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계시록을 읽는 태도
요한계시록은 일반 성도들에겐 신비하고 두려운 책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기도 하고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열쇠를 찾기 위해 수수께끼를 풀 듯 연구하기도 한다. 마치 신비한 암호가 이 책에 들어 있고 미래 사건들에 대한 시나리오가 들어 있기나 한 것처럼 이 책을 대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시록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 그저 무서운 책, 알기 어려운 책으로만 생각하고 덮어 버려야 할 것인가?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이 요한계시록은 주석하지 않고 남겨 두었듯이 우리도 그냥 덮어두는 것이 경건하고 옳은 태도일까? 아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다. 여기서 ‘계시(apokalypsis)’란 ‘베일을 벗겨서 나타내어 준 것’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리려고 나타내 주신 것이다. 이어서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 성도들에게 ‘보이시려고’ 주신 것이지 ‘덮으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을 너무 쉽게 생각하여 함부로 해석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계시록에는 신비하고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고도의 상징으로 표현된 환상들, 예언적 언어들, 상징적인 숫자들 등, 성경 전체의 조명하에 조심스럽게 풀지 아니하면 자칫 이상한 곳으로 빠져 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것들이 많이 있다. 특히 한낱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접근할 때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빠져 버릴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읽고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라고 믿고 접근하되, 그 해석에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소위 통속적인 책들을 보는 것은 위험하며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원어에 대한 지식과 성경 전체에 대한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 위에 해석자 개인의 경건한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사사로운 해석을 고집하지 말고, 올바른 신학 전통에 서 있는 경건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 글에서는 미국 칼빈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던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의 「요한계시록 주석」(서울: 아가페, 1981)과 네덜란드 깜뻔의 개혁신학대학의 교수를 지냈던 S. 흐레이다너스(Seakle Greijdanus)의 「요한계시록 주석」(Openbaring,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25), 깜뻔의 개혁신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한 H. R. van de Kamp의 「요한계시록」(Openbaring, 2e dr., Kampen: Kok, 2002), 그리고 미국 휘튼 대학 교수인 G. K. Beale의 「계시록」(The Book of Revel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9)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I. 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
1. 이제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반드시 속히 될 일(ha dei genesthai en tachei)’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주신 것이다(1:1). 따라서 계시록은 지나간 일이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속히 될 일’이란 앞으로 있을 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제 있는 일(ha eisin)’과 ‘장차 있을 일(ha mellei genesthai)’을 포함한다(1:19). ‘이제 있는 일’이란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요, ‘장차 있을 일’이란 4장 이후에 나오는 말씀을 가리킨다(Greijdanus). 그러나 ‘장차 있을 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지막 종말 때에 있을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안 된다. ‘장차 있을 일’이란 말 그대로 사도 요한의 때로부터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있을 일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전(全) 교회 시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 시대의 일이라고 해도 마치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또 몇 년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하는 식의 연대기적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그런 미래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전 7:15).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이다.”(잠 25:2)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셨다(요 16:13).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미래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연대기적 시나리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심판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교회와 세상의 싸움
따라서 계시록의 주제는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비밀을 찾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어떠한 영적 싸움을 싸우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이단들의 온갖 미혹과 세상의 유혹, 그리고 박해자들의 탄압과 박해를 받으며, 또한 사회 활동과 경제 활동에도 많은 어려움을 당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의 배후에는 용 곧 사단이 있다. 사단은 세상의 권력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를 핍박하고 미혹한다. 사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죽임을 당하여 그 존재가 끊어지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11:7-8) 그래서 이 세상은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며 즐거워한다(11:10).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시기상조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사태를 역전시키시기 때문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11,12) 그래서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국 교회가 승리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으신 자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것이다(11:15).
3. 그리스도와 교회의 승리
따라서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심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며,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1:18,19). 또한 “유대 지파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한다(5:5). 그리고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고 한다(6:2).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또한 용과 짐승과 그에게 경배하는 무리들을 이기신다(12:10, 19:16, 20:2,10,14, 22:3 등).
그러면 승리한 듯이 보이는 용(12:3), 짐승(13:1), 거짓 선지자(13:11), 그리고 큰 음녀(17:1) 곧 바벨론(14:8)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결국 멸망한다. 용 곧 온 천하를 꾀던 마귀는 결국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며, 그를 따르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영원한 불못에 던지운다(20:10). 사치와 권세를 자랑하며 음행으로 만국을 미혹하던 큰 성 바벨론도 일순간에 무너진다(18:2,3,19).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18:2) ‘음녀’ 또는 ‘바벨론’으로 비유된 세상은 무엇보다도 ‘크다’는 것을 자랑하고 뽐낸다. 거대주의, 물량주의를 내세우며 부귀와 사치를 누리던 세상, 그리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모여서 하나를 이룬 혼합주의, 통합주의의 세상, 그래서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 성도들을 탄압하고 박해하던 ‘큰 성 바벨론’은 결국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그러자 하늘과 땅의 성도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伸寃)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18:20)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다음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17:14)
4. 믿음과 인내
이러한 승리의 확신을 가진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8:4) 여기서 “거기서 나오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죄에서 나오라는 의미이다(요 17:15 참조). 이 세상은 비록 권세가 크고 부요하고 유혹하는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은 거기에 같이 참여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좋아 보이는 것들은 유혹이요 미혹이며 실상은 온갖 더러운 것들과 부정한 것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 배후에는 사단의 조종을 받는 더러운 영들이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상의 죄에 빠져 살다가는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을 받아 일순간에 멸망케 될 것이니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세상에서 나와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을 믿는 정절을 지켜야 한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께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4:4,5) 여기서 이들이란 곧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천’ 성도들을 말한다. 따라서 ‘14만 4천’(14:1,3, 7:4)이란 문자 그대로 14만 4천 명만을 뜻하거나 유대인들 가운데서 구속받은 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곧 이 세상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시록을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특별한 책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이에 대해서는 R. van de Kamp, Israël in Openbaring (Kampen: J. H. Kok, 1990)을 참조하라).
이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말고 충성할 것을 요구하신다.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하셨다(2:10). 여기서 “죽도록 충성하라(ginou pistos achri thanatou).”란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봉사하라. 있는 힘을 다해 재물을 바치고 몸이 병들어 죽을 때까지 주님의 교회를 섬기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비록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곧 옛날에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임금께 대한 절개를 변치 않고 끝까지 충성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끝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한 분께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곧 어떠한 환난이 닥쳐와도 믿음의 정절을 지켜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는 ‘계명을 지킬 것’과 ‘인내’가 강조되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 연고로 칭찬을 받았다(3:8). 그들은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주님의 말씀은 인내가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말씀이며 인내가 있어야만 결실할 수 있는 말씀이기에 ‘인내의 말씀’이라고 불린다. 인내가 없이는 세상의 권세와 박해와 위협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마귀의 권세는 끝이 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14:12; 13:10)
II. 계시록의 각 단락별 내용
요한계시록은 우선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다루고 있으며(제 1장), 둘째 부분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으며(2-3장), 셋째 부분은 인류와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는 것이 보여지고 있다(4:1-22:5).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이 계시의 확실성과 신적 성격이 말해지고 있다(22:6-21). 이 아래의 글은 흐레이다너스의 계시록 주석을 많이 참조하였다.
1.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1장)
첫째 부분에서 요한은 서두(1-3절)와 축복(4-6절) 후에 주님의 재림에 대해 말한다(7절). 이것은 계시록의 중심 사상이며 주제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말한다(8절).
그리고 나서 요한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밧모 섬에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9절). 거기서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그가 보는 것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고 하였다(10,11절). 그러자 요한이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으며, 그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12-16절). 요한이 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보고서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을 때에 그가 요한을 위로하며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하셨다(17,18절). 그리고는 요한에게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다(19절).
2.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2-3장)
계시록의 두 번째 부분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를 담고 있다. 곧 에베소 교회(2:1-7), 서머나 교회(2:8-11), 버가모 교회(2:12-17), 두아디라 교회(2:18-29), 사데 교회(3:1-6), 빌라델비아 교회(3:7-13), 라오디게아 교회(3:14-22)의 사자에게 보낸 주님의 편지이다.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 ‘아시아’ 지역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들이다. 밧모 섬으로 귀양가기 전에 요한은 아시아의 에베소에서 목회했었는데(Irenaeus), 그 주위의 교회들도 같이 돌아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밧모 섬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요한과 직·간접으로 관계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그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에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역사상 나타나는 일곱 시대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보거나 또는 교회 역사상 존재하는 일곱 유형의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일곱 교회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 등은 그 당시의 지리적, 역사적 상황에 비춰 볼 때 너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이단들의 유혹의 성격인 내용들도 그 당시에 만연했던 이단들의 것과 상통한다(구체적인 것은 R. H. Mounce, The Book of Revelation,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98), 64-115을 참조하라). 따라서 계시록 2-3장에 나타나는 말씀을 그 당시 역사상 실재했던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에 주어진 말씀은 물론 또한 그 후에 오는 모든 교회 성도들이 읽어서 유익되며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이것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말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의 말씀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말씀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롬 15:4 참조). 따라서 계시록 2-3장의 말씀은 그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읽고서 교훈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유혹과 위협을 받고 있으며 때때로 큰 시험과 환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 교회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 그리고 책망과 권면의 말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 된다(헨드릭슨, 「요한계시록」, 9-11 참조).
3. 교회와 세상의 싸움(4:1-22:5)
1) 하늘 보좌와 봉인된 책(4-5장)
계시록의 세 번째 부분은 ‘하늘의 보좌에 대한 환상’에서 시작한다(4장). 다시금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와서 요한에게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다(1절).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환상(vision)’이라는 사실이다. 그 환상은 ‘실제 사실’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미래에 있을 ‘실제 사실’을 보았다기보다도 인간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운영하시고 섭리하시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장에 나오는 바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의 환상도 꼭 그런 말(馬)들이 역사상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말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을 읽을 때 그러한 ‘환상들’을 통해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며 그 ‘환상들’이 역사상 그대로 일어날 실제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단지 어떤 단어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계시록의 상당한 부분이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본 ‘환상’이라는 사실, 곧 주님께서 그 종 요한에게 속히 될 일을 환상의 형태로 ‘보여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여주신 환상들 가운데는 변할 수 없는 사실들도 그대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위엄과 통치, 천국과 불못의 존재 등등 상당한 부분에서 ‘사실 자체’를 보여주셨거나 또는 사실 자체와 일치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본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4장으로 돌아와서 요한이 여기서 본 것은 하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2-3절), 그리고 보좌 주위에 둘러 있는 24 보좌들과 그 위의 장로들이었다(4절). 또한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도 보았는데, 그 앞뒤에는 눈이 가득하였으며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6절). 이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다(8-11절).
5장에서는 인류와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담은 책을 보여준다(1절). 이 책은 인봉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열 사람이 없기로 요한이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하나가 다가와서 말하였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하였다(2-5절). 이에 어린양이 나아 와서 그 책을 취하매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어린양을 찬양하였다(6-10절). 그러자 또한 천군 천사들의 합창(11-12절)과 온 피조물의 찬송이 들려 왔다(13절).
2) 일곱 인 재앙(6-7장)
6장에서는 어린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실 때의 일을 요한이 본 것이 기록되어 있다(1절). 곧 ‘흰 말’과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이 환상은 ‘세상을 달리는 복음의 승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7장에서는 먼저 ‘인 맞은 자 14만 4천’에 대해 말한다(1-7절). 여기서 우리는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14장에서 이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5절). 뿐만 아니라 각 지파의 인 맞은 수를 말하고 있는 부분(7:5-7)에 보면 단 지파가 빠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유대 지파들의 순서도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순서와 다르다. 뿐만 아니라 매 지파에서 인 맞은 자의 수가 똑같이 ‘1만 2천’이라는 것도 이 수가 상징적임을 시사한다. 곧 ‘1만 2천’은 12 곱하기 1,000이니 이것은 온전한 수(12)에다 많다는 개념(1,000)이 들어 있는 수이다. 따라서 1만 2천 곱하기 12인 14만 4천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충만한 수를 가리킨다. 이들은 곧 ‘영적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을 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cf. 계 14:3).
이어서 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다(7:9-17). 이들 큰 무리는 유대인들을 제외한 이방인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14만 4천’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곧, 먼저 것은 유대인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요 나중 것은 이방인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흐레이다너스는 이 두 집단이 근본적으로 같은 성격이라고 하면서도 나중 것이 먼저 것보다 더 넓은 집단이라고 한다. 곧, 먼저 본 ‘14만 4천’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수고하거나 고난받은 자들로서 특별한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서, 나중에 본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이 ‘14만 4천’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Openbaring, 170, 286). 그러나 이런 해석은 곤란하다. 14장 3절에서 ‘14만 4천’은 분명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이 둘은 문법적으로 동격임).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4-5절의 내용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지 특별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14만 14천’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성도들)의 총수’(Van de Kamp) 곧 ‘하나님의 백성의 총수’(Beale)로 보아야 한다.
3) 일곱 나팔 재앙(8-10장)
8-10장에서는 ‘복음을 배척하는 세상에 임할 심판’을 일곱 나팔의 재앙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나팔의 재앙은 ‘자연에 임하는, 그리고 자연을 통한 재앙’이다(8:7-12). 네 번째 나팔의 재앙은 이보다 더 심한 재앙이다(8:13). 그 다음 다섯 번째 나팔의 재앙은 영적이고 사단적인 박해와 환난을 말한다(9:1-11). 여섯째 나팔의 재앙은 두렵고 무서운 전쟁을 말한다(9:12-21). 10장에서는 요한이 힘센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손에는 작은 책이 펴 놓여 있었다(1,2절). 요한이 이 작은 책을 받아서 먹으니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배에는 쓰게 되었다(9-10절). 이것은 복음이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는 것으로서 달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으로 인하여 소동하게 되고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 복음을 계속 전파하여야 한다(11절).
4) 복음 증거와 세상의 저항(11-14장)
11장에서는 교회가 이 복음을 어떻게 세상에 전파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들 증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 결국 죽임을 당한다(1-10절). 그러나 심판 날이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시며 하늘로 올라오게 하신다(11-12절). 그러자 세상에는 큰 심판이 임한다(13절).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큰 소리가 들린다(15-18절).
12장에서는 앞장에서 말한 전쟁의 깊은 배후 곧 영적 배경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들과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다.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용 곧 사단의 박해를 받으며 위협을 당한다(1-4절).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단의 박해를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5절). 그러나 그의 교회는 광야로 쫓겨나 어려움을 당한다(6절). 이어서 사단과 교회와의 싸움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여진다(7-12절). 곧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마귀)과 그의 사자들과 싸웠는데, 용이 이기지 못하여 땅으로 내어 쫓겼다(7-12절). 그래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지만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은 환난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크게 분을 내기 때문이다(12절).
13장에서는 사단의 도구들로서 ‘두 짐승’이 나타난다. 하나는 바다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 나라들(정부 권력들)이다(1-10절). 다른 하나는 땅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거짓 예언 또는 거짓 종교, 거짓 학문과 그 수종자들을 상징한다. 이 둘째 것은 정부 권력과 적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항하여 싸운다(11-18절).
14장에서는 어린양과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승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7장에 나온 14만 4천이 다시금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다(1-5절). 7장에 예언된 것이 14장에서는 실현된 것으로 나타난다. 사단의 분노가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사단이 온 세상의 권력과 교묘한 술수를 동원했지만 결국 주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에 다른 천사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친다(6-7절). 그리고 또 다른 천사가 경고의 말을 계속 발한다(8-13절). 결국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오셔서 두 종류의 추수를 하신다. 하나는 의인들 곧 믿는 자들의 추수이며(14-16절), 다른 하나는 불의한 자들 곧 믿지 않는 자들의 추수이다(17-20절).
5) 일곱 대접 재앙(15-16장)
15장과 16장에서는 ‘일곱 대접의 재앙’을 보여주고 있다. 흐레이다너스에 의하면 이것들은 종말 직전에 임할 재앙들, 곧 종말로 인도하는 재앙들을 좀 더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xxxii).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꼭 종말 직전에 있을 사건들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헨드릭슨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 세대를 망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요한계시록」, 192-194). 15장은 환난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찬송과(2-4절), 마지막 재앙에 대한 준비를 보여준다(5-8절). 16장은 그 재앙이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묘사되어 있다.
6) 바벨론에 대한 심판(17-19장)
17장과 18장은 다시금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17장에서는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해 말하고 있고, 18장에서는 그에게 임할 심판을 말하고 있다. 그 ‘음녀’는 역사상 여러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세상 권력을 뜻한다. 특히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과 또한 그 세속 도시 로마를 가리킨다. 또한 나아가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에 물들은 이 세상 전체를 가리킨다(요일 2:15-17). 여기서 우리는 세상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모든 자들의 비극적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게 된다. 19장은 이러한 바벨론과 불경건한 세상의 멸망에 대해 천사들과 네 생물과 장로들과 구속받은 성도들의 ‘할렐루야’ 찬송이 기록되어 있다(1-8절). 그 때에 요한이 자기에게 말하는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할 때, 천사가 그를 만류하여 이르기를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였다(9-10절). 그리고 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싸우심이 기록되어 있다(11-16절). 그 결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던지움을 당한다(17-21절).
7) 교회의 승리와 최후 심판(20:1-22:5)
20장에서는 다시금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Greijdanus). 사단은 결박되고 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지워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갇히게 된다(1-3절).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은 자들은 살아서(첫째 부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4절). 그러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5절).
여기의 ‘천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천년’이란 숫자가 상징적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기간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흐레이다너스는 이 ‘천년’이 ‘기독교가 인류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로 본다(xxxiii). 즉, 로마 제국에서 이방 종교가 물러나고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때가 곧 사단이 결박된 때라고 본다. 곧 4 세기의 콘스탄틴 황제 이래로 기독교가 인류 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기독교인이 모든 영역에서 주도하게 되었다고 본다(403).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 서양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며 너무 치우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윌리엄 헨드릭슨의 견해와 같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또는 약간 수정하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직전까지의 기간이 ‘천년왕국 시대’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단은 결박되었으며(마 12:29), 하늘에서 떨어졌다(눅 10:1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곧 무력하게 하려 함이다(요일 3:8).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으며(롬 6:6), 죄가 우리를 주관치(곧 왕노릇하지) 못한다(롬 6:14).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셨으며(요 16:33),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또한 세상을 이겼다(요일 4:4, 5:4).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셔야만 한다(고전 15:25).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셨도다(ebasileusen).”라고 노래하였다(계 19:6; 11:17 참조).
다시 돌아와서 그 천년이 차매 사단이 다시 놓임을 받고 땅의 온 백성들을 모아 기독교회를 대적하고 공격한다(21:7-8). 그러나 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저희를 소멸하고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는 영원한 불못에 던지운다(9-10절). 그리고 나서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최후 심판이 행해진다(11-15절).
21장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1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또한 보았다(2절). 이 ‘새 예루살렘’은 현재 있는 육적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 앞에 붙어 있는 ‘거룩한 성’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깨끗케 함을 받은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 곧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거하시니 이들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백성이 되어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3-7절).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과 악한 자들은 불못에 던지움을 당한다(8절). 그 후에 요한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아름답고 큰 성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보석들로 꾸며진 완벽하고도 영광스러운 성이다. 이것들은 다 상징으로서 천국이 그만큼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러한 천국은 영원에서(곧 마지막 종말 때) 완전히 빛날 것이지만 또한 이 세상에서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고 있다(Greijdanus).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다. 만국이 이미 그 빛 가운데로 다니며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24절). 이방인들은 이미 이 세대에서 생명나무의 잎으로 고침을 받고 있다(22:1-5).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여기에 그 ‘본질’을 따라 기술되고 있으며, 단지 영원에서 이루어질 ‘영광의 계시’를 따라서만 기술된 것은 아니다(Greijdanus). 그렇게 때문에 영원에서 완전히 빛날 것이 또한 이미 이 세대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여기에 묘사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영원에 가서야 비로소 실현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루살렘은 ‘어떤 것’이냐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이 시대에 이 땅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미 보여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다.
4. 끝맺는 말(22:6-21)
마지막 부분은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확증하며(6-9절),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10-15절). 다시금 예수님의 자기 확증과 자기에게 나아올 것을 촉구한다(16-17절). 그리고 이 책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는 자들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발한다(17-21절). 그리고 다시금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요한계시록은 끝을 맺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20절)
계시록 20장과 천년왕국
서론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이 나타나 있다. 이로 인하여 파생된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크게 4가지 상이한 견해들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그리고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이다. 앞의 두 입장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반면에, 뒤의 두 입장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네 가지 견해는 아직도 자신들의 주장에 맞춰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하여 믿는 바 천년왕국설을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국 본문에 대한 철저한 주해를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를 통하여 요한계시록 20장 본문이 말하는 바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한가지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려다 보면 상충되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대한 변경을 가하거나, 내용에 추측을 사용하는 경우가 생기기 쉽다. 이러한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며, 해석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은 요한계시록을 점진적 병행법으로 보느냐, 혹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보느냐에 대한 결정에 의하여 좌우되며, 상징적인 해석을 하느냐, 문자적인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나 뜻이 결정된다. 또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과거적인 사건으로 보느냐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총괄적, 혹은 역사적인 것으로 보느냐를 결정해야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을 이해한다고 해도 20장의 문제를 다 해결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산재된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서, "살아서"라는 문구를 부활을 육체의 부활로 보느냐, 아니면 영혼의 부활로 보느냐 하는 문제, 통치가 '지상에서냐, 천상에서냐'의 문제 등이 있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하여 먼저 본문을 충실히 주해해야 한다. 이런 주해의 과정에서 자연히 천년왕국이 거론되게 된다. 따라서 주해하는 과정 중에서 각각의 천년왕국들이 주장하는 것이 과연 본문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살핌으로서 어떤 천년왕국설이 더 타당성이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필자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와 천년왕국과의 관계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과 요한계시록 20장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시며, 전하도록 하셨다는 사실과 이를 요한이 적용했다는 측면을 고려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요한계시록 20장이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주해를 통하여 살피려고 한다.
제 Ⅰ 장
문맥적인 고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환상과 사건들이 '어느 시기에 대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이 과거에 대한 묘사라고 하는 과거론자의 대답, 미래에 대한 것이라 하는 미래론자의 대답, 그리고 그리스도 왕국의 전 역사를 총괄한다고 보는 총괄론자들의 대답등이 그것이다.1) "과거론자들"은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대의 배경 가운데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자들이다. 과거론자들의 해석에 따른다면 요한계시록이 황제 숭배가 성행하던 아시아 지역에서, 로마 통치하에 가공할 만한 박해의 위협에 직면한 교회를 위해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짐승은 로마 황제들 가운데 하나이며, 거짓 선지자는 황제 숭배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2) 따라서 당시에 박해와 순교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함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하여 이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어는 이 학파의 시조가 제슈이드(Jesuit)파의 알카자(Alcasar)로서, A.D. 1614년에 이러한 해석 방법을 채택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3)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모리스가 말하고 있듯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4) "미래론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환난을 겪을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고 해석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대표하는 제슈이트파의 리베라(Ribera)는 이 학파의 시조로서 A.D. 1603년에 이러한 해석법을 주장한 이후 죤 다비(John Darby), 왈터 스코트(Walter Scott), 반하우스(D.G. Banhouse)등이 이러한 견해를 선택 및 발전시켰다.5)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주로 세대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견해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것들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또한 현재의 성도들이 환난에 대한 대처를 느슨하게 할뿐이다. "역사론자들", 혹은 "총괄론자들"은 요한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총괄적인 역사를 다룬다고 본다.
이 입장에도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 모두는 적어도 요한계시록이 그리스도 왕국의 전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시각에서는 일치한다.6) 여기서 말하는 서로 다른 관점이란 요한계시록이 교회 역사의 주요한 국면, 혹은 단계들을 보여주며, 예언된 환상이 자신들 시대에 실현되고 있으며 세상 종말에 성취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교회의 전 역사를 보여주되 요한계시록의 여러 현상은 서로 겹쳐 있지 않으며 일련의 연대기적인 순서로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복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주님의 둘째 강림 때에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견해들이다.7) 이러한 총괄론자들의 주장은 신약의 다른 부분과 일치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을 치우쳐 해석하지 않도록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견해는 과거주의와 미래주의 두 입장을 다 수용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요한계시록이 당시(과거)의 수신자들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다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장점이 있다. 전천년주의자들이나 무천년주의자들도 역사론자, 즉 총괄론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총괄론적 입장에서 본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남게된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주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을 전천년주의가 생각하듯이 시간적 연속성을 중심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무천년주의가 생각하는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으로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19장 11절 - 21장 8절까지의 환상들은 연속되는 환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연속이 다음과 같은 흐름이 진행된다고 생각한다.
1. 최후 심판자로 나타난 그리스도와 그의 뒤를 따르는 하늘 군대의 모습. = 19:11-16.
2. 마지막 전쟁의 선포, 그리고 짐승과 그의 군대의 파멸. = 19:17-21.
3. 사단의 감금. = 20:1-3.
4. 그리스도의 통치. = 20:4-6.
5. 마지막 반역과 그것의 진입. = 20:7-10.
6. 죽은 자의 심판. = 20:11-15.
7. 새 하늘과 새 땅. = 21:1-8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쪼개어 볼 필요도 없고, 같은 사건이 겹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8) 이런 입장에서 래드도 무천년주의가 말하는 '19장과 20장이 중복을 포함하면서 교회의 전역사의 끝에서 되돌아본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말한다. 래드는 요한계시록 20장 본문에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어떤 암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18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19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을, 20장은 두 단계를 거친 사단의 멸망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18장 - 20까지의 연관성을 제시한다.9) 이렇게 전천년설은 20장이 19장 11절로부터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이 그 내용상 상호 병행(또는 평행)적인 일곱 단락으로 구성된 이른바,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10)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은 1장 - 3장, 4장 - 7장, 8장 - 11장, 12장 - 14장, 15장 - 16장, 17장 - 19장, 20장 - 22장까지 7부분으로 나누어 구성되었으며, 그 각각의 내용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까지의 교회와 이 세상과의 관계를 묘사하되, 내용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점진성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도 종말론적인 점진성을 나타내며, 강조점과 내용의 초점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A. 19장과 20장의 관계
20장 초두에 나오는 '또 내가 보매( )'는 "그리고 내가 보았다"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표현을 시간적인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시간적인 연속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본 시점이 앞서 기록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4장에 하늘 보좌 환상이 기록되어 있고, 5장에 '그리고 나는 보았다'는 문구와 함께 두루마리 떼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두 사건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한 사건의 두 가지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에서의 이러한 표현은 반드시 시간적 선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19장과 20장이 시간적으로 연속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18장부터 20장은 연관성이 있는 일련의 환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래드의 경우 18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19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을, 20장은 두 단계를 통해 사단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고 말하면서 20장이 19장의 연속된 것임을 말한다.11)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시간적 연속을 나타내고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멸망에 대한 기사의 중복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래드는 요한계시록의 중복적인 측면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연속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12)
래드의 이러한 주장은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의 주된 문제인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의 중복을 부인하는데, 이는 요한게시록 20장이 교회의 전 역사의 끝에서 되돌아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9장과 20장의 관계를 시간적 연속성을 중심으로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하여도 내용이 중복되는 것이 등장을 하는 경우 이 논증은 난감하게 된다. 19장 19절 이하를 보면 백마 탄 군사들과 전쟁을 벌인 짐승, 거짓 선지자는 유황불 못에 던지우고 미혹된 자들은 새의 먹이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20장 3절에 들어서면 아직 미혹 당하지 않은 자들인 만국이 나온다. 19장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미 새의 먹이가 된 사람들이 다시 등장할 수 있는가? 또 20장 7절 이하의 전쟁, 그리고 사단이 잠시 풀려나서 성도들의 진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미혹되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다 멸망된 사단의 군대가 어디서 또 생겼는가?'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통하여 살펴보더라도 19장과 20장이 연속적인 관계, 즉 시간적 연속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없다.
19장과 20장을 시간적 연속이라는 개념이 아닌 하나의 묶음으로 볼지라도 무천년설을 주장할 수 있다. 묵시적인 환상들로 구성된 여섯 동아리와, 이 여섯 동아리 앞에 한 동아리의 편지, 그리고 여섯 동아리 뒤에 나오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절정적인 환상으로 본다. 그리고 첫째 동아리에서 여섯째 동아리까지 각 동아리 사이마다 사잇말이 들어간다. 이 사잇말은 동아리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13) 이러한 패턴으로 요한계시록을 분류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섯 개의 동아리와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절정에 해당하는 동아리를 합한 일곱 동아리를 요한계시록 장별로 살펴보면 2-3(편지들), 6(인들), 8-9(나팔들), 12-14(짐승들), 16(재앙들), 19-20(여러가지 환상들), 21-22(완성: 새하늘 새 땅)이다. 이렇게 일곱 동아리들은 일종의 동일한 환상들이 한데 어울려져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동아리 사이에는 사잇말이 들어가고 처음 1장은 머리말이 나오는 것을 요한계시록의 구조로 보는 것이다.14) 이것은 마치 점진적 평행법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지만 그 분류 방법은 차이가 있다. 점진적 평행법은 19장과 20장이 그 내용 때문에 서로 나누어지나 이 동아리로 묶는 것은 서로 유사한 환상이므로 한 묶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19장과 20장을 한 동아리로 분류한다. 이 동아리로 묶는 방법은 요한계시록을 주해할 때 성경 전체의 중심 사상인 복음과의 연결을 통한 해석의 내용이 무천년주의 입장으로 결론을 맺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5) 그 이유의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 방법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B. 묵시와 상징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 많은 부분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환상 가운데서 계시되었으며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일종의 묵시문학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당시의 묵시문학서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이점에 대하여 모리스는 묵시는 예언과 구별 되는데 요한계시록은 예언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묵시문학서는 저자가 익명인데 비하여 요한계시록은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묵시문학과는 달리 염세주의가 자리잡고 있지 않으며, 과거에 근거한 현재를 밝히려는 묵시와는 달리 계시록은 현실에 근거한 미래를 예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한다.16)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그 특성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므로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가면서 요한계시록을 살펴야 할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계시록을 쓴 요한이 환상을 보고 이 본 것을 글로 옮겼다는 사실이다.17) 요한계시록을 마치 보통 예언서처럼 그 내용을 바로 해석하려 한다면 내용을 곡해하기 쉽다. 물론 요한계시록 내에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말하고 들은 것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보여준 것을 보고 이를 글로 바꾸어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본 것을 정확히 그림으로 구성을 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어서 무엇을 전달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대부분 요한계시록 주석의 서론에서 환상이 뜻하는 바를 찾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의 쓰여진 바 문체에 초점을 맞추어 시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8) 그러한 시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법적 해석에 앞서서 요한이 본 것이라는 사실에 먼저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로 썼는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우선 요한이 글로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모양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한 후에 문학적 이해 작업이 진행되어야 바른 해석이 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계시를 보는 것을 통하여 받았다(1:1-2). 또한 그는 본 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11, 19). 때문에 처음부터 언어로 받은 것이 아니며 그가 본 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이 본 것을 기록했다는 말은 문자적 의미를 해석하도록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소위 말하는 바 문자적 해석보다는 상징적 해석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계시 전달 방법이 마치 그림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환상을 보았다. 이 그림을 단지 미래에 언제 일어날 사건의 증거 자료나 스냅 사진의 공개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환상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으나 사실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요한계시록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나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와 상징적인 의미를 바르게 찾기 위한 방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요한이 본 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환상을 요한이 본 것과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그림을 그린 후에 이 그림이 말하는 즉 환상이 말하는 바 의미의 상징적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그림 뒤에 나오는 해설들이 있다. 이것은 천사의 말일 수도 있으며 주님의 사자의 말이나 요한이 직접 그 의미를 말하기도 한다. 본문도 이러한 접근 방식에 의하여 접근하며 그 의미를 이해 하고자 한다. 물론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전혀 고려치 않고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배경의 내용이 이미 고려되어 있다는 전제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가능한 전천년주의의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해와 무천년주의의 주해를 함께 살피면서 본문의 의도를 살피고자 한다.
제 Ⅱ 장
요한계시록 20:1-10 주해
요한 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먼저 본문에서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때 상징적 의미와 해설이 있으면 그 해설의 내용을 통하여 그 환상의 의미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독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앞서 이 글을 쓴 요한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요한이 본 것,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이해, 그림에 대한 설명들을 찾아 본문의 내용을 살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피면서 본문을 주해하고자 한다.
A. 1절 - 3절 주해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 중 무엇이 그림인지 살피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본문에서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라는 부분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이라는 부분이 그림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인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라는 부분과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라는 부분이다. 이 나머지 부분은 그림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그것은 천사가 용을 잡아 무저갱에 잡아넣고 결박한 그림을 그리고 그 용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또 그 용을 잡아 가두되 천년 동안 가두고 인봉하는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천년이 차기까지는 만국을 미혹치 못하게 함을 말한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천사가 용을 잡아 무저갱에 잡아넣고 결박하고 그 용을 잡아 가두되 천년 동안 가두고 인봉한다'. 그리고 설명으로는 "그 용은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며 천년이 차기까지는 만국을 미혹치 못한다"는 것이다.
1. 사단의 결박.
20장 1절과 2절에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언급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결박을 '어떠한 상태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첫째로는, 사단의 활동을 완전히 막았다는 견해와 둘째로 사단의 활동을 완전히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활동의 범위만을 정하고 막았다는 해석이 있다. 래드의 경우 사단의 능력과 활동에 대한 철저한 속박을 묘사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을 미혹의 시기에 국한된 사단의 활동이 있을 것으로 본다.19) 왈부드의 경우는 사단의 활동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천년왕국 이전에 사단의 활동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이에 대하여서 살펴보면, 사단이 갇히는 때에는 벧전 5:8과 같은 사단의 미혹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20) 이 두 사람의 경우는 결코 사단이 묶여 있다면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후크마의 경우 사단의 활동이 약화되는 것으로 이해한다.21) 또한 핸드릭슨도 후크마의 견해와 같이 약화된 사단의 활동을 주장하고 있다.22) 이러한 견해들은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채용해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선 분명한 것부터 정리해 보면 사단은 결박당한다. 그리고 사단을 결박하기 위하여 한 천사가 손에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고랑을 들고 있었다. 이 큰 쇠고랑이나 무저갱의 열쇠와 인봉은 사단을 가두는 것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을 가두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가두기도 하며 풀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23) 무저갱, 열쇠, 인봉이 '가둔다'는 개념에서만 그치면 하나님의 권세 하에 있는 모습을 놓칠 수 있다. 본문은 무저갱, 열쇠, 쇠고랑, 인봉, 잡았다, 묶었다, 던졌다, 잠갔다 등으로 사단의 결박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사단의 결박이 다른 어떤 형태의 능력이나 권세로 풀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권세 하에 있게 된 사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사단의 활동에 대단한 제한이 있음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제한은 천년과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이 제한의 의미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면 천년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쉬울 것이다.
본문은 사단을 지칭하는 이름 넷을 다 모아 놓았다. 요한은 이러한 사단이 체포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용이었다. 그리고 그 용은 사단, 혹은 마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이 앞의 사단의 결박에 대한 것, 즉 쇠고랑, 열쇠, 무저갱, 묶다, 잡다, 인봉하다 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것이냐', 혹은 '문자적인 것이냐'를 결정하는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단의 결박이 상징적이라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자체의 시각이나 계시록 전체의 시각에서 본다면 사단의 활동이 완전히 묶인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하신 것과 비교해 볼 때 사단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는 사단을 무저갱에 던져 놓고 잠근 다음 인봉을 한다. 사단이 갇혀 있는 기간은 천년이다. 그리고 사단은 그 천년 후에 잠시 풀려나게 되어 있다. 19장에 이어서 20장이 시간적으로 연속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인 전천년설은 재림이 19장에 되어진 것으로 보고 재림 후에 천년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장과 20장이 연속적인 상태라고 보는 것은 19장의 마지막에서 용(사단)과 적그리스도(바다에서 나온 짐승)와 거짓 선지자(땅에서 나온 짐승) 중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19장 마지막에서 최종 심판을 받고, 20장에서 사단이 천년 간 투옥되었다가 잠시 풀려난 후 마침내 최종 심판을 받는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19장에서 사단과 관련된 모든 대상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20장에 와서 다시 사단이 미혹할 대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19장과 20장이 연속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19장과 20장이 시간적 연속선상에 있지 않다고 는는 견해인 무천년설이 본문의 의도에 가깝게 접근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0장의 사단 결박을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사단 결박(마 12:28; 눅 11:20)과 동일시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단이 일정 기간 결박되어서 만민을 미혹치 못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며, 요한계시록이 연대순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2. 천년
본문에서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천년이라는 문구일 것이다. 1절 - 6절에서 천년이라는 수치는 모두 네 번 사용되었다. 그 중 두 번은 요한이 본 광경이었고, 두 번은 설명에서 나온다. 이는 각각 성도의 묘사와 사탄의 결박에서 나오고 있다. 본문의 천년은 무한정 계속되는 기간이 아니라 제한된 기간임에는 틀림없다. 더군다나 '천년이 차도록'이라는 표현이 이를 더욱 확증해 준다. 이 천년이 일정한 기간이라면 그 기간이 상징적인 기간인지 문자적인 기간인지는 계시록 전체의 숫자 사용 방법과 연결해서 푸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천년의 기간은 사단이 묶여 있는 기간이며, 4절에 언급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기간이다. 그런데 용이 묶인 것이 상징적이라면 그가 묶인 기간 역시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게 보인다. 만일 이 어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를 천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천년이라는 개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이 천년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부각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천년이 상징적 의미라면 다른 개념들을 종합하여 이 의미를 찾는 방법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천년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무리한 해석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각양의 천년왕국론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본문과 유사한 천년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천년을 해석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천년이라는 기간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문자적으로 설정되거나 주장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기간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상징적 표현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이 천년에 대하여 상징수로 생각하고 완전한 하나의 기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24) 핸드릭슨의 경우 그의 주석에서 이 천년은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광된 의미를 갖고 있는 기간이라고 말한다.25) 그런가 하면 천년을 '주의 날', '사탄이 결박되는 날',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의 날'로 보는 견해도 있다.26) 문학 장르상으로 볼 때 묵시문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계시록에서 '천년'이란 말이 유대교의 종말론에 대응하는 기독교적 종말론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도래하고 있는 "새 시대", "하나님 나라의 시대" 등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봄이 더욱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27) 그러므로 이 천년의 개념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본문에서의 "천년"의 의미가 성경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해석이 된다.
B. 4절 - 6절 주해
4절에서 6절까지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라는 부분은 요한이 본 그림이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라는 부분은 이 그림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보좌에 앉았고, 그들에게 심판권이 주어졌는데 그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이 잘린 자들의 영혼과 우상에 절하거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 중 남은 사람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아나지 못한다"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난 것은 첫째 부활이다. 이(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며, 둘째 사망이 이들에게 아무런 권세도 행치 못하고 오히려 이(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라는 설명으로 이 그림에 대한 의미를 세우고 있다.
1. 보좌에서 다스림(왕노릇하다 ; )
본문에서 말하는 보좌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모리스는 요한이 사단의 보좌(2:13)와 짐승의 보좌(13:2, 16:10)를 제외하고 계시록에 총 47회 사용되는데, 이 모든 경우에 보좌들은 모두가 하늘에 있었다고 말한다.28) 이러한 모리스의 주장은 천년왕국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살아나다'는 의미를 결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래드는 이 본문을 보면서 4절이 원문 상 두 그룹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선 보좌 위에 앉은 자들은 모든 성도들로서 이들에게 심판이 주어졌고, 순교자들 그룹은 성도들 그룹보다 더 작은 그룹으로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라는 것이다.29) 이점에 대하여 휴즈는 동일한 의미의 나열로 본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7장 6절의 순교자의 피와 성도들의 피로써 표현된 것으로 보며 요한과 야고보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한다.30) 휴즈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으나 본문에서 멀리 떠나 있는 해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본문에서 성도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순교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교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을 잘 섬기며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이라면 휴즈의 적용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에 '살아나다'라는 말을 연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좌의 위치를 말한 모리스의 초점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왕 노릇하다', 혹은 '다스리다'의 개념은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같은 단어라 해도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무엇이 주체로 취할 때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와 같을 경우 왕이 백성들에게 그 대권을 행사하듯이 한 주체가 객체에게 막강한 권한이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31)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고 표현하는 사실에서 왕으로서의 권한이나 영향을 미치는 그런 형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단어가 쓰인 문맥대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통치에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는 주체가 그리스도이며, 성도는 동참하는 자들이다. 더군다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주님과 함께 다스린다고 말한다. 즉, 제사장으로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도 발견된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제사장 직분과 관련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린다는 개념은 이미 초대 교회에 확산된 개념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서론 부분인 1장 6절에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할 것이 없듯이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스림을 이해해야 한다. 이럴 경우 성도들의 통치는 성도들이 그 다스림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태로 본다면 사탄의 이용물이 되고 있는, 즉 미혹을 당하는 자들과 관계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요한이 이 계시록을 쓰고 있을 당시도 해당될 수 있다.
본문이 '하늘의 장면을 묘사하는가?', 혹은 '땅의 장면을 묘사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한 결과를 갖고 온다. 만일 본문이 땅의 통치를 묘사한다면 지상의 천년왕국을 지지하는 전천년설을 뒷받침할 수 있으며, 또한 성도들이 땅에서 영적인 통치에 참여한다는 입장의 무천년설도 뒷받침 할 수 있다. 만일 본문이 하늘의 장면을 묘사한다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통치한다는 무천년설을 지지하기에 충분하다. 또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다스리는 자들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도 결정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들이 초림과 재림간의 성도들 이거나, 혹은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살아나서 다스림에 동참하는 하늘의 성도들일 경우 무천년설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땅의 천년왕국에서 다스리는 성도들이나 순교자들이 육체적인 부활 후 다스린다면 전천년설이 더 타당할 것이다. 또 제사장이 되어 다스린다는 것이 구약의 제사제도의 회복을 말한다면 그것은 전천년설 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주장을 지지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면 무천년설의 입장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나 이미 앞에서 살핀 보좌에 대한 이해와 왕 노릇하는 것을 보아도 오히려 무천년설의 입장이 그 타당성을 더욱 세워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살아나다( ) : 첫 부활
요한이 이 장면을 '첫 부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리스의 경우 '살아서'라는 용어가 일반적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32) 후크마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그의 견해를 밝힌 '천년왕국'에서 무천년주의의 견해를 밝히면서도 육체적 부활을 언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이 본문의 경우 모리스와 그 견해를 같이 한다.33) 분명한 것은 요한이 살아나는 광경을 보았으며 그것이 첫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살아난 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요한이 이들을 가리켜서 복되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첫 부활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이 살아남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래드는 이 '살아나다( )'가 육체적인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5절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는 문구의 의미를 생각할 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동일한 문장에서 두 단어가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면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4) 문제가 있다면 래드가 지적한 대로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살지 못하는 영혼에 대하여 염두에 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영혼들이 살아 있을지라도 의미상 죽은 영혼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부활로 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이 '살아났다'는 표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첫 부활'이라는 말은 두 번째 부활과 또 다른 부활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들의 부활이라면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첫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래드는 첫째 사망은 재림시에 살아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만인이 체험할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고 둘째 사망은 불못의 영원한 죽음을 말한다고 주장한다.35) 래드의 주장대로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호수)이다. 또 그곳은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첫 부활과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둘째 사망이다. 첫째와 둘째를 대조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둘째 사망의 권세에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서 살필 수 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여도 첫 부활은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 요한은 이러한 부활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가 본 광경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살아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본 것은 하늘에서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좌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다스림은 보좌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둘째 사망의 면제자들이다. 그것은 첫 부활이 하나님 앞에서 있을 영원한 운명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운명의 변동이 있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즉,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하는 요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현재 운명의 변동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둘째 사망을 거론하면서 첫 부활의 복됨을 선포하기에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 휴즈의 경우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첫째 부활도 몸의 부활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으면서 그의 능력으로 부활의 보장됨, 즉 그리스도의 의와 연합된 것을 중심으로 논증을 펼쳐 나간다. 이 연합된 삶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성도가 연합하듯이 그의 부활하심에도 성도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며, 그 분의 승천은 우리의 승천이며 그 분의 영화는 우리의 영화임을 강조한다. 덧붙여서 에베소서의 말을 인용함으로 부활의 의미를 더욱 드러낸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 6). 이것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참된 몸의 부활에 성도가 참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36)
이러한 휴즈의 논증은 실제적인 육체적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도에게 적용되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휴즈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성도가 연합하여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둘째 사망은 성도를 다스릴 권세를 갖지 못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생명의 보증과 함께 부활의 보증이 됨을 말한다.37) 이러한 견해로 본다면 본문의 의미는 매우 자연스럽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성도의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일반적 가르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천년설의 강점은 5절의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하다. 이 부활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과연 육체적 부활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이미 본문 주해로부터 이 문제의 타당성을 검증했으나 이 본문이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더군다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는 5절의 표현을 생각한다면 천년왕국 후에 나머지 성도들이 부활하는 이중적 구조를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본문의 형태가 매끄럽지 못하다. 또한 요한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살아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을 그리고 있지 않는다는 반증이 된다.
무천년설은 본문의 가장 문제점인 살아남에 대한 논증을 매끄럽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4절의 살아남, 즉 부활의 장면을 육체적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로 보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러한 논증을 잘 펼치고 있다.38) 이와 같은 맥락에서 첫 부활에 대한 논증에 대한 몇 가지 뒷받침을 하고자 한다. 우선 마가복음 12장 18절-27절의39) 말씀을 보면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이 와서 예수님께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3장 6절의 말씀인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며 산 자의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죽은 조상이 현재 어떤 형태로든지 그 삶을 누리고 있음을 뜻한다. 이렇듯 죽은 자들에게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요한의 복음서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생의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소유한다(1: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6:35)이며 생수이다(4:10-14). 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하고 있으며 사망에 권세에 속박되지 않는다(5:24).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살아나는 것과 죽는 것의 의미가 부활과는 다른 것이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이러한 관점으로 살아남을 표현할 수 있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 11절-13절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전천년주의는 5절과 연결하여 여기서의 부활을 악인들의 부활로 해석한다. 그럴 경우 악인들과 성도들의 부활이 천년이라는 기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것의 타당성이 요한복음 5장 28절에서 말하는 바 성도들과 악인들이 함께 부활하여 각각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과 맞지 않는다. 요한복음 내에서는 요한계시록 20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본문이 5장 19절-29절이다. 사실 래드는 요한계시록의 구절과 어떠한 유사성도 없다는 이유로 연관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40)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의 내용 중 도움이 될 구절을 거절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더군다나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이 동일한 저자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연결의 타당성이 사라진다면 바울의 서신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어떠한 교리나 바울을 이해하는 것 역시 거절할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을 병으로 고생한 사람을 고쳐 주시면서, 자신이 안식일에 행한 일의 근거를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께 돌린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일이란 살리는 것과 심판하는 행위이다(21-22).
이러한 언급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는 것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을 선언하신다(24). 예수님께서는 이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지금이라고 말씀하신다(25, 26).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은 마치 지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미 언급한 영생을 취한 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주님이 지니셨음을 말씀하시면서(27) 마지막 때에 심판하는 때가 올 것인데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을 말씀하신다(28, 29).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 중에 25절 이하는 마치 요한계시록 20장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25절의 살아남과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살아나는 것과 비교되며, 28절과 29절은 첫 부활과 둘째 사망을 언급한 부분과 연결된다.41) 더군다나 이 요한복음 5장은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점에서 연결이 쉬우며, 요한복음서는 살아나는 것과 중생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요한복음서의 내용과 함께 요한계시록의 본문을 연결하여 해석할 때 무천년기설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서 말하는 생명의 책 외에 다른 책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통하여서도 무천년설이 더 설득력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성도들이 부활을 하였는데 20장 12절에서 그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헤아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6장 9절-11절에 보면 본문(4절)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6:9의 영혼들은 주님의 세상 심판에 대하여 부르짖는다(10).
그러나 그들은 그 수가 차기까지 쉬라고 말한다(11). 여기서 흰옷은 성도들의 순결이나 부활을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해석을 해도 성도들이 지상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주님과 대면하여 교제를 나누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그 수가 차기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4절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영혼들이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함으로 부활의 상태라고 표현한 것과 동일시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부활일 것이다. 이것은 산 자의 하나님 되심(막 12:18-27)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타당성에 있어서 전천년기설 보다 더 자연스럽다.
C. 7절 -10절 주해
7절에서 10절까지의 내용에서 그림은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설명은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라는 부분과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앞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그림과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앞부분에 대한 연속된 설명으로 '천년이 차면 사탄이 반드시 풀릴 것과 그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을 모아서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전쟁을 위해 모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그림으로 '사탄에게 미혹된 사람들이 지면에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읍을 포위하며 이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삼키고 저희를 미혹한 마귀는 불과 유황 못에 던지 운다'는 그림을 그린다. 또 이 그림에 대한 덧붙인 설명으로 불과 유황 못에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으며 그들은 영원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받을 것임을 말한다.
이 본문은 에스겔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래드는 곡과 마곡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이며, 그의 백성들에 적대적인 나라들에 대한 성경의 명칭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곡은 마곡 땅의 왕이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북쪽에서부터 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일시적인 메시아 왕국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새로운 시대에서의 영원한 왕국이 온다는 에스겔서의 구조와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42) 모리스도 래드와 같이 곡과 마곡은 '악의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다'고 보고 이는 하나님께 대항하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며,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말한다.43) 이처럼 곡과 마곡과의 전투와 그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말한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악의 세력은 더 이상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데 이는 사단을 포함한 모든 사단의 세력이 궁극적인 심판을 받게 되고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과 또 다른 책에 기록된 자들이 나뉘며 각각의 심판이 행하여진다.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의 구약적 배경을 에스겔 36장 - 48장의 예언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본다.44) 이스라엘의 부활을 표현한 뼈들의 살아남과 새 다윗의 통치 아래 성지의 회복됨(36-37), 마곡의 반란(38-39),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축복(40-48)이 그 배경이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본문과 계시록의 본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계시록 20장은 메시아의 통치가 1000년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 뒤 일반적 부활과 심판이 있을 것으로 말하는 반면, 에스겔 37장 15절 -28절은 메시아의 통치가 영원하다고 보며 일반적 부활이나 심판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이 천년왕국에 대한 도움을 실제적으로 주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래드의 경우 에스겔서의 예언이 요한계시록 20장과 구조가 동일하다고 주장을 하면서 에스겔서 36-37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묘사하고, 이스라엘은 땅의 회복과 메시아적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될 것(겔 36:24-29)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거하심을 말하면서 메시아적 왕국의 축복은 마지막이 아님을 말한다.
이 메시아적 왕국은 곡과 마곡이 일으킨 전쟁에 혼란에 빠질 것이며(겔 38장-39장), 하나님의 승리 이후에 영원한 세계를 볼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45) 분명 요한계시록 20:8의 곡과 마곡은 에스겔서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다. 휴즈는 사단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를 곡과 마곡으로 지칭한 것은 '마곡의 땅에 있는 곡'이 하나님의 원수로 제시된 에스겔 38, 39장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으며, 곡과 마곡은 열국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말년에 발진하며, 그들은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같이 땅을 덮을 것'이라고 선언되어 있다(겔 38:1-9)고 말한다. 또 에스겔서에 나오는 "여러 날 후"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의 '천년이 찰 때'와 동일한 날짜로 보고 있다.46)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을 서로 비교해 보면, 요한계시록 20장의 사건 순서는 사단의 패전, 성도의 부활, 천년 통치, 사단이 풀려날 때의 곡의 반란, 마지막 성도들의 부활, 마지막 전쟁, 21장에 이르러는 새 예루살렘의 수립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겔서의 경우 에돔과 패전한 이스라엘의 부활, 오랜 평화(35-37), 곡의 반란과 패전(38-39), 새 예루살렘의 비전(40-48)으로 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새들에 대한 초청(19:17-18)이 사탄의 몰락 및 천년왕국 이전에 나오는데, 에스겔서에서는 그것이 마지막 반란 이후에 나온다. 또 에스겔서 38장과 39장이 요한계시록 19장 11절 - 21의 내용과 20장 7절 -10절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9장의 내용은 에스겔서 39장 17절 - 20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7절 - 10절에서도 천년왕국 후 반역하는 만국을 "곡과 마곡"이라고 한 점과 이 곡과 마곡을 멸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불'이 내린 것은 동일한 예언 구를 인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47) 그렇다면 이 요한계시록의 두 문구(19장과 20장)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을 초점으로 하였다면 요한계시록 20장의 곡과 마곡은 사단의 멸망을 초점으로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것은 핸드릭슨이 요한계시록을 점층적 병행법으로 보는 것이나 골즈워디가 일련의 동아리로 묶어 이해하는 것과 잘 일치한다. 때문에 전체적인 조화를 살펴보더라도 무천년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제 Ⅲ 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
A. 그리스도의 초림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립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초림을 구약의 선지자들과 성도들이 고대하고 있었다. 비록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도래(초림과 재림)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았지만, 주님 자신과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초림 후 재림이 있을 것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있다.48)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신약의 많은 구절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백성들이 고대했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이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는 현세계의 역사를 '이 세대' 혹은 '현세상'으로 표현하고, 반면에 궁국적인 완성 이후의 역사를 '오는 세대' 혹은 '오는 세상'으로 표현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궁국적인 완성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현 세상이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개입인 메시아의 오심과 사역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이 세상이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는 단계를 '주의 날', '여호와의 날', '메시아 시대', 혹은 '하늘 나라'의 도래로 간주하고, 그리고 이 날에 즈음하여 전세계적인 종말론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사 2:11-17, 61:2, 슥 1:11-2:3, 암 5:18-20, 욜 2:1-2).49) 이렇게 표현된 '날'은 종말론적 사건이 일어나는 날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개입하실 것을 가리키며, 이 개입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백성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백성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사건이다.50) 그리스도의 오심은 심판과 구원이 함께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현현(the theophany tradition)에 근거하여 주의 날을 선포하였으며,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죄악으로부터 청결케하시고, 신실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그의 의로운 뜻을 관철하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주의 날과 더불어 시작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시대가 올 것 역시 기대하였다.51) 이처럼 그리스도의 초림이 나타내고 있는 시대는 다윗의 자손, 혹은 인자되신 그리스도의 도래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초림이 주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도래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권세로 온 세상을 통치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시대인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에 대하여 사가랴는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74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68-79).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었다(눅2:10, 14).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하여 그들이 고대하던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유대인들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려 주었다는 것과 백성들의 기대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건 속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초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보고 그 나라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골즈워디는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의미를 이미 세워놓은 것이라 말하면서 사람들이 이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곡해한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까닭은 새로운 또는 다른 사역을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분께서는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이미 그 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사역을 궁극적으로 완성할 것이다"52)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을 강조하고 이 초림과 재림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 분이 이루시는 구속의 전 사역을 의미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초림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아도 그리스도의 초림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한 바 천년왕국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구약의 구절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으며, 특히 유대인들은 구약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찬양하였는데 그 구절들이 천년왕국에 해당되는 구절들로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초림은 천년왕국의 시작이다. 이 초림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제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B. 하나님 나라 : 이미와 아직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면서 외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설교의 초점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가르치셨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가능한 나라다. 그리고 그 나라의 강조점은 '하나님'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 그 분의 구속적 행위와 주권적인 권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53) 이 나라는 "때가 찬" 시기에 주님이 오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나라다. 그리고 이 나라는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래된 나라이며 영원한 나라다(시145:13). 이미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알 수 있었듯이 유대인들은 주의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시대가 올 것을 대망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를 하셨는데 이 선포는 단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선포였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54)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워졌다는 말은 구원과 심판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 하면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새 시대로의 변화가 언약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포하신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55)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본문은 희년(은혜의 해)에 대한 말씀이다. 희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56) 이사야 61장의 선포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이 성경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 성취의 주체는 '시간'이 아니라 '성경'이다.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이 증거는 당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말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로 인한 구원과 심판이 드러난다.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는 그리스도의 통치적인 측면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통치적 측면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사역, 그리고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인격 안에서 이미 도래한 것이다.57) 세례요한은 미래에 있을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선포를 한데 반해, 예수님은 현존하고 있는 실제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포자일 뿐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오심으로 더불어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마태복음 12장 28절과 누가복음 11장 20의 말씀 가운데 강하게 드러난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내어 쫑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에 대한 확실성을 드러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현존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통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과 함께 임한 것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현존하는 것 뿐 아니라 미래의 성취를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전한 완성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 완전한 실현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자리잡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두 국면은 지금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은 그리스도의 오심(재림)으로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미래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이다. 이 주권적 다스림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동안의 다스림에 해당한다. 사단을 묶은 것에 대한 것과 천년동안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요한계시록 20장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완성된 나라가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고 있다는 측면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 대하여 성경에서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한번을 거론했어도 그것은 살려 내어 그것을 확실히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호한 이 한 구절을 근거로 성경 전체를 조명하여 내다보는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 본문이 비추어져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나타나는 천년왕국을 성경의 전체 내용을 끌어들여 맞추는 것은 올바른 해석 방법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성경 전체에 비추어 요한계시록 20장을 살펴볼 때 천년왕국의 의미가 분명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살펴보더라도 요한계시록 20장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 그 의미가 무천년설 입장에 서게 됨을 알 수 있다.
C. 미래의 종말 :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예수님은 장차 있을 미래적인 종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이 미래적인 종말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말한다. 이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나라로 이어짐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미래 종말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징조들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미래 종말은 그리스도의 전(全) 종말 사상의 배경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예수님의 초림과 사역,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등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종말이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미래 재림 때문에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인격과 사역으로 이미 종말이 임한 것이다.58) 종말이 이미 시작 되었고, 우리의 현재가 종말이며, 미래의 종말이 오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천년왕국이 별도로 그 위치를 차지할 수 없는 이유도 예수님께서는 별도의 기간이나 나라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 뿐 아니라 신약의 가르침 전체는 이러한 점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미래 종말의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미래 종말에 대한 것은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59) 감람산 강화로 불리는 마태복음 24장은 마지막 시대의 특성에 대한 묘사와 마지막에 되어질 일로 적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것을 말한다. 언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묻는 대답에 대한 대답을 이 본문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미래 종말에 대한 설교에서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징조에 대한 대답만을 하실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실 뿐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종말 징조를 통하여 제자들의 삶이 늘 깨어 있으므로 나태하지 않도록 하시는데 그 강조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자의 오심에 대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제시하고 있다.60) 이 전환점이 되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의 죽음이 종말론적 죽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 멸망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종말론적 성격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61) 즉 예루살렘 멸망은 미래 종말의 전주곡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이 하나님의 나라와 같이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 구조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미래 종말은 미래에 분명이 있을 것이지만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미래 종말은 말 그대로 미래의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있어 미래 종말은 이미 그 안에 있다. 단지 성취되지 않았을 뿐 미래 종말 안에 들어서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쿠즈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인 미래가 이미 우리의 역사적인 흐름 안에(현세에)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왕국이 미래에 충만한 상태로 도래할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는 이미 그것의 축복에 참여하고 있으며, 종말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62)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있을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예비적 단계인 어떤 기간을 설정치 않고 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만찬의 비유(눅 14:16-24), 혼인식 비유(마 22:1-14), 혼인 잔치 비유(마 25:1-13)들이 재림 때에 있을 지상에서의 공동체를 묘사한다고 주장한다.63) 그런데 이 비유들은 어떤 특정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충만을 말하는데 그 충만은 완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충만은 지금의 교회가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을 절정은 천년왕국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세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미래 종말에 대한 설교는 그 내용상 어떤 시기나 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과 그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경각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 24장과 병행되는 구절들 뿐 아니라 예수님의 미래 종말에 대한 비유들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31-46)를 통하여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비유는 최종적인 심판을 말하는데 이러한 문맥 속에서도 천년왕국에 대한 암시를 찾아보기 힘들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심판이 단회적인 성격인 것과 모든 사람이 그 대상이라는 사실은 요한 계시록 20장 11절 이하의 내용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바로 심판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재림과 심판 사이에 어떤 천년왕국이 설 것에 대한 암시가 없으며,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의 내용을 보완할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중에 밀과 가리지 비유(마 13:24-30, 36-43)에서는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것이며 추수 때에 비로소 나뉘게 될 것을 말한다.
이 추수 때를 예수님의 재림 때로 보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라는 점에서 재림이 곧 심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또 그물 비유(마 13:47-50)에서도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추수 때와 그물을 거둘 때까지 악인과 의인은 공존하지만 마침내 그 때(재림)가 되면 최종적인 분리가 있을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물 비유에서는 세상 끝에 악인이 풀무 불에 던지움을 당할 것을 말함으로 세상 끝에 다른 왕국이 설립될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1-13)에서는 신랑이 온 것으로 혼인 잔치에 예비된 자들이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고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천년주의자들은 혼인 잔치 기간을 어떤 왕국의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닫힌 문은 영원히 닫혀진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억측이 생긴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의 달란트 비유도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눅 19:11-27)와 맥을 같이 한다. 주님의 오심은 충성된 자에게 보상을,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는 화와 저주가 있을 것을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심판이 함께 진행됨을 분명하게 시사한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19:11-27)에서도 귀인이 돌아옴으로 인하여 심판이 있으며 다른 어떠한 기간이 주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은 즉시 자신의 왕됨을 거절한 자들에 대한 형벌을 가하며 충성된 자들을 보상한다. 이 역시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어떤 특별한 기간이나 왕국과 같은 별개의 형체가 세워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사실들을 무시하고 요한계시록 20장을 중심으로 이 본문들을 끌어들여 연결하려 한다면 당연히 무리한 해석이 되어질 것이다. 각각의 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 본문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 첫째 원칙이라면 분명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이 들어설 자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서로 보완적인 작업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의 내용들과 요한계시록 20장의 사건들을 무리 없이 나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의 내용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은 악인과 성도가 구별되고, 이 심판의 사건은 재림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천년설에서 말하는 바 요한계시록의 천년이 재림과 심판 사이에 있다는 가능성을 살피기 어렵다. 반면 무천년설은 여러 측면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곧 심판이라는 사실과 현재 우리는 미래 종말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천년왕국에 있다고 주장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D. 미래 종말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
미래의 종말에 대한 표현의 형태는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의 날"(행전 2:20, 살전 5:2, 살후 2:2, 벧후 3:10), "주 예수의 날"(고전 5:5, 고후 1: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그 날"(살후 1:10, 딤후 1:18), "하나님의 날"(벧후 3:12) 등이다. 이러한 사도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약성경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 중 재림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부활(첫 부활)과 심판의 부활(두번째 부활)을 지향하거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사이에 천년의 시간적 간격에 관한 논란이 바울 서신에서 논쟁의 구절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5장은 래드가 전천년입장을 표명하면서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등장시킨다.64) 따라서 바울 서신에서 미래 종말에 대한 가르침 중에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들을 상고해 보고자 한다.
1.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 18절.
천년왕국에 대한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대표적인 구절들 가운데 우선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의인의 부활만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악인의 부활과 시간적 차이가 있음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방법은 좀처럼 그 논리적 측면조차 타당성을 찾기 어렵다. 본문의 내용상 말하고 있는 주제에 따라 논리를 펼쳐야 됨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은 부분을 확대시켜 본문의 내용을 말하려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재림에 대한 구절을 해석할 때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을 천년왕국 문제와 밀착시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과 연결하여 재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65) 래드의 경우도 살전 4:16과 고전 15:51이 죽은 성도들의 부활 및 살아있는 자들의 공중으로 데려감이 동시적임을 말하면서, 이것을 첫째 부활로 보고 둘째 부활과 구분하는 시도를 한다.66)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은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쓴 내용이다. 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처럼 슬픔 가운데 젖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13).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말할 때 '먼저'라고 말한 것이 악인 보다 먼저를 뜻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도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악한 자들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성도들 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결코 뒤쳐져서 부활하는 일이 없을 것을 시사한다.67) 바울이 악한 자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문제의 초점을 죽은 성도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하는 글이기 때문에 악한 자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악한 자들의 운명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으니 바울이 악한 자들의 운명에 대하여서는 4:13-18 바로 뒤인 5:1-11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부활하여 영광을 누릴 것이며, 반면 그 때에 악인들은 갑작스런 멸망을 당케 되리라고 한다(1-4).68)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주님의 재림 때에 성도와 악인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날 것을 말한다.69)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4-10). 그 때는 구원이 충만한 완성을 얻을 것이며(9), 주님과 함께 살 것이다(10). 그러나 그 때 불신자들은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을 말한다(3).70) 이러한 면에서 보더라도 재림과 심판 사이에 간격이 있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전천년주의자들이 말하는 천년왕국이 들어설 자리를 찾기 힘들다.
2. 고린도후서 15장
천년왕국에 대하여 살펴볼 다음 구절은 고린도후서 15장이다. 이 본문은 흔히 부활장이라고 말할 만큼 부활에 대한 것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 서신 내에서 바울 신학의 구조를 잘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 신학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도의 부활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이 이처럼 바울에게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고전 15:13, 14)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년왕국과 연관하여 자주 거론되는 중요한 문제는 23절 - 28절의 문제이다. 그것은 논리의 전개가 시간적인 간격, 즉 천년으로 비유될 수 있는 '긴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가' 혹은 '논리적인 순서를 말하는가'의 문제다. 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님이 강림하실 때 각기 부활의 차례가 있는데 먼저는 그리스도이시며 다음에는 그에게 붙은 자며, 그 후에는 심판과 함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이 나온다. 본문의 "다음에는", 그리고 "그 후에는"을 용법에 근거하여 바울이 부활이 두 번 있을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먼저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 후에는" 첫 번째 부활에 살지 못한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한다.71)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강림 때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 후의 부활 사이에는 천년왕국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72) 보스는 이런 해석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그 단어들이 용법상 순간적인 연속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간격이 있다면 논리의 개념상 아주 짧은 간격이 있을 수 있으나 엄밀히 그것이 천년왕국의 한 특정한 기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73)
고린도전서 15장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살펴 보아야할 내용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장차 있을 신자들의 육체 부활의 성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러한 육체 부활을 언급한 것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신자의 육체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라고 말한 내용은 고린도 교회 안에 육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육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이"라는 말이 잘 설명해 주지만, 이 자들의 부인하는 내용이나 근거를 설명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를 믿었으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다고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부활을 부인하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히 추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이 육체로 살아날 것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이들'(12)로 불리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육체 부활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신자의 육체 부활을 다루기 전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빙성과 역사성을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증명하고(1-11), 신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연합 개념을 설명한다(12-20).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연합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연합 개념은 20절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른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74)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부활 연합에 대한 설명을 한 뒤 바울 사도는 죽은 자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대표 원리를 통한 논리를 펼친다.75) 바울이 이러한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한 논증을 펼치면서 창세기의 첫 아담을 통한 호소를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76)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 대조함을 통하여 유대의 조상과 그 자손 사이에 연대 관계가 있다는 사고를 반영함으로 각각의 대표자를 따라 옛 인류와 새로운 인류를 대조해 보인다. 바울은 아담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그의 부활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첫 사람 아담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칭하고(45),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77) 첫 사람―둘째 사람(47), 사람을 통해―한 사람을 통해(롬5:12-21) 아담이 인류의 시조가 된 첫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말의 인류의 시조가 된 둘째 사람이 된 것이다.78) 그리고 더 이상의 아담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 된 것이다. 바울이 성도의 육체 부활을 언급하면서 대표 원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원리가 육체 부활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바울의 주제는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이 부활에 속해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 아래 모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바울의 주장대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부활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전천년주의가 말하는 두번의 부활은 그 시기에 있어서 첫 번째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수정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까지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무천년주의의 해석이 논리적 타당성을 갖게 한다. 바울의 대표 원리가 말하는 것은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임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구속에 대한 것을 받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게핀은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부활이 갖는 세가지 사건으로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 둘째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용납할 때 일어나는 신자의 부활 그리고 신자의 미래적이며 신체적인 부활을 말하면서 이들 중에 두 번째 부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국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부활임을 말한다.79) 그리고 이것은 이미 실현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80) 물론 "아직"이라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바울의 논증은 무천년설의 기본 틀과 더 잘 들어맞는다.
이처럼 본문의 내용은 첫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나, 고린도전서 15장 23절-28절의 시간적인 간격에 대한 논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더라도 미래 종말에 천년이라는 기간이 설정될 것을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부활과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연속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의 가르침 가운데 미래 종말에 대한 것을 통하여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로 한 어떤 특별한 기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보스는 흔히 천년왕국의 내용을 가지고 다루는 구절들에 대하여 평하기를 "그 구절들에 대한 논의는 천년왕국적 함의가 그 구절에 있다는 것이 아니고, 천년왕국 개념을 넣어서 주해하지 않으면 그 구절들이 명백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데 반하여 천년왕국적 요소가 함께 고려되면 그 즉시로 그 의미가 명백해진다는 관찰에 근거한 논의"임을 분명히 밝혔다.81) 이처럼 전제된 성경의 주해는 주해하는 사람의 논리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는 결점을 갖고 있다. 때문에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로 어떠한 기간을 설정치 않고 있으며, 오직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천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바울의 가르침은 그 본문자체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성도가 부활한 것임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결론
필자는 본 논문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절-10절을 주해하면서 과연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중에 어떤 견해가 더 본문에 충실한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었다. 먼저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을 살폈는데, 이는 그것은 요한계시록 주해에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전제들이기 때문이었다. 또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중요한 결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요한계시록은 총괄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하며, 상징적인 요소를 충분히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의 내용이 시간적 연속이 아니라 점진적 평행법으로 보든지, 혹은 동일한 내용의 동아리들의 묶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을 살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해를 시도한 결과 우리는 사단의 감금은 완전한 무능력으로 보기 보다는 사단의 세력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천년간의 성도들의 통치를 전천년주의가 주장하듯이 재림과 심판 사이의 어느 특정 기간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며, 오히려 요한계시록 해석 방법이나 성경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 이 천년 기간을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미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요한계시록 20장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나라에 속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은 그 내용이 무천년적으로 해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시점에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마 16:13-20).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것을 말씀하셨다(마 28:18; 엡1:21-22 참조). 이 말씀은 사단을 온전히 제압하시고 계시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게 됨을 드러내 준다. 이렇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첫 번째 부활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실현된 나라라는 것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주제이다. 그리고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성도가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고 있는데,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된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는 그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능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은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말한다. 그 분의 통치에 따른 사단의 무능력은 당연한 것이다. 요한은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이 첫부활을 말하면서 두 번째 부활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첫 부활이 두 번째 부활을 이미 보증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사단의 통치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첫 부활에 동참한 성도에게 미치지 못함을 잘 나타내 준다. 첫 부활과 둘째 사망의 거론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따른 사단의 무능력함과 사망을 정복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보증이다. 이것은 실현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이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진 사실을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통치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세력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단의 몸부림은 단지 자신의 멸망을 서두르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인간의 노력에 있지 않으며, 사단의 방해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을 통하여 성취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를 요한계시록 20장이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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