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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셀축 / 셀주크 (Selcuk), 에페소스 / 에베소 (Ephesus)

by 은총가득 2022. 5. 8.

셀축 / 셀주크 (Selcuk), 에페소스 / 에베소 (Ephesus)

 



셀축 / 셀주크 (Selcuk), 에페소스 / 에베소 (Ephesus)


에페소스 / 에베소 (Ephesus)


에페소스는 라틴어/영어: Ephesus, 그리스어: Έφεσος, 터키어: Efes,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되어 진다.

 

에페소스는(성서: 에베소)는 이즈미르(Izmir, 고대 서머나)주의 셀축(Selcuk) 지역에 있는 고대도시이다.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km, 셀축에서는 남쪽으로 3km인 에게해로 흘러드는 카이스터(Cayster) 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터키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에베소’가 바로 이곳이다.


에페소스는 기원전 약 6000년경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청동기시대 이후로는 히타이트인이 거주했는데, 그들은 이곳을 ‘아파사르’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이 도시의 역사를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스 지역에 살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 해안지역으로 와서 정착하며 살면서 프리에네, 밀레투스와 함께 건설한 도시로 보고 있다(다른 학설은 기원전 1450년경 미노아인들이 크레타에서 이곳 해안지역으로 와서 정착하며 살면서 건설한 도시로 보기도 한다).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거기에는 렐레기안(Leleggian) 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고 있었다.

 

 

 

키벨레(Cybele

 

이오니아인들은 자기들이 전부터 숭배하던 아르테미스 여신에 ‘키벨레(Cybele)’ 신앙을 결합하여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앙을 형성하였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냥과 관계가 깊은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니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소스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Ancient world of 7 Wonder,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그리스 철학자 중 ‘똑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곳, 에페수스 출신이다.
기원전 600년 무렵 에페소스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과 항구에서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매우 번화하였고, 그에 따라 도시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이소스(Croesus)의 공격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래서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의 내륙 지대로 옮겨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 에페소스는 기원전 334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에 기원전 301년경에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리시마코스가 이곳을 통치하였다. 그는 인근의 멘데레스 강에서 흘러오는 토사(土砂)가 쌓여 에페소스가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되자 주민들을 내륙의 언덕 지대로 이주시켰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에페소스 유적이 있는 곳이다. 기원전 190년 에페소스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는 에페소스를 버가모 왕국에 편입시켰다. 에페소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인구가 25만 명이나 되는 소아시아 지역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에 이곳에 와서 선물을 샀다고 한다. 에페소스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신앙이 강한 곳이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되어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요한복음을 기술하였다고 전해진다.


에페소스 항구에 토사가 계속 쌓이자 역대 통치자들은 준설공사를 하고, 강의 물줄기를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토사의 유입은 막지 못하고 갯벌과 습지만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습지가 늘어나자 자연 모기가 기승을 부리게 되고 말라리아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신전의 재정 상태도 나빠져 갔다. AD 7세기 무렵에는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움에 따라 에페소스는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에페소스는 급속도로 쇠락하게 되었고, 1090년 셀주크인들이 정복하면서 도시의 중심을 아야술룩 언덕, 지금의 셀축으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 두 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한 에페소스는 셀축(셀주크)이라 불리우며 작은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에페소스는 종교가 매우 중요한 곳으로 특히 헬라의 여신 아르테미스(아데미)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바울이 AD 55-58년경 에페소스 지역을 방문해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숭배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행 19:21-24). 전설에 의하면 바울 이후 사도요한이 에베소에서 활동하였다. 그래서 사도요한 무덤교회가 현재 에페소스에 위치하고 있다.

 


에페소스 / 에베소 (Ephesus)의 주요 유적

 


1. 아르테미스(아데미) 신전 (Artemis Temple)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고대 세계 의 칠대경이 중 하나였다. 이 신전은 2번이나 완전히 새로 세워졌는데, 첫 번째는 거대한 홍수로, 두 번째는 헤로스트라투스의 방화로 인한 재건이었고, 세 번째로 지어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바로 고대 세계 7대 불가 사의 중 하나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 번째로 다시 세우길 원했지만 착공은 알렉산더 사후 기원전 323년에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신전은 규모가 더 커서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12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도 AD 268년 고트족의 약탈로 파괴되었고AD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다.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있다. 성소피아 성당의 기둥 몇 주(柱)는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2. 셀수스 도서관 (Celsus Library)


셀수스 도서관은 현재 앞부분만 남아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고 에페소스 유적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세계 3대 도서관의 하나인 이 건축물은 AD 106-107년경 로마제국의 아시아 지역 총독이었던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가이우스 율리유스 아퀼라(Gaius Julius Aquila)가 아버지의 묘위에 AD 135년에 지은 것이다. 도서관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셀수스 아퀼라는 이 건축물이 완성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아퀼라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 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앞 부분만 남고 대부분 허물어 졌지만 앞 부분에 있는 16개의 코린트식 기둥들은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들 16개의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는 2층 건물에는 3개의 출입구 가 있으며, 출입구 옆에 있는 4개의 정면 벽에는 지혜(Wisdom, Sophia), 미덕(Virtue, Arete), 지성(Intelligence, Ennoia), 지식(Knowledge, Episteme)을 상징하는 여신상이 있다. 24,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셀수스 도서관은 로마제국 시절에는 12,000여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이중벽으로 만들어 당시에 소장하고 있었던 수천 권의 두루마리 책들을 잘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들은 AD 262년 고트족의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당시 고대도시내 쇼핑거리 옆에 위치한 이 셀수스 도서관의 지하비밀통로가 유곽지역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많은 이야기를 짐작케 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강론하던 두란노 서원이 이 도서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행19:9-10).

 

 


3. 하드리안(하드리아누스) 신전 (Hadrian’s Temple)


도미티안 신전이후 두 번째로 로마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신전이다. AD 2세기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스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건물은 현재 많은 부분 소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첫 번째 문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 니케의 조각이 있고 두 번째 문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다. 4개의 기둥 중 2개는 원 형이고 2개는 사각기둥으로 되어 있다. 2개는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에페소스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안에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신등 여러 신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데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 에페소스 / 에베소 유적지들 _ 편집자 첨부

 

 

 

마리아의 집(Ana Meryem Evi)


마리아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에 제일 사랑했던 제자, 즉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였고 이날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모셨는데, 사도 요한이 말년을 에페소에서 보냈기 때문에 마리아도 이곳에 살았을 것으로 본다. 사실 마리아가 살았다고 주장되는 곳은 중동지역에서 이곳까지 세 군데가 있다.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독일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아나 카타리나 에머리크(Anna Katharina Emmerick, 1774-1824)라는 수녀가 꿈속에서 마리아의 영감을 받아 쓴 책을 보고, 어느 프랑스인 신부가 그대로 파보니 정말로 그 자리에, 그 책에 쓰여진 것과 같은 집이 있었다 하여 가톨릭에서 성지로 인정했다. 참고로 발견 당시에도 현지의 그리스계 정교도들이 매년 8월 15일마다 와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바티칸에서는 이곳을 성모가 거주했던 곳이라고 공식 인증을 한 적이 없다. 그리스 정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교구를 제외한 동방정교회 측이나 개신교 원리주의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 성지여행 코스로 시나이산과 같이 자주 언급하는 성지이다.
마리아의 집 뒷편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으며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마리아의 집을 관리하고 있다.

 

 

 

성 요한의 교회(Aziz Yahya Kilisesi)


시내에서 언덕을 올라가면 보인다. 성당터의 중앙부분에는 제대가 있었던 자리와 세례용 욕조가 있고, 사도 요한의 무덤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터키어로 “St.Jean’ın mezarı”라고 쓰여있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판석이 있는데, 그곳이 사도 요한의 무덤이다. 때문에 사도 요한의 축일이 되면 순례객들이 찾는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 건립된 성당이었으나 13세기경 발생한 대지진으로 건물이 거의 다 무너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튀르크 국가인 아이든국이 이 지역을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복원되지 못했다. 잔해 중 일부는 성 요한의 교회 바로 밑에 세워진 이사베이 모스크(İsabey camii)를 건설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에페소스의 잠자는7인의 동굴(Yedi Uyuyanlar Mağarası)
소아시아 서해안 도시 ‘에페소스의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성 막시미아노(Maximianus), 성 말코(Malchus), 성 마르티니아노(Martinianus),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성 요한(Joannes), 성 세라피온과 성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로 이들의 이름들은 여러 전승 기록에 따라 다르게도 나타난다. 이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통치 때 동굴에 감금당했으나 200년 후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었고 그들은 깨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전하며, 이후 성인으로 공경받기 시작했다.


장시간의 수면은 신화와 민담의 공통된 주제로 기독교의 색채를 머금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미 6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500년경에 사루(Sarugh)의 성 야고보(Jacobus)가 시리아어로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도미니코회 회원인 보레뉴(Voraigne)의 복자 야고보(Jacobus)가 황금 전설을 포함시킨 후 인기가 많아졌다.
쉬린제 마을(Şirince Köyü)


에페소스와 반대방향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원래는 “못생긴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상당히 작은 마을이었는데, 어떤 술탄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이쁜데 왜 못생긴 마을이냐라며 의아해하여 예뻐졌다는 뜻의 지금 명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의 쉬린제는 그냥 수공업 전시장. 와인과 잼, 직물과 도자기와 같은 수제품을 특산품으로 길거리에 내놓고 관광객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에페소스 박물관(Efes Müzesi)
에페소스에서 발굴한 것을 모아놓은 전시관이며, 입장료가 있다. 에페소스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모아다가 전시해 놓았다. 이곳에 유명한 아르테미스 신상이 두 점 전시되어 있는데, 헬레니즘 특유의 인간적인 분위기보다는 고대 근동의 신상을 연상시킬 만큼 크고 웅장하다.

 


아르테미스 신전 터(Artemis Tapınağı)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곳이나 지금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고 넓은 평탄한 습지에 기둥 하나 서 있는 게 전부로 그 터만 남았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복원모형은 에페소스 박물관에 있다.

 

 


누가의 옛 무덤


에페소스의 남쪽 출입구 건너편에 작은 원형건물 터 “누가의 묘”가 있다. 무덤입구에는 누가를 상징하는 황소 조각이 새겨진 돌이 있다.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의술을 배웠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빌립보를 향하는 바울을 만나 예수를 알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바울의 동역자요 그의 개인 의사로 함께 하였다. 후에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누가의 무덤은 이곳이 처음이었는데 누가의 유해는 요한이 에베소에 있을 때 에베소에 장례했다가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김동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