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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예수 그리스도 - 내 삶의 중심/ 갈 2:20 빌1:20~21

by 은총가득 2022. 5. 8.

예수 그리스도 - 내 삶의 중심

갈라디아서 2:20 빌립보서 1:20~21

 

 

 

 

오랫동안 투병하던 미국의 한 청년이 병상에서 요한삼서 1:2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 후 청년은 기적처럼 일어났고, 훗날 세계적인 대학과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오랄 로버츠대학교의 설립자 오랄 로버츠(Oral Roberts)목사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 붙잡았던 말씀은 시편 34:4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나라가 노예문제로 남북으로 갈라지고 개인적으로도 시련과 고난이 계속되자 링컨은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고, 드디어 나라는 하나가 되고 그는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많은 말도, 많은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말씀을 붙들고 계십니까?

 

우리 한국인들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붙들었던 말씀 베스트 파이브입니다.

 

1,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여호수아 1:9,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3,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4,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5, 빌립보서 4:13,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저는 젊은 날, 예레미야 33:3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신학교 시절부터 이 말씀은 저에게 힘이 되었고, 하나님은 저에게 때마다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라디아서 2:20를 통해서도 큰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군에 사단 사령부 강당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인 한 사람이 잘 하면, 군대를 살리고, 군대는 결국 군인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으로 군인의 사명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비단 군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영적 원리에도 해당되고,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성경 한 구절이, 성경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성경 전체를 성경 한 구절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이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갈라디아서 2:20로 요약되고, 또 갈라디아서 2:20이 성경 전체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 한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알기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뒷부분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일생에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또 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 자신을 아는 지식, 이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부인은 자기 남편의 묘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그는 일생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람이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쓴 웨슬리의 일기에 보면 그가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 단순한 열정만을 가지고 아메리카 인디언을 전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들뜬 마음으로 미국으로 가는 배위에서, 독일인 목사 슈팡겐베르크(August Gottlieb Spangenberg)를 만나고, 그로부터 본질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첫째, 형제는 성령님께서 당신을 통해 무슨 일을 하는지 압니까?

둘째,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셋째, 형제는 자신을 압니까?”

옥스퍼드 대학에서 우수하게 공부를 한 웨슬리였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목회해온 웨슬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웨슬리는 아무런 답변도 못하고, 매우 당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20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갈라디아서 2:20 앞부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은 내 안에 살아계신 분입니다.

 

둘째, 내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서 2:20 뒷부분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 평생 믿음으로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이 두 질문의 한 가운데 계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심에 계시는 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도 사람자체를 100퍼센트 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통해 바라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를 삶과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20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 신앙과 삶의 중심에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갈라디아 2:20그리스도가 세 가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성경이 어떤 책이냐고 물을 때에도 역시 갈라디아서 2:20이 해답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마치 바다와 같은 책입니다.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인류문화의 시작과 역사의 한복판을 가로지릅니다. 그 시대가 가진 규범, 율법, 문화, 종교, 삶, 가치관을 다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모든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품되, 한 가지 목적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행하시는 구원의 드라마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1,600년 동안 40명의 저자들이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언어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언어와 저자는 달라도 한 가지 방향만은 일치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입었던 한 벌의 원피스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옷입니다.

 

신약성경은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마태복음,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예수님이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예수님은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께 집중하면서 구원에 관한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은 구원의 길이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부터 기다린 구원의 메시아입니다. 마가복음은 구원의 깊이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과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누가복음은 구원의 넓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병자든 강도든 누구나 구원합니다. 요한복음은 구원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 낮은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입니다.

 

바울이 쓴 모든 서신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합니다. 고린도서,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입니다. 갈라디아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책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의 근거요, 기쁨의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임을 밝힙니다. 데살로니가서,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디모데서, 예수님은 모든 교회생활의 규범입니다. 요한계시록,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성경 전체를 보고,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둘째, 갈라디아 2:20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갈라디아 2: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의 원리는 교회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생활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교회는 세상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기대를 가졌는데 차츰 실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생활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세 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위’입니다. 다음은 ‘옆’입니다. 마지막은 ‘밖’입니다. 위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는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으로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역사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에 중심에 예수님보다도 베드로를 세울 수 있는 위험을 보여준 역사였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가 예수님보다 더 중요시되면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의 주인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 걸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하여 개신교회가 생겼지만, 정작 오늘의 교회는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셋째, 갈라디아 2:20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장소는 교회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20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신앙은 살든지 죽든지 삶의 모든 부분에 예수님이 중심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자녀교육을 할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방식으로 합니까? 자녀를 결혼시킬 때 예수님의 가치로 합니까? 부부관계의 중심이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대화합니까? 시어머니를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이 합니까? 며느리를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이 합니까? 직장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마음으로 합니까? 직장에서 상관을 대할 때 예수님 대하듯이 합니까? 부하를 대할 때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합니까? 이것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표준이 바로 갈라디아서 2:20, 빌립보서 1: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아무 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이 말씀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열심있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열심히 살 수 있고, 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은 예수님을 삶의 분명한 제 삶의 주인으로 모시게 한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가끔 흔들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아무 일에든지, 죽든지 살든지그 은혜로 주님을 다시 사랑하고, 그러다가 혹시 주님을 또 잃을지라도, 언제나 다시 주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이 말씀으로 다시 세우며, 오직 주님만이 삶과 신앙의 중심이 되는 저와 여러분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에 의한 의인(갈3:1-18)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1)(갈라디아서 3:1-5)
사도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서도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계속 추구하고 있는 자들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서 도덕적 계율에 복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매여있는 자들을 다룬다. 이들의 율법은 불완전한 것임에도, 율법에 의한 희생과 정결을 의지하여서 의롭게 되려는 그러한 자들이다. 그는 먼저 이러한 자들을 날카롭게 책망한다. 그런 다음 진리의 증거를 들어 그들을 확신케 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 책망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 책망하려고 할 때, 무엇이 잘못이며 무엇이 실수인가를 상대방으로 알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부른다(1절). 기독교인이란 점에 있어서 그들은 지혜의 자녀라고 할 수 있지만 탈선한 기독교인들이란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어리석은 자녀들이었다. 그는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묻는다.

 

 

이로써 그는 그들을 현혹하는 교사를 술수와 덫에 사로잡힌 자들로서 표현한다. 또한 이렇게 현혹된 것은 그들답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현혹됨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어리석음과 현혹됨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즉 그들은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왔고 또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고백하였던 칭의의 수단으로써의 복음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진리를 알고 도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우리는 진리에 복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진리에 복종해야 하고 견고하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영적으로 현혹된 자들은 예수 안에 나타난 진리가 그들 앞에 명백히 제시될 때 이같이 그 진리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고 더욱 확실하게 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들 앞에 밝히 보였는데"도 그들이 꾀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십자가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의 성례가 그들 가운데 집행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명백히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이 거룩한 신비를 알고 이 예식의 귀중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발표되었고 그리고 성례전 속에 표시되고 봉인된 진리를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예와 특권이 우리의 어리석은 변절과 신앙의 퇴보의 의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그는 그들의 영혼이 경험하였던 성령의 역사에 호소하여 저들의 어리석음을 제시한다(2절). 그는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면서 "성령을 받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적어도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성별케 하시는 능력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적적인 은사의 동참자들이 되었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는, 또한 그 신앙의 몇 가지 가르침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된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 믿음으로 인한 의인은 기독교의 특별하고도 근본적인 원리의 하나인 것이었다. 이 교리에서 떠난 그들의 어리석음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그들이 어떻게 하여 이러한 은사와 은혜를 받게 되었는가를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라고 묻는다. 즉 너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필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았는가?고 묻는다. 이 물음에 그들은 답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리가 그들에게 가르쳐지지도 않았으며 이방인인 그들이 그런 식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냐?"고 묻는다. 즉 의롭게 되는 오직 한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느냐?는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그들이 진실을 말한다면 그들은 후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토록 좋은 경험을 갖게 한 가르침을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성령이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복음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그들의 영에 유익한 축복이 되는 복음이 사역과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매우 현명치 못한 처사라는 사실이다.

3.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지난 행위와 현재의 행위를 생각해 보고 그들이 현재 매우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고 또한 이치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나 않는지를 판단해 보라고 한다(3,4절). 그는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기를"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하여서 성령을 받게 되었으며 이 안에 의롭다함을 얻는 참된 길이 계시되었던 것이었다. 이같이 그들은 잘 시작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율법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고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다 율법의 준행을 덧붙였고 이것에 의해 보다 높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와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 준수는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대신에 역현상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외롭다함을 얻기를 바라는 한은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기는 커녕 전혀 기독교인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은 그들의 한 손은 복음을 붙잡고 다른 손은 율법에 잡혀 복음에서 끌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고 그들이 지금까지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해체시키려 하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마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괴로움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그들이 복음을 버린다면 그들의 어리석음은 한결 심화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괴로움을 당한 모든 일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어리석게도 버려야 할 것을 위하여 고통을 받은 결과가 될 것이었고 그들의 고통은 모두 헛수고로 되고 말 것이요. 그들에게 아무 이익도 없을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변절자들은 그들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업적 또는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것들을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2) 누구든지 오랫 동안 예배, 수난, 안식일, 설교, 성례의 생활을 헛되어 살았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라는 사실이다. 변절의 경우 이전의 의는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4. 그는 그들이 그들 가운데 신의 인봉함과 위임을 받은 사역자들(특히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을 가졌었던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이들 사역자들은 그들 속에 성령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으며 기적이 있게 하였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이들 사역자들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인지, 듣고 믿음에 의해서인지"를 묻는다. 또한 이들 사역자들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또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확증된 가르침이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결과인지 또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결과인지를 묻는다. 이 일이 후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그들 자신이 잘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토록 의미있게 소유하였었고 입증을 받은 가르침을 버리고 이러한 업적도 이루어 놓지 못한 것과 복음을 바꾼다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잘못이었다.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2)(갈라디아서 3:6-18)
갈라디아인들에게 진리에 복종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또 이로써 그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을 깊이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쓴 사도는 본문이지 그들이 거절하므로 그가 책망한 교훈을 광범위하게 증거한다. 그것은 주로 율법의 행위없이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인(義認)에 대한 교훈이었다. 이 사실을 그는 몇 가지 방법으로 증명한다.


Ⅰ. 아브라함의 의인(義認)을 예로 들어 믿음에 의한 의인을 증명한다. 사도는 이를 증거하는 데 로마서 4장의 것과 같은 논증법을 사용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고 말한다(6절). 즉 다시 말해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었고, 그리고 그의 이 믿음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게 의인으로 인정되었고 또 용납되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상징된 것이었다. 사도는 이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육체를 따라서가 아니요, 약속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것"을 우리에게 말씀한다(7절). 따라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같은 방법에 의하여 그들도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들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창 12:3). 그 내용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고 그 내용이 본문에도 성경 또한 하나님이 믿음의 수단을 통하여 이방 세계를 의롭게 하실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안에서,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자만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처럼 의롭게 여김을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사도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즉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불문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하여 따라서 그가 가진 것 같은 믿음을 가짐으로 믿음의 아버지인 그와 함께 축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을 얻는 것도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Ⅱ. 그는 우리가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법정에 서서 그 재판을 받게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추방당하고 정죄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죄함을 받지 않고 의롭게 되는 방책으로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의인(義認)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재판 법정은 틀림 없이 그들에게 불리한 선고를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기 때문이었다(10절; 신 27:26). 율법에 의하면 인간들은 누구나 생활이 완전해야 하며 인격적이어야 하고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율법의 용어는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든가 또는 12절의 경우처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에 살리라"는 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율법은 저주를 선언한다. 우리의 복종이 율법책에 쓰여진 모든 것대로 보편적이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또한 영속적으로 되어지지 아니하는 한(만일 어느 때든 한가지 실수라도 범한다던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이 저주는 계시되고 경고된 것으로 진노와 파멸을 가져 온다. 저주는 모든 악에 대하여 각각 적용된다. 이 저주는 모든 죄인들, 곧 모든 인간들을 치는 강력한 힘과 권세와 효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 죄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범법자로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면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인 것이다. 이 의인을 율법으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지만 사도는 우리에게 이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준다. 그것은(그가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기이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므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는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감당하셨다. 그가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선물이 되시었다. 즉 그는 모세의 율법이 특별한 낙인을 찍은 것이며 불쾌히 여길 수 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죄를 없이하고자 선물로 자기를 드리신 것이었다(신 21:23).

 

 

예수께서 자기를 드리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가 되고 특히, 복음 시대를 위하여 예비해 준 성령의 놀라운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은 율법에 자신들을 드림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나타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죄인으로서 우리가 받았어야 할 비참한 경우를 기억하자. 율법 아래 있었다면 우리는 또한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처해 있었을 것이다.

2. 우리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자. 그는 우리 대신 저주를 담당하시려고 또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복종하셨다.

3. 그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될 행복한 미래를 전망하도록 하자. 우리는 저주를 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축복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4.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Ⅲ.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는 구약의 특별한 증언들에 대하여 언급한다(11절). 이러한 말씀이 언급된 것은 하박국 2장 4절로 거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이 다시 로마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인용되고 있다. 하박국 2장 14절의 말씀의 의도는 참된 삶을 소유하며 죽음과 진노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의 가호를 입어 생명으로 복귀됨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은 의로운 자이어야 하며 또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용납되고 그를 위하여 살수 있을 때만이 이러한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며, 이후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영생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임을 또한 제시해 주고자 한다.

 

 

그 까닭에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혹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할 지 몰라도 적어도 믿음이 없는 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없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이었다(레 18:15). 율법은 삶을 얻는 조건으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우리의 의인은 새로운 가르침 아니고 복음시대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세워지고 가르쳐진 것임을 밝히려 한다. 믿음이야 말로 진정 어느 죄인이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고 또는 의롭게 되는 오직 유일한 길인 것이다.

Ⅳ.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계약의 불변성을 주장한다. 이 계약은 모세의 율법의 주어짐에 의하여 취소되거나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15절 이하).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율법보다 앞선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약속에 근거하여 세운 것이었고, 또 약속은 믿음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8절). 그리고 이 계약은 확고하고 변함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계약이 폐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계약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는가 또는 합의 조항이 인준되면 양편이 다 묶이게 되면 이미 다른 길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뒤에 있어진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이 무효화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diaqh,kh-즉 계약과 유언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계약이라기 보다 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유언이 효력이 있기 위하여서는 유언자가 죽어야 하며 그가 죽은 후에 유언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유언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은 확고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난 만일 유언의 권리를 주장할 상속 인물이 없기 때문에 유언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16절) 거기에 대하여서는 그런 염려를 안해도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다. 그러나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체결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매우 놀랍게 해석한다. 우리는 그 계약이 오직 유대 백성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아니라고 한다. 즉 "자손을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단수로 표시한 것을 보아 그 말씀은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 같고 그 자손이 곧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아직도 효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영원히 거시하시며, 또한 믿음으로 그의 것이 된 영적 자손들 속에서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율법이 행위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그 율법이 계약을 폐할 수 없다면 또한 율법 속에 믿음이나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볍한다(18절).

 

그러므로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일 후에 있어진 한 행위가 약속을 폐기한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롭게 되는 길을 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지혜와 신실하심에 불일치 하는 것이 된다. 만일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에 유업이 주어졌고 이로 인하여 그의 영적 자손에게 물려진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거두시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처럼 후회할 일을 행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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