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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사울과 신접한 여인 (삼상 28:7-8)

by 은총가득 2021. 6. 1.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불러낸 사무엘의 영혼

(삼상28:6)

 

 난해한 성경구절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은,  성경의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의 다양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의적이며 임의적인 해석을 무조건 옳은 답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삼상 28:6에 보면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은 다시 나타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7:9-10)

부자와 나사로에서 보듯이, 죽은 자는 제한된 공간에서 고통을 받으며 세상으로 다시 올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다윗은 그의 어린 아이가 죽자 오히려 금식을 풀며 이렇게 말한다.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3)

다윗은 장차 죽은 아들에게 갈 수 있지만, 그 아들은 다윗에게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울왕의 요청에 의하여 신접한 여인에게 불리워진 사무엘은 무엇일까? 그는 정말로 죽은 자의 영혼인가? 아니면 여인이 정말로 영혼을 불러낸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인가?
또 이 여인은 정말로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는가? 혹은 거짓말로 초혼을 부르는 자일까?

삼상28:6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구절로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해석이 있다.

(1) 하나님께서 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실제로 사무엘의 영혼을 나타나게 하셔서, 사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이방 점성가였던 동방박사를 통하여 별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것은 정말로 사무엘의 영혼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하심이었다는 것이다.

 

(2) 이 여인이 평소에 접하고 있던 귀신(다른 영적 존재)이 여인에게 사무엘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서의 귀신은 죽은 자의 사후영혼이 아니라, 마귀, 사탄의 부하(타락한 천사들)로서 어느 정도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무리를 말한다.

 

(3) 이 여인 자신이 사울의 의도와 심증을 미리 파악하고, 거짓말로 사무엘의 영혼이 나타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의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각각 그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신접"(28:7)을 의미하는 "오브"라는 단어는 "친숙한 영"을 뜻하며, 이 용어는 어떤 영을 소유하거나 그 영에게 문의하는 자를 가르킨다. 즉 "신접한 자"(오브)는 어떤 영적 존재(귀신)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오브라는 용어는 아마 아브(아버지, 조상)에서 유래되었거나 아카드어인 "aptu"(구멍, 웅덩이) 에서 유래되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두 번째의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그 여인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28:13)라고 말하였는데,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엘로힘"으로서 일반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신적존재, 영적존재"를 말한다.
성경에서 "엘로힘"이란 고유명사적 의미로서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반 명사적인 단어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일반적인 신(god), 우상, 귀신, 천사에도 사용되어진다. 그것은 "엘"이라는 단어가 원래 "능력, 힘"을 의미하는 셈어에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엘로힘은 "재판장"(시편82:1, 6)이라는 의미로 사람에게 사용된 적은 있는데, 그것은 "힘, 능력"을 하나님께 위임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힘이 "죽은 사람의 영혼"에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은 없었으며, 성경에서 귀신이란 죽은 자의 사후영혼이 아니라, 사탄과 마귀의 부하, 즉 일련의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를 말한다.

사울왕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자, 여인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28:14)고 사울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28:12)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인은 어떻게 그가 사울인지 알았을까? 여인에게 이것을 알게하여 준 자는 사무엘의 영혼인가? 아니면 여인과 친밀한 다른 귀신인가? 혹은 추측으로 알았을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사울왕이 요청하였으며, 신접한 여인은 자신에게 정말로 그러한 능력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무엘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여인이 실제로 영혼을 부를 수 있는 신접자라면, 당연히 그 부르는 영혼이 왔었을 텐데, 왜 큰소리로 외치며 놀랐을까? 혹시 여태껏 거짓말로 영혼을 부르던 여인에게 실제로 사무엘이 나타나자 큰 소리로 놀라 외친 것이 아닐까? 즉 여인이 평소에 경험하였던 것 이상의 체험을 하였기에 큰 소리로 놀라 외친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인은 사울왕에게 "신(엘로힘)이 땅에서 올라옴"을 말하더니, 곧 이어 그 모양에 대해서 "겉옷을 입은 노인"이라고 설명한다.
즉 사울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여인의 보는 것을 통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며, 여인은 사울에게 사무엘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주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첫째 사무엘이 정말로 나타났다면 땅에서 올라올 리가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나님 곁으로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도서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더군다나 사무엘의 영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왕에게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설명한 것은, 정말로 죽은 사무엘이라는 것을 과장설명하기 위한 표현방식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잠15:24)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시9:1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쉐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둘째 "신"(엘로힘: 신적존재)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였다가, 그 모양에 대해서 겉옷을 입은 노인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여인은 겉옷을 입은 노인이 영적 존재(엘로힘)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사울왕에게 사무엘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설명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 겉옷은 히브리어로 "메일"로서 특별히 제사장의 겉옷, 도포를 가르킨다.(레8:7)
사울이 그 모양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인에게 물었을 때에, 여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무엘이 노인이며 제사장의 겉옷을 입었다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여인이 사울에게 거짓 사무엘을 불러냈다는 증거가 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28장의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동안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되이 행한 일, 대표적으로 삼상15장에서 아말렉 족속을 완벽하게 진멸치 않았던 것을 들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할 것을 예언한 바가 있었고, 사울도 죽게 될 것임(대상10:13,14)을 이미 말했던 적이 있었다.
신접한 여인은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며, 사울왕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인하여 사울왕과 아들이 죽을 것을 사사롭게 예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대상10:13-14)

신접한 여인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두려워 하였다. 그것은 사울왕에 의하여 신접한 자와 무당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자가 바로 그 사울왕이라는 것을 여인은 알게 되었다. 만일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면, 사울왕과 아들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

"사울과 그 아들들이 내일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28:19)고 말한 점이다. 그 말의 뜻은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 예언 그대로 사울과 아들들이 모두 죽게 되므로 사실로 입증된다는 점이다.
즉 28:16-19의 구절의 내용은 나타난 사무엘의 말이 신접한 여인의 엉터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귀신의 전적인 장난이거나 거짓이라면, 28: 17절과 같이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는 세상에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6)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사울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한 선지자 사무엘(삼상 10:7,8)의 도착을 기다리다 못해 자기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중죄를 범했다(삼상 10:8,13:8-15).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에 대하여 사무엘은 사울 왕국(그의 1대에 한하는) 단절의 예언을선고 하였다(삼상 13:9-14).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사울을 책망하고 폐왕을 예언했다(삼상 15장).
사무엘은 사울왕을 대신할 제 2대의 왕이 될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베들레헴에 보내어졌다(삼상 16:1). 그 후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단절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또 성경에서는 신접한 자나 무당과 접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레19:31, 20:6, 27, 신18:11)

-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31)
-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20:6)

-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18:11-12)

우리는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사울왕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다.
더욱이 사울왕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28:15)"라고 말하고 있다. 사무엘의 영혼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사울왕은 하나님 앞에 다시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왕을 섬기던 술객들도 모세와 비슷한 신통력을 행사하였다(출7:11)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될 것(마 24:25)이라는 사실은 모든 표적과 기적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특히 빌립보에서 바울이 핍박을 받게된 원인제공이 되었던 계기가 있었는데,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은 신통력이 있어서(행16:16) 바울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사로잡았던 귀신은 헬라어로 "프뉴마 피돈"(phyton의 영)으로 번역되어진다. 피돈은 델피의 신전을 지키는 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은 그 귀신을 쫓아냈는데, 그 주인은 그 귀신이 축출당하므로서 신통력이 없어져서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귀신이 축출되기 전까지 점을 치는 능력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마귀는 언제나 축출의 대상이었지만, 마귀에 연루된 사람은 은혜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마귀를 축출하셨다.
그러나 악한 영적 존재들에게 자신을 위탁하는 것은 하나님께 중대한 범죄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울왕은 마지막까지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의 근거를 쌓았던 것이다.


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물음(삼상28:1-19)

 

[1-2절]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참으로]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에게 어려운 시험이 왔다. 실상 그가 블레셋으로 내려간 것이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가 어떻게 자기 민족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한 번 잘못된 길에 발을 디디면 또 다른 시험거리가 오는 것 같다.

 

[3-7절]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담력을 잃게 된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사울이 여호와께 간구했으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우림’은 대제사장의 에봇에 넣는 물건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신 것은 그가 범죄함으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사울이 자신이 전에 그 땅에서 추방한(9절)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울은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두려워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고 이제 또 다른 죄, 더 큰 죄를 짓고자 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귀신에게 묻는 것은 제1, 2계명을 범하는 참으로 큰 죄악이다.

 

[8-11절]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사울은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밤에 그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 일이 위법임을 알았고 양심적으로도 잘못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변장했고 밤에 그 신접하는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에게 신접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올리기를 요청했다. 그는 여호와로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을 하였다.

 

[12-14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신접술은 악령들의 활동이다. 악령도 제한적으로 신기한 일들을 행한다. 그는 악령의 감동으로 사울을 알아보았고 한 신적 존재를 불러 올렸다. ‘신’이라는 원어(엘로힘)는 ‘신들’(KJV)이라는 말로서 ‘한 영’(NIV)이나 ‘한 신적 존재’(NASB)를 가리킬 것이다.

 

[15-19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본문은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고 그의 말을 대언하였다고 표현한다. 본문은 ‘사무엘이 . . . 이르되,’ ‘사무엘이 가로되’라고 표현하고(15, 16절), 또 그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그 다음날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19절). 또 20절에서도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그 여인이 불러 올린 자가 진짜 사무엘인가? 본문의 표현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견해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빛 아래서 우리는 이것이 악령의 활동이었다고 본다.13)

 

매튜 풀은 그 이유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말한다.

첫째로,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로,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인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로,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로,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회개에 있다. 사울에게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으나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둘째로,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죄인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럴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영적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사울이 만난 죽은 사무엘의 정체(삼상 28:8-19)에 대하여

 

1. 이 사건의 배경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수넴에 진을 치자(삼상 28:4) 사울은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다. 사울은 유독 블레셋 군대에 대해서만은 심리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았을 때 벌어진 첫 번째 전쟁 때문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왔었다. 처음 전쟁을 치러야 했던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막강한 위용 앞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사무엘 대신에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일로 사무엘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던 일이 있었다(삼상 13장). 이때부터 사울은 지금까지 블레셋 군대만 보면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특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오히려 사울은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의 군대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군대라는 개념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사실 사울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보다는 다윗을 뒤쫓는 일에 더 익숙해 있었다. 때문에 다시 블레셋 군대 앞에 서게 된 사울은 그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초월적인 힘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삼상 28:5).

 

이미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세속 국가의 왕과 같이 힘의 우위에 따른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사울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보다는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군사력을 의존하고자 했으나 사울의 군대는 블레셋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약체였다.

 

사울은 여호와께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여호와는 사울에게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삼상 28:6). 사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사울은 급박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추방한 신접한 자들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이 사건의 전개

 

마침 사울의 눈을 피해 엔돌에 피하고 있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낸 사울은 황급히 찾아가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였다. 신접한 여인은 이스라엘 왕의 준엄한 법령을 두려워하며 술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사울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신접한 여인은 그 사람이 이스라엘 왕 사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낸 후에 그가 사울임을 알게 된 것처럼 행동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이 불러 낸 사무엘의 음성을 통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일로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고 기력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사울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사울이 만난 죽은 사무엘의 정체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만난 인물이 과연 사무엘이었는지 본문은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사무엘을 불러낸 후에야 갑자기 사울의 정체를 안 것처럼 놀라워 한 것(삼상 28:12)과 이 여인이 땅에서 올라 온 신을 사무엘이라고 단정한 것은 사울이 마치 극적으로 사무엘을 만나게 된 것처럼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사울은 그의 정체뿐 아니라 그 존재조차도 전혀 볼 수 없었다. 오직 신접한 여인의 설명을 통해 그 존재가 사무엘이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죽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죽은 나사로의 비유일 것이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한 번 죽었던 사람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도 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눅 16:26).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나가 지옥의 실상을 친척들에게 알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케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는 아무리 사울이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울의 장래를 보여주기 위해 구태여 죽은 사무엘이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사울 앞에 나타날 필요성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준다.

 

또한 사울의 장래에 대해서는 이미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구체적으로 예언한 바 있다(삼상 13:13-14; 15:22-26). 또한 사울은 의로운 다윗을 핍박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보복하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다(삼상 24:12). 그리고 사울의 행위로 인하여 여호와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삼상 26:19). 따라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의 술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술법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고자 한 것은 블레셋 군대를 보는 사울이 극도로 나약한 심적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아니며 사무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사울은 오로지 신접한 여인의 말에만 의지하여 그 존재가 사무엘이라고만 여겼던 것이다. 사울은 이미 신체적으로 매우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신접한 여인의 묘사한 내용을 판단할 기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삼상 28:20).

 

그렇다면 신접한 여인이 불러내었다고 주장하는 ‘죽은 사무엘’의 정체는 결코 죽은 사무엘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 접신의 상태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울에게 한 말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울뿐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리 새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이처럼 신접한 여인뿐 아니라 귀신까지라도 사울의 종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 이 사건을 기록한 기자의 의도

 

이 사건에 대하여 사무엘서 기자가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사울의 반신국적인 행위와 여호와에 대한 불신앙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더불어 사무엘서 기자는 심지어 신접한 여인의 입을 빌어서라도 사울이 버림을 받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사무엘서 기자는 사울의 죽음과 더불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시점이 가까웠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결코 죽었던 사무엘이 신접한 여인의 술법을 통해 이 세상에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그 어떤 형체와 방법으로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죽은 사무엘이 정말 나타났을까?

 

 

인간은 늘 죽음 앞에서 패배한다. 현대 과학조차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조그만 실마리도 여전히 찾지를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 W. B. 예이츠는 '사람이 죽음을 창조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죽음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히 9:27)고 했다. 즉 이 심판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같은 상식을 무너뜨리는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죽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와 사울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사무엘 상 28장에 나오는 이 엔돌(Endor)의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장면은 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다. 학자들 간에도 일치된 견해가 없고 그 해석이 갈라지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난해구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사울은 하나님이 금한 강신술(降神術)을 활용하는 큰 죄를 범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강신술, 강령술, 마법사, 점쟁이, 신접한 자들의 행위에 대해 무섭게 경고한다(신 18: 9-12; 출 22: 8-18; 레 19: 21-26, 31; 20: 2, 27; 26:2; 렘 27: 9-10). 따라서 사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행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 선지자로 예언 은사를 받았다 주장하며 예수 이름으로 점치는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행위는 전혀 성경이 말하는 예언 은사가 아니다. 사울만도 못한 유사(類似) 강신 행위나 점치는 일들을 벌이는 자들일 뿐이다.

 

둘째 죽은 사무엘은 신접한 여자의 능력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고 자신이 스스로 놀라 큰소리를 질렀다. 신접한 여인은 설마 사무엘이 정말 나타날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놀라 큰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신접한 여인의 능력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들 앞에 나타난 사무엘은 과연 누구였을까?

먼저 이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사무엘의 모습이었다.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1) 성경은 그 모습이 분명 선지자 옷을 입은 노인처럼 겉옷을 입은 선지자 사무엘이라고 말한다(삼상 28: 12-14절).

(2) 사울도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14절).

(3) 또한 사무엘도 어찌하여 자신을 불러 올려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고 책망하는 장면이 있다(15절).

 

그렇다면 이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정말 참된 죽은 사무엘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강신술은 성경이 금하는 큰 죄악이다.

따라서 신접한 여인의 강신술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신술이든 유사 강신술이든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행위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일차적 경고이다.

 

(2) 그렇다면 사무엘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닌 이상이나 환상으로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이상이나 환상이었다면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요 허용하신 경우라 할 수 있다.

 

(3)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을 신접한 여자가 불러올릴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사무엘상 28장의 모든 정황은 신접한 여인과 사울이 스스로 속은 속임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소장, 조직신학 Th. D.)


사무엘의 영이 어찌 정확한 예언을 하는가?

(삼상28:8-19)

이스라엘이 초대 왕 사울은 그 통치 초기에는 사사이며 선지자인 사무엘의 도움으로 외침을 막아내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심을 드러내며 불순종하였고, 이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을 부으셨다. 이때에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삼상16:14, 18:10, 19:9)하였다. 그 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고 사울은 이때부터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삼상18:12)는 것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의 사울의 생애에는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사울에게 선지자의 목소리를 발하던 사무엘마저 죽고 말았다(삼상25:1)


그때에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 사울은 두려움에 떨림으로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라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삼상28:6)셨다. 이에 사울은 신하들과 함께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나섰다. 사실 사울은 이 일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접한 자나 박수는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과 그들을 믿고 추종하면 부정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레20:27, 레19:31). 그래서 그는 일찍이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켰었다.(삼상28:9) 그런 그가 이제 스스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신접한 여인에게 술법으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청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이때 술법으로 올라온 사무엘이 과연 누구냐이다.
만일 그가 거짓 사무엘이라면 그가 하고 있는 대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냐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여전히 여호와를 높이고 있고 또 사울의 운명에 대한 그의 예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술법으로 불려 올라온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이 군급하여 자리를 불러 올렸다는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네게 묻느냐”(삼상28:16)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사울이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은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정확하게 언급한 후에,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29:19)고 하며, 그들이 당할 운명을 정확히 예언하여 주었다.

 

이렇게 불려 올려진 사무엘의 말이 여호와의 주권을 여전히 높이며 사울의 이전의 행위와 미래의 운명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면 그는 진짜 사무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 사무엘은 결코 진짜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통하지 않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기별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무엘이 아무리 신령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신접한 자에게 묻고자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사8:19)고 하셨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전9:5)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대상10:13,14)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무엘은 강신술에 의해 사무엘의 탈을 쓰고 나타난 사단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울의 범죄와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범죄의 사실들을 가장 정확하게 나열할 수가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죄악의 내용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전하는 기별이 무조건 하나님의 기별일 수는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별은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이 가짜 사무엘이 전하는 기별은 사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낙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랑의 호소와 회개의 기대가 없이 정확한 내용으로 사울을 절망하게 한 것 자체가 바로 사단의 목소리란 증거가 된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1) 사무엘의 환상은 사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
2) 사무엘의 환상은 사탄이 보여 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경우였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임수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사울과 신접한 여인 (삼상 28:7-8)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삼상 28:7-8)

사울은 긴박했던 불레셋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 대한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에봇은 가버렸고 꿈과 우림과 선지자들은 침묵하였다. 이것은 다윗의 많은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삼상 22:10-13, 15; 23:2, 4; 30:8; 삼하 2:1, 5:19, 23). 절망의 상태에서 사울은 비록 그 자신이 그런 일을 금했었으며 비록 그가 요구한 죽은 자의 영은 그에게 벌을 주는 사람이었던 사무엘이었을지라도 강신술에 의해 장래를 알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그녀로 하여금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고 그의 조언을 듣게 된다. 이런 행위는 사실상 성경의 여러 곳에서 금한 것이었다. 신명기 18:9-12에서는 9개의 혐오스러운 죄의 목록 안에 이런 강신술도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조적인 것이었다. 출애굽기 22:8에서는 마술사를 살려 두지 말라 하였다. 레위기 19:21, 31 그리고 20:2, 27에서는 강하게 신접한 자나 점쟁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를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대적하시며 그런 일을 하는 자를 죽이라 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실제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릴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울의 출현은 문자적이 아니고 단지 심리적 인상의 산물이었는가? 아마도 그것은 귀신이나 사단 자신이 사무엘을 가장하였거나 전체가 사울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전통적인 주석가들은 여기 떠오른 사무엘의 환상은 사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1. 역대상 10:13-14에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라고 하였다.
2. 여기 신접한 여자가 강신술에 의해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것이 아닌 것은 사무엘의 모습을 보고 신접한 여인이 놀라 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사무엘이 나타날 줄은 기대하지 못했었다.
3. 그 모습이 선지자의 옷을 입은 분명한 사무엘이었다(14절)
4. 사울이 사무엘 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14절)
5.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15절)고 한 말은 분명 사무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는 책망이었다⑴.

이렇게 볼 때 여기 나타난 모습은 분명 사무엘 이었을 것이다. 다만 성경 본문만으로는 그 모습이 정말 몸을 가진 육신으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결론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신접한 여인이 한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신은 죽은 자의 영으로 보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다만 그것이 신접한 여자로부터 온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길을 고집 하는 왕에게 말씀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방편이었다⑵.

심리적인 인상이나 영향의 결과로 보는 해석은 신접한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란 사실과 그녀가 사무엘만 아니라 사울과 대화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동의하기 어렵다.

사탄을 통해서도 신접한 여자로 하여금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개혁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기서 사무엘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만 상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씨루스(Ephraem Syrus)에 의하면 사무엘의 모습은 귀신적 술책을 통하여 사울의 눈에 소개되었다고 보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사무엘의 유령은 전혀 역사적 배경이 없는 술사가 만들어 낸 속임수일 뿐이라고 보게 되었다⑶. 만일 본문이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경우였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임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렇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갈 때까지도 그를 깨우치시기 위해 마지막 경고를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쓰시던 자를 쉽게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하는 자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 셈이다.

이 이야기는 강령술이나 강신술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로 정죄하셨다(신 18:9-12; 출 22:18; 레 19:26, 31; 26:2, 27; 렘 27:9-10⑷.


1.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p. 164-165
2. Ibid.,
3. C.F.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II, Joshua, Judge,
I & II Samuel(Grand Rapids; Eerdmans, 1980), pp. 265-266
4. 글리슨 아쳐: 성경난제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1990), p. 245


사울이 배척당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는가?(삼상 28: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삼상 28:18)

위의 말씀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사울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울이 어긴 하나님의 명령은 물론 그가 제사장 대신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해서 제사한 것이다. 사울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은 정한 시간까지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불레셋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울의 변명이나 상황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 왕을 크게 꾸짖기를 왕이 망령되고 어리석게 행했다고 책망하고 그의 왕위가 길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면 왜 사무엘은 사울을 그렇게 크게 꾸짖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도 준엄하였는가?

우선 여기 사울이 변명하기를 그가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사무엘이 약속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시켰다. 그러나 사무엘은 약속한 기간 안에 길갈로 왔다. 그러므로 그의 항변은 잘못이다. 따라서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대신에 변명했으며, 또 자신의 실수의 책임을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다음으로 사울은 그의 제사를 드린 동기가 잘못되었다. 사울 왕이 위기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위기를 피해 보려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울은 정치와 종교적인 권위의 결합은 마침내 종교적인 관행이 단지 국사의 다른 일로 사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모른다⑴. 여하튼 그는 왕으로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종교적인 권위도 행사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단지 몰라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리석은 죄였다⑵.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계명으로 말씀했다(출 24:12). 그리고 사실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나 후에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씀을 했기 때문에 그 권위에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무엘의 명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어긴 셈이었다(참고; 시 19:8; 89:31; 112:1; 119:6, 10, 19, 60, 96, 115, 131, 166, 176).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한 사무엘의 책망이나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의 빛에서 볼 때 쉽게 이해가 되는 것으로 그는 벧세메스에서 증거의 궤를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옮기다가 심판 받은 경우와도 같았다⑶.

결국 사울의 제사 행위는 위에 언급된 세 가지 죄가 다 해당된다. 그는 불법적인 제사를 드렸으며, 신접한 여자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이 받은 심판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1. The Brodman Bible Commentary, Vol.3(Nashville: Brodman, 1970), p.43
2. Joyce G. Baldwin, 1 & 2 Samuel(Downers Grove: IVP, 1988), p.105
3. John F. Walvoord & Roy B. Zuck,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Old Testament(Victor Books
1985), p.445   revdavidsuh.com


사무엘상 28장<메튜헨리>

 

●블레셋이 걸어온 싸움(사무엘 상 28:1-5)

Ⅰ.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치고자 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계획이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결심하였다(1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일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따위는 남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이때쯤에서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험은 말끔히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의 모둔 군사들 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는 다윗을 그들의 편에 끌어들이자, 이러한 계획을 획책하였다.

 

Ⅱ. 이 싸움에서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를 도와 주기를 기대하였고 다윗은 그가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도록 아기스를 격려하였다. "너와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라고 아기스는 다윗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여 주었으니, 나는 너에게 나를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아기스는 가는 곳 마다 성공을 거둔 다윗과 같은 사람을 옆에 데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참 잘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일이 어떻게 되는가 살펴보겠읍니다. 앞으로도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2절).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나로 하여금 선택할 시간적 여유를 주시면 내가 어떤 자리에 서는 것이 왕을 가장 잘 돕는 길인가를 생각해 보겠읍니다." 이처럼 다윗은 아기스의 기대를 딱 잘라 버리지는 않으면서도 그를 꼭 돕겠다는 약속에 자신을 얽매여 놓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기스는 다윗의 말이 자기를 꼭 돕겠다는 말로 이해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의 호위대장, 보호자, 또는 나라의 재상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Ⅲ. 양쪽 군대가 광야에 마주 대하여 진을 쳤다(4절). "블레셋 사람은 수넴에 진을 쳤다." 그 곳은 잇사갈 지파에 속한 땅이며 그들의 나라로부터는 훨씬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땅은 전혀 무방비 상태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땅의 심장부까지 유유히 행진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다윗을 쫓는 동안 그의 백성들을 알몸둥이로 내버려 두었다. 사울은 그의 군사들을 길보아의 근처 산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준비는 하였지마는, "여호와의 신이 그를 떠났으므로" 싸울 마음은 전혀 없었다.

 

Ⅳ. 사울은 크게 두려워 떨었으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는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자신의 견해와 그리고 정탐꾼들이 가져온 보고에 따라서 그들의 수가 월등히 많고, 무장을 잘 갖추었고, 그리고 매우 용기들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 (5절). 그가 만일 하나님과 가까이 하였다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떨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시게 하였기 때문에, 그의 힘이 약해졌고, 그의 군대의 수도 감소되었으며, 보잘 것 없는 모양이 되었고, 더우기 그 자신의 마음도 심히 낙담하였고, 그의 죄에 물든 양심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떨게끔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가 살려준 아말렉 사람의 죄로 물든 피와 그가 죽인 제사장의 무죄한 피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의 죄가 눈앞에 늘어서서 그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고, 그의 생각이 혼미해지게 하고, 그의 모든 용기를 빼앗아 갔고, 그의 마음 속에 심판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낳게 하여 주었다. 재난은 불충한 자녀들에게 두려움이 된다.

 

이러한 근심 속에서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다" (6절). 그들이 번영할 때 하나님의 지성소와 그의 제단을 경시하였던 사람들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 하였나이다" (사 26:16). 그런데 어떤 인간이 여호와를 찾았는데 그를 만나지 못한 일이 있는가? 그렇다. 사울은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의 청원도 그리고 그의 요구도 괘념치 않으셨고, 그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지시하여 주시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조차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넣어 주시지 않으셨다. 사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겔 14:3) 그럴 수 없다. 그는 좋은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1.사울은 전혀 "묻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대상 10:14). 사울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물음에 대답지 아니 하시면 악령에게 의논하기로 은근히 뜻을 정하고, 희미하고 냉담하게 물었던 것이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묻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물었다.

 

2. 사울이 너무 때가 늦게서야 여호와께 물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련의 때가 이미 지나고, 그를 버리기로 결정을 내린 뒤에야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를 만날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3. 사울에게 주어졌던, 물을 수 있는 은총이 몰수된 뒤에 물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지자였던 사무엘과 다윗을 증오하고 핍박하였는데 어떻게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대답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대제사장을 죽인 그가 어떻게 우림을 통해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또 은혜의 영에게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꿈을 통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갈 6:7).

 

Ⅴ.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벌써 오래 전에 있었던 두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사무엘의 죽음에 관해 언급하였다. 사무엘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담대한 마음과 사울에게는 보다 두려운 마음을 주었다. 사무엘이 살아 있다면 그의 돌봄과 그의 좋은 충고와 그리고 그의 귀한 기도가 재난 중에 있는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사울은 생각했을 것이다.

 

2.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 내었던 포고에 관한 언급이 있다. 사울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되는" (출 22:18) "신접한 자들" 을 쫓아내는 법을 공포한 일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울이 사무엘의 영향을 받던 그의 통치 초기에 이런 법을 공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최근에 공포된 포고 모양으로 언급된 것을 보아서(9절) 그것이 최근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울은 그가 악령에 의해 시달림을 받을 때, 자기가 신들린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신접한 자들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죄로부터 어떤 해를 자기 자신이 받을 때는 열심을 내서 그 죄를 미워한다(사람들은 욕하는 자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이 욕을 먹을 때 그들을 고발하며, 술취한 자들로부터 자기가 행패를 받아야만 그 술취한 자를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거나 죄 그 자체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간 사울이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을 억제 하였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속에 있는죄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잘 보아 주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기를 돋운다. 사울은 그의 왕국으로부터 악령을 쫓아내고자 하면서도 질투와 적의심을 품은 채 자기의 마음 속에 모셔들이고 있었다.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사무엘 상 28:6-14)

Ⅰ.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7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실 때" 만일 그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회개하며,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늘을 쳐다 보아도, 그리고 땅을 굽어보아도 위로를 받을 길을 찾지 못하자(사 8:21, 22), 그는 지옥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하였으며, 누구든지 자기 편이 되어 자기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고 사울은 말했다(7절). 그리고 그의 신하들은 사울이 악을 행하는데 지나치게 그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즉시 사울의 포고를 피하여 (거기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엔돌에 숨어 있는 한 여자를 추천하였다. 사울은 그 여자에게 가서 물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잘못들을 찾아본다.

 

1.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고, 그를 싫어 하시는데도, 다른 피조물은 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모순된 행동을 취하였다. 그는 무당들의 죄가 극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신접한 자들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건마는 이제 그는 한때 그가 가증한 것이라고 선고한 것을 다시금 귀한 것이라고 의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이 어떤 죄에 빠질 유혹을 받지 않고 있을 때는 그 죄에 대해 무섭게 욕설을 퍼붓는데, 나중에 그들이 그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사울이 무당들을 한참 죽이고 있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가 오래지 않아 그런 무당 중의 하나에게 그 자신이 물어 볼 때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사울은 하사엘이 말한 것과 같이 "무어! 내가 개란 말이냐?" 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Ⅱ.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단 말을 듣자 사울은 즉시 그 여자에게로 갔다. 그런데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하고 다만 두 사람이 시종을 데리고 갔다. 아마 걸어 갔을 것이다(8절).

 

1.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가를 보라. 사울이 자기의 운명을 한갖 가련한 무당에게 물어보려고 갔을 때처럼 비참하게 보일 때는 일찌기 없었다.

2. 또 얼마나 자신의 일을 숨기게 되는가를 보라. 악한 일은 어두움의 일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며, 빛이 있는 곳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사울은 왕의 옷을 입고 무당에게 가지 않았다. 그는 보통 군인의 차림으로 갔다. 이는 그 여자가 사울을 알아보고 그를 도와주지 않거나, 또는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온 줄로 알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사울이 그런 곳에 갔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고, 싫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낯을 붉히고 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양심이다.

 

Ⅲ. 사울은 그녀에게 자기의 용건을 말하고 그 때문에 그녀가 결코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1. 사울이 그녀에게 원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어떤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신술이었으며, 죽은 자를 불러서 자기의 목적에 이용하여 점을 치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율법에 분명히 금한 것이며(신 18:11),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사 8:19)라는 말씀으로 금하고 있는 바이다.

사울은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8절)라고 말했다. 이 말로 보아서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사후에 여전히 영혼이 생존하고, 그리고 인가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서 끝장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한 영이 악령의 지시에 따라 올라 온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구로 쓰기에 합당치 않다고 거절한 사람이 마술적인 방법으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다.

 

2. 그 여자는 법이 두렵다는 뜻을 밝혔고, 또 이 사람이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온 것이 아닌가고 의심하기도 했다(9절). "네가 사울의 행한 일을 알지 않느냐?" 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울로 하여금 바로 그런 무당에게 가서 물어보는 그 시간에, 무당들을 없애라고 하였던 그 포고에 관해 이야기를 듣게 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그의 죄가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그 법이 매우 무섭다고 말한 것은 아마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여기에는 그녀에 대한 보수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마는,그 여자는 틀림없이 비싼 대우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사울의 포고 때문에 오는 위험을 깨닫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조심히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그 진노가 무섭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사울" 이 한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마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고, 그녀는 자기의 영혼보다는 육신의 생명을 노리는 올가미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로부터 받는 형벌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받는 형벌보다 더욱 무서워 한다.

 

3. 사울은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로써 약속하였다(10절). 그런 여자를 처벌하는 것이 왕인 그의 책임이었으며, 사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건마는 그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자기가 꼭 하여야 할 일을 자신의 맹세로써 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 양 행동하였다.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고 사울이 약속하였는데 이는 그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 것이었다. 자기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보복을 스스로도 막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Ⅳ. 사울이 영혼을 불러 올려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최근에 죽은 사무엘이었다. 그리고 무당은 마술을 써서 사울의 요청을 만족시켜 주었으며, 두 사람이 함께 있게 하여 주었다.

 

1. 무당이 원하는 안전의 확신을 사울이 그녀에게 주자 (다시 말해서 사울이 그를 결코 찾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만들어주자) 그녀는 마술을 쓰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가지고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라고 물었다(11절). 벌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은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 담대히 악을 행하게 하고, 그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

 

2. 사울은 사물엘과 말하기를 원했다. "사무엘을 내게로 불러 올리라." 사무엘은 자기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며, 전에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며, 자문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의 충고를 듣고 싶었다. 사무엘이 사울이 있는기브아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라마에 살고 었으며, 거기서 선지자의 학교를 운영하였건마는, 그가 어려움릉 당하면서도 사무엘과 의논하기 위해 거기에 찾아 갔었다는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그가 만일 찾아 갔었다면 문제가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 때 사울은 사무엘이 다윗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서, 그를 오히려 멸시하였고,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이 죽자 "오 다시 한 번 사무엘을 보았으면!" 하고 그를 애타게 부르게 되었으며, 모든 수단을 다 써서라도 "사무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 올리고자"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살았을 때는 멸시하고 박해 하다가도, 죽은 뒤에는 그런 분을 다시금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죽어서 음부에 내려간 부자는 "나사로를 내게 보내 주시고, 그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라고 외쳤다(눅 16:24-27).

 

3. 여기에는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고 말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이어진 말은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라고 되어 있다(12절). 거기에는 여인이 어떤 주문 같은 것을 외우는 그녀의 주술적인 작업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다거나 어떤 동작을 했다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을 자리였다. 그러나 이에 관한 성경의 깊은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깊은 곳을 알도록" (계 2:24) 허락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악의 신비성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 교회의 고해성사에 관해 기록한 책에 의하면 죄목을 나열하는 것을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악한 데 미련하기를" (롬 16:19) 바라서 죄짓는 법에 대해서는 감추고 있다.

 

4. 유령의 모습을 본 그 무당은 자기에게 온 사람이 사울인 줄 깨닫고 큰소리를 쳤다(12절). "왜 당신은 변장을 하고 와서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은 내가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는 사울이니이다." 이처럼 그 여자는 그가 아무리 변장을 했어도 그를 알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사울이 나중에 자기를 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 여자가 본 사람이 진정 사무엘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 여자는 악한 왕 사울보다는 선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더 두려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들의 왕이신 분의 진노보다는 땅의 왕들의 진노를 더 무서워한다.

 

5. (옆에 방에 떨어져 있던 것으로 짐작되는) 사울은 그 여자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서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었다(13절). 내가 한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라고 그 여자는 대답했다. 그들은 천사들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신들이라고 불렀다. 가련한 신들이 "땅에서 올라온다" 는 것이다. 그 여자는 지옥을 신성시하고 그들을 존경하는 이교도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만일 사울이 사무엘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사무엘의 시체가 있는 라마로 무당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사무엘을 불러 내게 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계획은 전적으로 그의 영혼이 육체를 닮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이런 계획에 응답해 주기 위해 사탄으로 하여금 사무엘의 형태를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셨고 거짓을 믿게" 만들어 주셨다.

 

사무엘의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고 말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사무엘 자신의 영혼이 아니란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혼" 더우기 의인의 영혼은" 위로 올라 가기 "때문이다(전 3:21). 그런데도 사람들이 속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속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악마가 사무엘을 가장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번 경우에 사울이 악마에게 물어봄으로 실망에 빠지게 하기 위해 악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만일 사울이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께 물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를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 땅에서 올라온다는 말을 듣자, 그 신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올라오고 있는지 묻기에 바빴다. 그는 조금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에 의해 완전히 강퍅해지고 있었다." 사울에게는 극유령의 형태를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적으로 그 여자의 말을 의지할수 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고 하였다. 사사들에게는 이런 겉옷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 사무엘도 때로 그것을 입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모습때문에 그여자가 그 유령을 보고 한 신(또는 신들 -Elohim)이라고 하였다고 본다.

 

6. 사울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사울이 비록 사무엘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보통 하는 대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렇게 했든지 또는 그가 듣고자 원했던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을 듣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신접한 자가 부리는 마귀의 음성은 지절거리며 속삭거리는 음성이다. 사 8:19). 그리고 사울은 속살거리는 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아마 무당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를 부리는 자의 음성은 "땅에서 나며, 말 소리가 티끌에서 지절거리기 때문이다" (사 29:4).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인다.


사울의 죽음 예언(사무엘 상 28:15-19)

여기에는 사울과 사탄과의 회담이 나왔다. 사울은 변장하고 왔다(8절). 그러나 사탄은 즉시 그 정체를 발견했다(12절). 사탄은 사무엘의 외투를 걸친 변장한 모습으로 왔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점이 "이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자" 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불리한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궤계와 책략을 잘 알지 못한다.

 

Ⅰ. 사무엘로 가장한 유령 또는 망령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불렀는가고 물었다(15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이 말에서 우리는 그가 사무엘을 가장한 악령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패트릭 주교가 보는 바와 같이) 무당은 의인들의 안식을 분요케 할 수 없으며 그들의 마음대로 의인들을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참 사무엘이라면 그런 마술적인 주술력에 굴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있어서는 사탄의 계략이 꼭 들어 맞았다. 사탄의 계략은 그를 꼭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Ⅱ. 사울은 가짜 사무엘을 진짜 사무엘인 줄 착각하고 그에게 자기의 한탄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의 한탄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심히 급급 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는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표만 있다면 그들을 잘 막아낼 수 있겠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읍니다."

 

사울은 그가 재난을 당하기 전, "블레셋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신 사실을 한탄하지 않았다. 그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을 탄식하였다. 자기들의 형편이 잘 될 때 하나님께 묻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물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며,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그들에게 응답하시지 않으시며 또 하나님 자신이 직접 대답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그의 사자들을 보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다.

 

사울은 참회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의로의심을 시인하지 않고, 화가 난 사람 모양으로 하나님이 불친절하고 그에게서 떠나 버렸다고 하며 달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싫어 버린 자를 선대하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죽은 선지자가 살아 있는 선지자보다 더욱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비록 사무엘의 이름을 대기는 했지마는) 실은 하나님보다는 다른 데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대적인 악마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께 왔나이다." "만일 내가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나는 지옥을 움직이겠다" - Flectere si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

 

Ⅲ. 사무엘의 겉옷을 걸친 악령은 사울에게 차디찬 위로를 주었으며, 사울로 하여금 절망하고 자살 하도록 이끌어 가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참된 사무엘이었다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 사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고 다윗을 다시 불러서 일을 맡김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얻도록 힘써 보라고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이와 정반대로 사울의 경우가 절대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행한 것과 똑 같이 사울에게도 대하여 주었다. 사탄은 가룟 유다를 먼저 유혹하였고, 다음에는 그를 괴롭혔다. 먼저는 가룟 유다로 하여금 그의 스승을 팔게 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목을 매달게 만들었다.

 

1. 그는 먼저 사울의 현재와 재난을 비난하였다(16절).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이 되셨다고 하였고,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좋은 응답을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하나님이 너의 원수가 되셨거늘, 내가 어찌 네 편이 될 수 있으며, 너를 떠나셨는데 내가 어떻게 너의 의논 상대자가 되겠는가?"

 

2. 그는 다윗이 나라를 이어받도록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여 사울을 비난하였다(17절). 아마 이 이상 사울의 귀에 불쾌하게 들린 소리는 또 없었을 것이다. 다윗과 화해하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윗에 대해 더욱 분격하게 하고, 더욱 불화하게 하는 말만 하였다. 한편 그 망령은 자기가 사무엘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단언하였다. 악마는 자신 있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거짓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도로 꾸미고" 그들의 용어를 흉내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주문에는 좋은 말만이 들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좋은 말 뒤에 악독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3. 그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를 비난하였다(18절). 그 죄에 대해서 사무엘이 사울을 회개시키고자 했을 때, 사탄은 사울로 하여금 그죄를 변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그 죄가 지극히 크다고 말했다.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 자가 무엇을 얻게 되는가를 보라. 사탄 자신이 비난자가 되어 그들을 모욕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꾀는 자들은 누구를 닮았는가 보라.

 

4. 그는 사울의 멸망이 가까왔다는 것을 예언하였다(19절).

(1)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두 번씩이나 언급되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사탄은 블레셋의 강한 힘과 엄청난 숫자를 보고, 한편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사울의 두려움 그리고 더우기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을 볼 때 능히 이런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선지자를 가장하기 위해서 이를 다시금 하나님과 결부시켜서 예언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리라."

 

(2)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이 싸움에서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였다. "내일" 다시 말해서 가까운 장래에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였다. 이 말은 죽는다는 말이요,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게 되리라는 말이다. 이것이 만일 진짜 사무엘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는 한 그런 일을 예언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가 악령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악령을 통해서도 예언을 하실 수 있다. 우리는 한 악령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이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그를 멸망시키는 방편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왕상 22:20 이하). 아마 그 악령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울을 파멸시켰을 것이다. 아합을 충동하였던 그 악령이 사울을 위협하였고 그 두 사람을 모두 쓰러 뜨렸을 것이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 아래 놓인 자들은 가련하고 불쌍하다. 왜냐하면 그가 "노하든지 웃든지 다툼이 그침이 없기" 때문이다(잠 29:9).


사울의 낙담(사무엘 상 28:20-25)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유령으로부터 그런 무서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볼 수 있다. 사울은 "그가 어찌할 바" 를 듣기를 원했다(15절). 그러나 그에게 들려진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방법 외에 어떤 자문이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여기에 나타난 사울처럼 실망하기가 쉽다.

 

Ⅰ. 사울은 무거운 짐에 억눌리게 되었다(20절). 사울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버티고 들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진영에서도 그렇고, 계속 밥을 먹지 않았다.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입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세력을 두려워하는 그의 두려움(15절)이 그의 입맛을 가시게 하였으며, 무당에게 가서 물어 보고자 마음을 정한 이후에 그를 엄습한 양심의 괴로움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보고도 욕지기가 나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무장한 군인처럼 그를 엄습해 온 새로운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의 화살이 그를 꿰뚫은 것 모양으로 사울은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졌으며", "그는 기력이 다하여" 그 침울한 소식을 그대로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사울은 이제 더 이상 무당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서 좋은 위로의 말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무서운 공포의 말씀을 주시며 그와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의 문도 아울러 열어 주신다.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은 거기서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이 있는 줄로 안다.

 

Ⅱ. 신하들과 무당 여인이 사울을 강권하여 떡을 먹여 기운을 차리게 함으로 사울을 자기 진영까지 돌아가게 하였다. 무당은 사울이 직접 그 유령과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도록 그 자리를 피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 사울이 넘어지며 신음하는 소리를 그 여자가 듣고, 그가 크게 괴로와 한다는 것을 알고 사울에게 달려 왔을 것이다(21절). 그리고 그 여자는 사울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고 자기 집에서 어서 떠나가게 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 만일 사울이 거기서 병이 들거나 더우기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당짓 때문에는 이미 형벌 받는 것을 피해 놓았지마는, 이 때문에 배반자라는 이름으로 벌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사울을 도와준 것은 어떤 친절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잘못된 위로를 구하려다가 더욱 비참한 꼴이 되었다.

 

1. 그 여자는 사울에게 기력을 차리게 하여 주기 위해 애썼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왕의 말을 청종 하였으니만큼, 왕도 이제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며 사울에게 강권했다(21,22절). 그 여자에게는 살진 송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글자 그대로 보면 그 송아지는 곡식을 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송아지를 잡으면 손해가 많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 송아지를 잡아 음식을 장만하였다(24절). 조세푸스는 그 여자의 예절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크게 칭찬하였으며,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지 못할 일에도 이 여자처럼 신속히 재난당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한바가 있다.

 

2. 사울은 음식 먹기를 싫어하였다. "사울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23절). 그는 명예롭게 칼에 맞아 죽기보다는 명예롭지 못하게 굶어 죽는 길을 택하고자 하였다. 만일 사울이 기력만이 부족하여 그렇게 애쓰는 것이었다면 음식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양심에 아무리 맛좋은 고기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신 김치에 초를 치는 것이나, 침울한 마음에 노래를 불러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3. 그 여자는 드디어 사울의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사울을 설복하여 기력을 차리게 하여 주었다. 그들은 억지는 아니지만, 다정스런 충고를 통해 사울을 강권하였다(23절). 이런 예의 바른 강권을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종들에게 주인이 말하기를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눅 14:23). "옳은 말은 유력한 것이어서" (욥 6:24). 사람들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사울은 그 음식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신하들이 음식을 먹고, "일어나서 그 밤으로 갔다" (25절). 그들이 그 밤으로 간 것은 가서 할 일을 빨리 하기 위한 점도 있었으나 그런 소문이 날 만한 집에 갔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세푸스는 여기서 사울의 용기와 넓은 도량에 감탄하였다. 즉 사울은 이제 곧 생명과 명예를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군대를 버리지 않고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가서 블레셋과 싸울 차비를 차린 점을 감탄하였다. 나는 오히려 그의 마음의 강퍅함에 더 놀란다. 이런 경우는 적어도 그 형벌이 잠시 유예되기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함직한데, 그는 오히려 더 멸망으로 달음질쳤다. 아마 이때 사울의 격노와 시기가 최고에 달했으며, 다윗에게 친절을 베푼 것 때문에 그가 몹시 화를 내고 있던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운명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는 자기가 죽는 다면 그의 가족이나 왕국이 그 후에 어떻게 황폐하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 VEmou/, Qano,ntoj, ga,ia, micqe,tw, puri, "내가 죽는다면 그 후에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든지 나는 상관 않겠다." - 는 태도였다. 그는 다윗처럼 "당신의 손을 내게 댈지언정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대지 마소서"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무엘상 28장 주석

 

성 경: [삼상28: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ꃨ 블레셋...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 여기서 `블레셋'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한 그들 모든 족속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의 연합군에 의해 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8; 29:2, 3).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벤에셀 전투)(4:1-11)이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전한 데 대하여 일대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14;52; 17:50-53; 18:6,30)


ꃨ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 이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그로서는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같은 일을 위하여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채 다윗을 자신의 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27:6, 12). 더구나 아기스는 이미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함으로써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27:10, 12)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ꃨ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 이 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다윗의 애매한 답변이다. 다윗이 이같이 애매한 답변을 한 까닭은, 그는 아기스의 요구대로 자신의 동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들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를 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 저자는 이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다윗이 극도의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ꃨ 그러면 내가...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의 애매 모호한 답변을 (1) 그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2) 그리고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머리지키는 자'는 `경호 대장' 또는 `시위 대장'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전사(戰士) 다윗이 한낱 이방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적 결과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전적 의뢰하여 조국 이스라엘 땅을 끝까지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따라서 당장 목전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윗이 우상의 나라 블레셋 땅으로 스스로 찾아든 것은,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창 12:10-20).

성 경: [삼상28: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사무엘이 죽었으므로...장사하였고 -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킨다(8절).


ꃨ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Smith).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18:10-14)인 바, 처음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신접한 자'(*, 오보트)에 대해서는 어원학상의 여러 이론(異論)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즉 (1) `오브'(`오보트'의 단수)를 비히브리어계의 단어 `아브'에서 온 것으로 보고, 어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혹은 유령이라는 해석(Hoffner), (2) `오브'를 어원학적으로 `조상' 및 `아버지'의 의미가 있는 `아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형상' 및 `도구'라는 해석(Lust), (3) `오브'를 `가죽 부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오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귀신이 들어가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화술사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Smith), (4) `오브'를 `어리석은',`공허한'이란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우브'(*)에서 온 말로 보고,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Lange)등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견해 중 첫째, 본절의 `쫓아내었더라'(*, 헤시르)란 말은 우상과 같은 유형적 형상의 제거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왕하 18;4; 23:19; 대하 17:6; 30:14; 사 3:23) 둘째7절의 `신접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오브를 다스리는 여자'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등에서 볼 때, '오브'는 (2)의 견해처럼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미신적 도구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 사후(死後)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19;31).


ꃨ 박수(*, 이드오님) - 이것은 `알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점(占) 또는 마술 등의 방법을 통하여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자, 곧 점장이나 마술사를 가리킨다(Lust, Fay).

성 경: [삼상28: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블레셋 사람이...수넴에 이르러 - 여기서 `수넴'(Shunem)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이다(Gesenius). 그 위치는 침공해 오던 블레셋 군을 및이하여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29:1; 수 19:17, 18)의 북쪽 약 5.6km 지점으로, 바로 이 지점은 `모래 언덕(창 12;6)의 남서쪽 기슭이었다. 즉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편의 소(小) 헬몬산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Conder, Robinson). 아마도이때 블레셋 군대는 `아벡'(4:1; 29:1)에서 소집되어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동녀(童女)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하다(왕하 4:8-10).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술렘'(Sulem)이다(Eusebius).


ꃨ 사울이...길보아에 진 쳤더니 - '길보아'(Gilboa)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에 있는 길이 약 12.8km, 그리고 폭 약 8km 정도의 산악 지대이다. 그곳 중 가장 높은 지대는 해발 약 565m 정도이다. 이 길보아 산악지대의 특징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다다르며, 반면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때 사울은 바로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스르엘'(Jezreel)에 진을 쳤다(29:1).

성 경: [삼상28: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 많은 군대로 인하여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ꃨ 보고(*, 라아) - 미세한 것을 들여다 보듯이 세심하게 탐색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16:6; 23:23; 25:15; 왕하 7:13).
ꃨ 두려워서(*, 야라) - 이 말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8:29).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사울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ꃨ 떨린지라(*, 하라드) - 이 단어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의 기습 공격으로 인하여,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냈던 당혹스럽고 어쩔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4:15). 바로 이같은 단어는 사울의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13:7; 사 32:11). 아무튼 사울은 과거 대(對) 블레셋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4:21-23, 31, 47; 17:53), 금번 길보아 전투를 맞이하여 `두려워 크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엘라 골짜기 전투(17:1-3)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인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Keil, Clericus).

성 경: [삼상28: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사울이...묻자오되 - 여기서 '묻자오되'(*, 솨알)는 '요구하다' 혹은 '문의(問議)하다'란 의미로서, 사울은 이때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15:26; 16:14)을 잘 알면서도, 이처럼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블레셋 군대로 인한 사울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ꃨ 여호와께서...대답지 아니하시므로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희귀는 어느 인물 또는 어느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3:1).
ꃨ 꿈으로도 - '꿈'(*, 할롬)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때,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 20:6; 민 12:6; 단 2:4).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선지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Fay),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Erdman).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ꃨ 우림으로도 - 여기의 '우림'(Urim & Thummin)의 약칭이다(출 28:30 주석 참조; 민27:21).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23:6).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또한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대제사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추측컨대, 사울은 놉(Nob)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8,19) 이후 성막을 기브온 자기 궁성(宮城)으로 옮긴 다음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Zadok)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것 같다(대상 16:3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본래의 것을 본뜬 모조(模造) '우림과 둠밈'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사후 다윗 시대의 두 명의 대제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삼하 8;17; 15:24, 29, 35; 대상 15:11; 18:16). 한편 사울의 이러한 시도는 (1) 놉 제사장 학살 사건 이후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2) 자신의 측근들로 제사직을 독점하고자 한 정치적 계산 또는 왜곡된 종교적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울의 '우림을 통한 문의'에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리 만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0-261; Smith, Fay).

 

ꃨ 선지자로도 - 하나님의 대선지자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3절; 25:1). 또한 그밖의 선지자들도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13:13, 14; 15:26; 16:14)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선지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저냐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만날 만한 때에', 즉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사 55:6; 고후 6:1, 2).

성 경: [삼상28: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 - , 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ꃨ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ꃨ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성 경: [삼상28: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사울이...변장하고 -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같다(Fay).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신접한 여인이 살던 엔돌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돌'이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왕상 22:30).


ꃨ 밤에...이르러 -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ꃨ 신접한 술법으로 -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 카삼)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레 19:31; 20:27).
ꃨ 사람을 불러 올리라 -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8: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ꃨ 어찌하여...올무를 놓아...죽게 하려느냐 - 이 말은 신접한 그 무녀(巫女)가 변장한 사울을 몰라봤음을 말해 준다. 즉 이때 그녀는 사울 일행을 자신과 같은 점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죽이기 위하여(출 22:18; 레 20:27; 신 18:11) 왕의 명을 받고 그곳으로 온 왕의 사신들로 알았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판단은 (1) 이전에 사울이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3절), (2) 사울 일행은 무녀의 눈에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비록 밤늦게 방문한 낯설은 사울 일행에 대해서는 그 무녀(巫女)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그당시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통한 복술을 베풀어 유명한 무녀로 통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본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사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ꃨ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처럼, 또는 여호와께서 살아 존재하시는 한 맹세한 사항이 확실이 이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 맹세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다(25:26).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삼상28:1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ꃨ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 사울이 많은 사람 중 하필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조언자 역할을 담당했었으며(10:1; 15:1), (2) 또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7:10-12),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그때 이같이 사무엘을 부름으로써, 그로부터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8:1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즉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Henry, Grotius, Patrick), (3) 본문의 '사무엘'(*, 쉐무엘) 앞에 '이름'(*,쉠)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등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네가지의 견해 중 (1)의 견해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3)의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4)의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 무녀가 본 것은, (2)의 견해대로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ꃨ 큰 소리로 외치며...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 이같은 무녀(巫女)의 언급은, 그녀가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한 인물이 사울인 줄 몰랐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비록 사울은 거구의 소유자여서(10:23) 타인의 눈에 쉽게 띄일 여지가 많았으나, 그래도 당시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8절), 무녀의 눈에 의해서 간단히 분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때 그 무녀(巫女)는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울인줄 몰랐으나, 사무엘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가 사울인 줄 깨달았을 것이다. 즉 그 무녀는, 블레셋의 침공이 격렬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사무엘의 혼을 부를 사람은 그 전쟁으로 인하여 최악의 곤궁에 빠져있을 사울 밖에는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Keil, Lange, Klein). 더구나 그녀는 사울의 큰 키를 이미 본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3, 9절) 두려움과 공포에 차서 즉각 큰 소리를 내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왕이...이르되 두려워 말라 -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3절).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그 사울에게 목격당한 그 무당 여인으로서는 큰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절).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은 그 무녀(巫女)에게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안심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卜術) 행위 조차도 서슴없이 독려하는 자아 모순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ꃨ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 이 질문은, 그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Smith).


ꃨ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 여기의 '신'(*, 엘로힘)은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Hertzberg, Klein),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삼상28:1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그 모양이 어떠하냐 -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ꃨ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 사무엘이 83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25:1 주석참조), 사단적 유령이 이같이 '노인'의 모습으로 무당에게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ꃨ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 여기서 '겉옷'(*,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긴 망토식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출 28:4; 레 8:7; 삼하 13:18; 대상 15:27), 사무엘도 생전에 선지자의 외투로서 이같은 겉옷을 입었었다(15:27).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본 형상의 주인공이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이같은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가 사무엘임을 넉넉히 느꼈을 것이다(Hertzberg).
ꃨ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절하니라 - 이것은, 그때 사울이 사무엘의 형상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은, 그 접신녀가 '노인'과 '겉옷'을 언급한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본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사울은 무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8:1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ꃨ 나로 분요케 하느냐 - '분요케 하느냐'(*, 히르가즈타니)는 '격분하다', '진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라가즈'(*)의 사역형으로서 '안식을 방해하다'(disquit, KJV; disturb, NIV)란 뜻이다(렘 50:34). 특히 이 단어는 시돈의 왕 타브닛의 비문에서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Klein). 따라서 이 단어는 무덤을 평온하게 안식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고대 중근동의 내세관과 잘 부합된다(Klein; 욥 3:13-19; 사 14:9). 아울러 이 말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지하 세계인 음부(스올)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히브리인들의 고대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ꃨ 심히 군급하니이다 - 여기서 '군급하다'(*, 차르)는 대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당하는 커다란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24:13; 욥 6:23; 7:11). 따라서 영역본들(RSV, NIV)은 '커다란 재난에 처해있다'(be in great distress)란 말로 번역했다.
ꃨ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23:17).
ꃨ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시기로 -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6절에는 언급되어 있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을 생략한 것은 '우림과 둠밈'(Urim & Thummin, 출 28:30 주석 참조)이라는 계시 수단은 다른 것과는 달리 자신의 극심한 잘못 때문에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Talmud, Berach, Xii. 2). 즉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6절 참조.
ꃨ 행할 일을 배우려고 - '행할 일'은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책(方策)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8:1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네 대적이 되셨거늘 - 이 말은 칠십역(LXX)의 번역대로 '네 이웃의 편이 되셨거늘'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15절).
ꃨ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만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묻는 행위는 가당치 않다는 뜻의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28:1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본절의 언급에 대해서는 15:27, 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28:1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는 사울이 왕이 된 후 하나님께 불순종한 여러 사건 중 '아말렉 진멸 명령'(15:3)을 어긴 사실이 가장 치명적인 사울의 범죄 행위임을 시사해 준다. 아마도 출애굽 후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여정을 최초로 그리고 비겁하게 방해하고 적대한(신 25:17-19)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회심(會心)의 복수전을 사울이 그의 사악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ꃨ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행하셨고 - 본절은 이때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이행치 않음으로써(15:9)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15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에게 왕위(王位) 박탈 선언을 했다는 점(15:26)과 연결하여, 여기서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 더이상 앉아 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작업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붙이시리니 - 여기서 '붙이시리니'(*, 나탄)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의지로 어떤 당사자나 나라에게 확실한 승리를 부여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ꃨ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무엘처럼 '죽은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뜻으로, 곧 '죽을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네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을 사울의 세 아들, 곧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가리킨다(31:2; 대상 10:2).

성 경: [삼상28:2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사울이...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쓰러져버린 것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ꃨ 종일 종야에...먹지 못하였음이라 - 사울은 전투에 앞서 금식을 하곤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14:24). 이와 유사하게 당시에도 (1) 사울은 엔돌의 이 접신녀에게 자신이 행할 바를 묻기 위하여 (2) 그리고 엔돌로 향하는 과정에서 블레셋의 수비망을 뚫고 가야한다는 어려움을 예상하여(Klein) 일부러 금식을 하였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나 이 견해와는 달리, 먼거리를 오느라고 식사를 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은(1) 당시 이스라엘의 진지인 이스르엘(29:1)에서 무당이 거주하던 엔돌까지의 거리는불과 8km 정도(Aharoni), 즉 두 시간 거리밖에 안되며 (2) 23절에서는 사울이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먹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성립되지 아니한다.

성 경: [삼상28:2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 이같은 언급은, 그 접신녀가 사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사울은 접신녀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15절) 마치 사무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로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접신녀는 자신과 사울 사이의 시계(視界)를 흐리게 할 목적으로 향을 피웠을 가능성도 있다(Smith).
ꃨ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 여기서 '고통함'(*, 바할)은 '두려워 떨다'란 뜻이다(창 45:3; 출 15:15; 삼하 4:1; 시 6:2). 그리고 '보고'(*, 라아)는 자세하게 관찰하는 행동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같은 행동 뒤에 취한 접신녀의 태도는 국도의 공포로 떨고 고통스러워 하며, 또한 육체적 탈진으로 기력이 쇠잔해 있는 사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Hertzberg, Smith).
ꃨ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 '왕의 말씀'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는 사울의 명령을 가리킨다(11절).
ꃨ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불러내라는 사울의 명령(11절)은 초혼(招魂)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 그당시 상황으로 인하여(3절), 무녀에게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으로 들렸을 것이다(9절). 그러므로 그 무녀가 그같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1) 사울로부터 목숨 보장에 대한 맹세를 이미 받았고(10절) (2) 또한 당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통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이 자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는 마당에서, 그 무녀(巫女)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결코 생명을 건 모험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라는 무녀의 말은 자신의 공을 자찬(自讚)하는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8:2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본절에 언급된 무녀의 행동은 사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접신녀의 이같은 동정도 사울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는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을 결코 제거할 수는 없었다.

성 경: [삼상28:2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 이것은 당시 만사가 귀찮은, 그리고 거의 자포 자기의 상태에 있는 사울의 탈진한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해 준다.
ꃨ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낙담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수습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따라서 사울은 지금까지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침상'(*, 밋타)은 방의 벽을 따라 길게 배열된 푹신한 긴 의자를 가리킨다(Keil, Thenius, Smith).

성 경: [삼상28:2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살진 송아지...잡고 - 이것은 사울에 대한 무녀의 정성이 극진했음을 잘 시사해 준다(창 18:7; 눅 15:23).
ꃨ 무교병 - 이것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으로, 급히 장만할 수 있는 음식이다(출12:8, 15-20). 이때 그 무녀는 보다 먹기 좋은 유교병은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성 경: [삼상28:2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그 밤에 가니라 - 날이 밝을 경우 (1) 블레셋 군대에게 발각될 위험과, (2) 그리고 블레셋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같 이급히 서두렀을 것이다(Klein). "실로 사울은 자신과 아들들과 백성들의 죽음과 패배를 괴로워하고 슬퍼하기에는 그 양심이 죄로써 너무 둔감해져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그의 강퍅한 심령을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맞으러 갔다. 즉 한때 여호와의 신이 임했으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는 축복을 누린 자 - 사울은 이처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으로 간 것이다"(O.V. Gerlach; 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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