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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

시편 93편 , 16편 [월터 브루그만]

by 은총가득 2022. 1. 13.
 
 
 

 

시편 93편 [월터 브루그만]

 

 

 

1 야훼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야훼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3 야훼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 높이 계신 야훼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5 야훼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편은 야훼의 통치를 기념하여 찬양하는 찬송시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시편이 다윗 왕국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축제를 배경으로 나왔다는 데 동의한다. 그 축제의 성격은 20세기 시편 연구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모빙켈 (Sigmund Mowinckel)은 이 논쟁에서 주요 인물이다. 그는 고대 예루살렘에서 가을 축제의 일부로서 왕의 즉위식 축제를 구성하려고 했다. [S. Mowinckel, The Psalms in Israel’s Worship, vol. 1 (1962), 113?114.] 예루살렘 제의는 다가오는 새해에도 나라가 안정성이 있다는 표시로 야훼가 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을 축제로 재연하였다. 그래서 야훼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매년 마다 다시 제정하였다. 크라우스 (Hans-Joachim Kraus)와 바이저 (Artur Weiser)도 하나의 축제를 구상하여 제시하였다. 크라우스는 이 축제가 시온이 신적 임재의 장소로 택하여지고, 다윗 혈통의 통치자들을 간택하였음을 축하 기념한다고 주장했다. [H.-J. Kraus, Psalms 60?150 (1988), 233?236.] 바이저는 언약 갱신 축제라고 주장했다. [A. Weiser, The Psalms (1962), 617.]

 

 

다른 학자들은 그 축제가 야훼의 왕권을 축하했다는 점에서는 동의했지만, 모빙켈의 즉위식 언어에는 반대했다. 마빈 테이트(Marvin Tate)는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최근의 연구를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고대 예루살렘의 가을 축제의 일부로 특히 혼돈의 권세를 야훼가 통치하심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지할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축제의 세부 사항을 알 수 없다. [M. E. Tate, Psalms 51?100 (1990), 474?481.] 시편 93편은 이러한 축제라는 설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편은 야훼를 왕으로서 맞이하며 환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태초적부터 혼동의 세력으로 활동하여왔던 권세들이 길들여졌음을 강조한다. 이 시편은 야훼의 칙령들이 신뢰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시에는 인칭의 변화가 있다. 이 변화는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것과 전례적 배경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배 인도자가 야훼에 관한 첫 번째 구절을소리내어 부르고, 합창단은 야훼를 언급하는 2-3절로 응답한다. 인도자는 4절에서 다시 말하고, 합창단은 결론 구절로 화답한다.

 

 

 

시편 93편은 전체 책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일련의 시편 모음집(시편 93-100편)을 시작하는 시이다. 맥칸 (McCann)은 시편 93편과 95-99편을 시편의 신학적 핵심이라고 간주한다. [J. C. McCann, Jr., “Book of Psalms,” in L. E. Keck et al. (ed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4 (1996), 1053.] 이 시편들은 야훼의 통치를 기념하는데, 특히 시편 3권 (시편 73-89)에 묘사된 바와 같이, 포로 생활의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사야서 40~55장에서 읊고 있는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목소리와의 연관성도 종종 제시되어왔다. 시편 93편은 또한 선행하는 시편들과도 관련이 있다. [M. E. Tate, 시편 51?100(1990), 474?478을 참조. 그는 시편 92?94편이 하나의 시편 모음집을 형성한다고 제안한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야훼가 “영원토록 높으시다”는 시편 92:8의 고백이다. 그렇게 확언하는 것은 시편 93편에 있는 왕 야훼에 대한 묘사와 잘 들어 맞는다.

 

 

The Ishtar-gate of Babylon in Pergamon Museum.

The cultic procession went through this gate.

 

톺아보기:

야훼는 왕이시다

 

이 시편의 첫 구절은[야훼 말라크]이며,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야훼는 왕이시다”로 번역된다.  [말라크]는 동사이므로 “야훼가 통치 또는 “야훼가 다스리신다”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이 표현은 이 시편의 전례적 배경에 대한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다. 모빙켈은 그 표현이 “야훼가 왕이 되어오셨다”로 번역되어야 하며, 즉위 의식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 대안으로 “야훼는 왕이시다”가 제시되는데, 이는 야훼의 왕되심이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요점은 야훼께서는 이미 왕이시며 즉위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야훼를 즉위시키는 것은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에서 강조된 자연의 순환을 암시할 수 있다. [H.-J. Kraus, Psalms 60?150 (1988), 232?233; and J. C. McCann, Jr., “Book of Psalms,” in L. E. Keck et al. (ed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4 (1996), 1053.] 시편 93편의 시작 구절은 야훼가 고대부터 왕이심을 암시하지만, 전례적 배경은 그 진술이 시사하는 것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그 표현은 즉위에 대한 환호라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그렇다고 야웨가 왕이 아니었고 지금 갑자기 어떻게든 왕이 되셨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축제에 참여하는 회중들은 매년 환호하고 재연하고 축하한다. 야훼께서 통치하신다는 이 시편의 선포는 고백을 현재 상태로 만들고 회중을 형성시켜주는 힘이 있다. 기독교 전통의 한 예는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 부활하셨다”는 부활 확언입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주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부활절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음을 고백한다. 이 선언은 또한 우리 시대의 회중을 위해 삶의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이 시편의 첫 구절은 야훼의 통치라는 주제를 선언한다. 강조점은 왕의 옷을 입고 위엄과 힘을 입고 왕으로 통치하시는 분이 야훼라는 것이다. 이 표현들은 위엄과 권세를 입은 바로 이 신적 왕에 대한 그림을 제시한다. 이 왕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 왕의 창조와 통치는 그 신적 통치가 얼마나 확고하고 안정적임을 증언하여 준다. 합창단의 응답은 야훼의 보좌가 “옛적부터 유래하였으며”, 승리한 신적 전사가 혼돈의 세력을 길들인다는 것을 확증하여 준다. 야훼께서 통치하시므로 창조의 질서가 확립되어 있다. 찬송가 가사는 혼돈이 다시 일어나 불안정이나 재앙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혼돈에 대한 묘사는 홍수와 같은 물로 계속이 이어지는데, 홍수는 그 소리를 높이며 포효한다. 무대 설정은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돈의 세력과의 전투이지만, 이 무질서의 세력을 길들인 분은 바로 야훼 왕이시다. 3절을 물이 야훼를 위협한다거나, 또는 물이 야훼를 찬양한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두 경우에서 모두 야훼가 혼돈의 물보다 더 크다는 것이 분명하다.

 

 

 

 

4절에서 전례적 예배자의 선언이 목소리를 낸다. 그는 야훼께서 거센 파도 위에 다스리신다고 소리쳐 말한다. 창조가 확립되었고 확립된 상태를 유지한다. 바다를 길들이는 것은 신적 왕권을 증거하여 준다. 시편 93편은 야훼의 통치를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혼돈의 세력과의 전투를 묘사하므로서, 신적 왕이 현존하고 피조물과 회중을 대신하여 활동하심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혼돈의 힘은 거대한 물로 표현된다. 다른 본문들에서는 반대 세력이 역사화된다.

 

 

합창단의 시편의 마지막 응답은 야훼 왕의 칙령이 신뢰할 만하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1-4절에 나오는 칙령들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이 신뢰할 수 있는 칙령은 성소 전례에서 선포된다. 성소는 신적 보좌실을 상징하며, 그곳에서 신적 왕은 공동체의 사회 및 종교 생활을 통치하기 위한 결정이나 규례를 선포한다. 그렇게 하여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축복의 근원이 된다.

 

 

 

지평의 융합:

혼돈이 문을 두드린다

 

시편 93편은 야훼의 통치를 선포하고 기념한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왕조가 무너진 후, 고대 신앙 공동체는 혼돈이 문을 두드리는 세상에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그런 식으로 묘사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안정성과 신뢰할 수 있는 칙령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선포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또한 반드시 해야할 본질적인 것이다. 이 시편의 선포는 현재 돌아가고 있는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편은 전례적 경험이란 방식을 통해 하나의 세상이 창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여 준다. 전례로의 부름 (소환/징집)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생명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고대의 찬사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기억으로 회중은 마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처럼 그 소망 안에서 살 수 있고, 혼돈의 문을 두드리는 이 세상에서 희망과 온전함을 길러줄 수 있는 한 곳의 푸근한 집을 찾을 수 있다.

 

 

 

 
 
 

시편 93편 메시지 [월터 브루그만]

 

 

 

 

시편 93편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3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5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개역개정 4판

 

 

시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다''라는 즉위식 정형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1b절은 자신의 주권 영역을 주장하기 위해 승리하여 오는 새 왕의 왕실 행렬을 묘사합니다. 짧지만 장엄한 그림입니다. 1c절은 결과적으로 세상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위태로워 보였지만 이제는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3-4절에서 여호와의 능력은 혼돈의 물의 능력과 대조됩니다. 혼돈의 홍수 물이 압도적이고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4절에서 우리가 29:3에서 본 '많은 물'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야훼는 혼돈의 모든 위협보다 분명히 더 강력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 확고한 왕이 새 질서를 위한 칙령을 내립니다. 여기에는 법령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시 29:11에서 새 법령은 샬롬입니다. 시편 96: 10b-13에서는 권리, 성실, 공평이 선언되었습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 창조된 생명의 변화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평이란 세속적인 쟁점으로 이동하지 않고, 신화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시편 16편 [월터 브루그만]

 

 

 

다윗의 믹담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들어가는 말

히브리 시편의 첫 시에서 표면화되는 주제 중 하나는 피난처, 특히 성전과 관련된 피난처입니다. 시편 5, 7, 11, 15편은 이 주제를 강조합니다. 시편 15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명시하고 있으며, 시편 16편은 종종 성전이나 성소를 피난처라는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이 시편은 분명히 그런 관심을 두고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독자들은 시편 16편과 친숙한 영역에 있습니다. 본문은 과거나 현재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이 시의 문을 여는 기도가 도피를 위한 기도인 반면, 시편의 많은 부분은 찬양이나 신뢰의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의 움직임은 탄원으로 시작하여, 시인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설명, 신뢰의 마지막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해석가들이 시적 언어를 통해 이 시가 어떤 고대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시도할 때, 그 그림은 더 흐릿해집니다. 크라우스 (Hans-Joachim Kraus)는 이 기도를 성소의 피난처라는 측면으로 해석합니다. 이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자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입니다. [H.-J. Kraus, 시편 1-59(1988), 234.] 그는 시편 5-6절의 언어를 이해하여, 시편의 시인은 레위인이라고 제시합니다. 이 레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땅을 받는 독특한 레위인의 특권(레 25:32-33; 레위 25:32-33; 민 35:8; 요 14:4)을 숙고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의 다른 변형으로는, 성전 피난처의 관점에서 기도를 읽는 것이지만, 고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 포함된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5-6절의 언어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성전에 있는 피난처는 그 공동체에서 한 분깃을 받는 것과 다른 신들과 대조적으로 그 분깃을 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피터 크레이기 (Peter Craigie)는 다른 해석 경로를 취합니다. [P. C. Craigie, Psalms 1?50 (2004), 155?159.] 그는 믿음의 사람에 의해서 드려진 기도하고 이해합니다. 그는 종교 혼합주의자, 즉 야웨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온 땅에 걸쳐서 산재하여 있는 다양한 제의 방식으로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고수하는 자입니다. 그는 2-3절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시편 기자의 신뢰 고백과 대조되는 혼합주의자들의 말로 해석합니다. [2-4절은 일부 사본상의 문제를 보여주며,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결정은 해석적 결과를 낳습니다.] 시편 16편의 고대 배경을 구성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시적 언어의 원래 배경이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여 줍니다. 시적 언어는 다양한 맥락 속에 있는 예배자들에게로 채택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은 또한 현대 독자들에게 이 시편들이 일반적인 개념적 또는 영적 틀이 아니라, 실제 고대 예배 환경에서 왔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1-4절]

이 시편의 문을 여는 단락(1-4절)은 피난처를 위한 간청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간청은 기도의 어조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주제가 시편의 첫 부분에서 공통적인 주제임을 언급했습니다. 첫 구절은 시인이 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보호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인과 하나님의 관계도 2절에서 나타나며 기도의 맥락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시인이 유일하신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실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미 2-3절의 번역이 논쟁의 여지가 있고, 크레이기 (Craigie)가 이 단어를 혼합주의자들의 기도를 인용으로 해석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혼합주의자들이 하나님을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신들, 3절의 “거룩한 자들”을 기뻐한다고 제안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혼합주의에 충성이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또한 크라우스가 "거룩한 자들"을 하나님께 충실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 언어는 충실한 사람들을 더 광범위하게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야훼께 신실하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야훼께 충성하는 자들을 기뻐하는 자입니다. 혼합주의자들이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4절). 그들은 여전히 ??야훼의 이름을 고백하면서 우상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 신학적, 사회적 환경은 예언자 호세아의 책에 묘사된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6:1-4은 신실한 청원자와 야훼에 대한 믿음을 주변 문화에서 숭배되는 우상들에 대한 믿음과 혼합하려고 하는 자들을 대조합니다. 이 시편의 시인은 생명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일관되게 고백하고 다른 거짓 신들을 배척합니다.

 

 

 

[5-8절]

5-8절은 시편 기자의 믿음을 계속하여 확증하여 줍니다.

5-6절에 사용된 용어 ? “택함받은 몫”, “제비뽑기”, “경계선”, “유업” ?은 토지 소유와 관련된 용어들이다(참조 요 13:23; 14:4; 15:3). ; 17:5). 우리는 이미 이 언어가 레위인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공하신 땅과 생계와 관련이 있다는 크라우스의 견해에 주목했습니다. 여기서의 땅의 기업은 야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위기와 갈등의 한가운데서 시인이 야훼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는 대안적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기도하는 사람이 땅을 분배하기 위한 제비뽑기를 통해 야웨의 선물과 생명의 공급을 경험했음을 보여줍니다. 론 클레멘츠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 거하는 특권과 예배의 특권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Ronald E. Clements, “Temple and Land: A Significant Aspect of Israel's Worship,” TGUOS 19 (1963): 16?28.]

 

그런 다음 5-6절의 언어는 야훼께서 청원자를 예배하는 공동체에 포함시키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이 배분하여 주신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토지 유산에 대한 언어입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내 마음”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교훈을 인식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양심 교육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8절은 시인이 하나님께서 닥친 위기에서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활기찬 삶을 마련해 주실 것임을 확신한다고 확언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시편의 첫 부분에 있는 혼합주의자들과 대조됩니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구절은 시편 15편의 결론을 연상케 하며, 이는 충실한 자는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며, 이는 시편 13:4에 나오는 충실한 자가 요동치거나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대조됩니다. 시편 16편의 시적 목소리는 야훼를 확신합니다.

 

 

[9-11절]

시편의 마지막 구절(9-11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노래합니다. 그 언어는 죽음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시편의 특징입니다. 야훼는 충실한 자를 죽음에서 보호하고 시편 기자는 충만한 생명의 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죽은 자의 영역인 스올 즉 구덩이, 즉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숭배하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특징이 있는 지하 세계에서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는 안식을 가져다줍니다(1, 9절). 11절에 나오는 임재의 언어는 시편의 첫 번째 탄원과 마찬가지로 성전의 피난처를 암시합니다. 이 기도는 야훼의 보호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므로, 그 목적은 독자들로부터 야훼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지평의 융합: 충성의 표현

 

시편 16편은 야훼께 드리는 기도이며, 야훼의 보호와 생명 공급에 대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시편의 결론은 애가 시편이 죽음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보호와 유일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삶을 상상합니다. 그런 믿음이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역사에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과 같은 많은 예가 포함됩니다. 신성한 충성심과 인간적 충성에 대한 응답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듭니다. 성전 피난처와 그곳의 신성한 임재는 절망 속에서 희망의 이미지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편은 시편 첫 부분의 기도의 전형적인 세 인물, 즉 신실한 시편 기자, 원수, 야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삼각함수적 측정 방식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도움은 시편 기자의 편에 있습니다. 이 시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헤아려 달라는 간청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증, 그리고 “충만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는 적들을 혼합주의자로, 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여전히 다른 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특징짓고 있습니다. 그러한 딱지는 현대 독자들이 시편의 기도에 나오는 적에 대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충실한 시편 필자들과 동일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적과 같은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주변의 문화는 신성과 신실함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쉽게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호전적인 소비주의에 어떤 면에서 충성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문화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톺아보기:

시편 16편과 베드로의 연설

 

기독교 전통을 읽는 사람들은 시편 16편이 베드로의 연설의 일부로 사도행전 2장 24-31절에 나오는 신약성경에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시편의 헬라어 본문의 마지막 네 구절은 다윗의 메시아가 부활할 것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다윗이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은 예수를 언급해야 합니다. 이 해석은 고대 이스라엘의 시편의 의미와 연속적이지만 또한 다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시편의 마지막 부분은 죽음의 위험으로부터의 구출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약의 해석은 무덤에서 메시아 예수의 부활과 관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