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과 신학 1

우리가 불순종한 그곳에서 시험 받으신 예수

by 은총가득 2021. 8. 18.

우리가 불순종한 그곳에서 시험 받으신 예수

 

Temptation of Christ(Philips Augustijn Immenraet, 1663). 사진: TGC 제공

“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성육신 사역을 광야에서 시작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그것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셔서 동산-성전-낙원을 회복하고자 하셨다 ”

 성경에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 기록된 본문을 보면 정말 작고 언뜻 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을 통해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 되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장자 된 이스라엘을(출 4:22)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자마자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40년을 떠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시험과 사단의 유혹을 통과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마 2:15). 마찬가지로 애굽으로부터 예수를 부르시고(마 2:15)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게 하신 후,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광야로 이끌어 40일간 하나님의 시험과 사단의 유혹을 받도록 하였다. 서로 관통하는 모든 것의 유사성은 실로 놀라울 정도이지만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을 기록한 본문에 나온 작은 디테일들을 보면 더더욱 놀라게 된다.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내용은 마가의 기록에 등장한다.

마가는 예수께서 광야에 계시면서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막 1:13) 라고 썼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이라는 면에 있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논하기에 앞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것이 가르치는 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아담은 동산에 짐승들과 함께 거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동산-성전-낙원을 “경작하고 지키는” 과업을 주셨고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도록 하셨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을 때 그는 그 동산-성전을 척박한 광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세상은 이제 죄, 반역, 불행, 그리고 위험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첫 번째 아담이 저지른 일을 회복하고자 두 번째 아담이 세상에 오셨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시작하셔야 했다. 동산이 아닌, 타락한 세상의 척박함과 저주를 상징하는 곳에서 말이다. 예수께서는 첫 번째 아담처럼 동산-성전 같은 낙원에 계셨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들짐승과 함께 광야에 계셨다.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로서의 예수께 다시 돌아가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셨을 때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 복과 저주를 약속하셨다(신 28–31장).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시험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구속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언약에 따른 복을 받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성육신 사역을 광야에서 시작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그것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셔서 동산-성전-낙원을 회복하고자 하셨다. 광야 및 동산이라는 테마를 살펴보면, 주 예수께서 자기 백성들 대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의 백성들의 죄를 동산 무덤 안에 가두심으로 사역을 완수하셨다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된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아담과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시험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다.

사단은 인류의 첫 부모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유혹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처럼(창 3:6) 믿었기에 그 열매를 먹고 말았다.

 

이스라엘 역시 광야에서 육신의 정욕(민 11:1–9, 31–35), 안목의 정욕(고전 10:7–8), 그리고 이생의 자랑(고전 10:9–10)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마귀가 마지막 아담이자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을 유혹하고자 했을 때, 그는 에덴동산에서 우리의 첫 부모를 유혹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나 광야에서 옛 언약인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데 썼던 것과 유사한 시험을 사용했다. 예수께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마 4:3), 안목의 정욕(8–9절), 그리고 이생의 자랑(5–6절)으로 시험을 받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시험 받은 아담 및 이스라엘의 반응과 달랐다. 시원적(始原的, protological) 아들인 아담(눅 3:38)과 모형론적 아들인 이스라엘(출 4:22)은 불순종했으나, 종말론적 아들인 예수(롬 1:4)께서는 순종하셨다.

 

가장 중요한 디테일은, 대적의 유혹과 대결하시던 예수께서 의지하셨던 성경 말씀들이다.

세 번 씩이나,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리고 세 번 모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대적했다.

 

이 본문은 신자들이 사단의 유혹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이기라고 권면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본문에는 그보다 더 깊고 심오한 무언가가 있다.

 

마태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사용하셨는데, 신명기는 광야에서 방랑하던 기간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신 것들을 요약한 책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취해야 했으나 취하지 않았던 것, 즉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기록해주신 것을 취하셔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대적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해야 했으나 하지 않았던 그것을 마침내 행하신 것이다.

 

우리가 불순종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순종하셨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단을 이기심으로, 또한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심으로(골 2:15)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복을 받으셨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됨으로, 우리는 이제 그 언약의 복(엡 1:3–14)에 참예하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는 마귀의 계략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와 능력이 주어진다(6:10–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에 참예하게 된다(엡 2:1–15; 갈 6:16 및 롬 11:17–20도 보라). 우리는 영적으로 부활하였고, 모든 방언, 족속, 백성과 나라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 받은 그의 몸의 지체들이다. [복음기도신문]

“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성육신 사역을 광야에서 시작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그것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셔서 동산-성전-낙원을 회복하고자 하셨다 ”

Nicholas T. Batzig | 니콜라스 T. 뱃지그는 사우스켈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있는 Church Creek PCA의 담임 목사이며, Ligonier Ministries의 협동 에디터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보화

 

▲ 사진: unsplash

238호 / 복음의 능력

 

역사 속에서 늘 있던 문제점은 사람들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 게 아니라 자기가 가르치는 교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존 웨슬리 같은 개혁가나 선지자는 내적 본질 없는 교리만 붙들고 있는 교회를 꾸짖었다. 교회의 조직과 교리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의 교훈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적 실재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존 웨슬리 같은 사람들을 따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영적 실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성경만을 따랐다. 이런 사람들에게 영적 보화를 안겨준 근원은 오직 하나이다. 그들의 모든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했다. 그분 위에 다른 무엇을 보탤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 분이 그들의 모든 것이었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라

(A.W.토저.2015)에서 발췌 


십자가에 못 박힌 삶

 

사진: pixabay

234호 / 복음의 능력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고 밀 때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했다. 큰 무리에 가로막혀 그분께 나아가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노력해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밀고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한 말은 ‘누가 믿음으로 내 옷에 손을 대었냐?’는 뜻이었다.

예수님과 함께있던 제자들은 에워싸 미는 무리 속에 있었다. 하지만 혈루증 환자였던 여인은 혼자였다. 그녀는 믿음과 사랑으로 혼자서 무리를 뚫고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기적을 체험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복된 삶이지만 동시에 고독한 삶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라 (A.W.토저.2015)에서 발췌 gnpnews@gnm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