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마속 (泣斬馬謖)
泣:울 읍.
斬:벨 참.
馬:말 마.
謖:일어날 속.
풀이
소리 없이 울 읍 · 벨 참 · 말 마 · 일어날 속 |
뜻 : 울면서 마속(馬謖)을 베다. 공정한 법 집행을 하거나,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三國志》〈蜀志 諸葛亮專〉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 곧 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
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겼다.
마속은 전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용장인 장합(張郃)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埦)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출전
223년, 촉주(蜀主) 유비는 221년부터 시작된 동오(東吳)와의 싸움인 이릉(夷陵) 전투에 출전하였다가 대패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면서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에게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했다. 유선이 유비의 뒤를 이었고, 역사에서는 유선을 후주(後主)라고 부른다. 건흥 6년(228) 봄,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위나라를 공격했다. 출정에 앞서 그는 후주 유선에게 글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출사표(出師表)〉이다.(이 〈출사표〉는 제갈량의 우국충정이 넘치는 글로서, 이를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읽고 울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는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 읽고 울지 않으면 우애를 모르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더불어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명문이다.)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린 후에 위(魏)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중(漢中)을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 한중에서 기산(祁山)을 향해 우회하면서 천수(天水), 안정(安定), 남안(南安) 등 3개 군을 접수하고 기산에 이른 다음 장안으로 진군하는 전략이었다. 이때 위연은 자오곡(子午谷)을 질러 바로 장안으로 기습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제갈량은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력을 다 기울인 이 전투에서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할 경우 국기(國基)가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위나라는 하후무(夏侯楙)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적했으나, 남안, 천수, 안정의 농서 지방 3군을 빼앗기고 강유가 촉한에 투항하자, 위 명제(明帝) 조예는 사마의(司馬懿)를 복직시키고 장합(張郃)을 가정(街亭)으로 향하게 하였다.
제갈량은 전력상의 요충지인 가정을 지킬 장수로 마속을 보내면서 가정의 길목을 지켜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마속은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적을 끌어들여 역습을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산등성이에서 장합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힘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마속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옥중에서 제갈량에게 〈속임종여량서(謖臨終與亮書)〉라는 글을 올렸다.
「승상께서는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하였습니다.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襄陽記曰, 謖臨終與亮書曰, 明公視謖猶子, 謖視明公猶父. 願深惟殛鯀興禹之義, 使平生之交不虧於此, 謖雖死無恨於黃壤也.)」
제갈량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속에게 참수형을 내렸다. 다시 구하기 어려운 장수이므로 살리자고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법을 엄정히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다. 이를 ‘읍참마속’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 ·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에 나오는데, 마속이 옥중에서 제갈량에게 올린 서신은 《양양기(襄陽記)》를 인용한 주(注)에 실려 있다.
곤은 요(堯)임금의 신하로 치수에 실패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이고, 우는 곤의 아들로 치수에 성공한 사람이다. 요임금과 순(舜)임금 때 20년 동안이나 홍수가 지속되었다. 요임금은 곤을 시켜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곤은 9년 동안이나 열심히 일했지만 물길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요임금은 그 책임을 물어 곤을 처형했다. 요임금의 양위로 제위에 오른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에게 치수를 맡겼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물길을 막는 방법이 아닌 물길을 내서 물이 빠지게 하는 방법을 써서 작은 시내는 큰 강으로 흘러들게 하고, 강물은 바다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13년의 노력 끝에 우는 마침내 홍수를 다스리게 되었고, 후에 순임금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고,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를 세웠다.
용례
사업하는 사람은 때로는 사업을 살리기 위해 ‘읍참마속’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명예퇴직이 ‘읍참마속’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역사 · 문화 자료─읍참마속의 진실〗
제갈량(諸葛亮)의 제1차 북벌은 결과적으로는 인선(人選)의 실패로 어이없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제갈량이 이런 인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고, 마속(馬謖)의 목을 베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가정(街亭)은 최전방의 전선은 아니지만 보급로의 거점으로, 촉(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고, 위(魏)나라 입장에서는 반드시 빼앗아야 할 요지였다. 제갈량은 가정을 지킬 장수로 중신들이 추천하는 맹장들을 제쳐 놓고, 마속을 기용했다. 맹장들은 본대 전력의 핵심 요원으로 공격에 쓸 말이지 수비에 쓸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운(趙雲, 조자룡(趙子龍))은 기곡(箕谷)에서 이미 위군의 발을 묶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위연(魏延)은 위군 본대의 주력을 격파하는 선봉장으로서의 대임을 맡고 있었다. 하여 제갈량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본대에서 빠져도 크게 전력 부담이 없는 마속을 파견한 것이다. 물론 제갈량도 마속이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장으로 왕평을 붙여 주었다. 마속의 임무는 가정, 즉 후방의 보급 거점을 굳게 수비하는 것이었고, 만약 제갈량이 지시한 대로 길가에 목책을 세우고 길목을 틀어막고만 있었다면 충분히 가정을 지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인재 부족으로 허덕이던 촉나라에서 제갈량이 끔찍이도 아끼고, 모든 일을 함께 상의했던 자기 사람 마속을 눈물을 흘리면서 벨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군법을 엄정하게 시행한다는 명분뿐 아니라 그 이면에 더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다. 당시 촉나라에는 세 개의 큰 파벌이 존재하면서 내부 모순이 심화되어 있었다. 현재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비(劉備)가 거느리고 들어온 형주(荊州)파, 전임 태수 유장(劉璋)의 동주(東州)파, 그리고 익주에서 태어나 자란 본토의 사족(士族)인 익주(益州)파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선주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劉禪)이 그 뒤를 이었지만 ‘승상이 군권(君權)을 대신’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갈량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이 했던 것처럼 강력한 ‘법치(法治)’를 펴 공평무사하고 엄정하게 법을 시행했다. 덕분에 삼국 중에서 촉나라가 가장 잘 다스려졌고 치안도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선택하여 파견한 마속이 국운에 영향을 미칠 만한 실책을 범했으니, 모든 파벌들이 제갈량의 행보를 주시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속의 목을 베지 않을 수 없었던 제갈량의 고충을 마속을 베면서 흘린 그의 뜨거운 눈물이 말해 주고 있다. 곡(哭)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소리 내어 우는 것이라면, 읍(泣)이란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말한다. 소리 내어 울든, 소리 없이 울든 간에 한 번이라도 울어 본 사람이라면 어떤 울음이 폐부에서 나오는 진짜 ‘사나이 마음’인가를 알 것이다. 그래서 곡참마속(哭斬馬謖)이 아닌 읍참마속(泣斬馬謖)인 것이다.
〖역사 · 문화 자료─이릉의 전투〗
형주(荊州, 호북(湖北) 강릉(江陵))에 주둔해 있던 관우(關羽)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번성(樊城) 탈취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동오(東吳)의 기습을 받아 싸움에 지고 자신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221년, 촉주(蜀主) 유비는 조운(趙雲) 등 명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吳)나라 정벌에 나섰다.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위한 출병이었다. 오나라의 손권은 육손(陸遜)을 대도독에 임명하고 5만 군사로 대항했다. 유비가 거느린 촉군과 육손이 거느린 동오의 군대는 이릉(夷陵)과 효정(猇亭)에서 맞붙었다. 유비는 무협(巫峽)으로부터 이릉에 이르기까지 장강 남쪽의 600여 리 되는 산 위에 수십 개의 영채를 설치하였다. 육손은 장장 7, 8개월을 싸우지 않고 장기전으로 나갔다가 촉나라 군대가 지쳤을 때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유비의 군대를 대파했다. 유비는 싸움에 진 후 백제성(白帝城)으로 피신했다가 얼마 후에 성의 서쪽에 있는 영안궁(永安宮)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전쟁을 ‘이릉의 전투’라고 하는데, ‘관도(官渡)의 전투’, ‘적벽(赤壁)대전’과 더불어 《삼국지》의 삼대전역(三大戰役)으로 불린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제갈량이 촉나라의 실세로 부상하여 그의 시대가 열렸다.
삼국지〉 "촉지" '마속전'에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가정(街亭)의 전투에 마속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평지에 진을 치라고 했으나, 마속은 자신의 생각대로 산에 진을 쳤다가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마속은 제갈량이 아끼는 장수에 친우 마량의 아우였지만 지시를 어기고 패전한 책임을 물어 참수했다. 그리고 장수들에게 군율의 엄중함을 강조했다.
어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일까?
정치관련 기사에 '읍참마속'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면서 읍참마속의 뜻이 화제다.
읍참마속( 泣斬馬謖 )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다'는 뜻으로 누참마속(淚斬馬謖)이라고도 한다.
이 단어는 고사성어로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무렵에 탄생했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무렵, 제갈량의 공격을 받은 조예는 명장 사마의를 보내 방비토록 하였다.
사마의의 명성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제갈량은 누구를 보내 그를 막을 것인지 고민하다 제갈량의 친구이자 참모인 마량의 아우 마속이 자신이 나아가 사마의의 군사를 방어하겠다고 자원한다. 마속 또한 뛰어난 장수였으나 사마의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긴 제갈량은 주저하였다. 그러자 마속은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겠다며 거듭 자원한다. 결국 제갈량은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권유하며 전략을 내린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전략을 세웠다가 대패해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으며 마속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다. 엄격한 군율이 살아 있음을 전군에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따라서 정치권에서 읍참마속은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에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읍참마속 뜻과 유래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를 많이 들어보셨을텐데요~
오늘은 읍참마속에 뜻과 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께요~
읍참마속 유래는 삼국지에서 생겼습니다 ^^
마속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평지에 진을 치라고 명합니다.
마속은 훌륭한 장수였죠.
하지만 마속은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산에 진을 쳤다가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마속은 제갈량이 아끼는 장수이자 친한 친구
마량의 아우였습니다.
제갈량은 장수들에게 군율의 엄중함을 강조하고자
패전한 책임을 물어 마속을 참수했습니다.
친구의 아우인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심했을지 이해가 됩니다.
읍참마속 뜻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밴다라는 뜻으로
친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도 규칙을 어겼을때는
엄벌해야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성어 읍참마속 뜻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밴다는 뜻입니다.
비록 규율을 어겼지만 아끼는 장수의 목을 밸 수 밖에 없는
이러한 경우를 일러 읍참마속 이라 합니다.
아무리 친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도 규칙을 어겼을 때는
공정하게 법에 따라 심판해야 함을 이르는 고사성어입니다.
이상 읍참마속 뜻과 유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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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종칠금 [ 七縱七擒 ]
일곱 칠, 놓아줄 종, 잡을 금.
諸葛亮(제갈량)이 猛獲(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았다는 옛일.
마음대로 다룸. 쥐락펴락함.
칠종팔금 [ 七縱八擒 ] 일곱 칠, 놓아줄 종, 잡을 금.
유래 및 용례
≪三國志(삼국지)≫ 蜀志(촉지) 諸葛亮傳(제갈량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三國時代(삼국시대) 蜀(촉)나라의 劉備(유비)가 죽고 劉禪(유선)이 왕으로 올랐을 때 제갈량이 남쪽 오랑캐를 토벌하러 나섰다. 오랑캐의 두목은 옹개였는데 제갈량은 오랑캐들이 내분을 일으키게 만들어 옹개를 죽게 했고 곧 맹획이오랑캐 장수가 되었다. 猛獲(맹획)은 아주 강직하고 용감한 남방의 새로운 領袖(영수)로, 제갈량에게 사로잡히자 비겁한 방식으로 사로잡힌 바 되었다고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맹획을 생포했다가 살려 보내기를 일곱 차례나 했다. 결국 强暴(강폭)한 맹획도 진심으로 승복하면서 다시는 촉한에 대항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제갈량은 맹획에게 촉한의 관직을 주었는데, 나중에는 그의 벼슬이 御史中丞(어사중승)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말은 마음대로 다룸, 쥐락펴락함 등을 나타내며, ‘七縱八擒(칠종팔금)’이라고도 한다.
침어낙안 [ 沈魚落雁 ]
잠길 침, 물고기 어, 떨어질 락, 기러기 안.
고기는 부끄러워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기러기는 부끄러워서 땅에 떨어진다.
유래 및 용례
여자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고기를 물속으로 가라앉게 하고 기러기를 땅으로 떨어지게 할 만큼 그렇게 아름답다는 뜻이 되겠는데 처음부터 이러한 뜻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니다. ≪莊子(장자)≫ 齊物論(제물론)에 齧缺(설결)과의 대화에서 王倪(왕예)가 말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王倪(왕예)가 말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람은 소와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맛있어 하고, 솔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것은 타고난 천성으로 어느 쪽이 과연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원숭이는 猵狙(편저)라는 보기 싫은 다른 종류의 원숭이를 암컷으로 삼고, 큰 사슴은 작은 사슴 종류와 交尾(교미)를 하며 미꾸라지는 다른 물고기와 함께 논다. 毛嬙(모장)과 麗姬(여희)는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絶世美人(절세미인)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그녀들을 보면 물속으로 깊게 숨어 버리고, 새들은 높이 날아가 버리며 사슴들은 뛰어 달아난다. 이들 네 가지 중에 과연 어느 쪽이 천하의 올바른 美(미)를 알고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볼 때 仁義(인의)니 是非(시비)니 하는 것도 그 방법과 한계라는 것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도저히 분별해 낼 수가 없다.” 물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새가 높이 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피해 달아나는 것이지, 미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미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런데 미인이라서 그런 것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고, 이 말의 對句(대구)로 ‘閉月羞花(폐월수화)’라는 말이 생겨났다. 달을 구름 속에 숨게 하고 꽃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뜻이다. 둘 다 미인을 형용하는 말로 굳어졌다.
침윤지참 [ 沈潤之譖 ]
잠길 침, 젖을 윤, 갈 지, 참소할 참.
물이 스며들듯 하는 참소.
침윤지언 [ 浸潤之言 ] 잠길 침, 젖을 윤, 갈 지, 말씀 언.
유래 및 용례
이 말은 ≪論語(논어)≫ 顔淵篇(안연편)에 있는 孔子(공자)의 말이다. 공자의 제자 子張(자장)이 공자에게 “어떤 것을 가리켜밝다고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물이 스며들듯 하는 참소와 피부로 직접 느끼는 호소가 행해지지 않으면 마음이 밝다고 말할 수 있고, 또 생각이 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浸潤之譖(침윤지참)’은 물이 차츰차츰 배어 들어가듯이 남을 여러 번 차츰차츰 헐뜯어서 곧이듣게 하는 讒訴(참소)이다. 물이 서서히 표가 나지 않게 스며들 듯 어떤 상대를 중상하고 謀略(모략)하면 呪術(주술)과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膚受之愬(부수지소)’는 듣는 사람의 피부를 송곳으로 찌르듯 이성을 잃게 만드는 그런 충격적인 호소를 말한다.윗사람에게 지극히 총애를 받다 보면 그 주위에는 참소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윗사람은 태산같이 믿던 사람도 누군가 오랫동안 그 사람에 대해 좋지 못한 평을 하게 되면 결국 믿던 사람을 의심하고 버리게 된다.
[|작성자 조아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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