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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성경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장면들/ 가룟유다의 최후

by 은총가득 2021. 6. 9.

삶의 마지막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시간으로 보내기 원한다면, 그 시간에 무엇보다 주변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므로 불편했던 일들이 있었다면 서로 풀면서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야 하지요. 기억은 오래도록 남기 때문입니다. 정성어린 격려와 지지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죠.

 

(그림-귀스타브 모로(1826–1898, 프랑스의 화가), ‘Le Christ au jardin des Oliviers’, 1880년경, 캔버스에 유화, 80×75cm, Musée Gustave-Moreau:파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에 앞서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그 목적에 온전히 충성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증거 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 이유대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3.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13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총 9장에 걸쳐서 유월절 전날에 있었던 일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함께 식사하시며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주시고 그리고 기도하신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실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첫 시작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그림-Heinrich Hofmann(1824–1911, 독일의 화가), ‘Christ in Gethsemane’, 1886년, oil, Riverside Church:New York, ⒸPD-Old/Wikimedia Commons)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그들은 제자로 선택받을 만한, 신뢰할만한 그런 면모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성실하지도,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지도 그리고 삶의 열매가 있지도 않았죠.

 

첫 번째 제자로 꼽히는 베드로만 보아도 예수님을 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시자 극구 말립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팔아버릴 것을 말씀하시자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곧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신뢰할 만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린아이 같습니다. 믿음을 만하지도, 신뢰할만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서로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높은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서로 싸웠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찾아와 자리 부탁을 하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림-Caravaggio(1571-1610, Italian painter), ‘denial’, 1610년경)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냥 예수님만 따라다니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옆에서 말씀을 주셨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나 오천 명의 사람을 먹이시는 것, 장님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 파도치던 갈릴리 호수가 고요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았고 함께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었고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죽기 전에 하신 일은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다른 아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그림-파올로 베로네세(1528–1588, 이탈리아의 화가), ‘Christ Washing the Feet of the Disciples’, 1580년경, 캔버스에 유화, 139⨉283cm, 프라하 국립미술관:프라하)

 

예수님은 유월절 전에 제자들과 저녁을 먹던 중, 갑자기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절대 씻지 못하신다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와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그 말에 바로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합니다. 왔다갔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지대인데다 신발로 샌들을 신고 다니니 조금만 걸어도 발은 먼지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씻고 들어가 식사를 했습니다. 그 때 종이 있으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주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로서로 씻겨준다고 합니다.

보통 이렇게 서로 씻겨주시는 경우에는 먼저 씻겨주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림-Ford Madox Brown(1821–1893, 영국의 화가), ‘Jesus Washing Peter’s Feet‘, 1852–1856, 캔버스에 유화, 116.8×133.3cm, 테이트 브리튼:런던)

 

아마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는 가운데 아무도 먼저 상대방의 발을 씻겨줄 생각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발조차도 씻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은 아마 걱정이 많으셨을 겁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 죽어 떠날 텐데, 이들을 두고 떠나는 그 마음의 걱정은 정말 컸을 겁니다.

이들을 통해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텐데, 이들을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래서 직접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신 발을 닦으셨습니다. 친히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셨고, 그 신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식탁을 같이 하며 떡과 잔을 주시면서 나의 몸이고 나의 피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단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힌 것만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몸을 다 주신 것이죠. 결코 흉내 내거나 따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행동만 있을 뿐입니다.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 확신하셨기, 이후에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을 깨달을 것을 아셨기에, 아무런 말없이 다만 행동으로 보여주실 뿐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중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의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그가 행할 일을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전혀 못 알아들어도, 도무지 듣지 않으려 해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함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림-틴토레토(1518–1594, 이탈리아의 화가), ‘Christ Washing the Disciples' Feet’, 1575년경-1580년경, 캔버스에 유화, 204.5⨉410.2cm, 내셔널 갤러리:런던)

 

그리고 이제 시간이 흘러 제자들은 변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충성합니다.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데, 심지어 그 사랑으로 죽기까지 헌신합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드립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경험한 이들의 삶의 증거입니다.


천명의 죽음을 한 함께 호스피스 전문가 오츠 슈이치는 저서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죽음을 앞두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으로 꼽는 것들 중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았더라면’과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첫 번째 후회로 꼽은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이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더 전하지 못한 것, 사랑의 마음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워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도, 더 많은 성취를 이루진 못한 것도, 더 높은 명예를 얻으며 놀라운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것이 아닌,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림-Carl Heinrich Bloch, ‘Christ in Gethsemane’, 1880, Brigham Young University Museum of Art)

 

그리고 이 책에서 후회하는 것으로 꼽는 것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준비하는 것에 대한 것도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내 장례식을 생각했더라면’, ‘내가 살아온 증거를 남겨두었더라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건강할 때 마지막 의사를 밝혔더라면’과 같은 것들입니다.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삶은 가치 있게 시작 된다”는 생사학 보급에 기여한 알폰스 데켄(Deeken) 교수의 말처럼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알고 준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준비의 첫 번째는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말이죠. 그러한 삶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정말 소중한 사랑의 마음을 남겨주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죽음과 하나 되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죽음은 피하고 싶은 큰 고난과 고통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혹시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슬픔과 아픔, 배고픔과 굶주림, 기쁨까지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그럼에도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기 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사하며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생명을 살리는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못하며 아직 죄인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림-Raphael(1483-1520, painter),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1499-1502, oil on panel, 52⨉44cm, Sao Paulo Museum of Art:Paulista Avenue)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5-8]

 


신약성경에 기록된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찾아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줄 테니 얼마를 주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그들은 은 삼십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이들에게 넘겨 줄 기회를 찾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림-Pieter Pourbus, ‘The Last Supper’, Oil on panel, 1548. Groeningemuseum, ⒸVassil/Wikimedia Commons)

 

14.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태복음 26:14-16]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버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여러 주장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돈의 욕심에 사로잡혀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왜 쓸데없이 귀한 것을 허비느냐며 분개했죠. 가룟 유다도 같은 생각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돈궤를 맡으며 거기 있는 것들을 훔쳐간 도둑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이 지금 그 사실을 지적하셨고, 자신의 본심이 들통 나는 그 순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넘길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욕심이 충격적인 사건의 주동자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림-Fyodor Bronnikov(1827–1902, Russian painter), '유다'(Иуда), 1874)

 

그런 가룟 유다의 삶의 마지막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중에 죽어가는 예수님을 목격하고는, 결국 예수님을 판 죄책감에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은 은을 도로 갖다 주고는 스스로 죽습니다. 그렇게 그의 삶이 끝납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 삶의 마지막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에게 후회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회개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하시는 것에 괴로움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감은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그것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그가, 잠시 눈의 비늘을 벗은 순간 욕심에 사로잡힌 냄새나는 자기 자신과 만났고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삶을 그렇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림-José Ferraz de Almeida Júnior(1850–1899, Brazilian painter), ‘Judas' regret’, 1880, oil on canvas, 209⨉163.3cm, Museu Nacional de Belas Artes:Rio de Janeiro)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태복음 27:3-5]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을 미리 미리 정리하는 것입니다. 꼭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더라도, 죽음을 가정해 주위의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죠.

사실 누구라도 자신의 집이나 공간에 둔 물건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합니다. 장과 수납장 등에 넣어 둔 물건을 다 꺼내서 쌓아놓고 보면 그 어마어마한 물건에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물건의 소유와 소비로 꽉 차 있는 것이죠.

 

하지만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물질을 소유하는 욕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 날 수 있고, 더 많이 소비하지 못하는 비교의식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림-Antoni Caba(1838–1907, Spanish portrait painter), ‘Repentance of Judas’, 1874, oil on canvas, 190x210cm, Reial Acadèmia Catalana de Belles Arts de Sant Jordi:Barcelona)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가룟 유다를 향해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돈과 재물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하신 말씀은 돈을 훔쳐가고 있던 가룟 유다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는 자신의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그가 자신을 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돈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에 오히려 자신은 아니라며 반문하죠.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 종종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바라 크루거라는 개념주의 예술가이자 사진작가가 한 말인데, 유명한 철학자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오늘날의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말로 유명합니다.

 

학자들은 오늘날의 소비사회의 특징으로 첫째는 현대인들의 소비는 욕구가 아닌, 욕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지적합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욕망에 따라 또 욕심에 따라 소비하는 시대라는 것이죠. 그래서 생겨난 문제점이 과소비라고 합니다.

 

(그림-Rembrandt(1606–1669, Dutch painter), ‘Judas returning the thirty silver pieces’, 1629, oil on oak panel, 79⨉102.3cm, Lythe/North Yorkshire/Mulgrave Castle)

 

둘째는 사랑 같은 것들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화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돈을 숭배하는 물신주의가 세상에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은 더 큰 즐거움을 위해, 더 큰 편안함을 위해, 보다 더 최신 것을 선호하기 위해 더욱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래서 그 욕심에 사로잡힐 때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고 바른 판단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일들도 저지르게 됩니다.

거기에서 좋은 삶의 마무리, 아름다운 마무리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죽음이 선물하는 새로운 삶이란, 모든 것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며 맞이하는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생의 진실과 추구해야 할 가치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돈과 소유물의 많음이 결코 인생을 책임지지 않음을 말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림-미상, ‘Kiss of Judas-scene from the Passion of Christ’, 12세기 후반, Romanesque frescoes, northern Sardinia:Italy, ⒸJoJan/Wikimedia Commons)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Discipline)이라는 책에서, 물질과 관련해서 생기게 되는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내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소유물을 선물로 받았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소유물은 우리의 노동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에 의한 것임을 기억할 때, 물질로 인해 일어난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림-Giotto di Bondone(–1337, Italian painter), ‘The Arrest of Christ’(Kiss of Judas), fresco, 1304-1306, 200⨉185cm, Scrovegni Chapel:Padua)

 

둘째로 우리의 소유물은 하나님의 보호에 의하여 유지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예방책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산을 전적으로 보호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유물을 보호하실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의 소유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 걱정을 하기 때문에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 재물에 매달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알고 있다면, 또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자리인 장례식장이 종종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조문객의 방문과 더 많은 늘어서 있는 근조 화환(花環)이 알게 모르게, 의도하든 하지 않던 죽음마저도 돈으로 평가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 더 훌륭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장례식장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형제간의 갈등, 유산으로 인한 싸움, 고인에 대한 원망과 비난까지 삶의 마지막은 돈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림-미상, ‘Passion’, 1480-1490년경, church of St. James:Toruń, ⒸPko/Wikimedia Commons)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돈을 따라가다 어느 날 갑자기 문 앞을 찾아온 죽음을 만나지 않으려면 말이죠.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서 자유롭게 참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려면 말이죠. 여기에 멋진 삶의 마지막이 따라 오게 됩니다.

[출처] 성경인물과 함께 찾는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6/ 알지 못한채 당하는 죽음, 가룟 유다|작성자 행복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