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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성경

명화 - `아담과 이브`/히 에로니무스 보스의 `지옥도

by 은총가득 2021. 5. 17.

뒤러의 ‘아담과 이브’

 

이 그림은 1507년에 그렸다.

우리가 이 그림을 주목하는 이유는 뒤러가 이론화한 ‘미 의식’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1507년에 베네치아에서 고향인 뉴른베르크로 돌아왔다. 이태리 여행을 통하여 르네상스 회화를 많이 보고 왔다. 르네상스 그림에는 원근법이라든지, 미술에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보았다. 뉴른베르크로 돌아오자 회화이론을 연구하여 회화 교본을 쓸 계획을 세웠다. 유화인 아담과 이브는 이 시기에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판화 형식으로 아담과 이브를 여러 점 그렸다. 유화로 그린 아담과 이브는 이 그림이 유일하다. 발꿈치를 들어 올린 채 막 앞으로 걸어 나오려는 듯한 아담의 얼굴에는 갈망과 소망의 표정이 담겨있다. 이브는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내닫으며 아리따운 모습으로 유혹하는 듯하다. 왼손에 들고 있는 사과의 가지를 뱀이 물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를 상징하는 인체의 비례를 8 : 1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8등신이라는 말은 미인이라는 말과 서로 통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9 : 1 이다. 라틴계 사람보다는 게르만족인 독일계 사람들의 키가 훨씬 더 크다. 뒤러는 북구인을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으므로 9 : 1이 맞을 것이다. 그만큼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그리려 했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서 뒤러의 ‘미 의식’을 보기로 하자. 뒤러는 독일 최고의 화가로 평가하는 이유도 뛰어난 미술의 재능도 있지만 미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기 양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뒤러가 살아 있을 때 나온 그의 평에 의하면 ‘숙련에 불과하던 것을(미술을 장인이 만들어 낸 공예 상품 정도로 취급했다.) 체계적 학문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왜 좋은 작품인지를 설명하는 이론적 근거가 없었다.

과학적 구성법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원근법에서 시작했다. 원근법은 수학이었고, 수학을 응용함으로 과학이 되었다. 뒤러는 원근법을 알았을 때 감격했다. 물론 이때는 빛과 그림자의 비례 관계를 논하는 색채론도 나와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은 측량의 기초 이론이 되는 기하학이었다. 뒤러는 복잡한 인체 구조도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비례를 연구했다. 창작되는 모든 것은 숫자와 무게와 비례에 의하여 결정된다. 회화도 마찬가지이다.

 

회화가 과학이다. 라고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레오나르드 다 빈치 이다. 이태리에서 돌아 온 뒤러는 회화교본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회화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글을 쓰려고 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비례론이었고, ‘인체 비례론’도 소 제목을 붙여서 마지막에 다루었다.

1507년에 그린 ‘아담과 이브’는 1504년 그린 모습과 다르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를 두고, 실험했고, 회의했고, 심한 마음의 흔들림도 있었고, 마침내는 포기하기에 이른다. 아름답게 그리는 방법을 두고 ‘각자의 판단대로 그려라.’라는 주장도 있다. 뒤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름다움이란 증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가 뒤러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단념했다. 완전한 해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찾아 낸 답은 자연에서 각각의 대상물이 빚어내는 형태의 조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형은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아름다움은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사실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있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근본 원칙은 부분들의 조화이다. 이것은 전체를 하나로 어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뒤러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이르는 것을 포기하고 서로 다른 형태에 내재하는 공통된 비례를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름다움은 신이 만들어 낸 자연에 흩어져 있으므로 순간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화가는 그것을 찾아내서 어울리게 해야 한다. 인간이 억지로 꾸며내서는 안 되고 자연에 있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는 것이 뒤러의 생각이었다.

1507년의 ‘아담과 이브’는 뒤러 회화에 하나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이전의 그림에는 이론적으로 구성하여 바로 작품으로 형상화 했다. 이후로는 이론과 실재의 그림을 분리시켰다.

1507년에 그린 ‘아담과 이브’는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뒤러는 전 생애에 걸쳐서 미술 이론을 연구했다. 특히 비례이론을 가장 중시했다. ‘인체 비례의 책’은 그가 죽은 후인 1528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화가이지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은 판화였다. (*판화는 인쇄술과 관계가 깊다.)

 

 

틴토레토의 `아담과 이브`

 

 

틴토레토의 ‘아담과 이브’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1518-1594)가 1550년에 그린 작품이다. 틴토레토는 아버지가 틴토레(염색공)이었으므로 얻은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자코푸 로부스티이다.

어릴 때는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다. 1533년에 티치아노에게 그림을 배우러 갔다. 베네치아 화파의 화가를 보면 티치아노, 틴토레도 ------, 하는 식으로 반드시 소개를 한다. 나는 화가로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를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틴토레토의 전기를 쓴 나돌은 이렇게 소개한다. 틴토레토가 티치아노 공방에서 도제로서 그림 공부를 할 때 틴토레토가 그림을 너무나 잘 그리는 것을 보고 티치아노가 질투심으로 그를 해고했다. 전기대로가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티치아노 밑에서 공부한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후로 베로네제 등의 다른 화가 밑에서 공부하였으리고 한다.

틴토레토는 피렌체 화가인 미켈란젤로와 베네치아 화파인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윤곽선을 분명히 하여 조각처럼 그렸고, 티치아노는 화려한 색채를 사용했다. 틴토레토는 이 둘의 영향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인물의 과장된 몸짓과 역동적인 구성, 극적인 빛의 사용으로 그들과 구분된다. 그에게 그림을 주문한 사람도 상류층보다는 중류층이 많았으리고 한다. 그는 그림을 주문받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로비 활동을 했다. 다른 화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그림을 의뢰받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와 화풍이 달랐다는 것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화풍을 불러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는 격정적으로 끌어오르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아담과 이브’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짧고, 거친 붓질로 칭찬도 받았지민 바사리같은 미술사가들은 나쁘게 평을 했다.

‘아담과 이브’를 보면 관람자에게 마치 선악과를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인가에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몸통과 서로 평평한 사선을 이루고 있는 인체의 중심축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림의 배경에 그려진 풍경화는 천국을 상징한다. 차분한 색채를 사용했다. 빛이 아담의 등과 이브의 전면에 비추었다. 빛과 색채는 티치아노의 영향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타나는 매너리즘의 영향도 보인다.

신화를 그림 그림은 좀 더 좀 더 활기찬 색조를 사용하여 티치아노의 영향을 가장 잘 보여준다. 선명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나체의 윤곽은 화면의 풍요로움을 강조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 그림에서도 보여주고 있지만 티치아노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육감적인 아름다움을 꾸준히 그렸다고 한다.

틴토레토가 그린 다른 그림, 즉 성화를 보면 아주 극적인 구도와 몸에서 빛이 나는 광채, 대담한 행동을 표현함으로 관람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 들인다.

명암 처리와 인물과 의상에 북유럽의 요소를 자기나름으로 도입했다. 색다르거나 이상한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

틴토레토는 1580년에 만토바가의 곤자가 가문의 주문을 받아서 베네치아를 떠난 이외에는 베네치아를 떠난 일이 없다고 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도 지금 베네치아에 남아 있다. 그만큼 베네치아 화파에 충실하였다고 본다. 또 베네치아에서 인정을 받으려 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구도와 극적인 자세는 앞으로 다가올 매너리즘과 바로크 회화를 암시한다. 매너리즘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인 엘 그레코는 실제로 틴토레토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히  에로니무스 보스의 `지옥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지옥도’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 - 1516)는 네델란드 화가이다.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개성적인 종교화를 남겼다. 1480년에 부유한 여성과 결혼함으로 생계를 위해 그림 그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보스의 그림은 폴랑드로 화법(얀 반 에이크와 반 데르 베이덴 전통의 사실적인 회화)과는 많이 다르다. 그 기원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반인반수가 등장하는 공상적인 세계를 표현하였다. 성서와 속담을 우의적으로 표현하였다.(인간의 어리석음, 죄의 무거움 등) 보스의 그림에는 기괴한 공상이 그려져 있어서 감상자에게 충격을 준다. 그림에 중세적 요소가 강하다.

후대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보스를 자신들의 선구자라고 하였다. 보는 이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 일으키는 기괴한 공상에는 불가사의한 근대성이 깃들어 있다. 보스의 회화를 심리적인 방법으로, 상징의 방법으로 해독하려는 연구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그림의 내용은 아주 잔혹하다. 화면의 구석구석에는 인간들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참혹한 벌을 받는다. 인간의 죄악을 크게 일곱가지로 전형화 했다.

그림의 상단은 포위당한 도시와 비슷하다. 건물은 폭파되고 불길이 솟아 오른다. 번개가 치는 섬광이 끔찍한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그러나 눈길을 조금만 아래로 돌림ㄴ 불길은 얼음으로 바뀐다. 나무 인간은 가라앉은 배 위에 서 있고, 주변에는 얼어붙은 인간이 서 있거나 미끌어져서 떨어진다.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은 중앙에 속이 비어 있는 나무 인간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나무 인간은 머리를 돌려서 주변을 본다. 그곳에는 죄를 짓고 고통을 받는 인간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나무인간에 대해서는 여러 미술사학자들이 에덴 동산에 나오는 나무로 본다. 삶의 나무와 죽음의 나무를 상징한다고 추정한다.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한편으로 나무 인간은 남성 성기의 상징이고, 달걀형의 몸체는 여성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지옥도는 세 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우측 패널에 그려진 그림이다. 중앙 패널에 그려진 그림의 제목은 ‘지상 쾌락의 동산’이다. 왼쪽은 낙원을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 폭 제단화는 교회의 제단에 사용하지만 이 그림은 교회의 제단화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그림이 어떻게 의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17년에는 나사우의 핸드리크 3세의 손에 있었다.

 

플랑드로 전통 화가들은 (얀 반 에이크 등)은 아주 꼼꼼하게 그리면서 사실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전통이다.

히에로니무스의 그림은 얇은 물감층을 사용하여 단 시간에 작업을 끝낸다. 물감 밑으로 밑그림이 비쳐나오기도 한다. 지옥도에서는 기이한 괴물의 형상을 창조하기 위해서 사전에 많은 스케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지옥의 이미지는 중세의 사고 방식에서 만들어졌다. 공포의 이미지는 지금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교회는 교회의 규범을 위반하는 사람에게 끔직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므로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성경에서 전해주는 지옥의 모습은 구약의 욥기에 나온다. 바다 괴물이 입에서 불을 뿜고, 콧구멍에서 뿌연 안개를 내 뿜는다. 중세부터 지옥이 대중의 교화 즉 도덕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을 문학적으로 묘사했다. cafe.daum.net/shh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