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 시간과 카이로스 시간
1. 그리스 · 로마의 신화적 시간
1.1 정해진 시간 크로노스
시간은 고대 그리스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세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Chronos), 아이온(Aion), 카이로스(Kairos)는 그 이름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시간의 신(神)으로 크로노스가 의미하는 시간은 전후(前後)가 정해진 시간이며, 시계와 연관 짓는 시간이다. 시간 크로노스는 숨겨진 것을 빛과 사물을 통해 보게 해주며, 나중에 진정한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교훈을 주는 지배자이다. 또한, 계절 등의 ‘연속’과 한 세대의 경과를 알려주며, 부당한 행위를 밝혀 신의 보복을 부르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력을 가진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괴물로 표현된다. 크로노스는 자기의 친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하여 추방하고, 그도 역시 자기의 아들인 제우스에 의해 추방된다. 크로노스의 품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은 결국 크로노스에 의해 죽게 마련이라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여준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는 죽음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요 일련의 연속적인 절대적인 시간을 뜻한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살아갈 나날들이며, 삶의 지속이며, 살아야 할 시간이다.
1.2 순환적 시간 아이온
본래 아이온은 그리스어로 영원이며 그 안에 ‘영원하며 동시에 고갈되지 않은 창조성’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이온의 속성은 영원성, 창조성, 생명성에 있다. 탄생과 윤회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순환적인 시간이다. 아이온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생애’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하는 삶의 현상으로서의 생애다. 쾌락과 연관되며 영원한 순환을 나타낸다.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의 형상으로 순환을 상징화했다.
아이온은 순환적 시간으로 불교나 힌두교 교리에 있는 윤회의 개념과 비슷하다. 선한 업(業) 즉, 선한 카르마를 많이 쌓으면 다음 생애에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윤회다. 그러나 그 본질은 좀 다르다. 불교의 윤회는 현재 내가 쌓은 카르마의 결과로 현재 마음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부린 욕심에 의해 생겨난 결과들이 나에게 또는 나의 자손에게 물려진다는 것이다. 다음 생애가 내가 아닌 나의 자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심리학의 기저가 부모의 양육 태도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보면 윤회의 근거가 된다 할 수 있다. 좋은 카르마를 대대로 순환시켜 작게는 가족을, 조금 더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책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삶이 필요하다. 성찰은 결국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내 안의 성찰 시간, 즉 몰입을 통한 양심을 드러내는 시간이며, 신과 만나는 시간이다. 순환적 시간인 아이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내면이다. 이 시간 또한 개인적 시간이 된다.
1.3 적절한 때 카이로스
그리스어 어원상 카이로스는 ‘적절한 기회’를 뜻하는 ‘Kairos’라는 말이 파생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카이로스는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기회, 운명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유리한 순간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제우스(Zeus)와 행운의 여신인 티케(Tyche)의 아들로 나타난다. 그의 모습은 사람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모호한 형상이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고, 뒷머리는 완전한 대머리이며 양발 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며, 또 알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려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밀 씨앗을 뿌리든 거친 바다를 건너든 그 가장 적절한 순간을 말한다.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지 않은 바로 적당한 그 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적시와 계량의 신으로 적절한 시간에 이르거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깨닫게 해준다. 금방 알아차릴 수는 없으나 발견하면 쉽게 붙잡을 수도 있고, 지나치면 다시 붙잡지 못하며, 최대한 빨리 사라지는 것이 기회이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영원을 얻고자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순간이나마 정지시킴으로 영원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의미이다.
Saturn Cutting off Cupid’s Wings with a Scythe (1802) byIvan Akimov
(Tretyakov Gallery)(출처-http://en.wikipedia.org/wiki/Saturn_(mythology)
Painting byPeter Paul Rubensof Cronus devouring one of his children, Poseidon
(출처-http://en.wikipedia.org/wiki/Cronus)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은 '크로노스'(Chronos)다.
제 자식은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는 신으로 묘사돼 있다.
그래서 연대기(Chronology) 등 시간을 나타내는 영어는 모두 이 신의
이름에서 나왔다.
2. 객관적인 의미의 시간 크로노스
크로노스(Chronos)는 시계 시간을 지칭한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이름 자체가 ‘시간’이란 뜻이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이며, 시계에 의해서 계측되는 시간이다. 시, 분, 초로 나누어지고, 연대기적 시간이고,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이다.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 즉 달력이나 시계로 표현되는 연속적 시간 개념이다. 또한, 도시, 상인, 관습과 용도, 관료제, 지배층, 빈곤층의 특수한 필요성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 측정 장치이다.
크로노스의 사명은 시간의 무한한 계속을 구분해서 취급상 편리하게 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바와 같이 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의 선험적 형식이다. 시간 없이는 무슨 존재든지 특정성을 소유하지 못한다. 크로노스는 모든 경험과 활동의 전제 조건이 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체험도 크로노스 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크로노스는 모든 상대적 존재물의 존재형식이며 그 밑바탕이 된다.
시계 시간으로 사는 문화에서는 시간을 일종의 부족한 자원으로 간주한다. 시계 시간 문화권에서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처럼 경제성을 강조한다. 해가 뜨면 정해지는 시간이며,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해 결정되는 시간이다. 낮과 밤이 찾아오고 계절이 바뀌는 시간이다. 측정이 가능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을 지닌다. 나이를 측정하고, 약속시간을 정하며, 직장의 출퇴근 시간을 정하는 등 일상의 시간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같고 평등한 시간이다. 1초, 1분, 1시간, 한 달, 일 년 등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의 시간이다. 또한, 크로노스의 시간은 흘러간다. 잠시 멈추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흘러간다. 시계가 반복적으로 회전하듯 그렇게 흘러간다.
시곗바늘이 반복적으로 회전한다고 직선적인 인간의 시간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어제와 오늘, 춘하추동의 계절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올해의 겨울과 내년의 겨울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 분명 다르다. 의미와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개인의 속도와 상관없이 흐른다. 시계는 멈추어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3. 주관적인 의미의 시간 카이로스
외부의, 외부에 맞춰진, 같은 형태로 흐르는, 이성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인 크로노스는 내면의, 내면에 맞춰진, 불규칙적으로 흐르며, 감각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에 대립한다. 개별적인 연관성에서 크로노스 안에 있는 것은 시계와 달력이며, 카이로스 안에 있는 것은 의식이다. 카이로스(Kairos)는 사건 시간이며 주관적이고 질적 시간이다. 창조적 시간으로 ‘영원한 것’과 ‘장차 올 것’ 사이를 매개한다.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에 대한 반성적 접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시간의 전통적인 직선적 성격을 가역(可逆)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시간이다. 고전적인 시간관에서 카이로스는 시간이 파열되고 열리는 순간을 뜻한다. 존재가 스스로 그 시간을 열고, 의미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삶의 활력이 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그때마다 자신을 뛰어넘어 주체적으로 대상 세계를 창조한다 할 수 있다.
행운의 여신은 카이로스를 통해 인간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죽음까지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행복한 순간, 시간이 확장되는 느낌의 순간, 1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을 선사한다. 각자의 마음 가운데서 체험하는 특별한 시간, 어떤 일이 수행되기 위한 주관적인 시간이 된다.
카이로스는 헬라어로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느낌의 시간을 말한다. 시기가 꽉 찬 의미의 순간, 감정을 느끼는 순간, 사건이 일어난 순간, 기쁨을 누리는 의미 있는 순간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이며, 더 할 수 없이 풍요롭고 활기가 넘치고 다채로운 생명을 잉태한 유연하고 비옥한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우리의 내부에서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의 질적 시간, 순조로운 순간, 완벽한 순간이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길고 짧은 개념만이 있다면 카이로스는 시간의 선택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진정한 질적 통찰력은 크로노스, 즉 양적 시간의 방법으로는 어렵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떤 순간에 카이로스를 경험한다. 감동하거나, 즐거움을 느끼거나, 행복한 느낌을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그 순간에 각자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낸다. 하나의 사건이 인생의 의미가 되는, 각자의 역사를 만드는 시간이다. 카이로스가 구체적으로 체현되는 곳은 존재 자체인, 구체적인 몸 자체에서이다.
카이로스는 의식에서만 잡는 시간이 아니고 몸 자체가 행복해지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행복의 순간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고 삶의 참 의미를 일깨워준다. 이 시간을 가진 자는 살아 있는 정신을 가진 자이다. 크로노스는 공통의 기한이지만 카이로스는 한 점, 혹은 물방울 같은 것이다.
4. 기독교적 관계의 시간 카이로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신앙과 달리 기독교의 독특한 점은 종교적 예식거행보다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였으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로마서 3:23; 5:12). 십자가 위의 예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죗값을 치르기에 충분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진 관계가 회복되었다(히브리서 9:11-14; 10:10; 로마서 5:8; 6:23).
성경의 구약은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후 인간의 죄로 하나님과 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보내어질 예수를 통한 구원을 기다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의미 있는 것은 추상적인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남을 기다리는 역사적 연속으로 구성 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수백 년간의 긴 기다림의 절정이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 운행자, 역사의 주인 그리고 심판자로 인식해 왔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시라는 개념은 구약의 일관된 메시지였다. 후에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들은 시간에 기대감을 부여했다. 성취될 약속은 그 어떤 사건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연대적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순간들보다 의미 있다는 말이다. 희망을 품고 연대적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시간의 기다림은 증가 또는 성숙한다.
신약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헬라어를 사용한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이며, 일상적인 사건들, 시계로 표시되는 시간이며, 일정 기간이나 간격을 말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한 개인이나 민족의 삶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시절들을 뜻하며, ‘무화과의 때’(막 11:3)와 같은 시기적절한 때, 또는 기회라 한다. 또한, 적절한 꼭 들어맞는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 이 기다림이 바로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다.
4.1 성경에 나타난 카이로스
(1) 모든 일에 때가 있다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도서 3:1-8)
전도서 3장 1절에서 8절까지는 카이로스를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된다. 분명한 것은 카이로스는 일정한 때를 의미한다. 오늘, 내일, 올해, 내년 등과 같은 연대기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을 의미한다. 우주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그에 알맞은 때가 있다. ‘때’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두 같지는 않다. 한 사람 한 사람 그에게 맞는 때가 있다. 그때를 누구와 비교해서도 안 되며, 때를 앞서서도 안 되고, 때를 지나쳐서도 안 된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가 가장 알맞은 때에 나타나며 그것을 잡아야 한다.
사람은 인생의 꽃 피울 시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어느 순간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우고 진자리에 대나무의 매듭 같은 하나의 마디가 생긴다. 인생의 한 역사를 만든 시간이다. 그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다른 것을 열등감으로 힘들어하면 삶이 어려워진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여유와 인내는 인생의 역사를 이루는 내면의 토양이 될 것이다.
(2) 성취의 의미로서의 때
하나님의 나라는 성취의 때(카이로스)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시간은 우리를 쫓고 다그치는 적이 아닌 의와 평강을 열어주는 문이 된다. 새로운 시대의 도약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지금까지 나의 현실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의미가 된다. 이단이라 할지라도 성경 교리를 역동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시야를 재발견하여 공포한다. 세속적 역사관에 내재하여 있는 결정론과 자기 노력이라는 상호 모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자신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주장과 우리에게 새로운 백성이 되라고 하는 그분의 부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복음 9:16-17)
예수를 통해 새로운 계명을 받고 새롭게 된 백성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새롭게 변화된 것이 의식만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몸은 예전의 습관을 따르면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는 격이나 포도주 부대는 찢어지는 격이 된다. 무엇인가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것은 모두의 바람이긴 해도 이루기는 어렵다. 지금의 환경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어제의 게으름을 버리고 싶고, 좀 더 나은 곳으로 직장을 옮기고 싶다는 물리적인 소망을 위해서 몸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이나 제자들은 놀라워했다.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알 뿐 실천으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라’라는 말을 듣고도 잠을 잤고, 하늘의 이치를 선포하셨는데 이 땅의 왕이라 생각하고 벼슬자리를 탐했으며,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버리기까지 했다. 제자들이 진정으로 의식과 몸이 변한 것은 예수 부활 후다. 죽음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옛 것은 죽어야 지금이 산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롭게 변할 카이로스를 주셨다. 변하기 위한 노력이 힘들지만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면 관습, 습관 등 어제까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던 몸과 마음을 깨우고 생활해야 한다. ‘항상 깨어있으라.’ 그리하면 도래하는 새로운 세상을 볼 것이다. 성취의 때는 결과이다. 긴 기다림이 과정이 지난 후에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성취의 때이다. 장애인 교육에 있어서 성취의 때를 보는 것은 신세계를 보는 것과 같다. 몇 년을 기다려야 미미한 변화를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때의 기쁨은 교사로서 느끼는 최고의 카이로스일 것이다. 젓가락 사용을 위해 몇 해인지도 모를 봄을, 가위질을 위해 몇 해인지도 모를 여름을, 한글 배우기를 위해 몇 해인지도 모를 가을을, 다장조 1도 계이름을 위해 몇 해인지도 모를 겨울을 보내 본 사람은 그때를 안다.
(3) 기다림의 의미로서의 때
에스더 4:14이 적절한 카이로스 사례다. 유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백성들이 위협을 받고 있던 바로 그때 에스더가 왕궁에 있게 된 것이 단지 행운이거나 우연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렇지 않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말속에는 “한 개인의 삶의 과정 안에 시기적절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주도권”이라는 개념이 있다.
카이로스는 에베소서 5:16과 골로새서 4:5에 잘 나타나 있다. 두 장 모두 ‘시간을 구속하라’, ‘너희는 기회를 사들이라’ 라 번역할 수 있다. 이 문장에는 적은 시간을 더 많은 활동으로 쥐어짜 내는 개념은 없다.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라는 내용도 아니다. ‘더 많이, 더 빨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좋은’ 활동들을 더 많이 우리 삶에 맞추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구속하고, 기회를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이다. 행복한 시간은 구속하여 길게 늘이고, 내 앞에 온 행운의 기회들은 사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내 안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진다.
성경에서의 기다림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히브리인들이 람세스에게 고통받을 때 울부짖어 기도한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셨다. 그 시간이 400년 가까이 된다. 그것도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 가정에 한 아이 모세를 보내시는 일이었다. 그로부터도 40년이 지난 후에 드디어 모세가 움직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도 긴 기다림이 있다. 80세에 광야로 나와 떠도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신다. 그 뒤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은 나이가 100세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다 로마군에게 잡혀 로마로 배를 타고 압송될 때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다. 매우 위급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와 항해하는 자를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사도행전 27:24)’ 라는 말씀과 함께 열나흘을 바다에 있게 하신다. 기다림과 관련된 성경의 예화들이다.
인간의 조급함을 말하기에 성경에서의 기다림은 비교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안다. 내가 원하는 시기와 장애 학생의 적절한 시기는 같지 않다. 물론 부모와의 시간도 같지 않다. ‘반복’이나 ‘느림’도 마찬가지이다. 크로노스의 시계로 측정한다면 정확하게 측정할 수도 있다. 측정하려면 먼저 기준이 필요하다. 몇 번의 반복에 기준을 두고 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것, 정해진 거리를 반복 훈련을 통해 얼마나 시간이 단축되었나 측정하는 것에서 몇 번이나 정해진 거리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장애인의 삶의 전반에 기준을 두기는 어렵다. 삶의 전반에 시계를 들이대고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을 측정된 시간으로 기억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개개인의 삶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공통의 시간에 살면서 그 사회적 시간 안에서 보면 장애인의 시간기준은 일반인과 또 다르다. 느림의 시간을 가지는 장애인과 장애인을 둘러싸고 있는 조급한 시간의 괴리는 시계로 측정하기 어렵다.
5. 시간의 두 가지 표상
학문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론화 작업이 요구되기 마련이기에, 문자나 상징 등의 기록 가능한 기호체계에 의존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그 대상과 기호 간의 격차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그런데도 많은 철학자와 이론가는 언어라는 기호로서 연구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해왔다.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언어가 아닌 각 분야만의 독특한 기호로 대상과 관련된 그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과 인식과 관련하여 후기 저서인 『고백록』 중 시간과 영원에 대한 제11권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현재가 만약 언제나 존재하는 현재이고 과거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가 아니고 영원이다. 그리고 현재의 시간은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것으로서 과거의 현재인 기억, 현재의 현재인 직관 혹은 지각, 미래의 현재인 기대로 이루어진다.
그는 시간이 우리의 마음-혹은 영혼-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지만, 마음은 심리적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현재’의 가치와 책임에 대해 강조한 셈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른 관점으로 시간을 정의했다. 그는 시간을 선후 관계에 의해 측정된 운동의 수로 여겼다. 즉, 물리적 관점으로 본 시간은 계산의 대상인 ‘지금’의 연속일 뿐인 셈이다. 이러한 시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이후 많은 철학자의 연구의 근간이 되는 주축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인은 이 두 철학자 각각의 시간관을 주축으로 본인의 작품의 이론적 바탕을 전개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의 표상으로 구분하였다. 바로‘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와‘카이로스(Kairos, καιρός)’인데, 이 두 개념은 주로 남성의 형상으로, 크로노스는 노인, 카이로스는 젊은이로 우의(寓意) 되곤 한다. 크로노스는 무한히 흘러가는,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측정 가능한 물리적인 시간 개념이고, 카이로스는 적절한 순간, 기회 혹 은 초월적 순간을 의미하는 주관적이고도 심리적인 시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크로노스는 물리적 시간, 카이로스는 심리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크로노스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시간이기에 객관적이라면, 카이로스는 그러한 시간을 어떻게 선택하고 활용하느냐와 관련된 주관적인 성격의 시간인 셈이다. 본인은 이 두 단어의 함축적 의미와 상징을 작품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즉, 앞서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은 크로노스와 연결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의식의‘현재’를 카이로스 시간으로 바라보고자 함이다.
1) 객관적 시간의 크로노스
크로노스(Chronos)는 이미 초기 그리스 시대부터 비슷한 이름과 철자 때문에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Kronos)신과 혼동되고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과 계절의 신으로 로마에서는 사투르누스(Saturn)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두 고대 문화에서 크로노스(Kronos)가 크로노스(Chronos)와 동일시되면서 시간의 신으로 숭배되었고, 다양한 예술작품에서 시간의 상징인 긴 낫이나 모래시계, 유리잔 등을 지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그리스·로마의 신들 가운데에서 가장 연장자에 속하기 때문에 주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고전의 대표 신들이 하늘의 천체로 연결될 때 사투르누스는 가장 높고 가장 느린 혹성과 연결되었다. 이 때문에 고전 미술에서 크로노스나 사투르누스는 완벽함 위엄을 갖추면서도 우울하고 침울한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현대의 문예적 표현으로, ‘사투르누스적(Saturnine)’ 이라는 표현이 음침함, 침울함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이는 혹성들 가운데 가장 차갑고 건조하고 느린 사투르누스는 일반적으로 노년, 비참한 빈곤, 죽음 등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의 도상 역시 사투르누스처럼 작은 낫이나 큰 낫을 들고 등장한다. 또한, 농경, 계절의 신인 사투르누스가 홍수나 기근 등의 재난을 야기하는 장본인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를 얻게 되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종교적 숭배 관습이 점차 해체되어 마침내 철학적 공론으로 대체되었을 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크로노스(Kronos)와 크로노스 (Chronos)가 우연히 지녔던 유사성으로 두 개념이 동일한 것으로 쓰이고, 실제로도 특징을 일부 공유하게 되었다. 크로노스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점성학 관련 그림들에서 그의 비우호적인 의미들이 강조되었다. 또한, 문헌적 근거만으로 성립되고 전개된 신화해설서의 세밀화에서는 유독 그를 끔찍하고 불쾌한 대상으로 묘사했다. 삽화가들은 거세 과정이나 아이를 산 채로 먹어 삼키는 행위를 서슴없이 묘사했는데, 고전 미술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장면이다. 이와 같은 식인 풍습의 이미지는 후기 중세 미술에서 고정적 유형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점성학 그림과 융합되어 때로는 거세 장면과 아이를 잡아먹는 모습이 결합하거나 먹는 행위와 목발 모티브가 연결된 경우를 접하게 된다. 신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고야의 유명한 그림 <아들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에서 생생하게 잘 그려졌다. 한편, 크로노스는 프랑스어 ‘Chronologie’의 번역어로, ‘시간의 학문’, 연대학(年代學)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에 있어서 연대학은 그 과거의 시간적 위치나 상호 간의 시간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오래된 과거의 사건 중, 숫자로서의 연대로 표시가 불가능한 사건이나 사상에 대해 상호 간의 시간적 전후 관계를 나타내는 상대적 연대가 사용되어 왔다. 20세기에는 물리 화학적 기반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개발되면서 절대연대를 측정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오랜 시간이라는 변수 속에서 상대연대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2) 주관적 시간의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인간의 삶이나 우주의 발전 과정에서 전환점을 기록하는 짧고 결정적인 순간의 의미로, 다시 말해 적절한 시간, 기회 등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기회’로 알려진 인물 모티브로 표현되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크로노스는 노인으로 표현되는 반면, 카이로스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어깨와 발목에 날개를 달아 잽싸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스 · 로마 신화의 헤르메스와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주로 기회의 상징물인 저울과 함께 표현된다. 이는 애초에 면도날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형태로 묘사되어오다가, 나중에는 바퀴라는 상징물이 더 첨가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외에 카이로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거의 대머리에 가깝게 깎여버린 머리칼이다. 이는 속담이나 시를 통해 표현되어온 ‘기회’의 특징을 은유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뒷머리는 대머리지만 이마 쪽 머리칼이 남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이 그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 신의 정면에서 머리칼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의 손은 신의 미끌미끌한 뒷머리 때문에 아무것도 잡을 수 없고, 그러면 적절한 시간을 놓치게 되어 결국 기회는 미끄러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기회의 신의 상징인 카이로스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특별히 사용되는 구제사적(救濟史的) 개념이기도 하다. 즉 신의 구제 계획의 중심이 되는 사건을 카이로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가령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 메시아인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최후의 심판, 종말까지 역사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각각의 시점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로스는 신의 지상에의 강림 혹은 신의 영원한 세계가 지상의 덧없는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는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유대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에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인류를 위해 대속한 대표적인 카이로스이다.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해 그 이전과 그 이후 역사의 의미가 결정된 것이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Hippokratēs, BC460~377 추정)의 이름으로 전승되는 수많은 저술 중 『금언집』의 서두에는 “생은 짧고, 기예는 길다.”라는 경구가 등장한다. 여기에 서 ‘기예(技藝, Ars, art)’는 문맥상 의술을 뜻하는 ‘기술(Techne)’로서 의 해석이 어울리지만, 오늘날에는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서 자주 인용되는 어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 이후에 이어지는 다음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기회는 덧없고, 실험은 위험하고, 판단은 어렵다.
그는 첫 문장에서 인생과 기예 간의 크로노스적인 비대칭성을 주장하자마자, 곧 동일한 의학적 문맥 안에서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을 끌어들인 것을 볼 수 있다. 즉 쉽게 지나가는 인생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어떤 의미로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본성을 더욱 빠듯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크로노스의 시간도 카이로스의 시간도 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는 표현 역시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니다. 또한,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시간의 흔적과 축적을 통한 삶의 표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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