,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 청지기는 알았던 것입니다. 또는 더 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빚진 자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채무자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과거를 회개하고 청산하는 것이 돈을 챙기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것-돈을 마지막으로 챙기지 않고 돈을 버리고서라도 사람을 챙겼고 관계를 챙겼습니다.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었지만 그러나 어리석은 빛의 아들들보다 오히려 지혜로웠습니다. 이 비유는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14절은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듣고 비웃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물론 예수님은 이 청지기가 법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시 경고를 하십니다.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면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원칙을 가르치십니다. 원칙으로 돌아갑니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그런데 분명히 원칙적 윤리적 가르침으로 돌아가면서도 한 가지를 경고하십니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적어도 이 청지기는 과거의 잘못을 돌아볼 줄 알았고 터무니없이 돈을 긁어내는 동안 힘들었을 채무자들의 아픔을 알았고 결단하여 회개하고 과거를 청산하려는 결심과 실천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집착했던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재물 축적이 아니라 관계회복임을 알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재물을 다 버려서라도 그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요, 하나님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내 욕심을 챙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시 요약합니다.
이 청지기가 인정받은 것은, 방법은 투명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그토록 집착하던 재물의 욕심을 결정적인 순간에 버릴 줄 알았던 깨달음이었습니다.
자신을 알고 잘못을 알고 돈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던 마음이었습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할 줄 아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을 얻고 싶어했던 그 심정이었습니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나름의 지혜였습니다.
청지기는 분명히 불의한 자입니다. 칭찬은 들었지만 흉내 내거나 배울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비유의 핵심은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은 청지기라도 나름대로 깨닫고 결단을 내리고 변화하고 이웃들의 어려움을 덜어준 행동의 결단을 칭찬하는 것이지 불의한 청지기의 문서변조 행위 자체가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도 나름대로 깨달을 줄 알아 결단을 내릴 줄 아는데 정작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맡고 관리해야 할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말씀대로 충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재물을 나누지도 않음을 꾸짖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 내게 적용할 것을 찾아내고 결단하는 영적 지혜가 중요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라도 깨달을 줄은 아는데,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사람들의 짐을 덜어줄 줄은 아는데 빚진 자의 마음은 아는데... 먼저 믿은 나는 그렇게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를 마지막으로 영접하실 친구,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구원을 회복하는 결단의 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신앙의 여정에 있어 무엇이 진정 가장 중요한가를 깨달아 알고 결단하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
아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 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문은 난해한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매우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이며 그의 하는 짓도 악한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파면을 통보받고 사후 대책에 부심하다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우선 장부를 허위 조작하여 채무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여력을 쏟게 되는데 그 방법의 재치에 감탄한 주인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게 됩니다.
실로 괴악한 이 비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 청지기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인 것과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약점,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거기에 따르는 상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고 말했을 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변명하려는 기색없이 당연히 올것이 왔다는 담담한 태도로 앞날을 위한 설계에 몰입합니다.
어떻게 보면 얄밉고 화도 나게 하는 태도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거나 고심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들의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필연적임을 명심하고 책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역사안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청지기는 자기에게 남은 기회와 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장부를 허위조작하여 빚진 자들의 환심을 산 것이 도덕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활용하는 지혜를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비유중에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경우 그는 받은 것을 묻어두었다가 그것을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의 태도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떠하던 받은 것이나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은사도 믿음도 능력도 지식도 활용해야 합니다. 활용하지 못할때 한 달란트의 가치는 보존할 수 없음은 물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활용의 결과이며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게된 것도 활용의 결과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서 폭풍우로 조난을 당한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난파선의 선원들을 구출하려고 어선들을 동원해 수많은 생존자를 구원해 냈습니다. 그러나 워낙 배가 작고 한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난파선의 틈에 끼어있는 한 선원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남아있던 생존자의 구조를 위하여 지원자를 찾는데 마침 한 청년이 그 모험에 지원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남편도 바다에서 죽은 바가 있을 뿐 아니라 큰아들도 원양어업에 나간지 수년이 되도록 소식을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아들마저 희생이 되면 혼자만 남게 될 것이라고 애원을 하며 지원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지막 생존자 한 사람을 살리려고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애를 태우면서 아들의 성공을 빌었으며 마침내 아들은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돌아왔는데 바로 그 생존자는 생사를 모르던 그 어머니의 큰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이 청지기는 목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빛의 아들을 능가하는 열심과 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의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보다 얼마나 소극적이고 기피적인가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풍성한 수확을 쌓아 놓고 내 영혼만을 위한 욕심으로 고마운 이웃 또는 불우한 이웃은 전혀 잊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기뻐하실 이웃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내가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쓸수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 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의 설명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사로의 이름이 나와 있으나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은 '다이브스'라고 합니다. 본문은 다이브스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그 삶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 빈민굴에 가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나라에도 거지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 다이브스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는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다이브스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을 인하여 더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우리나라 부자들 가운데 한국은 겨울에 추우니까 미국 하와이에 가서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철새처럼 더위와 추위를 피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히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소유한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70 이후에는 너무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 눈치보며 오래 살면 또 무엇하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며 오래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성실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적 죽음입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죽은 존재는 잊혀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대하여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이웃과 어린 자녀와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옥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지옥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제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습니다.
② 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의 자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신자에게도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③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에게 비교의 고통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 앞에 밝히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남과 비교할 때 더욱 큰 괴로움입니다.
④ 지옥은 무섭게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낙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 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낙에 빠져 있는 사람들아 정신 차려라.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 교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초리를 예비시켜 놓고 교육합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넘기실 수 없습니다.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십니다.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그것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른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지옥에 가면 당할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그가 십자가에서 친히 다 담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살리신 다음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신자를 부르셨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자격자이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부자야! 가난한 자야! 왜 계속 그리로만 가는가. 나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 요구를 거절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세상의 지식, 돈, 건강과는 상관없이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지구상의 13억 인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책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년 6억권 이상이 팔리는 책이 성경입니다.
죽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길 중에 한 길은 분명히 가서는 안될 길입니다. 지옥을 피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 놓인 우리 운명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죽음이 따라올 때 그 때는 기회가 없습니다. 가서는 안될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왜 이웃을 하나님이 내게 보냈을까요? 왜 전화를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괴롭히는 것일까요? 가는 길이 너무나 가서는 안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일학교 어린이를 통해서, 이웃을 동원해서, 사건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강원도에 황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탄공촌이 있는 곳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기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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