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황과 국가
- 중세의 시작, 교황 그레고리1세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들에 의해 멸망 당하고,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에서 먼 로마에서는 사실상 로마 감독이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점차 지난날 로마 황제의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 레오 1세가 훈족과 반달족을 돌려보내는 정치력을 보이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레오 1세의 선언문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면서 로마 감독의 권위는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로마 감독을 사실상 교황으로 승격시키면서 로마 교회와 감독의 권위를 높인 인물이었다.
이후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터를 놓은 사람은 대 그레고리였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로마의 지사로 임명되었지만, 정치보다 수도원 생활에 더 매력을 느끼고 34세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590년에 로마의 감독으로 선택되어 첫 번째 수도사 출신 교황이 되었다. 그가 교황이 될 당시 서방 지역은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어려운 때를 맞고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병력을 모으고 롬바르드족과의 평화협상을 이끌어 내는 등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가 한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북유럽 선교”였다. 그는 로마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를 잉글랜드에 파송하였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 왕과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왕으로부터 캔터베리의 궁전을 받게 되고, 왕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캔터베리의 대감독으로 세움으로써 로마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윌리브로드를 네덜란드 지역으로 파송하였고, 그는 ‘네덜란드의 사도’라 불렸다. 또 보니파키우스는 독일 지역에서 게르만족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그는 바울 이후 최고의 선교사로 불리며, 미신이 지배하는 저들 속에 들어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알렸다. 독일 헤세 지역에서 지역민들이 신성시하는 큰 떡갈나무를 찍어버리고, 우상숭배를 정죄하였다. 그는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세우고, 현지인들에 의한 복음 전도를 계획했다. 또 마인츠의 대감독이 되어 독일 전 교회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선교지였던 프리슬란트를 잊지 못해 그곳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도쿰이라는 곳에서 노천 예배를 드리려다가 이교 불량 청년들에 의해 순교하게 되었다.
한편, 그레고리1세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한다고 하였지만, 실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이단의 길로 교회를 이끌어갔다. 그는 원죄를 가진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구원 받지만, 구원 받은 이후의 죄는 공덕으로 속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 공덕을 위한 가장 큰 방법은 “성찬”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자(성인) 숭배와 성물 숭배를 도입하고 장려하였으며, 공덕이 모자라는 사람은 순교자들의 도움에 호소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연옥 교리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가벼운 죄에 대한 심판 전에 연옥의 불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의 권위와 감독의 권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전 세계 교회의 관리가 거룩한 사도요 모든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맡겨졌다’고 하면서 베드로의 계승자인 로마 교황이 전체 교회의 통치권을 행사하기를 원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정죄하고, 로마의 교황에게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호칭을 스스로 붙였다. 이 겸손해 보이는 호칭은 사실 모든 감독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사실 그리스도의 왕권을 범하는 중한 죄인 것이다. 그는 확실히 세계적인 권위를 행사한 첫 교황이었으며, 자신을 교황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목회규범”이라는 저서를 통해 사제의 목자적 지도 방법을 적은 중세 교회의 목회지침서를 만들고, “그레고리 성가”라는 음악을 도입하여 교회음악과 예배의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샤를 마뉴의 대관식
서방 지역에서 로마 교황의 권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교황들은 왕, 황제들을 자기의 권위 아래 두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시대 내내 교황권(교권)과 왕권(속권)이 대립하고 갈등을 빚었다. 교황들은 모든 나라가 교회와 교황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런 주장은 점차 세속 권세에 대한 욕망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부패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 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황과 황제가 대립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 교황의 권세 아래 왕권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샤를 마뉴의 대관식이었다.
샤를 마뉴 대제의 대관식
샤를마뉴는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은 뚜르 전투에서의 영웅, 찰스 마르텔의 손자였다. 그는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의 절반,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의 절반, 스페인 북부지역을 정복하여 옛 로마 제국 이후 가장 큰 왕국을 건설하였다. 또 그는 정복하는 지역마다 로마 기독교와 조직을 이식하였고, 색슨족의 땅에 수도원을 세우고 감독을 두었다. 로마 교황은 그의 정복에 선교적인 노력이 동반되고 있음을 기뻐했다.
샤를 마뉴는 교황 레오 3세를 위해 로마에 소집한 공의회에서 “사도적 자리(로마의 교황좌)는 모든 사람을 판단할 권리를 가지나 누구에 의해서도 판단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이틀 후 800년 성탄절에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의 관을 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샤를마뉴는 서방 세계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고(신성로마제국), 이 권위는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샤를 마뉴는 두려움을 모르는 당당한 기사와 정치가로서 북해에서 지중해까지 유럽의 절반을 통일하였다. 또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일반 성도들에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게 하였고, 니케아 신조를 가르치게 했다. 어거스틴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을 애독하며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기를 애썼다. 그는 교회 조직과 사제 교육을 강화시키고, 교회 재정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했으며, 수도원의 외적 개혁과 내적 쇄신을 일으켰다. 예배 의식에도 관심을 가져 그레고리 찬가를 정착시키고, 예전 중심의 예배에서 설교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다(자국어 설교). 또한 주일을 예배와 휴식의 날로 지정해 쉬게 하고, 십일조를 의무 세금의 개념으로 걷어 교회와 수도원과 교구 학교에 들어갈 재정을 충당했다.
또 그는 학문을 장려한 지도자였다. 문예 부흥을 일으킨 제왕으로 국가와 교회를 돌볼 지도자 양성을 위해 궁정 학교를 세우고, 요크의 알퀸을 교장으로 모셨다. 궁정도서관을 설립하고, 교구 학교를 세워 빈부의 차별 없이 모든 이들에게 학교를 개방하여 제국 전역에 유사한 학교들이 세워지게 했다.
- 힐데브란트와 카노사의 굴욕
샤를마뉴는 탁월한 정치력을 가진 왕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기에 그의 능력으로 제국은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는 유약했고, 다시 나라는 권력 암투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분이 일어나자 제국 변방에서 정복됐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혼란스러워졌다. 또한 교황권의 강화로 인해 로마 교황은 교권과 속권을 행사하였고, 권력의 강화는 곧 부패로 이어지게 되었다. 교황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정적끼리 무자비한 유혈 충돌을 벌이고, 고위직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성직이 매매되고, 권력자들이 교회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 교회의 부패상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위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교황청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들의 중심에는 내적으로 성직매매와 성직자 독신 문제, 외적으로 세속권력과의 성직 임명권 문제가 있었다. 성직매매가 횡행하면 부자들과 부패한 자들이 고위 성직을 얻고, 그들이 결혼해서 아들에게로 대대손손 세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직매매와 성직자 독신 문제는 개혁의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 툴의 부르노, 힐데브란트와 같은 수도사들이 일반 시민들의 인기를 힘입어 교황이 되었다. 이들은 황제에 의한 성직 임명권을 부정하고, 교황이 감독과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그중 힐데브란트는 1073년 교황으로 추대되어 그레고리 7세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는 교황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세계의 통치권자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영적 유익과 선한 정치를 위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만이 감독을 임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황제도 폐위시킬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생애 목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고, 교황이 교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사제들의 독신생활을 의무화했고, 성직 매매를 금하였으며, 제왕에 의한 교회 직분자 임명(평신도 서임권)을 금했다. 나아가 교황을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삼는 세계적인 신정정치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허순길, “어둠 후의 빛” 136쪽 이하 카노사의 굴욕 참고)
- 교황권의 절정, 이노센트 3세
중세 교회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교황으로 이노센트 3세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통치도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맡겼다고 주장하여 여러 왕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게 만들고, 4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않고, 도리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방교회와의 사이를 악화시켰다.
그의 3가지 선언
① 교황은 하나님보다 낮으나 사람보다 높다.
② 교황은 베드로의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다.
③ 교황은 누구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교황의 적그리스도적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었고, 제왕들을 파문하기도 하고, 이단들을 척결하기도 했다.
라테란 공의회(1215)
① 왈도파, 알비겐스파 근절을 위해 이단에 대한 중한 형벌을 하기로 함.
② 비밀 종교재판을 도입.
이단은 자기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므로 국가 권력으로 이단을 형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함. 이를 위해 비밀 종교재판을 도입하였다.
③ 온 교회의 통일된 생활을 위하여 신자들이 매년 1회 이상 고해성사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 것.
④ 화체 교리의 공식 채택
화체교리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박해를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게토가 유럽 곳곳에 형성이 되었다.
이 화체설은 트렌트 공의회(1545-1563),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도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화체설은 “저주받을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화체설은 성찬 때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가 성별하는 순간 실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설이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체를 만드는 사제의 권위가 높아진다.
이밖에 성직 임면권이 교황에게 있음을 다시 한 번 명시하고, 독신주의를 확고히 했다.
1. 수도원 운동
(1) 베네딕트 수도원
수도원이라고 하면 세상을 등지고 금욕생활을 하는 곳이요 중세 시대의 생활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화되고 윤리적인 생활이 무너진 시대에 이따금 수도원이 교회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영적 갱신 운동을 일으키는 등 긍정적인 흔적을 남겨 놓은 경우도 있었다. 은둔자 안토니가 그러하였고, 이어 수도사들의 공동생활을 연 파코미우스가 그러했다.
이후 콘스탄틴 대제 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국교로 채택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교회는 급속도로 세속화되어갔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수도원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사들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이 없어서, 어떤 이들은 지나친 금욕생활과 고행을 하고, 어떤 이들은 느슨한 생활을 했다. 이런 가운데 수도사들에게 모범이 되는 생활 규칙을 정하고 수도원 제도의 개혁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베네딕트였다.
그는 480년 누르시아의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지내는 동안, 로마의 부패와 부도덕한 삶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은둔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500년 로마 동쪽 수비아코에 있는 산속 동굴에서 생활하던 그에 대해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내 수도원장으로 초청이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엄격한 규율을 세워나갔다. 그런 가운데 반발을 겪고, 그는 엄격한 훈련과 더불어 인간의 연약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몬테카시노에서 수도원을 세운 그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로마인의 조직에 대한 천부적 재능으로 73장으로 된 수도원 체제와 생활의 규칙을 마련했다. 이것이 "수도 규칙"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자급자족하며, 경솔하게 수도사가 되지 않게 하려고 예비 수련기간과 서약을 하게 했다. 세상과 단절하는 서약은 첫째 빈곤의 서약(자기 재산을 사회 환원), 둘째 순결의 서약, 셋째 순종의 서약이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 (사진출처:아베마리아 출판사)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큰 의무는 예배 생활로 매일 규칙적으로 주로 시편을 낭송하는 7번의 예배를 드리는데 4시간이 걸렸다. 또 밤 2시에 깨어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게 했다. 베네딕트 수도생활 규칙에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수도사들은 일반 노동자들만큼 육체노동을 하고 부엌일을 했다. 베네딕트는 일반인들에게도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주문했다. 당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나온 선교사와 개척자 수도자들의 봉사는 더 없이 귀중했다.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수도원은 영혼의 평안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귀한 안식처를 제공하였고, 교육과 구제와 병원 사역을 감당했으며, 훌륭한 학자들이 수도원 제도를 통해 배출되었다.
(2) 클뤼니 수도원 개혁운동
10세기에 들어서 교회는 가장 어두운 하강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교회의 부패는 수도원의 부패와 교황 등 고위성직자들의 부패, 말단 지역 사제들의 부패로 한 몸이 되었다. 수도원이 귀족과 주교의 사유물이 되고, 수도원장이 되는 것이 권력을 차지하는 방편이 되어서 거대한 성직매매와 세습, 뇌물거래가 만연했다. 수도원의 이상인 베네딕트의 규율집도 거의 무시되었다. 이때 클뤼니의 수도원장들은 베네딕트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부패한 교회 환경 가운데서도 “백성의 성인들”이라고 알려졌다.
클뤼니 수도원의 전경
이들은 수도원이 독립적인 재산 소유권을 보유함으로서 스스로 독립할 힘과 기반을 가지고, 외부세력에 휘둘리지 않게 하였다. 수도원 개혁에 성공한 이들은 이어 교회 전체 개혁에 착수하였다. 성직 매매를 금하고, 평신도 서임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교황들과 제왕들이 돈을 받고 직분을 팔았으며, 직분자가 아닌 제왕들이 감독직을 주는 것을 “평신도 서임”이라고 불렀다. 어둡고 부패한 중세 교회 시대에 이들은 개혁적인 운동에 나섰고,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힐데브란트(그레고리7세)”였다. 이들은 수도사들의 금욕과 독신주의를 강조했으며, 베네딕트가 강조했던 순명과 복종도 강조했다.
(3) 시토 수도회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11세기 말 몰렘의 로베르가 창시한 시토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이다. 시토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에 들어간 그는 이후 시토회를 창립하고, 클레르보에 있는 새로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의 수도원은 학문을 강조한 클뤼니 수도원 생활과 달리 육체노동을 강조하였다. 또 빈번한 육체적인 징계와 함께 엄격한 금욕생활을 장려했다. 도덕적인 청렴, 풍부한 성경지식, 사랑의 헌신, 악에 대한 두려움 없는 공격 때문에 그는 “유럽의 양심”으로 불렸다. 또 그는 유대인들의 박해에 반대했으며, 교황을 교회의 합법적인 권위자로 인정하며, 두 명의 교황을 세우는데 영향을 끼쳐, ‘관을 쓰지 않은 교황’으로 불렸으며, 웅변적 연설가로 제2차 십자군 전쟁을 촉구하였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 (사진출처 : 가톨릭일꾼)
그는 무엇보다 말씀 묵상을 늘 소망했고, 특히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깊이 천착했다. 또한 뛰어난 설교자로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꿀처럼 달았다는 의미로 “감미로운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그의 ‘오 거룩하신 주님’, ‘구주를 생각만 해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설교와 가르침은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연합의 기쁨’이라는 주제에 깊이 몰두한 것이었다.
또한 중세 선행 교리에 반대하여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가르쳤고, 이로 인해 루터는 베르나르를 ‘중세의 어거스틴’으로 불렀으며, 종교개혁자들이 복음적 신비주의자로 평가했다.
(4) 탁발수도단,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
부와 사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산을 갖지 않고, 수도원 속에 살지 않고, 일반인들 속에서 살면서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수도사들이 생겼는데 이들을 탁발수도단이라고 불렀다. 이중 두 수도단이 유명하다.
1) 프란치스코 수도회
이 수도회의 창설자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구제에 쓰고, 작은 예배당에서 살면서 은둔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 마10:7-10에 따라 은둔을 이상으로 삼지 않고, 가난을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표어는 “가난은 나의 신부이다”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소박하고 경건한 생활 때문에 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또 스페인, 모로코 등에서 선교의 열심을 냈다. 그는 죽고 2년 뒤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분쟁과 혼란을 거듭하며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싸우며, 시한부 종말론 집단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사진출처 : 가톨릭일꾼)
2) 도미니크 수도회
도미니크는 오늘날 스페인 지역인 카스티야 왕국의 귀족 출신으로 가난을 추구하는 삶과 복음 전도, 학문 탐구를 자신의 수도원 이상으로 정했다. 특히 학문 탐구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가장 큰 특징이었는데, 이들의 공식 명칭은 “설교자회”로서 설교와 학문 탐구를 강조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수도회 출신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가난을 설교, 교육, 교훈, 학문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기며 무슬림과 유대인 선교에도 주력했다. 그러나 후일 많은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종교재판을 주도하기 했다.
부패한 중세 교회 시대에 이런 이름 없는 수도사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선, 교육, 전도에 헌신하는 것을 통해 타락한 시대의 양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셨다(겔34:2).
3. 이슬람의 태동과 십자군 원정
중세 기독교가 저지른 오류, 부패, 타락의 많은 양상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종교재판과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군이 저지른 망상과 악행은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종교가 광신과 미신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십자군은 중세적 정신의 전형적인 산물로서 이슬람이 점령한 성지를 되찾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일인 줄 알고 칼과 창으로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당시 유럽은 100여 년에 걸친 흉년으로 고통과 불안에 시달렸고, 사람들은 변화를 갈망했다.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하늘의 복락을 추구하며 다른 세계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었다. 또 어떤 이들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성유물과 순례에 관심을 가졌다.(이슬람의 태동과 성지 점령은 허순길, “어둠 후의 빛” 책 참고)
- 중세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얻으려고 한 5가지
①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는 무슬림을 물리치고, ②비잔틴 제국을 구하고, ③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종식하고, ④성지를 탈환하며, ⑤이 모든 여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십자군
동방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제국을 위협하는 투르크족의 위협에 대처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투르크 원정을 선포하여 비잔틴을 구원하는 동시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을 결의(구호: 하나님이 원하신다!)했다. 가뭄과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민중들, 정치적 기회를 찾던 귀족과 지도층 모두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고, 종말론적인 환상도 일어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으로 이들은 원정을 시작했다.
1차 원정(1096-99) : 퓌의 주교 아데마르가 지휘함.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이들은 비잔틴군과 합류하여 니케아를 탈환하고, 안디옥에 도착. 거기서 어려움을 겪다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거룩한 창’을 발견했다고 하여 사기가 올라 성을 정복함. 여기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즉결 처형됐다. 여기서 아데마르는 죽고, 고드프리가 사령관이 되어 1099년 6월 7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여리고성 전투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맨발로 성을 돌며 참회와 찬송을 드리고, 성을 공격한 끝에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당시 십자군들이 사용한 전략은 “포로로 잡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곧 적군을 다 살해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성 안의 모든 수비병들은 죽고, 무슬림 민간인들, 회당으로 피한 유대인들까지 모두 학살됐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은 “군인들은 그들의 말고삐까지 피로 물들이며 달렸다”고 썼다. 십자군은 도시를 서구식으로 정비하고, 라틴왕국을 세웠다. 고드프리는 ‘성묘의 수호자’로 불리며, 그의 동생 볼드윈이 예루살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2차 원정(1147-1149) : 1144년 에데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계기가 되어 무슬림과 유대인 진멸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러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함.
3차 원정 (1187-1192) : 무슬림권 최대 영웅인 살라딘이 1187년 예루살렘을 재정복하자 교황 그레고리 8세와 독일 왕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2세가 중심이 되어 십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중도에 독일 왕은 익사해서 죽고, 필립은 돌아갔다. 리처드만 남아 살라딘과 교전하다 돌아오게 된다.
4차 원정(1202-1204) : 예루살렘 탈환과 무슬림 세력 붕괴를 위해 이집트의 살라딘 본부를 공격할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제국을 세워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5차 원정(1217-1222) : 이집트를 공격하다가 무위를 그침
6차 원정(1228-1229) : 황제와 술탄이 협약을 맺고 성지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예루살렘까지 양도 받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1244년 이집트 무슬림 세력이 다시 예루살렘을 재정복했다.
7차 원정(1248-1254) :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예루살렘 탈환에 나섰지만 도리어 포로가 되었다.
8차 원정(1270-1272) : 풀려난 루이 9세가 다시 튀니지의 아랍인들을 공격했으나 거기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십자군 원정로 (사진출처 : 미래전략)
십자군 운동의 결과
-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 동방 기독교인과 서방 기독교인 간에 증오와 반감이 회복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테러와 전쟁 현장에서 반복되고 있다.
- 종교적으로 교황권의 전성기를 맞았다. 원정을 주도하고 사령관을 임명하는 것은 교황이었고, 교황의 명령과 요청에 따라 원정에 참여하여 많은 왕들이 죽거나 다쳤다. 왕들이 없는 사이 왕실에서 암투가 일어나 나라가 정치적으로 불안해지고, 서유럽의 통치권이 교황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 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성경 지리와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 성지에서 가져온 이른바 성물 때문에 교회 안에 우상숭배가 증가하게 되었다.
많은 수도사들도 전쟁에 참여하여 군사적 기사 수도사와 수도회가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여전히 수도원의 기본 정신인 청빈과 순결, 복종에 헌신했지만, 묵상과 성경 연구 대신 전투와 방어를 존재 목적으로 삼았다. 예루살렘에서 조직된 성 요한 기사단, 성전기사단은 그 후에도 계속 남아 강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왕권과의 갈등이 잦아지자 이들은 이단, 비행 집단으로 정죄되어 박멸되었다. 또 수많은 신비주의, 비교(秘敎) 전설의 소재가 되어 종교, 문학, 문화계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교회적,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도 실패였다. 전쟁은 국가의 소관이고 교회의 영역이 아닌데도 교회가 주도하게 된 것이다.
1.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스콜라 철학자들
13세기 중세교회는 교황권의 전성기, 탁발 수도단 설립과 함께 “스콜라 신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학문과 교육이 시골의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면, 이후 작은 도시의 성당과 부속학교에서, 이후 대도시의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며 생명까지도 바쳤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성경을 여러 가지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책으로 보았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하여 받기보다 인간 이성의 추리를 통해 받았다. 인간이 자기의 지적 능력으로 철학적 논리를 사용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부패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27살이던 1060년에 ‘란프랑크’라는 저명한 교사의 명성에 이끌려, 노르망디에 있는 “벡”이라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즈음 노르망디 출신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게 되었고, 많은 노르망디인 교사와 사제들을 영국으로 불렀다. 이때 란프랑크도 영국으로 건너가 켄터베리의 대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안셀무스도 1093년에 캔터베리의 대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성직 수여권 문제로 인해 왕과 충돌하였고, 안셀무스는 이탈리아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난 저서들은 유배 생활을 통하여 집필되었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그는 신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나는 내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으려 합니다(Proslogium, 1).”라고 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썼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성경에 호소하지 않고 본체론적으로 보이려 한 것이다.
그는 그보다 더 큰 어떤 것도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런 신의 개념은 인간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자는 인간 지성에만 존재할 수 없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신자로서 이단과 불신자들이 정통 진리를 수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합리적인 방법을 강조함으로 성경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 (Cor Deus Homo?)”라는 글을 통하여 성육신 신학을 다루고 그의 유명한 속죄 교리를 주장했다. 그는 그레고리 1세 이후 유행한 “보상설”에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죄가 마귀에게 진 빚을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 빚이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상한 하나님의 명예를 만족시켜준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려는 사랑을 가지셨으나 이는 그의 공의에 맞지 않았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의 죗값을 치러야 하는데, 사람은 다 범죄자로 죗값을 치를 자격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성육하게 하여 사람의 죗값을 치름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안셀무스의 설명은 “만족설”로 불리며 서방교회에 일반적으로 내려오는 속죄의 교리가 되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5:19의 말씀을 따른 것이었다. 안셀무스는 성경을 잘 알았지만, 인간 논리의 힘을 사용하기를 원했고, 성경에 기반을 둔 신앙을 제쳐두고 논리적으로 교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19세에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고, 이후 파리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소개받게 되었다. 이후 쾰른과 파리에서 교수로 가르치며, 말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다가 1274년 리용의 공의회에 가는 도중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평생 60권의 책과 많은 주석, 찬가를 지었다. 그중 대표적으로 이슬람권 선교사들을 위해 쓴 “이방인과 대결하는 원리”와 그의 신학 사상의 완성이자 이후 로마 교회의 교리적 기반이 된 “신학대전”이 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로마 교회의 실질적인 성경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신학 연구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식은 부분적으로 이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연신학을 수용한다.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탐구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불충분하기에 계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계시가 포함되어 있는 성경은 공의회와 교부들의 해석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여 교황 무오설의 터를 닦기도 했다.
그는 철학과 신학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양자 간에 모순이 없으며,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고 인간의 이성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지적 진리와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져야 하는 신앙적인 진리를 구별했다. 또한 우주의 모든 운동을 있게 하면서도 스스로 움직임이 없는 “원동자”로서의 하나님, 세상의 모든 원인의 원인인 “제일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을 주장했다. 이처럼 단순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번쇄한 합리적 사고로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이로써 아퀴나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계관과 생활관에 대한 논리적 체계를 개발했다. 그는 세계를 상, 하층 구조로 구별했다. 하층은 자연적인 것으로 제왕, 국가 지상의 것, 평신도, 자연, 일반인들이고, 상층은 교회, 성례, 하늘의 것, 사제, 은혜에 해당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타락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가져오지 않았다. 인간은 타락으로 자연적인 능력에 덧붙여 주신 은사인 “의”를 잃었을 뿐이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복 가능하며, 죄 사함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이 은혜를 입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리스도는 보상에 합당한 공로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그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인간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행할 선행의 본을 찾을 수 있다(선행-공덕-속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공덕을 쌓는 일을 할 수 있다. 공덕은 자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할 뿐 아니라, 잉여 공덕은 교회의 권위로 다른 죄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은혜는 인간에게 무분별하게 오지 않고 오직 성례를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세례, 견신례, 성만찬, 고해성사, 종부성사, 성직수여, 혼례라는 7성례를 세웠다. 아퀴나스는 이 성례들을 통해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신비한 몸인 교회의 지체에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 성례 외에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이 없다고 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마침내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로 받아들였다. 1567년 교황 비오 5세는 아퀴나스를 “교회의 교사”로 선언하였다. 개혁자 칼빈은 그를 ‘눈먼 교사’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을 하는 아퀴나스의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다.
2. 교회를 어둡게 했던 사상과 운동들
-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기보다 스스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하며, 영혼 속에 있는 내적인 빛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신비주의 사상가로는 독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들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은 연구나 합리적 이론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 묵상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은 신 안에서 자아를 잃어버리고 그 안에 잠기게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신적인 극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고 ‘거룩한 빈곤’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그는 “지옥을 통하여 하늘로”라는 엄격한 금욕의 길을 가르쳤다.
그의 신비주의는 성경도 교회도 필요 없고, 내적인 자아, 곧 자유롭고 아름답고 고상한 영혼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또 모든 피조물은 영원 전부터 신성 안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범신론적인 이단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정신이 담긴 “독일의 신학”이라는 책자에서는 십자가가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적 경험을 가리키며, 이러한 십자가와 지옥을 경험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그리스도’의 상징들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헤르트 흐로테는 “현대의 경건”이라는 운동을 일으켰다.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흐로테는 수도원적인 서약에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인 “공동생활 형제회”를 설립했다. 이 공동체 생활에서 그는 노동과 읽고 쓰는 교육을 장려했다. 이 공동체의 주요 목적은 “신비적 경건 생활의 증진”과 “사랑의 계명 실천”이었다. 흐로테는 성직을 통한 부패와 재산 축적을 비난하고, 성결과 경건에 집중하라고 요청하면서도 수도 생활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상에 머물러 자기 직업에 충실하면서 “현대 경건운동”을 견고히 따르라고 가르쳤다. 학문과 경건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내면적이면서도 확고부동한 지적 묵상을 통해 내면의 신비적 평화를 지키려고 했다. 이 출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에라스무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있다. 아 켐피스는 수도사로서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은 그 때에 이미 성경을 네 번이나 필사하고 많은 책을 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
이 공동생활 형제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복음을 전하고 원어를 연구함으로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귀한 역할을 했다. 또한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개인적인 묵상을 통한 경건과 신비를 체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제라는 중재자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기존 교회의 계급 질서와 중재 역할,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적인 신앙의 길을 전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고, 신비적이고 직접적인 계시를 찾으려고 하는 비성경적인 길을 걸었다.
- 교황권의 쇠퇴
교회는 초기부터 여러 교리적, 정치적 위기들을 공의회를 통해 해결했다. 사도적이고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보편 교회들의 회의를 통해서 진리가 보존되고, 계승되어 왔고, 교회는 바른 신앙을 고백했었다. 그러나 이후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공의회는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교황청의 정책을 승인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그러나 교황청의 몰락과 분열로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자,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하고 최종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보편공의회가 다시 힘을 얻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교회의 분열, 성직 매매와 온갖 부패하고 타락한 관습을 공의회 운동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프랑스 아비뇽에 있는 로마 교황청 (사진출처 : 크리스챤투데이)
그러나 문제는 이를 누가, 어디서 소집하느냐 하는 문제가 시작부터 생겨났다. 공의회운동이 소집될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압력에 눌려 아비뇽으로 옮겨졌고, 68년을 아비뇽에서 보냈다. 이를 “아비뇽 유수”, “교황의 바벨론 포로기”라고 한다.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이후에도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비뇽에 교황을 세워서 두 교황이 있게 되었고,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 교황을 세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 명의 교황이 생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공의회운동은 교황청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몇몇 개혁 작업을 하였지만, 결국 교황의 권위가 공의회 세력을 누르고 다시 결국 공의회 운동은 실패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에 대한 열망
9세기 토리노의 감독 클라우디우스 :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 정통하고 선행 교리, 성인 숭배, 성물 숭배, 순례 관습에 반대.
“우리는 십자가를 숭배하지 말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고트샬크 :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 예정, 하나님의 은혜를 강력하게 옹호.
- 왈도파
중세는 어두운 시대였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른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 사학자 바로니우스는 9,10세기를 “신정정치”가 아닌 “호색정치”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떤 교황은 그의 친척이 휘두른 망치에 맞아 죽고, 8년 동안 교황이 10번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20일 만에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교황과 부정한 관계로 낳은 사생아가 교황이 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이노센트 3세의 경우,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르며, 교회의 통치뿐만 아니라 세상의 통치도 주장했다.
이런 어두운 시대, 교회가 매우 세속화되었던 12세기에 왈도파가 참된 교회로 나타났다. 피터 왈도(Petrus Valdes 1140-1205), 그는 평범한 신자요 부유한 상인으로 살다가, 거리를 떠도는 음유시인의 노래에 감명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최선의 길을 사제에게 물었다. 그때 사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었고, 왈도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실천하였다.
보름스의 루터 기념관 앞에 있는 왈도 동상(출처 : 위키백과)
그는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필사하는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말씀을 따라 두 벌 옷을 입지 않고, 맨발로 걸으며, 주는 대로 먹으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렇게 설교하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모두 왈도의 생활을 본받았기에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로 불렸다.
이들이 기존 교회와 대조적인 생활과 전도 활동을 하자 리옹의 대감독은 설교를 금지시켰으나, 왈도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는 말씀을 따라 계속 설교하였다. 결국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에 의해 출교를 당했지만, 흩어지지 않고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세속화된 교회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왈도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은 1208년 이단에 대한 십자군 정벌을 선포하였고, 왈도파는 무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한꺼번에 50명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왈도파는 알프스 산간으로 피해 살면서 종교개혁 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도적인 가르침을 받아 검소한 생활을 하고, 성경을 모국어로 읽고 전하였으며, 만인제사장직을 믿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연옥 교리, 라틴어 기도, 고해성사의 의무 등을 부정했다. 성인 숭배, 성상 숭배, 유물 숭배도 반대하고, 세례와 성찬 이외에 다른 성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의 복음 이해는 매우 얕고, 복음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기쁜 소식으로 알기보다 순종을 요구하는 율법으로 보는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대의 어둠을 밝힌 빛이었다. 그들이 세운 교회의 표지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니(요1:5)”라는 말씀과 함께 타는 횃불이었다. 왈도파는 현재도 교황청 가까운 위치에 신학교를 가지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세계 70여 개 교회를 가진 소규모 공동체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 왈도파들의 신앙적인 이해와 삶의 방식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개인적 성경연구의 이해를 높임
- 회개의 의미를 높임
- 평신도설교자(설교)들을 통한 복음의 확산
- 자발적 빈곤과 같은 개인적 무소유의 삶
- 성자숭배의 거절
- 연옥의 거절
- 면죄부의 거절
- 맹세의 거절
- 모든 교회규정의 거절
- 세속적 재판권(특별히 사형제도에 관한)의 거절
- 카타르파의 이원론적 가르침을 거절
- 존 위클리프
12세기 프랑스의 왈도처럼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유능한 신학자였다. 또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왕의 넷째 아들인 곤트의 존과 평생지기였다. 그는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 시대 성직자들의 교권 남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어 “하나님의 지배권과 정부의 지배권”이라는 논문에서 의로운 청지기직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우리는 단지 그의 청지기일 뿐이며,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사람이 사용하도록 하시지만 지배권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사용자가 자기가 맡은 것을 남용하면 보유할 권리를 잃는다고 말하면서 부도덕한 성직자는 직분의 권리를 잃게 되며, 국가는 자격이 없는 성직자의 재산을 회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당시는 백년전쟁 기간으로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에 있었으므로, 영국은 법령 개혁을 통해 교황권에 저항하였다.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모든 위정자들은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데, 자기 유익을 위해, 세속의 이익을 탐하는 당대 교황권은 불법적이며 예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주장은 자격이 없는 성직자와 부에 비판적이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자연히 그는 고위 성직자들과 재산을 많이 가진 수도단, 교황의 큰 반대를 받았다.
위클리프의 이단 심문 상상도 (사진출처 : 리포르만다)
위클리프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황과 주교와 같은 계급제도가 아니라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모여서 구성되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실체,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교황을 지상의 지도자로 모실 수 있지만, 교황도 선택 받지 않은 자가 될 수 있으며, 세속권력을 쥐고 조세의 부담을 지우는 교황은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 도리어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 언어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382년에 라틴어 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2년 만에 영어성경을 내놓았다. 또한 왈도파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각처로 보냈으며, 이렇게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을 “롤라드파”라고 불렀다.
그는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면죄부 판매와 성인 숭배, 성물 숭배를 반대하였고, 연옥 교리를 배격했으며, 화체설 교리를 공격하였다. 그는 떡에 임한 예수님의 임재는 믿었지만 화체설 교리는 반대하여 교회의 큰 적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 민중과 왕실의 지지로 인해 큰 해를 입지 않고, 1384년에 별세했다. 그러나 31년 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출교 당하고, 그의 뼈를 발굴해서 불태워 강에 뿌리게 되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유럽 대륙을 휩쓸었고, 그는 종교개혁의 샛별이 되었다.
- 얀 후스
얀 후스(Jan Hus 1372? - 1415)는 15세기 초 프라하의 교회개혁운동 지도자였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하 대학을 나오고, 1401년 사제가 되고, 다음 해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았다. 당시 보헤미아 왕의 여동생이 영국 왕비가 되어 영국과 가까운 관계가 되었는데, 이 때 프라하의 예로님 프라츠스키가 옥스퍼드에서 유학하던 중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고, 그의 책을 체코로 가져와 후스에게 소개했다.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1915년 후스 순교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그리하여 후스도 위클리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그는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당시 교회 사제직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하였다. 사제들의 부도덕한 생활과 사치에 대해 공격하며 개인적인 경건과 삶에서의 순결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베들레헴 교회에서 체코어로 설교하며 매주 3천 명의 회중을 대상으로 뜨겁게 설교했다. 그의 설교와 가르침은 왕후와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의 책도 인기가 높아졌다. 이에 프라하의 대감독은 그의 설교를 금하고 그의 저서를 전부 불사를 것을 명령했다. 이를 거부한 후스를 대감독은 정죄하였다.
이어 1411년 프라하에서는 면죄부 논쟁이 일어났다. 후스는 위클리프를 이어 이를 정죄하였다. 죄 사함은 참된 회개로 얻게 되는 것이지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때 후스를 지지했던 세 젊은이(마르틴, 얀, 스타쉑)가 면죄부 판매에 저항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어 교황 요한 23세는 프라하 전 도시에 성직 금지 제재를 내렸다. 이것은 전 도시를 파문시키고, 아무도 성례를 집행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잠시 프라하를 떠난 후스는 전국을 돌며 설교하면서 보헤미아 국민의 신앙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유명한 “교회(De ecclesia)”를 썼는데, 거기서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이지 교황이 머리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사제들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구원을 위해 예정된 사람들의 전체라고 하면서, 교황이나 감독이 성경에 배치되는 교리를 제정할 수 없고, 사제의 지시가 잘못된 것이면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찬에서 포도주를 사제들에게만 제한시킨 것에 반대하고, 모든 신자들에게 줄 것을 주장했다.
황제 지기스문트는 1414년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열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안전한 통행을 약속 받고 콘스탄츠로 떠났던 후스는,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단에게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명분이 되었다. 하수구 바로 옆에 감방이 있어서 그는 금새 중병에 걸리고, 짐승 우리로 이송된 후 약 두 달 간 끔찍한 환경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하고 죽게 되었다. 최후의 순간 사형 집행관은 지금이라도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이를 거절하며 “내가 쓰고, 가르치고, 전한 복음의 진리 안에서 나는 오늘 기쁘게 죽기를 원한다!”라고 하면서 “동정녀 마리에게 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세 번 찬양하고 순교하였다. 그의 육신은 재가 되어 강에 뿌려졌다.
화형 당한 후 보헤미아 사람들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며,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했다. 결국 몇 달 뒤 모든 프라하의 교회들이 개혁을 지지하는 편으로 넘어가고, 교황의 주권에 도전하는 민족주의의 불길이 번져갔다.
- 피렌체의 세례요한,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사보나롤라는 이태리 북부 페라라에서 1452년에 태어났다. 그는 23세에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고, 33세에 피렌체로 가게 되었다. 피렌체는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가 전성기를 보내고, 단테가 신곡을 쓰고 마키아벨리가 정치활동의 무대로 삼는 이태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13세기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보나롤라의 초상화, 모레토 다 브레시아, 1524년 작품.
그는 메디치 가문의 실력자 로렌조 데 메디치 후원 아래 성 마가 수도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러다 유명해지면서 교회와 정원으로 옮기면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주로 개인과 교회의 부패와 타락, 음란 등 죄를 꾸짖는 설교로 유명하였는데, 그의 설교를 즐겨 듣던 사람 중에는 미켈란젤로도 있었다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계속 읽고 묵상하면서 그렸다고도 한다.
점점 대중들은 그의 심판 설교를 열광하며 좋아했으며, 성 마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프랑스의 공격을 가로막고 협상으로 동맹을 맺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학문 연구를 중시했으며, 그의 주도로 “허영의 화형식”이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 피렌체 중앙의 광장에서 시민들은 자기들의 “허영”을 대표하는 물품들(옷, 보석, 가발, 가구, 책, 카드, 보석 등)을 가져다 놓고, 찬양하고 행진을 반복한 뒤 불태우는 행사를 했다.
그러나 그를 반대한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저항이 일어났고, 마침내 폭도들이 성 마가 수도원을 공격하여 그를 체포하고
종교재판에 넘겨졌다. 갖은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교수형에 처해서 화형시켰다. 그가 죽을 때 15살이었던 루터는 그의 저술을 읽고 그를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순교자이자 자신의 이신칭의 교리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또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그를 복음적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종교개혁자 - 루터
루터의 성장배경
마르틴 루터 초상화
루터는 1483년 11월 11일 독일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로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아들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다. 그리하여 루터는 공동생활 형제단에 들어가 공부하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들어가서 학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의 교육은 문법, 수사학, 변증학을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법학, 의학, 신학이라는 전문 대학원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전공하여 왕실의 자문관이 되어 부와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노년이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도보 여행 중 자신에게 벼락이 치는 것을 경험하고, 죽음을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루터는 땅에 엎드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내가 수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리쳤다. 이후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루터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벼락과 서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성공하여 자기를 부양해줄 것을 기대했던 아버지는 대노하면서, 그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이후 루터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루터는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구원 받으며 사죄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당시 중세 로마교회의 방법을 따라서 엄청난 고행과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뼈를 에이는 추위에 철야, 금식기도, 스스로 매질하기,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서 육신을 쇠약하게 하기 등을 하였다. “나중에는 뼈와 가죽만 남은 귀신 같았다”고 회상하였고, 이것이 그의 노년에 질병으로 고통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몸부림은 2년 간 지속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평안을 얻지 못했다.
에르푸르트 대성당과 성 메리 교회당
당시 중세 로마교회는 순례를 통해 죄에 대한 처벌을 보상하고, 성자들에게 기도하거나, 유물을 숭배하면 속죄 받고, 1년에 한 번은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만일 죄를 고백하지 못해서 속죄하지 못하면 면죄부를 사서 값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극한의 고행과 참회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은밀한 죄의 인식 때문에 거의 절망하였고, 자신이 완전히 잃은 바 되었다는 비참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하고 진노하는 하나님일 뿐이었다. 그는 수도사로서 구원을 추구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럴수록 구원은 더 멀어보였다. 겉으로는 신학을 공부하고, 성공적인 사제의 길을 걸었지만, 마음에는 의심, 불안, 죄들,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가득했다. 규칙을 따라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양심은 그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다.
- 루터의 회심
이후 1512년에 “거룩한 성서의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신학 교수가 되어서 성경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하고, 교회에서 설교하며, 11개 수도원의 감독자요,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 “오직 성경”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는지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었다. 루터는 원래 롬1:17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싫어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 불의한 죄인들을 처벌하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거룩함에 대한 루터의 열심이 이제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거룩을 아무리 추구해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서기 위해 죄인은 의로워져야 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제껏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늘 부족했고, 그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의”는 불편하고 싫은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점차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수여되는 의,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우리 안에 태생적으로는 없었던 낯선 의가 바깥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인간적인 수단은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의를 우리 힘으로 쟁취해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되는 것이며(칭의), 그 의를 통하여 구원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가 되신다. 그렇기에 루터의 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충족시킨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하시되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기까지 순종하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죄인이 의를 얻어 구원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고뇌하는 영혼이라도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면 완전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죄의식을 느낄 때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서 그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 그의 죽음과 구속을 굳게 붙들고 그의 의를 내 것으로 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안식이며, 위로이며,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속에서 계시되며, 신앙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 이단에 빠져있던 중세 교회를 루터는 이제 어거스틴의 은혜론으로 개혁하고 있었다.
루터는 금욕주의, 고행, 신비주의, 면죄부 같은 인간적인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며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이다. 우리 안에 어떤 의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해주신다.
그렇기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고 정의했다. 여전히 부족하고, 자기중심적인 죄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의인이다. 신자는 이제 의의 길에 들어서서 항상 의로워지기를 노력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불의한 죄인임을 깨닫는 자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그가 어거스틴 수도원의 탑에 있는 작은 방에서 로마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는 밤낮 눈물과 절망 속에서 지내며, 수많은 중세 속죄제도와 성례전과 금욕과 고행으로 지내던 세월을 버리고, 이제 “탑 속에서의 체험”으로 그의 전 생애가 바뀌게 되었다.
- 면죄부 논쟁
베드로가 편히 쉬기에 합당한 대성당을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교황 레오 10세가 선포하고, 마인츠의 대주교가 징수하고, 요한 테첼이 설교하면서 판매되었던 것이 “면죄부”였다.
고대 교회에서는 중죄를 범한 사람을 출교시켰다. 그리고 그가 재입교하기 위해서는 회개에 합당한 표를 보여야 했다.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여러 행위를 통해 회개를 입증했다. 그런데 이것이 죄의 공적 고백이 아니라 사제에게 하는 사적 고백으로 바뀌었고, 회개에 합당한 표도 점차 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고행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만족, 보속, 고행을 위한 풍습이 면죄부의 기원이 되었고, 사제들은 죄를 면해주는 대가로 면죄부를 팔고, 이것을 악용하기 시작하였다.
자기 지역의 수도원과 교회를 돌볼 사명을 가졌던 루터 입장에서 교황청이 퍼뜨리는 이 면죄부는 아주 해로운 독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이 면죄부에 대해 공개토론을 할 것을 제안하면서 95개조의 발제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였다.
루터가 95개조 발제문을 못 박은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이 때 당시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술이 발명되었고, 루터의 발제문은 한 달도 안 되어 전유럽으로 보급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서의 주 내용은 성경적 회개의 의미를 설명한 후 면죄부의 잘못된 동기와 무효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사제)의 사죄권과 공로사상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천명하였다. 결국 95개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고 교황의 사죄권과 공로사상을 비판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 95개조 발제문으로 인해 도처에서 논쟁이 일어났고, 루터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 1518년 4월 26일에는 루터가 속한 어거스틴 수도회 총회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서 루터는 토론을 하였다. 이때 루터는 교회의 공로사상을 거부하고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시하였다. 또 1519년 6월 27일부터 두 주간 라이프치히에서 요한 엑크와 토론을 하게 된다. 이 때 교황의 신적 권위, 연옥교리, 면죄부와 고해성사에 대해 논쟁하면서 루터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이므로 성경보다 교황의 우위성을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고 교황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였다.
루터의 비판자들은 면죄부를 공격하는 것은 교황을 공격하는 것이며, 교황을 공격하는 것은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교황의 공적 행동은 무오하며, 오래된 면죄부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단이라고 하였다. 1518년 7월에 루터는 로마로 소환되기도 하였고, 카예탄 추기경과의 면담에서 이단적인 모든 것을 취소하도록 종용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끝까지 철회하지 않았고, 1520년 6월에는 “주여 일어나소서!”라는 칙령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칙령을 불태우고, 1521년 1월 3일에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
- 루터의 3대 논문
이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3편의 논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첫째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여기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했다. 당시 중세에서는 사제의 중재가 필수 요소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성례가 필요한데, 이 성례는 사제에 의해서 집례되었기 때문에, 사제의 중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였다. 평신도든 성직자든 누구든지 겸허히 회개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교황청의 세 가지 성벽을 공격했는데, 여기서 교황권이 세속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 교황만이 교회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 책은 출판 5일 만에 4천부가 판매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바벨론 유수”다. 이것으로 로마교회의 성례전을 비판하였다. 세례와 성찬 외에 5가지 성례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께서 친히 세우지 않은 7성례를 통해 교회를 포로로 삼은 교황제도를 바벨론 왕국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화체설을 부정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성찬의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께서 떡과 잔의 위, 아래, 가운데에 함께 계신다는 실재적 임재를 말하는 것이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것을 단순하게 믿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이다. 이 책에서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얻는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아니한 자유로운 존재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만민에게 봉사하며 섬기는 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글에서 루터는 참된 신앙은 영적 노예상태에서 신자를 해방시키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다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보름스 제국회의
한편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는 교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루터로 인해 제기된 종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1521년 3월 루터를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하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교황청의 수탈로 많은 불만을 가졌던 독일 국민에게 지지를 받던 루터의 문제를 두고, 카를 5세는 교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국회의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 루터를 지켜주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보름스에 가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루터는 “복음을 불경건한 자들의 조소 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제국회의에 출두하기로 작정하고, 그는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은 마귀들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보름스에 갈 것이라고 하면서, 비텐베르크를 떠나 보름스로 700km의 긴 여정을 떠났다. 제국회의에는 황제, 일곱 명의 선제후, 추기경과 교회 지도자들, 지역 관리들, 외국 대사들, 그리고 5000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이 회의에서의 루터는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그로 인해 결국 루터는 제국회의에서도 이단으로 확정되고, 그에게 음식이나 숙소를 제공하는 것을 금하는 황제의 파문 칙령이 1달 뒤 내려졌다. 이후 루터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이 일어나면서, 그가 사탄의 소생이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보름스 제국회의 모습
이단으로 정죄된 루터는 이제 그 누구에게서도 신변보호를 받지 못하고,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보름스를 떠나 귀로에 오른 루터를 누군가가 해하여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역시나 루터는 돌아오는 길에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고 납치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가 납치당할 것을 염려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먼저 납치를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지내게 되었다. 루터는 기사로 변장하고 “융커 게오르그”라는 이름으로 많은 저작들을 만들었다. 그중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교회 부패의 원인이라고 보았던 루터는 자국어 성경번역을 중요한 과제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1522년에 번역을 완성하고, 1523년 9월에 출판하게 되었다.
- 루터의 대적자들
1.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당시 유럽의 최고 석학이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천 년동안 라틴어 성경만 보았던 로마교회에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하였고, 당시 종교재판으로 무자비한 폭정을 일삼은 교황의 전제와 폭력을 싫어하였다. 그는 우신예찬이라는 책에서 수도사들을 조롱하고, 로마교회의 잘못을 비꼬았다. 그러나 그는 로마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다.
에라스무스
처음에는 루터에게 호의적이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에 대한 비방”이라는 책을 내면서 루터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의지의 속박”이라는 책으로 답변을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자유의지가 있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악을 택할 자유밖에 없다고 하면서, 노예의지론을 주장하였다.
2. 농민 전쟁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루터가 없는 동안 칼슈타트가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루터는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으나, 칼슈타트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그는 미사를 즉각 폐지하고, 성상 사용이나 독신제 서원을 정죄하였다. 또 성상파괴운동을 일으켰다. 루터도 물론 동의하는 일이었으나 개혁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쳤고, 시 당국은 옛 관습을 모두 폐지시켜버렸다. 이런 가운데 멜랑히톤은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루터를 찾아왔고,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개혁 운동을 이끌어갔다.
이런 급진적인 개혁 운동은 교회 안에 그치지 않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당시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농민들은 이러한 혁명적인 분위기를 타고 반란을 일으키고 살인과 강탈을 일으켰다. 이것은 루터가 의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루터는 귀족과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제압할 것을 요청했다. 여기서 루터는 친귀족적인 성향을 보이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 농민전쟁은 결국 유혈 진압되었고, 10만 여명의 농민이 죽게 되었다.
- 루터의 사상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8편의 설교를 하게 되는데,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내용이었다. 본질적인 복음의 근본진리가 아닌 비본질적인 예배의식, 순서, 성직자 복장, 성상, 결혼의 문제는 환경과 시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것을 “아디아포라”라고 하는데, 이것이 루터파 교회가 로마교회의 여러 예배 의식이나 성상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루터는 이러한 것들이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해 분열이 일어나기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루터파는 로마교회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반면, 개혁파는 로마교회의 잔재를 일소하게 되었다.
또 루터는 소명론을 통하여 새로운 직업관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1차 소명, 2차 소명이 나뉘는데,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1차 소명이라면, 우리 각자가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2차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두 왕국론”을 제시하였다.
- 루터파 교회의 발전
농민전쟁 이후 독일은 가톨릭 측과 루터파 측이 나뉘게 되었다. 교회 개혁에 반대하는 가톨릭 측은 라티스본 동맹을 맺고 루터파의 확산을 막았다. 이에 맞서 루터의 개혁을 지지하는 측은 고타동맹을 체결하고 루터파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 인해 양측의 타협은 불가피해졌고, 카를 5세는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열었다. 이때는 루터파 측이 다수였다. 그리하여 자기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에 따른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보름스 칙령의 철회였다.
그러나 1529년에는 가톨릭 측이 우세해지자 황제는 다시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이전의 결정을 번복하게 된다. 루터파는 다시 이단으로 처벌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루터파는 항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항의자들)라는 말의 기원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세의 필립은 독일의 개혁운동과 스위스의 개혁운동을 포함하는 연합 동맹을 결성해서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의 츠빙글리파 간의 연합을 시도하였고, 이를 위해 신학적 차이를 해소하려고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마부르크 회담”이다. 여기서 다른 조항들에 대해서는 모두 합의를 보았지만, 단 한 가지 성찬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양측 모두 로마교의 화체설은 반대했지만, 루터파는 공재설을 주장했고, 츠빙글리파는 “상징설 혹은 기념설”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결국 양측의 합의는 무산되고, 각각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루터교회는 점차 예배의식과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고, 1530년에 루터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멜랑히톤에 의해 “아우스크부르크 신앙고백서”가 작성된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기 최초의 신앙고백서가 된다. 또한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서인 “신학요의”가 1521년에 나왔다. 이후 30여년 간 교회개혁에 헌신했던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63세의 일기로 소천하게 된다.
※ 성찬에 대한 견해
로마교회(화체설) | 루터파(공재설) | 츠빙글리파(기념설) | 개혁파(영적 임재설) |
사제는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로 바꿀 수 있다. |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사제의 중재 없이 빵과 포도주에 임한다. | 성찬은 기념적 의식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 성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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