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나팔 재앙의 서막(계 15:1-4)
본장의 내용은 12장부터 14장까지 이어진 다섯 개의 삽경에 대한 기록을 마치고 11장의 끝에서 보도되었던 일곱째 나팔재앙과 연결되는 내용으로서 3대 7중 역사와 재앙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일곱 대접재앙과 관련한 보도이다.
앞의 내용에서도 3대 7중 역사의 개시부분인 인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그 전모의 방향을 제시하는 서론을 4장과 5장에서 밝혔던 바가 있었다. 본장도 마지막 재앙이 되는 일곱째 나팔 즉, 일곱 대접재앙이 개시되기 이전 그에 대한 서론 격으로 천상의 광경에 대한 내용이 보도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다 상술하면 먼저 1절에서는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될 것과 함께 이것이 시작되면 그로 인하여 일단 세상의 모든 문명과 인류 사회는 처절한 파국이 있게 될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2절부터 4절까지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이미 구원에 이른 성도들이 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하는 묵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선포하고 있다. 끝으로 5-8절은 심판을 집행할 일곱 천사가 하늘의 증거 장막과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장막에서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최후 심판이 담긴 대접을 받는 묵시를 전하면서 결국 이 모든 심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하여, 그리고 신구약의 모든 언약에 근거하여 집행될 것임을 강조한다.
1. 일곱 천사가 가진 일곱 재앙(1절)
1절의 보도는 요한의 눈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 보였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란 바로 일곱 천사들에게 주어진 일곱 재앙으로서 이것이 마지막 재앙이요 이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칠 것임을 밝히고 있다. 1절에서 밝히고 있는 일곱 재앙이 무엇인가는 여기에 부연된 묘사들에서 계시되고 있다.
1) 크고 다른 이적
요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광경은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었다. 여기서 이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shmei'on(세메이온)은 ‘놀라운 현상’이나 ‘표징’ 또는 ‘징후’나 ‘상징’을 뜻하는 명사다. 12:1에서도 ‘하늘에 큰 이적’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문자적으로 같은 의미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큰 이적이지만 이상하고 다른 이적이었다는 수식어가 첨부되고 있다. ‘이상하다’는 표현은 ‘놀라다’, ‘신기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qaumavzw(다우마조)에서 파생된 형용사 qaumastovn(다우마스톤)이다. 즉 앞에 있었던 이적들과는 좀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크고 다른 이적이란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상하고 무엇이 다르다는 표현인가?
이적과 관련된 표현은 12장과 13장에서 나온다. 12장에 언급된 이적은 해를 입은 한 여자에 대한 기사와 한 큰 붉은 용에 대한 기사를 언급하며 그 앞에 이적을 말했다. 13장에서는 짐승의 권세를 가진 새(끼)양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수단으로서의 이적을 언급했다. 그렇다고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놀랍고 큰 이적이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이적이 뜻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표현으로서 앞의 이적은 모두 사단에 의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교회가 사단에 의해 당하는 상징으로서의 이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이적이 일곱 천사에 의해 오히려 사단과 그들에 속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과 관련된 이적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는 그동안 요한이 보았던 이적과는 전혀 다른 양태의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이적의 규모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표현이다. 큰 이적이란 표현에 ‘놀라다’, ‘신기하다’란 의미의 형용사 qaumastovn(다우마스톤)이 함께 묘사되고 있다는 것은 그 이적의 크기가 심히 크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즉 지금까지 보았던 이적이나 재앙들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재앙이라는 의미이다. 그동안 있었던 이적과 재앙들은 그것이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지엽적이고 제한 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재앙의 파급은 전 세계적이고 전 인류적이 될 것이다.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대 재앙이기에 이러한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2) 마지막 일곱 재앙
요한이 본 이적의 실제적인 내용은 일곱 천사에게 들려져 있는 일곱 재앙임을 밝히고 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두 문장으로서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곡 마지막 재앙이라’라고 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plhga;" eJpta; ta;" ejscavta"(플레가스 헵타 타스 에스카타스)로 직역하면 ‘마지막 일곱 재앙’이다. 즉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다는 표현이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3대 7중 역사는 여섯 가지 인의 역사와 일곱째 인 안에 들어 있는 일곱 나팔 역사였다. 그리고 각 인과 나팔이 갖는 역사는 각기 다른 역사를 보여주는 묵시였고 그 속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가 병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일곱 나팔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재앙만이 가득차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앙은 일곱 천사에 의해서 진행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7의 숫자가 완전을 뜻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재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첫째, 대상적 의미에서의 완전성
즉 재앙을 받아야 할 대상자적 측면에서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란 뜻이다. 단 한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고, 단 한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때는 이미 구원받을 자들이 모두 구원에 이른 상태임을 밝혔다. 그것을 14장의 삽경에서 신약시대에 인침을 받고 시온산에 오른 자의 수가 십사만사천인으로 묘사했다. 그럼에도 여섯째나팔재앙에서는 삼분의 일만이 죽임을 당할 것으로 선포 되었었다. 그러나 마지막 일곱째나팔에서는 어느 누구한사람도 제외될 자가 없다는 측면에서 완전적이다.
둘째 실행적 의미에서의 완전성
완전히 이것으로 재앙이 끝날 것이란 의미이다. 즉 이 재앙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또 다시 재앙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의 완전성이다. 때문에 이 재앙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는 언급에서 ‘마치리로다’로 번역된 ejtelevsqh(에텔레스데)는 ‘이루다’, ‘성취하다’,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을 지닌televw (텔레오)의 예언적 부정 과거시제이다. 이것은 향후 쏟아질 일곱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를 종식시킨다는 의미 이전에 마지막 일곱 재앙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또는 충만하게 담겨 있다는 재앙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KJV 영문성경은 ‘왜냐하면 그것들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찼기 때문이다(for in them is filled upth wrath of God)’라고 번역하였다. 즉 본문에 언급된 일곱 재앙은 그것이 일곱 재앙이란 측면에서 진노의 처절함과 극렬함을 넘어서 그 끝에 이를 것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2. 구원받은 성도들의 찬양(2-4절)
2절의 내용에서는 1절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요한의 눈에 비쳐졌다는 의미에서 ‘또 내가 보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장엄한 찬양을 보도하고 있다. 천상의 광경과 찬양하는 자들의 신분, 그리고 찬양의 내용에 담긴 다양한 묘사에서 전해지는 계시가 있다.
1)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
요한의 눈앞에 펼쳐진 2절의 광경은 1절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 소개되고 있다. 때문에 ‘또 내가 보니’라는 표현으로 1절과는 다른 환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1절은 일곱 재앙과 관련된 보도였는데 2절의 내용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있는 모습을 보았음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의 언급된 짐승은 13:1에서 등장했던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을 가리킨 표현이다. 이 짐승은 머리가 일곱이며 뿔이 열이라 했다(13:1).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내용은 신약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세속적 교회에 대한 묵시였음을 앞에서 확인하였었다. 짐승의 일곱 머리는 제국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었고, 열 뿔은 로마제국 이후 벌어질 다국가 시대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살펴보았었다. 이러한 국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회란 이름으로 등장한 사단의 세력이 바로 그 짐승이었으며, 이것들이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란 보도를 통해서 신약시대 교회 안에 밀어닥친 세속사상의 극렬함을 확인하였었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국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역사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아울러 그것이 세속 국가에 의해 치명적인 해를 받게 될 것이란 묘사를 통해서 로마천주교로 해석을 하였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세속 국가를 배경으로 한 종교 세력은 로마 천주교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3:14에 보면 그 후에 또 다시 새(끼)양의 모습으로 등장할 짐승을 말했고, 그것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섬길 것을 보도했었다. 여기서의 새(끼)양은 개신교 안에서 역사할 사단의 역사로 이해하였었다. 그런데 그 새(끼)양이 칼에 상한 짐승의 우상을 만들 것이란 보도는 개신교가 타락하여 버려졌던 로마천주교의 양태를 닮아가고 그들이 걸어간 길을 답습해 갈 것이란 묵시로 해석했었다.
본장 2절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란 바로 이와 같은 사단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불이 섞인 유리바닷가에 서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 섞인 유리바닷가에 서 있던 자들의 신분은 신약교회 안에서 특별히 환난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4장에서는 14만 4천인에 대한 인 맞은 자들을 보도했다. 그런데 본문의 성격은 그와는 조금은 다른 표현이다. 14장의 14만 4천인은 택한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여기서의 표현은 특별한 상황에서 그것들과 싸워 이겼다는 설명이 이들에게 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이기고 벗어난’으로 번역된 nikw'nta"(니콘타스)는 ‘정복하다’, ‘승리를 쟁취하다’, ‘승리를 이루다’란 뜻의 nikavw(니카오)의 동사 현재 능동태 복수형의 단어이다.
14:1에서 등장한 14만 4천인에 대하여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쓴 것이 있도다’라고 할 때 이름을 ‘쓴 것’이란 표현은 ‘새기다’, ‘기록하다’란 뜻의 gravfw(그라포)의 완료 수동태인 gegrammevnon(게그람메논)이란 단어이다. 14만 4천인의 이마에 새겨진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수동태라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은혜의 결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에서 유리 바닷가에 서있는 무리들은 그들의 행위에 의한 결과를 나타낸다. 즉 은혜로 받은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로 받은 승리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14장에서 언급된 14만 4천인 가운데 특별히 사단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2) 불 섞인 유리바다
요한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 광경은 ‘불 섞인 유리바다’였다.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누인다.
첫째, 하늘 보좌로 보는 견해
웰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광경은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일곱 진노의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를 당한 사람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유리바다 같은 것의 곁에 서 있었다.---4:6의 바다와 달라서 불이 섞여 있는 것은 상황이 달라져서 지금은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 장면 전체가 장차 지구상에 내려올 심판의 불빛으로 희미하게나마 비쳐지고 있다.
데이크도 비슷한 견해로서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생기는 불빛이나 무지개 색깔을 나타내는 투명유리로 된 하늘나라의 성전에 있는 대 보좌실의 바닥을 가리키는 표현인 듯하다. 그 보좌에서 나오는 번갯불이 유리바다 위에 무지개 색깔을 비추어 그 유리바다를 마치 북녘 노을처럼 만들 것이다. 그분이 거하시는 빛에서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도시를 환하게 하며 유리바다를 번쩍번쩍 빛을 발하게 할 것이다(계 21:23; 딤전 6:16).
둘째, 공의의 심판으로 보는 견해
그랜드주석은 불 섞인 유리바다에 대해서 이렇게 주석했다. “한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유리바다 같은 것’에 불이 섞여 있다는 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일곱 대접 재앙이 극심하고 무서운 재앙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헨드릭슨도 이렇게 설명한다.
“요한이 본 바다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임에 유의하자. 이는 악인에게 내릴 심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솔직한 공의를 상징한다(15:4하반절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를 참조)---뿐만 아니라 세상 끝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것임을 전 우주가 알게 되도록 그들이 선포하는 것이다.”
본장의 불이 섞인 유리바다는 방향을 어디에 놓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1절의 일곱 재앙과 연결하면 재앙의 완전성과 그 격렬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 볼 경우 유리바다란 유리의 투명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이 확연히 들어날 것이란 심판의 완전성을 뜻하는 것으로의 해석이 유력하다. 인간들은 갖고 있는 지식과 능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판단은 왜곡이 불가피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성 앞에 티끌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심판은 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한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리바다에 불이 섞여 있을 것이란 묘사는 심판의 맹렬함을 묘사한 것으로의 이해가 가능하다. 결국 마지막 재앙은 불 심판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과도 상통하기 때문이다(18:16-18; 20:9).
그러나 2절에서 유리바닷가에 서 있는 자들과 연결하면 그 해석은 달라져야 한다. 불이 섞인 유리바다는 그들의 영광과 관련된 묘사로의 해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계시록에 나타난 유리바다는 하늘 보좌의 거룩성과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상징한다.
4:6에서 보면 하늘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21:18, 21에서는 바다란 표현과는 조금 다르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성의 길이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거룩한 하늘 보좌와 찬란한 영광을 상징한 묘사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이 역시 그와 비슷한 개념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보면 이는 가장 영광스러운 영광을 상징한 묵시로 해석될 수 있다.
유리에 불이 섞여 있다는 것은 유리에서 발산되는 광채가 그만큼 더 찬란한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오직 특별한 자들만이 이르게 되는 영광스러운 곳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불이 섞인 유리바다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재앙과 관련된 해석보다는 영광과 관련된 해석이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문맥적으로도 2절은 재앙을 말하였던 1절의 내용과는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
3절과 4절은 유리바닷가에 서 있던 자들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에 대한 기술이다. 이 부분은 크게 구분하면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노래의 주제
믿음의 승리자들이 부른 노래의 주제는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라고 밝히고 있다. ‘모세의 노래’란 과거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권능과 은총을 찬양했던 노래이다(출15장). 홍해 도하 사건에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홍해 통과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모형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당시 모세와 백성들의 감동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모세는 15:11에서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을 받을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린 양의 노래란 모든 택한 백성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노래를 말한다. 즉 실제적인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한 노래를 뜻한다. 모세의 노래가 구원에 대한 모형이며 그림자 격이라면 어린양에 대한 노래는 실제요 실상을 노래한 것이라는 연관성을 갖는다. 즉 노래의 제목이 갖는 뜻은 오직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은혜의 감격과 감사가 그 핵심임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 노래의 가사
노래의 가사에는 크게 네 가지 찬양의 의미가 담겨있다.
(1) 구속사에 대한 감격
찬양이 시작되는 노랫말에 대해서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라고 적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크고 기이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크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웅대한’, ‘웅장한’, ‘크고 탁월한’이란 뜻을 가진 mevga"(메가스)의 형용사 복수형인 Megavla(메가라)다. 그리고 ‘기이하시도다’는 ‘경이로운’, ‘충격적인’, ‘놀라운’이란 뜻을 가진 qaumastov"(다우마스토스)의 형용사 복수형인 qaumasta(다우마스타)다.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큼 경이롭고 웅대한 역사라는 그런 뜻이다. 무엇이 그리 충격적이라 할 만큼 경이롭고 웅대하다는 것인가?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바로 구원의 목적자를 창세전에 정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역사 외에 다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이 역사는 가장 경이롭고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큼 거대한 역사가 분명하다. 구원을 받는 선택받은 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실상으로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충격은 그 나라에 이르는 순간 천배 만 배, 억만 배를 더할 것이다. 믿음 안에서 느끼는 그 나라와 실제 그 나라에 이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세계의 영광의 가치가 믿음 안에서 그려진 세계보다도 훨씬 더 상상을 초월하는 찬란한 영광의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2)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심
3절 말미에서는 ‘주이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노래하고 있고, 4절에서는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고 찬미하고 있다. 이는 주님의 의로우심이 구속사를 통해 나타났음을 뜻하는 의미와 함께 구속사는 가장 의로운 하나님의 역사임을 찬양하는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 성경에서 ‘거룩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 헬라어 aJgio"(하기오스)를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o{sio"(호시오스)란 단어를 썼다. ‘하기오스’는 특히 성품이나 속성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호시오스’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와 관련된 거룩함이란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라는 의미 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거룩하다는 뜻이 더욱더 강하게 표현된다.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만인구원설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창세전 선택이라면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돌려진다고 말한다. 창세전에 구원받을 자가 먼저 선택 되었다면 구원 받지 못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죄도 짓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멸망 받을 자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계시록에 나타난 불택자들의 근원은 창세 이후로서 땅에 속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13:8; 17:8). 그들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속사는 한 점 흠도 찾을 수 없는 가장 의로운 역사였다는 사실이다. 즉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은 사단에 의해 뿌려진 땅에 속한 자들로서 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되 그저 값없이 주신 은혜가 아니었다. 구원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거저 받은 은혜가 분명하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철저히 그 죗값을 치르신 공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속성에서 보면 당신이 시작하시고 당신이 주관하신 일이기에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도 우리의 구원을 허락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당신에게도 철저히 공의를 적용 시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만이 했고, 당신의 백성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갚아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구속사는 가장 의로운 역사로서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다 할 수 있다.
(3) 심판의 당위성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다는 것은 심판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그 심판이 지극히 당연한 역사임을 뜻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동안 하나님은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해야만했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심히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보셔야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복병을 만나셨다. 그것이 바로 천사의 타락이었고, 그로인한 땅에 속한 자들의 출현이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는 부분적이지만 굴곡의 역사를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선악과 언약의 실패였고, 그로인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이었다.
물론 그리스도는 자기백성을 창세전에 택하실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음을 성경은 말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능의 하나님이셨기에 역사를 먼저 아셨기 때문이었다. 천사의 타락과 그로인한 질고를 아셨으면서도 이 길을 선택하셨던 것은 역시 이 방법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아울러 택한 백성들에게 가장 유익한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구속사에서 벌어진 모든 질곡의 역사가 다 타락한 천사, 사단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또한 그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에게도 질고의 역사가 있었고, 그러기에 택한 백성들의 신원의 호소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하나까지 모든 자기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기까지 참고 기다릴 것을 말씀했었다. 그리고 결국 교회는 모두 사단에 의해 더렵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질고의 역사를 이어와야만 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재앙을 비롯한 하나님의 심판은 가장 의로우신 역사임이 틀림이 없다.
다섯째 나팔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재앙은 그야말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처참한 역사가 진행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어질 일곱 대접 재앙은 이 태양계를 사라지게 할 만큼의 엄청난 대 변동의 역사일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사단과 그로 말미암은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절대 의의 역사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4)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3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만국의 왕’이란 표현을 썼고, 4절의 끝에서는 오직 주만 거룩하시다는 찬양을 돌리면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로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 접속사 o{ti(호티)가 부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오직 주만 거룩하시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상천하지에 하나님은 오직 홀로계신 유일신이기에 홀로 거룩하시며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홀로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 그리고 그들의 백성들로서는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영광이 100% 모두 하나님의 전전 주권과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경배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일 수밖에 없고, 찬양을 돌릴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일 수밖에 없다.
성도들의 진정함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찬양도 구원이 완성되고 그 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 진정성을 더할 것이다. 구속사에 대한 모든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거기서 받게 될 영광의 실재 역시 그것이 과연 어떤 영광의 것인가에 대하여 그 때엔 너무나도 극명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이 완성된 이후의 찬양의 대상이 qeov"(데오스) 한분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구속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의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모두 명사 단수인 qeov"(데오스)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니다. ‘만국의 왕’이라고 할 때 ‘왕’으로 번역된 헬라어도 명사 단수의 basileuv"(바실류스)다. 찬양의 주제는 모세의 노래요 어린양의 노래였다. 그런데 그 찬양을 받으실 대상은 오직 한 분뿐인 qeov"(데오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4장과 5장에 나타난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은 독립된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일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진리이다. 만약 영원히 독립된 인격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라면 여기서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대상 역시 삼위가 분명하게 드러났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직 홀로 이신 하나님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문의 기록만이 아니다. 구원이 완료된 이후의 계시록의 기록에서는 특별히qeov"(데오스)만이 강조되고 있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찬양과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것을 증명한다.
단 한곳으로 22:3에서 어린양이 언급된 바 있다. 거기 보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길’것이라고 했다. 개역성경의 문자적 의미로는 충분히 하나님과 어린양이 독립된 인격으로 같은 영광을 받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원어에서 보면 ‘보좌’로 번역된 oJ qrovno"(호드로노스)가 단수형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독립된 인격의 하나님이시기에 각자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면 분명 보좌는 단수가 되면 안 되고 복수로 되어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과 어린양’을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길’ 것이라고 할 때, ‘그를’로 번역된 aujtw(아우토)역시 단수 여격 3인칭 대명사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동일 본질이시며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앞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이란 수식어구를 썼기에 이러한 표현은 문법적으로 분명 오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일치한 문법을 사용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이 분리될 수 없는 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특히 성부와 성자에 대한 기술은 그렇다 하더라도 성령에 대한 역할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분명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말했다면 성령의 보좌도 말했어야 한다. 구속사에 나타난 역할이 분명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속사가 완료된 이후를 보도하는 계시록의 기록에서는 본문에서처럼 오직 홀로이신 한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구속사에서는 삼위로 때로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역사를 하신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한 인격의 하나님께서 일하신 역사였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위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독립된 인격으로 완벽하게 구분하실 수 있는 능력 또한 가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해준다. 최영백 교수
요한계시록 15장 강해
< 본장의 개요 > 우리는 15장에서 유리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은 누구이며 왜 이것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그리고 요한은 하늘의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았다고 했다. 이 이적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재앙은 인류에 대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마쳐 진다. 이미 12장에서 예비처로 인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섯째 대접까지의 심판에서 유월 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인 일곱째 대접 재앙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그 모습이 이곳에서 잠깐 보인다.
< 본장의 분류 > 1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의 이적 2 - 4 최종적인 보호처의 모습 5 - 8 일곱 대접 심판 준비.
< 본장의 강해 >
1절 :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 . . 계시록엔 세 가지 이적을 보여 주고 있다.
(1) 해 입은 여자의 이적 = 이것은 환난 날의 촛대 교회의 모습이다(12:1).
(2) 붉은 용의 이적 = 사탄의 최종적 활동의 모습이다(12:3).
(3)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을 가진 이적 =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모습.
2>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 . . 일곱째 나팔, 셋째 화를 말한다. 이 재앙은 또한 일곱 대접 심판으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
이다.
3>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미치리로다 . .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이시기 때문에 이 진노로 하나님의 심판이 마쳐지게
된다(16:17.벧후 3:10).
2절 :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 또 내가 보니 . . . 최종적인 재앙과 함께 요한은 다른 계시를 또 보았다.
2>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 . . 이곳은 지구가 최후의 심판으로 불타고 있는 모습이 유리 바다에 비취고 있
는 모습이다(벧전 3;7,10). 이곳은 성도들이 공중으로 휴거된 어느 장소를 말한다. 이곳에서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불
타는 지구의 모습이 마치 맑은 유리 바다에 비취어진 불꽃처럼 보인 것이다.
3>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아난 자들이 . . .
유리 바닷가에 서 있는 자들의 자격이 몇 가지로 나 와 있다.
공중휴거 된 자들의 자격
a> 적 그리스도의 수를 이겼다 - 적 그리스도의 정체를 간파하여 그에게 신적인 경배를 하지 아니했다(13:1-17).
b> 그 우상의 수를 이겼다 - 우상 앞에 경배치 아니했다(13:14,15)
c> 그 이름의 수를 이겼다 - 666의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했다(14:9-11)
d> 벗어났다 - 예비처로 인도 받았다. 공중으로 휴거됨.
4> 유리 바다 . . . 유리 바다란 성도들의 최종적인 보호처로 공중의 어느 장소를 의미한다.
최종적인 보호처는 공중 어느 것인가?
a> 지구가 불로 태움을 받는 일곱째 대접 심판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지구에서의 탈출은 불가피하다.
b> 공중이 반드시 하늘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폭발은 지구에서 가까운 하늘의 공간에서의 안전한
보호는 불가능하다. 공중이란 궁창을 말하며 그 궁창엔 수 천억 만개의 별들이 있다. 궁창엔 은하계 한 개에 태양
같은 항성이 무려 2천억 개 내지 6천억 개가 있으며 이런 은하계만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수가 무려 500만개 이
상이 된다.
c> 공중에 휴거된 성도들이 궁창 어느 곳에서의 잠정적 보호는 가능한 일이다.
d> 그곳이 하늘의 어느 별 일수도 있다.
e> 이곳에서의 체류 기간은? (단 12:11,12 ?).
공중휴거시 우리의 몸은 어떻게 되는가?
ⓐ 변화체는 공중 휴거의 필요가 없다. 변화된 몸의 거주지는 공중인 것이 아니라 천국이다.
ⓑ 공중 휴거의 이유는 천년왕국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다.
ⓒ 천년왕국은 변화체가 사는 곳이 아니고 육체를 가진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1) 천년간 죽음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사 66:20,21).
(2) 농사를 짓는다는 증거(사 65:21).
(3) 가정을 이룬다는 증거(사 65:23).
(4)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이 있다는 증거(20:8,9).
ⓓ 과학의 힘으로도 달나라까지 왕복한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으로 공중으로 올라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행 8;39).
5>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 . 공중 휴거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 할 새로운 악기로 본다.
3절 :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
4절 - 8절 (생략).
1>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 . . 이 두 노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세의 노래 = 홍해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노래(출15:1-8). 마지막 재앙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경우와 동일한데서 나온 말이다.
어린양의 노래 = 이 모든 구원이 오직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이긴 사실에 대한 노래, 둘 다 어린양에 영광을 돌리는 노래다.
2>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 . . 성도들을 위한 최종적인 보호처와 그곳에서의 성도들의 모 습을 환상으로 본 요한이 이제 다른 계시를 보게 된다. <민병석 목사>
15장: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
15장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의 모습과,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에 대해 증거한다.
[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요한은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한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일곱 천사들이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일곱 재앙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실 마지막 재앙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이 일곱 재앙으로 마치게 될 것이다. 이 일곱 재앙은 다음 장(16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대접 재앙이다. 그것은 앞의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들보다 더욱 심해진 재앙이다.
[2절]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요한은 무서운 마지막 대접 재앙에 대해 증거하다가 잠시 멈추고 또 하나의 광경을 증거하였다.
그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을 보았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대환난의 시대를 통과하고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분명히 마지막 재앙에 대한 예언으로 인해 성도들이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이 있는 광경이다. 지금 영적 싸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미래의 승리를 앞당겨 봄으로써 위로를 받고 더욱 담대함을 얻게 될 것이다.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그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불렀던 노래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이한 능력으로 도우셔서 그들을 위협하던 악한 세력을 완전히 파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 노래이었다. 물론 신약교회가 부를 노래는 모세의 노래가 아니고 어린양의 노래이다. 그러나 그 둘의 내용은 똑같다. 신약교회가 받은 구원은 홍해로부터의 구원, 애굽왕 바로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대환난의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거짓 선지자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 노래의 첫번째 내용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크고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적그리스도와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666)로부터 이기게 하셨다. 노래의 두 번째 내용은 만국의 왕이신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진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의롭고 진실하신 왕이시다. 그는 의롭고 진실하게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신다. 그는 의롭고 진실한 성도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며 불의하며 악하고 거짓된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4절]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그 노래의 세 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만 거룩하시고 그의 의로우신 행위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만국의 모든 사람이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고 주께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마땅히 가지는 경외심이며 특히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심판을 경험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악한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있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
[5-8절]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요한은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하는 광경을 본 후에 이어서 앞에 보았던 그 천사들을 보았다.
하늘에 증거 장막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이 그 성전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그들이 수종드는 심판이 얼마나 성결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인가를 나타낸다. 그들은 또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을 받았다. 금띠와 금대접도 그들이 수종드는 심판의 위엄성과 영광을 나타낸다. 하늘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 연기가 가득하였고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가 없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길이 없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만이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본장은 성도들이 대환난을 이기고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과 거룩한 심판은 두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승리자들의 노래하는 광경은 대환난을 통과할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성도들은 반드시 사탄과 세상과 악을 이길 것이다.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성도편에서 하나님만 섬기며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일서 5: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또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참된 믿음과 의와 거룩은 성도가 승리하는 방편이다. 이와 같이 살아서 우리도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자.
요한 계시록 15장 연구
15:1
마지막 재앙
1)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이적'의 헬라어 '세메이온'(* )은 본서에서 세번 나타난다(12:1, 3).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곱 천사가 행할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킨다(6-8 절;16장, Ladd, Johnson). 일곱 대접 재앙은 여섯째 나팔 재앙에 이어 나타나는 셋째 화로서(11:14) 마지막 때에 심판을 종결짓는 절정의 사건이다(Hughes, Johnson).
2)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3)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테'(* )는 '완성하다' 혹은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 )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이번 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마지막 재앙이며 이후에는 오직 마지막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15:2-4
이기고 벗어난 자들
1)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본절에서는 '유리 바다'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혼용되고 있다. 이 '유리 바다'는 4:6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유리 바다는 4:6과는 달리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불이 섞인. -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유리 바다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눈부신 순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Hughes, Johnson).
2 혹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Swete, Morris,Hendrikse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첫째 하늘(공중 하늘)-지상에서 핵전쟁으로 불바다가 된 상황을 공중에서 보고 있는 상황 여기서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세의 노래,어린양의 노래이다
수정같은 유리 바다-세째 하늘(신의 하늘)
계14:2-3=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새 노래를 부르는 악기-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이 나는 소리로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소리 같음
새 노래를 부르는 곳-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
새 노래를 부르는 자-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2)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 들은 짐승에게 절하여 경배하거나 짐승의 수인 666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온 자들로서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13:13-18;14:12, Ladd, Johnson). 그들은 하늘의 홍해라 할 수 있는 유리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다(Swete, Beasley-Murray).
이기고 벗어난 자들은 -17:14에서 빼내심을 얻음이고 7:17에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로 황충과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인내로 이기고 변화의 몸을 입어 들림받은 성도들로 본다 벗어났다는 말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들림받음을 말하고 있는데 짐승과의 싸움에서는 이기고 벗어난다는 말은 황충환난을 말한다 아니면 순교하여 부활함을 말할 수 있는데 순교하여 부활함을 이기고 벗어났다고 표현하기가 어색하다
3)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요한계시록 [Revelation] 4장 6절
[개역]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유리 바다의 위치는 보좌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이것은 짐승을 이긴 자들의 기쁨의 찬양을 시사한다.
그들은 거문고를 가지고 승리의 기쁨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역사하신 구속의 승리를
경배하며 찬양한다(5:8;14:2).
4)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본문은 짐승을 이기고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이 찬양한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두 가지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가 다른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Ladd). 래드는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한 것이며 어린양의 노래는 짐승의 핍박과 위협으로부터 구원된 자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한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 한다(Mounce, Beasley-Murray, Hughes, Morris). 이들은 두 가지의 노래가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으로 부터 시작해서 어린양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나 또는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이 어린양의 구원을 예표하는 모형이라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하나의 찬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어린양의 노래를 짐승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속으로만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편 모세의 노래에 대해서 혹자는 신 32장을 반영한것이라고 주장하며(Beckwith) 혹자는 홍해에서 수장을 통해 애굽 사람들의 추격을 퇴치하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출 15:1-18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easley-Murray). 그러나 본문의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가 출 15장과 신 32장을 반영한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것으로 유대인 회당과 초대 교회에서 불리어진 것이었다(Johnson).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께서 영원하며 완전한 주권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을 진노로 심판하셔서 멸망시키시며,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셔서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이고
계14:3에서의 새노래는 순교자들이 배워서 부르는 노래이다
5)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6)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7)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하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8)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9)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한다는 말에서 만국은 성도의 나라로 흰 옷입은 성도들이 주께 경배함을 말하고 있다
15:5-8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
1)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때에 법궤가 있었던 성막을 상기시킨다(출 25:16, 21;민 17:7;18:2). 그러나 옛 언약 하에 있었던 광야의 성막은 참 형상이며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다(히 8:5). 참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사실은 이미 11:19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며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Ladd).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성은 백성에 대한 구속의 완전함과 확실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한 악에 대한 진노의 심판 또한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
2)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성전으로 부터 나와'는 일곱 대접 재앙을 실현할 일곱 천사의 출현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3)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천사의 모습 중에서 '맑고 빛난'은 천사의 고결함과 거룩함을 의미하며(단 10:5, Mounce)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는 구약 시대의 왕적인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상징하는 것으로(출 28:4ff.)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대리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4)가슴에 금띠를 띠고
5)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세세에 계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주권이 영원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권한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시사한다(Ladd, Morris, Mounce). 하편 '대접'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알라스'(* )는 문자적으로 연희에서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나(암 6:6) 혹은 희생 재물의 피를 담기 위해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그릇을 의미한다(출 27:3). 이러한 '피알라스'는 5:8에서 순교자들의 신원하는 기도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노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어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진노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탄원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게 하는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Ladd).
6)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연기'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출 19:18;40:34;대하 7:1-3;사 6:4). 본절에서 연기는 일곱 재앙을 통해서 악을 완전히 심판하시기 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시사한다.
7)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일곱 재앙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경외스러운 나머지 감히 접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대하 7:1-3;;합 2:20, Mounce, Johnson).
(2) 모든 피조물이 온전히 깨끗함을 입는 마지막 심판의 때가 지나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 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Hughes). cafe.daum.net/rm21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
(계 15:1-16:21)
Ⅰ. 도입
본문의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를 논하기 전에 일관된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 앞에 기술된 12-14장의 삽입환상 군의 내용과 성격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줄 압니다. 12-14장의 삽입환상 동아리는 용과 짐승으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교회공동체와의 적대적인 투쟁의 관계를 다양한 상징과 묵시기법을 통해 기술합니다. 이는 11장에서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해 살펴본 교회와 악의 세력과의 적대관계를 부연해 근원부터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장은 교회와 사단과의 투쟁관계를 여자와 용의 상징을 통해 소개합니다. 13장은 용과의 동역관계에 있는 두 짐승과 교회와의 적대관계를 666으로 상징된 짐승의 표와 함께 기술합니다. 14:1-5은 이상의 적대세력의 핍박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낸 교회의 종말적 승리를 어린양과 함께 하늘의 시온 산에 앉아 있는 144,000인의 교회 상징을 통해 밝히 증거합니다.
한편 14:6-20은 사단의 도성을 상징하는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의 종말론적 심판광경을 소개합니다. 이런 내용은 이번 강론부터 다루게 되는 15-16장의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에 대한 내용을 개괄적으로 예고하는 의미가 있으며, 17-20장에서 확인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의 심판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15장에 소개되는 일곱 대접 재앙기사의 도입은 세 번째 화, 곧 일곱째 천사가 부는 나팔 재앙과 관련된 11:14-19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즉 11:14-19은 14:6-20과 함께 종말적 심판과 구원사건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18절의 심판기사 부분은 15-18장, 19:11-21, 20: 7-10, 11-15절과 연관되고, 16-17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기사는 19:1-10, 20:4-6, 21:9-22:1-5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나팔재앙(11:15)은 일곱 번째 인 재앙이 일곱 나팔 재앙을 도래시키는 역할을 했듯이(8:1-2),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15:1, 16:1)을 도입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11:14-19절은 14:6-20과 더불어 일곱 대접 재앙으로 초래하게 될 종말적 심판과 이에 대립되는 종말적 구원사건을 예고해 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15장은 16장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과정이며 서론부분에 해당됩니다. 먼저 15장의 구성은 세 부분(1, 2-4, 5-8)으로 구분됩니다. 1절은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에 이어 일곱 대접 재앙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이것으로 마지막 재앙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2-4절까지는 42달 기간의 짐승의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이긴 자들이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찬양하는 환상장면을 소개합니다. 5-8절은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지고 나타나는 장면을 기술합니다.
반면 16장은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구체적으로 시행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래서 마지막 일곱 째 대접이 쏟아지자 보좌로부터 ‘되었다’(It is done)라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종결을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사실상 악한 세력들의 근본적인 멸망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후 이 사실에 근거해 바벨론의 멸망(17-18장), 두 짐승의 멸망(19장),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용의 멸망과 불신자들의 최후의 심판(20장)이 집행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곱 대접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이유가 이런 사실들로 인해 확인됩니다.
16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9절은 처음 네 개의 대접 재앙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10-21절의 나머지 세 개의 대접 재앙이 소개됩니다. 일곱 나팔 재앙이 그랬듯이 본 대접 재앙도 처음 네 개의 심판 재앙의 대상은 주로 자연계에 집중되나 인간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런 인간의 고통은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구체화됩니다. 나머지 세 대접 재앙은 처음 네 경우와 대상을 달리하면서 심판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던 짐승의 보좌, 큰 강 유브라데, 그리고 악의 세력의 사령부 역할을 했던 공기(공중)를 향해 집중적으로 집행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Ⅱ. 전개
15장은 16장에서 본격화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부분에 해당됩니다. 이는 15:1과 5-8절에서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는 심판재앙과는 극한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찬양하는 모세와 어린양의 구원의 노래가 소개됩니다. 이는 16장부터 시행될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의 성격과, 짐승의 핍박과 고통으로부터 승리한 교회가 어린양의 구속사역의 승리를 찬양하는 장면을 대비시킴으로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이 가져다주는 구원과 심판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은 악인에게 극심한 고통과 환난과 죽음과 불못(지옥)의 형벌을 가져다주는 반면, 성도(교회공동체)에게는 승리와 기쁨과 영원한 구원의 안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1.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과 이중적 의미(계15:1-8)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1절)
요한은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환상을 통해 봅니다(1절). 그것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환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절의 크고 다른 이적은 표적의 성격을 띱니다. 여기서 일곱 재앙의 정체성은 5-8절에서 확인되듯이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본 일곱 대접 재앙을 마지막 재앙으로 표현함으로 앞서 기록된 일곱 인 재앙(6장, 8:1-2)과 일곱 나팔 재앙(8:6-13, 9:1-21, 11:15-19)과 차별화시킵니다. ‘크고 다른’ 이적이란 의미가 이런 사실을 함의합니다.
따라서 이번 일곱 대접 재앙으로 악의 세력을 포함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은 일단락됩니다. 그 후에는 최후의 종말적 심판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절하)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여기서 ‘마치리로다’(completed)란 완성과 성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대접 재앙의 성격이 일곱 인 재앙과 일곱 나팔 재앙과 병행 관계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마무리하는데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2-4절)
15:1은 사실상 15;5로 연결되면서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부분을 이룹니다. 따라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부분인 2-4절은 일종의 삽입형식을 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접재앙의 도입부분과 연결된 사실로 인해 대접재앙의 내용과 유기적으로 관련성을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접재앙의 도입과 관련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최후의 심판에서 제외된 승리한 교회의 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줌으로(2-4절) 대접재앙이 지나간 후에 승리한 자들의 감격과 감동의 심정을 대변해 줍니다. 심판의 이중적 성격인 구원과 멸망 말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현대교회 성도들이 여전히 짐승의 핍박과 공격에 노출돼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 안에서 이미 종말적 승리가 보장된 사실로 인해 동일하게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들이 충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요한은 2-3절을 통해 두 가지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나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자는 하늘 성전을 보여주고 있는 4:6의 수정 같은 유리바다와 병행관계를 이룹니다.
다른 점은 ‘불과 수정’의 차입니다. 이런 차이는 문맥상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수정 같은 유리바다(4:6)란 하늘 성전에서 하늘 홍해를 건너서 구원의 완성을 누리는 승리한 교회의 거룩하고 정결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불이 섞인 유리바다란 문맥 속에서 일곱 대접 재앙에 직접적으로 연결돼 바야흐로 대접 재앙이 시행될 것을 예고해 줍니다.
그렇다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정체는 누구인가요. 이들이 왜 유리바다 가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공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내용이란 점에서 동질성을 띱니다. 반면에 모세의 노래는 홍해도하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에(출 15:1-21), 그리고 어린양의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속죄와 구원과 영생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전자는 후자의 예표로 기능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정체는 모세의 노래와 관련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양의 노래와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화 곧 새 이스라엘인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 또한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의 원리 속에서 전자는 후자의 예표와 모형의 성격을 띱니다.
이런 관점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 곧 666표를 받지 않고 짐승의 핍박과 고난을 믿음과 인내로 견뎌낸 성도들(15:2)은 14장의 144,000인과 사실상 동일한 대상들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들 144,000명을 가리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로서 하늘에서 거문고를 타며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란 표현 속에서 동질성이 확인됩니다. 이상 삼자(이스라엘 백성/짐승의 표 받지 않은 자들/144,000인) 간의 상호 유기적인 연관성은 이들이 부른 새 노래와 모새의 노래 및 어린양의 노래가 본질상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3-4절은 어린양의 노래의 내용입니다. 어린양의 노래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의 크고 기인한 일’(출 15:11)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예표합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인 ‘하나님의 큰 일’(행 2:11)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일 예배 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공동체적으로 찬미하며 부르는 예배찬송의 성격이 사실상 모세의 노래이며 어린양의 노래이고 곧 새 노래에 해당됩니다. 새 노래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면 구원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시켜 줍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지불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피 값과 동일한 가치로 평가됩니다(행 20:28).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알파’의 신앙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복 중의 복이며 상급 중의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금 대접 재앙(5-8절)
5절은 1절에서 연결된 부분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열려진 하늘의 증거 장막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봅니다. 열려진 성전의 모습은 이미 11:19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종결과 언약성취가 확실함을 예고해 줍니다. 특별히 성전을 언급하면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 표현한 것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상징했던 성막제작을 하늘의 식양대로 짓도록 명하신 성막계시 사건과 관련된 표현입니다(출 25:8-9, 히 8:5).
본문에서 ‘증거’란 언약과 관련된 용어로 지성소에 안치된 증거궤나 언약궤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신실성의 증거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 되었던 자손언약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미 신실히 성취되었습니다. 자손언약의 성취는 다음 단계인 가나안 정복을 통한 땅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의 의미를 띱니다. 이런 식으로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는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성취를 보증해 주는 담보의 기능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일곱 천사에 의한 일곱 대접 재앙과 관련한 종말적 심판현상 또한 어김없이 시행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실은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오는 광경을 통해 재확인됩니다(6절). 하늘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현장입니다. 이를 통해 일곱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인 일곱 대접 재앙이 바야흐로 일곱 천사들을 통해 시행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일곱 천사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의 복장입니다. 특별히 가슴에 금띠를 띤 것은 1:13에 소개된 인자의 모습과도 방불합니다. 결국 이상과 같은 천사들의 복장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이 일곱 대접 재앙의 수행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리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마침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 일곱을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에게 건네줍니다(7절). 네 생물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좌(補佐)하는 중심 요소들 중 하나에 해당하면서(4:6-7), 중요한 사명과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5:6-7, 6:1-8, 7:11, 14:3, 19:4).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이란 표현은 5:8에서 성도의 기도가 가득 담긴 대접과 병행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성도의 기도를 연결시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성도의 기도응답을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6:10, 8:3-5).
죽은 성도들의 순교의 피의 신원에 대한 기도요청에 ‘아직 잠시 쉬라고’(6:11) 하셨던 말씀이 이제 이런 식으로 대접 재앙의 시행을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는 성도의 순교와 핍박과 박해와 고난의 대가가 이렇게 가해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돌려진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진술입니다.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심지어 원수 갚는 것조차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롬 12:18-21). 하나님은 선악 간에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가려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전 12:14).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에게 금 대접을 주는 것과 때를 같이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해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게 됩니다(7-8절). 연기는 구름을 가리키며 구약적인 배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과 임재의 상징으로 종종 사용됩니다(출 19:18, 40:34, 대하 7:1-3, 사 6:4). 따라서 이때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구름이 가득 찼다는 것은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을 건네준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집행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 시행은 하나님의 공의가 막힘없이 발휘되는 것을 통해 악한 자를 징벌하심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따라서 8절에서 일곱 천사에 의한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현시와 심판시행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으로 심판이 종결될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하심이 너무도 경외스러워 어느 누구도 감히 성전에 범접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는 달리 최후의 심판이 종식 될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47). 물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히 4:16). 하늘 보좌에 ‘이미’ 앉힌바 된 자들입니다(엡 2:6). 그러나 그 최종 상태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적 심판이 종식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현실화될 것입니다(골 3:4, 요일 3:2).
2.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계16:1-21절)
16장은 본격적으로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의 시행을 소개합니다. 대접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이유는 특별히 일곱째 대접이 공기(공중) 가운데 쏟아지는 것을 통해 “되었다”(It is done)라는 선언이 성전보좌 곧 하나님으로부터 발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본질상 악의 세력들의 총사령부가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6장은 크게 1-9절과 10-21절로 구분됩니다. 전자는 네 개의 대접 재앙이 주로 자연계를 중심으로 땅, 바다, 강과 물샘, 그리고 하늘에 각각 부어집니다. 이상의 네 영역은 나팔 재앙의 처음 네 경우와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는 재앙의 우주적인 성격을 의미합니다. 반면 대접 재앙의 경우에는 자연계와 더불어 인간의 고통을 동시적으로 수반하는데 이들은 주로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집중됩니다.
우주적 재앙인 처음 네 대접 재앙(1-9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납니다(1절). 이 음성이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명령합니다. 본 절에서 땅이란 물리적인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에게 한결 같이 땅에 대접재앙을 쏟을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5-7째 대접 재앙은 그 대상을 짐승의 보좌와 큰 강 유브라데와 공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절의 땅은 자연계를 포함한 사단세력의 영역 전부를 포괄하면서 사단의 세력을 향한 총체적인 심판이 개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후에 일곱째 대접재앙이 공기 중에 부어질 때, ‘되었다’(17절)라는 선언이 주어지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공기란 공중과 동일한 표현으로 곧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총사령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엡 2:2, 6:12).
한편 인(印) 재앙에서는 인을 뗀다고 기술함으로 계시 내지는 개봉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냈습니다. 나팔 재앙에서는 나팔을 분다고 함으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반면 대접 재앙에서는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표현하심으로 종말적 심판의 집행이 ‘마지막’이란 인상을 강하게 전달해 주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성전에서 나는 큰 음성은 하나님의 명령임에 틀림없습니다. 15:8에서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아무도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4:5).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란 표현은 재앙의 정도가 인 재앙과 나팔 재앙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아마 ‘마지막 재앙’이란 사실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도록 촉구한 듯합니다.
성전의 명을 받들어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아 붓습니다(2절). 본문의 땅은 사단의 전 영역을 상징하는 1절에 언급된 땅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땅입니다. 자연계의 땅입니다. 계속해서 대접 재앙이 바다와 강과 물샘 및 하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첫 번째 대접재앙의 대상이 아닌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첫 번 대접재앙의 증상은 사실상 출애굽사건과 관련해 애굽의 전역에 내렸던 여섯 번째 독종재앙을 연상케 합니다(출 9:8-11). 이때에도 피해의 대상은 애굽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첫째 대접재앙의 대상이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했던 악한 자들에게만 집중적으로 쏟아진 사실을 추정하게 됩니다. 땅에 이어 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붓습니다(3절). 이내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응고돼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어버립니다. 이는 애굽에 내린 첫 번째 재앙과 유사하며(출 7:14-21) 둘째 나팔재앙의 피해와도 방불합니다(계 8:8-9). 단지 나팔재앙 때에는 바다생물의 삼분의 일이 죽는 제한적인 재앙이었던 반면에 대접재앙은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음으로 범위와 강도 면에 있어서 훨씬 강화되고 있음을 봅니다. 마지막 재앙이란 사실이 이처럼 상대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대접 재앙을 통해 확인되는 피해양상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구체화 될 것이 확실합니다. 이제 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의 근원에게 쏟자 강물이 피가 됩니다(4절). 이런 현상도 애굽에 내렸던 첫 번째 재앙과 유사합니다. 특별히 강과 물 근원이 피로 변한 것은 바다가 응고된 피로 변할 것보다 훨씬 애굽 재앙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접 재앙이 상대적으로 애굽재앙 모티브를 적극 반영하고 있는 것은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고통을 가하고 있는 애굽의 이미지가 사단적 사상과 동질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계시록적 관점에서 사단의 세력들에게 가해지는 종말적 심판현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2-4절에 기술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정체성을 논하면서 요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홍해바다를 연상케 하는 유리바다 가에 서서 거문고에 맞춰 구속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 마지막 일곱 대접재앙을 기술하면서 상대적으로 애굽재앙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적용시키는 의도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애굽재앙 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열 재앙의 피해를 보지 않고 구원을 받았듯이 마지막 대접재앙이 시행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인(印) 맞은 자들의 피해는 극소화될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셋째와 넷째 대접재앙 사이의 막간을 이용해 물을 차지한 천사가 등장하면서 찬양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5-6절). 이 천사가 물을 차지하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 앞의 바다와 강과 물 근원에 대접재앙을 쏟은 천사로 추정됩니다. 천사의 찬양의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공정성을 선포하는 내용에 집중됩니다(5-6절).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16:5-6).
본문에서 몇 가지 사실이 확인됩니다. 먼저 심판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란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표현이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여기서도 11:17처럼 ‘장차 오실이’란 표현이 생략된 것은 자못 의도적입니다. 대접재앙이 마지막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음으로 사실상 더 이상의 추가적인 심판이 불필요함을 암시합니다.
일곱째 대접재앙으로 사단의 총사령부 격인 공기(공중)가 초토화되었다는 사실(16:17)은 본질상 사단의 종말적 심판이 집행되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정당성은 순교자들의 피 값을 가해자들로부터 취하시는 응보적 성격을 띠고 주어진다는 데서 성립됩니다. 다시 말해 종말적 성격을 띠고 있는 대접재앙의 정체성은 순교자들의 피 값을 요구하는 신원(伸寃)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띱니다(6:9-11).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에 화답하는 제단의 음성을 통해 재확인됩니다(7절).
이 부분은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하늘 성전의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을 향해 신원의 기도로 간청하는 내용(6:9-10)과 성도의 기도(8:3-5)가 함께 연계돼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응답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성도의 원통함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원한을 갚아주십니다(롬 12:19).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 9:17).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공정하고 합법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전 12:14). 성도들이 진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겪는 불의와 불법과 불공정 및 억울함과 원통함 등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반드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본문의 천사는 ‘저희(가해자:악한 세력)로 피(신원의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통치원리의 일환이기도 합니다(사 49:26).
8-9절은 네 번째 대접재앙의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넷째가 대접을 해에게 쏟아 붓습니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8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관하십니다. 이는 계 7:16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해나 어떤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의 보증과 대조를 이룹니다. 넷째 나팔 재앙에서는 해가 빛을 잃고 천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집니다(8:12). 그러나 대접 재앙은 해가 더욱 빛과 열을 발산함으로 피해가 극심할 것을 증거합니다. 9절은 “태움을 당한 자들이 이 재앙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자 않더라”고 대접재앙의 피해자들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이는 다분히 고의적인 패역한 행동임을 문맥 속에서 간파하게 됩니다. 고의적인 범죄와 회개치 않는 화인 맞은 양심은 전혀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시 19:13, 딤전 4:2, 롬 1:32). 영원한 불못의 형벌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고 모욕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은 13:6에서도 짐승의 사역의 본질이 하나님과 성도를 훼방하는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대접 재앙의 피해를 받는 장본인들의 정체성이 결국은 짐승을 경배하며 우상에게 절했던 자들이란 사실을 반증합니다. 더하여 이들이 회개치 않는다는 것은 대접재앙이 회개를 목적삼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선의적인 심판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가집니다. 종말적 심판은 행위를 따라 처치함으로 영벌의 심판일 뿐입니다(계 20:12, 15절). 더 이상의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악의 세력을 응징하는 마지막 세 대접 재앙(10-21절)
1-9절까지는 애굽 재앙 이미지를 차용한 자연계에 집중되는 강도 높은 대접 재앙으로 인간의 고통까지도 수반하는 모습을 봅니다. 특별히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악한 세력들이 대상이 됩니다. 마치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무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더욱 이런 차별적인 현상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성도들은 최후의 심판과는 무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계 20:15).
이제 10-21절까지는 5-7째 대접재앙 기사가 소개됩니다. 그 대상은 사단의 총체적인 세력들에 집중됩니다. 짐승의 보좌와 악의세력을 규합한 대규모 전쟁을 상징하는 큰 강 유브라데와 사단의 사령부인 공기(공중)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들 대상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유발시킨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점에 이르러 종말적 심판현상이 란 인상이 유난히 부각됩니다. 마침내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아 붓습니다(10절). 짐승의 보좌란 표현은 13:2에 근거합니다. 13:2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늘에서 쫓겨난 용으로부터 일체의 용의 보좌의 권세를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통치권을 대행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따라서 짐승의 보좌는 사실상 용의 보좌요 사단의 보좌와 일반입니다.
그런데 다섯째 천사의 대접재앙을 바로 이 짐승의 보좌에 직접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정공법입니다. 적의 심장부를 강타해 일거에 패배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만큼 심판의 때가 무르익었다는 반증입니다.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이 일곱째 대접재앙을 사단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공기(공중) 가운데 쏟음으로 보다 강화된 표현으로 기술됩니다(17절). 하여튼 나머지 세 대접 재앙은 이런 식으로 사단의 핵심부분들을 겨냥해 집중적으로 공략함으로 마침내 사단의 세력은 대패하게 된다는 것이 세 대접재앙이 갖는 요지입니다.
한편 요한 당시 ‘짐승의 보좌’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일세기 교회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을 상대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보좌란 의미가 물리적이기 보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짐승의 보좌란 시공을 초월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 권세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런 결과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며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자기 죄를 회개치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도 회개가 없습니다. 재앙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만 가중됩니다. 이것이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패역한 모습입니다(살후 2:11-12). 회개 없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은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로 본질상 짐승에게 속한 자들일 뿐입니다(13:6).
여기서 ‘그(짐승) 나라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된 지옥에서의 형벌의 삶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에 내린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출 10:23)으로 애굽과 이스라엘 지경이 구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애굽 또한 철저히 단절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불신자의 옛사람적 삶의 성격 또한 어두움의 삶이라고 성경을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어두움에서 해방돼 빛 가운데로 나온 자들인 셈입니다(엡 5;8-11).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반면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죄를 책망 받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전가시키지도 않습니다. 죄를 시인하며 즉각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회개에 돌입합니다(시 51:17). 모든 죄를 자백하며 용서와 긍휼을 구합니다. 이런 회개의 전형을 다윗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후,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최전선으로 보내 전사를 유도합니다(삼하 11:4, 14-15절). 악의적인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패역한 죄를 묻고자 선지자 나단을 다윗 왕에게 보냅니다. 나단은 어린 암양 새끼 한 마리를 가진 가난한 사람과 많은 가축을 소유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서 부자의 패역함을 고발합니다. 이 비유의 얘기를 들은 다윗이 부자에게 크게 노합니다. 이때 나단은 그 부자가 다름 아닌 다윗이라고 직언합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죄를 자복하고 용서와 긍휼을 빕니다(삼하 12:1-15).
이런 다윗의 심정을 고백한 내용이 시 51편의 내용입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철저히 자신의 죄성과 범죄행위를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과거와의 단절과 청산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전심으로 통회하며 용서와 긍휼을 구합니다. 본 시편의 다윗의 기도는 가히 회개기도의 모범이요 전형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의 진정성은 자신의 소욕을 좇아 가던 길과 행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향해 180도 방향과 가치관을 전환하는 전인적인 유턴(u-turn)의 삶을 가리킵니다(죤 박스터, 회심).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 붓습니다(12절). 그 결과 발생하는 사건의 전개를 12-16절까지 기술합니다. 대접재앙이 유브라데 강에 쏟아지자 강물이 마릅니다. 그래서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의 길이 준비됩니다. 유브라데 강을 통한 재앙 이미지는 여섯 번째 나팔재앙과도 유사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두 재앙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나팔재앙에서는 유브라데 강에 결박된 네 천사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놓임을 받습니다(9:14). 반면에 여섯 째 대접재앙에서는 동방의 왕들, 곧 지상의 통치자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건너는 것으로 소개됩니다. 혹자는 이런 유브라데 강 도하사건을 죽은 네로 황제가 다시 살아나 동방의 우수한 유목 민족인 파르티아의 군대를 인솔해 로마를 침공해 올 것에 대한 네로 재생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합니다(이필찬, 679/호크마 종합주석, 460).
그러나 이런 관점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고조되는 당시의 역사적인 전쟁발발의 정황을 배경삼아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과의 첨예한 영적 전쟁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정치군사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적인 긴박한 영적 전쟁 상황을 동방의 왕들로 묘사된 사단의 동조 세력들이 하나님과의 최후의 일전을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유브라데 강은 언약의 땅인 가나안의 동쪽 경계선입니다(창 15:18), 이 강 건너편에는 앗수르를 위시한 이방 국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구약적 배경에서 이 강은 이스라엘의 대적들로 상징되었습니다(사 7:20, 8:7, 렘 46:10).
13절은 잠시 장면이 바뀝니다.
그리고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인 귀신의 영이 천하 만국을 미혹해 땅의 임금들을 전쟁을 위해 아마겟돈으로 소집합니다(16절). 이 소집의 일환으로 지금 동방의 왕들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본질상 영적 전쟁인 사실이 확실합니다. 사단의 진영과 교회공동체 간에 벌어질 대규모의 종말적 최후의 영적 전투 말입니다. 이런 사유로 이 영적 전쟁은 예수님의 재림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시점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이런 표현은 구약에서 종말적 시점과 관련해 사용되는 관용구적 문구입니다(욜 2:11, 습1:14).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과 관련해 유의할 것은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의 정체와 사역입니다. 요한은 먼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봅니다. 개구리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생물(레 10:10, 41절)이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려진 재앙 중 하나이며(출 8:5-11), 시편에서도 재앙을 가져오는 동물로 묘사됩니다(시 105:30). 그런데 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옵니다. 용은 옛 뱀 곧 마귀와 사단으로 일컫는 온 천하를 꾀는 속이는 자의 수장입니다(12:3, 9절).
짐승은 13:1-2에 언급된 바다에서 올라온 용의 화신입니다. 왜냐하면 용이 짐승에게 보좌와 관계된 통치권 일체를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는 13:11에 소개된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바다짐승의 보좌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로서 짐승의 추종자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한 자입니다. 이들은 계시록에서 사단 왕국의 삼두체제를 구성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적극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활동합니다. 이들 악의 삼인방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14절에서 귀신의 영으로 통합해 호칭됩니다. 다시 말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의 정체는 귀신의 영과 병행시킴으로 동일시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마귀를 종종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합니다(막 1:23, 3:11, 5:2). 그렇다면 귀신의 영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14절은 귀신의 영의 사명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날의 전쟁에 참여토록 소집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적의 실상이 무엇인지 침묵합니다. 그러나 이들 귀신의 영의 실체인 개구리 같은 세 영이 악의 삼인방의 입에서 나왔다는 설명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저들의 말과 결부돼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듯이 악령의 역사도 이들 악의 삼인방의 입에서 나오는 미혹의 말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귀신의 영이 땅의 임금들을 아마겟돈 전쟁에 동참시키는 일과 관련해 사용된 이적은 거짓된 말을 통해 속인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구약 성경은 이와 동일한 원리를 통해 일어난 미혹의 전쟁기사를 소개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입니다(왕상 22장). 당시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의 탈환을 위해 아람과의 전투를 계획합니다. 마침 이스라엘을 방문한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아합은 함께 연합해 아람을 공격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때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됩니다. 아합의 어용(御用) 선지자들은 한결 같이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아람을 아합의 손에 붙이셨다고 거짓 예언을 합니다.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언 듣기를 청합니다.
이에 미가야가 불려옵니다. 미가야는 우회적으로 아합 왕의 죽음과 패배를 예언합니다(왕상 22:17). 그리고 이어서 어용 선지자들의 예언이 왜 거짓예언인지를 밝힙니다. 이 과정에서 미가야는 환상을 통해 본 ‘천상의 회의’ 장면을 일러줍니다. 이 회의에서 아합을 꾀어 전쟁에서 죽게 할 거짓말하는 영이 등장합니다. 즉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 아합 왕을 꾀어 전쟁을 일으키도록 미혹합니다(왕상 22:19-23).
예수님께서도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24). 바울도 악한 자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일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살후 2:8-10). 이처럼 마귀의 속성은 거짓과 속임수로 미혹하는 것입니다(계 12:9). 이때 유사성(類似性)을 가지고 접근함으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미혹 당하게 됩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 유사한 일부분에 사로잡혀 결국 속게 됩니다. 속임수는 자고로 마귀의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하와가 선악과 금령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뱀의 미혹에 빠졌습니다(창 3:1-5). 후에 마귀는 예수님에게조차 성경을 왜곡시켜서 시험하려 했습니다(마 4:5-7, 시 91:11-12).
이런 식으로 마귀는 이 시대에도 동일한 유사성의 원리를 가지고 성도를 미혹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위장합니다(고후 11:14-15). 상황이 이럴 진대 겉만 보고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저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7:16). 그러기 위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지에 대한 총체적인 성경계시관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청됩니다. 성경신학적 관점(언약적 구속사관)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본질에 깊이 접촉됨이 없이는 유사성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관의 정립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겟돈 전쟁(16:16)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돼 교회를 포함한 어린양의 진영과 사단의 추종세력들 사이에 벌어지게 될 최후의 한 판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영적 전쟁이란 사실은 15절에서 교회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소개되는 것과, 14절에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해 온 천하 임금들을 모으더라는 표현이 최후의 종말적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12:17(용과 여자의 남은 자손), 19:19(두 짐승/땅의 임금들의 군대와, 백마 탄 자와 그의 군대인 교회), 20:8(용/곡/마곡과 성도들의 진/교회)과 병행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6:14의 영적 전쟁은 사단의 진영과 교회를 포함한 어린양의 진영 간의 전쟁인 셈입니다.
계속되는 15절은 이런 긴박한 영적 전투에 직면해 현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 위기국면을 극복해 나가야 될 것인지에 대해 권면해 줍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5절). 이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한 종말의 때가 임박한 상황에서 주어진 신약의 여러 본문들과 병행관계를 이룹니다(마 24:42-44, 25:13, 살전 5:2, 계 3:3). 이처럼 ‘도적’ 모티브를 사용하는 종말적 삶의 특징과 강조점은 ‘그 때’(재림/심판)가 언제일는지 알지 못하니 근신(謹愼)하며 깨어 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경계의 메시지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곱 교회를 향해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이기는 자의 지혜로운 삶의 자세인 셈입니다.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이에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 세력들과 최후의 영적 전쟁을 상징하는 16절의 아마겟돈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심판과 관련해 사용되고 있는 므깃도(삿 5:19-21, 왕상 18:40, 황하 23:29-30, 대하 35:20-25)를 동일한 어근으로 사용함으로 악의 삼인방에 대한 종말적 심판의 장소로 인용되고 있는 셈입니다(이필찬, 688-689).
따라서 본 아마겟돈 전쟁은 영적 전쟁이며 동시에 악의 삼두체제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날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여섯 번째 대접재앙은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증시해 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단의 진영과 어린양의 진영과의 영적 전쟁의 의미를 담고 있는 아마겟돈 전쟁은 사실상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종말적 아마겟돈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아마겟돈 전쟁의 결정적인 단초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은 사실상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그 실체가 총체적으로 잠재돼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17-21절은 일곱 번째 대접재앙의 내용과 결과에 대해 기술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가운데 쏟아 붓습니다(17절). 이때 일곱 천사에게 대접재앙의 집행을 선언했던 큰 음성이 다시 성전의 보좌부터 들려오는데 ‘되었다’(It is done)라고 선포합니다. 여기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가운데 쏟아 부었다는 것은 공기, 곧 사단의 핵심영역인 ‘공중’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사단의 진영을 초토화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엡 2:2은 사단을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설명함으로 공중을 사단의 사령부로 지목합니다. 따라서 사단의 총사령부격인 공중이 진멸됨으로 사실상 사단의 진영은 초토화돼 공중분해 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순간에 아마겟돈 전쟁은 승패가 나버린 셈입니다. 이런 사실을 성전의 보좌로부터 ‘되었다’란 선언이 뒷받침 해 줍니다. ‘되었다’는 선언은 ‘성취되다’, ‘완성되다’란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종식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종전선언에 해당합니다. 세상역사의 종식을 가리킵니다. 구속사의 종말적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이제 사단의 본거지인 공중이 파괴됨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을 증거합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늘 있어 왔지만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 성취의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계 21:6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교회의 종말적 승리와 관련해 '이루었도다'(It is done)라고 최종 선언함으로 이런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합니다. 따라서 이상 사단의 진영이 공중분해 된 것과 관련된 ‘되었다’(It is done)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말미암는 최종적인 ‘이루었도다’(It is done)란 선언은 공히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요 19:30,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에 공히 기반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는 종말의 시작입니다(히 1:2, 약 5:3, 딤후 3:1, 고전 10:11). 종말적 구속사건이며 심판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창세 전 구속의 경륜(엡 1:4-6)은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삼 단계의 되었다’란 선언을 통해 마침내 악의 결국은 멸망이요 선의 결국은 승리란 도식을 통해 최종 마감될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이래서 지속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미래는 인간의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약속의 보증입니다.
18절은 종말적 심판 현상을 소개합니다. 이런 현상은 일곱 번째 인 재앙(8:5)과 일곱 번째 나팔 재앙(11:19) 후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동일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대접 재앙의 경우는 동일한 양상을 유지하면서도 표현상 더욱 강화되고 확대된 내용을 확인하게 됩니다. 일례로 ‘큰 지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사 이래 없었던 큰 지진인 사실과, 이로 인해 만국의 성들이 무너지고, 각 섬과 산들도 사라지고, 큰 성 바벨론마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아 멸망된 사실 등이 추가됩니다. 여기서 바벨론 성의 멸망은 14:8-10의 내용과 병행을 이루면서 좀 더 발전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뿐 아니라 ‘큰 우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무게가 한 달란트(50-90kg)나 되는 큰 우박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하게 되었다고 보충 설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심화되고 강화된 종말적 심판현상들로 인해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은 최후의 심판이란 성격을 극대화시켜 설명해 줍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특별히 5-7번째 대접재앙의 실상을 담고 있는 10-21절의 내용은 악의 세력의 삼두체제인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 및 이 모든 세력을 포괄하는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기사를 총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대접재앙이 마지막 종말적 재앙(심판)이란 시각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교회시대가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의 와중에 처해있는 지를 실감나게 해 줍니다. 따라서 혹자들의 주장대로 계시록의 다양한 묵시적 예언들이 여전히 재림과 관련된 미래적인 사건으로 치부되는 관점은 마땅히 시정돼야 합니다. 계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세 종류의 각기 다른 일곱 재앙심판들은 미래가 아닌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현 교회시대에 우리의 인식여부를 불문하고 현재진행형으로 시행되고 있는 종말적 심판현상인 사실을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속사를 마무리 짓는 최종적인 영적 아마겟돈 전쟁은 여전히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Ⅲ. 결론
15-16장은 마지막 일곱 대접재앙을 기술합니다. 15장은 16장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부분의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구속의 노래를 소개함으로 종말적 심판에 담긴 구속의 또한 측면을 대조해 기술합니다.
일곱 대접재앙이 마지막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띠는 것은 특별히 10-21절의 내용을 통해 5-7번째 대접재앙의 대상들이 악의 핵심세력을 상징하고 있는 용과 두 짐승과 큰 성 바벨론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짐승의 보좌를 와해시키는 다섯 번째 대접재앙 심판(10절)은 사단 세력의 중심영역으로 총사령부 격인 공기(공중, 엡 2:2)를 일곱 번째 대접재앙에 의해 초토화시킴으로 사실상 병행관계를 이룹니다. 이런 사실은 다시 한번 각각의 일곱 재앙들이 시간적인 연속성을 극복해 반복과 병행과 점진적인 방법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를 띠고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특별히 일곱 대접재앙과 관련해 재앙의 내용들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을 근간으로 시행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당시 모세를 통해 애굽지역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의 대상이 애굽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해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열 가지 재앙의 피해로부터 안전하게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맥락 속에서 15장은 대접재앙의 도입과 더불어 출애굽 구속의 모티브에 근거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15:3)를 소개함으로 애굽에 대한 심판 중에서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어린양에 속한 새 이스라엘에게 연관시킴으로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통한 교회공동체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열 가지 재앙의 피해자인 애굽인들을 대접재앙의 피해자인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과 연계시킴으로(16:2) 상호간의 병행관계를 시도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의 결말은 항상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본질상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란 측면에서 동질성을 띱니다. 반면 전자는 구속에 대한 예표를, 후자는 구속에 대한 실체와 더불어 구원의 영속성과 영원성을 함의한다는 관점에서 차이점을 가집니다.
마지막으로 5-7번째 대접재앙으로 사단의 세력들이 일망타진되었다는 선언(17절)은 이것이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강하게 증시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17-20장에 기술된 사단의 지휘체제의 구체적인 멸망을 예시해 주는 척도로 기능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즉 10-21절은 용과 두 짐승과 바벨론의 멸망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17-20장에는 바벨론과 두 짐승과 마지막으로 용의 멸망을 상술함으로 스토리 전개의 극적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킵니다. 이런 상호 불가분의 관계는 전자는 후자를 총론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면 후자는 전자의 내용을 좀 더 발전시키고 구체화시켜 각론적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 발생하게 될 이런 최후의 종말적 사건들은 세상 역사 속에서 집행될 때 순식간에(in the twinkling of an eye, 고전 15:51-52)에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은 이 모든 종말적 사건 속에 포함된 다양한 요소와 국면들을 총체적으로 포괄해 일시에 집행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일례로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 마 25장에 소개된 우편 양과 좌편 염소의 우주적 분리사건, 계 20장에 기록된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정황, 주님의 재림과 동시에 발생하게 될 우주적인 부활사건 등이 시차를 가지고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동시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그 나라는 더 이상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완성된 나라이기에 더 이상의 발전도 성장도 성숙도 불필요합니다. 영존하는 나라로서 항상 현재적입니다. 그래서 영원의 세계, 영원의 나라입니다. cafe.daum.net/remnant7000
http://cafe.daum.net/correcttheology
요한계시록 15 - 16장 주석
성 경: [계15: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 '이적'의 헬라어 '세메이온'(*)은 본서에서 세번 나타난다(12:1, 3).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곱 천사가 행할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킨다(6-8절;16장, Ladd, Johnson). 일곱 대접 재앙은 여섯째 나팔 재앙에 이어 나타나는 셋째 화로서(11:14) 마지막 때에 심판을 종결짓는 절정의 사건이다(Hughes, Johnson). 한편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테'(*)는 '완성하다' 혹은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이번 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마지막 재앙이며 이후에는 오직 마지막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15:2]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보니...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유리 바다 가에 서서. - 본절에서는 '유리 바다'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혼용되고 있다.
이 '유리 바다'는 4:6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유리 바다는 4:6과는 달리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 (1) 불이 섞인. -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유리 바다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눈부신 순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Hughes, Johnson).
2. 혹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Swete, Morris, Hendrikse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 (2) 짐승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은 짐승에게 절하여 경배하거나 짐승의 수인 666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온 자들로서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13:13-18;14:12, Ladd, Johnson).
그들은 하늘의 홍해라 할 수 있는 유리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다(Swete, Beasley-Murray).
?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이것은 짐승을 이긴 자들의 기쁨의 찬양을 시사한다. 그들은 거문고를 가지고 승리의 기쁨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역사하신 구속의 승리를 경배하며 찬양한다(5:8;14:2).
성 경: [계15:3,4]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하더라. -
본문은 짐승을 이기고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이 찬양한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두 가지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다른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Ladd).
래드는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한 것이며 어린양의 노래는 짐승의 핍박과 위협으로부터 구원된 자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한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Mounce, Beasley-Murray, Hughes, Morris). 이들은 두 가지의 노래가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으로 부터 시작해서 어린양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나 또는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이 어린양의 구원을 예표하는 모형이라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하나의 찬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어린양의 노래를 짐승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속으로만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모세의 노래에 대해서 혹자는 신 32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며(Beckwith) 혹자는 홍해에서 수장을 통해 애굽 사람들의 추격을 퇴치하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출 15:1-18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easley-Murray). 그러나 본문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가 출 15장과 신 32장을 반영한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것으로 유대인 회당과 초대 교회에서 불리어진 것이었다(Johnson).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께서 영원하며 완전한 주권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을 진노로 심판하셔서 멸망시키시며,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셔서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본문과 구약성경의 인용 구절들을 대조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
| 모세의 노래 | 본 문 | 구 약 성 경 본 문 |
| 어린양의 노래 | | |
+----------------------+-------+--------------+--------------------
| '주 하나님 곧 전능 | | 암 4:13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 하신 이시여' | | 말 1:11 | '만군의 여호와' |
+----------------------+ +--------------+---------------------
| | | 시 139:14 |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
| '하시는 일이 크고 | | | 영혼이 잘 아나이다' |
| | | 시 111:2 |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
| 기이하시도다' | | | 이를 즐거워 하는 자가 |
| | | | 다 연구하는도다' |
+----------------------+ +--------------+---------------------
| '만국의 왕이시여' | 3 절 | 렘 10:7 | '열방의 왕이시여' |
+----------------------+ +--------------+---------------------
| | | 시 145:17 | '여호와께서는 그모든 행위 |
| '주의 길이 의롭고 | | | 에 의로우시며' |
| | | 신 32:4 |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 |
| 참되시도다' | | | 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
| | | |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
+----------------------+-------+--------------+-------------------
| | | 렘 10:7 |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 |
| | | | 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
| '주여 누가 주의 | | 시 86:9 |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 |
| 이름을 두려워하지 | | | 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 |
| 아니하며 영화롭게 | | | 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
| 하지 아니하오리이 | | | 돌리리이다' |
| 까' | | 말 1:11 | '해 뜨는 곳에서 부터 해 |
| | | | 지는 곳 까지의 이방 민족 |
| | | |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
| | | | 것이라' |
+----------------------+ +--------------+--------------------
| | | 삼상 2:2 |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 |
| | | | 가 없으시니' |
| '오직 주만 거룩 | 4 절 | 시 99:3 |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
| | | | 찬송할 지어다 그는 거룩 |
| 하시니이다' | | | 하시도다' |
| | | 시 111:9 |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 |
| | | | 시도다' |
+----------------------+ +--------------+--------------------
| '주의 의로우신 일이 | | 시 98:2 |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
| 나타났으매' | | |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 |
| | | | 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
+----------------------+ +--------------+--------------------
| '만국이 와서 주께 | | 시 86:9 |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 |
| 경배하리이다' | | | 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 |
| | | | 하며' |
+----------------------+-------+--------------+-------------------
성 경: [계15:5]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때에 법궤가 있었던 성막을 상기시킨다(출 25:16, 21;민 17:7;18:2). 그러나 옛 언약 하에 있었던 광야의 성막은 참 형상이며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다(히 8:5). 참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사실은 이미 11:19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며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Ladd).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성은 백성에 대한 구속의 완전함과 확실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한 악에 대한 진노의 심판 또한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계15:6]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 '성전으로 부터 나와'는 일곱 대접 재앙을 실현할 일곱 천사의 출현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한편 본절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 중에서 '맑고 빛난'은 천사의 고결함과 거룩함을 의미하며(단 10:5, Mounce)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는 구약 시대의 왕적인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상징하는 것으로(출 28:4ff.)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대리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성 경: [계15:7]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 '세세에 계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주권이 영원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권한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시사한다(Ladd, Morris, Mounce). 하편 '대접'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알라스'(*)는 문자적으로 연희에서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나(암 6:6) 혹은 희생 재물의 피를 담기 위해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그릇을 의미한다(출 27:3). 이러한 '피알라스'는 5:8에서 순교자들의 신원하는 기도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노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어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진노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탄원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게 하는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Ladd).
성 경: [계15:8]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 '연기'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출 19:18;40:34;대하 7:1-3;사 6:4). 본절에서 연기는 일곱 재앙을 통해서 악을 완전히 심판하시기 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시사한다. 한편 일곱 재앙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경외스러운 나머지 감히 접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대하 7:1-3;합 2:20, Mounce, Johnson). (2) 모든 피조물이 온전히 깨끗함을 입는 마지막 심판의 때가 지나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Hughes).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 '헌 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코스'(*)는 출 9:8-11에 나오는 여섯번째 재앙인 '독종'이나 욥의 몸에 난 악창(욥 2:7)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첫번째 대접 재앙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려간 여섯번째 재앙과 같은 종류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애굽 사람들에게 독종이 발생했던 것과 같이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도 이런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재앙은 이미 욥이 고백한 바와 같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다 준다(욥 2:7, 8, 13).
성 경: [계16:3]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 바다를 피로 변하게 하는 두번째 재앙은 애굽의 하수가 피로 변해 하수의 고기들이 죽고 물에서 악취가 나는 재앙과 유사하며 둘째 나팔 재앙(출 7:20, 21)과도 유사하다(8:8, 9). 그러나 둘째 나팔의 재앙은 바다 피조물 가운데 삼분의 일만 당하는 제한적인 것인 반면에 둘째 대접 재앙은 바다 가운데 거하는 모든 생물에게 미치는 것이다. 바다가 죽은 자의 피와 같이 응고되고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상태로 변하게 되면 그 가운데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게 된다.
성 경: [계16:4]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 둘째 대접 재앙은 강과 물 근원에 떨어진다. 이 재앙은 셋째 나팔 재앙과 병행을 이룬다(8:10, 11). 또한 이것은 모세를 통해 나일 강과 애굽의 모든 물의 근원을 피로 변화 시켰던 첫째 재앙과도 유사하다(출 7:17-21;시 78:44). 물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다. 이러한 물의 근원과 강을 피로 변하게 하는 셋째 재앙은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것임을 시사한다(Johnson).
성 경: [계16:5]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 '물을 차지한 천사'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유대인들이 모든 자연적인 힘 즉 바람, 해, 비, 물 등에 그것을 다스리는 천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근거로(에녹 1서 66:2) 물을 주관하는 천사라고 해석한다(7:1, Ladd). (2) 혹자는 앞절에 언급된 대접을 쏟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한편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심을 선포한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은 1:4과 병행된다. 이 호칭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며 감정닿은 것에 의해서 좌우되는 분이 아니심을 시사한다. 또한 '거룩하신 이'에서 '거룩'은 본절과 15:4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셔서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Morris, Mounce)
성 경: [계16:6]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내리신 물이 피가 되게 하는 심판(4, 5절)이 의로운 이유이다. 이것은 사 49:26을 반영한다. 여기서 '마시게 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도카스 페인'(*)은 완료형으로 '마시도록 주어진'이란 의미이다. 이 완료형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초래된 결과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하나님은 대적자들이 자신의 백성을 괴롭히고 핍박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로 저희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엄중한 심판을 행하신다.
성 경: [계16:7]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 제단의 말하는 음성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정당함을 다시한번 확언한다. 여기서 '제단'은 핍박을 받아 순교당한 영혼의 기도(6:9, 10)와 성도들의 기도와 연관되어 있다(8:3-5).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핍박받는 성도들이나 순교한 자들의 신원에 부응하는 응답임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한 분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당성과 정당성을 지닌 것이다(Ladd).
성 경: [계16:8]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 넷째 나팔 재앙에서는 해가 빛을 잃고 천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진 반면(8:12), 넷째 대접 재앙은 해가 오히려 뜨거워져서 사람들을 불로 태운다. 이것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해가 어떤 뜨거운 기운에 상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7:16). '불'은 성경에서 흔히 심판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전 3:13;벧후 3:7). 본절에서 해로 하여금 불을 내어 태우는 심판을 할 수 있도록 권세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Ladd, Mounce).
성 경: [계16:9]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원진지라 이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 본절은 해가 뜨거워서 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 반응은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는 완악하고 교만한 태도 뿐이다. 이 사실은 혹자의 지적대로 그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짐승의 본성을 그대로 닮았음을 시사한다(Caird). 이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죄악된 행위를 회개하고 창조주를 받아들여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계속해서 하나님을 모독, 훼방한다(사 52:5;롬 1:25;2:24).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는 짐승의 표를 받고 경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회개치 않고 오히려 거스려 훼방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향해 고의적으로 대적한 짐승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최후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14:10, 11;롬 1:21-23).
성 경: [계16:10]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 여기서 '짐승의 보좌'는 사도 요한 당시 세상 권력이 중심이 되어 우상 숭배를 강요하였던 로마 제국을 언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Plummer). 그러난 그 보좌는 단순히 로마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보좌'는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 권세를 숭배케 한 모든 곳을 가리킨다(Johnson). 왜냐하면 본절의 '보좌'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이 버가모 교회의 '사단의 위'(*, 호 드로노스 투사타나)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2:13). 한편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는 애굽이 당했던 아홉번째 재앙을 상기시켜 준다(출 10:21-29).
이 어둠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9:2을 근거로 하여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연기로 인해 어두워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Charles). (2) 혹자는 국가적인 내전(內戰)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Kiddle). (3) 혹자는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 황제의 파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Caird). (4) 혹자는 어두움이 가시적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이며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Johnson).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21:25;22:5;요 8:12;12:35, 36, 46;요일 1;5-7;2:8-10;솔로몬의 지혜서 17:21).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 짐승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혀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야할 만큼 혹심한 고나난을 겪게 된다.
성 경: [계16:1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 본절은 다섯째 대접 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낸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칭호는 단 2:44에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Morris).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나라를 멸하시고 영원히 망하지 않는 새로운 한 나라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다섯째 대접 재앙을 받은 자들은 온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교만하게 행한다.
성 경: [계16:12]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 여섯번째 재앙은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어 온 천하의 임금들이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려고 아마겟돈이라는 곳에 모이는 것이다(14절). 이 여섯째 대접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9:14)은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벌어질 전쟁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두 재앙 사이에 차이를 보이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는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던 네 명의 천사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놓여지는 반면(9:14)여기에서는 동방의 왕들, 즉 지상의 통치자들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하기 위해 모여든다는 점이다.
동방의 왕들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다는 말은 사도 요한 당시 크게 유행하던 소문, 즉 죽은 네로 황제가 다시 살아 파르티아 군대를 거느리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 로마로 침공해 올 것이라는 네로 재생설을 그 배경으로하고 있다(Morris). 유브라데 강 동쪽 에는 우수한 유목 민족인 파르티아인(Parthinans)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기원 1세기 어간에 이들이 로마를 침공할 것이라는 우려가 항상 있었다. 이러한 우리는 네로의 재생 신화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는데, 즉 자살했던 네로가 다시 살아나 파르티아 유목민들의 수장이 되어 로마 제국을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그 당시에 널리퍼져 있었다(Sibylline Oracles 4:115-139). 그러나 본절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실제적인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Johnson, Minear). 이것은 오히려 세상의 종말론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동방의 왕들, 즉 악의 세력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마지막 최후의 결전에 임할 태세가 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계16:13]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 요한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환상을 본다. 여기서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다르타'(*)는 '불결한'이란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마귀를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막 1:23;3:11;5:2). '더러운 영'을 내놓는 '용'은 머리를 일곱 개 지닌 사단을 가리키며(12:3, 9) '짐승'은 13:1-10에 등장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나타내고 거짓 선지자는 13:11-17에 언급된 '땅에서 나온 짐승'을 의미한다(Mounce, Ladd). 한편 '개구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정한 동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레 11:10, 41)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린 재앙 중 하나이고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재앙을 가져오는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출 8:5-11;시 105:30).
이방 세계에서는 개구리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 개구리는 '아리안'(Ahriman)으로 불리어 졌는데 주정적으로 평가되어 재앙을 가져오는 자인 동시에 흑암 권세의 대리자로서 빛의 사자인 오르무드(Ormud)와 싸우는 존재로 생각 되었다(Moffatt). 반면에 애굽인들은 개구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풍요하나 다산의 여신인 헥트(Heqt)로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런 신들을 '귀신' 즉 사단의 사자 또는 우상 숭배와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로 생각하였다(9:20;19:2;고전 10:20, 21).
본문에서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입으로 토해놓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14절에서 '귀신의 영'으로 진술되는 것으로 보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말과 미혹시키는 일을 하는 존재이다. 즉 '귀신의 영'은 땅의 왕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거짓 예언자들처럼 이적을 행할 뿐만 아니라 온갖 거짓말과 유혹하는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성 경: [계16:14]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본절은 13절의 '더러운 영'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 이적을 행하여 세상 임금들을 현혹한다. 구약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을 찾아볼 수 있다. 즉 거짓말하는 영이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 아합 왕을 꾀어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왕상 22:19-23). 예수께서도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것을 예언하셨다(마 24:24). 또한 바울은 악한자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임하게 될 것을 예고하였다(살후 2:8-10). 한편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은 생소한 표현이다. 이와 동등한 표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리스도의 날'(빌 1:10), '주의 날'(살전 5:2) 등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Morris, Ladd). 이 날에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귀신의 영'은 세상의 임금들을 미혹한다.
성 경: [계16:15]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본절은 마 24:42-44과 병행된다. 계속적으로 귀신의 영이 미혹하여 전쟁 준비를 시키는 과정에 본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은 마지막 대전쟁이 임박할 때 성도들이 극적인 위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 경고의 의미는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만 함을 권면하는 것이다(마 24:43;살전 5:2).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적 같이'오신다는 경고는 사데 교회(3:2-4)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3:18) 주어졌던 것이다. 이 경고는 두 교회의 우상 숭배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함을 강조한다(Johnson). 한편 본절에서의 '복'은 본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일곱 가지 복가운데 세번째 복에 해당된다(1:3;14:13;19:9;20:6;22:7, 14). 본절은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있을 사단의 기만과 핍박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늘 깨어 있어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 주실 것을 시사한다.
성 경: [계16:16]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 '아마겟돈'의 보다 정확한 음역은 '하르 므깃도'(*)인데 '하르'(*)는 '작은 산'을 의미하며 '하르므깃도'는 '므깃도 산'을 가리킨다. 이 '므깃도 산'에 대한 견해는 여섯 가지이다.
(1) 혹자는 갈릴리의 고대 도시 므깃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indsay, Seiss, J.B. Smith, Walvoord).
(2) 혹자는 갈멜 산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ohmeyer, Farrer). (
3) 혹자는 '집회의 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사 14:13, Bruce, Torrey, Rissi). 이것은 14:12-15의 기록에서 바벨론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보좌로 상징되는 북극 집회의 산에 오르려고 하는 것과 본절의 '아마겟돈'이 관계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사본의 증거가 부족하며 전후 문맥과 서로 모순되고 있다.
(4) 혹자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슥 14:2;욜 3:2, Charles).
(5) 혹자는 '약탈의 산'이나 '멸망의 산'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ird, Kiddle).
(6)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이 견해에 따르면 '므긷도'는 군대를 소집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가다드'(*)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를 명사형으로 고치면 접두어 '마'(*)가 붙어 '마게드'(*)가 되며 이는 '군대를 소집하는 곳'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 접미어 '오'(*)가 붙어 '마게돈'(*)이 되면 '군대를 소집하는 장소'가 된다. 이는 곧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14절)와 같은 말로 그리스도의 재림때 있을 심판을 위하여 열방을 한 곳에 모으는 예언적인 성취를 암시한다(욜 3;12)는 것이다. 여섯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것으로 어떤 지리적인 실재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과 대결하여 그들을 패배시킬 종말론적인 전쟁 또는 그 장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9:11-21).
성 경: [계16:17]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 '공기 가운데'는 용과 짐승의 권세를 잡고 있는(엡 2:2) '공중'을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사단의 권세를 잡고 있는 공중에 대접을 쏟는 것은 짐승과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결정적인 타격(打擊)이 가해짐을 시사한다(벧후 3:10). 한편 '되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넨'(*)은 '성취하다' 또는 '완성하다'의 뜻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진노를 나타내는 말이며 인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성 경: [계16:18]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 본절의 대천재지변과 유사한 현상은 일곱번째 나팔 재앙 후에도 동반되었었다(11:19). 이러한 현상은 대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Moffatt) 하나님의 심판으로 행해진 재난이 그 절정에 달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Hughes). 요한은 일곱번째 대접 재앙으로 인해 생긴 번개와 뇌성과 지진이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재앙보다도 심하고 극렬한 것이라고 진술함으로 결정적인 재앙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16:19]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 '큰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네 가지 주장이 있다. (1) 예루살렘성을 가리킨다(11:8). (2) 혹자는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18:10, 16, 18, 21, Mounce). (3) 혹자는 지리적인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무관하게 무신론적 사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Morris, Kiddle, Bruce). (4) 혹자는 뒤에 언급되는 바벨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문맥상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만국의 성들'은 짐승을 따르던 지상의 모든 국가들을 나타내는 말로서(17:12-14), 그것들이 무너졌다는 말은 전세계에 걸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멸망함을 시사한다.
?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과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으며(18:2), 땅의 왕들이 그와 함께 음행토록 했으며, 상인들도 그의 세력을 인해 치부하게 하였다(18:3). 이러한 바벨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그에 따른 응분의 진노를 부으신다.
성 경: [계16:20]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 여섯째 인이 떼어졌을 때에도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 옮겨졌다(6:14). 이러한 표현에 대해 혹자는 엄청난 지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나(Mounce), 혹자는 최후 심판에 일어나는 대격변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여하튼 이것은 마지막 일곱째 대접 재앙으로 인하여 지상의 피조 세계가 파국을 맞게 됨을 시사한다.
성 경: [계16:2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 '달란트'(*, 탈란티아이아)는 시대에 따라서 그 무게가 같지 않았으나 대략 60파운드에서 100파운드 정도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무게의 우박이 재앙으로 주어진다. 구약성경에서도 우박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적들을 심판하신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수 10:11).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짐승을 경배하는 불신자들은 우박의 재앙으로 더욱 마음이 강퍅해진 애굽 왕 바로와 같이(출 9:35) 회개치 아니하고 그 재앙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
'성경과 신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 속에 나타난 용의 존재/ 외 (0) | 2021.08.18 |
---|---|
창세기 ‘아담과 이브’는 실존하였다 (0) | 2021.08.11 |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적 형상들 및 흐름 (0) | 2021.06.13 |
WCC, 그 실체를 밝힌다/ 현대에선 종교다원주의 ‘야훼와 다른 신앙’ (0) | 2021.05.28 |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본문: 창1-3장) (0) | 202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